< 숲의 주인 > - prologue --- 헉! 재현은 번쩍 눈을 떴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기 방의 천정이었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몇 초간을 꼼짝 않고 천정을 노려보고 있으니, 간신히 이곳이 자신의 방이라고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아직도 자신을 옭아맬 듯 온 몸을 휘어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악몽이었다. 온 몸을 흠뻑 적신 식은땀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재현은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뻣뻣하게 굳히고 있던 몸에 힘을 빼자 급격히 몸이 식는게 느껴졌다. 요즈음엔 특히 더 했다. 이 악몽이. 내용은, 악몽이라고 하기엔 정말로 별 내용 없는 꿈이었다. 자신은 아주아주 울창하고 깊은 숲 속에 서 있다. 아주 조용한 숲이다. 새 우는 소리도,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리고 자신은 방황하고 있다. 왜 방황하고 있는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느낌이 그랬다. 그리고 숲 저편에 누군가 서 있다. 그리고 자신은 항상 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면 꼼짝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모습인지, 아니,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알 수 없다. 그저 무시무시한 시선이 자신을 압박할 뿐이다. 그 시선이 번쩍거리거나 무섭게 빛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숲의 그림자에 가린 누군가는 아마도 자신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고, 자신은 그 시선을 받으면 꼼짝달싹 할 수 없다. 차갑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고, 무언가가 지독히 모자란 듯 열망하는 시선. 아무튼 그 시선을 받으면 재현은 괴로웠다. 움직일 수도 없고, 숨을 제대로 쉬는 것 조차도 힘들다. 하지만 재현은 그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꺼풀도 까닥 못해서가 아니다. 꿈 속에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숨이 턱에 까지 차는 괴로움 속에서도 끝까지 그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식은땀이 온 몸을 적시고, 숨이 넘어갈 지경이 되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눈을 감고 싶어 질때면, 누군가 뒤에서 그의 팔을 잡아챈다. 그러면 재현은 잠에서 깨는 것이다. 하지만 꿈은 너무나도 생생해 잠에서 깬 후로도 그를 사로잡고 있었으며, 재현은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데 항상 한 참이 걸렸다. 시내의 공기는 언제나 탁하다. 높은 건물들은 하늘을 모조리 가리고, 달리는 차들과 사람은 매연과 소음을 뿜어낸다. 더럽고, 답답하고, 자신을 짓누르는 공기... 재현의 걸음이 휘청, 흔들렸다. 그러면서 옆의 누군가와 부딪혔다. 그 사람은 욕설을 내뱉으며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고, 재현은 가슴을 움켜잡으며 크게 숨을 토해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숨이 턱턱 막힌다. 공기에 폐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직 초봄이라 더울리가 만무한데도 후끈한 열기가 머리에 치밀어 오르고 그와 더불어 두통이 엄습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이지만, 재현은 도무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큰 건물의 화단 가장자리에 걸터앉고 나니 두통이 좀 덜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여전히 코와 눈과 목이 매캐한 것을 느끼며 그는 우울한 얼굴로 도시전경을 돌아보았다. 항상 바쁜 듯 걸음을 서두르며 어디론가로 걸어가는 사람, 사람들. 콘크리트에 박힌 장식물인 듯 생기없는 가로수와,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자동차들. 현기증이 다시 시야를 흐렸다. 주변의 건물들이 모조리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아버지의 일과 자신의 진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온 재현은 아무래도 이 도시에 적응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릴때부터 몸이 허약해 시골의 아주 조용하고 작은 마을에서 줄곧 자라온 그는 이렇게 더럽고 나쁜 공기도, 귓전에서 떠날 줄 모르는 소음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태양빛이 스며들지도 않는 것 같은 도로에는 메마른 열기가 피어오르고 어디에서도 여유와 자연과 아름다움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재현은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따위, 가지 않아도 좋으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울창한 숲과, 드넓은 하늘과, 몇번이고 심호흡을 하고 싶어지는 투명한 공기와, 바닥의 흰 자갈들이 그대로 보이는 옅은 호수는 언제나 산과 성을... 재현은 문득 생각을 멈추었다. 자신에 예전에 살 던 곳에는 산은 있지만 호수도, 성도 없다. 하지만 그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올랐던 영상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곧 그 기억은 흐려졌고 아마 티비에 나온 외국의 어떤 장소를 떠올린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재현은 힘들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학교에 가야한다. 게다가 오늘은 수업이 있는 첫날이다. 벌써부터 지각을 할 수는...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몸은 휘청, 하고 중심을 잃었다. " 괜찮아? " " 아... " 갑자기 순식간에 머리가 맑아졌다. 머리가 기대인 어깨에서 시원하고 청량한 느낌이 풍겨왔다. 재현은 몸을 바로 하고 자신을 부축해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외국인? 자신을 받쳐준 남자는 아주 밝은 금발에 녹색눈을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어느 쪽이냐면... 동양계와 백인계의 혼혈같다. 이목구비는 선명하지만 전체적인 얼굴윤곽은 균형이 잡혀 있으면서 갸름하다. 아무튼 굉장히 보기드문 미남이었다. " 아, 고맙습니다. 좀 어지러워서요... " " 아뇨. 괜찮습니다. 어지러울 법도 하지요, 공기가 이렇게나 나쁘니... "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재현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등장함과 동시에, 아까까지 그를 괴롭혔던 불쾌감과 괴로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치 공기 청정기처럼 몸에서 신선한 공기라도 흘러나오는 것인지, 주변의 공기가 놀랍도록 깨끗하게 느껴졌다. 숲의 한 가운데라도 와 있는 것 처럼. " 괜찮겠어요? 학교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 " 예. 이제 괜찮아 졌습니다. " 남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했다. " 하지만 제 곁을 떠나면 곧 괴로워지실 겁니다. 바래다 드리고 싶지만... " " 아뇨... 그럴게까지 폐를 끼칠수는... " 왜 그가 있어서 내가 괜찮다는 식으로 말하지? 하지만 재현은 웬지 그 말이 당연한 듯이 느껴졌다. 그의 주변에 감도는 청량한 이 느낌 때문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현은 이 남자가 가버리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 그럼... " 재현이 고개를 잠깐 숙였다가 뒤돌아 서자, 갑자기 남자가 자신의 팔을 붙잡았다. " 잠깐만요! " 아, 이 느낌은... 재현은 순간 몸에 전율같은 것이 흐르고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왜 일까. 꿈 속에서 자신의 잠아 챈 손과 지금 이 손이 같다고 느꼈다. 재현은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뒤돌아 보았다. 그는 재빨리 그의 팔을 놓았지만, 무언가 복잡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뭔가를 잔뜩 말하고 싶은데,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그런 간절한 얼굴이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고통으로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재현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아주 익숙하고, 그립고... 재현이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 그는 갑자기 자신의 뒷통수를 누가 잡아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에 당겨지기라도 하듯 재현의 머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 인파 속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어깨까지 드리우는 긴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키가 커서 그런지 그가 걸친 검은색 정장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위화감이 들었다. 아니. 그 자체가 이 곳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외모가 특이하거나 해서가 아니다. 그의 존재감이, 너무나 익숙한 그의 시선이 그의 눈동자를 잡아 끌고 있었다. 그는 이상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안도한 듯도 하고 분노한 듯도 하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뚜렷히 떠오른 쾌감의 빛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꿈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재현을 붙들었다. 재현은 악몽이 재현된 느낌에 비명을 지를뻔 했다. 하지만 그는 꼼짝달싹 하지 못한채 그의 시선을 마주봤다. 꿈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절대,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겠다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생겨났다. 오기일까? 모르겠다. 실제로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재현은 그의 시선에서 절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말하는 것은 명백했다. - 찾았다! " 무스카리 알리움!! " 금발의 남자가 비명같은 소리를 올리며 재현을 잡아당겨 자신의 뒤로 숨겼다. 재현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다. 저 남자는 뭐지? 그리고 이 남자는?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들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자신은 이러한 상황을 예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울렸다. 이미 그와는 눈이 마주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재현은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불타는 듯한 눈동자였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이제는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그 순간이었다. 남자가 무언가를 소리치며 재현을 붙잡은 것은. 갑자기 강렬한 빛이 터져나오며 재현의 시선을 가렸다. 그리고 곧이어 발밑이 꺼지는 느낌, 체중이 사라지는 느낌이 연이어 찾아왔다. 머리에 피가 몰리는 아찔한 기분이 들면서 재현은 정신을 잃었다. 1. 환생 푸확! 조용하던 호수에 갑자기 큰 파문이 생기며 물방울이 튀어올랐다.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꿀같은 금발머리에 녹색눈의 남자였다. 사방은 큰 호수였고 호수는 그처럼 큰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런 갑작스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누구든 감탄을 금치 못할 절경이었다. 남자는 양 팔로 물을 휘저으며 떠올라 얼굴을 손으로 훑어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떠오르는 또다른 인영은 없었다. 그는 일단 서둘러 물 밖으로 나왔다. 넓은 호수와 그를 둘러싼 울창한 숲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물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금발머리와 실용적인 근육이 붙은 호리호리한 몸이 뚜렷히 돋보였다. 한쪽 허리엔 자신의 키만큼 커다란 장검을 빗겨차고 있었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와 몸에서 풍겨나오는 청량한 향기, 거대한 장검이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멜리아였다. 대륙의 유일무이한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이자 최초의 글로리 나이트, 트리옌들의 영광. 하지만 그는 자괴감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채 거세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자신의 실수였다. 자신의 실수! 수백년을 참아왔건만... 그 짧은 순간을 참지 못해 그에게 다가간 것이 화근이었다. 그 불결하고 더러운 공기 속에서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그를 본 순간 도무지 나서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일족이라면 정화석을 지니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만큼 나쁜 공기 속에서 그는 그렇게 무방비했다. 얼마나 괴로울지, 그것이 그의 수명을 얼마나 깎아먹을지 생각하자 카멜의 가슴속은 찢어발길 듯 아팠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나선 것이다. 아주 잠깐만, 아주 잠깐만 그를 도와주고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카멜은 분노에 차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자를 직접 눈으로 다시 본 것도 수백년 만이었다.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모든 숲의 저주. 무스카리 알리움! 카멜이 그와 접촉한 아주 짧은 순간에, 무스카리와 마주쳤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나 감시의 눈을 번득이며 그녀를 찾고 있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 나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물밀듯한 기억의 그리움도, 사무치는 가슴의 아픔도 무시한채 모르는 척 해야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찌르며 주먹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그의 피는 투명한 색이었다. 카멜은 손바닥을 펴고 자신의 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실소했다. 자신은 그녀를 위험에 빠트리고, 다시 무스카리의 시야에 닿도록 해 놓고서... 잠깐이라도 그녀를 보고, 만지고, 말한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에 까만 머리카락이었다. 고통에 새하얗게 질려있던 얼굴도, 한참 성장의 시기에 서 있는 미성숙한 몸도 예전의 그녀와는 판이하게 틀렸다. 하지만 그녀였다. 완전히 이계의 껍질을 뒤집어 쓰고도 그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순결한 영혼은 그녀였다. 못 알아 볼리가 없었다. 자신의 그녀의 묘목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서라도, 그녀가 몇번이나 어떤 곳에서 환생하든 간에 그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향기를 쫓아 수백년을, 얼마나 많은 세상을 떠돌아 다니며 찾았는지 모른다. 단지... 단지... 잠깐만이라도 그녀를 다시 보고 싶어서. 무스카리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역시 그녀를 미칠듯이 찾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영원히 찾을 수 없을 터였다. 그는 자신처럼 묘목도 아니었고, 그녀의 본체를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자신과 같은 입장도 아니었다. 그는 모든 숲의 적이고 불타는 것들의 제왕. 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면 무스카리는 결코 그녀를 찾아내지 못할 터 였다. 하지만, 자신과 같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닌 주제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카멜은 어리석은 자신을 실컷 저주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길지 않았다. 황급히 돌아오는 바람에 지금 그가 어디로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무스카리보다 자신들이 그를 먼저 찾아야 했다. 그는 정령을 소환하며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무스카리가 다시금 그녀를 발견했다는 불안감과 두려움 속에, 다시 그녀가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이 상황이 미치도록 기뻤기 때문이다. " 찾았다. " 오래 잠들어 있었던 황금의 눈이 뜨였다. 그는 대지의 가장 깊고, 뜨거운 곳에서부터 몸을 일으켰다. 그 놈을 쫓아가면 틀림없이 그녀를 찾을 수 있을거라는 자신의 확신은 들어맞았다. 그 놈은 내가 자신처럼 그녀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는 것만을 믿고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자신의 시선을 무시한채 그녀를 찾아다녔다. 어리석은 놈. 그것은 억측이고, 교만이다.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든 시커멓고 붉은 불길은 결코 카멜같은 놈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카멜을 비웃으면서, 카멜보다 먼저 그녀를 찾아낼 수 없는 자신 역시 비웃었다. 그는 수백년 동안 사용한 적 없는 황금빛의 날개를 솟구쳤다. 그를 감싸고 있던 용암과 대지의 뜨거운 불길이 소용돌이치며 땅을 울렸다. 과연 그녀인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변해버린 모습이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 눈동자는 틀림없이 그녀의 것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다. 자신이 무서워서 온 몸을 벌벌 떨면서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주제에 절대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온 세상의 푸르름이라는 푸르름은 다 끌어다 놓은 것 처럼 푸른 눈동자의 빛은, 거센 바람과 벼락이 되어 마음의 불길을 일으켰다. 그것은 절대로, 그 누구도, 자신조차도 끌 수 없는 불이었고 그 불은 그녀를 원했다. 찾았다. 찾았다. 찾았다. 이젠 결코 놓지 않는다.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지금에야말로 너를 갖겠다. 용암은 불과 지축을 뒤흔드는 뜨거운 기류로 지상에서 가장 큰 공포를 뱉어내었고 그것은 하늘로 떠오르자마자 크게 홰를 쳤다. 태양마저 가려버리는 화산재에 파묻힌 하늘에서, 눈부신 용의 비늘이 태양처럼 빛났다. 재현은 울창한 숲속에 서 있었다. 아주아주 조용한 숲이다.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자신은 그곳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재현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발끝을 부드럽게 스치는 옷자락. 재현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자신은 땅에 닿도록 끌리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면서 머리에서부터 머리카락들이 흘러내렸다. 눈에 들어온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은빛이었다. 어쩌면 은빛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재현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걷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손 역시 무척 가늘가늘하고 부드러웠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드는데, 그 시선과 마주쳤다. 사람이었다. 불타는 듯한 머리카락에, 태양같은 황금색 눈동자다. 아주 키가 크고, 검은 가죽과 붉은 천으로 된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재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불 같았다. 재현은 꼼짝 달싹 하지 못하고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온 몸을 옥죄는 듯한, 눈동자가 통째로 불타버릴 것 같이 뜨거운 시선이다. 재현은 그 시선이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했다. 황금색 눈동자의 검은 동공이 어쩔 수 없이 비어버린 무언가 같았다. 온 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거부반응이 일었지만 재현은 그 시선을 바로 마주하고 있자니 왠지 그에게 가야할 것 같았다. 그는 아무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고만 있었지만, 틀림없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한 발 앞으로 내딛으려 몸을 기울이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팔목을 잡아챈다. -----헉! 재현은 번쩍 눈을 떴다. 시야에 새파랗게 푸른 하늘이 들어왔다. 재현은 현실감각을 찾지 못해 몸을 잔뜩 굳힌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방금의 기억이 늘 꾸던 그 악몽이라는 것 까지는 생각해 내었지만, 여기가 아직 꿈속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한 참이 지나고 나서야 재현은 숨을 몰아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뜨거웠던 몸이 차갑게 식으며 식은땀이 축축하게 느껴졌다. ... 아니, 식은땀이 아닌가? 그러고보니 여긴 어디지? 재현은 여기가 평소와 같이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에 들어오는 하늘이 그랬고, 등에 딱딱하게 느껴지는 자갈의 느낌이 그랬다. 재현은 여기저기 부딪혔는지 아픈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트막한 계곡이었다. 맑은 물이 자갈들이 내어놓은 길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고, 울창한 숲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재현은 그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다. 어디 물에라도 빠졌었는지 온 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가방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재현은 휴대폰이 걱정이 되어 주머니를 뒤졌지만 그마저도 어디에 휩쓸려 없어졌는지 없었다. 일단은 계속 축축한 계곡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싫었기에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큰 바위에 걸터앉았다. 평소와는 꿈의 내용이 달랐다. 자신은 꿈속에서 여자가 되어 있는 듯 했다. 보았던 발끝도 아주 조그맣고 하앴으며, 손 역시 그랬다. 머리카락도 길었고... 이상한 색깔이었다. 은빛이라고 말하기엔 모자란... 재현은 멍하니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그 색이 무슨 색깔인지 깨달았다. 바람이 나무에 흔들리면서 햇빛을 받으면, 잎사귀의 뒷편이 은빛으로 빛난다. 회색도 아니고, 완전한 은색도 아니고, 녹색도 아닌 뭐라고 설명 할 순 없지만 일순 일순 드러나는 아주 아름다운 색채. 그리고 그 시선을 보내던 남자의 모습도 처음 보았다. 줄곧 꿈 속에서 그의 시선을 마주 대했기 때문일까.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무서운 얼굴이었다. 재현은 그 얼굴이 아까 거리에서 시선을 마주쳤던 그 남자와 아주 흡사-아니, 같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를 떠올리자 문득 한기가 들었다. 꿈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강렬한 시선이었다. 찾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무엇을? 아까 그 금발의 남자가 뭐라고 외치며 자신을 붙드는 순간부터 기억이 끊겨 있다. 자신은 왜 이런 곳에 있는거지? 어찌되었건 첫날부터 등교가 글렀다는 생각은 재현의 기분을 꽤 무겁게 했다. 학교를 말도 없이 빠졌다는 걸 알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터였다. 안그래도 도시로 와서 밖에 나가기도 싫어하고 적응을 못하는 걸 걱정하던 부모님이었다.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재현은 애써 그런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집'이라는 단어가 아주 까마득하게 느껴지는데도. 주변의 나무들로 동그랗게 둘러쌓인 공터는 조용했다. 숲이 울창하여 산 중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마냥 파랗고, 이따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나무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은 숨을 들이마시다가 이렇게 맑은 공기를 마셔본지가 얼마만인가 싶은 기분이 되었다.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만 아니라면 정말로 좋은 곳이었다. 도심의 소음이라고는 조금도 들려오지 않고, 기분좋게 물 흐르는 소리와 바람부는 소리... 그리고 무엇인가가 조잘거리듯 웃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조잘거리는 소리? 누가 있나 싶어 재현은 잠시 내려 감았던 눈을 뜨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 ... 잘 못 들었나. " 재현은 잠시동안 모든 것을 잊고 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젖은 교복 상의를 벗고는 일단 공중전화라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낯익지 않은 숲이다. 흔히 볼 수 있었던 잡목림이 아니었다. 하얗게 가지를 드러내고 뻗어있는 나무들이나 덤불들. 외국의 영화에서나 보곤 하던 그런 숲이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무언가 계속 조잘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와 재현은 불안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소리는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면 사라지고, 또 무심결에 걷다보면 들려오곤 했다. 눈에 보이는 능선을 목표로 걷고 있었는데, 가까워 보이던 능선은 꽤나 오랜 시간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듯 했다. 하지만 그곳을 목표로 걸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능선을 올라서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 듯 길이 나타났으니. 일단 숲속에서 계속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은 사라졌다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재현은 햇빛아래 아름답게 빛나는 숲을 쳐다보며 길을 따라 걸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탄성을 내지를만큼 아름답고, 평온하고, 좋은 곳이었다. 딱,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라고 생각할 만큼. 도시의 더러운 공기에 괴로워하고 숨막혀 하던 때가 언제인 듯, 폐에 가득 들어온 신선한 공기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재현의 기분이 우울해지지 않도록 해주고 있었다. 늘 피로하고 무거웠던 몸인데 오늘은 그렇게 걸었음에도 힘이 나고 지치지 않는다. 길은 아랫쪽으로 갈수록 점점 넓어졌다. 그리고 숲이 끝나가는지 길의 앞쪽으로 보이던 나무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길의 어느 즈음에 서자, 재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수목한계선을 기점으로 숲은 끝나 있었고, 앞에는 넓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몇 개인가의 구릉에 꼬불꼬불 하얗게 속살을 드러낸 길이 나 있었고, 아득한 지평선과 우람한 산들이 땅을 둘러싸고 있었다. 바람에 싸르르 흔들리는 들풀들이 빛을 발하고, 새파란 하늘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눈부셨다. 재현은 입을 딱 벌리고 서서 그 장관을 쳐다보았다. ' 우리나라엔 이런곳이 없어... ' 재현은 자신이 얼마나 기억을 잃었길래 외국에까지 내동댕이 쳐 진건가 불안감을 느꼈다. 외국이 아니라면 딴 세계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들판과 지평선. 인공적인 것이라고는 자신이 손에 든 교복 상의밖엔 없는 듯한 땅. 재현은 감탄과 경악속에 걸음을 내 딛었다. 일단은 어디로든,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한다. 그래야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현은 걸으면서도 저 까마득한 길을 따라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자신이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장관인 풍경에도 흥미를 잃고, 끝없이 이어진 길이 지겨워지기 시작할때쯤, 풀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 사이사이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소리지만 아는 소리다. 재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전 자신이 떠나왔던 숲에서 어떤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말이고. 마차다. 그것은 느릿하게 걸었던 자신과는 달리 말발굽 소리와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빠른 속도로 재현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재현이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마차가 재현의 앞에 서자, 재현은 마부석에 올라앉아 있는 사내와, 마차뒤에서 고개를 내미는 또 한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갈색이나 밀색의 머리색을 하고서 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재현을 보고 진행을 멈췄다. 마부석에 앉아있는, 인상이 험악하게 생긴 사람이 입을 열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까봐 긴장하고 있던 재현의 귀에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말이 전달되었다. " 뭐냐, 이런 곳에. 짐도 없이. 안수케로 가는거냐? " 재현은 당황해서 하마터면 아무런 말도 못할 뻔 했다. " 아, 저 죄송하지만 갑자기 낯 모르는데 떨어져서. 안수케가 어디죠? " 남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지평선 근처에 맞닿아 있는 산 아래를 가리켰다. 재현이 집중해서 보자 산 아래에 무엇인가가 보였다. 그것은 도시였다. " 저기. 마차로야 열나게 달리면 성문 닫을때까지 저 곳에 도착할 수 있다만. 걸어서는 무리일텐데. 생김도 특이하고, 차림도 이상하고. 게다가 아직 어리고, 짐도 없고. 고아냐? " 재현은 왜 갑자기 고아인지를 묻는 것이 의아했다. " 저어, 사실은 저도 왜 이곳에 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남자는 갑자기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웃음지었다. 험상궂은 인상이라 웃으니 비열하게 보였지만 재현은 외국인이건 아니건 이 상황에서 사람을 만난것이 반가워 그런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 어찌되었건 이런 들판에서 아무것도 없이 노숙하는건 미친짓이야. 밤이 되면 짐승들이 나오니까. 원한다면 마차에 타. 도시에 데려가 주지. " "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 재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남자는 손짓으로 뒤를 가리켰고, 재현은 마차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조잡하게 생긴 마차는 창문도 없고, 옆으로의 문도 없었다. 뭔가 좀 이상한 것을 느끼며 마차뒤로 가자 뒤쪽에 앉아있던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안에는 겁먹은 눈동자를 한 아이들이 잔뜩 타고 있었다. 재현은 순간 흠칫 했다. 뭔가 위험신호가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 타선 안된다고. 그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듯, 불안한 눈동자로 계속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재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 저... " 머리뒤에 큰 충격과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곧 재현은 의식을 잃었다. 다시 의식을 찾은 것은, 희미한 말소리 때문이다. " ...예,예. ... ... 물론... 물건은 확실히... " 눈을 떴지만 사방이 깜깜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얻어맞은 뒤통수가 지끈지끈 아팠다. 가느다랗게 신음을 흘리자,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 정신이 드니? " " 으... " 손들이 그의 몸을 받쳐주었다. 재현은 그 손에 기대어 몸을 일으켰다. " 조용히 해. 지금 우리를 넘기는 중이니까 소란을 피우거나 하면, 값을 떨어뜨린다고 놈이 싫어할거야. " " 여긴 어디... " 책망하는 듯한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 너 바보 아니냐? 마차를 봤으면 모른 척 해야지. 그런 곳에서 혼자 멍청하게 있으니까 이런데 잡히는거 아냐. " " 잡혀? " 처음의 목소리가 말했다. " 그래. 너 정말로 대체 왜 이 마차에 타려고 했는지 모르겠구나. 창문도 없는 마차라면 노예상인들이 끌고 다니는 것이 당연한데. " 노예상인? " 그게 무슨 말이야? " " 넌 지금 노예상한테 잡혀온거라고. 우리는 안수케로 팔려가기 위해 이동되던 중이었어. 그 속에 너도 포함된 거라고. " 아픈 머리가 다시 한번 지끈거렸다. " 대체 무슨 소리야? 노예상이라니... " 그때 마차문이 열렸다.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재현은 어둠에 익숙한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바깥으로는 무장한 남자들이 서 있고,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중년의 남자와 마차의 사내들이 뒤쪽으로 서 있었다. 한 남자가 거칠게 소리쳤다. " 제대로 서 제대로!! " 재현은 아이들에 섞여 덩달아 내렸다. 그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남자들의 으름장에 일렬로 서기 시작했다. 재현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자, 아까의 목소리 중 하나가 그를 쿡 찌르면서 말했다. " 얼른 서. 맞기 싫으면. " 재현이 맨 끝에 서고, 비단 옷을 입은 남자가 처음서부터 아이들을 꼼꼼하게 훑기 시작했다. " 얼굴은 이쁘장한데, 너무 말랐어. 벗어. " 남자가 명령하자 처음에 서 있던 아이가, 걸치고 있던 넝마와 다름없는 옷을 벗었다. 아이가 알몸이 되자 남자는 상품을 검열하듯 눈으로 그 아이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서 장부같은 것을 들고 서 있는 남자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시종으로 보이는 남자가 장부에 그의 말을 받아서 썼다. 그가 보고 지나친 아이들은 각기 남자들에게 끌려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 전부 정당하게 사들인 노예들이 맞겠지? " " 예, 당연한 말입죠. " " 요즘 치고는 수가 좀 많은데? " " 뭐, 예전보다 아이를 파는 사람들이 적다고는 하지만, 어디서나 궁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보다, 가격은 제대로 매겨주셔야 합니다. " " 끌, 살기가 좋아지니 노예값만 오르는군. " " 잠깐만요! " " 뭐냐? " 노예상인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재현이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전 노예가 아닙니다. 단지 마차를 좀 얻어타려고 했ㅇ... " 철썩!! 재현은 등을 후려갈기는 고통에 순간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뒤로 다가온 남자가 가죽끈이 여러개 달린 뭔가로 등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노예상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재현에게 다가왔다. " 이 녀석은 뭐야? 으흠?! 뭐야, 녹색눈이잖아!! " " 트리옌들은 아닙니다! 이 검은 머리를 보십시요. 이 녀석은 제 스스로 마차에 올라탔습니다. 벌판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줏어왔지요. " " 뭐야? 그럼 바로 사들인 놈이 아니잖아? 요즘은 단속이 심해서... " " 아닙니다! 오도가도 못하고 혼자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고아거나, 버려진 놈입니다. 아니면 어딘가의 이방인인 듯. 옷차림도 이상하고. " " 그렇게 어린 놈도 아닌데... 너 정말 트리옌이 아니냐? " 재현은 고통에 입술을 깨물다가 대꾸했다. " 그게 뭐야... 난 노예가 아냐! 당장 풀어줘! " " 노예가 아니라면 패를 보여라. " " 패? " " 네 고향과 신분을 증명하는 패 말이다! " 그런 것, 가지고 있을 턱이 없었다. 재현이 아무런 말을 못하자 마차에 있던 그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 보십시요. 그냥 떠돌이입니다. 노예로 몸이 상한 것도 아니고, 트리옌이 아닌데 녹색눈이라면 굉장한 상품입니다. 보십시요. 생김도 아주 고귀하잖습니까. " 노예상인은 조금 고민하는 듯 하더니 대꾸했다. " 하지만 인장을 찍어오지 않았을테니 제 값은 줄 수 없어. " " 잠깐만... 악!! " 뭐라고 항변하려던 재현은 또 등에 채찍을 맞았다. 재현은 고통에 무릎을 꿇었지만 곧 일으켜 세워졌다. 노예상인이 고개를 까닥이더니 명령했다. " 옷을 벗겨봐. " 저항할 틈도 없이 교복이 벗겨지고 나체가 되었다. 노예상인은 꼼꼼히 그를 살펴보더니 말했다. " 음. 하지만 꽤나 고급품이군. 굳은살이 박히거나 한 흔적도 없고, 흉터도 없어. 정말 트리옌이 아니겠지? " " 트리옌이라는 것도 모르는 놈입니다. 애초에 트리옌이 이렇게 순순히 잡힐리가 없잖습니까? " 노예상인이 한숨을 쉬었다. " 전쟁이 끝난 이후로는 트리옌을 마음대로 잡아들일 수 없으니, 트리옌을 주문해도 하는 수가 없단 말야. 녹색눈만이라도 좋다는 자들은 널렸으니, 특별히 값을 후하게 쳐주지. 하지만 만약 후환이 생길 경우에는 네놈이 다 책임을 져라. " " 예, 예, 물론입죠. " " 그럼 이놈은, 인장부터 찍어야 겠군. 데리고 가서 찍어. 상품이니 안다치게 조심하고. " " 놔! 놓으라고!! " 재현은 바로 어디론가로 끌려갔다. 화려해보이던 입구에서 안쪽 깊숙한 방으로 끌려간 재현은 인장을 찍는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 얼굴이 하애졌다. 그를 방에 매달아 놓고, 안에 있던 남자가 숯불속에서 꺼낸건 문양이 있는 인두였기 때문이다. 재현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 그, 그만 둬. " 남자가 흰 주머니같은 것을 재현의 입에 물렸다. " 일종의 마취제니까 떨어지지 않게 물고 있어라. 뭐, 혀 깨물지 않도록 하는 효과도 있지. " 재현이 입을 벌리려 하자 다른 남자가 우악스럽게 재현의 턱을 틀어막았다. 재현은 거세게 발버둥 쳤지만 방에 매달린 사슬에 꿰인 팔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재현은 갑작스러운 이런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왜 이렇게 된거지? 시뻘겋게 달군 인두를 든 사내가 재현의 옆을 지나쳐 갔다. 벌겋게 달궈진 무늬는 천박한 장미모양. 입에 문 주머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며 혀가 굳어져갔다. 재현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올렸다. 제발, 제발 누가 구해줘...!!! 카멜은 들판의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기에서 기척이 끊어졌다. 바닥에 남은 마차 바퀴와 어지럽게 흩어진 발자국이 불길한 느낌을 자아냈다. 카멜은 왜인지 솟구쳐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보다 먼저 찾아야 한다. 먼저. 또 다시 그의 수중에 그녀를 넘길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카멜 주변의 풀들이 바람결에 실려 크게 원을 그리더니 화르륵 솟구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풀잎으로 그린 그림인 듯 어떤 소녀의 인영이 나타났다. " 펜, 오키드! " 카멜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풀잎이 그려낸 소녀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지었다. - 일어나요, 카멜리아 버베나. 당신은 무릎을 꿇어야 할 만한 사람이 아니예요. " 아닙니다. 그간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 - 아니, 지금 이렇게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또 떠날 건가요, 카멜? " 아니요. " 소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정말로 기쁜 듯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럼, 그럼 이제 포기한 거로군요. 드디어 제 곁에 있어주는 건가요? " ... 그분이 돌아왔습니다. " 순간 펜 오키드의 얼굴이 굳었다. - 아... 설마... 당신이, 당신이 그녀를 찾아냈다는 말인가요? " 예. " 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나 미소를 지니고 있는 그녀를 아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실로 놀랄만한 분노였다. 하지만 카멜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녀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 다시.. 다시 돌아오다니 말도 안돼요. 그녀는 이미 수백년전의 사람. 다른 차원으로 가 몇번이고 다시 환생했을 터인데, 그녀일리가 없잖아요? " 아닙니다. 그분의 첫번째 묘목인 제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리 없습니다. 틀림없이 그녀였습니다. " - 그런... ... " ...게다가 무스카리 역시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지금 한시라도 서둘러 먼저 그 분을 모셔오지 않는다면, 전쟁이 다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송구스러우나 제가 한시라도 걸음을 재촉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카멜이 요청을 하며 고개를 들었기에, 펜은 재빨리 표정을 감췄다. 그녀는 애써 말했다. - 도움이 필요하진 않으신가요? 서둘러 그 분을 맞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아닙니다.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 - 그래요. 당신은 그 분의 첫번째 묘목이자, 트리옌의 영광이시니. 길을 서두르도록 해요. 다음에는 그 분과 함께겠군요. " 예. " 카멜이 고개를 다시 숙였다가 들었을때는 이미 모양을 잃은 풀잎들이 뿔뿔히 바닥으로 흩어지는 모양뿐이었다. 카멜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고 땅에 내려앉은 풀잎들을 다시 흐트리며 뛰었다. 펜 오키드와 마주친 이상, 더더욱 서둘러야 했다. 펜 오키드의 트리옌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펜의 아까의 말은 카멜의 가슴을 불안으로 잔뜩 휘저어 놓았다. 다른 차원으로 가 몇번이나 환생했을 사람. 영혼은 비록 그녀일지 몰라도 겉은 아닌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갑자기 이 세계로 돌아왔으니 그 껍데기가 어찌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과거에 대한 기억이 있을리 만무하다. 카멜은 바람처럼 달려 들판을 가로질렀다. 시공의 흔들림에 카멜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뛸 듯이 기뻤던 펜 오키드는 정령들을 거두고는 잠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주변에 아무도 있지 않았기에 그녀는 누구의 신경도 쓰지 않고 마음껏 인상을 찌푸렸다. 움직임에 따라 발끝까지 닿을 듯 긴 회청은의 머리카락이 따라 흔들렸다. 드디어 그가... 아무도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지 못했건만... 그녀를 찾아낸 것이다. 아리스타타 칼미아. 신성수, 에린지움의 유일의 주인. 그 이름을 떠올리자 마자 미칠것 같은 질투가 온 몸을 사로잡았다. 방 안에는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듯, 소년의 고개가 푹 꺾였다. 오른쪽 날개뼈에 선명히 남은 장미무늬를 확인하며 인두장은 인두를 도로 숯불속에 집어넣었다. 남자가 소년이 의식을 잃자 턱을 놓았고, 침에 젖은 약주머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정리해 넣으며 찜찜한 기분에 말했다. " 인두장님. 이 녀석, 눈이 녹색이던데 설마 트리옌은 아니겠죠? " " ... 트리옌이면 이런데 끌려 오겠어? 게다가 아무런 능력도 없잖아? " " 하, 하지만. " 노예상인에게 고용된 사병은 그래도 불안한지 축 늘어진 재현의 옆 얼굴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 녹색눈이라니 재수없... " 그 사병은 채 말을 잊지 못했다. 소리도 없이 잘려나간 문짝 다음으로 그의 목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인두장은 바닥을 구르는 그의 목을 한번 보고, 침입자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그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자신의 목도 곧 바닥을 굴렀기 때문에. 침입자는 연이어 재현을 묶은 쇠사슬을 잘라내었다. 무슨 종잇장마냥 잘려나간 쇠사실에 의식을 잃은 재현의 몸이 스르륵 무너지자 무스카리는 그의 몸을 받았다. 안아서 등을 확인해보니, 자신이 한 발 늦었던 듯, 등에는 이미 선명한 장미무늬가 찍혀있었다. 고통의 열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듯 벌겋게 달아올라있는 상처에 손을 대고 그는 짤막히 주문을 외웠다. 잠깐 손에서 흰 빛이 났지만 마법은 곧 튕기듯 꺼져버렸다. 그가 손을 들어 상처를 다시 확인하자 화상은 나았지만 인장은 완전히 없어지지 못했다. 이미 변화를 시작한 몸이 그의 마법력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무스카리는 자신의 망토로 재현을 감쌌다. 그리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발자국 소리따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황망하게 재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의식을 잃은 무방비한 얼굴. 그는 순간 심장이 선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녀의 무방비한 얼굴을 본 적은 딱 한번 뿐이었다. 이미 그녀의 영혼이 몸을 떠나고,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을때. 무스카리는 잠시 바닥이 꺼지는 듯 아득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지금 그녀는 그의 품에 있었다. 찾을 수라도 있었던 카멜과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수백년의 시간동안 그는 이 순간만을 바랬다. 아니, 처음 그녀를 만났을때부터, 그 숲에서 그녀를 만났을때부터 그는 이 순간만을 바래왔다. 뜨거운 희열이 그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찼다. " 누구냐!! " 무스카리가 의식을 재현에게로 부터 돌렸을때, 그는 이미 포위된 상태였다. 그를 둘러싼 사병들 뒤에서 노예상인이 노발대발 외치고 있었다. " 내가 녹색눈동자일때부터 웬지 찜찜하다고 했더니...!! 잡아! 녀석을 잡으라구!! " 수많은 창검이 무스카리에게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노예상인이 본 것은 사병들에게 짓눌린 침입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엇인가의 힘에 짜부라지듯 터지는 그의 사병들과, 무섭게 그를 노려보는 침입자의 시선 뿐. 무스카리는 재현을 안은 채 천천히 현관으로 걸어나왔다. 고급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잘 꾸며진 정원에는 어떤 인기척도 소란스러움도 없이 조용했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 뒤에 자리한 저택의 참상을 상상하지 못할 듯 했다. 하지만 카멜은 달랐다. 그는 대기중에 섞여오는 피냄새를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무스카리가 고개를 들자, 그곳엔 이미 검을 빼든 카멜이 서 있었다. 카멜의 녹색 눈동자가, 분노로 시커멓게 가라앉아 있었다. " 당장 놓아. " 무스카리는 짙은 비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 그대는 항상 늦군. 카멜리아. " 카멜은 뿌득. 이를 갈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당장 그분을 놓아드려라. 두 번... 두 번씩이나 네가 어떻게 할 분이 아니시다. " 무스카리는 카멜의 분노따윈 아랑곳 없다는 듯, 품에 안은 재현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 놀라워.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지. 네가 아리스타타를 찾아내리라곤. " "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마!! " 카멜이 비명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검은 허무하게 공간만을 베었고, 무스카리는 이미 그의 뒤쪽으로 몸을 피한 뒤었다. " 하지만 나만은 믿었다. 나는 너라면 틀림없이 아리스타타를 다시 찾아낼 것이라고 생각했지. 놀랍지 않은가? 아마 너의 친우도, 트리옌도, 어쩌면 너 자신도 반신반의 했을거다. 하지만 나는 믿었어. 알 수 있었기 때문에. " 휙! 또 검이 허공을 갈랐다. 무스카리의 옷자락이 조금 찢겨나갔다. 카멜은 정령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 봐라. 그대가 찾아낸 기적이다. 모든게 너무나도 작던 아리스타타와는 틀리군. " " 그 이름을 부르지마!! " 무스카리가 서 있던 땅을 중심으로 흙이 패이며 다시 검이 날아들었다. 카멜은 무스카리의 품에 안겨있는 재현때문에 공격다운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또 그녀를 뺏기고 만다는 불길함이 카멜의 머릿속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 하지만 눈동자는 선명한 녹색이다. 이제 껍데기를 벗어가기 시작하면 다시 본연의, 영혼의 모습에 가까워질거다. " " 무스카리!!! " 카멜의 검이 무스카리의 뺨을 스쳤다. 핏방울이 허공에 튀고, 무스카리는 낮게 웃으며, 한 손으로 재현의 얼굴을 덮었다. 짙은 금빛의 눈동자가 음험하게 번뜩였다. " 아리스타타가 어찌되도 좋은가? " 속사포처럼 날아들던 카멜의 검이 멈췄다. 카멜은 증오로 얼굴에 그늘을 지우고 말했다. " 또 그 분을 죽일 셈인가? " 무스카리는 그 틈을 타 사라졌다. 바람에 아직 선명한 재현의 체취와, 무스카리의 체취가 흩어져갔다. 카멜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곧 그의 분노에 찬 외침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 무스카리... 무스카리 알리움-!! " 카멜은 검을 바닥에 내동댕이 치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는다. 무스카리, 네놈이 또 그분을 죽이도록 두지 않겠다. 모든 숲의 적,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스스로 아리스타타의 주인임을 자처했던 용이여! 증오스러웠다. 그의 불타는 머리카락이, 그 잔인한 금빛 눈동자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친 손가락이, 그 집요한 집착과 욕망이. 그의 모든 것이! 카멜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그날의 악몽이 다시 되살아 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때도 자신은 한 발 늦었었다. 무스카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너지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청은빛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피가 온 몸을 적셨지만 인간과 달리 한없이 투명한 그 피는 아무리 흘러도 그녀를 더럽히지 못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아. 같은 실수는 두번 반복하지 않아! 카멜은 거듭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무스카리가 자신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축복의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 카멜은 절망감을 억지로 마음속에 구겨넣고 정령을 불렀다. 잡아챈 손의 주인이 외쳤다. - 안됩니다! 그와 동시에 재현은 번쩍 눈을 떴다. 시야를 까만 밤하늘이 뒤덮고 있었다. 꿈이... 꿈이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을 뒤에서 잡던 그 손은 누굴까? 재현은 식은땀으로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걷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숲의 공터였다. 자신은 모포를 감고 있었고, 옆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반대편에 누가 있었던 듯 그곳에 짐이 놓여 있었다. 문득 재현은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기억해 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황급히 등을 더듬어 봤지만 아무런 감촉도 느낌도 없었다. 틀림없이, 살이 타는 고통이 느껴졌었는데... 혹시나 계속 노예로서 잡혀있는 것은 아닌가 살펴보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듯한 사람은 지금 자리를 비웠고, 그를 구속하는 물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도망가야 하나? 웬지 모를 불안이 가슴속에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도망가면 뭘 어쩌나? 자신은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난데없이 갑자기 잡혀가 노예라니... 이상한 점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외국인들과 말이 통하는 것 부터가 그렇고, 자신을 녹색눈...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이대로 일어나 어디론가 도망간다고 해도 재현에겐 또 누군가에 끌려가 나쁜 일을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재현은 막연하게나마 이곳이 원래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고,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낭패한 지경에 빠졌다는 걸 이해했다. 밤에 숲의 한가운데서 아무리 모닥불이 있다고는 하지만 조금 추울 터였다. 하지만 재현은 아무런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재현은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힘껏 심호흡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몸이 아프지 않다는 정도일까... 툭하면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하여 잘 아프곤 했던 그인데, 이런 낯설고 어려운 환경인데도 몸이 불편하지 않았다. 대기가 깨끗해서 일까.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이다. 그 점만이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재현은 문득 들려온 소리에 상념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어두운 숲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큰 키에,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사람이었다. 재현은 이곳에서 검은 머리를 처음 보았기에 눈을 크게 떴다. 남자는 재현이 일어나 앉아있자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 깨어났군. " 가까이서 본 눈동자도 검은색이었다. 재현은 웬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는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남자는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아주아주 낯익고... 익숙한 얼굴. 남자가 문득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재현은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 들었다. 남자는 곧 손을 거두고 반대편으로 가 앉았다. " 아픈 곳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군. " " ... 죄, 죄송합니다. " 남자가 고개를 모로 저었다. " 아니다. 그런 일을 당했으니. 무섭기도 하겠지. " 무서워? 아까 일 때문일까. 재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 ...여긴? " " 안수케에서 남쪽으로 있는 숲이다. 아무래도 인가보다는 숲 속이 좋을 것 같아 이리로 왔다. " " 저... 를 구해주신 건가요? "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왜... " 그는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 그건 네가 트리옌이기 때문이지. " " 트리옌요? "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그 말을 계속 들은 것 같다. " 그래. 트리옌. 네 눈동자는 녹색이잖아? 그건 트리옌이라는 소리다. " 재현은 깜짝 놀랐다. " 아니요. 제 눈동자는 녹색이 아닌데요. 당신과 같은 검은색입니다. " " 나와 같은 검은색이라도 그건 흔한게 아니지. 하지만 네 경우에는 확실히 트리옌이 맞다. " " 네? " " 그건 네 눈동자가 녹색이라서 그래. " " 아니 왜... " " 지금 비춰볼데가 없어서 그렇지 너도 네 모습 보면 납득할거다. 녹색이야. " 재현은 다시 물었다. " 트리옌이 뭐죠? " " 트리옌은... 신성수 에린지움에서 태어나는 나무들을 말하는 거다. 그들은 모두 녹색눈을 가지고 있거든. 그게 가장 정확한 표식이다. " " 나무요? " " 그래. 트리옌은 통상 두개의 몸을 갖지. 하나는 본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무 그 자체이고, 하나는 움직일 수 없다는 나무의 약점에서 벗어난 활동하는 육신. 걸음이라고도 하지. 그 육신은 거의 인간하고 흡사한 모습인데 그 눈이 녹색이라는 거야. 그 몸 또한 나무에서 만들어지지. 트리옌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는 피가 투명하다. " " 피가 투명해요? " 재현은 난생 처음들어보는 이상한 소리에 입을 딱 벌렸다. " 그래. 다른 인간이나, 용족과는 달리 그들은 피가 투명하다. 이 세계는 크게 나누어 네 종족이 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트리옌이고, 용족, 인간, 수인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크게 용족과 트리옌으로 구분되어 질 수 있지. 트리옌에겐 신성수 에린지움이 있고, 용족에겐 골드 드래곤인 에리카 로벨리아가 있다. 트리옌은 되살리고, 가꾸고, 지켜내고 기른다. 용족은 만들고 캐내고 불태우고 녹인다. " " 그럼 트리옌은 창조이고, 용족은 파괴인가요? " " 아니, 그런식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냐. 좀 더 개념적인 것이지. 트리옌이 자연 그 자체라면, 용족은 재 창조한다. 나무는 잘라내지 않으면 집으로 만들수 없고 쇠는 녹이지 않으면 검을 만들 수 없다. 그런 식이지. 어쨌거나 그런 연유로 두 개체는 서로 공존하며 적대하면서 이 세계의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거다. 그리고 그 밑으로 인간들이 왕국을 이루고 살고 있고, 수인족들이 일족을 이루며 살고 있지. " " 그런데... 제가 트리옌? " " 그래. 아마 널 잡아간 이유도 네가 트리옌이면서 그렇게 멍청했기 때문이다. 수백년전에 용족과 트리옌 사이에서 큰 전쟁이 있었지. 전쟁은 용족의 승리쪽으로 기울어져서 많은 트리옌들이 전장에서 죽거나, 최악의 경우 하찮은 인간들에게 잡혀 노예로 전락하거나 했지. 그때에 노예로써 트리옌이 인기가 아주 많았기 때문에... 요즘은 전쟁이 끝난지도 몇백년이 되었고 에린지움의 걸음도 생겼기 때문에 트리옌을 노예로 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아직도 트리옌이라면 눈 벌개서 찾는 속물들이 많아. 녹색눈이라면 더욱 환장하고... 게다가 지금 네 머리카락이 아직 검은색이라서 트리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겠지. 트리엔의 머리색은 주로 옅으니까. " " 하지만 제가 트리옌이라니... 저는 얼마전까지 여기 사람조차도 아니었는걸요. "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 그건 네가 환생체이기 때문이다. " " 환생체요? " " 용족에게는 트리옌들처럼 몸이 두개 없다. 그래서 한번 죽으면 끝이지만 트리옌은 나무인 본체가 죽지 않는 한 완전히 죽는다고 할 수 없다. 단지 움직일 수 없고 인간처럼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뿐이지, 그 본질과 힘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들말에 따르면 그릇을 떠난 트리옌의 영혼은 어디엔가에서 다시 환생한다 하더군. 다른 차원이나, 혹은 다른 시간에서. 물론 다시 발견되는 일은... 극히 적다고 할 수 있지. " " 그러면... " " 그래. 너는 트리옌의 환생체로서 다른 차원에 살다가 원래 네 본체가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 거다. 원래 육신은 영혼의 영향을 받는 것. 네 본체가 있는 이곳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껍데기가 벗겨지고 네 본질이 나타나는 거야. 지금 네 눈이 녹색인것이 그렇고, 앞으로 신체적으로 여러가지가 변할거다. " 재현은 갑자기 닥친 많은 상황과 정보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 그럼... 그럼 그때 그 금발의 남자가 나를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건가? 그런데 왜... ? ' " 자는게 좋을거다. 내일부터는 걸어야하니까. " " 걷다니, 어디엔가 가는건가요? " 남자는 자신의 잠자리를 펴면서 무심하게 대꾸했다. " 그럼, 계속 여기에 있을거냐? " " 아니... 그런건 아니지만. 당신은 왜 절 도와줍니까? " " 아까 말했잖아. 네가 트리옌이기 때문이라고. 트리옌이든 용족이든 인간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트리옌은 남쪽나라 결계안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와야 할 의무를 안고 있지. 지난 전쟁으로 트리옌의 수도 많이 줄었거니와, 트리옌에게는 여러가지 능력이 있으니까. " " 그렇군요... " " 적어도 널 노예상단에 넘긴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테니 걱정마. " 그럼 우린 어디로 가는 거죠? " " 그건 가다보면 알게 돼. " 남자는 잠자리로 들어가 누웠다. 재현도 그를 따라 누웠다. 재현은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하는지 몰랐다. 알 수 있는거라곤 하나도 없고, 자신의 입장도 정리 할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자신은 여기에서 뭘 해야하는지, 모르는 것 투성이. 부모님이나 학교 걱정같은건 이 상황에 대한 불안에 묻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지금 저 남자조차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익숙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지만... 왠지... 뭔가 무서웠다. 하지만 자신이 원래 이곳 사람이라서 그런지, 몸은 곧 잠을 요구해왔다.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감자, 남자의 목소리가 문득 말했다. " 내 이름은 안스륨이다. " " 제 이름은 재현입니다. 김재현... " " 그런 이름은 좋지 않아. 굳이 네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릴 필요는 없다. 게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으니, 이름을 하나 지어두는게 좋아. " " 하지만... 이곳에서는 어떻게 이름을 짓는지 모릅니다. " 남자의 목소리가 한참 망설이는 듯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 아스포델. 아스포델이 좋겠다. 그냥 아스라고 부르도록 하지. " " 아스포델... 무슨 뜻인가요? " 또 침묵이 흘렀다. " 별 의미는 없다. 그냥 흔한 이름이야. " " 그래요... 그러다보니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드렸네요.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 대꾸는 없었다. 재현... 아니 이제 아스포델은 눈을 감았다. 귓전에서 새로 지어진 자신의 이름과, 여기가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곳... 그런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 난생 처음 야숙을 하는데도, 너무나 편했다. 항상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였던 것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차소리에 잠을 깨는 일도 없는 것이다. 아스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숲에는 깊고 고요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무스카리...아니, 안스륨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꺼져버린 모닥불에 남은 작은 불씨도, 너무 조용해 되려 귀를 후벼파는 침묵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누워 잠든 아스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깍지껴 턱에 댄 채 그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마법으로 검게 물들인 머리카락과 검은 망토는 숲의 어둠에 묻혀 있었지만 역시 검게 물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그의 시선은 어둠속에서도 아스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16세쯤 되었을까. 마치 더 여물지 못한 가량가량한 턱 선이지만 단단하게 뻗은 것이 여자와는 틀렸다. 자신보다야 훨씬 작은 체구지만 어깨도 넓고 팔도, 가슴도 단단하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도 검은색. 안스륨은 짙은 의구심을 느꼈다. 저기 누워 있는 것이 정말로 자신의 아리스타가 맞는가? 이질감과 괴리감이 그를 감쌌다. 그것은 흡사 공포였다. 그 공포는 익숙한 것이었다. 수백년동안 그의 곁을 지켜왔던 짐승이었다. 그의 아리스타는 여성이었고, 머리카락이 허벅지에 닿을만큼 길었다. 햇빛에 닿으면 눈부신 은빛이고, 달빛에 닿으면 신비로운 청은빛이고, 바람이 불면 숲의 색깔로 빛났다. 그는 그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보고 그녀의 본체를 상상할 수 있었다. 들은 바와 마찬가지로 줄기와 가지는 그녀의 피부와 마찬가지로 흴 것이다. 그리고 은빛의 나뭇잎은 바람이 없어도 파도같은 소리를 내며 저런 색깔로 빛날 것이다. 용족인 자신이 에린지움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아마 늘 전장에 직접 나서곤 했던 아리스타의 성격이 아니었다면 그녀를 볼 기회도 없었을 수 있다. 수없던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때론 눈부신 태양아래서, 때론 창백한 달빛아래서 그는 수도없이 아리스타타의 청록색 눈동자에 깃들어 있던 꺾이지 않는 빛을 마주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어둡고 조용한 숲 속에 있었고, 자라다 만 소년과 함께 있다.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으리라는 불안감과 싸우면서, 찾으러 헤맬수 조차 없는 자신을 비관하면서, 카멜 그 자식의 뒤통수만을 쫓아온지 수백년. 안스륨의 손이 떨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저 자식을 깨워 다그치고 싶었다. 네가 정말 아리스타냐? 모습도 다른, 성격도 다른, 기억도 없는 네가 정말 아리스타냐?! 당장 그 푸른 눈동자를 어루만지고, 입술을 열어 헤집고, 몸을 열어 확인하고 싶었다. 몇번이나, 몇번이나 그를 그렇게 안고 더듬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리스타임을 확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멜, 카멜 그 빌어먹을 자식은 자신과 같지 않을 것이다. 자신과 같은 불안감을 모를 것이다. 녀석은 그녀의 첫번째 묘목으로 트리옌의 영광이었으며 시공을 넘어 그녀를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자였다. 안스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에서 갖은 어두운 감정이 흘러나왔다. 불안감, 욕망, 슬픔, 의구심, 자책, 분노, 질투... ... 하지만 자신은 아스를 건드릴 수 없었다. 또 같은 과오를 반복할 수는 없다. 이것은 그에게 기회였다. 아직 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때, 내가 누구인지 모를때,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카멜이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기 전 마주쳤던 기억도 이미 지웠다. 비록 트리옌으로써의 자각이 시작되어, 임시방편이기는 했지만.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안스륨은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길고 긴 밤이 될 터였다. " 뭐라고? 아리스타타가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 " " 허허, 게다가 무스카리의 손에 있다고? " 카멜은 고개를 떨구었다. 카멜은 축복의 성에 있는 커다란 회랑에 있었다. 거기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은 무수한 트리옌들이었다. 모두 하나같이 늙은자가 없고 녹색눈동자를 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수령이 몇백년은 먹은 고령의 장로들이었다. 장로들은 글로리 나이트 카멜리아가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를 찾아 데리고 돌아왔다는 큰 소식에 모여들어, 그보다 더 큰 충격- 에린지움의 심장이 지금 그의 손아귀아래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에 흥분하고 있었다.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평소엔 꼭 몇자리가 비곤하던 회의석엔 주인이 앉은 적이 극히 드문 장로회 최고령의 트리옌 스피리아 로단테의 자리만이 비어있었다. " 다 제 불찰입니다. " " 자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분을 데려온 것인가? 아니, 그 사람이 정말 그 분이 맞기는 한 것인가? " " 우리에게는 이미 에린지움의 걸음이 계시네! 지금 펜 오키드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인가? " " 하지만 펜 오키드님에 에린지움의 완전한 걸음이신지는 아직 모르네. 알다시피 그 분의 눈동자는 그저 우리와 같은 녹색이잖는가! " " 조용히! " 펜 오키드의 낭랑한 음성이 회랑을 울렸다. 소란스러움이 일시에 가라앉고, 카멜은 걸어내려오는 펜 오키드를 올려다 보았다. 희고 반투명한 의복을 어깨에 걸치고, 에린지움의 잎사귀를 엮어 만든 관을 쓴 펜 오키드는 발치까지 닿는 은발을 출렁이며 자리에 섰다. 틀림없이 그녀의 적통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터인데도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카멜은 무릎을 굽히며 말했다. " 에린지움의 지킴이, 펜 오키드님을 첫번째 묘목이자 트리엔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 카멜리아 버베나가 뵙습니다. " " 아니, 저런 무례한!! " 카멜이 아리스타타가 돌아온 이상, 에린지움의 걸음임을 부정하고 그녀의 정식 명칭을 다 말하지 않았기에, 펜을 지지하는 많은 트리옌들에게서 술렁임과 분노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펜 오키드는 개의치 않고 좌정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 내 앞에서 소란스러움을 일삼는 자들과 나이트 카멜리아 어느 쪽이 무례한지 모르겠군요. 그대는 무릎을 꿇어야 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일어나세요. " 순간 조용함이 찾아왔다. 카멜은 일어나면서 속으로 씁쓸함을 삼켰다. 과연.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뒤로하고 에린지움의 가지를 잘라 '만든' 걸음 펜 오키드는, 계속 거듭되어 왔던 그녀의 정당성을 스스로 세울 수 있을만큼 능력있는 여자였다. 에린지움의 심장을 차지하기 위해 용족들이 일으켰던 전쟁에서 에린지움의 걸음인 아리스타타가 죽고서, 간신히 용족들을 물러가게 했지만 전쟁후의 피폐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많은 트리옌이 죽고, 본체의 나무와 숲들이 불타고, 카멜과 로단테외의 모든 묘목들이 죽었다. 게다가 아리스타타가 없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트리옌들은 구심점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 했고, 황폐함과 용족의 이름만이 땅 위를 지배했다. 그래서 한무리의 트리옌들이 생각해 낸 것이 에린지움의 걸음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에린지움의 가지를 잘라 형상을 빚었다. 무언가를 손상시켜 만든다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트리옌들로써는 매우 힘든 과정이었고, 또 큰 충격이며 파문이었다. 아무리 에린지움의 가지로 만든 걸음이라 해도 영혼이 깃들리 없다는 것이 대다수의 주장이었다. 차라리 아직 남아있는 묘목인 카멜이, 아리스타타의 영혼을 찾아 떠났으니 그를 기다리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신성수 에린지움의 힘은 당장 필요했고, 결국 펜 오키드의 육신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영혼이 없을거라던 많은 트리옌들은 입을 다물었다. 에린지움의 가지로 만든 걸음은 눈을 떴고, 말했으며, 에린지움의 능력을 행사했다. 빛나는 은발머리는 에린지움 외에는 가질 수 없는 색이었고 펜 오키드는 자신의 입장을 빠른 속도로 이해하고 트리옌들의 구심점이 되어 에린지움의 능력을 이용해 땅을 재건했다. 묘목을 만들고, 숲을 키우고, 많은 트리옌을 태어나게 했다. 그녀는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 거의 완벽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보통 트리옌들과 같이 그냥 녹색눈에 에린지움이 있는 곳으로 통하는 문을 열지 못하는 자일 지라도 그녀의 놀라운 능력은 그녀의 정당성을 꺼림칙해 하는 많은 입들을 묵살했다. 전쟁의 상처는 점점 아물어 갔고, 불탔던 숲도 푸르름을 되찾아갔다. 오직, 오직 카멜만이 아리스타타를 찾아 헤맬 뿐, 위대하고 강했던 에린지움의 원래 주인을 추억하고 그리워 하는 자들은 많아도 필요로 하는 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와서 아리스타타를 되찾아 왔으니, 트리옌들은 혼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 펜 오키드, 당장 결계를 발동시키시고 제게 나이트들과 군사를 붙여주십시오. 지금 그 분께서 무스카리의 수중에 계십니다. 송구스럽게도, 저 혼자 구하지 못했습니다. 죄는 나중에 받겠으니, 한시라도 빨리 그 분을 구해야 합니다. " 펜 오키드는 미소를 띄운 상냥스런 얼굴로 말했다. " 그대의 염려는 이해해요. 결계라면, 그때 그대와 만났을때 이미 쳐두었답니다. 그대가 찾아온 이상, 그 영혼은 아리스타타의 것이겠지요. 이미 많은 시공을 지나 몇번이나 환생해,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있을지라도 나와 같이 에린지움의 영혼임은 틀림없는 일. 심장을 뺏길 지경이 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만큼의 판단력도 없음이 분명하니 어서 그녀를 구해야 합니다. 그대에게 묘목과 나이트를 붙여드리지요. 서두르세요. " 카멜은 고개를 숙이고 회랑을 빠져나왔다. 뒤로 한 곳에서 웅성거림이 다시금 터져나왔다. 펜 오키드가 다른 이들이 아직 미처 떠올리지 못한 많은 것을 말한 덕분일거다. 분하지만 그 말대로 였다. 환생한 그 소년은 과거의 기억도 없고, 이 세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터였다. 아직 정령을 부릴 줄 아는지 모르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게다가... 게다가 가장 위험한 것은, 무스카리에게 무방비하다는 사실이었다. 본체와 걸음이 한 몸인 셈인 용족은, 용으로도 변할 수 있고 인간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일단 걸음이 죽어도 본체는 남아 힘을 보존하는 트리옌들보다는 불리했다. 한번 죽으면 힘도 사라지니까. 하지만 트리옌들이 갖고 있는 결정적인 약점은 용족에게 심장을 뺏기면 트리옌의 본체도 죽고 그 힘도 빼앗은 용족의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심장을 뺏는다-는 것에 관해서는 불분명한 부분이 많았다. 트리옌들에게는 정확히 말해서 심장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던 것이 딱 두번 있었다. 덕분에 세계는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괴하는 힘이 적지만 본체가 있는 한 능력이 남아있는 트리옌과, 강하지만 그럴 수 없는 용족. 그런데 실제로 있는 존재 인지 없는 존재인지도 불분명한 골드 드래곤 에리카가 자신의 아들이자 용족의 우두머리인 무스카리에게 말했던 것이다. 저 은빛의 나무를 가져오라고. 그래서 용족은 전쟁을 일으켰고, 무스카리는 아리스타타를 납치했고, 아리스타타는 영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에린지움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 덕분에 에린지움은 무사했고 용족은 물러갔다. 아리스타타의 대행인 펜 오키드도 있다. 하지만 에린지움의 걸음은 여전히 아리스타타였고, 그녀의 영혼이 무스카리의 수중에 있는 이상 그는 어떻게 해서든 다시 그것을 가지려 할 것이다. 그러면 에린지움과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는 죽을 것이고, 그 능력은 무스카리의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은 트리옌의 멸망을 의미했다. 이런 이상, 아리스타타는 돌아와서 반갑기는 커녕, 무스카리의 수중에 있는 이상 트리옌들의 절대적인 급소이고 한시바삐 없애야 할 아킬레스 건이었다.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이러한 상황을 모두 깨달은 펜 오키드는, 잠깐 카멜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카멜은 이번에도 그녀를 지키기 힘들 것이다. 아리스타타는 이제 트리옌들에게도 쓸모없는 존재이고, 다시 죽여야 할 만큼 위험한 인물이다. 그녀는 다시 죽어서 다른 시공으로 가야만 한다. 그리고 트리옌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 카멜은 펜 오키드의 것이 되어야 한다. 펜은 아리스타타에 대한 질투를 느꼈던 자신을 비웃었다. 그녀는 카멜을 따라갈 묘목을 한명 불러 말했다. " 카멜의 노력은 불필요한 것이었어. 불쌍한 사람 같으니. 그의 그리움이 그녀를 두 번 죽게 만드는군요. " 펜을 바라보는 녹색눈은 그녀가 처음으로 심었던 묘목이었다. 또다른 글로리 나이트인 월 저먼더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며 펜은 생긋 웃었다. " 굳이 아리스타타를 지키거나 데려오려 애쓰지 않아도 좋아요. " " 뭐하는 거야?! " " 에? " 아스는 당황해서 안스륨을 올려다 모았다. 먹으라고 해서 다 굽힌 고기를 집은건데, 안스륨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손을 쳤기 때문이다. 고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손에 발갛게 자국이 남았다. " 설마 그런것도 몰랐던 거냐... " " 네? " 안스륨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 트리옌은 육식을 하면 안된다. 못하기도 하지만. 트리옌에게 육식은 독이 된다. 산 피를 먹이면 무려 수명이 깎이지. " " 아아? 하, 하지만 여태까진 잘 먹어 왔는데요... " 육식을 그다지 즐기지도 않고 맛있다고 여긴적도 없지만 밥상에 올라오면 어머니가 편식하는 것을 싫어했기에 다 먹어왔던 것이다. " 그것은 네 껍데기가 인간일때의 이야기고. 이제부터 육식은 절대로 하면 안된다. 앞에 둔 과일과 물을 마셔. 양이 좀 적을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 " 예에... " 아스는 안스륨의 눈치를 보며 과일을 집어들었다. 안스륨이 쳤던 손이 화끈거렸다. 갑자기 인간이 아닌 다른게 되어버린 기분이라니. 집에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일까? 아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 미안하다. " " 네? " 딴 생각에 빠져있던 아스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안스륨은 불을 뒤적거리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은 듯 무표정했다. " 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 안스륨이 인상을 찌푸렸다. " 때가 되면 네 본체엔 돌아갈 수 있을거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 "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원래 살던 곳이요. " 안스륨은 당황했다. " 여기로 오기전, 그러니까 네가 환생해서 살던 곳 말이냐? " " 네. 부모님도 거기 계시고, 학교도 다녀야 하는데... 갑자기 이런 곳으로 와버려서는. " " ...그렇군. 하지만 여기가 원래 네가 살아야 할 장소야. " 안스륨은 아스가 전의 그 곳을 그리워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트리옌에게 도무지 좋다고 할 수 없는 환경. 트리옌의 생존엔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가 필수적이다. 트리옌에게서 맑은 공기가 뿜어져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 공기는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모라고. 돌아갈 방법이라고. 그는 자신이 아스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을 뻔 했다. 그만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만 집중해, 아리스타인지 아닌지의 의문에만 사로잡혀 그런 부분은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왔다-는 것은 아스 본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아스는 떠나온 것이었다. 원래 자신이 살던 곳에서. 안스륨은 어젯밤과 같은 불안감과 불쾌감이 스미는 것을 느꼈다. " ... 돌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돌아가더라도 오래 못 살 것이 뻔해. " " 네? " " 네 꼴을 보아하니 태연히 육식을 하고 살았겠지. 게다가 이곳만큼 트리옌이 살기 좋은 곳이란 없어. 나쁜 환경 역시 트리옌을 죽이는 독이다. 돌아갈 생각은 버리는게 좋아. " 아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랬던건가. 어릴적부터 유달리 몸이 약하고 아팠던 자신. 결국 인간이 아니었다는 소리인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 다 먹었으면 일어서도록 하지. 서두르는게 좋아. " 둘은 자리를 정리하고 길을 나섰다. 끝도 없는 숲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길을 걸었다. 숲을 따라 걸으며 산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한참동안 걷다가 물소리를 들었다. " 계곡이 있나보군. 좀 쉬었다가 갈까. " 둘은 계곡으로 내려갔다. 나무 사이로 숨은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큰 돌과 자갈들 사이로 물은 흘렀다 떨어졌다 시간을 담아 강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계곡으로 내려가자 차갑고 시원한 물에 차갑게 식은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안스륨은 계곡의 바위 근처에 걸터앉아 땀을 닦았다. 오래간만에 오래 걸었더니 조금 힘들었다. 용족은 원래 날아다니는 종족이다. 아니면 마법으로 텔레포트를 쓰면 된다. 걷는 일은 되려 날아다니는 것 보다 더 많은 힘이 들었다. 아스는 그런 안스륨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 힘드세요? " " 조금. " " 의외로 체력이 약하시네요. 나도 괜찮은데... " 안스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이야기 했다. " 그거야 당연하지. 너는 트리옌이잖아. 땅 위에서라면 지치지도 않고 얼마든지 걸을 수 있다. " " 예에? 하지만 전 몸이 약한걸요. 툭하면 쓰러져서 어머니가 걱정을... " " 그건 나쁜 환경에 있어서다 이제부터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걸. 밤에도 걷자고 보채지나 말아라. 원래 본체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인지 트리옌만큼이나 쏘다니고 걸어다니길 좋아하는 녀석들은 없으니까. " " 예에? " 안스륨은 마구마구 복잡해지는 아스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 왜? " " 아뇨. 그냥... 아까 전까지도, 길을 걸으면서 죽 생각했어요. 도대체 나는 이렇게 낯선 곳에 떨어져서는, 갑자기 돌아왔다-라니. 조금 무섭고, 외롭기도 하고 쓸쓸하고 그랬어요. 하지만 이제 아프지도 않고, 어디든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갈 수가 있다니 기분이 좋아졌거든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기분이 좋아져도 되는건가 싶어서." " 그렇군. " " 이제는 조금 들뜨기도 해요. 언제나 공해니 매연이니, 나쁜 공기나 소음 따위에 시달리지도 않고 이렇게나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에 서 있다는게 기쁘거든요. " 아스는 눈을 감으며 햇빛을 얼굴로 받았다. 그는 미소를 띄우며 팔을 벌리고 말했다. " 줄곧 이곳에서 살아온 당신은 모르겠지만요, 나는 이곳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노예상단으로 끌려가 고약한 짓도 당했지만 어쩌면 돌아온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보세요. 햇빛도 이렇게나 좋고, 공기는 파묻히고 싶을만큼 맑아요. 어디선가 새 우는 소리도 들려오고, 물은 차갑고 시원하고 달콤해요. 오후의 한가운데, 우리는 숲속에 서 있어요. " 아스가 그렇게 말하자, 주변이 변하기 시작했다. 햇살은 눈부시게 떨어지고, 물방울들이 공기 중으로 흐트러지며 빛난다. 바람이 숲을 스치고 지나가면, 숲에서만 들을 수 있는 파도 소리가 난다. 아스의 주변으로 맑은 파문같은 것이 흩어졌다. 예민한 안스륨은 그가 옅은 빛을 발하며 어떤 기운이랄까 공기랄까 그런것이 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숲이 넘치는 생명의 기운을 받아 술렁이기 시작했다. 들어오면서 안스륨과 아스가 밟아 숨죽였던 풀들도 고개를 쳐들고, 말라있던 이끼가 이슬을 머금고, 웅크렸던 씨앗들이 새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아스가 무의식중에 트리옌의 힘을 쓰는 것이다. 그 변화는 강력해 눈에 보일 정도라서, 안스륨 조차도 그 영향을 받는 듯 했다. 길을 오는 내내 그를 괴롭혔던 어지러운 마음이 가라앉고 의문으로 흐려졌던 눈동자가 틔워졌다. 수백년을 헤매어 찾아낸 소년이다. 눈을 감고 햇빛을 받아 빛나는 저 모습이, 그의 눈동자에 이렇게나 빛나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없다. 자신은 새 희망을 얻었다. 모든것을 새롭게 다시 시작 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꿈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아리스타가 저기에 있고, 무스카리도 여기에 있었으며, 그들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향긋한 바람만이 스칠 뿐인. 안스륨은 행복했다. 너무나도 행복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시각. 축복의 숲에서는 일군의 무리들이 축복의 성을 빠져나와 도시밖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정령을 몸에 두른 그들의 걸음은 누구보다도 빨랐다. 가장 선두에 선 사람은 눈부신 금발을 휘날리는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 트리옌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 카멜리아였다. 그 바로 뒤를 따르는 사람은 상아색 머리카락의 월 저먼더. 그는 펜 오키드의 첫번째 묘목인 또 다른 글로리 나이트였다. 그 뒤로 세명의 파인 나이트와 다섯명의 윌리암 나이트가 따르고 있었다. 카멜은 그 어느때보다 빨리 내달리고 있는 자신을 알면서도 다리가 느리게 느껴져서 답답했다. 지금 이 시각 그 분과 무스카리가 뭘 하고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왔다. 그는 무표정한 월을 잠깐 쳐다보았다. 자신보다 한참의 다음 세대인 저 젊은 나이트는 펜이 직접 손으로 길러낸 몇 안되는 나이트들 중에서도 처음이었다. 자신이 아리스타타에게 직접 길러진 첫번째 묘목이듯이. 물론 그만큼 강할 것이고 많은 전력이 될 터였다. 하지만 카멜은 웬지 그의 무표정에서 불안감을 느꼈다. " 그래요? 와-! 흰색 가지라니. 상상이 안가네. " " ... " " 왜요? 계속 말해주세요? " 안스륨은 앞서 가고 있는 아스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어느샌가부터 기운을 차린 것인지 처음에 겁을 먹었던 기색도 어디론가로 가 버리고, 그저 걷는 것만으로는 성에 안차는 듯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이리 뛰었다가, 저리 뛰었다가 하면서 쉴 새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피곤하지도 않느냐는 질문에, 도대체 얼만큼 움직여야 피곤해지는지 궁금해서 계속 움직인다고 대답했다. 이 녀석. 이렇게 말괄량이 였나- 하고 안스륨은 남몰래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 잎사귀는 은색이라고 하지. 바람이 불면 회청은빛으로 빛난다고 했다. 에린지움의 지킴이인 펜 오키드의 머리카락 색도 그와 동일하다. " " 머리카락 색이 그렇단 말이예요? " 아스의 눈이 휘둥글해졌다. " 그래. 아주 아름다운 색깔이지. " " 그래요? 안스륨은 본 적 있나요? " " ... 아름다운 색깔일거다. " " 본 적 없나요? " " 아니. 펜 오키드의 머리카락은 본 적 없어도. 아리스타타의 머리카락은 본 적 있다. " " 아리스타타? " 안스륨은 잠시 망설였다. 이 이야기를 해도 좋을까. 혹여나 기억이 돌아오거나... ... 아니. 아니다. 몇번이나 환생을 거듭해 잃었을 기억이다. 안스륨은 아스가 아무것도 몰라서 기쁜지 슬픈지 잘 알 수 없었다. " 그래. 아리스타타 칼미아. 에린지움의 걸음이다. " " 그건 아까 들었었죠? 걸음이란 건 본체인 나무말고 육신인거... " " 맞다. 펜 오키드도 그녀와 같은 빛깔이라고 했다. " " 어떤 빛인지 감도 안 잡히네. " 안스륨은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 햇빛 아래에서는 눈부신 은색이다. 계곡물이 튀어오를때 빛나는 색깔과 같지. 달빛 아래에서는 부드러운 청은빛이다. 숲 속에서는 바람이 불때의 나무와도 같은 빛깔이지. 아주 아름답다. " " 그래요? 그럼 그녀도 트리옌들이 산다는 축복의 성에 있나요? " " 아니. " 안스륨은 되도록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려 노력했다. " 죽었다. " 하지만 아스의 얼굴이 당황하는 것을 보니 틀린 모양이었다. 어색함을 느꼈는지 그는 고개를 돌리고 앞장서서 걷더니만 말했다. " 안스륨은 그 아리스타? 아리스타타라는 분과 굉장히 친했나봐요. 그녀가 죽어서 슬펐겠군요. " " 아니. 나같은 수인족이 그녀와 친할리 없지. 먼 발치에서 조금 본 것 뿐이다. " " 하지만 목이 메어서 제대로 말하기도 힘들어 했잖아요. 가까운 사이였을거라고 생각했는데... " " 아니. 아리스타타는 모든 트리옌과 그를 따르는 왕국의 희망이고 기둥이었다. 죽어서 슬픈게 당연하지. " 아스는 더이상 아리스타타에 대해 묻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잠깐을 흐르고, 아스는 애써 화제를 바꿨다. " 저, 수인족에 대해서 말해줘요. 안스륨은 수인족이라고 했죠? 그래서 그렇게 오래산거라고. " " 그래. " 안스륨은 편의상 아스에게 자신이 수인족이라고 말했었다. 굳이 어려운 거짓말들을 하기 보다는, 그냥 그 전쟁을 경험했던 오래사는 수인족이라고. 게다가 그의 지금 머리색이 검은색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꾸해뒀다. 검은색은 수인족외에는 찾기 힘든 빛깔이기 때문에. 트리옌은 주로 밝고 옅은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졌고, 용족은 아주 강렬한 색채의 머리카락을 가진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래산다고 해도 수인족은 이백여년밖에는 못 산다. " 수인족은 작은 일족을 이루어 무리지어 산다. 하지만 나처럼 혼자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수인족은 외양도 아주 각양각색이고 사는곳도 각양각색이다. 대표적인 수인족으로는 인어족이나, 버킨족이 있다. 전쟁이 일어났을때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트리옌들이지만, 수인족들도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일족끼리만 사는 소수민족이기때문에 전쟁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었지. 노예로도 많이 팔렸고. 그때 멸족된 수인들도 많다. " " 그렇군요... 어! " 숲의 아래쪽, 조금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 땅에 반쯤 파묻힌 듯한 여러 구멍들이 보였다. 특이한건 그 구멍들마다 문짝이 달려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꼭 집인 것 마냥, 그 구멍의 근처에는 울타리도 쳐져있고 정원도 있었다. " 저게 뭐예요? " " 수인들의 마을이다. " " 마을이예요? " " 그래. 두빈족들의 마을이다.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면 되겠군. " 아스는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 저, 마을에 내려가 보기는 처음이예요. 제대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처음이구요! " " 잠깐. " 안스륨은 아스를 붙잡고 작게 주문을 외웠다. 아스의 눈동자가 어두워지며 검은빛으로 보였다. 하지만 트리옌으로 돌아오고 있는 몸이라 마법이 완전히 먹히질 않아, 햇빛에 따라 녹색으로도 보였다. 완전히 트리옌으로 돌아오게 되면 이제 이런 사소한 마법조차도 걸리지 않게 될 터였다. 안스륨은, 그때까지 밖에 시간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 뭔가요? " " 눈동자를 검게 해뒀어. 녹색 눈동자는 트리옌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꼴이니까, 이렇게 해두는 쪽이 여러모로 좋을거다. 다만 마법이 완전하지 않으니 햇빛을 정면으로 받으면 녹색으로 보일거니까 조심해. " " 마법이라구요? 헤에, 신기하네요. " " 가자. " 안스륨과 아스는 작은 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을로 내려가자 그... 집이랄까 구멍이랄까. 그런 것들 사이로 나 있던 길을 걷던 조그만 아이 하나가 안스륨과 아스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아스는 그 아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 저건... 저애는... 마치 쥐처럼 생겼잖아?! ' 아니, 쥐처럼 생겼다는건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 같다. 얼굴은 쥐처럼 생겼는데 코가 더 길다. 그리고 손이 넓적하고 길어 땅을 파기 좋은 모양이었다. 얼굴과 손, 발 고리를 빼놓고서는 감촉 좋아보이는 털로 감싸여 있었다. 하지만 안스륨은 태연하게 아이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 놀라지 말거라. 족장님께 손님이 왔다고 전해주겠니? " 아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는 쪼르르 길 사이로 사라졌다. 아스는 아이가 갔음에도 불구하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 마치 쥐처럼 생겼어요. " " 정확하게 말하면 두더지에 가깝지. 원래 수인족들은 어릴때는 짐승과 아주 흡사한 모습을 한다. 자라면서 점점 인간형에 가까워지지. " " 안스륨도 어렸을때는 저랬어요? 안스륨은 무슨 수인족이예요? " 안스륨은 잠깐 고민했다. " 나는 까마귀족이다. 성이 레브록이지. 같은 일족은 모두 같은 성을 가진다. " " 그렇군요. 그래서 그렇게 머리색이나 눈동자가 까만거군요. 그럼 지금 저도 겉으로 보기에는 안스륨과 같은 일족으로 보이겠네요? " " 그렇지. 그러니 누가 이름을 물으면 아스포델 레브록이라고 말해야한다. " 아스는 어쩐지 좀 부끄럽고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여태까지의 안스륨은, 자신을 구해주긴 했지만 단지 자신이 트리옌이라서 구해준거고, 어쩔 수 없이 보호한다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말이나 행동에서 단순히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못할만큼 아스를 위해주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확실히 보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스는 어쩌면 자신이 안스륨에게서 어색함을 버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믿을 사람이라고는 안스륨밖에 없는데도. 하지만. 그가 붙여준 이름으로, 그의 성을 따른다. 웬지 안스륨과의 확실한 접점이 생긴것 같기도 하고, 가족이 된 듯한 느낌도 들어 아스는 조금 기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조금있자 어떤 사람하나와 아까의 그 아이가 돌아왔다. 정말로 성인이 되면 인간형에 가까워지는지, 조그맣고 짧고 굵은 털이 많아도 확실히 사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엉덩이 사이로 길게 빠져나온 털없는 꼬리라던지가 사람 모습이 되어도 어딘지 두더지같다-는 느낌은 버릴 수 없는 모습이다. 그 수인족은 조금 경계하는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 굉장히 오래간만의 손님이군요. 산중이라 이곳에 들리는 분은 잘 없는데. " " 숲을 타고 이동중이기 때문에 그렇소. 안스륨 레브록이요. 하룻밤 신세질 수 없겠소?" " 그쪽 분은? " " 아, 예. 아... 아스포델 레브록입니다. " 아스는 이름을 말하면서 웬지 얼굴이 빨개졌다. 수인족은 이름을 듣자 표정을 풀면서 손을 내밀었다. " 그렇군요. 까마귀족 중에서도 레브록인 검은 까마귀분들은 아주 현명하고 조용한 분들이라 들었습니다. 저는 웰스 두빈입니다. 두빈족의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안스륨은 짧게 웰스와 손을 맞잡은 후 그의 안내를 따라 걸었다. 그 뒤를 아스가 따라 걸었고 아스의 뒤를 아까의 꼬마가 뒤따라 걸었다. 꼬마는 아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 왜 그러니, 꼬마야?; " " 아니. 레브록은 어른 까마귀도 이렇게 조그만가 해서. 저 레브록 어르신은 큰데 말이야. 혹시 여자 레브록이야? " " 으음~ 으음~ 그게 아니라 형아가 어렸을때 잘 못 먹어서 그렇단다. " " 이상하네. 레브록들은 머리카락도 길다고 그랬는데 형아는 머리도 짧고. " " 으음~ 으음~ 그건 역시 못먹어서 형아는 머리카락이 길게 못자라요. " 아이는 피식 웃더니 투덜거렸다. " 적당한 핑계가 그것밖에 없어?? 나도 어리지만 그쯤은 알아. 일족이 저 어르신이랑 결혼을 반대해서 도망쳐 나온거지? 우리 엄마가 두명씩 짝지어 따로 다니는 수인족들은 다 그런거라고 했단 말이야. " 아스는 맹랑한 꼬마의 말에 웬지 발끈했다. " 그게 아니란다 꼬마야. 형아가 저 형아보다는 작지만 어딜봐서 여자란거야? " " 나 꼬마아냐! " 그때 앞장서던 웰스가 땅으로 들어가는 듯하게 보이는 문을 열고는 꼬마를 꾸짖었다. " 조용히하고 너는 얼른 집에 돌아가! 엄마가 기다리신다! " " 쳇. " 꼬마는 길로 뽀르르 사라졌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흙으려 다져진 벽과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아래에 불빛이 있는 듯 희미하게 밝았다. 그야말로 두더지의 땅굴이라 아스는 신기해서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흙벽은 단단히 다져져 있었지만 나무뿌리가 벽에 튀어나와 있기도 했고, 축축하면서 보드라운 듯한 흙냄새가 났다. 계단을 다 내려가 조금 넓어진 땅굴을 걷자 안에 동그랗고 아늑한 방이 나왔다. 방의 천정에 동그란 돌이 박혀있었는데 빛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가운데 동그랗게 깔개가 깔려있고 동그란 탁자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벽가로 흙을 다져만든 선반이나 나뭇잎을 엮어만든 바구니 따위가 있었다. 그리고 방의 건너편으로 또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길인 듯 굴이 나 있었다. 방의 탁자에 한 할머니가 앉아있었다. 조그맣고 쪼글쪼글한게 꼭 건포도같은 모양새였다. 그녀 역시 치마밑으로 길게 꼬리가 빠져나와 있었고 탁자위에 늘어놓은 종이들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웰스가 갑자기 소리쳤다. " 족장님!!!!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 족장은 입을 몇번 오물오물 거리더니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 홀... 이놈아아~ 그렇게 크게 말 안해도 들린다. 괘씸한 노옴. 집 무너지겠네... " " 이쪽으로 앉으시죠. " 웰스는 우리를 탁자자리로 안내하고 자신도 족장의 옆에 앉았다. " 저희 족장님인 티오 두빈이십니다. 연세가 많으셔서 귀가 잘 안들리시거든요. 갑자기 소리쳐서 놀라셨지요? " " 아닙니다. 만나뵈서 반갑습니다. 안스륨 레브록입니다. " " 안녕하세요. 아스포델 레브록입니다. " " 옹냐 옹냐~ 인사는 됐어... 홀홀. " 아스가 보기에 할머니의 귀는 멀쩡해 보였다. 아스의 생각을 눈치라도 챈 듯 웰스가 어색하게 웃더니 말했다. " 저, 사실 잘 들리시는 듯 해 보여도 엉뚱한 대답을 자주 하셔서... " " 그래그래 알았어, 점 봐 달라고? 누구부터 볼꺼야?? " " 저런 식으로요. 족장님!!!! 아무도!!!! 점 봐 달라고!!!! 안했어요!~~~ " " 떽끼 이놈!! 소리 안쳐도 잘 들린다니까!! 네가 이 분들 점 보러 왔다고 했자녀!! " " 아니라니깐요!!! 이분들은 그냥 하룻밤 묶어 가실 거라니까요!!! " " 뭐어?? 네가 대신 봐준다고?? 네놈이 점을 볼 줄이나 아냐!! 괘씸한 노옴~ " 좁은 토방에서 두명이나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니 귀가 다 먹먹했다. 안스륨도 마찬가지였는지 조용히 웰스를 제지했다. " 됐습니다. " " 죄송합니다. 피곤하실텐데... 저희집에서 묶으세요. 전 먼저가서 마누라에게 준비를 하라 할테니, 그때까지만 족장님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연세가 많으신 분이라... 저희 족장님 점 보는게 유일한 취미라서요. " " 알겠습니다. " 웰스는 왔던 길로 사라졌고, 족장이 다시 물었다. " 누가 볼껴? " 아스가 안스륨을 쳐다보며 말했다. " 안스륨이 볼꺼예요? " " 아니. 나는 됐어. 너나 봐. " " 음, 저도 미신같은건 잘 안 믿는데. " " 미신이라니? 이런 점은 다 맞다. 다만 점의 내용을 선택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 " 그게 무슨 소리예요? " " 그러니까 원하는 내용, 원하는 시간의 것을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무작위지. " " 그럼... 결국 들어도... " " 그래. 하지만 내일 세수할거라는 이야기든 미래에 죽을거라는 이야기든 맞긴 맞는거니까. " 아스는 의심쩍은 눈으로 족장에게 다가앉았다. 족장은 아스를 쭉 훑어보더니만 손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종이들을 뒤섞기 시작했다. 잘 보니 그것은 그림이 그려진 카드였다. 뒤섞은 카드를 족장은 아스에게 내밀었다. " 자, 이중에서 뽑아라. " 아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가운데에 있는 카드를 뽑아냈다. 뽑아 그림을 보니 어떤 식물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꽃같기도 하고, 열매같기도 한 갈색의 몽우리가 달린 것이었다. 몽우리의 끝에 가시같은것이 달려있어 얼핏보면 검은 나비같기도 했다. 내가 그것을 주자 족장이 말했다. " 멜로우로군. 가까운 미래건 먼 미래이건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웰스네 집은 저 토굴을 따라 문을 나가고 나서 두번째 오른쪽 통로에 있는 곳이야. 길 잃어먹으면 찾기 힘드니까 조심하고. " " 그게 끝인가요? " " 그래~ 뭐 불만이냐? " 아스가 이 세계로 갑자기 오게 되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건 당연하다. 알고 있는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아스는 맞긴 맞지만 보는 보람이 없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족장에게 인사를 하고 안스륨과 아스는 그녀가 가르쳐준대로 문을 나가 두번째로 있는 오른쪽 통로에 있는 문에 노크했다. 안에서 웰스가 나와 둘을 반겨주었고, 젊은 아내 역시 나와 둘을 반겼다. 그들에게 이끌려 식탁에 앉은 아스는 여태껏 제대로 먹지 못한 터라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육식은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웰스는 쑥쓰러운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 죄송합니다. 하도 오래간만의 손님이라서, 딱히 다른걸 준비할 수가 없었어요. 고기라도 대접해야 하는건데... " " 아니예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너무 맛있는걸요! " 아사의 말에 아내가 미소지었다. 곧 웰스가 안스륨을 보면서 질문했다. " 그런데 두 분은 어떤 연유로 일족에서 나와 두분이서만 길을 가시나요? " 아스는 아까 그 꼬맹이가 말한 것이 생각나 음식이 목에 걸릴 뻔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안스륨이 불쾌해할지도 모르는데... 아스는 조심스럽게 안스륨의 눈치를 살폈다. 안스륨은 빵을 집으며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 사랑의 도피중입니다. " " 푸------욱!!!!! " " 아니, 괜찮으세요?? " 아내가 황급히 물을 가져다 주었고 아스는 황급히 씹던 음식이 다 튄 입을 가렸다. 하지만 당황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스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안스륨을 향해 소근 말했다. " 아니, 무슨 소리예요?? " " ... 그렇게 해두는게 편하잖아. " 웰스가 허허헛 웃으면서 말했다. " 쑥쓰러워 하시기는. 다 이해합니다. 저도 한때는 아내와 결혼하는데 일족의 반대가 있어서 그런 생각도 했었으니까요. 단 둘이서 일족을 떠나 길을 가시니, 아마도 그러리라 짐작은 했었습니다. " " 힘내세요. 힘들고, 정착할 곳을 찾기 어렵겠지만 사랑의 힘은 위대하니까요. " 아스는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생각했다. ' 제 어디가 여자같다고 그러세요?!! ' 아스는 부부가 안내해 준 방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투덜거렸다. " 대체 우리의 무얼보고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게다가 안스륨까지, 사랑의 도피라니 무슨 생각이었어요? " " ... 거짓말은 아니니까. " " 뭐라구요? " " 아니다. 그렇게 화낼일이 아니지 않아. 수인족은 특정한 종족들을 빼놓고는 일족과 떨어져 혼자 다니는 일이 아주 드물다. 특히 전쟁후에는 더 그렇게 되었지. 혼자 다는 수인족은 사냥 대상이 되니까. 그래서 혼자나 둘이서 다니는 수인족은 잘못하면 범법자나 도망 노예로 착각당하기 쉬워. 사랑의 도피라고 해두는 쪽이 제일 나아. 특히 너는, 아직 등에 노예 인장이 남아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 아스는 놀라서 등을 더듬었다. 더듬는다고 손이 가 닿을만한 자리가 아니지만. " 아프지 않아서 안 찍힌 줄 알았는데... " " 상처는 내가 치료했지만 인장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마 트리옌으로 완전하게 돌아가게 되면 없어질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남에게 보이지 않도록 해라. " " 그- 런 흉터라니 신경쓰이네요. " 안스륨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 어차피 네겐 보이지도 않잔아. " " 그렇긴 하지만. " 아스는 그동안 입고 있었던, 자신에겐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컸던 안스륨의 옷을 벗었다. 커서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듯 했다. 아스는 벗은 등을 손으로 더듬어 흉터를 확인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혼자 손이 닿아보려 끙끙하다가 아스는 문득 안스륨이 보면 상당히 웃긴 꼴이라는 생각이 들어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정말로 웃겼었는지 안스륨은 아스가 하는 양을 말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부부는 안스륨과 아스가 사랑하는 사이라고 완전 오해한 것이 틀림없는 듯 안내해준 방에는 침대가 하나밖에 없었다. 아스는 아직은 사이가 좀 서먹한 안스륨과 한 침대를 쓰는 것이 좀 어색했지만 그렇다고 둘 중 하나가 바닥에서 자자고 제의하는 것도 이상할 듯 싶었다. 침대는 충분히 넓었기에. 뭐, 어차피 둘 다 남자니까. 아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침대에 누웠다. 그때까지도 안스륨은 아스를 쳐다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 안 자요? 피곤할텐데. " " ...아니. 자야지. " 아스가 눈을 감자 안스륨이 옷을 벗고 불을 끄고 옆자리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불이 꺼지자 아스는 졸음이 몰려 오는 것을 느꼈다. 또 그 꿈을 꾸지 않을까 궁금하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요즘은 그 꿈을 꿀때마다 내용이 진행이 되니까. 아스는 애써 꿈에 대해 잊으려고 하며 잠을 청했다. 불을 끄자 빛이 들어오지 않는 토굴에는 암흑만이 가득찼다. 안스륨은 곧 고르게 색색 거리는 아스의 숨소리를 듣자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아스를 대하고 나서는 모든게 도무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늘어났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안스륨은 아스가 무방비하게 같은 침대에서 잠든 이 상황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알 수 없었다. 예전은 아리스타타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다. 하지만 저렇게 야외가 아니라고 옷까지 벗고 잠든 아스를 옆에 두고 잠들 수 있을리 만무한 상황은 그리 기뻐할만한 것은 아닌 듯 했다. 어둠속에서 안스륨은 문득 떠오른 아리스타타를 생각했다. 그녀는 밤새 시달려 피곤한 몸으로도 절대로 자신의 옆에서 잠드는 일이 없었다. 기절했다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 한은 그러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를 품에 안고 잠들어도 깨어보면 아리스타타는 침대위에 없었다. 항상 창가에 올라앉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창문을 열어놓고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드높은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죽어도 무방비하게 잠들 수 없을만큼 자신이 싫었기 때문일까. 아마 둘 다 였겠지. 안스륨은 조용히 돌아누운 아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용안은 어둠속에서도 아스의 부드럽게 휜 등과, 그 등의 날개뼈에 찍힌 인장을 쳐다볼 수가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 인장을 더듬었다. 아스가 깨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깊이 잠든 듯 기척이 없었다. 봉오리를 활짝 벌린, 사람을 유혹하는 듯 조잡하고 천박한 장미의 인장. 안스륨은 그곳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입맞추었다. 이 자욱이 남아있는 한은, 에린지움이 아닌 완전한 자신의 것이다. 아스는 잠에서 어렴풋이 깨었다. 아스는 끌어안은 배게에 얼굴을 비비적 문지르면서 일어나기 싫다고 생각했다. 이렇게나 상쾌하고 쾌적하고 포근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일이 굉장히 오래간만인 것 같았다. 요즈음은 계속 악몽이다 기절이다 해서 눈을 뜰 때 좋은 기분 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몰랐다. 그 전에도 몸이 약한 탓에 늘 머리가 무겁고 몸이 아팠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트리옌이기 때문이지마...는... 아스는 문득 끌어안은 배게(?)의 감촉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넓고 단단하면서 부드럽고, 뭔가 좋은 체취가... 아스는 번쩍 고개를 들고, 자기가 부둥켜 안고 비비적거렸던 배게가 안스륨이라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벽에 가 몸을 붙였다. 안스륨이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스는 어색함을 무마하기 위해 급히 말했다. " 아하하! 아, 안녕하세요! 아니지, 잘 주무셨어요? " " 아니. " " 에? " " 누가 그렇게 앵겨붙어대는데 잘 수가 있어야지. " " 아앗! 죄송해요!! " 아스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사과했다. 자기 잠버릇이 그렇게나 나빴던가. 물론 안스륨은 다른 의미로 이야기 한 것이지었마는 아스가 알 리 만무했다. 안스륨은 밤새 잠을 못 잔 탓인 듯 조금 나른한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팔이며 어깨, 근육이 얇게 붙은 가슴이 드러나며 아스는 그 모습이 굉장히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아스는 새삼 안스륨이 미남이구나... 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 동안 눈여겨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깊게 들어간 눈이나 날씬하게 뻗은 코나 날렵해뵈는 턱이나 화려하지 않아 한 눈에 들어오는 얼굴은 아니지만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완벽하게 짜여진 얼굴이었다. 아스는 새삼 감탄을 하며 안스륨이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는 것을 바라봤다. 안스륨은 아스가 계속 벽에 붙어 누워있자 왠지 퉁명스런 어조로 말했다. " 얼른 일어나. 갈 길이 바쁘다. " " 아, 에. 일어날게요. " 라고 말은 하면서 아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안스륨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아스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사실은, 보통 남자들에겐 자주 있는, 아스에게는 그다지 없었던 '아침의 반응' 이 오래간만에 무척이나 기분좋게 잤던 탓인 듯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뭐 남자끼리라지만, 왠지 저렇게 잘생기고 왠지 무뚝뚝해서 카리스마 있는 안스륨 앞에서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아스는 안스륨이 나가면 얼른 일(?)을 마치고 나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스는 제발 나가달라는 간절한 눈초리로 안스륨을 바라봤지만, 안스륨은 그걸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 했다. " 어디 아픈가? " " 아니요오... " 아스가 속으로 비명을 삼키든 말든 안스륨은 이불을 들춰보며 아스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 열은 없는데, 너무 무리한... " 아스가 결사적으로 이불을 붙들고 늘어지자, 안스륨이 이상하다는 기색으로 이불을 꼭 붙드는 바람에 손마디까지 새하얗게 드러난 손을 바라보았다. 안스륨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 뭘 숨기는 거야? " " 에엣? 아뇨! 숨기긴요 뭘... 제가 뭘 숨길게 있다고... " 아스의 소리없는 사정을 무시한채 안스륨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불을 확 걷었다. " 으아악! " 이불을 너무 꼭 붙들고 있었던 탓에 이불이랑 같이 딸려 침대 밖으로 나가떨어질뻔 한 아스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적나라하게 그 민망한 모습을 안스륨에게 보이고 말았다. 아스는 목까지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쳤다. " 으... 모, 몰라욧! 17세 청소년이 숨길게 뭐가 있겠어요?!! " " 피식. " 아스는 순간 입을 벌리고 멍해졌다. 지금, 저 표정없고 무뚝뚝한 안스륨이 피식- 하고, 자신의 이런 꼴을 비웃었다?! 도대체 어디에 포인트를 줘서 멍해져야 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안스륨이 웃은것에 멍해져야 하나? 아니면 저 멋진 남자에게 이런 꼴을 보이고 말아 비웃음을 샀다는데 멍해져야 하나? 안스륨은 아스가 멍해지든 말든 아스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끌어당겨 무릎에 앉혔다. " 에엣? " 머리카락에서 부드러운 햇빛내음이 나는걸 느끼며 안스륨은 활기찬 아침을 맞아 기상하고 있는 그것에 손을 내밀었다. " 으앗?! " 버둥거리려는 아스를 붙잡아 허리를 감고 그것을 훑어주자 곧 등이 움찔, 하고 굳었다. 곧 음성이 숨죽인 달콤한 신음소리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안스륨은 애써 입을 다물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 읏... 우... 음... ... 앗, 앗! 아, 저, 놔줘요, 할 것 같단 말이에요! " " 해. " " 소, 손이 더러워... " 안스륨은 입 다물라는 듯 아스의 목덜미를 꽉 깨물었다. " 아... 앗... !! " 목줄기가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곧 손 안에 뜻뜨미지근 한 것이 가득 찼다. 아스는 쾌감의 여운이 아직 남은 것을 느끼고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엄청난 창피함이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 아, 저, 저어... 죄송...해요. " " 아니다. 얼른 나가서 씻는게 좋겠어. 토굴이라서 제대로 씻기는 힘들지만 아까 주인이 건너방에 물과 대야를 가져다 놓더군. " 안스륨이 아스를 놓아주자 아스는 후다다다닥 건너방으로 사라졌다. 안스륨은 품에 안았던 무게감이 사라지자 웬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며 손에 묻은 체액을 바라보았다. 체액에서 짙은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를 낳지 않는 트리옌으로써는 성에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들 자신은 잘 못 느끼지만 피나 수액이 놀라운 치유력을 가진 약이 되는 트리옌의 몸에서 나오는 체액은 강렬한 미약이다. 그것이 전쟁 한 때 일부 트리옌을 노예로 만든 결정적인 이유였다. 침이나 눈물은 물론이거니와 안스륨의 손에 묻은 그것도 그랬다. 머리가 아찔해지는 향기였다. 안스륨은 그 향기에서 아리스타를 짓눌렀었던 수많은 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음이 한없이 우울해지고 있었다. 안스륨은 그것을 달래기기라도 하 듯 아스의 투명한 체액을 천천히 핥았다. 아스는 길을 떠나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말없이 조용하고 얌전하게 걷고 있었다. 대신 아스는 아주 눈에 띄게 힐끗 힐끗 안스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묵묵히 걸을 따름이었다. 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마치 마치, 혼자 마스터베이션이라도 하다가 어머니에게 들키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아닌가!! 아침부터 얼토당토 않은 상대를 해줬다고 웃기게 생각하겠지. 아스는 점점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때 갑자기 안스륨이 멈춰섰다. 아스가 ?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안스륨이 눈에 띄게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 나와. " 그러자 뒤에서 손이 쑥 뻗어나오더니 안스륨을 덮쳤다. " 여어-! "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에 놀라서 아스가 쳐다보자 안스륨을 뒤에서 끌어안은 사람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 안녕? " " 에... " 굉장한 미남이었다. 목덜미를 감은 머리카락은 보라색이고, 눈동자는 시릴만큼 차가운 푸른색이었다. 게다가 키가 큰 안스륨과 비슷할만큼 훤칠했다. 안스륨과는 달리 만개한 꽃처럼 한눈에 확 들어오는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비인간적으로 보일만큼 화려한 외모... 안스륨은 그의 팔을 떨어내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 무슨 일이지? " 그는 호들갑스럽게 몸을 꼬고는 말했다. " 무슨 일이라니!! 그렇게나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네가 간신히 나왔구나 싶어 이렇게나 오래간만에 만나러 온 나를 보고 무슨 일이라니! " " 시끄러워. " 안스륨은 그를 무시하고는 아스를 잡아끌며 말했다. 안스륨은 그가 아스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봐 불안했다. 그는 취미가 나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생글거리며 아스옆에 따라붙더니 말했다. " 드디어 찾았나보네? 이 애가 환생체야? 아직 녹색눈이네? 너 이름이 뭐니? " " 에에... 아스포델... 레브록요. " 검은눈으로 보이게 해놨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아봤을까 궁금해하며 아스는 주저주저 레브록이라는 가짜성을 대었다. 남자는 킬킬 웃더니 자기 소개를 했다. " 그것 참 낯 뜨거운 이름이네. 나는 레제다야. 레제다 튜베로즈야. 그냥 레지라고 불러. " " 아, 예. 전 아스라고 부르세요. 저어, 그런데 안스륨과 아는 사이세요? " " 안스류움? " 레지는 오호라~ 하는 듯한 시선으로 안스륨을 위아래로 훑었다. 무려 그 시선에 기분이 나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안스륨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 입 다물어. " " 꺄- 꺄- 무서워라.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면 너어무 무섭잖아! " 말하는 자기가 그르다. 안스륨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이 놈은 무시가 최고이자 최선이고 유일한 방책이다. 아스가 옆에 있는데 살기를 흩뿌려 쫓아낼 수도 없고 설사 진심으로 상대한다고 해도 자신의 시선을 눈으로 받아낼 수 있는 몇 안되는 놈들 중의 하나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레지때문에 안스륨은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이렇게나 나무가 많은 숲에서는 무섭게 쫓아 올 카멜의 기척을 읽어낼 수도 없는데다 레지까지 가세를 하니 피곤하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났다. 레지는 친한 척 아스의 어깨에 팔을 올리더니 떠들기 시작했다. " 네가 생각해도 너무 하지 않니? 그간 아무런 연락도 없이 틀어박혀 있다가 나왔으면 나왔다고 연락이라도 해야지! 인사는 커녕 여기까지 맞으러 온 사람을 이렇게 박대하다니! 너도 너무너무 불쌍하다. 저런 무시무시한 남자랑 있어야 하다니! 나같은 사람은 목이 컥! 막혀 죽을거야. " " 저어, 저, 레지님은 안스륨하고 많이 친한가봐요? " " 친하다 말다. 네가 생각해도 나처럼 사교적인 성격의 사람과 저런 남자랑 친하다니 의문이겠지만, 어린시절을 함께 한 사이니 친하지. 솔직히 나같이 마음 넓은 사람이 아니면 누가 저런 사람에게 살갑게 대해주겠어! 봉사야 봉사. " " 그러세요? 친구인가요? " 레지는 생글생글 웃더니 안스륨에게 물었다. " 무슨 사이라고 할까? " " 그냥 아는 사이다. " " 응! 그냥 아는 사이야. 보시다시피. 내가 충고 하나 하겠는데 얼른 이 남자랑 떨어져 있는게 좋아! 정신건강에 안 좋거든. " " 에, 하지만... 저는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도 안스륨말고는 믿을만한 사람도 없는데요. " " 꺄-꺄- 몰라몰라, 안스륨, 치사해라아아아~ 이런 상황을 이용하다니, 나뻐! " " 입 닥쳐. " 안스륨은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으르릉 말했다. 레지는 빙긋빙긋 웃더니 말했다. " 정말? 나 조오기 오다가 그 녀석 봤는데. " " 뭐? " " 아-! 오래간만에 봐도 너무 멋있었어용 카멜군! 빛나는 금발머리에 표정은 또 어찌나 비장한지! 트리옌들이 우르르 모여있으니 아아주 눈이 즐겁던데. "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숲의 좁은 길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레지는 모습을 감췄다. " 아! " 아스는 그 중에 선두에 선 금발의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때 마주쳐서, 자신을 데려왔던 그 남자다! 왜 자신을 여기로 데리고 왔는지 궁금했었는데. 그때 누군가 나타나는 바람에 갑자기 이리로 끌려 온 것 같았는데, 남자를 틀림없이 본데다가 한참 얼굴을 쳐다보기까지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꿈속에 나왔던 그 남자와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꿈이 진행되면서 나타났었던 남자의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안스륨은 아스를 자신의 뒤로 보내고 이동주문을 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잡히는 마나의 양은 작았다. 안스륨은 인상을 찌푸렸다. 가장 우려했던 사태인 것이다. 카멜은 안스륨을 확인하고 검을 빼들었다. 다행히 그 분의 환생체는 무사한 듯 했다. 그는 동그란 눈을 뜨고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의아한 모습이었다. 카멜은 아스의 모습을 확인하자 여태까지도 내내 급했던 마음이 더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 그 분을 놔드려. " " 카멜... " " 비열한 놈.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이용해, 그렇게 곁에 두다니...!! " 안스륨은 묵묵히 카멜을 바라봤다. 카멜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찾아냈다. 수백년 많은 시공과 차원을 넘나들며 자신이 찾아낸 그 분 이었다. 그런데 막상 여기에 와서도 그 분은 무스카리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이 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사람에게 저 저열한 놈이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모르는 척 그 분과 함께 있는 것이다. 카멜은 분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안스륨이 조용히 말했다. " 나는 마법사가 아니다. 그때에도 나를 어찌 못했던 네가, 지금이라고 어찌할 수 있을 것 같나. " " 나를 우습게 보는거냐? 네가 감히 나를 우습게 보는거냐? 너를 몇 번이나 죽음으로 몰아갔던 나다. 네가 살아날 수 있었던 건 네 실력 때문이 아니라 네 비열한 성격 때문이었어!! " 분노에 찬 카멜의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아리스타타님이 자신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이용해서 벗어났었다. 아리스타타님을 지키기 위해 번번히 저 놈의 목숨을 빼앗지 못 했지만, 얻어진 것은 결국 싸늘한 시체가 된 그녀였다. 카멜은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 " " ...나 역시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겠다. " 안스륨은 중얼 말하고는 짐 속에서 칼을 꺼내었다. 카멜은 그 칼을 보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섬세하고 정교한 무늬의 손잡이. 안스륨에게 그 칼은 짧아보였다. 아리스타타가 자신의 심장을 찔렀던 칼이었다. 안스륨이 칼을 꺼내자 아스가 황급히 말했다. " 무슨 일이예요? 안스륨, 저 사람이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어요. 그런데 왜 싸우는 거죠? " " 절대로 다른 곳에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라. " 안스륨의 말에 카멜이 이를 뿌득 갈았다. " 네놈, 그 분을 방패삼을 생각이냐?! " " 아니. 지킬 생각이다. " " 네놈이 어떻게, 어떻게 감히 그 분을 지킨다는 소리를 하는건가!!! " 카멜이 분노에 찬 검을 내질렀다. 무서운 검격이 숲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이트들은 카멜과 무스카리의 결투에 경의를 표할 듯한 마음이었다. 카멜의 장검끝은 휘기라도 할 듯 우아하고 화려한 선을 그리며 무스카리의 품으로 날아들었고, 무스카리의 치밀하고 무거운 검술은 그러한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카멜도, 무스카리도 아스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아스를 지키기 위해 제 실력을 채 발휘못하고 있었다. 한 파인 나이트가 그 광경을 감상하고 있던 월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 카멜님을 돕지 않아도 되는겁니까? " " 저기 어디에 끼어들겠다는 거냐? 섵불리 끼어들었다가는 아리스타타님이 다친다. 때를 봐서 내가 저 분을 빼내어 이동할테니, 너희들은 그런때 무스카리가 따라붙지 못하도록 막아라. " 월은 차가운 시선으로 카멜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멜의 검술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설적인 글로리 나이트, 첫번째 묘목이자 트리옌의 영광 카멜리아. 저 숲의 저주인 무스카리의 절대적인 적수인 것이다. 지난 전쟁때 몇번이나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었던, 그 누구보다도 강하며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트리옌. 월은 무스카리의 피를 바라며 분노에 찬 파열음을 토하는 카멜의 검 끝을 가늠해보고 난생처음으로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자신도 첫번째 묘목이었다. 펜 오키드가 길러냈으며 그 역시 글로리 나이트로 카멜의 빈자리를 채워왔다. 하지만 항상 그가 들어왔던 것은 카멜의 명성이었고, 적수가 없을 그의 유일한 벽은 카멜의 이름 이었다.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를 찾아 수백년 글로리 나이트의 자리를 비워놓았건만, 되려 그랬기에 월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항상 생각했었다. 카멜이 돌아오면, 그와 겨루어 그를 뛰어넘어 자신의 가치는 자신 스스로가 만들겠다고. 그의 펜 오키드가 그랬으며, 그녀가 그랬기에 자신도 그래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저 검을 저렇게 받아낼 수 있을까... ? 월은 의문을 느끼는 자신에게 미약한 분노를 느꼈다. 펜 오키드조차도 그를 원했다. 그가 그녀를 지지하면 자신의 정당성이 더 확고해질 것이라고 믿는 그녀였다. 그것을 위해, 에린지움의 걸음이 되기 위해 펜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월은 그녀의 또다른 희생물이 될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이름의 뜻에 걸맞도록 아름다웠다는 그녀. 축복의 성에 걸려있는 초상화 속에서됴 그녀는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아름다운 여자였다. 펜 오키드가 소녀같은 아름다움을 지녔다면 아리스타타는 실로 우아했다. 그림같은 생기없는 얼굴이 그리 아름다울진대, 살아 걷고 말하고 웃는다면 누구든 그녀를 경애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에린지움의 걸음. 온화하면서도 치밀한 위엄을 모두 지닌, 전무후무한 은빛의 여왕, 숲의 절대자. 절대자라는 이름에 완벽했다는 그런 고귀한 여왕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몸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자신을 죽였던 무스카리의 뒤에 숨어 어쩔줄 몰라하는 겁에 질린 눈동자는 실로 평범하다 못해 보잘 것 없었다. 눈부신 은빛과 청록색의 눈동자는 절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평범한 모습. 검을 쓸 마음조차도 들지 않는 무기력한 소년이다. 월은 펜이 환생체의 귀환 소식에 과민반응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저런 초라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그 아리스타타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녀가 너무나도 대단했던만큼, 실망은 클 것이다. 아리스타타가 지금 저 지경이라는 것을 알면, 펜의 입지는 굳어질 것이다. 월 개인적으로는 굳이 저 소년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펜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자신은 저 소년을 죽일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쩌정!! 안스륨은 또다시 덤벼오는 카멜의 검을 아슬하게 막아내고 팔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초조하게 빠져나갈 기회를 살폈지만 분노로 검을 휘둘러오는 카멜의 앞에서 그런 기회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언뜻 연약해보이는 용모임에도 카멜의 검은 실로 강했다. 그리고 지금은 더 강해졌다. 안스륨은 그의 검을 막는 것이 벅찬 자신의 팔을 느끼며, 아리스타타를 잃은 후 카멜이 얼마나 마음속에 날을 세웠을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분했을 것이다. 미치도록 분했을 것이다. 아리스타타의 시신앞에서 그가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자신의 이름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백년을 오로지 희미한 아리스타타의 느낌만을 쫓아 떠돌며 그 날을 곱씹고 또 곱씹었을 것이다. 안스륨은 소리없이 검을 휘둘렀지만 그도 카멜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조차 한 번 받아보지 못했다! 카강! 안스륨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카멜의 검을 올려쳤다. 강력한 힘에 하마터면 카멜은 검을 놓칠 뻔 했다. 안스륨은 올려친 자세 그대로 돌아 다시 카멜을 내리찍어 왔다. 카멜의 화려함 검격에 비해 별 것 없어보이던 안스륨의 칼끝은 기회를 포착하자 검을 쪼개기라도 할 듯 내리쳐졌다. " 윽...! " 카멜은 재빨리 몸을 틀어 칼끝을 피했지만 머리카락이 일부 잘려나가는 것 까지는 막지 못했다. 금빛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가닥가닥 빛나며 먼지처럼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때였다. " 안스륨!! " 안스륨이 카멜을 공격하느라 잠깐 아스에게서 떨어진 사이, 월이 바람처럼 날아와 그를 안아간 것이다. 아스의 당황한 목소리에 안스륨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싼 나이트들의 모습이 보일 뿐, 이미 아스를 안은 월은 숲 저편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와 동시에 아스의 기척또한 가려져 구분해 낼 수 없게 되었다. 짧은 그 순간에, " 아ㅅ...! " 카멜의 검은, 수백년동안 그토록이나 원해왔었던 피를 머금고 환희에 떨었다. 안스륨은 어깨를 찔린 고통에 잠깐 움찔, 몸을 떨었지만 곧 카멜을 내찔렀다. 카멜이 칼을 피하면서 안스륨의 어깨에 파고들었던 검을 뽑아내자 오후의 햇살 아래로 붉은 피가 튀었다. " 놓아줘요!! 안스륨은 나에게 아무짓도 하지 않았어요! " 월은 아스가 소리치는 것을 무시하고 한동안 내달렸다. 계곡가에 와 닿아서야 월은 아스를 놓아주었다. 아스는 황급히 물러서며 화난 기색으로 말했다. " 왜 안스륨을 공격하는 거죠? 나 때문인 듯 한데, 그는 나를 여태까지 보살펴 줬어요! " " 당신은 트리옌입니다. 저희도 트리옌입니다. 트리옌은 트리옌의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당신이 그의 옆에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 " 왜죠?! " " 그건... " 월은 말하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곧 자신이 죽일 사람과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곧 죽고 다른 곳에서 환생할텐데 불 필요한 말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월은 허리춤에 매여있던 검을 빼들었다. 검날이 계곡의 물빛을 반사해 빛났다. 아스는 월이 검을 빼들자 움츠러들었다. " 당신에게 유감은 없습니다. " 월은 검을 휘둘렀다. 검 끝이 아스의 뺨을 스쳤다. 공포에 질린 눈동자가 월을 보고 있었다. " 왜, 왜 이러는 거지요?! " 월은 대꾸없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검은 이번엔 아스의 옷깃을 스쳤다. 아스에게 큰 옷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고 뒷 걸음질 치던 아스는 계곡의 자갈에 미끌어져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월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검이 두번이나 빗나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다시금 팔을 치켜들다가, 의아함에 멈칫했다. 계곡의 물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아스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오후의 햇살이 드러난 마른 어깨에 비춰졌고 조용한 숲에서는 간간히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계곡물이 흘러가는 소리만이 날 뿐. 조약돌들이 통탕거리며 이 상황의 긴박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노래했다. 월은 붉게 물들어가는 햇살이 자신의 속눈썹에 맺히는 것을 느끼고 눈을 깜빡여 그것을 털어내었다. 숲에서 이름 모를 새가 지지거리며 울고 있었다. 월은 뭔지 모를 위화감에 당황해하며 아스를 쳐다보았다. 이 상황이 이해가 안된다는 듯 공포에 질린 멍한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드러난 얇은 쇄골과 가슴이 숨소리에 따라 조금씩 위 아래로 움직였다. 한번, 검을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무력한 소년따위- 노을빛에 물든 흰 목덜미 밑에서 팔딱거리며 뛰고 있을 맥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부드러운 조용함이 계곡에 석상처럼 서 있는 두 사람 사이를 스쳐갔다. 월은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아스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무슨 조화일까. 펜 오키드를 위해서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검을 써왔고, 강해지라는 그녀의 말에 따라 강해졌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런 개념따위 월에겐 제대로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강해야만 했고, 펜 오키드의 것이었다. 그 외의 다른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런 그가, 아스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이 싫은 것이다. 월은 난생 처음으로 검을 휘두르기 전 자신의 감정에 대해 곰곰히 생각했다. 동정일까? 아리면,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를 죽인다는 거부감일까? 그녀의 카리스마가 지금 저 소년에게서 나타나 자신이 압도되는 것일까? 이상한 일이었다. 월은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의 검 끝을 잡아끌고 있는 듯한 부드러운 노을빛을 떨쳐내며 그는 검을 정확히 아스의 가슴팍으로 내리찔렀다. 아스는 한동안 망설이는 듯 했던 그의 검이 똑바로 자신의 가슴 중심을 찔러오는 것에 눈을 질끈 감았다. 휘웅!!! 꺄아아아아아... .... ... 아스는 가슴이 꿰뚫리는 고통대신, 자신이 내지를 법했을 비명을 내지르는 아련한 소리를 듣고 놀라 눈을 떴다. 놀란 것은 월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검 앞을 가로막고, 아스의 주변을 둘러싼 희미한 형제들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검에 맞은 한 정령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고, 모여든 그것들은 두려운 눈초리로 월과 그의 검 끝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령을 부리는 기색도 없었는데 어떻게?? 정령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확실히 아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트리옌의 가장 큰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은, 아직 정령에 대해서도 모를 아스를 그들 스스로가 지키고 있었다. 월은 순간 아연해졌다. 그 역시 트리옌으로 정령을 부리는데, 자연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듯, 그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들 스스로가 의지를 가지고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존재가 신성수 에린지움이 아니라면. 눈앞에 있는 무력한 소년은, 정말로 아리스타타의 영혼을 몸에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죽여야 한다. 월은 정령조차도 베어 없애버리는 자신의 강한 검에 정령들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도 정령의 도움을 받고 숲과 나무와 그에 깃드는 정령들을 지켜야 할 나이트였다. 하지만 펜 오키드가 죽이라고 명령했다. 죽여야 한다. 어서 죽여! 월은, 자신이 이렇게나 망설이고 주저해야하는 이 상황이 짜증났다. " 죽어라!! " 꺄아아아아아 ... ... ... !!! 월이 휘두른 검이 수많은 정령들을 치고 지나갔고, 월은 이윽고 검이 아스의 살을 꿰뚫는 둔탁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비명이 고요했던 숲을 울렸다. " 아악!!! 아, 안스륨!!! " 월이 아스의 가슴팍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안스륨의 팔이었다. 안스륨은 무시무시한 기색으로 아스를 뒤에서 감싸고 팔을 내밀어 그의 칼을 대신 맞았다. 팔을 관통한 칼끝에서 피가 뚝뚝 흘렀고, 그것은 계곡물에 떨어져 퍼졌다. 월은 순간 검을 놓을뻔 했다. 안스륨, 모든 숲의 저주이자 불타는 것들의 제왕인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그 시선에 담기고 있었다. 압도적인 살기가 주변을 감싸고, 월은 시선만으로도 자신을 잡아쨀 듯한 그의 시선에 주춤, 물러났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그를 포박하고, 그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월은 숨쉬는 것도 잊고 그의 분노에 불타는 시선을 마주대하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점점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 아, 안스륨. 팔이, 팔이... ...!! " 아스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월의 정신을 돌려놓았다. 월은 황급히 안스륨의 시선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아스는 자신의 등에 기대는 안스륨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안스륨은 땀에 젖었는지 아스는 등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계곡물에 벌겋게 번져가는 것은 틀림없이 피였다. 아스는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그를 돌아보았다. 안스륨은 검을 팔에서 뽑을 생각도 못한 채 스르륵 몸을 기울여 쓰러졌다. 월은 안스륨이 몸이 성치못하다는 사실을 퍼뜩 깨닫고 안스륨의 팔에 꽃힌 검을 뽑았다. 안스륨의 검붉은 피에 젖어버린 아스는 월이 검을 뽑으면서 팔에서도 쿨렁쿨렁 피가 쏟아져 나오자 증오에 찬 눈동자로 월을 노려보았다. "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왜 날 죽이려는 거냐!! "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무스카리가 여기있다면 곧 카멜이 쫓아올 것이다. 월은 아스를 죽이려 검을 휘두르는게 슬슬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에게 검집이 날아들었다. " 월 저먼더!! 무슨 짓인가!!! " 월은 재빨리 검집을 쳐내었다. 카멜이 검을 휘두르려는 월을 발견하고 먼저 검집을 집어던진 것이다. 달려오며 아스의 외침을 들었던 카멜은 의혹과 불신에 찬 눈동자로 월을 쳐다보았다. 월은, 일이 귀찮게 되어버렸다고, 아까 그때 자신이 망설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 뭐가 말입니까, 이 자를 죽여야 하잖습니까. " " 안돼!!! " 아스가 비명을 지르 듯 소리쳤다. 가까이 다가온 카멜의 눈이 커졌다. 아스는 결사적으로 안스륨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 안스륨을 죽이려면 나부터 죽여! " 월은 아스가 자신이 아스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말할까봐 얼른 말했다. " 무슨 소리십니까. 그 자는 그렇게 당신이 감쌀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자는... " " 시끄러!!! 안스륨이 어떤 사람인지는 난 잘 몰라. 하지만 나 때문에 그를 다치게 하지 마!! " " 저희와 같이 가셔야 합니다. " " 싫어! 지금은 안돼!! 지금은 안스륨이 내 보호자야! 당신들을 따라갈 순 없어! " 카멜은 눈물을 흘리며 안스륨을 지키려 애쓰는 아스를 보고 갑작스런 어지럼증이 나타났다. 아스가 흘리는 투명한 눈물방울에서 짙은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숲이 그의 시야에서 흔들렸다. 그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저 분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저 자가 어떤 놈인지도 모르기에 저러시는 것이다... 저 극악한 놈이, 저 분의 옆에서 상냥한 척, 다정한 척 마음을 얻어내려... 무스카리, 네가 아리스타타님을 죽여놓고서는, 다시 시작하려는 게냐? 네 본성을 숨기고 네가 이 세계의 유일한 사람인 양, 그렇게 행세하는 거... ... ... 화가 났다. 카멜은 애써 자신에게 치밀어 오르는 그 화가, 아스를 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다. 아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애원했다. " 제발... 제발 지금은 보내줘. 다음에, 다음에 갈테니까, 제발, 제발 지금은 그냥 보내줘... " 그때 안스륨이 신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 ... ... 그런 소리... ... 따위 하지마... 네, 네가 간다고 해도... 내가 보내지 않아... " " 안스륨! 말하지마, 아프잖아!! 제발 보내줘요! 당신이 절 이리로 데리고 왔죠? 다음번에 만날때 당신을 따라갈게요. 지금은 제발 그냥 있게 해줘요. 안스륨의 상처를 고칠 수 있게 해달라구요! 안스륨이 죽거나 하면, 나 절대로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을거예요! " 노을에 고개를 도리질치며 소리치는 아스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월은 몸을 저리게 하는 아스의 향기에 숨을 들이마셨다. " 카멜리아 버베나. " 갑자기 카멜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아스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들어 카멜을 봤다. 아스는 뭔가 슬프고 화가 나는 듯한 복잡한 표정의 카멜을 보고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생각했다. 카멜이 다시 한번 말했다. " 카멜리아 버베나. 당신의 첫번째 묘목이자, 트리옌의 영광, 에린지움을 지키는 글로리 나이트 입니다. 카멜이라고 불러주십시오. " " 아... " " 전 당신이나 당신들이 아닙니다. 카멜입니다. " 아스는 카멜이 울 것 같은 얼굴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말했다. " 카멜... " " 약속하시는 겁니다. 다음번에 만나면, 저를 따라와주십시오. " " ... ... 알겠어요.저를 걸고 맹세하겠어요. " 카멜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당신은 고작 이런 일에 당신 자신을 걸 만큼 가치없는 분이 아닙니다. 대신 약속을 어기면, 저는 그때 저 자의 목숨을 앗아갈겁니다. " " ... ... 안돼! " 안스륨이 신음을 억누르며 애써 말했지만, 그런 그의 고통스런 모습은 아스의 대답을 재촉하는 꼴밖에 안되었다. 아스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요. 카멜. " 카멜은 월을 쳐다보고는 돌아섰다. " 가자. " 월은 잠깐 주춤했지만 곧 카멜을 뒤따랐다. 노을진 숲의 나무 그림자 사이로 사라져가는 금발을 쳐다보며, 안스륨은 헛웃음을 지었다. 빌어먹을 녀석, 어리석은 녀석. 자존심만 높은 녀석. 나를 생각하고 나를 말하고 나를 위해 우는 아스를 더 이상 보기 힘들었겠지. 안스륨은 정신을 놓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다르다 카멜. 나는 너처럼 질투나 자존심 따위를 세울만큼의 여유도 없다. 치사해도 좋고, 비열해도 좋다. 네가 무슨 말을 하건 나는, 이제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다. 나를 보고 웃어주는 아리스타타를 놓치지 않겠다. -- 철썩!!! 꽤 아팠다. 카멜은 얼음장같은 얼굴로 월을 노려보았다. 월은 터진 입안을 혀로 핥으며 대꾸했다. " 왜 이러십니까. " " 몰라서 묻나? " 월은 흘낏 카멜을 쳐다봤다. " 아무리 전설적인 글로리 나이트,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인 카멜리아 님이라고 해도, 이런 처사는 심하시군요. 저는 제가 왜 맞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 네가 감히 아리스타타님을 죽이려 하지 않았어! 펜 오키드가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나? 그녀가 시켰어?! " 월은 격하게 말하는 카멜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제 앞에서 펜 오키드님을 모욕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아무리 카멜이라 해도, 당신은 수백년동안 축복의 성을 비웠고, 그 사이에 에린지움과 숲과 결계를 지킨 것은 펜 오키드님이십니다! 돌아왔으면 그분을 보좌할 생각을 할 것이지, 그러지는 못할 망정 또다시 에린지움을 위협하는 존재밖에는 안되는 아리스타타를 데리고 와서는, 고작 질투심에 사로잡혀 다 잡은 무스카리를 그냥 놓아주다니, 당신이 정말 전쟁의 절대적인 영웅이었다는 그 카멜리아 버베나가 맞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 " 입 다물어. " " 고작 여자 하나때문에 이렇게나 이성을 잃고, 같은 글로리 나이트에게 무례하게 손찌검을 하는 당... " 카멜이 월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는 녹색눈을 파랗게 빛내며 노여움에 소리쳤다. " 고작 여자 때문이라고?! 네가 뭘 아느냐, 아리스타타를 실제로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네가 뭘 알아!! " " 크... 이거 놓으십시오. 저도 글로리 나이트고, 현재 에린지움의 걸음을 모시고 있는 첫번째 묘목입니다. " " 고작 여자가 아니다. 그깟 만들어진 펜 오키드도 아니야!! 모든 트리옌의 희망이고 숲의 기적이다! 무적의 여왕이고, 은빛의 여신이다! 너에게 그런 취급을 받을만한 분이 아니야! 펜 오키드의 사주에 두번씩이나 내 앞에서 죽어야 할 분이 아니란 말이다!!! " " 고작 여자가 아니라구요? 우습군요. 여자는 아니겠지요, 아직 덜 자란 소년입니다. 초라하고, 쓸모없고, 평범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소년입니다. 보셨잖습니까, 자신을 죽인 무스카리를 감싸며 우는 것을. 아리스타타의 기억도 없고 능력도 쓸 줄 모르고, 보통의 트리옌보다도 못한 존재입니다. 예전의 그 아리스타타가 아니란 말입니다. 놓으십시오. " 월의 말에 카멜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월은 졸린 목을 쓰다듬으며 기침을 몇번 하더니 말했다. " 당신도 아시잖습니까. 지금 그 소년은 차라리 없는게 더 나은 존재입니다. 설사 그 소년을 축복의 성에 데려간다고 치지요. 그러면 그 소년이 예전의 아리스타타처럼 그런 위대한 존재로 모든 이들의 사랑과 경애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오산입니다. 되려 펜 오키드님을 지지하는 자들과 그 분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자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나, 트리옌들은 원래의 목적을 잃고 내분에 휩싸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그녀를 지금 데리고 온 것은 실수입니다. 데리고 오려면 펜 오키드님이 계시기 전에 데려 왔어야 합니다. " " 그만. " "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아리스타타님의 첫번째 묘목이기도 하지만, 에린지움의 글로리 나이트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무스카리에게 그분의 심장을 빼앗기기 전에, 당신이 직접... " 퍼억! 월은 카멜의 주먹에 맞고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는 이번엔 무지 아프다고 생각하면서 옷을 털고 일어났다. " ... 제 말이 심했군요. 그것에 대해선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처신을 잘하십시오. 지금은 아리스타타의, 전쟁 전의 시대가 아닙니다. " 월이 다른 나이트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숲의 그림자를 밟으며 사라지자, 카멜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괴로운 침묵이 그의 어깨위로 내려앉고, 숲의 어둠이 그의 슬픔을 가리웠다. 이토록 바보같은 자신, 멍청한 자신을 카멜은 마음껏 욕하고 싶었다. 그래.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다. 그녀를 보고 싶고 가지고 싶다는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자신은 그녀를 무스카리의 수중에서 위태롭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갈데 없이 목숨을 위협받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무스카리에 의해 죽은 아리스타타... 이제는 그녀의 명성과 아름다움까지 죽어버린 것일까? 에린지움 아래에 서서 눈부시게 미소짓던 그녀는 이제 자신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자신의 추억을 남겨두고 변해버린다. 마법에 가리운 그의 눈은 무스카리를 위해 울고, 그 말은 무스카리를 위해 애원한다. 그를 위해 자신을 따라오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이름조차 몰랐다!! 분노와 무서운 고독이 그의 있을리 없는 심장을 쥐어짰다. "... " 이따끔 부는 실바람에 발밑의 풀들이 흔들렸다. 고요한 달빛이 그의 금빛 머리카락 위해 내려 앉아 반짝거리며 빛났다. 끝이 안보이는 숲의 어스름한 어둠과, 어디에선가 울기 시작한 밤새가 그의 귀청을 울렸다. 부우, 부우- 부우, 부우- 카멜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잘 된 일이다. 다음번에 마주칠때, 그를 데려온다면... 자신 스스로가 약속했으니 올 것이다. 설사 무스카리가 가로막는다고 해도, 전쟁 후 용족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저 결계 안에서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용족이 쓰는 마법의 힘은 결계안에서 미약하지만, 숲이 울창한 여기 자연에 깃든 정령의 힘을 막을 길은 없다. 그리고 무스카리를 다치게 해서라도 일단 그 분을 데려오기만 한다면, 자신이 오겠다고 약속했었으니 무스카리에게로 돌아가려 하진 않을 것이다. 억지로 그 분을 끌고 와, 무스카리가 그립다고 무스카리에게로 보내달라고 울부짖을 것을 보는 일은 카멜에게 고통이 될 것이다. ... 안스륨이라고? 카멜은 무스카리가 가짜로 그 분에게 대었을 이름에, 차가워진 머리로는 비웃음밖에 안 난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하나로 통합되어 버린 언어의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고어로 만들어진 그 이름의 뜻은, 사랑에 번민하는 마음... 웃기는 일이다. 그 놈이, 무스카리가 사랑에 애닳아 한다 이 말인가? 무스카리, 다시 시작한다고 했던가. 그건 너의 거짓말이다. 그건 네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야. 너는 오로지, 빼앗고, 짓누르고, 가지는 것 밖에 모르는 난폭자이고 약탈자다. 그게 너의 본성이다. 언제까지 그것을 그 분에게 숨길 수 있을까? 카멜은 달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질투만큼이나 무스카리를 비웃었다. 타악!!! 바닥에 부싯돌이 나뒹굴었다. 아스는 절망적인 얼굴로 계곡물에 젖어 축축한 채로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안스륨을 쳐다보았다. 그를 계곡에서 어찌어찌 끌어내어 여기까지 오는데만도 지나치게 긴 시간이 걸렸다. 그가 무거운 탓이라고는 하지만, 아스는 안스륨의 신음소리가 들려 올때마다 힘 없고 약한 자신을 원망했다. 일단 그를 평평한 바닥에 눕혔을때에 벌써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옷을 벗겨내고 상처를 돌봐야 할테지만, 주변이 너무 캄캄해서 시야가 어두웠으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피를 많이 흘렸으니, 추울 것이다. 아스는 망설이다가 안스륨을 놔두고 아까 카멜들과 마주쳤던 곳으로 가 안스륨의 짐과 칼을 찾았다. 그리고 돌아와 그의 짐을 뒤져 그가 쓰는 것을 본 일이 있는 부싯돌을 꺼낸 것이다. 급히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를 조금 모아 불을 피우려 했지만, 한번도 부싯돌을 써보지 못한 자신은 불 하나 피울 능력이 없었다. 이렇게나 자신이 무력하다니... ...! 아스는 스스로의 무능력함에 욕을 퍼부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울고 싶었지만, 그러다가는 진짜 안스륨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 아스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부싯돌을 들었다. 따악! 따악! 부싯돌이 부딪힐때마다 미약한 불꽃이 튀었지만 그것은 좀체로 부싯돌 사이의 지푸라기에 옮겨붙지 않았다. 가끔씩 옮겨붙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제대로 살리지를 못했다. 아스는 울지 않으려고 오만상을 썼지만, 배어나오는 눈물이 어쩔 수 없이 흘렀다. 눈물로 시야가 흐려지자, 아스는 그것을 훔치며 중얼중얼 자신을 달래었다. " 우, 울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얼른 불을 피워야지, 이 멍청한 녀석... ... 흑, 흑, 아, 안스륨이 죽이면 다 나 때문이야... " " 그렇게 울다가 지나가던 짐승이라도 덮치면 어떻게 할려구 그래? 나 처럼~ " 아스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화려한 보라색 머리카락, 새파란 눈동자, 큰 키... 레지였다. " 레지!! " " 야아, 그렇게 반갑다는 듯 불러주면 너무너무 기분 좋아지잖아? " " 레지씨... 어, 어떻게... " " 아, 뭐, 모른척 하려고 했는데, 날 애타게 유혹하는 향기가 너무 짙어서 그냥 갈 수가 없었지. " 레지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아스는 반가움과 서글픔이 뒤범벅이 되어서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안스륨이 다쳤다는 것을 알리고, 얼른 불도 피우고 상처도 봐야 하는데! 하지만 레지는 아직 아스의 말 못한 마음까지 알아차렸다는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아스가 엉성하게 모아놓은 장작에서 불길이 확 솟았다. 아스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고는 환한 불빛을 보고 좀 정신을 차렸다. " 레지씨! 안스륨이 저 때문에 심하게 다쳤어요! 어떻게 하면 좋죠? 피도 많이 흘리고... " "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에 죽을 놈이면, 옛날에 죽었지. " " 레지씨! " 아스는 급히 레지의 팔을 붙들었다. 아스의 간절한 얼굴을 보고 레지는 좀 뜨악한 표정이 되더니만 어깨를 으쓱했다. " 아니 뭐, 저 놈은 나 한테 도움을 받았다면 되려 기분 나빠 할텐데. " " 제가 고마워 할께요!! 안스륨 몫까지 배로요! 제발 상처 좀 봐주세요! 전 이런 일은 도통 처음이라, 아무것도 못하고...! " " 알았어 알았어, 그런 얼굴로 쳐다보면 거절 못하잖아? " 레지는 축 늘어진 안스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축축한 옷을 벗기고 팔과 가슴에 난 상처를 살펴보았다. 그는 휘파람을 야유하듯 불더니 말했다. " 호되게 당했구만. 이 놈을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는 사람은 그 녀석밖엔 없지. " " 그 녀석 이라면... " " 너도 봤을텐데. 카멜리아 버베나, 금발머리의 인형처럼 잘생긴 청년. " " 아... 그, 그사람이 안스륨을 이런 꼴로 만들어 둔거예요? " " 너무 뭐라하지 말라구. 세상천지에서 제일 불쌍한 놈이니까. 어휴, 나 같으면 분하고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옛날에 포기했다. 녀석들이 참 질기단 말이야. " " 도대체 왜 안스륨을 이렇게... ... ?? " 레지는 어라라, 하는 얼굴로 아스에게 말했다. " 모르는 거야? 너 때문이잖아. " " 저 때문이라는 것은 대충 알았어요. 그... 그 사람이 말했어요. 저는 트리옌이라서 안스륨하고는 같이 있으면 안된다고... 그리고 그 카멜이라는 사람도 안스륨에게 큰 원한이 있는 것 마냥... " " 큰 원한이 있는건 당연하지. 그리고 네가 안스륨하고 같이 있어도 안되는 것도 맞아. 그 녀석은 이럴 수 밖에 없는거야. 아아! 죄 많은 안스륨. " 레지는 주절주절 떠들며 짐을 뒤져 깨끗한 천을 찾아내었다. 그것을 아스에게 물에 좀 적셔와 달라고 부탁하고 아스가 후다다닥 뛰어 다녀오자 그것으로 천천히 안스륨의 상처 부위와 피에 젖은 곳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피를 다 닦아내고 나자, 검에 날카롭게 베인 가슴의 상처며 팔의 상처가 더욱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레지는 울상을 하고 있는 아스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손. " " 에? " " 손. " 아스는 영문을 모른채 말 잘듣는 강아지처럼 레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 놓았다. 레지는 아스의 손을 잡고는 검지 손가락의 끝을 자신의 날카로운 손톱으로 조금 할퀴었다. 곧 손가락 끝에서 방울방울 눈물같은 투명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 ... 아얏! " 레지는 그 손가락을 안스륨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마구 킬킬거리고 웃었다. " 쭈쭈먹는 안스륨이래요! 손가락 빠는 안스륨이래요! 우킬킬킬킬~ !! " 아스는 그 상황에서도 아연해졌다. 저런 성격이어서야, 도와주어도 고맙지 않은게 당연하지. 아스는 레지가 웃는 것을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레지가 배를 붙잡고는 허리를 뒤 흔들며 숨이 넘어갈 듯 웃어대었기 때문에 그것은 한참이 걸렸다. " 저어, 레지씨, 그런데 이게 도움이 되나요? " " 키득키득... 우후... 웃겨라. 당연히 되지. 못 들었어? 트리옌들에게는 많은 능력이 있어.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피가 굉장한 치유력을 가진 약이 되는 거야. 물론 트리옌이 죽어버린 후에 나오는 죽은 피는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그냥 먹거나 바르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크게 나타나. 물론 뭐, 아무리 투명하다 해도 피니까 펑펑 쓸 수는 없지만. " " 아니 저, 그렇다며 괜찮아요! 다른 손가락도 그을까요?? " " 됐어 됐어, 그랬다가는 저 녀석에게 끔찍한 잔소리를 듣게 될테니까 그만 두는게 좋을걸. 워낙 튼튼해놔서리 내일이면 멀쩡하게 일어날거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 " 예에... " 아스는 조금 창백하게 눈을 감고 있는 안스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아스는 가슴이 욱씬거리는 것을 느꼈다. 한번도 그의 이런 무방비하고 기운없어 보이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아스는 조그맣게 물었다. " 안스륨은 왜 나를 이렇게 다치면서까지 곁에 두려는 걸까요? 그리고 왜 안스륨이 저랑 같이 있으면 안되는 거죠? " " 으음~ 첫번째 질문은 몰라서 묻는 건 아닐테고, 두번째 질문은 내가 대답해 줄 만한게 아닌데? " 아스는 고개를 들어 레지를 바라보았다. " 저, 갑자기 이곳에 떨어져 길을 헤매다가 노예상단에 잡혀갔을때, 안스륨이 구해주었어요. 정말로 갑자기 이런곳에 와버려 어디를 가야할지, 뭘 해야 할지... 안스륨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노예가 되어서 나쁜 꼴을 많이 당했을거예요. 제가 트리옌이라는 것도 몰랐을테고...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들이 나타나서 안스륨이랑 있어서는 안된다, 안스륨을 죽이려 드니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 레지가 싱긋이 웃었다. " 잊어먹고 있는게 하나 있어요 아스군~ " " 네? " " 아스군은 별로 실감 못했는가 본데, 아스가 이곳에 돌아오게 된 것은 왜 일까요? " " 그건... 트리옌이라서... " " 왜 트리옌일까요? 얼마전까진 인간이었잖아? " " 그건... 안스륨이 내가 전생에 트리옌이었다고 내가 환생체라서... ... 그럼? " " 딩동댕동~! " 아스는 울컥 가슴속에서 불안감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안스륨이 아무말도 하지 않았기에, 아스는 자신이 트리옌이라는 것은 몸이 나아서 묘하게 납득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전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이 세계와 관련있는 것은, 트리옌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모르는 자신의 전생뿐이다. 아스는 순간 피가 식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 그렇군요... 그냥, 그냥 제가 트리옌이라서가 아니었어... 그런 것 치고는 안스륨이 제게 너무 잘해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안스륨이 제 곁에 있는 것도, 그들이 안스륨과 저를 죽이려는 것도, 다 저의 전생 때문인가요? " " 으음~ 그에 대해서도 내가 답해줄만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네. 섵불리 입 놀렸다가는 저 놈이 날 죽일거야. 흑흑. " " 그래요... 그렇군요. " 아스는 몸을 휘감는 서늘한 느낌에 잠시 눈을 감았다. 안스륨은, 자신의 전생 때문에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이지, 그냥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느 사람이 아무런 이유없이 남에게 이렇게나 큰 친절을 배풀겠는가... 아스는 안스륨에게 레브록이라는 성을 받으면서 그와 한결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배만큼 멀어진 느낌이었다. 아스가 망연한 표정으로 몸을 축 늘어뜨리자, 레지가 얼른 말했다. " 과연 그럴까? " " 네? " " 저 놈이 너의 전생 때문에 너한테 잘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지 지금? " " ... 그게 사실이잖아요. " " 네 전생 때문이라면, 왜 너에게 너의 전생 이야기나, 뭐, 과거에 너에게 빚진 것이 있어서 잘해준다 운운, 너는 예전에 어떤 사람이었다 운운, 그런 소릴 하지 않았겠어? " 그러고보니 그랬다. 안스륨은 단 한번도 과거의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도, 그의 전생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한 적도 없었다. " 그리고 네 전생이 어땠든간에, 지금 안스륨이 곁에 있는 건 너잖아. 네 전생이 아니라. " 아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레지의 말이 맞았다. 단순히 자신의 전생 때문이라면, 전생의 자신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자기 목숨을 걸고서까지 과거의 기억도, 아마 모습도 다를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막연한... 그냥 잘해준다-는 그런 막연한 끈보다는 낫지 않은가? 전생의 일 때문에 안스륨이 자신의 곁에 있는거라면, 자신을 위해 목숨도 걸 정도라면 그는 그렇게 쉽게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앞으로 안스륨과 헤어져도, 이 대륙의 어디에 있어도 안스륨과는 헤어지면 그만이 아닌, 전생과 이생에 걸쳐 인연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스륨을 얼굴을 바라보았다. 빨리 나아요 안스륨... ... 레지는 시무룩한 기운이 사라지고 얼굴이 환해진 아스를 보고 내심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네. 자신의 말에 영향을 받아 아스가 안스륨을 조금 꺼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은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다. 하여튼 늘 요 입이 문제라니까. 레지는 그렇게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오늘 카멜과 마주치면서 그가 오늘 얼마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졸였을지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마 카멜이 조금이라도 무신경한 사람이라, 아스의 충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처럼 나불나불 떠들었다면 아스는 당장은 안스륨의 곁을 떠나진 못하더라도 어느정도 그를 경계하겠지. 아리스타타의 예의 그 무스카리에 대한 경계심과 증오심은, 자신도 익히 봐서 알고 있다. 아스마저 또 그런다면 녀석은 미쳐 날뛰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뭐, 그리 되어도 재미있겠지만.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 가장 큰 즐거움은 나중으로 미뤄 두는 법. 레지는 지금 저렇게 자신의 본성을 감추며, 전전긍긍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주 즐거웠다. " 자 봐, 피가 멎고 상처가 좀 아물었지? " " 그렇네요. 다행이예요... " 아스는 한숨을 몰아쉬며,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진 혈색으로 숨을 고르게 몰아쉬며 잠든 안스륨을 바라보았다. 편안해진 안스륨의 모습을 보자, 왠지 안심이 되면서 다시 눈물이 나왔다. 아스가 훌쩍거리자 레지가 놀라 물었다. " 아니, 왜 그래? " " 아니예요. 제가 너무 바보같아서... 레지씨가 없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하니, 안심이 되어서 그래요. " " 아아, 울면 곤란해진다구. " " 죄, 죄송해요. " 레지는 공기중에 배어나오는 아스의 향기를 맡았다. 아까 땀을 잔뜩 흘린데다가, 울기까지 해서 아스의 주변은 물론이거니와 숲 주변으로 달콤한 향내가 미약하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아스가 다시 울자 점점 짙어지는 향기를 킁킁거리고 맡으며 레지는 입맛을 다셨다. 무스카리가 다친 몰꼴만 구경하고 가려다가, 이 향기에 끌려 아스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었다. 해달라는 대로 했으니, 조금 보답을 받아도 괜찮겠지? 안스륨이 깨어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녀석은 지금 비몽사몽이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아깝지. 레지는 아스에게로 다가서 눈물을 닦아주는 척 손끝에 묻은 그의 눈물을 조금 맛 보았다. 곧 입안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맛과 향기가 가득찼다. 과일 맛같기도 하고, 꽃향기같기도 하고, 뭐라고 설명이 안되는 향기다. 하지만 지독하게 유혹적인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보통 트리옌들보다 훨씬 짙다. 레지는 오래간만에 맛보는 트리옌의 체액을 혀끝으로 음미하며 아스의 얼굴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속삭였다. " 트리옌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또 뭔지 알아? " " 네? " " 바로 체액이 향기롭고 유혹적인 미약이 된다는 점이지. 그렇게 훌쩍거리고 울어대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야. " 자존심이 하늘을 치사시킬만큼 높아서, 눈물 따위를 구경할 수 조차 없었던 아리스타타에 비해서, 너무나도 무방비하다. 무스카리도 침대 위에서가 아니면 맛보지 못했겠지. 항상 에린지움의 트리옌은 무슨 맛일까 궁금했었다. 레지는 눈물을 닦던 아스의 손을 붙잡아 내리고는 천천히 아스의 눈물이 묻은 뺨과 눈가를 핥았다. " 달콤하기도 하지. " " 저, 저어, 레지씨? " 아스가 얼굴을 붉히며 떨어지려고 했지만, 레지는 아스를 놓아주지 않았다. " 네 부탁 들어줬잖아? 그러니까 좀 맛보게 해줘. " " 에- " 혹여나 놓칠까봐 레지는 아스의 얼굴을 붙들고 샅샅히 핥았다. 눈물만 조금 맛보고 놓아주려고 했지만, 눈꺼풀을 혀끝으로 문지를 때마다 배어나오는 유혹적인 그것이 그의 자제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레지는 조금 생각하다가, 자신에게 자제심 따위가 없다는 걸 떠올리고 아스의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 ... " 죽는다. " ... 려다가 실패했다. 그럼 그렇지. 레지는 아쉬움을 느끼며 아스에게 떨어졌다. 레지는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안스륨을 보고 히죽 웃었다. 이봐 이봐, 아스가 있는데, 살기라도 퍼트릴 생각이야? 그의 무언의 말에 안스륨은 레지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어 들였다.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놈. 안스륨은 눈가가 붉어진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아스를 보고 충분히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엔 눈물만 좀 맛보려 했겠지. 하지만 곧 타액도 맛보고 싶어졌을테고, 자신이 깨어나지 않았으면 다른 것도 맛보고 싶어졌을 것이다. 레지의 탓만은 아니었다. 아스의 몸에서 나오는 체액은, 그럴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으니까. 안스륨은 아무리 에린지움의 걸음이라고 하지마는, 저런 능력까지 강력할 필요가 뭐 있나 하고 속으로 불평했다. " 아스. " " 안스륨! 괜찮아요? 말 해도 되는 거예요? " " ... ... 그래. " " 정말 크,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나 때문이예요... 나 때문에... " " 울지마. " 안스륨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하는 단호한 말에 아스는 히끅 울음을 멈췄다. " 저어, 레, 레지씨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어, 어라? " 아스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레지는 또 금새 사라져 있었다. 안스륨의 레지의 이름을 듣자 더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 그런 놈따위 신경쓰지마. 아무데도 쓰잘데 없는 놈이니까. " " 아앗! 아직 일어나면 안돼요! 상처가... ! " " 괜찮다. " 안스륨은 몸을 일으킨 후 안도랄까, 우려랄까의 깊은 한숨을 쉬었다. 카멜이 낸 어깨에서 부터 가슴까지 이르는 상처가 욱신, 하고 고통을 호소했다. 허나 무엇보다 아픈건 팔이 찔린 상처다. 빌어먹을 놈. 트리옌 주제에 감히 아리스타타를 죽이려 들다니. 새로운 에린지움의 걸음이 만들어졌다는 소리는 들은 적 있다. 그녀의 짓인가? 안스륨은 그 트리옌의 차가운 눈동자를 생각하자 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아무리 결계 안에서라고는 하지만, 아스를 지키지 못했다... ... 아스가 그 상황에서 카멜에게 다음에 만나면 따라가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아스의 그런 약속 역시 화가 났다. 생각하면 할 수록 화나는 일 투성이다. 안스륨은 아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짧고 까만 머리카락이 온통 곤두서 흐트러져 있고, 베이는 바람에 자꾸 흘러내리는 옷으로 덜 여문 상아같은 어깨가 보였다. " ... ... 묻지 마. " " 예? " " 왜 너와 같은 트리옌들이 우리를 쫓아오는지 궁금하겠지. " " ... ... 아... " " 그들에게로 가고 싶으냐? " 억누르려고 했지만 시선에 담기는 미약한 분노는 어쩔 수 없었다. 안스륨은 옆의 나무 기둥에 어깨를 기댄채로 조금 고개를 숙여 아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스는 안스륨의 검은 눈동자가 빛을 발하는 듯 자신을 응시하자 갑자기 숨이 탁 막힐 듯한 기분이 되었다. " 카멜에게로 가고 싶어? " 아스는 하마터면 뒤로 주춤 물러날 뻔 했다. 안스륨을 처음... 처음 봤을때와 같은 무서움과 차가운 두려움이 아스의 손을 붙잡았다. 아스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끼며, 안스륨이 ... 안스륨이 ... 무섭다고 생각했다. 아스는 안스륨을 제일 처음 대했을 때 이후로 처음, 자신이 안스륨의 곁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스는 간신히 고개를 도리질 쳤다. " ... 아니예요. " 아스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 아니예요, 안스륨. " " ... ... ... 그래... " 안스륨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 .. ... 나에게 시간을 줘. 아무것도 묻지 말아. ... ... 당분간만이다. 당분간만... " 아스는 불안감이 자신을 뒤흔드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말하는 안스륨에게 묻고 싶었다. 그가 묻지 말아달라고 하는 모든 것을. 자신은 전생에 누구이며, 전생에 자신과 나 사이에겐 무슨 일이 있었으며, 왜 나는 환생체로써 이곳에 와야했고, 카멜과 트리옌들이 왜 자신을 뒤쫓는지... ... 아스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자기 한구석의 마음에서, 어딘지 모르게 안도하는 자신을 느꼈다. 마치 저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아직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한 기분.... ... 아스는 안스륨을 떠나야 한다는 느낌과, 아직은 이대로가 좋다는 상반된 마음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덕택에 아스는 입을 다물었고, 둘 뒤에서 불타고 있는 모닥불만이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짙은 음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안스륨의 눈과 뺨에 깊은 그림자가 생겨 더 이상 그의 표정을 잘 관찰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스가 조금만 주의력이 더 깊었더라면, 안스륨이 남 몰래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아스는 모닥불 빛 때문인지 왠지 붉어 보이는 안스륨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 ... 알았어요, 안스륨. 처음에 만났을때 곧 알게 될거라고... 그랬죠. 그렇죠? 당분간만이라면 몰라도 괜찮아요. 안스륨은 지금 저의 유일한 보호자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고... 저를 보호하려 하니까요. 그것들이 안스륨을 괴롭힌다면 묻지 않을게요. 여태까지 안스륨이 저한테 많은 것을 해줬는데, 제가 그거 하나 못 참겠어요? ... ... 단지... 지금 안스륨의 옆에 있는건 저니까요. " 전생의 자신이 아니라. 지금 살아서 안스륨의 옆에 있는 사람은 나니까요. 카멜은 나이트들에게 말했다. " 모두 복귀하도록 한다. 나는 계속 그 분과 무스카리의 뒤를 쫓겠다. " 월이 의무적으로 물었다. "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 " 물론. 게다가 이미 그 분이 다음에는 나를 따라와 준다고 약속하셨다. 결계 안에서 무스카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 펜 오키드님께, 전해라. " 카멜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월을 쳐다보며 말했다. " 반드시 그 분을 데려가겠노라고. " " ... ... 예. " 나이트들이 모두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정령을 부른 후 빠른 속도로 카멜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카멜은 한 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북으로 가는 길을 쳐다보았다. 산의 끝자락에 나 있는 이 숲만 지나면 한동안 평야가 이어지고, 본격적으로 인간들의 나라가 나온다. 그 부근으로 가면 숲이 이렇게 우거진 곳은 없기 때문에 카멜은 안스륨에게 쉽게 기척을 들킬 터였다. 어차피 복잡하고 어지러운 인간들의 도시에서는 그 분을 빼내기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평야를 따라 두 개의 큰 도시를 지나고 나면, 곧 트리옌들이 세워놓은 용족을 경계하기 위한 결계가 쳐져 있는 곳이 나온다. 제 아무리 무스카리라 해도 그 결계를 뚫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그 분은 이미 자신에게 오겠다고 약조한 상태다. 물론 그 분을 순순히 놓아줄 무스카리가 아니었지만, 결계의 바로 옆에서 마법을 쓸 수 없음은 물론이요, 어제 큰 부상을 당하기까지 했으니 제 아무리 무스카리라도 그 분까지 데리고 그 곳을 빠져나가 북으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 하다. 물론 그 사이에 안스륨이 그에게 무슨 해라도 입히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 지만, 아직 그 분의 옆에서 그런 가증스런 연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카멜은 정령을 불러 두 다리를 감싸게 한 후 내달리며 생각했다. - 결계에서 보자, 무스카리!! 아스는 외국의 고전 영화에서나 나올 법하게 띄엄 띄엄 몰려있는 농가의 집들과, 녹색 쿠키같이 길을 따라 네모지게 만들어진 밭들을 보며 감탄했다. 여태까지 보아왔던 풍경이 대 자연의 그런 것이었다면, 지금은 사람의 손이 닿은, 조금은 아늑한 느낌이 드는 풍경이었다. 큰 산맥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평야를 감싸고, 밭과 농가의 한참 뒷편으로 햇빛에 흰빛으로 빛나는 성벽과 큰 도시가 보였다. " 와! 와!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예요. 저 도시도 그렇구요. 저 도시는 뭐죠? " " 드라세나다. 인간들의 나라중에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다. 전쟁중에 인간들의 나라 중 용족과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도시이기도 하다. " " 그럼, 저기 보이는 흰 성에는 누가 살아요? " " ...글쎄. 나도 이 나라에 들러본 적이 오래되어 알 수 없구나. 하지만 아마 드라세나의 성을 가진 왕이 살고 있을거다. " 도시의 성벽과 성과 곳곳에는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는데, 깃발들은 진분홍빛의 것과, 알록달록한 술이 달린 금빛 깃발 두 종류였다. " 진분홍빛의 깃발을 보니 알겠군. 저 깃발에는 가까에서 보면 붉은 백합이 그려져 있지. 드라세나라는 뜻은 고어로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가 있다. 아주 예전에 저 나라가 내전에 휩싸였을때 한 트리옌이 죽을 위기에 처 했던 왕가의 공주를 살려줬다더구나. 공주의 부탁으로 그 트리옌은 공주가 나라를 되찾을때까지 곁을 지켰고, 그녀가 여왕에 등극하자 떠나겠다고 말했다지. " " 헤에, 그래서요? " " 이 이야기는 두가지로 끝난다. 하나는 그 트리옌의 이름이 드라세나였기 때문에 여왕이 자신의 성과 저 수도의 이름을 드라세나로 했다고 하고, 또 다른 이야기로는 여왕이 그 트리옌을 사랑했지만 트리옌이 떠났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겠다는 의미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 " " 와, 낭만적이네요. 안스륨은 어느쪽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으세요? " " 글쎄. 어쨌거나 그 여왕이 왕위다툼의 내분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덕분에 여왕등극전의 내전때 거의 없어지다 시피 했던 왕족의 씨가 그녀가 죽고 나서 거의 말라붙을 지경에 이르렀었다. " " 그렇군요... 그럼 저 금색 깃발은 뭔가요? " " 흐음. 꽃의 축제 휘닉스야자의 때이긴 하지만... 보통 그때엔 흰색 깃발을 내 거는데, 그 사이에 금색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 아스와 안스륨은 밭 중간중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농민들과, 이따끔 모여있는 농가들을 지나쳐 도시로 곧게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멀리서 봐서 그런지 가깝게 보이던 길은, 직선길이라 꽤나 길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두 사람은 성문에 도착했고, 아스로써는 처음보는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성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다가가지 병사들 중 한명이 둘을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 뭐야, 수인족인가? " " 그렇소. " " 수인족이 둘만 다니다니, 이거 수상한데. 너라면 모르지만, 저쪽의 꼬마는 용병이나 길잡이도 아닌 것 같은데, 도망노예들 아닌가? " 노예라는 말에 아스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렸다. 자신의 등에 남아있는 장미의 낙인이 새삼 뜨거운 것 같았다. 하지만 안스륨은 태연하게 품속에서 반듯하고 네모나게 깎인 패 두개를 꺼내어 병사에게 건네주었다. " 으음? " " 도망노예라면 이렇게 대낮에 버젓이 성문을 찾을리가 없지 않소. 그것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용병이고 저 여자는 길잡이오. 내 일족들은 떼강도를 만나 모조리 죽었고, 그 이후로 용병이 되어 혼자 다니다가 우연히 같은 종족인 저 여자를 만나게 되어 같이 다니는거요. 여기 곧 휘닉스야자의 때가 아니오? " " 맞소만. 으흠. 확실하게 용병의 패와 길잡이의 패구만. " " 휘닉스야자라면 부유한 상인이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 올 것이라고 생각해 일거리가 없나 들른 것이오. " 아스는 안스륨이 언제 저런걸 갖고 있었나 싶기도 하고, 술술 입에서 나오는 거짓말에 자기도 놀라는 표정을 지을 뻔 했다. 게다가 난 왜 도 여자야? 병사는 뒤의 수인족 여자를 한번 힐끗 보고 패를 안스륨에게 돌려주었다. 여자라고 하기에는 머리카락도 짧고, 소년같은 얼굴이다. 하지만 병사는 곧 의심을 접고 안스륨의 말에서 틀린것을 지적해 주었다. " 그런데 당신 휘닉스야자라니, 대체 언제적 말을 쓰는거요? 지금은 팜파스그라스의 축제요. 수백년전에 용족과 트리옌의 큰 전쟁이 있기 전에는 휘닉스야자 꽃과 유희의 축제였지만, 그 후로는 전쟁의 종식을 축하하는 의미와 죽은 아리스타타님을 기리기 위해서 팜파스그라스로 바뀌었소. 아리스타타님이 죽었다는 날과 용족이 완전히 물러나 전쟁이 끝난 날까지가 축제일이거든. " 안스륨의 얼굴이 미미한 놀라움에 물들었다가 곧 사라졌다.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휘닉스야자의 축제일에 죽었었다. 그때는 한참 전쟁중이었고 이 도시에 주둔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다. 아직도 인장을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는 아스를 데리고 안스륨은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아스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자, 여태까지 보았던 사람의 수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과, 낮고 조잡하지만 많은 건물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단단히 다져진 흙바닥에서는 이따끔 아이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 지나가고, 짐승의 등에 짐을 실은 상인들과 꽃을 파는 여인들이 곳곳에 보였다. 특히 꽃과 리본을 파는 여인들이 많았다. 아스로써는 난생 처음보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바구니에 가득 담겨 제각각의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안스륨이 여관을 찾기 위해 아스를 데리고 도시의 시장으로 들어가는 동안 아스는 정신없이 한 눈을 팔았다. " 안스륨 안스륨! 저 동물은 마치 토끼처럼 생겼는데, 무척 크네요! 저기 짐을 지고 사람이 타고 있는 거요!! " " 수인족들이 기르는 짐승이다. 래브빅이라고 하지. " " 안스륨 안스륨! 저 꽃은 무척이나 송이가 크네요! " " 안스륨 안스륨!! 저 아가씨는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어요! " " 안스륨 안스륨!!! 저기 팔고 있는 저 것은 뭐죠? 색깔이 이상해요!! " " ... ... " 안스륨은 아스 몰래 짧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꽃의 축제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 전통은 아직 남아있는지, 길가는 여자들마다 꽃으로 머리카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열린 집집마다의 창문이나 상점에는 꽃들이 가득 꽃혀 도시에 화사함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비록 현대의 깔끔하고 멋지게 꾸며진 큰 상가나 건물들에 비할바 없는 곳이었지만, 그곳에는 활기와 순수가 가득했다. " 정말 멋져요! 꽃들이 정말로 많네요. " 아스가 감탄하는 사이 지나가던 사람에게 여관이 있는 위치를 물어본 안스륨은 곧 시장을 빠져나와 여관이 있다는 도시 광장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빵집과 갖은 과일을 파는 노점상과 조잡한 악세사리를 파는 아저씨와 쿠키를 파는 소년과 그들보다 많은 꽃을 파는 처녀들 사이를 지나 둘은 광장에 이르렀다. 성벽과 마찬가지로 흰 포석이 깔린 광장의 중앙에는 조그만 분수가 있고 뒤로 곧게 포석이 깔린 길이 죽 나 있어 그것이 도시 끝의 성에까지 가 닿아 있었다. 분수 중앙에는 흰 여자의 조각상이 있었는데 그 조각상의 발치와, 분수의 주변으로는 많은 꽃다발이며 화관들이 꽃의 자그만한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들 사이사이로는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 했는데, 악세사리며 리본이며 편지며 조그맣게 말린 머리카락들이 꽃들 사이로 보였다. 아스는 감탄하며 그 조각상을 보기 위해 발길을 멈췄고, 안스륨도 따라 멈췄다. 조금 부유하게 보이는 통통한 소녀 둘이 꽃 무더기 사이에서 시든 꽃을 골라내고 새 꽃다발과 화관을 놓았다. 그리고 시든 꽃 위에 올려져 있던 구슬 묶음을 내려놓은 싱싱한 꽃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흰 조각상의 여인에게 손을 모으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아스가 안스륨에게 물었다. " 이 조각상은 누구죠? " " ... ... 아리스타타를 기리는 축제라고 했으니, 아리스타타겠지. " " 와- " 둘은 말없이 조각상을 올려다 보았다. 조각상은 허벅지까지 닿는 긴 머리채에 우아한 표정을 한 어떤 여인의 모습이었다. 고개는 위엄있게 조금 하늘로 치켜들고 있고, 눈은 내리깔고 있으며 머리위로 살짝 들어올린 손에 나뭇잎이 한장 얹혀 있었다. 그리고 아래로 내리뻗은 손은 검을 짚고 있다. 아주 잘 만든 조각상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햇빛에 눈부셔 얼굴을 찡그릴 듯한 모습이었다. " 무척이나 아름다운 조각상이네요. " 안스륨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 저 나뭇잎과 검은 뭘 말하는 거죠? " " ... ... 나뭇잎은 아마 에린지움을 뜻하는 것일테고, 검은 그녀가 스스로 자결했던 그 검을 표현했던 것이겠지. " 안스륨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자, 짐이 무거워 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짐 속의 검이 무거워 진 듯한 느낌이다. 그 검이 먹었던 아리스타타의 투명한 피 값만큼. 안스륨은 그 조각상에서 에린지움에 안치되어 생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관되어 있다는 아리스타타의 시신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당장 그것이라도 찾아 오고 싶었지만, 용족인 이상 축복의 성 가장 은밀한 곳에 있을 에린지움까지 갈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안스륨은 햇빛이 눈부시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 우하하하하핫 - 뭐야? 한 번 해보자는 거냐? - 여기 맥주 시키신 분! - 그 칼 저리 치워!! ... 으와아, 무진장 시끄러웠다. 아스와 안스륨은 다리품을 팔아가며 여관이 몰려있는 골목을 한참이나 전전하다가 간신히 빈 방을 하나 찾아냈다. 찾아낸 방은 북새통으로 밀려드는 손님들을 위해 다락을 급히 치운 곳이라 천정도 낮고 곰팡이 냄새가 풀풀 나고 침대도 없고 좁았다. 하지만 안스륨은 그 방을 평소라면 침대가 두 개 딸린 좋은 방에 묶을 수 있는 값을 치르고 빌렸다. 애초에 축제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스는 키가 큰 안스륨이 천정에라도 부딪힐까 조마조마 했다. 그나마 그 방에서 위로가 되는 유일한 점은, 맨 위에 있어 좀 조용하다는 것과 위치가 높아 창문으로 시야가 트여 잘 보인다는 점일까나. 아무튼 둘은 지금 여관의 홀에 내려와 식사를 시켜놓고 앉아 있었다. 홀이라고 다를 건 없어서, 축제의 밤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상인, 그들을 따라온 용병들로 귀청이 터져나갈만큼 시끄러웠다. 아스는 축구장의 한 가운데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소리질렀다. " 안스륨!! 정말 사람이 많네요! 너무 시끄러워요! " " 축제일이니 어쩔 수 없다. 전야제인 오늘부터 내일 모레까지는 계속 이 지경일거다. " 아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스륨은 소리도 안 지르는데 왜 목소리가 잘 들릴까. " 축제면 볼게 많겠네요!! 정말 기대되요!! " " 으음... " 안스륨은 조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뒷자리에서 빵을 씹으며 뭐라 막 웃고 있던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 무슨 일이요? " " 죄송하지만, 오늘 밤에 무슨 행사가 있는지 들을 수 있겠소? " " 아아, 그런거라면 잘 물으셨소. 난 이 곳 토박이니까. 오늘은 전야제로 왕자님이 직접 초청했다는 유명한 집시패들이 공연을 할거요. 그리고 올해의 운세도 점 쳐준다는 군. 내일 오전엔 성의 정원까지가 개방되어 왕께서 축언을 하시고 먹을 것을 베풀거요. 가지 않으면 후회할걸! 그리고 오후에는 아리스타타님을 기리는 행사가 광장에서 있을 거고 그 후에 기사단과 병사들이 행진을 하오. 이것도 상당히 볼만하지. 그리고 밤에는 팜파스그라스의 미인뽑기 대회가 있소. 내깃돈도 걸 수 있소. 나는 작년에 우승했던 쟈스민이 우승한다는데에 올인이오! 그 처녀가 작년 대회 우승으로 콧대가 있는대로 높아져서, 구혼을 모조리 거절했거든. " " 그렇군. " " 마지막날인 모레에는 꽃 경연대회가 열리오. 그리고 서커스단도 오고, 밤에 아리스타타님의 발치에 놓인 꽃을 태우는 행사와 불꽃놀이가 마지막이요. " " 고맙소. " 아스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입을 딱 벌렸다. 기간도 굉장히 긴데다가 무슨 행사가 이렇게나 많은지. 아스의 놀라움을 눈치라고 챈 듯 안스륨이 설명했다. " 원래 이 축제는 대륙에서 가장 큰 축제다. 이만한 놀거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지. 이 나라는 이 축제로도 큰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 " 으흠, 관광 특수라는 거군요. " " 관광 특수? " " 에, 아니예요. 그나저나, 우리 그럼 밥 먹고 조금 있다가 저녁이 되면 구경 나갈거죠? 그렇죠? " " 미안하지만 일찍 들어와야 한다. 내일 또 일찍 출발하려면 오랫만에 지붕이 있는 곳인데 푹 자두는게 좋아. 물론 너는 숲 속에서 자는게 더 편하겠지만, 난 그렇지 않았으니까. " " 에에-!! 너무해요, 그럼 아까 그건 왜 물어봤어요? " " 난 오늘 밤의 것만 물어본 것인데, 저 자가 다 이야기 해준거다. " 아스는 얼굴 가득 불만을 표시했다. " 싫어요! 난 오늘도 구경할거고 내일도 구경할거고 낼 모레도 구경할거라구요! " "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알지 않느냐. 뒤에서 그 놈들이 쫓아오고 있는데 여기서 미적거릴 수 없어. " " 이렇게 넓고 복잡한덴데 어떻게 마주쳐요?! 안 마주치도록 하면 되잖아요. 만약에 보면 얼른 숨을게요, 네? " " 안돼. " " 안스류우우움~! " " 안돼. " " 안스륨!! 허락해 주지 않으면 울 꺼예요! " 안스륨은 그 말에 조금 망설이는 듯 하더니 잘라말했다. " 부탁이야!! " 아스는 순간 안스륨이 말한 것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부탁이라고 말한 것은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의 손을 붙들고 있는 소년이 한 말이었다. 조금 긴 머리를 뒤로 묶고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한 소년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아스의 손을 잡고 있었다. " 아얏! " 안스륨이 냉정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그 소년의 손을 치고는 말했다. " 누구 손을 잡는거냐. " 소년은 투덜투덜 인상을 쓰면서 맞은 손을 몇 번 털더니 아스를 보았다. " 아, 하지만 꼭 부탁하고 싶은게 있는 걸. 아, 내 소개도 안했네. 내 이름은 제피란더스. 제피라고 불러. 네 이름은? " " 어... 아, 아스포델. 아스포델 레브록. " " 에에에에에~? " 소년은 놀라더니만 머리를 긁적거렸다. " 부모님이 되게 열렬하셨냐? 자식에게까지 어떻게 그렇게 낯 뜨거운 이름을 지어주냐? " " 낯 뜨거운 이름? " " 에에? 몰랐어? 아스포델이라는 건, 고어로 나는... " " 안스륨 레브록. " 제피의 말을 뚝 잘라먹고 안스륨이 말했다. 제피는 말하다 말고 그를 보다가 싱글 싱글 웃더니 말을 이었다. " 아무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꼭 하고 싶은 부탁이 있어!! " " 처음보는 사람에게 부탁을 하다니, 낯이 두껍군. " " 어라? 당신에게 부탁하는 거 아니잖아요? 나는 지금 이 쪽의- 에에, 아스라고 부르면 되지? 아스에게 부탁하는 거라구요. 내 부탁, 들어줄거지? 너는 그 녀석과 달리 착해보이니까. " " 어, 저, 무슨 부탁인지 알아야... " 제피는 아스의 말이 끝나니가 무섭게 들고 있던 보따리를 풀고 안에서 드레스를 꺼내었다. 드레스는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품으로, 안스륨과 아스는 그가 이것을 꺼내는 연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 저어, 실은... ... " 제피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게 해서는 말했다. " 여기서는 힘들겠네. 이 여관에 묶는 거지? 방에 올라가서 이야기 하면 안될까? " 그래서 셋은 아까 잡은 좁은 방에 들어갔다. 안스륨은 천정이 낮기 때문에 바닥에 앉았고, 제피는 재빨리 보따리에서 온갖 것을 꺼내는데 잘 보니 모두 여자의 물건이었다. 드레스, 분, 장신구, 구두, 코르셋, 심지어는 가발까지. " 사실은 네가 이번에 누구 대신에 여장을 좀 하고 미인 대회에 나가줬으면 싶은데. " " 뭐어-?!!! " 아스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 사실, 원래 내가 내보내려 했던 녀석이 그만 토라져서 하지 않겠다고 해버렸거든. 짜식, 머리가 굵어지더니 이제는 내 말을 잘 안 듣는단 말이야. 어렸을땐 내 말이라면 죽고 못 살았으면서. " " 아니 저, 나는 남잔데? " " 그러니까 여장이라고 했잖아. " " 그런거라면 여자에게 부탁하지 왜 나를... ... " " 원래 내가 부탁하려 했던 녀석도 남자였어. 네가 아니면 안돼! 네가 그 녀석을 굉장히 닮았단 말이야! 체격도 비슷하고, 얼굴도 비슷하고! 분위기는 좀 틀리지만 좋아. " " 아니, 애초에 왜 미인대회에 남자를 내보내려고 한거야? " " 으음, 그건 말이지. 그 녀석이 어디가 그렇게 예쁜지는 나도 딱히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남녀를 막론하고 인기가 있으니까 말야. 미인대회에 투표하는 것은 남자뿐만이 아니라 여자도 많거든. 그래서 그냥 예쁘기만 해서는 절대 우승을 노릴 수 없어!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있는 마스크여야만 한다는 말이야. " " 나 역시 그렇게 잘생긴 얼굴이라고는... " " 아니야!!! 그 녀석과 이렇게나 닮았다면, 틀림없이 우승가능성이 있어! 아니야! 우승해! 여태까지 내가 찍었던 우승자는 틀린적이 없거든. " 아스는 제피의 열렬한 언사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 그런데 왜 미인 대회에서 우승하려는 거야? " "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 미인대회에 내깃돈을 거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야. 나는 계속 우승자를 정확히 점찍어 내깃돈을 걸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우승자를 찍기 때문에 돈을 따도 액수가 적단 말이야. 그래서 이번 해에는 아예 내가 우승자를 만들자고 생각한거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해에도 출전하는 작년의 쟈스민이 우승할거라고 내깃 돈을 걸고 있거든. " " 헤에? " " 그래서 처음 출전하는 제라늄에게는 아무도 돈을 걸지 않고 있어. 게다가 그게 누구인지도 모르고 말야. " " 제라늄이라니? " 그 말은 안스륨이 대신 설명했다. " 원래 전통깊은 이 미인대회에서 출전하는 처녀들은 가명으로 접수를 한다. 물론 내깃 돈이 너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지. 그, 쟈스민인가 하는 아가씨는 작년에도 이번에도 같은 이름으로 출전해서 사람들이 아는 모양이군. " " 맞아. 제라늄은 내가 접수해놓은 이름이거든. 고로 내가 여기에 돈을 걸어 네가 나가서 우승하면, 나는 돈을 왕-창 벌 수 있다 이 말씀!! " " 그렇지만 아스가 거기에 출전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 같군. " 안스륨의 말에 제피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 아니야! 우승 상품은 물론, 너에게 주겠어. 그 우승 상품이 대단한거여서 해마다 대륙에서 온갖 처녀들이 몰려든단 말이야. 애초에 서류심사로만 수백명이 떨어져. " 아스는 호기심에 물었다. " 상품이 뭔데?" " 에린지움의 잎사귀야. " " 벌써 맞은 모양이니, 저까지 때리진 않겠어요. " 펜의 냉랭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방금 일어나 머리를 땋고 있던 그녀는 밤새 달려온 월을 한번 흘낏 보고는 오늘 걸칠 망토를 골랐다. 월은 감정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펜 오키드님이 신경쓰실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생의 아리스타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보잘 것 없는 소년이었습니다. " " 후훗, 우습군요 월. 자, 이 망토 어때요? " 월은 펜이 치켜들은 보라색의 빌로드로 만들어져 섬세하게 은실로 수가 놓인 아름다운 망토를 쳐다봤다. " 아름답군요. " " 자아, 여기 핀으로 고정해줘요. " 월은 펜에게 다가가 수정으로 만들어진 핀으로 망토를 고정하기 시작했다. 수정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월을 바라보며 펜이 말했다. " 월. 당신은 저의 첫번째 묘목이긴 하지만 에린지움에서 난 씨로 만들어진 트리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없죠. 당신의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에린지움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라는 거예요. 보통 트리옌들은 에린지움의 많은 능력을 알고 있지만, 에린지움의 본질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에린지움은 절대로 마르지 않을 바다와도 같은 거예요. " 월은 핀을 다 고정시키고 펜에게서 조금 물러섰다. 펜은 월의 옷깃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면서 말을 이었다. " 나는 아리스타타를 단 한번도 본 적 없지만, 그 누구보다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잘 알아요. 그건 바로 내가 에린지움과 공명하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그게 내가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가장 큰 증거이구요. 아시겠어요? " " 네. " " 에린지움이 마르지 않는 바다라면, 아리스타타는 하늘을 치사시킬만큼 드높은 산봉우리예요. 그렇게 솟은 산봉우리는, 무너지지도, 꺾이지도, 흔들리지도 않아요. 구름조차도 자신의 발 아래 두고, 하늘과 마주하는 산이지요. 벼락이 자신을 때리면, 스스로 부서지는 그런 산 봉우리 말예요. 생전의 그녀를 지칭하는 수많은 말들이 있죠. 은빛의 여왕, 숲의 절대자, 무적의 여인... 하지만 과장되어 지지 않은 그녀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존심으로 뭉쳐진 얼음여왕이죠. 이 세상에 두번 다시 그런 여인은 없을 거예요. " 펜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대리석과 수정으로 만들어진 그렇게 넓진 않지만 아름다운 복도를 걷는 그녀의 어깨에서 보라색의 망토가 이따끔 반짝거리며 그녀의 은색 머리카락과 더불어 흔들렸다. " 겉모습만으로 상대를 보지 말아요. 월. 당신의 그런 자의적인 판단은, 내게 불쾌감을 불러 일으켜요. 나의 명령은 틀린 적이 없고, 틀릴 일도 없고, 당신의 섵부른 판단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내가 죽이라면 죽이는 거예요 월. 그게 나의 첫번째 묘목이 해야 할 일이예요. " 불쾌하다는 말과 달리 월을 뒤돌아 본 그녀는 후후 웃었다. " 아리스타타가 드높은 산봉우리라면, 저는 절대로 흔들림없는 반석이 되겠어요. 그녀가 드 높기 때문에 무너졌다면, 저는 반석이 되고, 나무의 뿌리가 될 거예요. 당장 다시 돌아가세요. 그리고 은밀히 아리스타타를 추적하세요. 그리고 없애요. 그것이 반석을 다지는 일이고, 나를 돕는 일이예요. 이것은 명령이고, 다시 돌아오면 뺨을 때릴 거예요. " " 제발! 제발! 부탁이야!!! " " 저도요, 에린지움의 잎사귀라잖아요? 어떤건지 너무 궁금하단 말이예요. " 안스륨은 매달리는 두 손을 뿌리치고는 성큼 성큼 걸었다. " 안스류움-! 제발요. 나, 그거 너무 갖고 싶단 말이예요!!! " " 나도!! 제발 내깃돈 많이 벌고 싶단 말야! 아니, 벌어야 해! 집에 아프신 어머니와 굶어 쇠약해진 어린 동생들이 일곱이나 있다구!!! " " 에에? 그거 정말? " 아스가 놀란 얼굴로 제피를 바라보자, 제피는 아스에게 재빨리 윙크를 하고 안스륨을 후다닥 쫓아가서 매달리기 시작했다. " 제발~ 제바알! 우리 식구들 다 굶어죽으면 네가 책임질래?! " " 안스류우우움! 부탁 안들어주면 여기서 울어버릴꺼야!! " 안스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아스를 쳐다보았다. 대체 울겠다는 협박을 아까부터 계속 해대는데, 무슨 부주의한 생각으로 저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스의 얇팍한 속셈이야, 제피의 부탁을 들어주고 에린지움의 잎사귀를 보고 싶다는 명목으로 미인대회에 출전해서, 끝까지 이 축제를 다 보고 갈 생각이겠지만. 제피는 아스가 울겠다고 협박하자 덩달아 말했다. " 나, 나도 울거야! 우아아아아아앙~!!!!!!!!!!! " 아직 어리다고는 하지만 다 자란 소년이 광장 한복판에서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자 안스륨의 인상이 절로 찌그러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셋을 쳐다보고 있었고, 아스도 필사적으로 눈물을 짜내려고 끙끙거리다가 간신히 눈물 한방울을 짜내는데 성공했다. 아스가 눈물을 짜내자 말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셋을 쳐다보는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안스륨은 왠지 유쾌하고 생소한 감각이 자신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고 황급히 아스의 머리통에 꿀밤을 때렸다. " 아얏!!! " " 우는 시늉은 그만해. 아스도, 너도. " " 쳇. " 제피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안스륨은 어지럽다는 듯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여기에서는 카멜의 기척을 읽어내기 쉬우니까 괜찮겠지. " 좋아. 하지만 카멜 그 녀석한테 들키면 안되니까 아스는 여기 있는 내내 여장을 하고 있어라. 그리고 절대로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 " 와아! 안스륨, 그럼 허락해 주는거야? " " 그래. 그리고 두번 다시 운다는 걸로 날 협박하려 들지마. " " 와아! 제피! 되었어! 나 축제 구경 할 수 있게 되었어!! " " 어? 어! 나도 되었어! 나도 돈 딸 수 있게 되었다구!! " 안스륨은 해바라기 처럼 활짝 피어나 웃는 아스의 얼굴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이 간지럽다. 하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저 아리스타타가 운다는 어설픈 협박을 해가며 떼를 쓰는 모습이라니. 조금 곤란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기쁘다. 안스륨 자신도 막 웃고 싶었다. 지금 당장 저렇게 팔짝거리고 뛰며 좋아하는 아스를 붙잡아 끌어안고, 이마에 입맞추고, 저 사랑스러운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리고 싶었다. 안스륨은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미소를 지으려다가, 문득 광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리스타타의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치켜들고, 조금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책하는 듯한 표정으로 저기에 서 있다. 안스륨의 얼굴이 도로 딱딱하게 굳었다. 아리스타타 그녀는 자신이 조금 곤란한 부탁을 할 때면, 항상 저런 식으로 말했었다. 절대로 부탁하는 모습이 아닌 듯, 턱을 치켜들고 입술을 꼭 다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것으로 자신의 승낙을 기다렸다. 자신이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듯이. 오래묵은, 익숙한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안스륨은 햇살 아래에서 미소짓는 아스를 바라보며 주변의 꽃 향기와, 늦은 오후의 붉은 햇살과, 많은 사람들의 즐거운 소음이 모두 자신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리같은 이질감이 자신을 둘러싸고,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카멜인가? 자신에게 이렇게나 외치는 것은. - 감히 네가, 네가 지금 이 행복을 즐기는 거냐? 네가 그럴 자격이 있느냐? 아니, 아니다. 카멜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몸을 지키라고 자신이 줬던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는 무너지는 아리스타타의 모습과 같은 자신의 죄책감이다. " ... 참고로, 저 녀석의 등에는 장미 인장이 있다. " 제피의 눈동자가 커졌다. 안스륨은 그가 열려고 잡고 있던 방문을 지그시 누르고는 그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천진해 보이는 호박색 눈동자가 커지고, 그가 더듬 말문을 열었다. " ... 도망 노예? " " 아냐. 잘 못 잡혀가서 우연히 찍힌 인장이다. 노예 따위가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인장이 찍혀있으면 노예라고 생각하는 놈들이 많지. 그런 의미에서, 너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줘야 겠다. 물론, 그 가벼워 보이는 입을 나불거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는, 너 자신이 피부로 느껴야 할 거다. " 제피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런 위압감은 처음이다.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자신을 내려다 보는 키 큰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는, 밤하늘을 때리는 벼락같은 위협을 담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귀하게 자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안스륨은, 아주 약간의 경고 차원에서 노려봐 줬을 뿐인데, 사생 결단 하듯이 눈을 흡뜨는 제피를 보고 피식 웃을뻔 했다. 조그맣고 건방지긴 하지만, 당찬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안스륨은 고개를 들고 문을 누르고 있던 팔을 떼었다. 그는 안스륨이 물러나자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안스륨이 자기가 드레스를 입히겠다고 부득불 우기기에, 코르셋을 맬 줄 아느냐는 제피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그것 때문이었는가 보았다. 레브록이라면 까마귀족의 성이다. 검은 머리카락들을 보았을 때부터 짐작했지만 그들은 수인족으로써, 어쩌면 저 인장을 들키면 큰 곤욕을 치뤄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제피 자신도 원하지 않는 바이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스가 기다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코르셋을 들고 형이학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를 보고 제피는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 명복을 비네, 친구. " " 에? " " 에, 가 아냐. 일단 속옷을 완벽하게 갖춰입어야 드레스를 입어도 맵시가 난다고. 일단 벗고 이거 입어. " " 어- 하지만. " 아스는 등의 그 무늬가 생각나 주춤거렸다. 제피는 안심하라는 듯 웃어보이며 말했다. " 그것에 대해서는 나도 들었어. 입 다물라고 밖의 아저씨께서 협박 하시던 걸? 그 사람 무서워서 라도 말 안할테니까 걱정마. " " 으응,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건- " 레이스가 잔뜩 달린... 이걸 뭐라고 해야하나? 어찌되었던 간에 아스는 옷을 벗고 그것을 껴 입었다. 아직 소년의 체구라 그 옷은 무리없이 들어갔지만, 코르셋을 조이게 되었을때 아스는 왜 제피가 자신의 명복을 빈다고 했는지 영문을 알 수 있었다. " 으아아아아아악~!!!!! " 그 비명소리에 안스륨이 달려 왔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안스륨은 문이 부서져라 뛰어들어와서는, 제피의 발 아래 깔려서 버둥거리는 아스를 보고 할 말을 잊었다. 제피는 사정없이 아스의 허리를 짓누르며 코르셋의 끈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아직 어리다고는 해도 남자의 힘이다. 아스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 허, 헉, 아, 안스륨, 사, 살려줘요-!!! " 하지만 안스륨은 냉정하게 그말을 일별했다. " 네가 원했던 일이야. 축제기간 내내 그걸 입고 돌아다니려면 꽤나 피곤하겠군. " " 안스류우우우우움-!!!! " 안스륨은 도로 방 문을 닫고는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아스의 비명소리를 무시하고 도로 홀로 내려왔다. 그리고 혼자 맥주를 시켜서 홀짝거리고 마시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서는 어느새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었고, 축제의 들뜬 분위기에 휩쓸려 간이 커진 사내들은 저침없이 판돈을 내걸며 떠들어 대었다. 안스륨은 이런 소음에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하지도 않을 뿐더러 싫어했다. 그가 사는 폭풍의 성채에는 언제나 안드리움 화산이 우짖는 열의 폭풍이 휘몰아 치는 소리가 우웅 거리고 울렸었지만 그것은 늘상 들리는 소리라 사람의 귀를 잠식하기 때문에 소음이라고는 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것을 제외하고 그곳은 항상 조용했다. 차갑도록 조용했다. 보통 인간이라면 참을 수 없을 뜨거운 열기가 휘몰아치는 바깥과는 달리, 넓고 넓은 성안의 바닥과 기둥은 얼어붙을 듯 차가운 고독과 침묵에 감싸여 있었고 그곳에서 항상 혼자였던 자신은 그것에 익숙했다. 하지만 안스륨은 어렵지 않게 이 소음속에 태연히 파묻혀 보통 인간같이 맥주를 마시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보통 사람들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생활한다... 먹고, 마시고, 호흡하고, 기뻐하고, 걱정하고, 걷고, 나눈다... ... 또 마음이 간질간질 했다. 안스륨이 애써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자, 문득 가게의 일하는 꼬마가 그에게 다가와 난처한 듯이 말했다. " 저어, 손님 죄송합니다만, 지금 탁자가 많이 모자라서, 합석을 하셔도 괜찮을런지요? 이 쪽분도 한 분 이시라. " " ... 알았다. " 축제의 때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안스륨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자 그의 앞자리에 조그만 그림자가 털썩 주저 앉았다. 반짝이는 감색의 짧은 고수머리가 눈앞에서 흔들리고, 짜증에 미간을 찡그린 하늘색 눈동자가 안스륨에게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축제라서 어디엘 가도 번잡스럽군요. 휴, 더워라. 이 자식은 대체 어디간거야?! " 안스륨은 눈앞의 소년이 찾는 그 자식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금 낯익은 얼굴. 그는 눈앞의 고수머리 소년이 시킨 맥주 주문을 받고 달려가려던 가게의 꼬마를 붙들고 말했다. " 미안하지만 맨 윗방에 올라가서 손님이 왔다고 전해라. " " 어, 네. " 안스륨은 맥주를 느긋하게 마시며 손부채를 파닥거리는 좋아보이는 옷차림의 소년에게 말했다. " 미안하지만 네가 찾는 그 자식이 다갈색 머리를 뒤로 묶고 바보같은 호박색 눈동자를 한 놈 아닌가? " "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설마 그 망할 자식 보셨습니까? " " 아아, 물론. " 그 말에 소년은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반쯤 몸을 일으켰다. 안스륨은 맥주를 마시면서 대꾸했다. " 조금있으면 올거니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는 좀 쉬는게 좋을 것 같군. " " 어휴, 그렇군요. 더 이상 쫓아다니기도 지쳤습니다. 에에- 저는 스타티스 입니다. 스티니 스타니 절대로 줄여서 부르지 마시길 바랍니다. 스타티스 입니다 스타티스. " 안스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맥주잔을 들어올리려다가 잠시 멈칫 했다. 계단에서 제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한 소녀가 조심조심 내려오고 있었다. 구두가 익숙치 않은 듯 한없이 위태로워 보이는 걸음따라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머리카락이 출렁였다. 목젖을 숨기기 위해 목까지 올라오는 조금 갑갑해 보이는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아스는 조금 중성적인 매력이 풍기는 활달한 말괄량이 아가씨처럼 보였다. 아스는 안스륨을 보고 연지를 바른 입술로 활짝 웃었다. 안스륨은 순간 환상을 보았다. 아리스타타가 자신을 보고 웃는 환상. 앞에 앉아있던 스타티스가 제피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외쳤다. " ㅇ... 아니아니, 제피란더스님!!! " " 여어, 스티-! " " 여어도 아니고 스티도 아닙니다! 도대체 어디 가 계셨습니까?! 그 소녀는 또 누구고요?! " 제피는 은근슬쩍 스타티스에게 아스의 손을 넘기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능갈치게 말했다. " 그야물론, 네가 죽어도 안된다고 그래서 네 대역을 찾고 있었지. 이 녀석이 그 대역이고, 잘 봐봐, 너를 많이 닮았지? " 그때서야 스타티스는 아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 에- 안녕하세요. 아스포델 레브록입니다. " " 아, 아? " 스타티스는 순간 아스의 이름 뜻에 놀라 조금 멈칫했지만, 오랫동안 훈련되어 온 그의 숙녀에 대한 예의에 따라 반사적으로 아스의 손을 들어올려 손등에 키스했다. " 예, 만나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레이디. 저는 스타티스입니다. 성을 밝힐 수 없는 저의 불충을 용서해주시길. " " 에엣? 아, 아니요! " 아스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레이디라니. 이런 모습도 사실은 부끄러워 죽겠는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낯익은 소년이 자신을 그렇게 지칭하자 얼굴을 어디둬야 할지 모를 기분이었다. 스타티스는 곧 고개를 들어 아스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고개를 갸우뚱 했다. " 실례지만 레이디, 혹시 어디에선가 저와 마주친 적이 계시지 않습니까? " 아스는 그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스타티스의 손에서 안스륨이 아스의 손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안스륨은 우아한 동작으로 팔을 벌리며 고개를 숙였다. 스타티스는 순간 눈앞에 앉아있는 수인족으로 보이던 사내의 완벽하고 아름다운 예법에 놀랐고, 제피는 안스륨은 무척 고풍스러운 인사법에 놀랐다. 안스륨은 아스의 손등에 입맞추며 시선만을 들어올렸다. 아스 역시 놀라 입을 벌렸다. 안스륨이 웃었기 때문이다. " 저 역시 만나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레.이.디. " 한 참이 지나고, 안스륨이 아스의 손을 놓아주고 나서야 아스는 그것이 비웃음임을 깨달았다. 안스륨이 자신을 놀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스는 얼굴을 벌겋게 달구고는 소리쳤다. " 안스륨!!! " 제피는 모두를 끌어모아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 낯이 익은게 당연하지. 잘 봐봐 두 사람, 서로 닮지 않았어? " " 에에? " 스타티스와 아스는 의아한 듯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곧 인상을 찌푸리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 그럴리가? 난 이렇게 예쁘장하지 않아! " " 그럴리가? 난 여자가 아니야! " 곧 둘은 서로 으르렁 시선을 마주대었다. 아스는 아무리 여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안스륨에게 놀림을 당한터에 레이디인 여자라는 소리가 기분 좋을리 없었고, 스타티스는 예쁘장 하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탓이다. " 미안하지만 난 여자가 아니야! 제피의 부탁으로 여장을 했을 뿐이지! " " 미안하지만 나 역시 예쁘장하게 생기지 않았어! 이 도시 최고의 검객인 나를 보고 예쁘장?! 꼬치가 되고싶냐?! " " 두 사람 다 조용히 해! 아스는 특히 입 다물어. 누구라도 알게 되면 나만 곤란해 지니까! 그리고 스티가 예쁘장한건 사실이잖아? " " 스티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스타티스입니다! " 안스륨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끄러운게 하나 더 늘어났다. 안스륨은 묵묵히 맥주를 마시면서 아스와 스타티스를 관찰했다. 이목구비가 조금 닮긴 했다. 동그래도 끝이 새초롬한 조금 장난끼 어린 눈매라든지, 조그만 코나 입이라던지... 하지만 이목구비가 조금 닮았을 뿐 두사람이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틀렸다. 스타티스의 검객 운운하는 소리는 틀린 말이 아닌 듯, 그의 허리춤에는 얇은 세검이 두자루나 매달려 있었고, 아스와는 달리 어깨나 팔이 제법 단단하고 무엇보다 손이 크고 굳은살이 여기저기 박혀 거칠었다. 얼핏 보면 그렇게 닮았다고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제피의 눈썰미는 뛰어난 듯, 두 사람을 그렇게 나란히 앉혀놓자 꼭 남매로 보였다. " 아무튼 또 제게 말 없이 제 멋대로 나가시다니요! " " 시끄러워. 애초에 내 부탁도 무시하고 나가버린 건 너잖아. 당장 내일 밤에 출전해야 하는데 빨리 대역을 구해야 했다구. 여차하면 나라도 여장하려고 마음먹을 정도였단 말이야. " " 그건 핑계가 아닙니다! 당신도 왜 그런 부탁을 들어주는 겁니까?! 남자가 여장을 하다니, 자존심도 없습니까? " " 뭐야! 자존심이 없다니! 지금 여장했다고 나 무시하는 거냐!! " " 어디서 반말입니까 반말이!!! " " 존댓말은 마음에 우러나와야 하는거야!! " " 뭐?! 제피님과 같이 있어서 오냐오냐 해주니까... 한 판 해볼래?!! " 어느새 제피는 뒤로 빠지고 스타티스와 아스의 설전이 되어버렸다. 스타티스가 허리에 참 검을 덜그럭거리며 협박하기 시작하자 아스 역시 얼굴을 붉그락 푸르락 물들이며 당장 가발을 집어던질 기세다. 안스륨은 반쯤 몸을 일으킨 두사람을 손으로 내리누르며 말했다. " 시끄러워. " " 그래 그래. 지금 여기서 투닥거릴때가 아니라고. 오늘 저녁에 예선이 있단 말이야. 가지 않으면 탈락이라구. " " 제피님! 되지도 않는 그런 내기 따위 관두십시오! 이런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꼬마가 우승할리도 없잖습니까! " " 뭐야! 불만이면 니가 해! 니가 해!!! " " 시끄럽다. " 안스륨이 잔뜩 불만에 찬 어조로 말하자 그제서야 두 사람의 입이 다물렸다. 사태가 좀 진정되자 제피가 얼른 아스를 이끌고 여관의 바깥으로 나왔고 안스륨과 스타티스가 뒤를 따랐다. 스타티스는 가는 길에도 연신 궁시렁 거렸고, 아스는 그런 스타티스를 때때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제피는 그 사이에 끼여서 실실거리고 웃고 있었다. 밖은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 했고, 광장 곳곳에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광장 한켠에 마련된 곳에서 예선심사가 이루어 지고 있었고 중앙에는 집시들이 차지하고 앉아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예선 순서를 기다리는 처녀들과 마을 처녀들과 남자들이 노랫소리에 맞추어 경쾌하게 발을 움직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색색깔의 꽃을 머리에 꽃아 틀어올린 처녀들의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이 들뜬 축제의 밤 향기를 머금고 빙글빙글 돌았다. 일행은 예선순서를 기다리며 춤추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스가 탄성을 내지르며 볼을 붉게 물들였고, 제피도 발로 바닥을 가볍게 치며 장단을 맞추었다. 멋진 밤이었다. 세상의 사람들은 행복의 꽃이 이 밤에 가득 핀 듯 모두 웃고 있었고 안스륨마저도 조금 들뜨게 만드는 축제의 특별한 힘이 밤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때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스타티스에게 한 처녀가 다가오더니 수줍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옷차림은 조금 남루하지만 아름답고 귀여운 소녀였다. 스타티스는 당황한 낯빛으로 얼굴을 붉히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제파가 와하하핫 웃으면서 스타티스를 춤추는 일행사이로 밀어넣었다. 스타티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곧 숙녀에 대한 예의의 피가 발동되었는지 공중에서 발을 맞부딪히며 인사를 하고 소녀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제피도 몸이 근질근질 했는지 아스를 앞으로 이끌었다. 아스가 당황해서 외쳤다. " 난 춤 출 줄 몰라! " " 괜찮아. 금방 따라할 수 있어. 내 발 세번 밟는 것 까지 용서해줄께!! " " 안스륨! " 안스륨은 조금 난처한 듯 조금 재미있는 듯 흥분한 아스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는 제피에게 끌려나가 머뭇머뭇 거렸고, 제피는 그런 아스를 보고 능숙하게 공중에서 발을 맞부딪히더니 아스를 이끌기 시작했다. 아스는 곧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제피가 이끄는 대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까르르, 하는 그의 웃음소리가 안스륨의 바로 곁에서 들리는 듯 했다. 안스륨은 아스의 웃음과, 그의 기쁨과, 축제의 열기 속에 푹 잠겨 남 몰래 미소지었다. 그때였다. 그가 기대 서 있던 벽의 옆 골목길에서 뜨거운 열기가 튀어나와 그를 삼켰다. 춤곡이 바뀌어 군무가 되었다. 남녀는 각자 길게 늘어서 서로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 아스의 예명- 제라늄을 부르는 예선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기에, 군무도 출 줄 모르고 하는 아스는 줄에서 빠져나왔다. 제피도 같이 나오려고 하기에, 아스는 그가 무척 신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말했다. " 나 혼자 다녀올 수 있으니까 추고 있어. 다녀올게. 뭐 어려운 것은 없지? " " 응! 그냥 확인 만하고 심사단이 시키는 대로 몇 바퀴 돌기만 하면 돼! " 황급히 인사를 하며 제피가 대꾸했다. 아스는 안심하라는 듯 손을 흔들어 주고는 예선 심사단 쪽으로 갔다. 자기 말고도 몇명의 처녀들이 몰려 서 있었다. 심사단은 아스를 확인하고는 뒤로 돌아봐라, 옆으로 걸어봐라, 웃어봐라, 잘하는게 무어냐 등등 따위를 물었다. 잘하는게 뭐냐는 소리에 아스는 조금 멈칫했지만, 달리 대꾸할게 없어 노래라고 대꾸했다. 심사단은 곧 합격-이라고 말했고, 아스는 혹시나 남자인 걸 들키면 어떻게 하나 조금 조마조마 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군무쪽을 보니 스타티스도 제피도 처녀들의 손을 잡으며 멋들어지게 추고 있었다. 아스는 안스륨에게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아까 안스륨이 서 있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혹시 그 옆의 골목 안쪽으로 갔나, 싶어서 안스륨은 어두운 골목길을 기웃거렸다. " 안스류움-! 거기 있어요? 어디 있어요? " 아스는 순간 그림자가 진다고 생각했고, 그때 뒤에서 거친 팔이 튀어나와 아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 -- 읍!! " 아스는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한손에 그러모아 쥐고는 위로 들어올리는 것을 느꼈다. 발이 바닥에서 한 참 떨어졌다. 굉장한 거한이 그를 뒤에서 붙잡고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광장의 소란스러움과는 다른 골목의 조용함과 더러운 어둠속에서 몇명의 인영이 걸어나왔다. 아스는 뒤의 거한의 모습을 확인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와 입김에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느꼈다. " 확실하겠지. " 그의 말에 앞서 나온 보기 흉한 곱추가 손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 물론입죠. 그 여관주점에서 일하는 꼬마가 말해줬습니다요. 도망 노예가 확실합니다. 뭣하면 확인해보이시죠. " " 아니, 됐다. 돈을 줘라. " 아까 옷을 갈아입던 도중에 손님이 왔다고 알리러 온 여관의 꼬마가 푼돈을 벌기 위해 노예상단의 끄나풀인 곱추에게 말했던 것이다. 곱추와 함께 있던 음울한 인상의 바싹 마른 사내는 허리춤에서 금화 두푼을 꺼내 그에게 튕겨주었다. 곱추는 그것을 재빨리 낚아채어 꼽등이처럼 후다닥거리며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거한은 큰 손으로 아스의 목과 턱을 한손으로 틀어쥐고는 그를 자신에게로 당겨 아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스는 거한의 징그러운 얼굴과, 거대한 몸집, 송충이가 기어가는 듯 음산하고 꺼끌꺼끌한 목소리, 역한 냄새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괜찮은 얼굴이군. 이만하면 상급품이다. 도망 노예라면 귀찮은 일도 훨씬 줄고. " " 오늘밤은 이만할까요? " " 그래. 난 이 축제가 참 좋아. 멋 모르고 나다니는 이런 여자들을 낚을 수 있으니까. " 덩치 큰 거한은 노예 사냥꾼 이었다. 몰래 인신매매를 하고 불법적인 거래로 노예상단에서부터 돈을 벌어들이는 놈이었던 것이다. 그는 고리대금으로 가난한 집의 버러지같은 아비들이 저당잡히곤 하는 처녀들 이외에도 도망노예를 잡거나 이런 축제일에 몰래 몰래 처녀들을 납치하여 팔아치우는 짐승같은 놈이었다. 아스는 속으로 필사적으로 안스륨을 불렀지만 마른 사내가 아스의 입을 동여매었기에 들릴리가 만무했다. 마른 사내가 사람이 들어갈만한 큰 자루를 꺼내었고, 거한이 그것을 아스에게 덮어씌우기 시작했다. 시야가 어두워지고 몸이 구속되는 것을 느끼며 아스는 무언의 외침을 보내었다. ---- 안스륨! 안스륨!!! " 누구냐? " " !! " 아스는 자루속에 들어가 시야가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안스륨이 나타났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안스륨이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다. 그와 처음 만났을때와 마찬가지로. 아스는 자신이 안스륨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반가움에 눈물이 나오려 했다. " 으헉! " 곧 어지러운 사람들의 발소리와, 땅을 치는 둔중한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그리고는 곧 거한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 으아아악!!! " 투두둑, 하고 어떤 액체가 바닥에 흩어지는 소리. 털썩, 하고 무엇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곧 타다닥 발소리들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고, 거한이 분에 찬 목소리로 쩌렁쩌렁 외치는 것이 들렸다. " 두고보자!!! " 그리고 잠깐의 침묵. 아스는 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꾹 참았다. 안스륨은 자신이 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스는 가볍게 다가오는 안스륨의 발소리를 들었다. 곧 그 발소리는 아스의 앞에 멈추었고, 아스를 칭칭 동인 자루를 벗겨내었다. " ㅇ... ...!! " 자신의 눈앞에 보인 것은, 카멜이었다. 아스는 반가움에 외치려던 말끝을 흐렸고, 카멜의 금발머리와, 그의 녹색 눈동자와,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황망히 쳐다보았다. 다음에 만나면 그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은... 적어도 지금은 가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도 즐겁고 즐거운 이때에, 그를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아스는 조용히 카멜이 자신을 묶은 밧줄을 풀어내고 입을 묶은 천을 풀어내기를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이 산더미 같은 질문들 먼저 물어야 할까? 하지만 안스륨이 기다려 달라고 했다. 당분간만이라고. 당분간만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했다. 아스는 뭐라 할말을 찾지 못한 채 카멜이 내미는 손을 바라보았다. 카멜은 아스가 자신이 내민 손을 바라보기만 하자 그의 겨드랑이를 잡고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 말없이 드레스 자락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었다. " 괜찮으십니까? " " ... ... 예... 구해줘서... 고마워요. " " 아닙니다. " 카멜은, 물끄러미 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로 잊혀졌던 지난 수백년의 시간이 바람이 되어 지나쳤다. 아스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고, 카멜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 결과 둘은 한참을 서로를 응시했고, 아스는 카멜의 눈동자에 덧씌운 많은 그리움과, 당장 그의 마음을 박차고 뛰어나올 많은 감정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었다. 아스는 또 하마터면 그의 이름을 부를 뻔 했다. 그와 계곡에서 마주쳤을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지었던, 그 슬픈 표정을 했기 때문이다. 아스는 카멜에게서 아주 익숙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한동안 잊었다가 발견해낸 어린시절의 보물상자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말없는 둘의 귓전에, 광장에서 들려오는 춤곡이 침묵이 되어 울렸다. 카멜이 손을 내밀었다. " 가실까요. " 안스륨은, 차가운 성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고개를 한 참 꺾어야만 보이는 높은 천장. 거인의 창을 그대로 박아놓은 듯한 끝없는 기둥들. 양 옆과 밖으로 넓게 뻗은 테라스에는 성 안에까지 침범하지 못하는 안드리움의 번뇌의 열기가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날뛴다. 안스륨- 아니, 무스카리는 이 익숙하고 냉막한 차가움과, 무서운 열기 속에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인을 응시했다. 머리는 짤막한 적금발에, 냉철한 눈매에 어울리지 않는 눈동자는 이글거리는 핏빛이다. 자신만큼이나 키가 크고, 거추장스럽지 않게 볼륨없는 몸매는 한자루의 창과 같이 날카롭다. 마치 남자같이 건조한 턱선과 입매는 절대로 웃지 않을 것 같은 무거움이 내려앉아 있다. 그녀는 안 그래도 큰 키에 등을 꼿꼿히 펴고 서서, 검사처럼 끝이 짧고 뭉툭한 긴 손가락을 허리에 얹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스카리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어머니. " 그녀가 한없이 무거워 보이기만 하던 입매를 천천히 열었다. " 어머니라는 단어는 네게 어울리지 않는구나, 무스카리. " " ... 에리카 로벨리아. " " 그 나무를 다시 찾았던 모양이더군. " 아마 레지가 말했겠지. 무스카리는 이를 꽉 다물었다. " 여전히 아름답더냐? 그녀는? " " ... 환생체는 평범한 소년입니다. " " 네가 그런식으로 말하다니 우습구나. " " ... ... 네. 아름답습니다. " " 너의 실수를 잊을만큼 말이지. " 무스카리는 입을 다물었다. 골드 드래곤 에리카 로벨리아. 자신의 어머니. 자신에게 저 무적의 여인 아리스타타의 심장을 가져오라 명했던 사람. 무스카리는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에리카는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 너는 그럴 수 없다 무스카리. 너는 번뇌와 고독과 악의의 자식이다. 그런 희극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 " ... ... " 에리카는 금욕적으로 보이는 얼굴에 실같은 미소를 띄웠다. 그는 무스카리의 턱을 치켜들며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그와 마주했다. 무스카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 내가 명령하지 않아도 네가 원하겠지. 이번에야 말로 가져와. 아리스타타의 심장을. " 빙글빙글 돌고 있는 사람들의 가운데에 선 아스는 내민 카멜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아스를 이끌고, 당장 안스륨을 피해 도망가지도, 안스륨이 어디있냐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그저 그를 데리고 사람들이 춤추는 곳으로 데려왔을 뿐. 아스는 당황하여 설마 자신이 여장을 해서 카멜이 못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카멜은 아스가 멍하게 있자 자기 스스로 아스의 손을 붙잡아 올려서, 고개를 깊히 숙이고는 그의 손등에 입 맞추었다. "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저의 이름은 카멜리아 버베나. 당신의 첫번째 묘목이자 트리옌들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입니다. " 아니었다. 카멜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카멜이 착각할리가 없었다.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인 그는 그 누구보다도 아스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서 나오는 향기는 여전히 그를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고. 자신을 그리움의 나락으로 빠트린다. 카멜은 아스의 다른 손을 맞잡으며 청했다. " 저와 함께 춤추시겠습니까, 레이디...? " 아스는 그의 처연한 표정을 읽었다. 알 수 있었다. 아스는 왠지 모르지만 알 수 있었다. 카멜은 지금 이 순간.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이 순간, 그와 다만 춤추고, 다른 사람들처럼 음악에 몸을 맡기고, 조금이나마 미소지으며 이 순간 행복해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는 다만 자신과 춤추고 싶어 하는 것이다. 아스는 대꾸없이 고개를 숙였고, 카멜은 부드럽게 한 손으로 아스의 손을 잡고, 한 팔로 아스의 허리를 잡고, 그를 이끌어 나갔다. 집시들의 경쾌한 음악소리가 둘의 발을 저절로 움직였다. 장신구와 탬버린을 짤랑거리며 춤추는 남녀의 사이를 누비는 곱슬머리 집시여인의 노랫소리에 맞추어, 주변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아름다운 내 아가씨, 저와 함께 춤추시겠어요, 수줍은 내 아가씨, 저와 함께 춤춰주세요. 남자들은 공중에서 발을 부딪히고, 여자들은 치마를 벌려 양 옆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둘다 위로 한 손을 치켜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 서로의 어깨와 허리를 휘감는다. 남자들의 긴 바지와 허리춤으로 여인들의 치맛자락이 감겨들고, 광장의 분수대 주변을 빙글 빙글 돌기 시작한다. 곱슬머리의 집시여인은 카멜에게 미소지었다가, 꽃무덤에 싸인 아리스타타의 조각상을 빙글 돌아 긴 머리카락과 이국적인 무늬의 망토를 휘날리며 목청을 돋우었다. 오늘밤만은 저 달빛을 두려워 말아요. 오늘밤 내 손을 잡을 것은 검도 아닌, 술잔도 아닌, 바로 당신. 타다닥, 바닥을 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경쾌하게 울린다. 둘의 주변을 감싼 경쾌함과, 즐거운 소음과, 집시의 노랫소리가 무거운 세월을 잠시라도 잊게 만들고 있었다. 카멜의 손에 얹힌 아스의 손은 따스했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발은 어디까지라도 그를 따라올 듯 했다. 사르륵 사르륵, 이따끔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려 자신의 얼굴에 휘감기는 것을 느끼며 카멜도 환상을 보았다. 그대에게 영원을 약속할게요. 우리들의 영원은 지금 바로 이 순간! 에린지움의 가지만큼이나 흰 얼굴이 화사하게 빛나고, 청록색의 눈동자가 그를 보고 반달이 되어 웃는다. 은빛의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꽃잎처럼 흩날리고 자신은 지금 그녀를 품에 안고 그 수백년의 괴로움과 고통을 다 잊는다. 아스는 인형처럼 굳어있기만 하던 카멜의 얼굴이 희미하게 미소짓는 것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슬프지 않고, 복잡하지 않은 표정을 한, 미소짓는 카멜은 정말로 애틋하게 아름다워 그의 마음을 울렸다. 아름다운 내 아가씨, 저와 함께 춤추시겠어요, 하나뿐인 내 아가씨, 저와 함께 춤춰요. 다시 제자리에 선 남녀가 고개를 숙이고, 한바퀴를 빙글 돌고, 자리를 바꾼다. 아스는 자신의 등과 어깨를 감싸안는 카멜의 팔과, 그의 머리를 끌어안는 카멜의 어깨를 느꼈다. 아스는 훗- 하고 느껴지는 카멜의 체향이 무척이나 신선하다고 느꼈다. 처음... 처음 그 어지럽고 지저분한 도시에서 마주쳤을때, 자신의 머리를 맑게 하고, 눈을 뜨이게 했던 그 향기이고 그 공기이다. 아스가 그것이 멀어진다고 생각하자, 마지막으로 아스를 꼭 안았던 카멜은 벌써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하는 남자들의 열에 맞춰 분수 저 편으로 멀어졌고,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춤이 시작될때에 그의 금발머리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스는 갑갑함이 자신의 어깨를 뒤 흔들어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팔을 내 뻗게 만드는 것을 알았다. 아스는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엉거주춤 밀려 바깥으로 튕겨 나왔다. 아스는 황망히 카멜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아직 자신에게 남은 카멜의 향취를 느꼈다. 그 향취는 아스를 급히 다그쳤다. 아스는 커다란 아쉬움이 자신을 덮친다고 생각했다. 그때 제피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 어디 갔었어? 한참 찾았었잖아. 아까 너랑 춤추던 트리옌, 너와 아는 사이냐? 굉장한 미남이던데. 게다가 그 멋들어진 장검이라니! 틀림없이 나이트일거야! 그리고 안스륨은 어디갔어? " " ... ... " 아스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사라지던 그의 뒷모습이 몇번이나 떠오르며, 그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모르는 많은 기억과 세월들이 그를 짓눌렀다. 아스는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끼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제피가 당황하여 왜 그래? 라고 묻는 말들 사이사이로, 축제의 열기에 빛나고 있는 광장 사이사이로 다른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그것은 숲이었다. 아주 조용하고 깊은 숲.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지독히도 조용한 숲. " 아스-? 아스!! " 아스는 휘청 무릎이 꺾였다. 제피가 재빨리 아스를 부축했지만 아스는 이미 제피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아스는 갑자기 그를 찾아든 그 꿈속의 선명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숲이다, 아주 조용하고 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거기서 자신은 방황하고 있다. 발치에는 반 투명한 치맛자락이 걸리고, 숙이는 고개와 어깨로 물결같은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린다. 나무를 짚은 손은 자작나무 가지처럼 희고, 자신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때, 아스는 무언가의 시선에 사로잡힌다. 깊은 숲의 그림자 저편에서, 이글거리고 불타오르고 한없이 열망하는 뜨거운 시선이 자신을 사로잡는다. 자신은 그 시선을 마주대하면 움직일 수도 없고, 숨 쉴수 조차도 없지만, 절대로 고개를 돌릴 수 없다. 아니, 돌리고 싶지 않다. 눈을 감아버리고 싶지만, 큰 키에 붉은 머리카락을 한 남자의 울렁거리는 황금빛 시선은 자신을 그렇게 두지 않는다. 숨조차 쉴 수 없어 가슴이 헐떡 거리는 가운데에서도, 아스는 앞으로 가야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나갈 듯 몸을 숙이며 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그러면 누군가가 자신의 팔목을 잡아챈다. 아스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다보고, 그곳에 금발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한 아름다운 남자가 서서 필사적인 표정으로 외친다. - 안 됩니다!!! 아스는 정신을 잃었다. 잠깐의 어지러움이 무스카리의 발밑을 휘감고, 광장의 소란스러움이 다시금 찾아들었다. 그리고 무스카리는 안스륨으로 돌아왔다. 안스륨은 식은땀이 조금 베어나온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고 눈을 떴다. 안드리움의 불꽃을 닮은 그 핏빛 눈동자는 간 곳이 없고, 자신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여기가 환상인가. 이토록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 아리스타타가 자신을 보고 미소짓는 곳. 여기가 꿈이다. 영혼을 녹이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냉혹한 그 성채가 자신의 현실이다. 그 성채안에 갇혀 증오스러운 시선만을 보내던 아리스타타가 자신의 현실이다. 이것은 꿈이다. 안스륨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러다 문득 카멜의 기척이 사방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스륨은 소스라치듯 기대섰던 벽에서 몸을 뗐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찾았다. 하지만 평소라면 금방 눈에 띄였을 짧고 나풀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안스륨은 광장의 주변을 둘러싼 인파를 헤치며 자신보다 훨씬 큰 옷을 걸치고 가볍게 뛰어갈 아스의 뒷모습을 찾아 헤매었다. 가슴이 먹먹해져 오고, 큰 불안감이 그의 발걸음을 흐트린다. 이렇게 나무가 그다지 없는 곳이라면 트리옌의 기척은 금방 잡아낼 수 있겠지만, 카멜의 느낌과 이렇게 큰 축제에 몇 명 끼어들었을 다른 트리옌들의 기척에 가려 안스륨은 방향을 잡아낼 수가 없었다. 수백년 카멜의 뒤통수만 노려보며 방황해왔던 그 세월이 다시 떠오르며 안스륨은 두려움에 찬 눈동자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스. 아스. " 안스륨!!! " 안스륨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웬 갈색머리카락의 소녀를 들쳐업은 낯익은 소년 둘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안스륨은 마음의 공황속에서 그들이 누군지 잠시 멍하니 기억을 더듬어야만 했다. 그 둘은 제피와 스타티스였다. 그제야 안스륨은 등에 업힌 사람이 아스이고, 아스가 미인대회에 참가하고 카멜을 피하기 위해 여장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안스륨은 떨리는 손으로 축 늘어진 아스를 넘겨받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도 자신은 알 수 없다. " 왜 이렇지? 무슨 일이 있었나?! " " 몰라, 갑자기 휘청거린다 싶더니만 쓰러졌어. 어디가 아픈거 아냐? " 안스륨은 급히 아스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별다른 열도 없고, 어디가 다친 것 같지도... 안스륨은 아스의 몸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여러가지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연지의 달짝지근한 냄새와 불쾌한 체취가 그의 코를 스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신경 거슬리게 만든것은 그것들을 가리고 있는 카멜의 향기였다. 안스륨은 자신이 에리카의 환상에 이끌려 가 있는 동안 아스가 카멜을 만났음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역겨운 인간의 냄새는... 안스륨은 아스를 살펴보다가 문득 아스의 팔목에서 희미한 밧줄자국을 발견했다. 카멜이 이랬을리는 없다. 무슨 생각으로 카멜이 혼자 있는 아스를 그냥 두고 갔는지는 몰라도, 이 밧줄자국과 역겨운 냄새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안스륨은 아스의 등에 나있는 노예의 인장에 생각에 미치면서, 아스의 곁에 잠깐이나마 있을 수 없었던 자신을 책했다. 안스륨은 제피를 노려보았다. " 내가 경고했던 것, 잊지 않았겠지. " 제피는 펄쩍 뛰면서 화를 내었다. " 사람을 뭘로 보는거야? 나를 그렇게 입싼 의리없는 놈으로 보지 말라고! " " ... 아무래도 예감이 안 좋다. 무슨 일을 당한 것 같군. " " 에에, 예의 그것 때문인거야? " " 혹시 안전하게 묵을 만한 곳을 구할 수 없을까. " 제피는 그게 뭔데요? 라며 미간을 찡그리고 묻는 스타티스를 잠깐 쳐다보았다가, 흐음- 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곧 앞장을 서며 안스륨을 손짓했다. " 그렇게 안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그리 편한 잠자리가 되진 않겠지만, 안전하지 못한 곳보다야 낫겠지. 따라와. 스티, 너는 여관에 가서 이 사람들 짐을 좀 챙겨와. " " 에엣? 제가 어째서 이런 심부름까지 해야합니까? " " 그럼, 내가 꼭 여기서 너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딱딱하게 굴어야겠어? " 스타티스는 인상을 구기면서 궁시렁궁시렁 여관 골목 쪽으로 사라졌다. 제피는 아스를 안은 안스륨을 성 쪽으로 난 길에 안내했다. 약간의 시간을 걸어 도착한 곳은 성을 크게 돌아 성의 뒤쪽으로 나와 있는 몇개인가의 건물과 공터로써, 보아하니 성의 고용인들이 살기도 하고 성으로 가는 물건들을 검품하기도 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 공터의 중앙에 큰 천막이 쳐져 있었는데, 그곳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러 나간 듯 조용했다. 제피는 그 천막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한 천막의 입구를 들추었다. 그러자 천막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한 여인이 반가운 얼굴로 외쳤다. " 제피!! " " 야아, 시라! " " 꺄아, 오랫만이야! 불러놓고 왜 안오나 했어! " " 난 아까 봤는걸? 노래 정말 멋졌어!! " 아까 광장에서 탬버린을 들고 노래를 부르던 곱슬머리 처녀였다. 그녀는 한참을 제피를 보고 꺅꺅거리며 좋아하더니, 안스륨을 보고 말했다. " 이 미남, 소개해주지 않을테야? " " 아, 응. 이쪽은 안스륨. 까마귀족이야. 그리고 품에 안겨 있는 아가씨는 아스. " " 반가와요. 난 시네라리아. 시라라고 불러요. 그나저나, 정말 내 타입이네. " 안스륨은 자신을 보고 몸을 꼬는 시라를 보고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했다. 제피는 둘을 가리키며 손을 모았다. " 저어, 사실은 이 분들이 묵을데가 없어서 그런데, 여기 있을 동안만 부탁하면 안될까? " " 뭐어? 에에, 그야 그다지 어렵지는 않지만. 분쟁거리가 있어서 숨는거라면 곤란해. 싸움질이라도 나면, 한 두 사람 쯤 칼로 꼭 쑤셔야 직성이 풀리는 놈들도 많다는 거, 알잖아. 떠돌다 보니 거친 녀석들이 많아서. " " 그런 일이라면 걱정 마. 이 분이 알아서 하실거야. " " 흐응, 그래. 그럼 내 천막을 써. 나는 당분간 다른 곳에서 자면 되니까. 그런데 저런 늑대씨랑 귀여운 아가씨는 한 천막에 둬도 되는 사이? " " 음, 에- 그게. " " 물론. " 제피가 설명해야 하나, 라는 듯한 태도로 말하려 하자, 그것을 자르고 안스륨이 입을 열었다. " 물론. 약속된 사이다. " " 으음. 뭐 그렇다면야. " 제피도 어차피 아스는 남자니까 상관없겠지, 하고 안스륨을 돌아보았다. 그럼, 편히 쉬라는 말을 뒤로 하고 시라는 제피를 이끌고 방해하면 안되는 둥 어쩌는 둥 하는 소리를 하며 천막 밖으로 사라졌다. 안스륨은 시라가 비켜준 자리에 아스를 조심스레 눕혔다. 그리고 갑갑해 보이는 드레스의 목을 조금 풀고 등 뒤의 단추를 끄른 후 코르셋의 끈을 풀어 느슨하게 해주었다. 아스는 한결 편한 듯 뒤척거리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른 숨소리를 보니 쓰러졌다가 이제는 깊은 잠이 든 모양이다. 안스륨은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아 조심조심 아스의 가발을 벗기고 그의 흐트러진 머리를 바로 했다. 멀리서 축제의 들뜬 소음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천막이 스치는 바람에 조금 흔들리고, 입구로 새어들어온 바람에 희미한 꽃냄새가 묻어났다. 조용했다. 안스륨은 문득, 입 밖으로 소리내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아리스타타. " 조용한 천막안에 그의 목소리가 생경스러운 울림이 되었다. " 아리스타타. " -이번에야 말로 가져와, 아리스타타의 심장을. 안스륨은 아스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깊은 시름에 잠겼다. 카멜은 온 몸 가득 달빛을 한 껏 받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힘껏 폈다. 그 달빛이 아리스타타라도 되는 듯이. 그를 녹이기라도 할 듯 부드러운 달빛이 그의 금발머리를 어루만졌다. 카멜은 아슬아슬한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멀리 흐르는 별들의 길과 달빛을 우러러 보았다. 아직도 품 안에 그 따스한 느낌이 남아 있는 듯 했다. 아직도 손안에 부드러운 그 느낌이 남아 있는 듯 했다. 카멜은 여태껏 자신이 아리스타타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리스타타를 품에 안고, 그녀와 함께 춤을 췄다. 밤바람과 꽃냄새에 어우러져 카멜은 모든 것을 잊었고, 모든 것을 생각해내었다. 은빛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에린지움의 밑에서, 그 나무가 서 있는 달빛의 들판에서, 숱하게 그녀를 봐 왔었던 지난 시간들이, 그에게 고통으로 잊혀졌던 추억이 다시금 그를 찾아왔다. 에린지움 아래의 차가운 관에 둘러싸인 창백한 얼굴이 아닌, 복숭아빛 생기를 머금고 빛나던 그녀의 얼굴을 카멜은 너무도 오랜만에 기억해내었다. 무스카리의 비웃음과 지금도 그를 빼앗겼다는 분노에 가려 자신은 이때껏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리스타타는 돌아왔다. 그 강인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영혼은 다시금 자신의 앞에 서 있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일을, 자신은 해 내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아리스타타의 곁을 지켰던 것도 자신이고, 그녀를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도 자신이었다. 그것은, 무스카리가 전쟁 때 짓밟았던 그녀의 그 짧은 시간에 비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단정적인 어조로 말하던 그녀, 생각에 잠긴 그녀, 성난 듯 눈썹을 들어올리던 그녀, 턱을 들어올리며 소리치던 그녀, 가끔 피곤한 기색으로 이마를 짚던 그녀, 눈을 감고 에린지움의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공명하던 그녀... ... 무수히 많은 아리스타타가 떠올라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그에 연달아 아리스타타의 목소리까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명령이야, 카멜. 무슨 소리하는 거야, 카멜. 카멜리아 버베나, 나의 첫번째 묘목, 트리옌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 카멜리아, 나의 카멜리아, 나의 카멜. ... ... 카멜은 그녀를 잃었다는 분노와 슬픔, 무스카리를 향한 증오에 그 많은 것들을 잊고 있었다. 카멜은 손안에 바람을 쥐었다. 이제 다시 찾았다. 지금 그 분이 무스카리의 곁에 있는 것도 잠깐이다. 네 놈이 우스운 연극을 하고 싶다면 기다려주지. 하지만 그래봤자 네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야 무스카리. 지금 네 품에 있다고 생각될지 몰라도 네 품에 있지 않고, 네가 그저 외면하고 싶은 과거는 가릴 수 있는 치부가 아니다. 카멜은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보통 사람이 봤다면 기겁할 일이지만 카멜은 공기처럼 가볍게 담 아래로 착지했다. 그의 발 아래에서 바스락, 하고 풀이 반겼지만 그는 곧 그 손길을 뿌리치고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인적없는 들판은 달빛에 바다처럼 빛났고, 카멜은 은빛의 수면을 달리며 그가 가진 행복과 기쁨을 두 다리에 실어 박차올랐다. 무스카리, 무스카리 너는 모른다. 아리스타타님에 대해 너는 아무것도 몰라. 오늘만은 헛된 꿈에 젖어 있을 너를 동정해주마. 그에 답하듯 큰 구름 그림자가 들판을 가로지르고 거센 바람이 포효했다. " 어머, 일어났어? " 아스는 일어나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멍청이 앉아 있다가, 시라가 들어오며 하는 소리에 물끄러미 그녀를 봤다. 그녀는 입구를 들치며 들어오다가, 가발이 벗겨진 아스의 까만 머리카락을 보고 놀란 듯이 말했다. " 검은 머리카락! 너도 그 안스륨과 같은 까마귀족이구나! 어머머머머! 그럼, 사랑의 도피 중? " 아스는 벙하게 있다가, 머릿속에 둘이서만 다니는 수인족은 의심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엉겹결에 대답했다. " 에에... 예, 뭐. 그래요. " " 헤에, 그렇구나, 하긴. 일족에서 훌륭한 아이를 많이 나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가 자손을 남기지 않겠다는데 반대할만도 하지. 게다가 안스륨 정도면 너무 멋지잖아? 많은 부인들을 거느려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 아스는 시라의 말을 한참 생각하다가, 단추를 끌러놓는 바람에 가슴팍까지 흘러내린 드레스와, 그로인해 드러난 밋밋한 가슴과 실팍한 목젖이 보여 시라가 자신이 남자임을 눈치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른바, 사랑의 도피-를 하는 대상이 남자니까, 안스륨같이 멋진 남자는 남자와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없고, 그래서 반대하기 때문에 도피- 그렇게 되는건가. 아스는 뭔지 모를 납득을 혼자 해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세수하고 올래? 안스륨인가 하는 그 사람은 뭔가 좀 알아볼 일이 있다고 너 부탁하고 나갔어. " " 그래요? 무슨 볼일일까... " " 공터 윗쪽에 우물이 있으니까, 거기서 씻으면 돼... 아유, 참, 차림이 엉망이네. 제피도 어쩜 그렇게 보는 센스가 없는지. 너, 지금 여장하고 있는거, 그 미인대회에 나가려고 제피가 부탁해서 그런거 맞지? " " 에에? 어떻게 알았어요? " " 어떻게 할기는. 여자보길 우습게 알어. 척하면 착이지. 작년에도 우리가 여기 들렀을때, 제피가 내깃돈딴게 적다고 투덜거렸었거든. 보나마나 스타티스에게 부탁했다가 거절당해서 너한테 부탁한 거겠지. " " 와아, 점쟁이가 따로 없네요. " 시라는 짐꾸러미를 뒤적뒤적거리며 뭘 꺼내더니 윙크를 찡긋 했다. " 여자는 이 나이가 되면 점을 안 봐도 다 점쟁이란다. 실제로 난 점쟁이이기도 하지만. " " 그래요? " " 일단 대충 이거 두르고 가서 씻고 오렴. 내가 그 센스없는 드레스 당장 벗겨줄테니! 아무리 본판이 좋아도 옷이 그래서야 우승은 글렀어! " 아스는 시라가 꺼내준 숄을 두르고 밖으로 나가 우물가로 갔다. 우물가에는 아침을 짓기 위해 물긷는 사람들과 세수를 하러 나온 남자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들은 모두 다 시라처럼 조금 까무잡잡한 피부에 기하학적인 무늬가 색색깔로 들어있는 이국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어, 아스는 이 공터에 천막을 친 사람들이 집시의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스가 세수를 하고 돌아오자 시라는 재빨리 아스의 구깃구깃해져버린 드레스를 벗겨내버리더니 그녀와 입은 것과 비슷한 형태의 옷을 꺼내었다. 아스는 길다란 천 한장으로 이리 묶고 저리 묶고 연결해서 금방 옷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는 시라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옷은 하늘색을 바탕으로 금빛무늬가 가장자리로 세세하게 수 놓여져 있는 것으로 집시들이 입은 것과 같은 모양이었지만 그 색깔은 훨씬 정갈하고 단정해서 아스의 피부빛에 어울렸다. 볼륨감을 주기 위해 옷자락을 말아 가슴부위를 두르고, 어깨를 다 드러내놓은 조금은 대담한 차림에 아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 저어, 아무리 그래도 저 남자인데, 이렇게 노출이 심하면 남자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꼴이잖아요. " " 어라? 아냐! 아스는 수인족이라서 그런지, 원래 체구가 그런지 보통 이쪽의 사람들보다 훨씬 체구가 작아. 골격도 작아서 어깨도 좁은편이고. 피부도 상아색인데다가 털도 없고 고와서 오히려 이렇게 노출하는게 더 여자같아 보인다구. 나만 믿어! 후훗, 너 우승하면 제피에게 크게 한 턱 내라고 해야지. " 시라는 웬지 인형놀이를 하듯 신이나서 흰색의 스카프를 목에 둘러 목젖을 가르고, 술이 달린 끈으로 가슴밑을 묶어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밑밑한 허리와 엉덩이 부위를 효과적으로 카바했다. 그리고 포인트를 주려는 듯 색돌이 잔뜩 박힌 커다란 머리장식을 아스의 머리위로 올렸다. 그녀는 꺄-꺄 소리를 치면서 외쳤다. " 이만하면 화장만 완벽하게 하면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야! 내가 했지만 정말 예쁘게 했네!!! 너, 나한테 고마워 해야해. 안스륨이 보면 널 데리고 도망쳐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할걸?! " 아스는 시라가 즐거워하며 화장도구를 잔뜩 늘어놓는 것을 보고 울상이 되어 말했다. " ...배고파요오오. " " - 어서오십시오! 손님이십니까? " 안스륨은 싱긋 웃으며 자신을 맞이하는 문지기를 바라봤다. 문지기가 인사를 하는 경우에는, 안에 들어갈만한 사람인지 증명하라는 소리다. 아마 남루한 차림에 수인족으로 보였기에 그렇겠지. 안스륨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입구를 풀었다. 입구 안에는 색색깔의 작은 보석들이 일순 드러나 햇빛을 받고 번쩍였다. 문지기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고, 안스륨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는 복도에는 적당히 좋은 취향의 그림들이 걸려있고, 홀의 입구에서 예쁘장하게 생긴 시동이 토도도 뛰어나오더니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 어서오십시오, 손님. 집 밖에서 쓸 사람을 찾으시나요, 방 안에서 쓸 사람을 찾으시나요? " 안스륨은 시동에게 은화를 튕겨주며 대꾸했다. " 방 안에서. " " 네에,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 시동은 능숙하게 은화를 품으로 갈무리 해 넣고 앞장 섰다. 시동은 홀에 내려와 있는 큰 계단을 따라 올라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2층의 중앙에 터 있는 응접실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 주인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 " 어서오십시오~! 이것 참, 아침엔 손님이 드문 편이라 제가 미처 나가뵈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 " 아니다. 한참 축제의 때이니, 진귀한 것들이 많으리라 생각해서 굳이 들렀다. " " 그렇습니다! 이곳 드라세나는 이 팜파스그라스의 축제로도 유명하지만, 그 덕분에 크게 성업한 도시와 상인들로 시장 역시 유명한 곳이지요. 저희 상단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상단으로, 일부러 먼 곳에서 여기까지 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 덥수룩한 수염을 애써 다듬은 남자는 안스륨의 곁에 서며 고개를 굽신거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 원하시는 물건이 어떤 것입니까? 소녀도 있고, 소년도 있습니다. 수인족도 어떤 종류든지 있고, 원하신다면야... " " 흐음, 어린애도 있나보군. " " 예에, 그 정도도 없으면, 대륙에서 손꼽히는 상단이라 할 수 없지요. 안 그래도 이번 축제를 기회삼아 이곳으로 넘어온 많은 사냥꾼들이 새 물건을 넘겨주었습니다. " 어린애를 노예로 쓰는 것은 불법이다. 수백년전의 전쟁은, 많은 사람들도 죽였지만 많은 노예들도 만들어 냈다. 전쟁의 궁핍함에 못 이긴 아녀자들이 스스로 몸을 팔았고, 전쟁터에 끌려다니며 놀잇감이 된 처녀들과 숲과 들에서 잡혀온 많은 희귀한 수인족들이 노예로 전락했다. 이리저리 팔려다니며 노예로 전락하다가 마지막에는 사창가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성병이나 전염병등으로 죽는다. 한때는 트리옌마저도 노예로 삼았던 대륙의 악습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전쟁후에 제대로 된 댓가를 지불하고 낙인이 찍히기 전에는 노예라고 인정하지 않게 하는 제도가 만들어 졌지만 그마저도 그리 큰 효력이 없어 암암리에 유괴든 인신매매든 어린애든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쟁 중에는 잠깐 노예로 잡혀가거나 몸이 더럽혀 지더라도 힘들게 기회가 닿으면 평민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외려 노예의 인장은 한번 찍히면 헤어나기 힘든 굴레가 되어 자유를 구속했기 때문에 한번 노예가 되어버리면 죽을때까지 노예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안스륨은 노예상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 16세 정도의 소년으로. 검은 머리카락이나 검은 눈동자면 좋다. " " 아- 예. 까마귀족의 아이라면, 저희쪽에서 어렵게 어렵게 하나 들여와 있습니다. " 노예상인은 속으로 안스륨이, 돈으로 같은 일족의 노예를 사서 자비를 베풀려는 그런 사람으로 보였는지, 조금 비굴한 태도를 접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노예를 사간 후에는 모두 그 사람의 소관이다. 그 노예가 죽을때까지 고생을 하든 자유의 몸이 되든 상단의 이익과는 상관없는 몸이 되는 것이다... 싼 값에 다른 상단으로 넘기는 것보다야 낫겠지. 노예상인은 앞장 서서 2층에 늘어선 방들 중 하나로 안내했다. 잘 꾸며진 방안에는 큰 전신거울이 두개나 있고, 바닥에는 푹신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안스륨은 소파에 깊숙히 몸을 묻으며 시동이 음료와 과일을 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안스륨은 일어난 후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기에 목이 말랐지만, 내오는 음료에는 손을 대지 않고 과일을 씹어먹으며 목을 축였다. 음료에는 조잡하고 역한 환각제를 소량 넣고 다른 단 맛으로 그것을 가린 일종의 최음제였다. 노예상단에서는 손님이 오면 이런 음료를 내어 마음이 동하게 만들어 노예를 사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조금 있자 무장한 남자가 어깨까지 까만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호리호리한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안스륨은 감정없이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간신히 허리께를 가릴만한 것을 걸친 아이는 입에는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구속구가 물려있고, 손은 앞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지만 움푹 들어간 눈의 눈빛만은 형형했다. " 자, 어떻습니까? 진성의 검은 까마귀족입니다. 까마귀족은 예로부터 현명하고 두뇌가 명석하기로 소문난 종족이죠. 저 녀석도 외양은 별 거 없지만 글도 읽고 쓸 줄 알고 눈치도 빨라 집에 데려다 놓으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겁니다. 자자, 한바퀴 돌아보거라. " 아이는 눈을 매섭게 부라리며 노예상인을 노려보았다. 노예상인은 죄송합니다, 라며 안스륨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웃는 낯으로 다가가 가볍게 그 아이의 뺨을 찰싹 때렸다. 그리고는 억지로 돌려세웠다. " 군살없이 미끈한 몸이지요? 이만하면 앞으로도 더 클꺼고, 방 안에서 더 쓰지 못하게 되면 집 밖에서 쓸 노예도 충분히 될 수 있는 몸입니다. 어떠십니까? " " ... " 안스륨은 중얼 말했다. " 내가 원하는건 저런 아이가 아냐. 다른 아이는 없나? 검은 머리에 검은 눈으로. " " 아- 죄송하지만 현재로선 이 아이 밖에. 아아, 하지만 잘 보십시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길만 잘 들인다면 어디까지나 따를 법한... " " 아니아니, 그런건 상관없어. 다른 아이는 없어? 앞으로 들여올 계획도 없나? 축제 동안에는 여기 머무를 거니까, 그 동안에 말이다. " 노예상인은 잠시 주춤하다가, 결국 그 소년을 안스륨에게 떠 맡기는 것이 힘들어졌음을 깨닫고 순순히 대답했다. " 으음, 주문을 하신다면 급히 다른데서 들여올수는 있습니다. 어떤 아이를 찾으십니까? " 안스륨은 턱을 괴고 천천히 이야기했다. " 체구는 저 소년보다 조금 작은 편이고, 상아색 피부의 순하게 생긴 얼굴이 좋아. 저런 빈상에 고생한 놈 말고. " 안스륨의 말에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예상인은 희색이 만연해지더니 두 손을 비비면서 잽싸게 대꾸했다. " 아-! 그런 소년이라면, 곧 들여올 아주 좋은 물건이 있습니다! " " 흐음? " " 이 도시에서 꼭 그런 도망 노예를 봤다고, 저희 가게와도 거래를 하고 있는 자가 말했었습니다. 원하신다면, 그 노예를 잡아오는대로 우리 가게에 들여놓겠습니다! " " 좋아. " 안스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은 루비 하나를 노예 상인에게 튕겼다. 노예상인은 허둥지둥 그것을 받았고, 그는 서 있는 노예 소년의 옆을 지나며 말했다. " 선수금이다. 축제가 끝나기 전에 또 들릴테니, 데려다 놓도록. " " 예! 물론입죠!! " 그때 나가려는 안스륨의 옷자락을 노예 소년이 붙잡았다. 안스륨이 돌아보자, 소년은 애걸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소년은 오래 전 일족이 다 뿔뿔히 흩어져, 노예로 붙잡혀 와 갖은 수모와 치욕,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온갖 궂은 일을 당하며 이곳까지 흘러왔다. 하지만 금발에 제비꽃색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노예들 사이에서 그는 볼품없었고 그를 찾는 손님들은 없었다. 여기에서 팔리지 못하면 그는 또 다른 어떤 곳으로 끌려가야 한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 마저도 희석될 즈음, 그는 일족과 헤어진 후에 처음으로 자신과 같은 까마귀족을 만난 것이다. 그를 따라가야 했다. 소년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보석에 희희낙락 하고 있던 노예 상인이 그런 소년을 보고 크게 호통을 쳤다. " 이게 무슨 짓이냐!! 손님께 무례하게!! 당장 떨어져! " 안스륨은 이미 볼일은 다 끝났는데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소년을 성가신 눈초리로 쳐다봤다. 소년의 여러가지 원망과 희망이 뒤섞인 눈동자를 쳐다보며 그는 말했다. "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난 네가 필요없다. " 소년은 고개를 뒤 흔들었다. 안스륨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소년은 놓아주지 않았다. 노예 상인이 소년을 배를 걷어차도 소년은 안스륨의 옷자락을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부여잡고 있었다. 안스륨은 계속 자신의 갈 길을 방해하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검은 눈이 공포에 흠칫 굳고,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안스륨은 옷자락을 잡아당겨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성큼 성큼 걸어 방을 나갔다.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큰 키의 남자에게 매달렸던 소년에게 남은 것은 건방진 짓을 행한 댓가로 맞을 가혹한 매질뿐이었다. 스타티스는 화장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나온 아스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그리 희지 못한 피부나, 화사하지 못한 짧은 머리는 흠이 아니었다. 어깨까지 드러난 피부는 고왔고 목덜미에서 찰랑거리는 짧은 머리는 되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화려한 머리장식에 검은 머리칼의 색은 더욱 선명했다. 화장으로 짙어진 눈매는 고혹적이고 부드러워진 턱선은 가냘프다. 아스도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건 특수효과야!'라고 생각했을 정도니, 스티의 놀라움이 오죽했겠는가. " 너무 미인이라서 놀랐냐? " 아스가 장난삼아 웃으면서 말하자 스티는 창백해진 얼굴로 대꾸했다. " 저런 미소녀같은 기분 나쁜 얼굴과 내 얼굴이 닮았다니... 이건 비극이야! " - 퍽!! 울부짖는 스타티스의 뒷통수를 시라는 맹렬하게 쥐어박았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으름장을 놓았다. " 감히 내 예술품 앞에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지는 못할 망정. 어때? 어제의 모습보다 훨씬 낫지? 그 센스없는 드레스는 저기 처박아 뒀으니까 나중에 찾아가. " " 그런데 스티도 오늘... 정말 말쑥하게 차려입었네? " " 스타티스라고 제대로 불러! 그야 오늘은 행사가 있으니까 그렇지. " 스타티스는 고수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하고 뭐 묻을까 겁나는 흰 제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청색에 금띠를 두른 휘장에 어깨엔 금줄과 망토가 걸려있다. 양쪽 허리에 찬 세검이며 까만 가죽장화도 지나치게 윤이 반짝 반짝 나서, 스타티스는 그야말로 자기로 만들어진 장난감 병정같은 모습이었다. 시라는 스티를 뒤에서 감싸안으며 웃었다. " 요 아리따운 레이디께서는 기사단 후보생이거든! 아직 나이가 일러 후보생이지만, 내년이면 어엿한 기사야. " " 시험에 합격해야돼요. " " 에에, 하지만 고작 13살의 나이에 검의 천재로 후보생에 천거받은 몸이시니, 걱정할거 없잖아? " " 실기만 보는게 아니라구요. 교양이니 예법이니 얼마나 어렵다구요. " " 그럼, 행사라는건 오늘 오후에 있다는 행진? " 아스의 질문에 스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레이디냐고 툴툴거리며 그는 대꾸했다 " 기사건 기사 후보생이건 다 좋은데 이 겁나도록 흰 의례용 예복은 정말 불편해. 뭐 묻을까 무서워서 돌아다니겠어. " 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 하지만 정말 멋진데. 나도 이런 너풀거리는 거 말고 그런 걸 입었으면 좋으련만. " 스티는 우쭐하며 말했다. " 흥, 아무나 입는 건줄 알아? 너는 그런 너풀거리는게 잘 어울리네. " " 이봐- 우리가 닮았다는 소리는 헛으로 들었어? 내가 잘 어울린다는 건 너도 잘 어울린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야! " " 누구가-! 나는 5살때부터 검을 만져와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기사 후보생이야! 누가 너처럼 흐물흐물한 여자같은 놈과 닮아?! " " 지금 해보자는 거야? 나도 너같이 재수없는 놈이랑 닮았다는 소리 듣는거 싫다구!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한 번 입어보지 그래?! " " 시끄러웟!! " 아스와 스티는 시라에게 한 대씩 쥐어박힌 후에 입을 다물었다. " 정말 아웅다웅 싸우는 꼴이라니. 오늘은 제피, 정신없이 바쁠테니 네가 이분들 안내를 좀 해. 아아, 저기 안스륨도 오네! 어이~ 잘 생긴 미남씨, 식사는 하셨나요? " 시라의 말에 따라 돌아보니 안스륨이 막 공터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시라의 말에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스를 쳐다보았다. 시라는 아스의 옆에 찰싹 붙으며 말했다. " 야호! 어때요? 정말 예쁘죠? 이만하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죠? 도망친 보람이 있죠? 꺄하하!! " 안스륨은 아무런 대꾸없이 아스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물었다. " 식사는? " " 에, 했어요. " " 뭐야 뭐야!! 예쁘다던가 좋다던가 감상이라도 말해봐. 놀라는 척도 안하다니, 너무해. 네 연인은 너무 무뚝뚝하잖니. " " 아니 뭐- 남자가 예쁘다는 소리를 들어봤자 별 쓸모없지 않나요; " 어제 여장을 했을때 놀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아스는 볼을 부풀렸다. 시라는 셋을 몰아내며 말했다. " 자자, 나도 식구들과 같이 갈거야. 스티, 너 손님들 얼른 데리고 가서 왕궁 구경도 시켜주고 그래! 좀 있으면 있을 전하의 축사 후에 만찬을 베푸니까, 가서 실컷들 먹으라고! " " 어째서 내가 구경시켜줘야 하는거야?! " " 제피의 손님들이잖아! 제피가 바쁘면 네가 맡는게 당연하지! 얼른 가! " 아스와 안스륨은 투덜거리며 앞장서는 스타티스를 따라 왕궁의 넓은 정원을 구경했다. 드라세나의 정원은 흰 성을 중심으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펼쳐져 있는 넓은 곳이었는데, 나무가 각을 이뤄 가꾸어져 있지 않다면 무슨 벌판쯤으로 여길만큼 넓었다. 아스는 잘 가꾸어진 잔디와 나무들을 보며 골프장을 연상할 수 있었다. 정원 군데군데 있는 기둥과 조각상들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깨끗한 예복으로 갈아입은 도시의 사람들과 상인들, 초대되어 온 귀족들이 정원 구석구석을 누비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정원이 아무리 넓다해도 도시의 사람들이 전부 몰려온 터라 그곳은 제법 북적북적 했으며, 성의 바로 입구쪽 흰 포석이 둥글게 깔린 조그만 광장과 길위로 늘어져 있는 식탁에는 먹을 것이 즐비했다. 조금 후에 나팔이 울리고, 사람들이 성 앞 차려진 만찬 근처로 몰려들자 성의 입구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몇명의 사람들이 나왔다. 너무 멀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스티가 그들이 왕가의 사람들이라고 말해주었다. 뭐라뭐라 짧은 왕의 축언과 왕가 사람들의 인사가 끝나자, 건배가 시작되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드라세나의 사람들과 심사위원인 귀족과 상인들이 모두 모이는 이 자리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기에, 많은 아가씨들이 오늘 밤에 있을 미인대회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꾸미고 나와 정원을 누비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춤을 췄다. 대륙 최고의 축제에서 에린지움의 잎사귀를 걸고 이루어지는 대회기에 대륙 각지에서 몰려온 많은 미인들이 아름다움을 뽐냈다. 금빛 고수머리를 잔뜩 틀어올려 큰 사파이어핀을 달아 시선을 끌어모으는 처녀가 있는가 하면, 녹색의 잔디위에서 눈에 띄는 불타는 듯 붉은색의 드레스를 입고 나와 시선을 끄는 여자도 있었다. 아스와 스타티스는 연신 지나다니는 처녀와 소녀들을 보며 감탄성을 흘렸다. " 우와, 저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애, 귀엽지 않냐? " " 응, 응! 되게 귀엽다! 그보다 저기 노란색 리본을 한 쪽이 더 예쁘지 않아? " " 표독스럽게 생겼어. 여자라면 당연히 귀여워야... 아, 저 사람이 쟈스민이야! 작년 대회의 우승자. 여전히 예쁘군. " 아스는 스티가 가르친 쪽에 서 있는 한 옅은 금발머리의 아가씨를 보았다. 새초롬하게 웃고 있는 아가씨는 과연 눈에 뜨일만한 미인으로, 녹색의 원피스로 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허리가 끊어질 듯이 가늘었다. " 저 개미허리가 매력 포인트라지. 작년 대회에서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슬픈 시를 외워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것을 무기로 우승했어. 너의 강력한 라이벌이니 눈여겨 봐. " " 누가 강력한 라이벌이라는 거야?! " " 나와 닮은 얼굴로 출전하는 이상 우승해야지! " " 언제는 닮아서 싫다며?! " 안스륨은 또 아웅다웅 하기 시작하는 두 꼬마를 보고 낮으막히 한숨을 쉬었다. 이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타입의 사람중 하나다. 안스륨은 아까부터 그들을 바라보며 들려오는 수근거림에 잔뜩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 저 하늘빛 옷의 아가씨는 누구지? 정말 청초하고 아름다운데! ' ' 짧은 머리카락도 색달라. 목덜미가 드러나서 더 섹시하지 않냐? 흐흐... ' ' 가녀린 체구! 품에 안으면 쏙 들어오겠네! 미인대회에 출전하겠지? ' ' 이름이 뭘까? 가서 춤이라도 한 곡 췄으면... ' ' 옆의 저 덩치 큰 수인족은 노예인가? 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인데 안 어울려! ' ' 꺄아-! 스타티스 님이야! 오늘도 너무 아름다우셔! ' ' 역시 예복입은 모습이 제일이라니까! 오늘 행진에서도 얼마나 늠름하실까! ' ' 늠름이라니! 저 가냘픈 체구 어디에서 검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것일까! ' ' 흥! 그런데 스타티스님 옆의 저 여자는 누구야? ' ' 천박하게 집시들의 옷을 입었어! 저렇게나 어깨를 다 드러내 놓고... ' ' 특이한 장신구에 옷차림을 하면 시선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 ' 저 시커먼 수인족 노예하고나 놀 것이지 왜 스타티스 님 곁에!! ' ... 안스륨은 온갖 말에 귀가 다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 - 하는, 목숨을 바쳐 에린지움을 지키신 아리스타타의 뜻이 진실로 아름다우시다! 에린지움의 걸음, 아리스타타 칼미아님을 드라세나는 경애한다! " - 경애한다! - 경애한다! - 경애한다! 흰 옷을 입은 사제가 손을 들며 말하자, 그 자리에 모자를 벗고 가슴에 손을 얹은 시민들이 따라서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많은 말은 울림이 되었다. 꽃에 둘러싸인 아리스타타의 조각상은 그런 사람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아스는 묵묵히 생각에 잠긴 안스륨을 보고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할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노예로 오인받아 잡혔다고 이야기하면 크게 걱정하면서 축제 구경이고 뭐고 돌아가자고 할까 걱정되기도 하고, 카멜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까봐 망설여졌다. 굳이 안스륨에게 카멜과 춤추었다는 이야기를 숨기고 싶은게 아니다. 다만... 다만 그것은 카멜의 어떤 소중한 부분이라, 그가 증오하는 안스륨에게 말하기 꺼려지는 탓이다. 그냥 아스는 입을 다물었다. " 여어~ 아가씨, 예쁜데, 나랑 차가 같이 한잔 할까? " 아스는 기분 나쁜데다 구 시대적인 노골적인 추파에 인상을 찌푸리고 돌아보았다. 그곳엔 제피가 윙크를 하며 서 있었다. 그도 오늘 축제일이기 때문인지 어제와는 다른 아주 좋아보이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느슨하게 앞섶을 풀어헤친것은 마찬가지지만. " 스티없지? 보면 또 잔소리 할라. 아침부터 좀 바빠서 이제야 왔어. 그 녀석, 행진하러 갔냐? " " 응. " " 이야- 아스, 예쁘다. 이거 틀림없이 시라의 솜씨지? 오늘 정원에서 주가 좀 많이 올려놨냐? 크크, 그래봤자 네 출전이름도 모를텐데, 안다해도 소용없겠지만. 네 내기표는 내가 몽땅 사들였거든. 후후. " 아스는 멍하니 생각했다. 저러다가 내가 일등이라도 못하면 제피는 자신을 때릴지도 모른다고. 곧 빰빠라라~ 하는 요란한 나팔소리와 함께, 둥 둥 북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멀리서 성의 길을 따라 늘어선 사람들 중앙으로 흰 예복으로 몸을 감싸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기사단이 나왔다. 앞서 걷는 붉은 제복의 기악대는 높은 모자와 흰 깃발을 달고 걸음을 맞추며 행진을 시작하고, 뒤로 드라세나의 깃발과 축제의 깃발과 녹색 깃발을 들고 있는 기사들을 선두로 붉은 바탕에 금띠의 휘장을 가슴에 두른 기사단이 뒤를 따랐다. 북소리에 맞추어 흰 장갑과 검은 가죽장화가 동시에 움직이고, 바람에 뒤로 길게 늘어진 망토가 흩날린다. 붉은 휘장을 두른 정식 기사단 뒤로 푸른 휘장을 두른 기사 후보생들도 서 있었다. 그 가운데 양 옆으로 세검을 차고 남색 고수머리를 바람에 흩날리는 스타티스는 단연 돋보였다. " 꺄-악~!! 스타티스님!!! 사랑해요!!! " " 오빠!! " " 형!! " 형은 뭐냐... 라고 생각하며 아스는 주위의 환호성에 벙벙해져 물었다. " 대단한 인기네요. 스타티스. " " 아, 응. 녀석은 가문도 좋은데다가 뭐니뭐니 해도 검을 양손으로 자유자재로 다루는 천재니까 말야. 게다가 묘하게 여자들에게는 예의바르거든. 또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미라 해야하나... 아무튼 제작년인가 이 근처를 주름잡고 있던 불량조직을 박살낸 후로는 완전히 인기인이 되어 버렸어. " " 그렇군요. " 기사단은 성앞에서 부터 광장에까지 깔린 흰 포석을 따라 행진을 하고, 아리스타타의 조각상 앞에 멈춰섰다. 곧 대오를 바꿔 광장에 늘어선 그들은, 지휘관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지휘에 따라 일제히 검을 받들었다. " 일동- 차렷!! 경례!! " 하늘을 향해 내뻗은 검들이 희게 햇살을 반사하고 있어 눈부셨다. 아리스타타를 향해 검을 바치고 무릎 굽혀 고개 숙인다. 지구에서도 이런 광경은 못 본 아스는 그 장면이 한숨이 나올만큼 멋지다고 생각했다. " 아무리 에린지움을 지키고 죽어버렸다지만, 수백년이 지났는데도 아리스타타에 대한 존경은 대단하네요. 훌륭한 여자였나봐요. " 제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 물론이지. 저 무스카리의 손에 잡혀 심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결할만큼 강단있고 고결한 여성이었으니까. 나이트가 구해주러 오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에, 자결하지 않았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전해지는 바로는 아주 자존심이 강해 어떤 모욕도 용납하지 않았고 모욕을 받지 않을만큼 스스로에게도 엄했다고 하지. 모욕을 당하고서라도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거야. 게다가 무스카리- 용족에게 에린지움의 힘을 빼앗긴 다는건, 트리옌들의 멸망을 의미하는 거니까... " " 그렇군요. " " 무스카리에게 잡혀가서 갖은 모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스스로의 목숨을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은, 자신이 받은 모욕이 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가치와 존재를 잘 알고 있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었겠지. 용족에게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이 곳 드라세나는, 그렇기에 더욱 더 그녀에 대한 외경심이 강한 편이야. 그녀가 자결한 날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이렇게 축제와 더불어 크게 행사를 지낼만큼. " 기사단은 검을 거두어 들이고 깃발을 아리스타타의 조각상 앞에 세웠다. 그리고 다시 열을 맞추어 왕궁으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 뭐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과장된 면도 업잖아 있겠지만, 그녀를 경험했고 겪었던 많은 트리옌들은 펜 오키드가 있는데도 아리스타타를 그리워하고 있다지. 아름답기도 아름답거니와,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운 여성이었다니까. 나도 그녀가 실제로 살아있다면 어떤 여자인지 꼭 만나보고 싶었을거야. 그 시대에는 하루에도 몇십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위해서 목숨을 내 걸겠다고 발치에 몸을 던졌다니까, 나도 그렇게 될지 모르지. 하하. " 곧 해가 졌다.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뒤섞이고, 광장에는 미인대회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직 초저녁인데 벌써 술이 곤드레만드레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고, 다들 꽃이며 먹을 것을 들고 희희낙락해 하고 있었다. 아스와 스티는 우물거리며 고기꼬치를 먹고 있는 제피를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 나도 먹고 싶어!! " " 안돼! 넌 곧 대회에 나가야 하잖아. 그럴 사람이 고기 냄새나 입에서 풍기며 다닐수는 없는 노릇이야! " " 으으, 배고픈데. " " 스티 넌 조심해가며 먹으면 되잖아? " " 스타티스 입니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혹여 이 예복에 뭐라도 묻히면 시녀에게 잔소리를 한바가지로 들을 겁니다. " " 헤에, 맛있는데, 안되었다. " 제피는 둘을 놀리려는 듯이 하나를 더 사 먹었다. 어디론가로 잠깐 사라진 안스륨이 나타나 아스의 머리를 짚었다. 그의 손에는 말린 과일이며 과자가 들어있는 봉투가 들려 있었다. " 이거라도 먹도록 해. 배가 안 차겠지만 안 먹는 것 보다는 낫겠지. " " 와앗! 맛있겠다! 고마워요 안스륨. 자, 스타티스도 먹어. " 아스는 말린 과일을 우물거리며 제피가 받아왔던 이름과 번호가 적힌 리본을 가슴팍에 달았다. 과자를 다 먹을때 쯤 대회준비가 다 끝이 나고, 주변으로 내기표를 두세배 값으로 올려파는 사람들과, 벌써부터 승부를 점치고 있는 내기꾼들, 그리고 광장 한켠에 마련해둔 내기표와 돈을 관리하는 자리에는 온갖 사람들이 북적이는 탓에 시끄러웠다. 곧 마련된 단 위로 횃불이 환히 밝혀지고, 사회자로 보이는 남자가 위로 올라가더니 확성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들고 말했다. " 자! 그럼 286번째 팜파스그라스 미인경연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 " 왓! 왓! 시작한다!! " 아스는 제피의 손에 끌려 황급히 대기하고 있는 아가씨들 틈에 끼였다. 제피는 아스의 어깨를 두드리며 잘해! 라고 외쳤고 한번도 이런데에- 더구나 여장으로 나서본 적 없는 아스는 새삼 긴장되기 시작했다. 광장에 꽉꽉 몰려든 사람들이 모두 단 위를 주시하고 있었고, 아스는 아무리 축제가 구경하고 싶었더래도 이런 한심한 모습으로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자신의 선택이 점점 한탄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자! 그럼 올해 예선을 통과한 50여명의 대륙 최고의 미녀들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 차례차례 아가씨들이 무대위로 올라가 출전한 예명과 본명, 그리고 자기소개를 했고, 대륙 각지에서 몰려온 아가씨들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으로, 몇 명의 수인족과 트리옌의 아가씨도 한 명이 섞여 있었다. 아윽고 아스는 자기차례가 되어, 허둥허둥 단 위로 올라가자, 자신을 주목하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그만 꽝꽝 얼어붙었다. " 자! 이번에는 45번! 수인족의 귀여운 아가씨, 제라늄입니다! 자,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 " 아- 예에, 에- 저는 45번 제라늄으로, 이름은 아스포델 레브록... " 아스가 이름을 말하자 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웃음이 터져나왔다. 아스는 왜 웃는걸까 당황하며 더욱 더 얼어붙고 말았다. 자신이 어디까지 말했더라? 내가 뭘 말하고 있었지? 아니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머리가 완전히 패닉상태에 빠지고, 아스는 반사적으로 안스륨의 모습을 찾았다. 아스는 군중들 틈에서 손을 흔드는 제피와, 팔짱을 낀 스타티스와 같이 서 있었다. 그의 큰 키와 검은 머리는 사람들 틈에서도 눈에 잘 띄였다. 안스륨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스는 안스륨의 입이 벙긋거리며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네.가.가.장.사.랑.스.럽.다. 아스는 웃으면서 급히 말을 이었다. " 네에-! 저는 대륙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소녀랍니다!! " " 야- 참으로 깜찍한 자기소개네요. 그럼 다음 46번! 골든메리!! " 아스는 휘청휘청 단을 내려오면서 온 전신을 붉게 물들였다. 사랑스러운 소녀랍니다-! 라니. 안스륨이 가르쳐준대로 말하긴 했지만 정말 부끄러웠다. 자기소개만으로도 심사위원의 심사에 아가씨들의 반이 떨어졌다. 아스는 바보같은 소개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의 이름은 명단에 있었다. 다음 순서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아스는 자신의 차례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심사위원의 질문에 진땀을 뻘뻘 흘렸다. " 네-! 그럼 다음 질문! 가장 여자다운 여자는 어떤 여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정적인 여자? 상냥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 " " 에에- 저어, 항상 감사할 줄 아는 여자라고 생각하는데요... " " 굉장히 재치있는 대답이로군요. 감사할 줄 아는 여자라...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 " 으음, 주어지는 만큼 감사할 줄 아는 여자는 항상 가정적이고 상냥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제피는 아스를 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 잘 하는데? 제법 하잖아. 차림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식상하지 않고 좋아. 짜식, 역시 남자라서 그런지 남자들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잘 아는 거 같네. 좋아 좋아! 돈 굴러오는 소리가 절로 들린다! 안스륨, 저런 녀석과 같이 있다니 너 행운아인 줄 알라고! " 안스륨은 제피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 가장 자신있는 요리는? " " 라면이요... " " 라면? 그건 어떤 요리죠? " " 에에, 굉장히 쉬워요. 밀가루로 만들어진 면에 양념을 넣고 끓이면 됩니다. " " 무슨 양념이죠? " " 얼큰한 양념요... " " 이런 이런, 세세한 것은 아가씨만의 비밀인가 보군요! 다음 코너인 장기자랑에는 무엇을 준비하셨나요? " " 노래요. " " 예에-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다음 분! " 아스는 한숨을 내 쉬었다. 나 잘하고 있는 거겠지? 단을 내려가면서 일행쪽을 보니 제피가 엄지 손가락을 쳐들고 웃고 있었다. 장기자랑에 처녀들은 많은 것을 선보였다. 시 낭송, 춤, 악기 연주, 노래, 연극 등등... 아스는 무대 뒤에서 자신이 부를 노래를 안 정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였다. 노느라고 여태까지 그것도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아가씨들이 부르는 것을 보니 댄스나 락이나 이런 가요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스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뭉기적 뭉기적 올라간 단 위에서 간신히 음악시간에 배웠던 가곡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예전에 배운거라 잘 부를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지만, 아스는 반주는 되었다고 하고 홀로 무대에 섰다. 그리고 합창단 소녀마냥 손을 앞으로 그러모았다. 등불을 끄고 자려 하니 휘영청 창문이 밝으오 문을 열고 내다보니 달은 어여쁜 선녀같이 내 뜰 위에 찾아오다 달아 내 사랑아 내 그대와 함께 이 한 밤을 이 한 밤-을 얘기하고 싶구나 그리 높지 않음 음성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광장에 울렸다. 잔잔한 어둠이 하늘로 내려앉은 밤에 그 어느 작곡가가 아내에게 바친 사랑의 선물은 아름답게 노래가 되어 그의 목소리에서 굴러나왔다. 사람들은 누구도 들어 본 적 없는 노래건만 아름다운 가사와 음률에 한숨을 내쉬었다. 참가자 중의 하나인 트리옌의 아가씨는 아스의 주변으로 퍼지는 익숙한 공기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디서 흐르는 단소소리 처량타 달 밝은 밤이오 솔바람 신선한 이 밤에 달은 외로운 길손같이 또 어디로 가려는고 달아 내 사랑아 내 그대와 함께 이 한 밤을 이 한 밤-을 동행하고 싶구나 달빛 아래에서 아스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반짝이고, 그의 몸에서 나오는 향기와 주변으로 퍼지는 목소리에는 뚜렷한 힘이 실려 있었다. 꺾여 시들했던 꽃에서 생기가 돌고, 술에 취해 속이 거북했던 사람은 울렁거림이 잦아들고, 울던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평온해진다. 트리옌의 여자는 자신에게 더욱 뚜렷하게 전해지는 그것에 놀랐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틀림없이 수인족인데! 아스의 노랫소리는 안스륨의 마음도 뒤흔들었다. 안스륨은 아스의 목소리에서 어렴풋한 옛 기억을 끄집어 내었다. 노래가사처럼 외로운 달이 들판을 잠식한 밤이었다. 달빛을 받아 고고하게 빛나는 아리스타타는 밤 산책을 하고 싶다고 그 달밤을 거닐었다. 자신은 그녀를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따라걸었다. 그 밤에는 전쟁의 피냄새도, 숲이 불탄 잿더미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희미한 초향이 감돌던 달 밤. 자신은 그 한 밤, 이야기 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와 함께 걸었다. 그녀와 동행했다. 유일하다시피한 그녀와의 추억. " ~ 달아~ 내 사랑아~ 내 그대와 함께~ " 레지 역시 용족다운 청력으로 아스의 노래를 모조리 듣고 있었다. 그는 지저분한 시장 건물의 어둠속에 숨어서 금방 귀에 익은 노래를 흥얼 흥얼 따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뒤 쪽 골목에서 다투던 목소리가 뚝 그쳤다. " 이 한밤~ 을 이 한 밤~~~ 을 " " 누구냐!!! " " 동행하고~ 싶구나~ " 레지는 기대고 섰던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들어보이며 아는 척 했다. 하지만 상대는 레지를 모르는 듯, 잔뜩 당황해서 무기를 꼬나쥐며 외쳤다. " 누구냐는데도! " " 누구긴. 댁을 만나러 온 사람이지. 그 처량맞은 몽둥이는 좀 내려놔 줘. 안쓰러워 보이니까. " 거한은 잘린 자신의 왼팔을 쳐다보며 분노에 찬 신음성을 흘렸다. 그때 그 트리옌이 무게감없이 종이처럼 잘라버린 팔은 눅진한 고통으로 그를 계속 괴롭히고 있었다. 거한은 그때까지 자신과 말씨름을 하던 곱추를 방패삼아 앞장세우며 물었다. 그렇게 큰 덩치에 곱추가 가로막는다고 막아질 것 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 내게 무슨 볼일이야!! " " 댁에 빚을 진 것을 청산하러 왔지. 복수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게 아니고 말해줄게 하나 있거든. 다름 아닌, 당신의 팔을 그 꼴로 만들게 한 검은 눈동자의 꼬맹이 말야. " 그 이야기를 꺼내자 거한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었다. 등에 장미 낙인이 찍힌 도망 노예 주제에, 여장을 하고 돌아다니며 자신을 이 꼴로 만들었다. 사실 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은 그의 팔을 자른 트리옌이었지만, 트리옌을 자신이 어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노예 사냥꾼의 분노는 자연히 그 소년에게로 돌려졌다. 곱추에게 여장을 하고 숨어있는 도망 노예 이야기를 들었을 때엔 거저 먹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얻기는 커녕 왼팔을 잃은 것이다. 레지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 당신도 분하겠지? 그런 도망 노예 따위가 감히- 노예 사냥꾼의 왼 팔을 잘라먹었으니. " 어둠속에서 거한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 원하는게 뭐냐. " " 그 녀석을 다시 잡아줬으면 해서. 주변의 무시무시한 보호자는 내가 따돌려 줄테니까. " " 그 트리옌말이냐? " " 아니, 그 녀석은 벌써 떠났어. " "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네가 얻는게 뭐야? " " 흐흥, 무스카리의 저런 행복한 모습은 재미없으니까. 내 취향이 아니라고. 희희낙락하는 녀석의 꼴 따위. " " 댓가는? " " 그 아이를 잡아다가 팔면 되잖아? 왜 내게 댓가를 바래? 넌 복수 겸 장사하고, 나는 덩달아만족을 느끼면 되는거야. 누이좋고 매부좋고." " 그 놈 말고도 다른 만만하고 예쁜 것들이 얼마든지 있어. 댓가도 없이 내가 왜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거냐! " 거한은 이렇게 자신을 찾아와 말하기 까지 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원한이나 그런것에 얽혀 참견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잃어버린 왼팔 대신의 댓가를 레지에게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레지는 음습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는 말했다. " 부탁이 아냐. 명령이다. " 시커먼 공포를 닮은 살기가 골목의 어둠에 스며들어 거한을 뒤덮었다. 곱추는 거품을 빼물며 자지러졌고, 거한의 얼굴이 어둠속에서 창백하도록 질렸다. 보랏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사내는, 절망의 쾌락, 공포와 고통의 지배자 레제다 튜베로즈. 고독과 악의의 사생아였다. 두구두구두구두구두구~~~~ 북이 요란스럽게 울리는 가운데, 사회자가 우승자를 발표했다. " 올해 최고의 미인은-! 대륙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가씨, 45번 제라늄 아스포델 레브록!! 축하합니다!!!! "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지고 아스는 벙벙해졌다. 설마하니 정말 1등 할 줄은 몰랐다. 멀리서 제피가 꺄호! 하며 환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쟈스민의 얼굴도 실망으로 시무룩해지고, 여기저기서 내기표를 집어던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 제라늄을 매점매석 한 놈이 누구야!! ' ' 으악! 제피 네 이놈!! '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소음이 이는 가운데 아스는 수상소감을 짧게 말했다. 곧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조그만 상자를 들고 아스의 앞에 섰다. " 팜파스그라스 미인대회의 우승자에게 주는 상이오. 에린지움의 잎사귀를 수여하도록 하겠소. " " 고맙습니다. " 뒤에서 떨어진 소녀들이 부러움의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렸다. 그러고보니 이거 보고 싶다고 떼를 쓴 것은 핑계였지만, 막상 앞에 보이니 그 소문의 에린지움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삼사위원은 상자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시킨 뒤, 그것을 아스에게 넘겨주었다. 에린지움의 잎사귀는 동백의 잎처럼 가장자리가 둥그스름하고 조금 길죽했다. 그리고... 놀랍도록 은빛이었다. 그 은빛은 달빛을 받거나 하는 그런 빛깔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듯한 은빛이었다. 조그만 함의 붉은 공단위에 얹어진 그것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아스는 감탄했다. 잎사귀 한 장이 이렇게 아름다울진대, 이것으로 이루어진 나무는 얼마나 아름다울 것이며 이런 머리카락을 가졌다는 아리스타타는 얼마나 아름다웠을 것인가. 대회가 끝나고, 본격적인 술판이 벌어지는 가운데 제피는 돈다발을 들고 희희낙락 그것을 세고 있었다. 곧 정산이 다 끝나자 그것을 턱 하니 스타티스에게 맡겼다. " 어느 불량배가 뺏겠다고 달려들지 모르니까, 네가 갖고 있어라. " " 도대체 이걸 어디다 쓰실 계획입니까? " " 글쎄? 하렘이라도 만들까? " " 제피란더스님!!! " 아스는 안스륨의 곁에 서서 조심스럽게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그 잎사귀를 손가락으로 들었다. 어느새 두 사람이 곁에 와서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스티가 말했다. " 이렇게 가까이서 구경하기는 처음이야. " " 나는 보는것도 처음이야. 안스륨, 정말 예쁘네요. 반짝반짝 빛나요. 그런데 이걸 어디다가 쓰죠? " " 어디다가 쓰다니! " 제피가 팔을 붕붕 휘두르며 소리쳤다. " 일년에 한 차례씩은 나는 거라고 하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무라고!! 그 잎사귀가 얼마나 귀한 건 줄이나 알아? 다이아몬드만큼의 화폐가치도 지니고, 약으로 쓸 수도 있고, 장신구로 쓸 수도 있고, 얼마나 좋은건데! 사실 꽃이 더 비싸긴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구하기 힘드니까. " " 그래? " " 그것을 모으는 수집가도 꽤 된다고. 갖고 가면 꽤나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걸. " " 그런데 일년에 한 차례씩은 난다니? " 안스륨이 대꾸했다. "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건 에린지움의 잎사귀가 아니라 에린지움의 낙엽이다. 에린지움은 보통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 낙엽을 떨어트린다. 시들지는 않지만 가지에서 떨어지지. 에린지움의 여러가지 능력과 마찬가지로 약으로 정제되기도 하고, 보석과 같이 통용되기도 하지. " " 헤에, 왠지 어디다가 팔기는 아까워요. " " 몸에 가까이 두면 피로도 물리치고 상처도 빨리 낫는 효과가 있다. " 안스륨은 문득 옆에 장식된 꽃에서 흰 리본을 풀어내더니 잎사귀 끝에 그것을 묶고 떨어지지 않도록 가벼운 구속마법을 걸었다. 그리고 그것을 아스의 목에 묶은 후 누가 훔쳐가거나 벗겨지지 않도록 또 한번 구속마법을 걸었다. " 가벼운 마법을 걸었으니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거다. 잘 간직해라. " " 저 보다는 안스륨이 갖고 있어요! 상처가 빨리 낫는다면서요? " 많이 아물기는 했지만 여전히 결계안이라 본체로 돌아갈 수 없는 이상은 상처가 아무는 것이 더뎠다. 하지만 안스륨은 고개를 저었다. " 네 것이야. 너에게 더 필요할거다. " 아스는 신기한 듯이 계속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가느다란 잎맥으로 계속 수액이 흐르는 듯 그것은 움직이는 듯도 보였고, 빛에 비춰보면 반쯤은 투명하게 보이기도 했다. 차가운 돌 덩어리인 보석 따위보다 훨씬 아름답다. 고작 잎사귀 한 장 이건만, 에린지움에서 부여받은 그 놀라운 생명력으로 싱싱하게 살아있었다. 어느새 제피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손에 샴페인을 들고 짖궂은 얼굴로 말했다. " 그럼 자축행사를 해야지? " 퐁-! 마개가 달아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 으와앗!! " " 으아악 옷 버립니다! 무슨 짓입니까?!!! " 샴페인의 분수가 모두의 머리위로 쏟아지고, 아스의 놀란 비명과 기겁한 스티의 악다구니가 이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그런 그들을 보며 웃고, 아스와 안스륨은 정말로 즐겁다고 생각했다. 축제는 밤 늦게까지 이어졌고, 사람들은 술과 음식과 음악과 노래와 이야기를 끝없이 나누며 광장에 머물렀다. 아스도 안스륨이 뜯어말리는 것을 만류하며 맥주를 조금 마셨고 제피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스타티스의 타박을 먹었다. 달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별들도 졸음을 느껴 하품에 깜빡일 즈음이 되어서야 광장은 조금 한산해졌다. 스타티스는 널브러진 제피를 끌고 돌아가고, 안스륨도 아스의 눈에 잔뜩 달린 졸음과 피곤함을 보고 그만 돌아가자고 말했다. 조금 아쉬웠지만 내일도 있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아스는 말했다. " 샴페인을 맞아서 그런지 몸이 끈적거려요. 우물가에 가서 좀 씻고 올게요. 먼저 가요. " " 아니다. 같이 가자. " 우물가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스를 안스륨이 뒤따랐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지 못해, 누군가의 긴 팔이 목에 휘감겼다. " 여어, 오늘 하루 즐거웠는가 보지? " 귓가에 속삭이는 달큰한 목소리. 아스는 레지가 나타난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공터의 우물가로 가고 있었다. 안스륨은 인상을 찌푸리며 레지의 팔을 풀었다. 뒤돌아 본 레지는 평소와는 달리 보였다. 그도 어쩌면 이 축제를 즐겼는지, 폭풍의 성채에서도 잘 드러내지 않던 힘을 조금 개방해놓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조금 들떠 보였고, 화려한 외모는 더욱 더 그 존재감을 강렬하게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 무슨 일이지? " " 그런 말 말고, 좀 안녕했느냐거나 반갑다거나 그런 말은 없어? " " 그런 말을 바란다면 찾아오지 마. " " 아잉 싫어-! 내가 무스카리를 좋아하는거 알면서~ " " 무슨 개수작이야? " 레지는 후훗 웃더니 조금 물러났다. " 아주 즐거워 보이는구나 무스카리.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소년을 데리고서 이런 인간들의 축제를 즐기며 비실비실 웃는 꼴이라니. " " ... 인지 아닌지도 모른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 " 아아니- 그렇잖아. 그냥 난 말이지. 혹시나 카멜이 잘 못 찾기나 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지. " " 뭐? 그럴리가 없다. 그는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이야. 그녀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절대로 그녀를- " " 수백년동안 시공을 넘나들며 돌아다녔어. 그가 지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있지? 너무 지치고, 너무 그녀가 그리운 바람에, 그 판단력이 흐려졌을지도 모르지. 우연히 마주친 다른 트리옌의 환생체를 그녀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잖아? " 안스륨은 인상을 찌푸렸다. "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너는 카멜을 몰라. " 레지는 빙글거리며 말했다. " 카멜을 아주 잘 안다는 투로 이야기 하는데? 놀라워- 하긴, 증오하는데에도 사랑하는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하지. 수 백년 동안 카멜만을 따라다녔을텐데 모르는게 이상하겠지. 하지만 무스카리, 너는 너를 안다고 생각해? 자신조차 모르는게 자신이야. 지친 카멜이 그리움에 붙잡은 트리옌의 환생체를, 카멜처럼 아리스타타의 기척도 구분해낼 수 없는 네가 어떻게 아리스타타라고 단정지을 수 있어? " " ... 카멜이 잘 못 볼리가 없어. 그 놈은 그렇게 나약한 놈이 아니다. " " 카멜은 네가 아냐 무스카리. 너처럼 음험하지도, 집요하지도, 사악하지도 않지. 우리의 귀여운 금발머리 청년은 너무도 순수하고 아리스타타만을 향한 올 곧은 마음이라, 지난 수백년의 세월이 지독히도 괴로웠을꺼야.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할만큼. " 안스륨은 생각했다. 그도, 자신도. 이미 아리스타타에게 미쳐있다. 더 미칠 정신은 없다. " 어때 나의 가정이? 그럴듯하지? 이게 아니라고 반박할 수 있나? 없지? 후훗. " " ... ... " " 네가 손안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저 환생체는, 네 손안에 없고, 아리스타타라고 믿는 존재는 아리스타타가 아닐수도 있어. 기억도 없고, 외모도 다르고, 성격도 달라. 정녕 저 아이가 아리스타타? 그 자존심 강하고 오만하기 그지 없는. 살아남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 죽음을 택한 그 여자가 맞는가 싶구나 무스카리. " 레지는 안스륨의 귓전에 속삭였다. " 네 스스로 생각해봐. 단 한번이라도 그런 의심을 한 적이 없는지. 아니지? 네 성격 상 그럴리가 없지. 카멜이라면 또 모를까, 너는 아냐... 매일 밤마다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했겠지. 크큭... " 맞다. 그렇다. 처음 아스와 함께 했던 그 깊은 숲의 어둠 속에서도, 잠 들지 못하는 숱한 밤속에서도, 이게 꿈은 아닌지. 저 소년이 정말 아리스타타가 맞는지 의심속에 지내왔다. 갈가리 찢어서라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그녀의 마음을 얻어내겠다? 그건 오산이야, 무스카리. 그녀의 마음이, 네가 가질 수 있는 것이었나? " 절대로 울지 않는다. 절대로 웃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다. 증오스런 눈초리로 쳐다본다. 자신은 그녀에게 적, 폭군, 난폭자, 약탈자, 그런 뜻 이외의 것은 되지 못했다. ... 자신을 보고 웃고, 자신을 위해 울고, 자신을 의심없이 바라보며, 자신을 유일한 가족, 보호자, 휴식처, 친구.... 로 여기는 저 순진하고 약하기만 한 소년은. ... 정말, 아리스타타? 레지는 혼란에 휩싸인 안스륨의 눈동자를 보고 큭큭, 웃음을 흘렸다. 아아, 그 은빛의 여왕이 그토록 강하고 두려울 것 없던 너에게 남겨놓은 상처는, 이리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쩍 입을 벌리며 두려움의 피를 쏟아내는구나. 레지는 아리스타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픈 심정이었다. 괴로워하고 두려움에 떨며 의심해 무스카리. 너는 고독의 산제물. 번뇌의 증거다. 행복이니 기쁨이니 하는 단어 따위 어울리지 않아. 그때였다. 아스가 먼저 간 골목 쪽에서 여러가지의 발소리가 들리며 한 목소리가 외쳤다. " 노예가 도망 갔다! 잡아, 잡아!!! " 안스륨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는 레지의 목줄을 틀어쥐며 짓씹듯 말했다. " ...네 놈!!! " 안스륨의 손아귀 속에서 레지는 목이 뜯기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큭큭, 그를 비웃었다. 안스륨은 레지를 내던지고 황급히 아스가 사라진 쪽으로 뛰었다. 레지 저 놈이! 진심에도 없는 말을 하며 자신의 심경을 흐트려 놓고서는, 아스에게서 시선을 떼도록 만들었다!! 레지는 뒤로 나자빠져 한참을 콜록거리다가, 목을 좌우로 까닥거리며 중얼거렸다. " 아, 아파라. 여튼 난폭하기는. 그럼 다시 잡으러 오기 전에 재빨리 도망가야 겠지? " "... 안스륨? " 아스는 걸어가다가 문득 안스륨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다시 골목을 돌아나가려는데, 그때 순간 누군가가 아스에게로 뛰어들어와 둘은 거창하게 부딪혀 넘어졌다. " 아야야... " 아스가 썼던 머리장식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아스는 부딪힌 이마를 짚으며 상대에게 물었다. " 으... 괜찮아요? ... 다친데는 없나요? " " 으으... " 컴컴한 골목의 그림자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어스름한 늦은 달빛에 상대방의 모습이 드러나고, 아스는 눈을 크게 떴다. 평범하게 생긴 얼굴위로 드리워진 짙은 빛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수인족이었다. 안스륨과 똑같은 까마귀족이었다! 온 몸이 무언가에 맞은 듯 상처 투성이인 상대방은 거의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공포와 당황이 뒤범벅이 된 얼굴로 소년은 아스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아스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확인하더니 놀라움에 커진다. 그는 뭐라고 말할 듯 입을 열었고, 아스는 그의 그런 느낌이 어쩐지 낯익다고 생각했다. 그가 황급히 몸을 일으킬 때 아스는 왜 자신이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 자신이 들판에서 마차에 타려고 했을때, 그 안에서 보았던 노예들의 눈빛이었다. 어둠속에서 드러난 왼팔에 찍혀있는 낙인은, 자신의 날개뼈에 찍힌 것과 마찬가지로 장미무늬. 도망 노예라는 생각이 미처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전에, 멀리 뒤 쪽에서 소란스러운 외침과 발소리가 들려왔다. " 노예가 도망갔다! 잡아, 잡아!! " 까마귀족 소년의 얼굴이 공포에 질리고, 그는 아스를 지나쳐 황급히 도망치려 했다. 순간 아스는 그를 붙잡았다. 아스는 자신이 왜 그를 붙잡았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답은 곧장 떠올랐다. 그를 이대로 잡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안스륨과 같은 까마귀족이다. 자신이 성을 빌려 쓰고 있는 일족이다. 도와줘야 한다. 아스는 자신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떠올리지 못한 채 붙잡은 그에게 바닥에 떨어진 머리 장식을 씌웠다. 그리고 몸에 둘렀던 옷을 풀어 그에게 건넸다. " 제가 대신 미끼가 될게요! 이걸로 머리카락을 가리고 도망쳐요! " 소년은 잠시 아스가 던진 천을 받아들어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는 아스의 드물기 짝이 없는, 자신과 똑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 그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오전에 자신의 애원을 무시했었던, 그 남자가 원했던 소년이다. 고생이라고는 모를 듯한 순수한 얼굴에, 서슴없이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여유까지. 자신을 가로막으며 몸을 돌리는 아스의 날개뼈에 찍힌 인장을 보고 그는 그가 안스륨이 원하고, 거한의 노예 사냥꾼이 노예 상인에게 넘기기로 했었던 수인족의 도망노예임을 확신했다. 소년은 망설였다. 매질당한 고통에 신음하다 깨어나 보니 자신을 구속했던 물건들은 다 풀려 있고, 입구를 지키고 있던 자들도 곯아 떨어져 있었다. 마치 자신더러 도망치라고 외치는 듯한 상황에 그는 도주를 결심했다. 노예가 된 후 처음으로 만난 일족에게까지 외면당하고, 어느 곳에 팔리지도 않은 채 여기저기 떠돌다가 결국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를, 미래라고는 있을리 없는 상황. 도망가지 않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마치, 마치 누군가가 저 소년과 이렇게 마주치라고 만들어진 듯 하다.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저 수인족을 원하는 남자가 나타나고, 그와 비슷하게 닮은 자신을 누군가가 놓아주고, 자신은 결국 저 아이와 이렇게 마주치고... 저 순진해 뵈는 소년이 자신을 이렇게 도와주리라는 것 까지 계산된 듯한 냄새가 났다. ... ... 그래도 이런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비참한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의 그런 망설임을 쫓아보내 듯, 아스가 소리질렀다. " 얼른 가요! 전 괜찮아요! 나는... 나는 도와줄 사람이 있어요! " 소년은 지체없이 발길을 돌려 뛰었다. 그의 뒷모습이 어둠 속 골목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골목 끝에서 밝은 횃불의 빛과 흔들리는 그림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스도 걸음을 돌려 그 까마귀족의 소년이 사라진 골목과 반대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노예상에서 고용한 병사들은, 오른쪽 골목으로 사라지는 작은 그림자를 보고 아스를 뒤쫓기 시작했다. 아스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면서, 마음 속으로 안스륨을 생각했다. 그래. 자신은 괜찮다. 자신은... 자신은 안스륨이 구해 줄 것이다. 처음 만났을때 처럼, 자신을 죽이려 했던 트리옌에게서 지켜줬었던 것 처럼. 트리옌인 아스의 두 다리는 사슴처럼 달렸고, 조금씩 쫓는 병사들과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숨이 차서 뛰기가 힘들어지자, 아스는 잠시 장작더미가 쌓인 뒤쪽에 숨어들어 숨을 골랐다. 최대한 조용히 숨을 죽이려고 했지만, 쿵탕쿵탕 뛰어오르는 가슴이 호흡을 벅차게 만들고 있었다. 아스는 크게 심호흡 하려고 노력하며, 몸에서 지끈 땀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아스의 맞은편 벽이 환히 밝혀져 오는 것이 보였다. " 어디 간거야? " " 젠장, 되게 빠르네. 잠자다가 이게 무슨 뜀박질이야? " " 정말 이쪽으로 온 거 맞아? " 헉헉거리는 숨소리에, 투덜거리는 말소리. 어지러운 발소리들이 아스가 기댄 장작더미 뒤쪽에서 들렸다. 아스는 재빨리 숨을 들이마시고 기척을 죽였지만, 쿵쿵거리고 맥박이 뛰는 소리가 귓전을 가득 울려, 그는 트리옌이라면 있을리 없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시끄러운 소리라고 착각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횃불의 밝기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아스는 주먹을 꼬옥 쥐었다. " 여어! 저 쪽에서 도망가는 사람은 봤다는데! " " 그래? " " 에이씨, 또 뛰어야 하나. " 발소리들과 사람의 기척이 멀어진다. 아스는 참았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도망가는 사람을 봤다라, 자신이 이쪽으로 유인했는데, 결국 들킨 것일까? 아스는 그가 걱정되었다. 빨리 안스륨을 찾아서 이 사실을 알려야 겠다고 생각하고 아스는 조심 장작더미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장작더미 뒤의 공터는 비어있었다. 하지만 바깥을 바라보는 아스의 뒤로, 외팔의 큰 그림자가 이빨을 드러내며 손을 뻗고 있었다. 안스륨은 예민한 청각에 의지해 복잡한 골목길을 따라 뛰고 있었다. 하지만 트리옌인 아스의 발소리는 들릴리 없고, 인간들의 발소리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골목 구석구석에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의 발소리가 남아 있었고, 뛰는 발소리들은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다. 안스륨은 잠시 멈춰섰다가, 뛰는 발소리들이 북쪽 성벽 아랫쪽 부근으로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레지, 그 자식이 일부러 자신의 기운을 확장시켜 시야를 흐트려 놓고는, 헛소리로 아스에게서 신경을 끄도록 만들었다. 안스륨은 그런 얼토당토 않은 소리에 흔들린 자신을 욕하면서 레지를 저주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소동이라니. 예의 레지의 그 '나쁜 취미' 가 발동 된 것을 깨달으며 안스륨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즐거운 나를 보고 있자니 비위가 뒤틀리나 보군. 레제다. 안스륨은 훌쩍 옆에 있는 담장으로 뛰어올라 지붕을 밟고 뛰며 길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그림자가 낡고 오래된 건물의 벽면에 비치고, 이따끔 보이는 길에 몇명의 남자들이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띄였다. 얼마 가지 않아 높은 북쪽의 성벽 근처에 당도한 안스륨은, 달빛에 환히 드러난 흰 성벽 아래에 몰려 서 있는 까만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그 위에 씌인 큰 머리장식이 유난히 눈에 띄였다. 안스륨은 칼을 빼들고 그에게 접근하는 병사의 모습을 보고는 잇소리를 내며 뛰어올랐다. 곧 흰 성벽 아래에서 눈부신 빛이 터졌다. " 일어나. " 스타티스는 문득 침대맡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허벅지를 더듬었다. 짧은 단검이 튀어나오고, 불청객의 목에 그것을 갖다붙이던 그는, 낯익은 얼굴에 눈을 크게 떴다. " 안스륨?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헤어진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열린 창문 밖으로는 어스름 동이 터오는 듯 푸른 새벽의 기운이 스며들어오고 있었고, 안스륨은 그런 차가움을 온 몸에 뚝뚝 흘리며 스타티스의 침실, 그의 침대맡에 서 있었다. 스타티스는 그가 어떻게 기사 후보생인 자신에게 기척을 들키지도 않고 침대까지 찾아왔는지 경악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 그런 것을 따질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드라세나 그 자식에게 얼른 성문을 페쇄시키라고 해. " " 에? " 멍청하게 되묻는 스타티스의 말에 안스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 제피란더스 드라세나, 그 왕가의 녀석한테 성문을 페쇄시키라고 지금 당장 말하러 가라고!!! " 스티의 미간도 덩달아 구겨지면서 당혹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 어떻게 제피란더스님이 왕족인 걸... " " 얼간이냐? 쥬니퍼의 세검을 양 허리에 떡 하니 차고 다니면서, 그 자식의 정체를 모를 것이라 생각했어?! " 스타티스는 안스륨이 두개의 세검을 쓰는 쥬니퍼 가문의 자제인 자신이, 존댓말을 쓰는 대상이 왕족밖에 더 있겠느냐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잠옷바람으로 계속 침대위에서 꾸물거리면 그가 자신을 바닥에 내동댕이 칠 것 같다는 생각도 떠올렸다. 스타티스는 단검을 도로 허벅지에 숨기며 옷을 갖춰입기 시작했다. "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성문을 폐쇄하라니, 적당한 이유가 업잖으면... ...그리고, 아스는... 아니, 그 소년은 누굽니까? " 스타티스는 말을 하다가 그제야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을 발견했다. 검은 머리카락에다가 아스가 입고 있던 천을 몸에 감고 있어서 퍼뜩 눈치채지 못했는데, 얼굴을 보니 아스가 아니었다. 안스륨은 이를 갈며 말했다. " 아스가 노예 상단에 잡혀갔다. 이 놈 대신으로. " 퍽! 스타티스는 허리에 검을 차다가 말고 잔인하게 바닥에 뻗은 검은 머리 소년을 걷어차는 안스륨을 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노예인 것이 틀림없는 팔의 장미 낙인에, 등에는 매질 당한 사처가 가득하다. 안스륨은 한번 걷어찬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다시 그의 머리를 걷어차고 구둣발로 콱콱 짓밟기 시작했다. 스타티스는 기겁을 하며 그를 말렸다. " 그만둬요! 무슨 짓입니까? " " 나는, 이놈과 함께, 노예 상단에 가 있겠다. 빨리 성문 폐쇄명령을 내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도시를, 못 벗어나게 해!! " 계속 발길질을 하느라 말이 중간 중간 끊기는 안스륨에게 스타티스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 같은 일족의 아이에게 무슨 짓입니까?! 그만둬요!!! " " 누가 이런 버러지 같은 놈과 같은 일족이라는 거냐!!! " 스타티스는 화가 나 내지르는 안스륨의 말에 움찔, 하고 몸을 굳혔다가 곧 그런 자신을 책했다. 검의 천재라는 자신이 저런 수인족의 화난 기색에 밀리다니. 아스가 대신 잡혀갔다는 노예는 불쌍할 정도로 계속 걷어 차이고 있었지만, 스타티스는 그를 말리는 대신 빨리 왕궁으로 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는 쪽이 저 노예 소년을 돕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외투를 입고 방문을 나섰다. 아무리 아스가 그 대신 잡혀갔다고는 해도, 같은 일족에 노예가 된 신세의 소년을 저렇게나 사정없이 걷어차다니. 스타티스는 불쾌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말에 올라탔다. 입구에 서 있던 문지기는, 어제도 왔었던 낯익은 수인족이 도망갔다던 검은 머리카락의 노예를 끌고 오자 깜짝 놀라 안으로 그 사실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안스륨이 문을 발로 뻥! 차버렸고, 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콰당 열렸다. 놀란 기색의 시종이 달려나오고, 안스륨은 걷어차여 비틀거리는 노예를 앞장세워 그를 계속 발로 차며 앞으로 걸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노예는 앞으로 가다가 고꾸라지고, 다시 일어서서 가다가 걷어차이고를 반복했지만 계속 쓰러져 있을수가 없었다. 오늘 길 내내 쓰러지면 그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안스륨이 그를 찼기 때문이다. 소년은 놀란 노예 상인이 달려나오는 것을 보고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바닥으로 쓰러졌고, 안스륨은 걷어차는 것을 그만두고 노예 상인에게 윽박질렀다. " 내 놔. " " 예에? 무슨... ... " " 어제 내가 사겠다고 했었던 노예 말이다!!! 이 빌어먹을 녀석을 대신 데리고 왔으니 내 놔!!! 어제 네 놈들이 잡아갔지 않느냐!!! " 푸확! 살기가 사방에 퍼지고, 사색이 된 노예 상인이 뒷 걸음질을 치다가 뒤로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서 있던 시종은 꺄악! 거리더니 기절해버렸고, 안스륨의 눈동자는 덧 씌워진 검은빛을 잃고 금빛으로 분노에 일렁이고 있었다. 레지 그 자식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이 도시를 떠날때까지, 아니 이 도시를 떠난 후에도 계속 옆에 붙어 있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혹시 몰라, 노예 상단이 잡혀간다면 차라리 자기가 되 사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에 어제 아침 이곳에 들렀던 것이다. 안스륨은 상인의 멱살을 후려잡으며 으르렁 거렸다. " 만약 내가 주문했던 것에 흠집 하나라도 나 있으면, 그날부로 장사는 다 했다고 생각해라. " " 왜, 왜 이러십니까, 손님!!! 제발 진정을... " " 내 놔!!!! 어디 있어?!!! " 노예 상인은 히익, 겁에 질린 소리를 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 죄, 죄송하지만 손님... 소, 손님이 말씀하셨던 그 노예는, 저희가 아직 잡질 못 했... " " 그럼 어디 갔어!! 어디 갔느냐고!! " " 으아악! 소, 손님... !! 제, 제발 이걸 놓으셔야...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 잠시 후, 안스륨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곱추와, 곱추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부들부들 떠는 상인을 볼 수 있었다. 곱추는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서는 말했다. " 예에! 분, 분명히 보라색 머리카락의, 미남자였습니다. 그가 노예 사냥꾼에게 자신이 유인해줄테니 그 도망 노예를 잡으라고...! 저는 그때 무서움에 정신을 잃어서 듣지 못했지만, 나중에 노예 사냥꾼이 말하기를 약속되었던 여기 상단에는 팔지 말라고 했답니다...!! " 안스륨의 눈동자에서 분노가 들끓었다. " 레지... 레제다 튜베로즈!!! " 너를 어떻게 씹어먹으면 좋을까? 그 빙글 빙글 웃는 얼굴을 손으로 짓뭉개어 박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안스륨은 전신으로 뿜어져 나오려는 살의를 억지로 억누르며 이를 갈았다. 어머니의 빌어먹을 사생이자, 자신의 동복동생인 그놈은 항상 이렇게 자신의 주위를 맴돌며 일을 틀어놓는다. 그때도 그랬다. 레지의 달콤한 말에 속아넘어가, 아리스타타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더라면... 비록 자신의 본심이었지만, 그 말이 그렇게 아리스타타를 죽이는 말이었다면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을 것이다. 늘 웃는 낯으로 자신의 옆에서 떠들어대지만, 실은 그 누구보다도 그가 자신을 증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그가 느껴보지 못한 어떤 감정도 자신이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놈을 죽일 수만 있었다면 예전에 죽였겠지. 아니, 무리를 해서라도 그를 죽였어야 했다. 안스륨은 더 이상 끓어오르는 살의를 감출 수가 없었다. 감출 이유도 없다. 서걱,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게 곱추의 머리통이 날아가고, 노예 상인이 죽어라고 비명을 질러대었다. 주변에 늘어서 있던 무장한 사병들이 달려드는 것을 바라보며, 안스륨은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저 잡 것들의 피를 뒤집어 쓰고 나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까. 제피와 황급히 안스륨이 있겠다고 말했던 노예 상단으로 말을 달리던 스타티스는 문득 풍겨오는 피냄새에 제피의 앞을 가로막았다. 갑작스러운 일에 제피의 말이 크게 투레질하고, 놀란 제피가 말했다. " 왜?! 얼른 가야지! " " 잠시만요. 아무래도 안스륨이라는 그 남자, 위험합니다. 제피님은 바깥에 계십시오. 저 혼자 들어가보고 오겠습니다. " " 무슨 소리야?! " " 아니, 차라리 궁에 돌아가십시오. 제가 안으로 들어가서 사실을 알리고 모이라고 한 경비병들에게 사실을 물어볼테니, 제피님은... " " 아스가 잡혀갔어! 그것도 굳이 내 부탁을 들어주느라 이 도시에 머무르다 그렇게 된 거라구! 그냥 넘길 수 없는 노릇이야. 아스가 잡혀간 것은 일부는 내 책임이야! 왕자라는 놈이 자신의 손님들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으니... " " 제피란더스님!! " 스타티스가 강한 눈빛으로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 말했잖습니까, 저 남자는 위험합니다. 안에서 피냄새가 납니다. 위험할지도 몰라요. " " 그렇다면 더더욱 가야지. 내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네가 나를 지켜주니까 위험하지 않아!! " 스타티스는 말을 달려가는 제피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럴때만 내 나라입니까? 그럭저럭 좋은 취향의 그림이었던 것은 피가 튀어 제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무기들과 이리저리 뒤섞인 사람의 모양을 했던 것들은 대부분 토막이 나 있거나, 무엇인가에 눌린 듯 짜부러져 있다. 스타티스는 드문 드문 보이는 흰 것들이 뇌수나 척수라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눅진하게 토기가 밀려오고, 제피는 시신으로도 보이지 않는 고깃덩이들 사이에 서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지옥의 사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검은 들고 있지만, 검만으로 만들 수 있는 시신들이 아니다. 스타티스는 그의 기색에 긴장하며 자꾸 검집으로 가려는 손을 애써 억눌렀다. 욱, 하고 참지 못한 제피가 먹은 것들을 토해내는 소리가 고요한 홀 안을 울렸다. 크으, 하고 입가를 닦고 애써 몸을 일으킨 제피는, 공포를 떨쳐버리려는 듯 소리쳤다. " 무슨 일이냐 안스륨!!! 도시내에서 살인은 사형에 처해진다!! " 안스륨은 칼에 묻은 피를 무심히 떨쳐내었다. 그가 이쪽을 돌아보자, 스타티스는 반사적으로 검을 틀어쥐었다. 잘 못 했다. 기사단에 연락을 넣고 오는건데... 피를 뒤집어 쓴 그는 검은색의 눈동자로 차분했지만, 그 차분한 눈동자는 이런 살육의 현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이성적인 것이었다. " 내 것을 건드리려는 것들 역시 사형이야. 피를 뒤집어 써도 기분은 별로 좋아지지 않는군. 다만 조금 진정은 되는 것 같다. 성문은 폐쇄했나? " 제피는 그의 말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아스포델. 나는 당신의 것. 아스의 그 이름은 그가 안스륨의 것이라는 명백한 표시였다. 안스륨은 노예 상단이 그를 잡아가려고 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곳의 열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그는 아스에게 미쳐있었다. 스타티스는 제피의 앞을 가로막으며 속삭였다. " 섵불리 건드리지 마십시오. 우리와는 아는 사이이고 우리가 적극적으로 아스를 찾는 일에 협조해줄 수 있다는 것을 밝히면 괜찮을 겁니다. 자극되는 이야기는 꺼내지 마십시오. " 그리고 곧 안스륨에게 말했다. " 왕자님을 만나기 위해 최대한 빨리 서둘렀지만 알현이 허락되는 시간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금 늦었다. 급히 폐쇄했지만 몇 명은 도시 밖으로 빠져나갔어. 지금 나간 사람들을 목격한 경비병들을 광장에 모이라고 해 뒀으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빨리 물어보고 노예 사냥꾼의 위치를 파악해야 해! " " 알현이 허락되는 시간때문에 늦었다고? 무슨 핑계를 대는 거지? 쥬니퍼 놈이 드라세나를 만나는데 알현을 신청해? 웃기는구나! " 안스륨은 화가 난다는 어조로 스타티스에게 말했다. 예로부터 왕가의 보호자로써 왕가 자체가 아닌, 왕가의 혈통 하나만을 평생 따라다니며 지키도록 되어있는 쥬니퍼의 사람이, 어찌보면 가족보다도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왜 알현을 신청하고 만나느냐는 소리였다. 쥬니퍼 가문은 상대가 황태자든 반역자이든 자신이 모시기로 한 사람이면 죽을때까지 따른다. 그래서 그를 비꼬는 사람들은 그들을 왕손의 개라고 불렀다. 그래서 쥬니퍼의 가문에는 각자 모시는 사람에 따라서 아버지와 자식간이, 형제가 서로 칼을 겨누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스타티스는 이런 이야기까지 그에게 해야하는 지금 상황이 지독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미안하지만 제피란더스님은 태자가 아니시다. 하지만 나는 쥬니퍼 가문의 독자다. 그래서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알현을 신청하고 성문이 개방 될 때까지는 제피님을 만나는 것이 금지 되어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보다는 지금 이런말을 하는 도중에도 아스는 멀어질지 모른다. 서두르는 쪽이 좋을텐데. " " 좋아. 아무래도 나는 혼자이니, 네놈들이 전력을 다해 찾는 쪽이 좋을거다. 아스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후로는 나도 몰라. 이 축제는 꽤나 즐거웠는데, 다시는 열릴 일이 없다면 슬프겠지. " 드라세나를 없애겠다는 소리다. 순간 제피와 스타티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눈앞에 있는 하찮은 수인족의 사내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시할만한 것이 못되었다. 바닥에 널린 고깃덩이들이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스타티스는 지금 이 순간 저 남자를 베어버리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자신이 실패할 경우, 자신만이 아니라 제피란더스님도 죽는다. 게다가 저 남자는...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레벨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방금 순간 일어났던 자신의 살기를 읽었을텐데도, 미동조차 하는 기색이 없다. 신경도 쓰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품든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스티는 제피를 앞장세워 몸을 돌렸지만, 안스륨이 자신의 뒤를 따라온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검을 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서둘러 광장으로 갔다. 광장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그렇게 수상한 사람들은 지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노예 사냥꾼으로 보이는 자도 지나가지 않았고, 그 노예 상단에 드나들곤 하던 노예 사냥꾼 중에서 거한으로 유명한 자의 이야기는 자신들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자들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경비병들은 그 거한의 사냥꾼이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보았다면 모를리 없다며 입을 모았다. 스타티스는 그 노예 사냥꾼이 눈에 띄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도시를 빠져나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면 한 패가 더 있을지도 몰라. 두 사람 이상 성문을 빠져나간 게 몇 건이나 되나? " " 남문으로 사내 세명이 지나갔고, 서문으로 그, 예의 유명한 호키폰 상단이 지나갔습니다. 짐 마차를 세 대인가 끌고 있었는데, 확인은 해보았지만 그 속에 사람을 숨겼다면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북문으로 꽃을 잔뜩 실은 짐 마차 한 대와 작은 체구의 남자 둘이 나갔습니다. 그 외에는 여자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세쌍인가 지나갔는데 가능성은 없습니다. " 스타티스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 아직 축제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호키폰 상단이 지나갔다고? 이상한 일이군. 호키폰 그 상단 한때는 노예를 운송하는 일도 하지 않았나? " " 에예! 맞습니다! " " 그렇다면 그 노예 사냥꾼과도 면식이 있겠군. " 스타티스는 제피와 안스륨을 돌아보며 말했다. " 그 상단이 제일 수상합니다. 짐마차가 세대씩이나 되면 그 거한도 몸을 숨길 수 있습니다. 저희는 그 쪽을 쫓고, 혹시 모르니 다른 일행들도 쫓도록 병사들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 " 알았다. 안스륨, 말은 타실 줄 아시지요? " 안스륨이 고개를 끄덕였고, 스타티스는 말을 가지러 간다는 핑계로 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하러 갔다. 만약 그곳에서 아스가 죽거나 무슨 일을 당한 흔적을 발견하면 그 상단은 물론이거니와 곁에 있던 그들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안스륨을... ... 아스는 몸이 흔들리는 감각에 깨어났다. 뒤통수가 욱신, 하고 통증을 알려왔다. 머리가 지잉- 울리고 눈을 뜨려 하자 눈이 부셔서 눈알이 푹푹 쑤셔왔다. 덜컹! 하고 마차가 크게 요동치는 바람에 아스는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내가 아스의 몸을 받쳤다. 아스는 쿵쾅쿵쾅 울리는 머리통을 붙잡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스는 웬 마차의 마부석에 타고 있었고, 드문 드문 나무와 돌들이 있는 들판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 ... ? " " 빅디님, 깨어났습니다! 이제 도시에서도 멀리 왔으니 나오셔도 될 것 같은데요. " 아스는 눈앞에서 말하는 사내가 어딘지 낯 익다고 생각했다. 바싹 마른 체구에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얼굴. 어두운 골목이 오버랩 되는 것을 느끼며 마차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느낌에 아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뒤의 짐마차에는 오전의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나며 온갖 향기를 뿜어내는 꽃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 꽃무더기가 움찔 움찔 움직인다 싶더니만 안에서 거대한 덩치가 몸을 일으켰다. 몸에 꽃잎과 꽃가루를 묻히고 바닥으로 뛰어내린 거한은, 오른손으로 몸을 툭툭 털었다. 그 거한은 외팔이었다. 잘린 왼팔에 감긴 붕대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나고 있었다. 아스는 어두운 골목길의 풍경이 선명히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거한이 자신을 돌아보자 그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때 골목에서 자신을 납치하려 했던 그 사람이다! 옆의 사내도 그와 함께 나타났었던, 곱추에게 돈을 줬던 그 남자였다. 아스는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몸에 무엇인가가 휙! 하고 감겼다. 마른사내는 순간 허리춤에 매고 있던 밧줄을 능숙하게 던져 아스의 몸을 묶어버렸다. 실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버둥거리던 아스는 볼썽사납게 마부자리에서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거한이 그런 아스에게 성큼 성큼 다가와서 이를 드러내었다. 그의 불쾌한 체취와 꽃향내가 뒤섞여 형언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냄새가 났다. " 빌어먹을 쥐새끼, 네 놈때문에 내가 내 팔을 잃었어! 갈아먹으도 시원찮을 놈! " 아스는 눈앞이 번쩍 울리는 것을 느꼈다. 곧 굉장한 아픔이 머리옆에 느껴지고 아스는 반대편으로 나가 떨어졌다. 귀싸대기를 올린 것이겠지만 워낙 큰 손은 아스의 머리통 전체를 때렸다. 쿵! 하는 소리가 울리고 아스는 낮으막히 신음을 흘렸다. 고막이 상했는지 귀에서 축축한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거한은 다시 성큼 성큼 다가와 그 큰 손으로 아스를 마구잡이로 때렸다. 아스는 비명을 올렸고 깨진 뒤통수와 귓전에서 쉴새없이 피가 흘렀지만 투명한 터라 거한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되려 맞아도 아스가 멀쩡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분노에 차서 계속 손찌검을 했다. " 네 놈 때문에! 하찮은 도망노예가 내 팔을 잘라먹어! 죽어! 죽어! " " 아악!! " " 그만하십시요 빅디님! 곧 펌킨에서 팔아야 할 아입니다! 이번에 건진거라고는 저 녀석 밖에 없는데 경매에서 비싼 값에 팔려주잖으면...! " " 값도 얼마 안 나올 볼품없는 새끼가! 퇘! " 거한은 아스에게 침을 뱉고 분이 안풀리는지 계속 욕설을 지껄이며 쿵쾅쿵쾅 발을 굴렀다. 아스는 얻어맞은 고통으로 몸을 둥글게 말았다. 통나무에게 얻어맞은 것 처럼 온 몸이 후끈거렸다. 빅디는 신음하고 있는 아스의 두 다리를 갑자기 잡아 벌렸다. 마른사내가 염려스럽게 외쳤다. " 빅디님! 상품인데... 게다가 혹여 누구라도 쫓아오면... " " 쫓아오기는 누가? 이런 도망 노예 따위를 생각해서... 도망 노예니 이런 일이 익숙하겠지. 내 큰 것으로 네 그 천박한 구멍에 박아주는 걸 고맙게 여겨!! " " 빅디님... " " 시끄러!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안 풀려! " 아스는 거한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한이 다리를 붙잡아 올리고, 경비병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아스에게 대충 둘러놓았던 여행자 망토가 아래로 흘러내리자, 한 겹뿐인 속옷이 드러났다. 거한은 그것을 한번에 아래로 끌어내렸다. 맨피부가 드러나는 느낌이 들고, 아스는 그제야 이 자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깨달았다. " 무슨 짓이야-!!!!!! 건드리지 - 으악!! " 빅디는 무자비하게 손을 휘둘렀고 아스의 고함은 비명이 되어 흩어졌다. 하늘을 가리며 거한이 자신의 바지를 끌어내리고, 그 덩치만큼 비정상적으로 큰 것을 보고 아스는 욕지기가 치밀었다. 크고, 붉고, 돌기가 돋아나 있는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닌 것 처럼 보였다. 새파랗게 질린 아스가 그것을 바라보자, 빅디는 쾌감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 어떠냐? 크흐흐... 너 같이 천박한 놈들에게 꽂으면 다들 자지러지지. 사실 나는 버킨족과의 혼혈이다. 인간으로써는 이렇게 훌륭한 물건이 있을 턱이 없지. 너 같은 놈에게 맛보게 해주기는 아깝지만, 심한 경우에는 장 파열이 되기도 하더군. 하지만 너는 상품으로 팔아야 하니까 그렇게 까지는 참아주지. " 아스의 눈동자가 공포에 얼어붙었다. 곧 엉덩이 쪽으로 그것으로 느껴지는 물체가 와 닿자 아스는 비명을 내질렀다. " 아아아아아악!!!!!! " " 멈춰라-!!! " 거한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사실 남자는 빅디처럼 체구가 커서 거한이 아니었다. 땅딸막한 키지만, 무서울 정도로 살이 쪄서 거한이었다. 눈코입이 다 살에 파묻히는게 아닐까 걱정되는 남자, 호키폰은 오늘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였다. 식사는 맛이 좋지 않았고 체했는지 내내 속이 불편했다. 무엇보다 제피 그 꼬맹이에게 미인대회에 걸었던 돈을 다 빼앗겼다는 사실이 분통 터졌다. 그리고 지금 웬 기사단 무리가 쫓아와서 자신들을 불러세우자 찔릴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호키폰은 그 덩치로 어렵게 어렵게 마차에서 내려 먼지를 일으키며 말들을 세운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백마에서 뛰어내리는 남색 고수머리를 보고 호키폰은 드라세나의 유명인사가 여기까지 웬 일인가 싶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뒤로 연이어 내리는 것은 재수없는 자식, 제피다. 저 자식은 도대체 어떻게 스타티스와 알게 되었는지 늘 둘이 붙어다녔다. 그리고 큰 키에 검은 머리의 수인족 사내가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 조사할 것이 있어서 왔다. 혹시 검은 머리카락의 수인족 아이를 데리고 있지 않느냐? " " 에에? 아닙니다. 저는 노예거래에 손 뗀지 오래 되었습니다! " 뭐, 눈 앞의 이 미소년 스타티스를 팔 수만 있다면 다시 해도 괜찮지만. 아마 펌킨의 경매에다 내 놓으면 꽤나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거다. 호키폰은 왠지 모를 아쉬움에 입맛을 쩝쩝 다셨다. " 노예 사냥꾼도 보지 못했느냐, 거한의 빅디라는 이름의. 그를 알텐데. " " 아뇨- 손 뗀지 오래 되었다니까요! " " 그럼 왜 서둘러 도시를 떠났지? " 호키폰은 울상이 되어 말했다. " 그야, 미인 대회의 내기에 거기서 장사할 밑천을 다 걸었는데, 모조리 제피에게 다 잃었잖습니까! 화도 나고 장사할 돈도 없는데 뭐하러 있습니까? " 스타티스와 제피는 수심에 찬 얼굴을 했다. 잘 못 짚은거면 안되는데. 스타티스는 뒤에 있던 병사들에게 손짓을 하고 말했다. " 그럼 좀 짐을 수색해 보겠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짐마차 세대가 다 텅텅 비어있겠군. 그러면 그 안에 사람 두엇쯤은 숨길 수 있겠지? " " 아이고, 팔다 남은 짐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요! 사람 숨겨서 뭐하게요? " 평소라면 탈세로 사들인 물건들을 들킬까봐 노심초사 했을테지만 물건 살 돈조차 없었으니 여유로웠다. 그런데 노예 사냥꾼을 잡기 위해 쥬니퍼 가문의 사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일곱, 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다섯이나 나와 있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들은 도대체 자신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의 표정들이었다. 쥬니퍼 가문의 부탁이니 나오긴 했지만,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기사 후보생인 스타티스의 말을 듣는다는 것도 기분나쁘고, 위험인물이라는게 수인족의 남자라는 것도 이상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불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병사가 외쳤다. "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타티스님! " 제피가 한숨을 쉬었다. " 아무리 잘 숨어도 짐마차 외에는 그 거한이 숨을만한데가 없어. 잘 못 짚었나 보다. " 안스륨은 하나하나 상단의 인간들을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검은 머리카락의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얼굴도 눈에 새길듯이 유심히 쳐다보고, 마법의 흔적도 살펴보았지만 아스로 보이는 수상한 인물은 한명도 없다. 안스륨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차라리 그때 카멜에게 보냈어야 했나? 카멜이라면 자신처럼 이렇게 멍청하게 아스를 찾아 헤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공 저편에서도 아리스타타를 찾아낼 수 있는 자다. 눈 앞에 있을 아스를 놓치는 바보 짓 따위 하지 않겠지. 무력한 자신이 화가 났다. 애꿎은 제피와 스타티스에게 화가 났다. 아스를 그때 노예 상단에서 데리고 나오며, 안으로 깊숙히 갈무리 해 둔 분노가 자꾸만 들끓었다. 목을 벌리고 입술 틈새로 새어나오려고 한다. 억눌러둔 잔인한 본성이 자꾸만 속삭인다. ' 애초에 아스를 폭풍의 성채로 째빨리 데려가서, 꼭꼭 숨겨뒀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사랑 따위, 마음 따위를 바라는 네 헛된 꿈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잖아. 그때와 마찬가지야, 아리스타타를 짓누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그녀의 마음을 네가 욕심 내었기 때문에, 그녀가 죽었잖아... ... ' 소리도 없이 짐마차 한대가 두동강이 났다. 곧 와르륵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때까지 불만을 궁시렁 거리고 있던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검자루를 틀어쥐었다. 호키폰은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고 생각하며 박살이 난 짐마차를 히에엑 거리며 쳐다보았고, 안스륨은 감히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댄 맹랑한 꼬마를 쳐다보았다. 제피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 스타티스!! " " 너를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무고한 살생은 내 앞에서 용납할 수 없어. 화가 나는 것은 알겠지만 여기서 칼을 휘두르며 분풀이를 하느니 얼른 아스를 찾는 쪽이 유리할 거다. " 안스륨이 이죽거렸다. " 감히 내 목숨을 시험하려 드는 너를 내버려두면서 말이지? 모조리 다 죽이고 저기 서 있는 왕자 녀석만 살려 인질로 붙잡고 아스를 찾아내라고 협박하는 쪽이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 스타티스가 입술을 사려물었다. 양 손에든 세검이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갑자기 제피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날 없애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많아. 그래봤자 소용없을거다. 호키폰. 가장 큰 노예시장이 어디지? " " 그야, 드라세나... " " 아니아니, 외부적으로 드러난 곳 말고 말이야. 고위 귀족이나 돈 있는 것들이 음성적으로 온 갖 것을 판매하는 시장을 자주 드나든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것에서 노예가 빠진다면 섭하겠지. 가장 가능성 높은 곳은 변변한 자원이나 시장도 없으면서 끊임없이 금전이 왔다갔다 하는 펌킨일테고. 펌킨 어디야? " " ... ... 퍼, 펌킨 성이 있는 곳이야... 아니, 곳입니다. 그곳의 공작이 그 시장을 주관한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 " 좋아, 스타티스, 가자! 여기가 아니라, 그 꽃을 실었다는 짐마차였어! " 스타티스는 조심스럽게 검을 거둬들였다. 제피는 신경도 쓰지 않고 먼저 말에 올라 달리기 시작했다. 스타티스가 검을 거두자 안스륨도 말에 올라 주저없이 달렸고, 곧 병사와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스타티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에 올랐지만, 호키폰은 죽을뻔 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부서진 짐마차 한대를 아까워 했다. 투각, 투각, 투각, 둔탁한 소리가 빅디의 귀를 때렸다. 마른 사내가 황급히 말했다. " 빅디님! 빅디님! 병사들입니다! " 빅디는 자신의 아래에 깔려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이를 질끈 깨물고 눈물을 머금은채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빅디는 아스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보고 자신의 것이 빨리 그 아이를 원한다는 듯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다지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고 볼품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소년은 지독히도 유혹적이었다. 그냥 자신의 것을 박고싶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갑자기 탐스러워 보이는 입술에 입맞추고, 상아색 피부를 쓸어만지고 꼭 저 눈물같이 투명한 것을 머금을 그의 것을 빨아 울리면 지금 자신을 휘감는 뭔지 모를 향기와 스며드는 쾌감을 더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했다. 마치 자신이 이 소년을 사랑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 빅디님! " " 이봐! 무슨 일이야?! 웬 비명이야! " 빅디는 들려온 목소리에 가까스로 바지춤을 추스리고 일어났다. 아스가 흐느끼며 다리를 모았고, 말에서 내린 병사가 일어선 거한을 보자 눈을 크게 떴다. " 네가 빅디군. 맞지? " " 맞다. " " 저 뒤에 있는 소년이 검은 머리카락의 수인족이군. 좋아, 찾았다. 저 소년을 우리에게 넘겨! 그리고 얌전히 포박을 받아라! " 병사 네명이 칼을 빼들며 외쳤다. 빅디는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팔을 하나 잃었다고 이것들이 만만하게 보나? 옆의 마른 사내가 그에게 속삭였다. " 병사들과 불필요한 마찰은 일으킬 수 없습니다. 잘 못 해서 지명수배라도 당하면, 사냥꾼 생활도 끝입니다. 그냥 저 소년을 넘겨주고 도망가는 쪽이... " " 싫다. " 마른 사내는 빅디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가 무식하고 험악한 사내라 해도, 어린애들과 멀쩡한 처녀들을 납치해 팔아치우면서 그들이 여태까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한번도 무모한 짓을 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그 녀석을 두려워 하는 것은 뒤의 일이다. 지금은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노예 사냥꾼이 병사들과 얽매여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빅디는 아스를 넘겨주기 싫었다. 그의 이성은 사내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외쳤지만 감정은 그렇지 못했다. 사내는 빅디의 기색을 보더니 한숨을 내 쉬고는 아스를 힐끗 바라보았다. 좋지 않다. 저 소년은 자신들에게 위험하다. 시작은 마른사내가 밧줄을 휘둘러 한 병사를 휘감는데서 부터였고, 거한의 큰 손이 날아들자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스는 병사들의 말소리가 울리자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싸움이 일어나기 시작할 무렵에는 두다리로 걸을만큼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도망가야 한다. 안스륨이 구해주러 온다는 믿음에는 변함없었지만, 그 전에는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지켜야 한다. 구해주러 올 안스륨을 위해서도, 적어도 그가 구하러 오기 전까지는 성한 몸으로 있어야지, 안스륨의 얼굴이 걱정과 고통으로 흐려지는 것은 보고싶지 않았다. 물론, 자기라고 이런 꼴을 당하는게 좋을리 없다. 아스는 자꾸만 후들거리는 다리를 채근하며 일어섰고, 곧 힘을 주어 뒤로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자 다리는 사슴처럼 바람을 가르고 움직였고, 상체가 묶여있는 터라 그렇게 빨리 달리지는 못해도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포가 아스를 잡기 위해 따라 달렸고, 아스는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그때 누군가가 옆에 나타나더니 자신의 다리를 걸었다. 아스는 달려가던 기세 그대로 넘어져 들판위를 데굴데굴 구르다가 바위에 부딪혀 멈췄다. 얻어맞은데다가 바닥을 구르니 온 몸이 후끈! 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아스가 고개를 들어 본 곳에는, 상아빛 머리카락에 녹색눈을 한 트리옌이 서 있었다. 월이었다. " 당신... " 아스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 남자였다. 카멜과 같이 왔던... 하지만 자신을 죽이려 했던 트리옌. 그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에, 아주 사무적인 태도로 허리의 검을 뽑았다. 아스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 이자는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고, 지금 또 다시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사실 월은 아스가 안스륨이나 카멜과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노예 상인에게 잡혀가고, 여기까지 올때도 월은 죽 아스를 따라왔다. 여전히 그는 아스를 별로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펜은 그것을 강렬히 원했다. 아무리 노예 사냥꾼이라 살 가치가 없는 놈들이라 해도 무고한 피를 묻히는 것은 아스 하나만으로도 족하다 생각했기에 월은 아스를 조용히 죽이고 갈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아스가 홀로 도망치려는 이때가 그 기회였다. 아스는 묶여 있었고, 잔뜩 얻어맞은 온 몸은 통증을 호소했으며 뒤로는 바위가 있어 돌아 도망치면 그대로 등을 찔려 죽을 것이었다. 아스는 전과 같은 행운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때 숲에 내려앉았던,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만들던 노을도 없었고, 월의 눈동자에 그때와 같은 망설임도 비치지 않았다. 장검이 치켜올려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스는 왠지 마음이 편안했다. 안스륨이- 안스륨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장검의 날카로운 빛이 아래로 내려쳐지고, 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아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절박한 외침이 터져나온 것은. 그 생각은 안이한 아스의 태도를 박차고 체념에 감았던 아스의 눈을 뜨이게 했다. - 나의 목숨은 내 것이 아냐, 내 목숨은... 내 목숨은 나를 살려준 안스륨의 것이야! 나는 죽을 수 없어!!! 키위잉- 바람이 진동하는 소리가 울리고, 아스의 목에 걸려있던 에린지움의 잎사귀가 스르륵 망토위로 떠오르며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흩어져갔다. 그 빛은 곧 강렬한 파문이 되어 주변으로 퍼지고, 아스는 갑자기 온 몸을 훑는 생소하고 날카로운 아픔에 짧은 소리를 질렀다. " ---아! " " 으... 헉?! " 빅디는 마른 사내를 쳐다보았다. 마른 사내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목에 꽃았던 납작한 칼을 빼내었다. 곧 분수처럼 붉은피가 옆으로 터져나오고, 빅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거한이 바닥에 쓰러진 네 명의 병사위로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중얼거렸다. " 저런 소년에게 집착하는 당신은 더 믿을 수 없습니다. 밑에서 온갖 잡 심부름을 해가며 기술이나 요령도 익혔고, 돈도 모았지. 이제 저 소년을 팔고 나면 새로 인생을 시작할 기회가 생길거야. 더이상 너는 필요없어. " 사내는 꽃이 사방팔방 흩어진 짐마차와, 원래 아스가 쓰러져 있던 빈자리를 쳐다보았다. 곧 멀리로 고개를 돌리자, 이상한 느낌이 와 닿았다. 들판이 진동하는 듯, 바람이 진동하는 듯 소름이 오소소 돋고, 뭔지 알 수 없는 것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들판 저 너머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터졌다. 장로회와 회동을 갖던 펜 오키드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에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녀가 갑자기 입을 다물자 모두들 의아한 눈초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갑자기 숨이 가빠지며 무언가 어지러운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비틀, 이마를 짚자 옆에 있던 트리옌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 괜찮으십니까? " " 아, 네, 물론. 죄송합니... ... " 두근, 두근, 두근. 펜은 고개를 들어 웃어보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에린지움의 거대한 공명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펜은 에린지움의 이렇게 큰 움직임을 난생 처음 겪었다. 놀라서 그녀가 자리에 벌떡 일어나고, 그녀의 시선은 이미 회장안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에린지움을 보고 있었고, 아리스타타의 시신을 보고 있었고, 낯선 벌판을 보고 있었고, 월을 보고 있었고, 펜 오키드를 보고 있었고, 또... 펜은 하마터면 외마디 비명을 지를뻔 했다. 그녀의 몸이 은은한 은빛에 감싸이며, 의도한 바가 아닌데도 에린지움의 능력이 행사되고 있었다. 트리옌들이 어리둥절 자리에서 일어서는 가운데,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에 무중력처럼 위로 떠오르며 흩날렸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막기 위해 두 팔로 몸을 감싸안았다. 눈에 보일만큼 뚜렷한 어떤 기류의 파문이 주변으로 흩어져 나갔다. 몸을 싱그럽게 하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그 기운에 모두들 기분은 좋아졌지만, 펜이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눈부신 빛이 그녀의 몸에서 터져나오며, 펜이 고함쳤다. " 아리스타타-!!!!!! " 카멜은 트리옌들의 영역 가장 끝, 결계가 가장 가깝게 있는 조그만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황량한 벌판 한 가운데 세 워진 조그만 마을은 대부분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업소와 잡화상, 음식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마을 어디엘 가도 지평선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는 커다란 나무를 볼 수 있었다. 다른 나무는 한그루도 보이지 않는 마른 황무지에 그것은 카멜에게 생소한 모습이었지만, 벌써 수백년째 저곳에 서 있는 나무를 보았을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 했다. 그 나무들이 결계를 지탱하고 있는 중심부로써, 전쟁 중 레인저부대가 용족의 후방에서 혈투를 벌이며 몰래 몰래 심었던 나무의 씨앗이었다. 카멜이 아리스타타를 찾아 떠날 당시에만 해도 어린 묘목이었는데, 벌써 저렇게 자란 것이다. 그 나무들은 다 에린지움에서 난 씨앗들로 보통 트리옌들이 태어나야 할 나무지만 그 결계의 나무들에만은 트리옌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그 나무들은 본체와 걸음이 하나로써, 걸음은 육신이 없고 지극히 정령에 가까운 존재였다. 정령과는 달리 눈에 보이고 영혼을 가지고 있지만 감정은 극히 미미하고 오로지 이 결계만을 지키며 에린지움의 의사만을 받아들인다. 카멜은 그들이 전쟁의 희생물이라는 사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며 창문을 바라보던 카멜은, 갑작스러운 느낌에 깜짝 놀라 멈칫 굳었다. 뚜렷해지고 있었다. 실낱같이 약하고 흐렸던 아리스타타의 기운이, 갑자기 강해지고 있었다. 결계의 나무들도 그에 반응 하듯 가지들을 푸르르 떨었다. 카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뛰쳐나가 결계의 나무에까지 내달렸다. 나무로 가는 도중에 보니, 그 나무의 정령들이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 역시 수백년만에 겪는 느낌과, 갑자기 나타난 의사에 당황하고 있었다. 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진 결계의 진이 뚜렷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고, 갑자기 결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크게 자란 나무위로 진법이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카멜은 그 광경을 보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 아리스타타님...! " 월은 눈부신 빛에 가렸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펜과 비슷한 기척과, 기운의 사람. 아니, 틀리다. 이것은 너무 거대하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듯 폭발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파르라니 빛나는 짧은 은빛 머리카락은 공중에서 흩날리고, 은은한 빛을 머금은 그의 주변으로 계절이 피어나고 있었다. 황량한 들판에 뿌려져 숨죽이고 말라가던 씨앗들이 순식간에 싹을 틔우고, 조그만 꽃을 피우고, 풍성한 잎을 만들어낸다. 들판이 환희에 떨고 있었다. 주변의 정령이라는 정령은 모조리 몰려온 듯, 어지러운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고 있었다. 햇빛조차 산란스럽게 날뛰고 있었고 반짝반짝거리는 빛무리가 감돌고 있었다.세상의 모든 기척이 그녀에게 모여든다. 선명한 청록색 눈동자가 월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저히 아까의 그 소년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얼굴은 같지만 그 표정은 지극히 오만하고 기품있는, 세상의 유일무이한 자의 것이었다. 월이 아리스타타의 초상을 보고 막연히 생각했던, 그저 아름다우리라 생각했던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위압적인 힘이고 드높은 기상이었다. 은빛의 여왕, 숲의 절대자, 무적의 여인. 아리스타타 칼미아. 그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월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 손에 든 검은 무엇이지? 이 나를 벨 참인가? " 월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놓쳤다.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계속 자라나고 있는 풀들에 떠받쳐 떨어지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월은 그것만으로도 온갖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 펜 오키드가 바랬나? 우습다. 그녀와 나는 하나이다. 같은 에린지움이야. 나의 육신을 죽인다 해도 나의 영혼은 상처받지 않으며, 나의 영혼이 죽고 심장이 뺏기면 그녀 역시 죽는다. " 월은 문득 자신의 다리로 덩쿨과 풀들이 감겨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그것을 응시하자, 월은 갑자기 지독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주변으로 더욱더 무서운 속도로 식물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월은 자신의 생기가 땅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월은 마땅히 공포를 느껴야 했지만, 왜인지 그런 감정도 느낄 겨를이 없이 아리스타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 펜에게로 돌아가라. 펜 오키드, 나를 증오하는 것은 너를 증오하는 것이고, 에린지움을 증오하는 것이다. 네가 에린지움의 모든것을 교감하고 공유할 수 없는 이유다. " 아리스타타가 영롱한 청록색의 눈동자를 눈꺼풀 속에 감추었다. 월은 주변으로 다시 갑작스레 찾아온 계절을 보았다. 가을과 겨울. 폭발적으로 자라났던 식물들은 제 수명을 다하고 시들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씨를 떨구고 있었고 어떤 것들은 노랗게 물들어 퍼석거린다. 그의 생기를 빨아먹던 풀들도 시들고, 아리스타타의 주변으로 에린지움의 힘이 다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슈웃, 하는 소리와 함께, 아스는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물에 젖듯 은색 머리카락이 다시 검은색으로 변하고, 누렇게 말라버린 들판 위로 다시 햇살이 고르게 퍼지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월은 자신이 온통 식은땀으로 젖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는 진정 아리스타타였고, 그가 주체못한 힘이 정녕 에린지움의 권능이었다. 월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망설이지 않고 주저앉았다. " 꺄아아-!! " 펜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털썩 쓰러졌다. 갑자기 너무나 많은 힘을 쓴 탓에 정신이 몽롱했다. 주변으로 트리옌들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고, 펜은 꺼져가는 의식속에서 아리스타타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방금의 순간 펜은 아리스타타였고, 아리스타타는 펜이었다. 펜은 자신조차도 의심했던, 자신이 진정한 에린지움의 걸음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대한 확답을 아리스타타에게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말했다. 자신과 그녀는 하나이고, 에린지움과도 하나라고. 자신을 증오하는 것은 에린지움을 증오하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이 완벽하게 에린지움과 공유할 수 없는.... 그녀는 마지막 남은 온 힘을 끌어모아 월을 불렀다. " 월...! 월, 돌아와! 돌아와!! " " 펜 오키드님!! " 펜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주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했다. 세상이 술렁이는 듯, 숨어 있는 대지의 의사가 내비치는 듯 격동했던 순간은 거짓말같이 잦아들었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주저앉었던 트리옌은 일어나 바람 같이 사라졌다. 숨어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던 마른 사내는 천천히 쓰러진 아스에게로 다가갔다. 방금의 그 모습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휘날리던 은빛 머리카락, 청록색 눈동자,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 마른 사내는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냥 내버려두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렇게 해서는 펌킨에서 장사라도 시작할 밑천을 마련하지 못한다. 사내는 몸이 아픈지 고열에 신음하는 아스를 들쳐매고 시체가 쓰러져 있는 짐마차 옆으로 돌아왔다. 그는 두려움에 밧줄로 아스의 몸을 꽁꽁 묶었고, 꽃다발을 들쳐내고 마차의 가장 밑에 아스를 눕히고는 그 위로 꽃들을 올려 드러나지 않게 했다. 빅디의 거구마저도 가렸던 많은 양의 꽃들은 손쉽게 아스의 모습을 가렸고, 사내는 지체없이 마차에 뛰어올라 말들을 채근했다. 투다다다다다다... .... 마른 벌판에 마차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맞은 데다 너무 큰 힘을 갑자기 받아들이는 바람에 고열이 시작된 아스가 낮으막히 중얼거렸다. " 안스륨... ... ... " 밤이 어스름 내려앉기 시작했다. 가물가물한 노을을 어깨에 얹고 안스륨은 미친듯이 말을 달렸다. 하루종일 잠시도 쉬지 못하고 달리던 말은, 벌판에서 풍기던 피냄새가 가까워져 오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다리를 꺾으며 풀썩 쓰러졌다. 안스륨은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 질 뻔 한 것을 간신히 모면하고, 미력한 동물에게 욕지기를 지껄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한 참 뒤에서 달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안스륨은 거품을 물고 뻗은 말을 내버려 두고 피냄새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벌판의 잡풀들 사이에서 낮은 돌들처럼 보이는 것은 시체였다. 어지러운 발자국들에 풀들이 눕고, 꽃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짓뭉개져 있다. 병사들의 시신이 네구, 경동맥에 큰 칼자국이 난채 작은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는 거한이 아마 그 노예 사냥꾼일 것이다. 하지만 아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누워 있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 또 놓쳤다는 생각에 안스륨은 속이 타들어갔다. 곧 뒤따라 온 스타티스와 제피가 잔뜩 지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스타티스는 몸을 추스르며 시체와 바닥에 남은 흔적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 칼에 당한 것이 한 명, 이 거한에게 허리가 꺾이거나 목이 꺾여 죽은 것이 세 명, 거한은 칼에 맞아 죽었으니 다른 사람이- 아마 한 패가 더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군요. 발자국을 봐도 그렇고, 이들보다 조금 작은 발자국이 하나 더 있습니다. " " 아스는? " " 아무래도 그 다른 한쪽이 데리고 간 것 같네요. 마차 바퀴 자국이 이어져 있으니까. " 스타티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체를 거두는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조금 망설이며 말했다. " 더 이상은 쫓을 수 없습니다. 돌아가서 말을 갈아타고 갈아 탈 말을 또 따로 준비해서 와야합니다. 여행할 물건도 필요하고... 밤이 되기 전에 성으로 돌아가야... 돌아갈 일도 걱정이군요. 말들이 지쳐서. " " 너희들은 돌아가. 나 혼자 쫓겠다. " " 에에? 하지만 해가 지면 벌판에 몬스터들이 날 뛸 겁니다. 게다가 무턱대고 펌킨으로 가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경매장이 어딘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럴듯한 신분이나 연줄이 없으면 갈 수 없어요. 귀족의 산하에서 관리되는 것이니, 조금 늦더라도 저희와 가는 쪽이 빠를 겁니다. " 안스륨은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 놓치는 건 이만하면 됐어. 멀어져 가고 있는게 뻔히 보이는데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 제피가 역정을 내며 말했다. " 어차피 혼자 걸어가나 돌아가서 제대로 준비하고 출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오히려 이쪽이 더 빨라. 쓸데없는 고집은 그만 부려! 우리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말이야! 약속해! 반드시 아스를 찾아내겠다고! 도울 수 있는데 까지 돕겠다고! " 안스륨은 대꾸하지 않았다. 자책감이 그의 눈 속에 가득했다. 그는 아스가 걱정 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이들은 아스가 아직 트리옌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저러는 것이다. 혹시 누가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다치기라도 한다면, 죽기라도 한다면... 불안과 걱정이 몸을 무겁게 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아리스타타가 죽었을 때 조차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초조함이 마음을 바싹 태운다. 안스륨은 이제 화 조차도 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시 붙잡으면, 다시 이 품안에 안으면, 놓지 않을테다. 누구에게든 줄까보냐! 안스륨은 자리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을 모아 이마를 짚었다. 아스, 아스... 너는 나의 것이다. 숲이다. 아주 조용한 숲이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아주 조용한 숲.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물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아주 깊은 숲이다. 자신은 그 곳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긴 치맛자락과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숲을 헤맨다. 그러자면 갑자기 숲 저편에서 무서운 시선이 자신을 옮아맨다. 그러면 자신은 꼼짝도 할 수 없다. 큰 키에,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 그것은 뜨겁고 메매르고 끝없이 갈구하는 시선으로 자신의 마음을 바닥까지 들여다보려 하 듯 바라본다. 몸은 무언가의 두려움에 떨려오고, 숨이 막히지만, 자신은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돌릴 수 없다. 그 시선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독히도 무섭지만 자신의 걸음은 앞으로 내딛으려 한다. 그러면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아챈다. 돌아본 곳에는 금발에 녹색눈동자의 아름다운 청년이, 필사적인 표정으로 외친다. - 안됩니다!! 아리스타타! - 헉! 아스는 흠칫 몸을 경련하며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둡고, 무언가가 자신을 덮고 있으며 바닥에서 흔들림이 느껴진다. 여기가 어디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마치 암흑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다. 머리는 지끈지끈 아프고, 열에 들떠 눈을 뜨기 조차 힘겹다. 온 몸이 누군가 계속 때리는 것 처럼 아프고 화끈거리면서 멀미가 난다. 멀쩡한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의식이 깜깜한 수면위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혼란스러웠고 팔도, 다리도, 어디고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스는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럴 정신조차 생기지 않았다. 아스는 알 수 없는 상황과 어지러운 의식, 아픈 몸과 울렁거리는 속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듯 눈을 감았다. 차라리 다시 잠들고 싶었다. 자신과 다른 것이 구분되지 않았고 자신이 자신인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혼란스러운 의식속에서 아스는 방금의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몽롱한 기억으로는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만난 사람들은 다 낯이 익었다. 하지만 누군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뚜렷한 것은 자신을 아리스타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이름인가? 어디선가 들어본적이 있는 듯한 이름. 아스는 무의식중에 긍정했다. 그래, 나는 아리스타타로구나. 산으로 둘러싸인 흰 성의 앞으로는 넓고 얕은 인공적인 호수가 있고, 발을 담가 봤자 가장 깊은 곳에 무릎까지 밖에 오지 않는 그 호수는 바닥이 온통 투명한 자갈로 밤이 되면 은은한 빛을 내뿜는다. 낮이면 흰 성이 두개인 양 산과 성을 그대로 비추어내는 거울호수. 축복의 성은 흰 돌로 이루어진 성 만을 이르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산과 거울의 호수까지를 포함해서 축복의 성이다. 자신은 그곳의 주인으로 에린지움의 걸음, 너무도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온 트리옌, 숲의 여왕 아리스타타다. 하루의 대부분은 호수가 잘 보이는 자신의 방 바깥의 테라스에서 지낸다. 너무도 오랜 세월을 살다보면 모든 감정이 무디어지고, 살아있다는 것 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다. 흘러가는 계절과 바뀌는 밤낮을 무심히 살피며 홀로 세상을 관철한다. 모든 것이 큰 의미는 없다. 사람들과 시간은 스쳐 지나가는 것일 따름. 테라스에 앉아, 자신을 지표삼아 무한한 방랑을 계속한다. 자신은 은빛의 여왕도, 숲의 절대자도, 무적의 여인도 아니다. 그저 영영 떠도는 방랑자일 뿐이다. 앞으로도 뒤로도 너무 긴 시간속에 자신의 흔적을 찾는 것은 너무 힘들다. 사무치는 고독과, 무서운 외로움. 그럴때면 에린지움을 찾는다. 또 다른 자신, 자신과 함께 이 대륙에 뿌리 박힌 위대한 나무. 천년 이상을 지난 일이건만 아직도 또렷히 기억이 난다. 불모지로, 아무것도 없던 땅에 한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언령 마법사는 그때까지 세상에 남아있던 모든 '언어'의 힘을 바쳤다. 세상은 간절히 원했고, 대정령의 힘을 모아 자신이 태어났다. 이 세계와 함께 하는 무한한 힘. 근원적인 생명력. 에린지움과 공명하여 하나가 되면 다시 모든 감정은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드높은 하늘마저 자신을 거역할 수 없다. 자신은 이 세상과 함께 하는 존재이다. 나는 아리스타타 칼미아. 지난 세상의 눈부신 희망이었고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존재하던 어느 날. 나는 그 시선과 마주쳤다. 어느새 인가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너무도 긴 시간이 흘렀다. 다시 의식을 두드려 깨운 건 낮은 말소리 였다. " ... ...장 오늘, 오늘밤에 노예 경매가 열린다. " " 좋아. 수고비는 여기있다. 데려가. " " ... 그런데 괜찮은거야? 어디 별 볼데는 없어서 그리 큰 값은 못 받겠지만, 어디 망가지거나 하기라도 하면... " " 값은 얼마든지 좋으니까 빨리 팔아버려. " 멀어져 가는 발소리. 누군가들이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어딘가로 데리고 가 눕힌다. 그리고 무언가 속박이 사라지자 몸이 좀 편안해졌다. 그리고 후끈-하고 피가 도는 느낌이 들고 통증이 비명을 질러댄다. 갑자기 숨쉬기가 괴롭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심호흡한다. 차가운 어떤 것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 ... 열이 심한데. 이봐! 여기 차가운 물과 수건 좀 갖다줘! 이 아이 아프잖아! " " 뭐야? 이게 어디서 명령이야? " " 시끄러! 적어도 너보다는 비싼 몸이야! 만약 저 녀석이 전염병이라도 걸려 왔으면 어떻게 할래? " " 알았다! 알았으니까 소란만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 " 주변에서 누군가들이 웅성거렸다. " 헤에, 새카만 머리. 까마귀 족이야. " " 까마귀 족은 드문데. 그렇게 아름다운 종족은 아니라서 비싼 값은 못 받아도, 검은색 매니아들에게 좋게 팔릴거야. " " 검은색 좋아하는 놈들 중에는 변태가 많다던데. " " 시끄러워! 검은색 머리카락과는 대조되게 피부가 아주 희잖아. " " 예쁘다-. " 갑자기 이마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그것은 천천히 이마와 뺨 등 몸 전체를 닦기 시작했다. 시원하면서 훨씬 숨쉬기도, 기분도 낳아졌다. 아스는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눈을 떴다. 눈앞에 많은 얼굴들이 보였다. 다 낯설고... " 정신이 들어? " 뺨에 하얀 비늘이 돋아있는 흰 머리카락의 사람이 말했다. 열린 입술 사이로 뾰족한 이가 보였다. 아스는 간신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것을 긍정으로 여겼는지 비늘소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수건을 물에 적셔 이마에 얹었다. 그러자 한결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은 많았다. 다 소년이고, 자기 또래거나 자기보다 어리다. 게다가 다 예쁘고, 특이하고, 신기하다. 시야에 들었다 나가는 소년중에는 고양이처럼 생긴 귀가 달렸거나 새의 깃털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아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이 쉬어서인지 말이 쉽사리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물을 조금 입에 흘려 넣어주고, 아스는 그것을 꼴깍 삼키고 나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 "... 여기는?... " " 여기는 펌킨의 지하경매시장이야. 세상의 온갖 희귀하고 대놓고 구하기 힘든 것들이 오가는 곳이지. 그리고 여기는 그 중에서 오늘밤에 열릴 노예 시장에 팔릴 소년들을 모아놓은 방이야. 오늘은 그렇게 수가 많지 않아. 대부분은 멸종직전의 수인족이야. " 소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지난 일이 떠올랐다. 자신은 안스륨과 같은 까마귀족의 소년을 도우려다가, 그때 축제 전야에 자신을 잡아가려 했던 거한에게 다시 잡혀와 강간당할 뻔 했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리고 갑자기 싸움이 일어나서, 도망치려다가 월과 마주쳤고... ... ? 기억이 끊겨 있다. 아스는 아무리 생각해 보려 했지만 그 이후의 기억이 거짓말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의식을 잃었던 모양인데, 그 가운데에서도 어렴풋 뭔가 떠오르려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도망가는 것은 실패한 모양인지, 다시 노예시장으로 와 있다. 죽진 않아서 다행이구나. 아스는 자신의 한심한 처지에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럼... 너희들도 모두... ? " " 응. 여기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두어번 주인이 바뀐 아이들이야. 나도 두번째고. 전의 주인이 지독한 밝힘증이라 나한테 질렸을 때는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했는지 몰라. 하지만 변태 보다는 낫지. 저기 어린애도 이번이 두번째로 팔려가는 길인데, 전 주인이 얼마나 괴상망측한 놈이었는지 몸이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져서는... 쯧. " 비늘소년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본 곳에는 자그마한 체구의 아름답게 생긴 소년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눈 밑에는 치타나 표범처럼 눈물 선이 나 있고, 귀와 유두와 손톱에 방울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리고 온 몸은 붕대로 칭칭 동여매어져 있었다. 그 붕대는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노예들에게 흔히 하곤 하는 압박 붕대였다. " 너는 보아하니 처음이네. 그렇지? 게다가 억지로 끌려왔는지 여기저기 멍이잖아. " " ...아... 응. 실수로 상단에 잡혀가서 이 모양이야. " " 미리 말해두지만 도망갈 생각은 않는게 좋아. 여기 경비는 그야말로 철통이거든. 도망가려다 잡히면 맞는거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해. 그리고 자살같은것도 하지마. 재수 없으니까. " 비늘 소년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 그러진 않아. 난 괜찮아. 곧 구해주러 올거니까. " 비닐소년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누가? 누가 노예 따위를 구해주러 오냐? 아직 처음이라 뭘 모르나 본데, 그런 희망따위 깨끗하게 버리고 팔려가면 기교나 많이 익히도록 노력해. 빨리 익숙해지는게 좋아. " 아스는 말없이 세운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 안스륨은 올거야. 첸리 백작은 유명 인사였다. 그것은 그가 귀족이면서 마법사이기 때문이고, 보통의 마법사들이 무척이나 꺼려하는, 마법으로 돈 버는 일을 거리껴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남색가로도 유명 했다. 그는 지하경매시장을 운영하는 파르젠 공작과 개인적은 친분도 있었기 때문에 대륙의 희귀한 수인족 노예들을 많이 사 들였다. 또 그만큼의 편력도 유명 했다. 거금을 들여서라도 간신히 손에 넣은 아무리 희귀한 노예라 하더라도 석달이면 질리곤 했다. 그래서 곧 팔아 치운다. 이러한 과정을 16살 때부터 해왔으니 그는 노예에 대해서는 모르는게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손에 넣지 못해 안달인 노예가 딱 하나 있었으니, 대륙 전쟁 때 잠시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는 트리옌이 그것이다. 그도 트리옌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다. 그가 본 트리옌은 여자였는데 뱀족처럼 보석 같은 비늘도 없고 묘족처럼 쫑긋거리는 귀나 꼬리도 없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조그만 체구의, 조금 예쁘장한 소녀 정도였다. 조금 구미가 당기는 거라면 싱그러운 녹색의 눈동자 정도일까. 하지만 그때 트리옌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그런 불상사를 만든 것은, 바로 트리옌들의 몸에서 나오는 체액이 미약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했다. 첸리 백작은 그 미약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눈물이나 침에서도 미약하게나마 그런 기운이 있다는데, 트리옌들은 보통 성격이 차갑거나 무덤덤해서 눈물같은 것을 구경할 기회는 없었다. 오늘 그는 지난 두 달 간 푹 빠져있던 퓨마족 아이를 팔고 새 노예를 사기 위해 시장을 찾았다. 그는 도시의 고급 보석상 지하에 숨겨져 있는 거래소에서 그 아이를 맡기고 밤에 있을 경매를 기다리기 위해 공작가를 찾았다. 그는 공작과 담화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파르젠 공작은 도시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십여년 전 지하경매시장을 열면서 큰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 자체는 돈 버는 것 외에는 큰 관심이 없는 사내라, 첸리 백작은 내심 그가 좀 지루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화술은 공작이라는 권력자 답지 않게 적당한 아부와 듣기 좋은 말로 이루어졌고 첸리는 내심 그를 무시하면서도 그의 대접 받기를 즐겼다. " 이번에는 고작 두달이었나? 회심으로 준비한 아이였는데. 내 생각으로는 저 아이가 표범족으로는 마지막 아이가 아닌가 싶네. 요즘은 점점 더 희귀한 노예를 구하기가 힘들어져서 말일세. 허어, 이러다가 경매의 질이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이야. " " 하하. 마지막 아이라서인지 그동안 겪어 봤던 노예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을만한 아이였습니다. 털은 매끄럽고, 무엇보다 침대에서의 울음 소리가 좋았지요. 체구도 자그마하고 움직임도 날렵해서, 몸에 달아놓은 방울 소리가 듣기 좋았죠. " " 아니, 그런데 벌써 질렸단 말인가? 좀 봐주게. 자네를 거쳐간 노예들은 감당하기 힘들다고, 정력가들도 다들 난리일세. 길을 너무 잘 들여놔도 큰일이야. " " 흐흐, 건드리기만 해도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는데다 하루에도 몇번이고 할 수 있도록 길들이니까요. 되려 제게 고마워 해야지요. 그렇게 길들이기도 상당한 공이 듭니다요. 아시잖습니까? 하핫! 이번에는 뭐 좀 특이한 물건이 있습니까? 자금이 딸리면 준비해야죠. " 파르젠 공작은 내심 혀를 찼다. 징글맞은 놈 같으니라고. " 이번에는 뱀족의 아이와 백로족 아이가 좀 특이하게 준비되었지. 백로족의 아이는 나도 처음 봤는데, 머리카락이 새의 깃털처럼 보여서 특이하더군. " " 그래요? 그런데... 정말 트리옌은 구할 수 없는 겁니까? " " 떽끼, 그런 소리 말게. 나를 범죄자로 만들 셈인가? 이제는 에린지움의 걸음이 있기에 애초에 붙잡는 것 조차 힘들어. 트리옌이 노예였던 것은 용족이 이쪽을 대부분 점령하고, 정령의 힘도 제대로 못쓰던 때의 일이지, 불가능하니 그만 포기하게. 그보다는 곧 경매가 열리니 그에나 신경쓰도록 해. 뱀족의 아이라면 환장하는 사람이 와 있으니까. " " 아아, 나중에 박제를 만든다는 흉흉한 소문이 돈다는 자 말입니까? " " 설마 박제까지야 만들겠나? 사가는 뱀족의 아이마다 없어지는 것은 사실인 것 같네만. " 첸리는 공작의 말에 대충 대꾸하면서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는 트리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집과 작위를 빼놓고는 모두 줘도 아깝지 않을 지경이었다. 은은한 향기가 난다는 그 미약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지, 도대체 어떤 향일까- 백작은 차의 향이 그것이라도 되는 양 킁킁 거리고 냄새를 맡았다. 해가 졌다. 아스는 갑자기 자신을 어디엔가로 데려가는 남자들에 놀라서 비늘소년을 돌아봤지만, 비늘소년이 괜찮다고 말하기에 말없이 따라갔다. 벽돌로 이루어진 좁고 낮은 통로를 지나며 아스는 여기가 왠지 지하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스가 도착한 곳은 목욕탕이었다. 같이 온 사내들이 아스의 망토를 벗기려 하자 아스가 거부했지만, 그런 뜻이 들어먹힐리가 없었다. 몸도 아프고 열은 계속 되었기에 아스는 곧 반항을 포기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큰 목욕통에 던져진 아스는 난생 처음보는 향유로 씻겨지고 안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옷이 입혀져 온 몸에 분이 발렸다. 아랫도리까지 보이는 적나라한 옷에 아스가 부끄러움을 넘어 격분을 느낄때쯤, 아스는 처음 있었던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방으로 돌아오자 곧 아이들이 모두 어디엔가로 데려가졌다. 통로가 두 개 있는 조그만 방으로 들여보내지고, 얼굴을 붉히고 화가 잔뜩 난 아스를 비늘소년이 위로했다. " 인상 펴. 좋은 값에 팔리지 못하면 계속 여기저기 끌려다녀야 해. 별 특이점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옷차림으로라도 손님들의 시선을 끌려는 거야. 게다가 너는 피부가 아주 고우니까... 난 걱정이야. 소문에 뱀족의 아이를 데려다 박제로 만든다는 사람이 와 있다는데, 좀 무서워. " 아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뱀족의 아이를 돌아보았지만, 뭐라고 위로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스는 문득 든 감정에 가슴이 쿡쿡 쑤셔오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에게는 안스륨이 있지만, 이들에게는 아무도 없다. 평생 노예로 살다가 죽겠지. 날개뼈에 찍힌 낙인이 화끈거리며 아파오는 것 같았다. 바보같다. 자신만 안스륨이 구출해 줄거라, 혼자 안심하고 있었다. 곧 바깥에서 사회자의 큰 목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이 차례 차례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첸리는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 했다. 까만 머리카락에 까만 눈동자. 호리호리하고 선이 가는 체구의 소년으로 이런 곳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 귀여운 평범한 외모에 보드라워보이는 살결이 좀 좋아보인달까. 이런 상류층만 상대하는 경매시장에 팔릴만한 정도의 외모는 아니었지만 일단 희귀한 수인족이고, 검은 머리카락은 드무니까 물건으로 내 놓은 듯 했다. 수치심으로 물든 얼굴을 보면서, 버진이라 길들이는 맛은 있겠는데-라고 무심결에 쳐다보던 그는 문득 그의 눈동자에서 익숙한 기운을 감지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검은 눈동자위에 감도는 것은 틀림없는 마법의 기운- 눈동자에 어떤 가벼운 속임수 마법이 걸려있는 듯 했다. 곧 경매가 시작되고, 사회자가 말했다. " 까마귀족의 소년입니다! 아직 버진으로 아주 살결이 곱고, 여린 몸집이지요? 까마귀족은 예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난 종족이니 오래 잘 기르면 다른 용도로도 쓰실 수 있을 겁니다! 어릴때부터 노예 생활이 길들여져 아둔하고 멍청하여 대화가 안되는 식상한 노예에 질리셨다면, 지금 바로 시작해주세요! 최저 가격은 금 50 부터입니다! ..네네, 100! 100 나왔습니다! 예! 120! 130! " 별 특이한 점 없는 아이인데 첸리는 의외로 사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랬다. 저정도의 아이면 끽해야 150. 하지만 가격은 어느새 180까지 올라갔다. 첸리는 약간의 호기심과 의아함으로 자신에게 가벼운 항마법장을 걸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250을 외쳤다. 마법을 지우고 본 소년의 눈동자는 싱그러운 녹색- 트리옌이었다. 갑자기 250이 튀어나오자,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누군가가 260을 제시했지만 곧 첸리는 300을 외쳤다. 상대방은 곧 포기했고, 사람들은 갑자기 남색가로 유명한 저 백작이 왜 저아이에게 집착하나 의문의 술렁임이 잠시 이어졌다. 낙찰되었다는 안내가 나오고, 첸리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노예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완전히 마법을 깨고 선명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안내인에게 다가가 곧장 자신이 산 노예를 마차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더 경매에 참가하시지 않겠느냐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그는 외투를 두르고 마차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잡담을 나누고 있던 마부가 허겁지겁 달려오고, 첸리는 초조하게 마차안에서 소년을 기다렸다. 이윽고 안내인이 아스를 데려오고, 첸리는 안내인의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도 채 듣기 전에 마차의 문을 닫았다. 아스의 반항적인 눈빛따위는 보이지도 않았다. 첸리는 재빨리 자신에게 건 항마법을 흐트리고 아스의 눈동자에 걸려있던 마법을 깨트렸다. 아스가 흠칫, 놀라고 무언가 쨍- 하는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눈이 따끔하여 눈을 깜빡거리자, 첸리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오오... 트리옌이군...! 트리옌이군!! " 숲을 닮은 녹색 눈동자는 너무도 맑고 신선하다. 그 눈동자에서 나오는 눈물은 틀림없이 자신을 천상의 쾌락지로 데려다 줄테지. 눈을 깜빡거리던 아스는 갑자기 맞은편에 앉아있던 수염난 남자가 자신을 붙들고 입술을 가져오자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날렸다. " 무슨 짓이야!!! " - 퍽! 남자의 고개가 가볍게 돌아가고, 남자는 곧 무섭게 자신의 뺨을 올려붙였다. " 으윽!!! " 터진 입안을 핥으며 남자를 쳐다보자, 남자가 희열에 들뜬 얼굴로 말했다. " 드디어 가졌구나. 반항하는 맛까지 있으니, 앞으로는 매일이 즐겁겠군. 잠들어라. " 남자가 다시 손을 아스에게로 가져다대고, 아스는 갑자기 멀어지는 의식에 내심 비명을 질렀지만 곧 푹 쓰러지듯 의자에 뻗고 말았다. 첸리는 부어오른 아스의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 그 녹색눈이 보이지 않으니 섭섭하군. 널 데려가자 말자 쉴 새 없이 울게 만들어 주겠어. 고작 트리옌을 금 300에 얻다니! 밤새도록 울리고 젖게 만들면 드디어 그 미약을 맛볼 수 있겠군! 여관으로 돌아간다! 서둘러!! " 마부는 또 노예를 갈아치운 백작을 속으로 욕하면서 말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히히힝- 말들이 투레질 치고, 곧 마차는 빠른 속도로 경매시장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첸리백작이 시장을 급히 떠난 얼마 후, 경매를 지켜보던 파르젠 공작은 갑자기 귀한 손님이 들렀다는 말에 황급히 그를 맞이하러 자신의 저택으로 와야 했다. 자신의 저택 응접실에 앉아 있는 것은 붉은 옷을 입은 귀공자 하나와, 칼을 찬 기사 후보생으로 보이는 미소년 하나. 검은 머리카락의 수인족 하나였다. 그가 집사에게 그들의 정체를 묻자,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낮게 말했다. " 드라세나의 왕자와 쥬니퍼의 독자이십니다. " 공작은 희색을 얼굴에 가득 띄우고는 응접실로 들어서며 외쳤다. " 아니, 이렇게 귀하신 분들이 오시다니, 정말 기쁘기 이를데 없군요. " 제피는 최대한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자신이 이런 표정을 하면 귀족들은 아주 좋아한다. 그는 손을 내밀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 반갑네, 공작. 비공식적으로 온 것이라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무례를 용서하게. " " 아닙니다! 왕림해주신 것만 해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펌킨 왕국의 뒤 파르젠 이라고 하옵니다. " " 이쪽은 나를 호위하는 쥬니퍼 가문의 스타티스라고 하네. 인사 올리게 스타티스. " 스타티스가 고개를 숙였다. 공작은 큰키의 수인족이 자신이 들어오든 말든 일어서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신경쓰였지만 제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언급하지 않았다. 왕자가 총애하는 노예일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경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겠지. 그는 제피의 장갑 위에 입맞추며 물었다. " 그런데 갑작스럽게 어인 행차이시온지... ? " 제피는 흐음, 하고 턱을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실은 내가, 까마귀족의 수인족을 좋아한다네. 저 자도 내가 아끼는 노예중의 하나지. " " 취향이 참으로 까다로우십니다. 까마귀족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별로 없지만, 한번 그 종족을 길러본 사람들은 늘 제게 감탄을 하곤 합니다. 머리도 좋고 행동이 재빨라 곁에 두는 맛이 있다더군요. " " 그래. 원래는 드라세나에서 한 까마귀족을 살 생각이었는데,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쪽으로 팔렸다더군. 그래서 몸소 찾아왔다네. 까마귀족의 노예는 찾기 힘드니까 말일세. " " 아- 그러십니까? " 공작은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해야할지 머리를 굴렸다. 그는 막 그 수인족이 첸리백작에게 팔리는 것을 보고 오는 길인 것이다. 단골고객인 첸리백작이 무려 300이나 주고 그 아이를 사 갔는데, 다시 돌려달라고 말하면 자신의 작위 때문에라도 별 소리 없이 돌려주겠지만 몹시 기분 상해 할 것이다. 공작은 제피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나을지 첸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 나을지 저울질 했다. 하지만 제피의 지위가 아무리 높다고는 해도, 외국인인데다가 검은 까마귀족밖에 사지 않는다면 그리 수익을 올려줄 것 같은 상대도 아니다. 게다가 태자에게 견제당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2왕자... 쥬니퍼의 독자가 2왕자를 호위하는 바람에 말썽이 많다더니만, 사실인 모양이었다. 먼 왕족은 가까운 귀족보다 덜하다. 그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 죄송하지만, 그 아이는 벌써 다른 분께 팔렸습니다. 먼 길 오셨는지 송구스럽기 그지 없군요. 대신 제가 다른, 검은 머리카락의 노예가 한 명 있으니 거저 드리는 값으로... " " 누구에게 팔려갔어-!! " 제피가 응접실의 탁자를 쾅! 내려치고, 위에 얹힌 차 숟가락이 달그락 거렸다. 공작은 제피의 반응을 보고, 그가 절대로 그 까마귀족 아이말고는 살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가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니, 아까부터 묵묵히 앉아있던 같은 수인족이 나는 매라도 떨어뜨릴 것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공작은 왠지 앞에 앉은 왕자보다 그가 노려보는 것이 더 무서웠다. 그는 오랜 사교계와 장사의 생활로 터득한 생존본능으로 재빨리 말했다. " 첸리백작입니다. 시간만 주시면 제가 가서 당장 다른 노예와 바꿔 오겠습니다. 그는 오랜 저의 손님이니 제가 말하면 금방이라도... ... 시장 건너의 고급여관에 묶고 있습니다! " 그는 그가 말할수록 옆의 살기가 점점 짙어지는 것을 느끼고 당장 첸리백작의 거처를 말했다. 제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가자! " 눈을 뜨자, 아스는 자신의 몸을 묶는 구속의 느낌에 반사적으로 팔을 뒤틀었다. 하지만 팔은 위로 단단히 묶여 있고, 다리 역시 벌려져서 침대 기둥에 묶여있다. 아스는 무방비하게 노출된 것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 심리로 몸을 뒤 흔들었고 침대가 덜컹였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듣고 첸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 풀어줘! " " 흐흥, 무슨 소리냐? 너는 내가 샀다. 금 300에 내가 샀고 이제 넌 나의 소유야.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너는 불평할 권리가 없어. " " 나는 노예가 아니야! 이 낙인도 실수로 찍힌 것이야! 날 풀어줘! " " 누구들은 처음부터 노예로 태어나나? 나는 노예가 쓸데없이 떠드는 것을 싫어해. 잘난척 하는 것들이 제일 싫어. 너같은 노예들은 그저 침대위에서 울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꾸 그 입을 놀리면 밤을 지내기가 고통스러울거다. " 첸리는 비열하게 웃었다. 아스는 소름이 끼쳤다. 빅디가 생리적으로 혐오감이 들었다면, 이 남자는 본능적으로 혐오감이 든다. 잘 다듬은 콧수염 밑으로 음흉하고 불쾌한 웃음을 흘리며 자꾸만 자신의 몸을 시선으로 더듬는다. 아스는 송충이가 몸 위를 기어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첸리는 이상하게 생긴 끈적끈적한 액체를 들고 오더니 꼼꼼히 아스의 몸 위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스는 남자의 손길이 구석구석에 닿자 소리를 질렀다. " 손 떼!! 만지지마!! 이 변태 호모 자식아!! " - 철썩!! 고개가 꺾이고, 아스는 고통에 눈물이 찔끔거렸다. 빅디에게 맞은데가 아직도 성하지 않아 몸에 미열이 남아있는데, 계속 가해지는 폭력은 괴로웠다. 하지만 아스는 무서운 시선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첸리는 웃으면서 입에 물리는 구속구를 꺼냈다. " 시끄러운 꼬마로군. 네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니 아쉽지만, 너희 트리옌들의 몸에서 나오는 체액이 사람을 환장하게 한다니 듣지 않아도 되겠지? " " 치워! 치워! 이 개ㅅ... 읍, 우읍!! " 입에 둥근 모양의 구속구가 단단히 채워지자 더이상 욕설도 뱉어낼 수 없었다. 아스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말로 못하는 모든 것들을 시선에 담아 노려보았다. 첸리는 그런 그의 시선에 조금 멈칫했다가, 곧 웃으며 아스의 몸에 무언가를 바르는 일을 계속했다. " 좋은 눈이야. 그 녹색눈으로 나를 노려보니 나쁠 기분도 좋아지는 것 같군. 이따끔 노예를 사오면 구를대로 굴러 자포자기한 눈을 한 놈들이 많지. 그런 놈들은 재미가 없어. 그래서 난 버진을 선호하는 편이다. 여러가지 수고도 들고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만큼의 보람도 있거든. 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놈들고 가끔은 있지만, 가끔이지. 너도 곧 그런 시선은 관두게 될거다. 곧 박아달라고 애원하며 엉덩이를 흔들어 댈테니까, 그렇게 노려볼 수 있을때 노려보는게 좋아. " 빌어먹을 놈. 짐승같은 놈. 혐오감과 불쾌함, 갖은 말로 할 수 없을 나쁜 감정들이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아스는 저 변태자식의 얼굴에 시원스레 토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몸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스륨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듭 목숨의 위협을 받았지만, 그렇게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고 위해줘 이 곳에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 이런 상황은 싫다-! 이럴 바엔 차라리 월의 손에 죽는 것이 나았을 뻔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안스륨이 있는 이상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죽을 수는 없다. 아스는 선명히 떠오르는 무표정의 얼굴을 그리며, 소리없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안스륨, 안스륨-! 빨리 와줘! 빨리-!! 첸리는 아스의 다리 사이와 엉덩이 뒤까지 그것을 꼼꼼히 발랐다. 그것은 일종의 자극제로, 사람의 피부를 극히 민감하게 만드는 약이었다. 약간의 마약성분도 들어있기 때문에, 익숙한 자들은 바르기만 해도 그것이 선다. 첸리는 웃음을 흘리며, 약이 체온에 녹고 몸에 스며들 때까지 기다렸다. 파르라니 분노로 시선을 불태우는 아스를 바라만 보기에는 아까웠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이윽고 촛불에 드러난 아스의 맨 몸이 반들거리기 시작했다. 아스는 안 그래도 열이 있는 상태에 이것이 발려지고 나자 온 몸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화끈거려서 몸이 따가울 지경이다. 첸리는 조심스럽게 손가락끝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유두를 어루만졌다. 아스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흠칫 몸이 떨리는 것을 숨길 수가 없었다. 첸리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처음이니까 고통을 덜어주지. 아주 기분 좋을거야. 지극히 몸이 민감해지니, 예민한 곳도 찾기 쉽지. 벌써 네 것이 곤두서는게 보이지 않나? " 유두를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며 튕기자, 아스의 허리가 조금씩 튕겨올랐다. 아스는 이렇게 미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몸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여자 경험도 없는 아스는 중심으로부터 올라오는 이상한 열기에 미칠 것 같았다. 분노와 수치심이 뒤범벅되기 시작한다. 들뜨는 몸과는 달리 손발은 곧 당할 일들을 두려워 하듯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 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천천히 즐길 생각이었지만, 유두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첸리는 바지에서 튀어나올 듯 팽팽해진 자신의 것에 조금 초조했다. 아까부터 풋풋하면서 달큰한 이상한 향기가 자신을 어지럽히는 듯 했다. 직접 자극을 주지 않으면 절대로 서지 않는 페니스였는데, 고작 유두만 조금 만지작거렸는데도 이렇게나 반응한다. 트리옌이라서 그런가? 침대에 매달려 쭉 뻗은 나신이 바른 약과 촛불에 번들거리고, 그 것이 마치 꿀이라도 바른것처럼 달콤해 보였다. 그는 성급하게 아스의 것을 움켜쥐었다. 아스가 외마디 억눌린 신음을 내지르고, 첸리는 그의 것을 손에 잡자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자신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아스의 것을 어루만지자, 내리감은 아스의 눈꺼풀 끝에서 눈물 방울이 흘러내렸다. 첸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아스의 눈끝으로 가져가 눈물 방울을 찍었다. 그리고 그것을 혀 끝에 찍어 맛 보았다. 머리가 아찔했다. 조금은 시큼한 맛에, 목구멍까지 달큰한 향과 아릿한 열기가 치닫는다. 첸리는 자신의 것을 그 안에 박는 것이 무슨 죄처럼 느껴졌다. 그보다는 저 눈꺼풀을 혀로 문지르고, 손안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아스의 것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핑크빛의 페니스에서 배어나올 세상의 감로주를 빨아마시고 싶었다. 지금은 돈이나 권력,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의 앞에 드러난 나신이 전부였다. 첸리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을 느끼며, 자꾸만 입 천장을 핥는 자신의 혀를 느끼고 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바지를 벗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 하면서, 입을 그의 유두로 가져갔다. 아스는 몸을 뒤틀며 억눌린 비명을 내질렀다. -------안스륨-!!!!!!!!! 안스륨은 흠칫 위를 바라보았다. 스타티스가 손마디를 꺾으며 여관주인을 협박하고 있었다. 안스륨은 미간을 찌푸리고 어쩐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듯한 여관의 2층을 바라보았다. 고위층 손님만을 받는 여관답게 주인은 쉽사리 백작이 묶고 있는 곳이 어딘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제피와 스타티스는 내심 진땀을 흘리며 깐깐한 여관주인을 어르고 달래고 했지만, 속으로는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불어! 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안스륨은 멍하게 2층의 화려한 난간을 바라보았다. 갖가지 생각들이 넘쳐 더이상 아무런 생각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때 그의 마음으로 일순 다시 뛰어들어온 느낌. 기척과도 같고, 향기와도 같은 느낌. 안스륨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카멜이 아니다. 하지만 이 감각은 생소하지만, 이 느낌은 익숙했다. 아스의 느낌. 안스륨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위층으로 뛰어올랐다. 놀란 제피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 안스륨!! " " 안됩니다!! 손님 이외에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 " 어디냐, 어디냐 아스. 안스륨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은 못 느낀다. 자신은 아스가 어디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하지만 안스륨은 왠지 아스가 그를 애타게 부르고 있고, 자신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디야?! - 안스륨-! 여기야!! 안스륨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목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일 것 같았다. 안스륨은 벽의 전면을 차지하는 큰 그림을 때려부수고 뒤쪽으로 숨겨져 있는 이중문을 발견했다. 그곳은 여관에 은밀하게 묵길 바라는 손님들을 위한 방이었다. 안스륨은 자체없이 문을 부수었고, 곧 그곳에서 적나라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스와 그 위를 덮치려는 더러운 사내를 발견했다. 안스륨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 누, 누구...!! " 아스는 팔다리가 묶인채 몸에 무언가를 바르고 입에 구속구가 물려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이 깨져 녹색 눈동자가 그대로 보이고, 은밀한 곳 까지 훤히 노출되어 다리가 벌려져 있다. 안스륨은 더러운 인간사내의 손이 아스의 몸 구석구석에 닿았다고 생각하니 순간 이성을 잃었다. 그는 칼도, 마법도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한 칼에 보내버리기에는 그의 분노가 너무 큰 탓이었다. 안스륨은 남자를 깔아뭉개고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어억! 하는 비명이 울리고, 안스륨은 그의 손이 얼얼할때 까지, 남자의 얼굴이 짓뭉개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까지 그를 린치했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튀기 시작하고 코가 부스러지고 턱이 일그러지고 이빨이 모조리 나가버리는데도 그는 주먹질을 그치지 않았다. 안스륨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를 뒤따라 온 제피와 스타티스가 아스를 묶은 것들을 풀고, 아스가 그의 이름을 울먹이며 외쳤을 때였다. " 안스륨...!! " 안스륨은 황망히 뒤돌아 보았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에서 그를 아찔하게 만드는 향기가 난다. 안스륨이 엉거주춤 그것을 바라보자, 아스가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후와... ... 아득한 향기가 그를 감싸고, 안스륨은 제 정신을 차렸다. 그는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아스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체온과, 팔안에 잡히는 육체의 감각. 안스륨은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아스를 이렇게 안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있다. 여기 있어. 안스륨은 안도가 되는 동시에, 무엇인가가 지독히도 괴로웠다. " 안스륨, 안스륨... 흑, 나, 나 기다렸어, 안스륨이 올 줄 알았어... 하지만, 너무 늦었잖아. 못 오는 줄 알았어. 어떻게 찾은 거야? 어떻게... " 잔뜩 잠긴 목소리가 가엾음을 토해내고, 안스륨은 행여나 부서질까 살짝 안았던 팔에 힘을 주었다. 안스륨의 어깨에 아스의 고개가 젖혀지고, 눈물방울이 아스의 귓전으로 흘러갔다. 안스륨은 뭐라고 입을 열었지만, 말이 되어 잘 나오지 않았다. 괴롭고, 괴롭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괴롭다. 안스륨은 신음하듯 말했다. " 너를 사랑하니까... ... " 아스의 녹색눈이 크게 떠졌다. 안스륨은 겁이 나는 듯 조심스럽게 아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흠칫, 하고 아스의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안스륨은 애원하듯이 혀끝으로 할짝할짝 아스의 입술을 핥았다. 아스는 망설이듯,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고, 안스륨은 거침없이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달짝지근하고 레몬처럼 시큼한 맛이 입안에 가득찼다. 안스륨은 애타는 기분이 되어 아스의 혀를 찾았다. 입속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그것을 끌어내어 핥고, 빨고, 깨문다. 그럴수록 점점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만 혀와 혀가 문질러지는 그 달콤한 감각만이 지배할 뿐. 안스륨은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빨 듯 그렇게 아스의 혀와 입술을 빨았다. 숨이 벅찬 아스가 흐윽, 하고 낮으막한 신음을 흘리고, 안스륨은 부서져라 아스를 끌어안으며 정신없이 그의 입술을 탐했다. 숨결 하나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괴로웠다. 그럴수록 목말랐다. 이렇게나 너를 사랑하는데, 나는 어쩌면 좋을까. 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져도 나는 모자랄 것 같다. 나는 이대로 갈증에 몸부림치다 죽어버릴 것 같다. 그리고 차라리 그 편이 행복할 것 같다. 온 몸에 발린 약에, 안스륨의 정신없는 키스에 아스의 몸은 바짝 달아올랐다. 그의 것은 바짝 곤두서서 애원하듯 안스륨의 옷에 문질러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스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숨이 차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아스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아스에게도 지금 그 순간의 키스가 시간과 감각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 키스의 맛은 레몬맛, 딸기맛, 달콤하고 황홀한 것. 흔히들 묘사되는 그런 것과는 틀렸다. 안스륨의 키스는 그야말로 수렁이었다. 아스는 이대로 자신이 안스륨에게 빨려들어가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었다. 단지 입술을 겹치고 있을 뿐인 그 행위는 두사람의 정신을 샅샅히 흐트리고, 마음을 끌어당겨 뭉쳤다. 하아- 호흡곤란을 느낀 아스는 작은 가슴을 팔딱팔딱 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거친 호흡이 침묵위로 흘렀다. 안스륨은 그에게서 간신히 입술을 떼고, 그를 품에서 떼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은 괴로움에 일그러졌다. 말해버렸다. 사랑한다고... 입술을 떠난 말은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말은 절대적인 위력을 가진다. 수백년 전, 안스륨이 했었던 그 말은 무서운 마법이었다. 고대 언령 마법사가 말의 마법으로 에린지움을 만들었듯이, 안스륨이 내뱉은 말은 무서운 칼이 되어 아리스타타를 죽였다. 그의 손이 공포에 부들부들 떨렸다. 안스륨은 순간 자신이 있는 곳이 수백년 전, 어느 조그만 성의 정원인지, 아니면 고급 여관의 2층 밀실인지, 알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아리스타타다. 그 사실이 그를 무섭게 옥죄어 왔다. 소년은 금새라도 아리스타타로 변모하여, 자신이 건네었던 아름다운 칼을 빼들고, 거침없이 자신의 가슴을 찌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차라리 죽고 싶은 괴로움에 치를 떨며, 굶주린 공포와 고독이라는 짐승에게 심장을 물어뜯긴채, 카멜의 뒤만을 따라 기약없이 수백년을 떠돌 것이다. 스쳐가는 수많은 시간과 공간과 사람들은 아무도 자신에게 의미가 되지 않고 그에게 의미가 되는 아리스타타는 영영 찾을 수 없는 채, 몇번이고,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그래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하고 자신을 저주하며--- 그렇게 수백년을. " 안스륨. " 안스륨은 형언할 수 없는 시선으로 아스를 바라보았다. 아스는 많이 당황했지만, 미소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소였다. 아스는 안스륨을 자신이 끌어당겨 안으며, 낮으막하게 그의 귓전에 속삭였다. " 고마워요. "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렇게 수없이 되뇌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안스륨은 난생 처음으로 눈물이 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가슴이 아릿하게 저며오고, 눈가가 뜨끈하며 자신의 몸에서 생기는 거라고는 생각 할 수 없을만치 투명한 물이 눈꺼풀을 적시며 떨어진다. 시야는 물속에 잠긴 것 처럼 흐려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부풀려 진다. 안스륨은 아스의 가슴에 기댄 채, 조금 울었다. 안스륨이 아스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자, 기절한 채 널브러진 첸리백작앞에 제피와 스타티스가 서 있다가 아는 척 그들을 반겼다. 스타티스는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멀리 두고 있었고, 제피 역시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워낙에 뜨거운 키스씬에 내몰리듯 방 밖으로 나온지라 얼굴이 조금 붉었다. " 감격적인 재회는 다 끝났어? " " 그... 그보다, 아무리 그래도 외국의 백작입니다. 그렇게 떡같이 패 놓았다가, 자칫 외교문제로 발전하면... " 제피가 혀를 끌끌찼다. " 하여간, 생각하는 머리하고는. 절대-! 절대 그럴 일 없어. 나도 신분을 숨기고 이곳에 온데다가, 이런 비공식적인 일로 외교문제를 삼았다가 손해보는 쪽은 펌킨이야. 뭐, 물론 그런 소문이 돌면 나야 눈총을 많이 받겠지만. "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죽이지만 마. " 그날 밤, 첸리백작은 태어나서 상상도 하기 힘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안스륨은 그의 이마에 노예낙인을 찍었고, 그의 물건을 가차없이 잘랐기 때문이다. 그는 고통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에게 치유마법을 시전하며 다시는 노예를 사지 않겠다는 맹세를 아스에게 해야만 했다. 긴 밤이 깊어지고, 아스가 씻고 싶어 했기에 안스륨은 아스를 뜨거운 물이 가득한 목욕탕에 넣었다. 아스가 낮으막히 신음을 흘리자, 안스륨은 당황해서 물었다. " 어디 아프냐? " " 아니... 몸이 화끈거리는데 뜨거운 물이 닿으니까 델 것 같아요. " 아스는 조심 조심 몸에 물을 끼얹으며 약을 씻어내려 했지만, 뜨거운 열에 발갛게 달아오른 몸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게다가 아까의 고백과 키스가 자꾸만 생각나서, 아스는 목욕탕이 김에 가득 차 물 안쪽이 잘 안 보인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했다. 최대한 다리를 오므리고 자신의 것을 가리려고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고, 아스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열에 진땀이 날 정도로 괴로웠다. 차라리 찬물이었다면 좋았을텐데. 안스륨은 가만히 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일 못 본새에 고생이 심했던지 얼굴도 수척해고 여기저기가 멍이다. 안스륨은 자꾸만 나려는 화를 억눌렀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지 얼굴이 벌건 아스는 혼자 힘으로 씻기도 힘들어보였다. 안스륨이 씻겨주겠다는 말을 하려 할때, 아스가 말했다. " 저어, 안스륨... 찬물에 씻으면 안될까요? " " 찬물? 안된다. 아까보니까 몸이 뜨거운게 열이 나는 것 같던데... " 발갛게 달뜬 애원하는 듯한 눈매. 안스륨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자신의 중심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잠시 이마를 짚었다. 온 몸에 발려있는 저건... 틀림없이 그거다. 미약의 일종으로, 온 몸에 바르면 몸이 극히 예민해지는... 그것때문에 저럴테지. 저렇게나 유혹적으로 보이는 거겠지. 안스륨은 애써 생각했다. 저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을 유혹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다만, 다만... " 안스륨? " 아스는 말없는 안스륨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안스륨은 아스를 번쩍 들어올려 안았다. 우왓! 하고 물방울이 튀고, 아스는 욕조의 가장자리에 기대어 앉혀졌다. 고개를 쳐든 자신의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아스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안스륨은 자신의 앞에 무릎꿇어 앉은채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 " 아... " 다음 순간, 아스는 자신의 것에서 아찔한 부드러움을 느꼈고, 안스륨의 고개가 자신의 다리사이에 파묻힌 것을 보았다. 그의 어깨까지 오는 검은 생머리가 젖은 다리사이에 감기고, 안스륨이 자신의 것에 혀를 감자 아스는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하...앗! " 안스륨의 혀가 그의 것을 뿌리부터 핥아 올리며 강하게 감는다. 아까 자신의 혀를 유린했던 안스륨이 자신의 것을 물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스는 그만 사고회로가 정지되는 듯 했다. 곧 무서운 쾌감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다른 때였다면 아스는 그만하라는 말 한마디, 저항하려는 몸짓 한번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농밀한 혀의 애무가 귀두를 쓸어안고, 그의 크고 무심해보이지만 따뜻한 손이 허리와 가슴을 더듬자 아스는 그만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온 몸에 바른 약이, 달뜬 몸이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괴로울만치 반응한다. 아스는 자신이 다리를 있는대로 벌린채 안스륨의 혀에 페니스를 맡기고, 한 손으로는 욕조를 짚고 한손으로는 안스륨의 머리를 붙든 채 까만 머리칼을 뒤 흔들며 정신없이 소리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아스의 눈가로 흘러나온 눈물과 땀이 욕실안에 가득차 음란하고 유혹적인 향기를 만들어 내어 안스륨의 것을 훑어올리고 있었다. 솟아오른 유두는 안스륨의 손가락 사이에 걸리고, 그것이 위로 스치고 만져지고 쓰다듬어 지자 아스는 난생 처음으로 찌릿거린다- 느낀다-라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다. 츄읍, 하고 안스륨이 자신의 체액과 침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리고, 흰 목을 있는 힘껏 뒤로 젖힌채 아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 아- 앗, 핫, 하... 아... 응... " " 사랑한다. " " 아, 앗, 아흑... ... " " 미칠것 같이 사랑해! 사랑해!! " 안스륨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그 무뚝뚝하던 목소리가 애원하듯 구걸하듯 외친다. 그가 외칠때마다 아스의 페니스에 그의 입김이 와닿아 아스는 더 크게 울었다. " 아아, 앙! 앙! " 안스륨이 거침없이 그의 것을 빨아올렸다 놓았다 속력과 힘을 가하자, 아스는 발끝으로 다리를 세운채 괴로움과 쾌감에 눈물 방울을 머금고 옆구리와 허리를 더듬는 안스륨의 팔을 붙잡았다. 이윽고 그의 손이 아스의 목덜미에 와 닿자 아스는 제정신으로 들었다면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 소리를 마구뱉어냈다. " 아, 앗, 앙! 아흑... 흑... 아... 앙! 앗! 그만!... 그... 그만...아아! " 아스의 허리가 뒤로 꺾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몸이 폭발할 듯 뜨거워져 갔다. 안스륨의 뜨거운 혀가 그의 귀두밑을 문지르자 아스는 비명을 올리며 사정했다. " 아----- 아아아아!!! 아, 안스...!! 으... 흑!! " 입안 가득히 퍼지는 지상 최고의 마약. 안스륨은 정신없이 그것을 들이켰다. 미약이 체내로 들어가고, 아까부터 공기중에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의 것을 자극하던 향기가 절정에 이른다. 쾌감에 움찔거리는 그의 허리를 붙잡으며, 안스륨은 아스의 달콤한 그것을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샅샅히 핥고, 자신도 참을 수 없는 흥분만으로 극에 달해버렸다. " 흣 ... ...! " 흰 허벅지 사이 안스륨의 입술이 달큰한 신음소리를 뱉어내고, 아스는 계속 된 절정의 여운에 흠칫 흠칫 허리를 튕겼다. 안스륨은 그러고도 아스의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계속 핥았다. 아스는 안스륨의 낮은 신음소리에 자신의 것이 다시 서기 시작하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쾌락에 멍해진 머리로 안스륨이 옷을 벗는 것을 지켜보았다. 같은 남자로써 거부할 수도 없을 만큼 매력적인 몸과, 매력적인 페니스였다. 아스는 스스로 물기와 증기가 가득한 욕실 바닥에 누웠다.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이미 엉망진창으로 안스륨에게 모든 것을 내보였다. 언제든 어떻게든 안스륨이 곁에 있어줄 것이다. 아스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자신을 보고 미미한 웃음을 짓는, 늘 상냥하지만 무뚝뚝한 말을 하는 안스륨에게는,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아스는 스스로 애원하듯 안스륨을 바라보았다. 안스륨의 미간이 희열과 괴로움으로 일그러지고, 그의 입술이 다시 아스의 입술을 덮쳤다. 뜨거웠다. 오로지 뜨겁기만 한 두 사람의 체온이 전부였다. 두 사람은 거침없이 서로에게 매달렸고, 때로 위로하듯, 때로 격렬하게 서로를 끌어안고 다리를 비비고 혀를 문질렀다. 안스륨의 것이 아스의 것과 함께 비벼지고, 안스륨은 애타게 아스의 내부를, 아스의 모든것을 바라는 몸을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안스륨은 바짝 발꿈치를 세운 아스를 앞으로 안에 가슴을 더듬으며 위로했고, 그를 벽으로 몰아세워 엉덩이와 허리를 애무하며 자신의 것을 다리 사이로 마찰시켰다. 두 사람의 몸과, 증기가 들어차 음란하고 습한 소리가 야했고, 거친 호흡소리와 아스의 쾌감에 잠긴 울음소리가 성욕의 불길이 되었다. 흰 목덜미를 깨무는 흰 치아, 조심스럽게 유두를 찾는 붉은 입술, 붙잡을 것을 찾아 헤매이는 거친 손길, 몇번이고 몇번이고 쾌락의 증거를 토해내는 몸. 한덩이의 불이 되어 쾌감의 늪을 태우는 두 사람에게, 그 순간은 영원이 되었다. 다음 날, 조금은 늦은 아침 안스륨은 아스를 가져다 주기 위해 아침식사를 가지러 내려왔다가 떠날 채비를 갖춘 제피와 스타티스를 발견했다. 제피는 손을 들면서 인사하더니 말했다. " 마침 잘 내려왔어. 우리는 이만 돌아가려고. 나도 그렇고 스티도 그렇고,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되거든. 다들 쓸데없는 의심이 많아서 말이야. " " 스타티스 입니다! 스티가 아닙니다! 아무튼, 제피님이 말씀은 저렇게 하셔도 상당히 곤란합니다. 제피님의 입장이 난처해지시잖아요. 제피님도 그렇게 태평스레 말할때가 아닙니다. 어떻게든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만들어 두잖으면. " 안스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피나 스타티스나 둘 중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들었다. " 고마웠다. 보답은 언젠가 꼭 하겠다. " " 에- 아, 뭐. 아니야. 아스가 저렇게 된 건 내 부탁을 들어주다가 그렇게 된 거니까- " " 아니야. 쥬니퍼의 독자가 호위하는 2왕자의 지위가 어떤건지는 나도 대충 상상할 수 있다. 태자가 날을 바짝 세우고 감시하고 있을텐데, 외국에까지 다녀온 걸 알면 틀림없이 의심할테지. " " 으응, 뭐어. 늘 그러니까. " 제피는 어쩐지 낯 뜨겁다고 생각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스타티스는 걱정이 담긴 눈초리로 안스륨을 바라보며 말했다. " 어제 잠깐 봤지만- 아스, 트리옌인 겁니까? " " 그래. " " 그리고 당신은... ... " 제피가 당신은 뭐? 뭔데? 하고 스타티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스타티스는 고개를 내저을 뿐, 뒷 말을 삼켰다. 그는 대충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마 위장을 하고 있을 모습이지만, 절대적으로 그가 가진 힘과 살기는 수인족의 것이 아니다. 스타티스는 본능적인 검사의 감으로 그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결계때문에 저런 모습일테지. 그는 머리를 내저었다. " 안 될 겁니다. 힘들 겁니다. 아스와 당신은. "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스타티스는 그런 말을 담아 안스륨을 쳐다보았다. 안스륨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 알고 있다. 보통 트리옌이라도 힘들테지. 하지만 그는... ... 어쨌건, 자네들은 오늘의 수고를 결코 헛되이 하지 않은거야. 댓가를 기대해도 좋다. 그것이 드라세나라 할 지 라도. " 아스는 아리스타타다. 지금은,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 언젠가라고 표현은 했지만 안스륨은 그것이 곧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아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때에, 그는 자신이 받은 호의를 잊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고, 단순히 그 친분만으로도 제피는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의 태자를 더욱 더 위협하는 것이 되겠지. 제피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댓가같은건 바라지 않아. 그냥 이럴때는 평소엔 정말 싫다-라고 생각하는 왕자라는 내 지위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게 좋을 뿐이야. 드라세나 따위는 내게 어울리지 않아. 바라지도 않고. " 스타티스가 많은 말이 담긴 눈동자로 제피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것을 모른 척 했다. 안스륨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곧 아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여관밖으로 나갔다. 어제의 그 깐깐했던 여관주인이 살랑거리며 다가와 안스륨에게 물었다. "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여관의 밀실 입구를 부순 댓가로 안스륨이 던져줬던 보석은 그 여관을 통째로 사고도 남을만한 값이었다. 그래서 지금 안스륨과 아스는 여관의 최고급 방에 무기한으로 머물 수 있을 손님이 되어있었다. 안스륨은 짧게 대꾸했다. " 식사. 방으로. " 안스륨은 침대에 드리워진 반 투명한 휘장을 걷고 큰 침대의 푹신한 배게와 이불속에 파묻히다 싶히 누워있는 아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젯 밤 내내 욕실에서 젖은 채로 있던 머리는 또 바로 침대에서 뒹구는 바람에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드러난 어깨며 목덜미에는 선명한 자욱들이 발갛게 드러나 있었다. 밤새도록 욕실이며 침대며 몇번이고 사정하며 열락을 지샌덕에 아스는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안스륨은 가볍게 아스의 이마에 입맞추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이 침대에서 그저 눈을 뜨면 사랑하고 살을 맞대고 잠들고 그렇게 영원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안스륨은, 까만 머리카락 밑으로 올라오고 있는 은빛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아팠다. 새로 나는 머리카락은 선명한 은색. 길게 자라면 틀림없이 아름다운 회청은빛으로 바람에 나부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죄도, 추잡한 욕심도, 커다란 욕망도 알게 되겠지. 자신이 잠시나마 감추고 싶었던 현실은, 점차 큰 발자국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 ... " " 아- 저어... 미, 미안요! " 아스는 화들짝 안스륨의 손을 살며시 잡았던 손을 떼었다. 안스륨이 조금 멍하니 아스를 바라보고, 아스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변명을 했다. " 저, 저, 그냥요. 손을 잡고 걸어도 될까 싶어서... 물어보고 그럴 걸 그랬나봐요. " " ...아니야. 그냥 누구랑 손을 잡고 걸어본 적이 없어서 놀랐다. " 안스륨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스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아스는 안스륨의 웃는 모습에 놀랬다가, 곧 햇살이 퍼지듯 활짝 웃으며 그의 옆에 섰다. 마주잡은 두 손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고, 이제 봄의 절정에 이르러 온 세상이 연둣빛에 점령되는 시간에 그늘 하나 없는 들판의 길은 조금 더웠지만 두 사람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새 순이 피어나는 들판위로 햇살이 부서지고, 연두빛을 초록빛으로 키운다. 가끔씩 내리는 봄비는 들판을 적시고, 이따끔 내리는 소나기는 무지개를 만든다. 들판의 습지에서는 새 떼가 바람에 휘날리는 천 조각 처럼 날리고, 바람의 모양을 그린다. 그 공간과 시간을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때로는 말없이 걸었다. 돌 밖에 없는 황량한 황무지에서도 두 사람은 웃었고, 드러난 사막의 뜨거운 폭염 아래에서도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다다른 오아시스에서는 이따끔 알몸으로 서로의 몸을 부볏고 그럴때면 몇일이고 두 사람만의 낙원에서 서로에게 취해 시간을 잊었다. 꿈결같은 시간. 영원히 이어졌으면 하는 길. 밤이면 안스륨은 아스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매끄러운 배를 쓰다듬으며 귓볼의 파르르한 솜털을 조심스럽게 혀끝으로 훑으며. - 결계를 넘어가면, 뜨거운 사막을 지나자. 사막을 지나 대륙의 지붕 뜨거운 불길의 화산을 지나면 누구도 이르러 본 적 없다는 대륙의 끝 빙원에 당도할거다. 빙원에서 은하수와 오로라를 밟으며 걸어 빙해에 다다르면, 빙산의 징검다리를 지나 아무도 없는 세계의 끝으로 가 함께하자. 결코 이루어 질 수 없을 소망. 이윽고 마지막이 다가왔다. 황무지와 사막의 먼지바람이 날리는 곳에서서 아스는 지평선에 드러난 녹색의 익숙하지만 낯선 것을 발견하고 놀라 말했다. " 안스륨! 저거 봐요! 나무예요! 풀도 찾아보기 힘든데인데- 저렇게나 큰 나무가... 어라? 저쪽 지평선에도 있어요!! " " 대륙전쟁의 산물이다. 트리옌들의 결계야. 보통은 그냥 결계라고 부르지만 바른 이름은 브리오니아 결계다. 전쟁때 용족들이 드라세나를 격파하고 그라시스 숲에까지 이르자 아리스타타가 용족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결계를 만들기 위해 레인저 부대를 편성해 후방에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거의 괴멸되다시피 하며 심고 지켰던 것이 바로 저 나무들이지. 그리고 아리스타타가 죽고 전쟁이 끝난 후 펜 오키드가 태어나 결계를 완성했다. " " 그렇군요. 그럼 결국 전쟁에서는 쓰이지 못했네요? ' " 그래. 하지만 전쟁을 예방하는 효과는 있겠지. 용족은 저 결계를 지나치기도 힘들고 안에서는 본체로 돌아갈 수도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도 없다. " " 그런데 우린 저기에를 가는 건가요? " " 그래. 우리는 결계를 지난다. " 안스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스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안스륨의 손을 꽉 잡았다. 두 사람은 바람부는 황무지를 건너 나무쪽으로 다가갔다. 황무지에 우뚝 선 기둥같은 나무들은 도무지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도록 풍성한 잎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록 나무들은 부르르 흔들리며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나무 위로 떠오른 결계의 진법이 하얗게 타오른다. 아스는 주변이 술렁거리며 나무위로 갑자기 나타난 어떤 문양같은 것이 웅웅 거리며 빛나자 놀라서 안스륨을 쳐다보았다. 파아아- 바람이 급하게 불고, 바람따라 갑자기 몰려온 구름들이 하늘을 어둡게 한다. 사방이 어두침침해지며 바람이 불자 아스는 얼굴을 때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부여잡으며 외쳤다. " 왜 이러는 거죠 안스륨?! 가까이 가도 괜찮은 거예요? " " 경계하는 거다. 나를. " 콰아아아아--------- 바람은 이윽고 폭풍으로 자랄 듯 미친듯이 날뛰었다. 흙먼지 사이로 진법이 당장이라도 으르렁 거릴 듯 울렁이며 타오른다. 희디 흰 불꽃이 안스륨을 노려보고 있었다. 용족에게 반응해 결계가 움직이는 것이다. 무스카리가 더 가까이 다가가면 저 나무를 지키는 정령 트리옌들이 그를 향해 공격할 것이다. 그리 되면 쉽사리 지나갈 수는 없다. 혼자 몸도 빼내기 힘든데 아스를 데리고는 거의 불가능 하다. 이 결계를 깰 수 있는 사람은 펜 오키드와 아스 뿐이었다. 안스륨은 팔을 뻗어 아스의 어깨를 안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 품안에 이대로 가두고, 놓아보내고 싶지 않다. 어쩌면 좋을까, 지울 수 없는 이 죄를. 널 사랑한 죄를. 널 사랑한다고 말한 죄를. 너를 죽인 죄를. 바람에 아스와 안스륨의 머리카락이 한데 뒤 엉켜 흩날렸다. 두 사람의 망토가 미친듯이 나부끼고, 안스륨은 아스의 어깨를 그렇게 붙잡은 채, 아스의 귓가에 대고 천천히... 천천히... 말했다. " 나는- 죄를 지었다. " " 영원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다. " 안스륨은 아스의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금발머리가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 바람에 휘감겨 날뛰고, 빼든 장검이 파르라니 빛난다. 안스륨은 하마터면 그보고 더 기다려 달라고 말할 뻔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안스륨은 있는 사실 그대로, 자신의 죄를 아스에게 고하고, 하지만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와 함께 가달라고 말하고- 결계를 지나, 폭풍의 성채로 가, 숲도 나무도 없는 번뇌의 불길이 타오르는 차가운 감옥에서 자신의 품에 그를 안은 채 영영 놓아주지 않을... 그럴건가 무스카리? 그는 알고 있었다. 신선한 바람도, 맑은 햇살도, 푸른 숲도 아무것도 없는 그곳은 그야말로 아스에겐 독이다. 자신이 결계안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듯, 그곳에서 아스는 아무런 능력도 가지지 못하고, 한걸음 걷는 것을 힘겨워 하며 새장안에 갇힌 새처럼 힘없이 울다가 시들어 갈 것이다. 그럴건가 안스륨?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동안 누려온 행복도 너에겐 과분한 사치. 너는 영영 이루어지지 못해. 너는 용족이고, 그녀는 트리옌이다. 너는 에리카의 아들, 숲의 저주,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무스카리 알리움이고, 그녀는 에린지움의 걸음, 숲의 절대자, 은빛의 여왕 아리스타타 칼미아다. 자신은 번뇌의 불길속에서 타오르는 시커먼 죄의 증거이고, 그녀는 숲의 햇살속에서 찬란히 빛나는 세계의 희망이다. 네가 원한게 뭐였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스앞에서 죄를 숨기고 본성을 숨기고 좋은 사람인 척 하며, 그를 사랑한다고 지껄이고 그의 몸을 탐하며 너의 욕심을 채웠다. 그래, 이건 단순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한번만이라도 아리스타타의 미소를 보고 싶다는 욕심, 한번만이라도 그녀와 거닐어 보고 싶다는 욕심, 한번만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욕심. 나의 추악한 욕망. 안스륨은 칼을 빼들었다. 카멜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말했다. " 너의 끝간데를 모르는 욕심을 채우려 들지 마라. 또 그 분을 죽일 셈이냐? 데려가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 또 그분을 죽여? 아스는 안스륨을 올려다 보았다. 그의 무표정이 이상하게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다. 카멜이 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 약속을 지키십시오. 저자의 목숨을 담보로 약속하셨습니다. " " 안돼!!! " " 안스륨... " 불안함에 위태롭던 안스륨의 얼굴이 다잡아졌다. 그는 아스를 자신의 뒤로 제끼며 말했다. " 네가 간다 해도 내가 보낼 수 없다!! 어떻게 되어도 좋다. 자신은 지금 이 순간이 최선이다. 아스와 함께 있는 지금이 모든 것이다. 그를 지킬 것이다. 이제는 그 무엇도 나에게서 아스를 뺏어가지 못해! 죽음도! 카멜 너도!! " 안스륨이 칼을 내질렀다. 휘웅, 하고 새파란 칼날이 카멜을 짓쳐들어가고, 카멜이 그것을 막아내며 소리쳤다. " 너의 그 이기심은, 언제쯤 채워질 것이냐!! " 안스륨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이 목마름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뭐라 해도 좋아! 내 죄를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그를 데리고 도망치겠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설사 수백년을 헤매더라도 그와 내가 살 땅을 찾겠다! 수백년동안 헤매더라도 그만 내 곁에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없어!! " 카멜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녹색눈이 새파랗게 불타올랐다. 그는 도무지, 자신의 앞에서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무스카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과분하다. 네가 저지른 죄의 무게, 마주대하지 않아 잊은 거냐?! 이제 눈앞에 그 분이 있으니 모른 척 하고 싶은거냐?! 쩡-!!! 서로의 망토 끝자락이 찢겼다. 큰 호선을 그리며 칼과 검이 다시 한번 격돌했다. " 너는 너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말할 자격도!!! 그 죄를 갚을 자격조차도 없는 놈이다!! " " 나는... 나는...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 그녀? 아스는 얼핏 안스륨이 외친 말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곧, 안스륨이 자신에게 소리치는 것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 아스!!! 결계로 가라! 결계로 가서 저것을 없애! 그리고 나와 함께 가자! " " 말도 안되는 소릴!!! " " 너만이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 " 닥쳐!! " 아스는 황망히 뒤를 돌아보았다. 하얗게 빛나는 나무. 아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카멜의 검끝이 당장이라도 안스륨을 쪼개놓을 듯 달려드는 것을 보고 뒤로 돌아 나무를 향해 뛰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무는 더욱 거대했다. 나무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바람이 그 나무를 비켜가는 듯 했다. 우람한 줄기는 전쟁을 버텨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탄탄했으며, 사방으로 뻗은 가지에 달린 잎사귀는 숲을 그러다 모은 듯 풍성했다. 막상, 가까이 오긴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결계를 없애라는 것인지 아스는 알 수 없었다. 나무를 베기라도 해야하나? 아스는 무심결에 나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 두근. " ?! " 갑자기 몸이 고동친다. 아스는 눈앞이 순간 아찔했다. 손을 댄 나무에서 무언가 무서운, 굉장한 것들이 자신에게 마구 흘러오고 있었다. 아니, 흘러오고 흘러 나간다. 아스는 마치 자신이 나무와 이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보았다. 나무속에서 힘차게 움직이는 수액의 맥동과, 그곳에 자리잡은 한 트리옌의 모습을.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투박한 나무 껍질이지만, 또 다르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나무와 이어진 한없이 투명한 수액의 자신과, 그 손에서 자신과 마주 대하는 어떤 트리옌의 모습이다. 그 트리옌은 인형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아스의 앞에 한 소녀의 인영이 나타난 것은. 사방으로 휘날리는 바람처럼 긴 머리카락은 파르란 은빛. 선명한 색깔을 띄고 오만한 눈매에 감싸인 커다란 눈동자는 녹색. 아스는 놀라서 뒤로 물러났고, 나무에서 손을 떼는 순간 기이한, 머릿속으로 보는 듯한 트리옌의 모습도 사라졌다. 아까 그 트리옌과는 달리 이 트리옌의 소녀는 직접 눈에 보이고 있었다. 반투명한 형체는, 반듯한 이마를 찌푸리고는 경멸조로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 뭘 하려는 짓이지? " ...아? " - 뭘 하는 짓인지 물었어! 결계를 와해시키고, 저 용족과 함께 갈 셈이냐! 분노에 찬 소리를 내뱉는 소녀의 머리카락은- 은빛. 아스는 오래전에 안스륨에게 들었던 말을 기억해 내었다. 은빛의 머리카락은, 에린지움이라는 트리옌들의 위대한 나무의 증거. ' 잎사귀는 은색이라고 하지. 바람이 불면 회청은빛으로 빛난다고 했다. 에린지움의 지킴이인 펜 오키드의 머리카락 색도 그와 동일하다. ' " 용족이라니... 안스륨은... " 아스는 어쩐지 머리가 혼란스럽고, 무언가 무서운 것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펜은 기가 막힌다는 듯 외쳤다. - 자각했는 줄 알았는데, 아니군! 그럼 그렇지, 그 아리스타타가 이럴리 없어! 결계에 손을 대길래, 혹시나 했는데- " ... ... 아리스타타? " - 그래! 너의 전생, 아리스타타 칼미아! 에린지움의 걸음이자, 숲의 절대자, 은빛의 여왕! 무적의 여인 아리스타타! 그런데 지금 그 아리스타타가 숲의 저주 무스카리 알리움을 따라가려 하는 건가! ' 햇빛 아래에서는 눈부신 은색이다. 계곡물이 튀어오를때 빛나는 색깔과 같지. 달빛 아래에서는 부드러운 청은빛이다. 숲 속에서는 바람이 불때의 나무와도 같은 빛깔이지. 아주 아름답다. ' ' 그래요? 그럼 그녀도 트리옌들이 산다는 축복의 성에 있나요? ' ' 아니. 죽었다. ' - 저 숲의 저주!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바로 너를 죽게 만든 용족 무스카리를! ' 물론이지. 저 무스카리의 손에 잡혀 심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결할만큼 강단있고 고결한 여성이었으니까. 나이트가 구해주러 오기 일보직전이었기 때문에, 자결하지 않았으면 본체도 죽고 힘도 무스카리가 가져간다고는 해도 목숨은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 말야. 전해지는 바로는 아주 자존심이 강해 어떤 모욕도 용납하지 않았고 모욕을 받지 않을만큼 스스로에게도 엄했다고 하지. 심장을 뺏기는 모욕을 당하고서라도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거야. 게다가 무스카리- 용족에게 에린지움의 힘을 빼앗긴 다는건, 트리옌들의 멸망을 의미하는 거니까... ' ' 네놈이 어떻게, 어떻게 감히 그 분을 지킨다는 소리를 하는건가!!! ' ' 나는- 죄를 지었다. ' ' 영원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다. ' " ---아! " 아스는 갑자기 몸이 부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갑자기 아스의 머리카락이 무서운 속도로 자라기 시작했다. 사방팔방으로 뻗쳐가는 머리카락은 펜 오키드와 같은 은빛. 상아색의 피부는 눈처럼 희어지고, 펜이 놀라서 쳐다보는 가운데, 멍하니 뜬 녹색 눈동자는 이제 선명한, 선명한 청록빛이 되어간다. 쨍, 쨍, 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고, 마법이 하나 둘씩 깨어져 나간다. 그와 동시에 안스륨이 가려뒀던 기억도 하나 둘씩 떠올랐다. 그래- 그 숲에서, 숲에서 항상 자신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무서운 시선은, 붉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의, 큰 키에- 안스륨의 얼굴을 한 남자다. 카멜과 처음 만났을때에도, 그는 그렇게 자신을 무서운 시선으로 바라봤었다. 그리고 카멜이 외쳤었지. ' - 무스카리!!! ' - 꺄아아아아아아!!! 갑자기 무엇인가가 뒤에서 펜의 영상을 잡아 일그러뜨렸다. 펜은 자신이 잡아뜯기는 듯 비명을 올리며 흐트러졌고, 긴 팔이 멍하게 있던 아스의 손을 잡아채 나무로 가져다 댄다. 아스가 채 상대방을 인식하기도 전에 그가 외쳤다. " 결계를 풀어! " 아스는 순간적으로 그 말을 인식했고, 갑자기 나무의 기운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더니, 아스는 손에서 무엇인가가 급작스럽게 빠져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계의 나무들에서 정령 트리옌들이 진을 휘돌고, 하얗게 타오르던 진은 점점 그 빛을 죽이며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휘웅- 하는 울림소리가 나면서 바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레지는 아스의 손을 놓고 재빨리 마법을 시전했다. 결계가 풀어지는 상태에서 레지는 손쉽게 마법을 행할 수 있었고, 당장 공간을 자른 듯한 입구가 생겨났다. 그 공간의 저편으로는 불타는 화염의 산이 보이고 있었다. 아스가 레지를 돌아보았지만, 레지는 그에게 신경쓰지 않고 연이어 마법을 시전했다. 그가 마법을 풀어놓자 쿠궁, 하고 카멜이 서 있던 땅밑이 움푹 꺼지고, 카멜은 갑작스런 타격에 몸을 휘청였다. 안스륨의 검 끝이 카멜의 뺨을 스치고, 투명한 피가 흐르자 그 특유의 청량한 향기가 주변으로 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레지는 그대로 안스륨을 끌어안고 잘린 공간속으로 뛰어들었다. 안스륨이 내지르는 소리와 함께 둘은 사라졌다. " 레지 ㄴ...!! " 우르릉- 몰려든 구름이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빗방울이 투둑, 투둑, 거칠고 메마른 땅을 때리기 시작했다. 결계가 완전히 사라지고, 정령 트리옌들이 나무속으로 스며들었다. 비가 대지에 내리는 소리만이 가득차고, 아스는 무서운 침묵속에 홀로 서 있었다. 쏴아아아아---- 곧 비 안개가 피어오른다. 아스는 그 속에서 길게 자라버린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꿈속에서와 같이 긴 은빛 머리카락이다. 그 머리카락을 더듬는 손가락은 자작나무 가지처럼 희다. 자신은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방황하고 있었다. 비가 온 전신을 때리고 그 소리가 가득 아스의 귀를 울렸지만 아스는 그 지독히도 조용한 숲속에 서 있었다. 아주, 아주 조용한 숲.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숲. 자신은 그곳에서 헤매다가... ... 아스는 자신에게 다가온 카멜을 바라보았다. 카멜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한숨처럼 말하며 아스를 끌어안았다. " 아리스타타님-! " 아스는 그에게 끌어안긴채 눈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빗물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자신의 피가 식은건지, 비가 차가운 건지 몸이 차가웠다. 마음까지 차가워진 것 같았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스는 생각했다. 나는 아리스타타가 아냐. 나는 아스포델이야. 급작스럽게 내린 비는 내린 것 만큼이나 금새 수그러들었다. 카멜이 머무르고 있던 조그만 마을의 초라한 여관방에서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비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스는 카멜이 건네준 따뜻한 음료를 손에 쥔 채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카멜은 애써 탁자밑으로 떨리는 손을 가리고 있었다. 처음에 봤었던 검은 머리카락의 평범한 소년은 간 곳이 없다. 아직 완전한 아리스타타의 모습은 아니지만, 너무 길게 자라 어깨까지 자른 머리카락은 은빛이다. 그저 은색이 아니다. 한 여름날, 나무가 바람결에 휘날리면 빛나는 그런 색이다. 긴 눈꺼풀에 반쯤 가린 눈동자는, 수 백년동안 그리던 청록색. 하늘과 바다의 푸르름과, 숲의 푸르름을 합친 듯한 빛. 무스카리가 갑자기 나타난 남자와 함께 사라지고, 아스는 그 후로 말이 없었다. 잠깐 펜이 나타난 것 같았는데,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아리스타타라는 것을 안 듯 했다. 카멜은 어색한 긴장과 침묵속에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아리스타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직 그는 완전히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고, 카멜은 마음의 공황상태에 빠진 누군가를 능숙하게 달랠만한 말재주를 갖고 있지 못했다. " 나는 누구였지? " 카멜은 갑작스런 아스의 질문에, 질문을 착각했다. 아스는 누구지? 가 아닌 누구였지? 라고 질문했지만, 카멜은 서슴없이 대꾸했다. " 아리스타타님이십니다. 아리스타타 칼미아. 대륙의 희망이자, 숲의 절대자, 은빛의 여왕, 무적의 여인... 대륙에서 한 분 뿐이신 에린지움의 걸음이십니다. 당신을 수백년 동안 찾아 헤매었습니다. " " ... 왜? " " ... 그렇군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시겠군요. 트리옌들은 걸음이 죽어도 완전히 죽는 것이 아닙니다. 걸음이 죽어도 그 본체인 나무는 남아있으며, 그 영혼은 어딘가로 가서 환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리스타타님의 영혼을 찾았던 겁니다. 수백년... 수백년 그 길고 긴 시간동안... 얼마나 당신을 그리며... 얼마나 당신을 찾아 헤매었는지 모릅니다. " 아스는 고개를 들어 카멜을 보았다. 그는 아스의 손을 붙잡으며, 그 앞에 무릎 꿇었다. 그의 눈꺼풀과 그의 손을 잡은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 당신을 찾은 것은 접니다. 오로지 저만이 당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스카리... 무스카리 그는...!! " "... 그가 아리스타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아리스타타는 자결했다고 들었는데... " 아스는 멍한 정신속에서 질문했다. " 용족의 수장인 무스카리는, 에리카 로벨리아의 명령에 따라 아리스타타님의 심장을 갖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지요. 그라시스 숲에서 아리스타타님은... 제가, 제가 미처 지켜드리지 못하고 그만, 그 놈에게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리스타타님을 찾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만 아리스타타님은 그만... 그만 제가 가시기 전에, 무스카리에게 심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결하셨습니다! " 카멜이 비통한 음성으로 외치며 아스의 손에 이마를 대었다. " 하지만... 하지만 이제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찾았습니다. 다시 무스카리 그 놈의 수중에 계실때 제가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무스카리 그놈은 아리스타타님을 죽인 것만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죄를 숨기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리스타타님의 곁에서 모두를 우롱하고, 능멸하며-!! " " 무스카리는, 왜, 왜 아리스타타를 납치했지? " " 아리스타타님의 심장을 원했고- 그 놈이... 그 무스카리가... " " ... ... 아리스타타를 사랑했구나. " ' ...너를 사랑하니까... ... ' ' 사랑한다. ' ' 미칠것 같이 사랑해! 사랑해!! '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리스타타를. " 아리스타타님. " 아스는 무섭게 카멜의 손을 뿌리쳤다. 카멜은 아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 아리스타타님? " " 그렇게 부르지마-!!! " " ... 아... " " 나는 아리스타타가 아니야!! 나는 아리스타타가 아니야!!! 나는, 나는, 나는 아스포델이야!!!! " 카멜은 그를 붙잡았지만, 아스는 다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아스는 여관을 박차고 뛰어나가, 안개비가 내리는 곳으로 뛰어나갔다. 카멜은 그를 붙잡아 세우려고 했지만,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느다랗지만 차가운 비가 내리고, 카멜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무스카리... 무스카리... 그 저주스러운 이름-!! 그가 또! 그가 또!!! 아스는 달리고 달렸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울고 있는 그의 뺨을, 얼굴을, 눈꺼풀을 때린다. 그는 아리스타타를 사랑했다. 그는 아리스타타를 사랑했다. 그는 아리스타타를, 그는 아리스타타를... 죽은 아리스타타를... 그래서 나를 구해주고, 그래서 나를 위해주고, 그래서 나를 안아주고, 그래서 나를 사랑한다 말하고... ... 안스륨이라는 이름도 거짓이다. 아스는 이제 그 이름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안스륨도, 아스포델도 모든 것이 거짓말. 자신이 그렇게 기쁘게, 고맙게, 쑥쓰럽게 받아들였던 레브록이라는 성도 거짓. 그는 자신이 모르는 용족의 사람이고, 자신 역시 자신이 모르는 트리옌이다. 레지, 레지... 지금 그의 옆에 있는 것은 나라구요? 아니, 아니야... 내가 아니었어. 그가 보고 있던 것은... 모든 것이 부서져 내린다. 아스는 순간 발밑이 미끄러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신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고, 은빛 머리카락이 어깨로 흘러내렸다. 주변은 모두 안개로, 자신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비는 내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아스는 침묵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무서웠다. " 안스륨. " 아스는 울상이 되었다. " 안스륨. " 구하러 와 줄 거죠?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 이런 말도 안되는 현실, 이런 싫은 이야기들... 구해줄 거죠? 언제나 그렇듯이. "... 아, 안스륨... " 노예 상단에 잡혀갈때마다 구해주었잖아요. 언제나 내 옆에 있었잖아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를 그렇게나 옆에 두고 싶어 했잖아요. 같은 성을 가진, 가족이라고... " 으허어엉... ... " 아스는 축축한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아니야, 안스륨은 이제 없어. 안스륨은 이제 없어. 안스륨은 아무데도 없어. 차가운 비가 아스의 어깨에 내렸다. 그때였다. " 아스. " 아스는 자신이 환청을 듣는가 싶었다. " 아스. " 아스는 고개를 들어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욱한 안개가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다. " 안스륨... " " 아스. " 안개 저편에서 키 큰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스의 몸이 굳었다. 안스륨이 아니었다. 안스륨은 이제 없다... 자신과 같았던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는 간데 없고,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를 한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물이 솟구쳤다. 그래, 이게 안스륨의 본 모습. 자신이 아닌 아리스타타라는 위대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의 모습. 현실이 덜커덩 소리를 내며 아스의 어깨로 떨어졌다. 무스카리는 아스에게로 다가와 그에게 팔을 벌리며 말했다. " 미안해... " 뭐가요? 아리스타타를 죽인 것이요? " 사랑한다... " 아리스타타를? " 나와 함께 같이 가자. " 아리스타타와 함께? 무스카리는 하염없이 울고 있는 아스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소중하다. 너무나도 사랑스럽다. 나와 함께 가자. 나의 죄도, 너의 과거도 모두 없는 곳으로 떠나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자. 무스카리는 손을 뻗어 아스를 안으려 했지만, 아스는 흠칫, 물러났다. 무스카리의 금빛 눈이 커졌다. " ... 아리스타타... " 아스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도리질 쳤다.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냐? 그런... 이제 내가 증오스러운 거냐? 너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내가... 무스카리는 멈칫 멈칫 손을 뻗었지만, 아스는 그것을 피하고 달아나려는 듯 뒷 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 아리스타타... " " --- 싫어!!!!!! " 무스카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 소용없었구나.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며, 너와 함께 했던 지난 시간들이. 너를 보고 내가 웃었고, 네가 나를 보고 웃었던 지난 시간들이, 다 소용없었구나. 이 큰 죄앞에, 나의 이기심 앞에, 욕심앞에, 나의... 나의 분노와, 나의 갈망과... 나의... 안돼. 안돼. 놓칠 수 없어. 절대로-!!!!! 무스카리의 눈동자가 분노로 불타올랐다. 지독한 갈망과 끝이 없는 열망. 그 시선이 아스를 꿰뚫는다. 아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 시선을 마주했다. 지독한 시선이다. 그 시선은 아스를 옭아매고 꼼짝 못하게 만든다. 숨도 쉬지 못하도록 그를 조인다. 무스카리는 아스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를 마구 다그쳤다. 초조함이 그를 붙잡고 그의 이성을 흐트린다. " 절대로 놓아주지 않아! 싫다고 해도 할 수 없어! 나는 너를 가진다! 너는 내 것이야!! 아스포델!!! 아리스타타!!!! " 그것이 그의 본성이었다.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갈취하고 빼앗고 가둔다. 끝없는 불길로 숲을 태우고 모든것을 사로잡는다. 가지고, 가지고, 가지고... 분노가 무스카리를 뒤덮었다. 그의 눈앞에서 수많았던 지난 과거들이 점멸해가고 있었다. 아리스타타는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며, 경멸어린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본다. 아리스타타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친다. 아리스타타는 날개꺾인 새처럼 울며 키스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리스타타는 진저리를 치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자신을 밀어내려 한다. 아리스타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신을 거부한다. 아리스타타는 뒤로 묶인 손을 부서져라 틀어쥐며 그저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린다. 아리스타타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그저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아리스타타는 결코 웃지 않고 아리스타타는 사랑한다는 자신의 고백에 목숨을 끊는다. " 그래! 그것이 우리들의 전부야!!!! 나는 너를 짓누르고! 너는 나에게서 도망가려 하고!!! 나의 사랑을 받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게 나은! 너는 그런 여자야!!! 나는 이런 놈이고! 싫다면 너를 억지로 가지겠어! 도망가면 잡아오면 돼!!! 보답받지 못해도 난 사랑한다! 나의 사랑은 그런 거야! 너를 영혼까지 묶어버리겠어! 너의 전부를 뺏겠어!!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채울 수만 있다면 이 세계를 다 부수겠어--!!!! " 무스카리는 뒤로 돌아 도망가려는 아스를 억지로 억눌렀다. 무스카리는 뒤에서 아스의 팔을 억누르고 그를 붙잡고 거침없이 그의 성 만큼이나 곤두선 자신의 것을 꺼냈다. 그리고 아스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스의 안으로 들어섰다. " 아아아아아악-!!!! " 아스의 처참한 비명이 울렸지만 무스카리에게 그것은 거부의 반응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통과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사지는 무스카리의 분노를 부채질했고, 무스카리는 소리치며 아스를 부술듯이 쳐 올렸다. " 이래야만 했어!! 진작에 이래야만 했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너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엔 없어! 사랑해! 사랑해!! 미칠것 같이 사랑한다! 이 구멍을, 이 갈증을 어떻게 해야하나? 내가? 내가? 어떻게!!!!! 사랑한다 아리스타타! 사랑해! 아리스타타! 아리스타타!! " 지독한 고통, 끔찍한 현실. 몸을 괴롭히는 고통보다, 끊임없이 아리스타타의 이름을 부르는 무스카리의 목소리가 아스를 더욱 더 괴롭게 했다.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눈물은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스는 눈을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 아리스타타---!!!! " "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바스라져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숲 한가득 침통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무들은 축축 늘어지는 무거운 가지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바람자락에 파르르 몸을 떤다. 흐느낌과도 같은 구름이 흐느적 전주곡을 울리자, 곧 숲은 울기 시작했다. 한방울 두방울 나뭇잎의 가슴을 때리던 눈물 방울은 곧 그들에게 전해지는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비틀던 나무들을 쓰러트렸다. 먼 하늘에서 이따끔 외마디 신음같은 천둥소리가 울리고 바람조차 숨 죽이고 숲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카멜은 아스의 얼굴을 더듬지는 않았다. 아스가 울지 않아도 이미 숲이 울고 있을테니. 차라리 그가 운다면 좋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 그의 눈물에서 새어나올, 이런 거센 비에도 씻겨나가지 않을 향기가 그를 달래주고, 아직 아스가 살아있다고 말해줄테니. 그 눈물이 무스카리를 위한 것이래도 좋을 것 같았다. 카멜은 가슴이 아팠다. 아스는 워낙 거세어 드리워진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거친 빗방울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제 빛깔을 찾은 듯 했던 청록색 눈동자는 구름이 잔뜩 낀 불길한 하늘처럼 흐렸고 파문 없는 연못처럼 차가웠다. 도자기같은 이마는 빛을 잃고 다물려진 입술은 살아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스는 죽어 있었다. 카멜은 그의 창백한 얼굴위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아스의 가느다란 은빛 속눈썹에 맺힌 빗방울에서 멈칫거렸고, 카멜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입술 사이에서 조심스런 음성이 새어나왔다. 빗소리에 묻혀버릴 것 같은 그 음성은 빗소리와는 다른 침묵속에서 울렸다. " 긴 암흑 속을 지난다 생각하겠습니다. 오아시스없는 사막을 지난다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기다리겠습니다... 여태까지의 제가 그래왔던 것 처럼. 하지만 알아주십시오. 당신이 지금 지나고 있는 그 시간을, 그 고통을, 수백년동안 겪으며 제가 지금 당신곁에 있다는 것을. " 2. 방황 챙강-!! 때 아니게 위로 솟구쳐 튀어오른 칼날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튕겨냈다. 카멜은 갑자기 시야로 덮쳐든 그 빛살에 눈을 찌푸렸지만, 눈부신 것이 그 칼날인지, 아니면 또 다른 칼날을 쥐고 서 있는 한 청년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여긴 것은 다른 자들 모두 마찬가지인 듯, 수련장에 모인 모든 묘목들은 입을 멍하니 벌린채, 바닥으로 내리꽃힌 칼날이 아닌 그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는 가늘면서 단단한 자작나무 가지같고, 높은 어깨와는 대조적으로 날씬한 허리는 중성적인 매력을 더한다. 사슴같은 목 언저리에서 애처롭게 찰랑거리는 회청은빛 머리카락에 감싸인 차가운 청록색 눈동자엔 냉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내려앉은 당황스런 침묵을 깨치며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나와 결투하고 싶다면 정중히 해. 땅바닥에 꽃히는 것이 칼이 아닌 자신이 되고 싶잖으면. "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묘목 하나는 분해할 생각도 못하는 듯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차분히 칼을 집에 집어넣고 옷깃을 바로하더니 뒤로 돌아섰다. 카멜이 건네주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수련장을 빠져나와 뒷뜰을 가로지르며 그가 말했다. " 덥군. 무른 날씨야. 씻고 싶어. " " 계곡에 멱이라도 감으시죠. " " ...싫어. 욕조에 물을 받아줘. 차갑게 해서. " " 네. " " 리아트리스! " 아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뒷쪽으로는 뒤늦게사 정신을 차리고 분함을 토로하러 뛰쳐나온 묘목이 서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묘목중에서 가장 검술실력이 뛰어났던 그 묘목은 검을 배운지 고작 일여년도 되지 않은 아스에게 참패를 당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과 충격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 이번 한번 그렇게 나를 이겼다고 거만에 떨지마!! 아리스타타님도 아닌 너같은 이방인에게 이대로 지고 있을 내가 아니니까! 오늘은 방심했을 뿐이야! " " 흥, 그래서, 방심은 네 실력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거냐? 너의 스피리아가 그렇게 가르치든? " " 시끄러!!! 나도 카멜님에게 배울수만 있다면 너깟것 쯤은...!! " 그는 이를 뿌득 갈면서 건방진 표정을 하고 있는 아스를 한번 노려보고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카멜을 한번 쳐다보고는 꾸벅 고개를 숙이곤 수련장으로 돌아갔다. 아스는 기분나쁘다는 듯 수건을 카멜에게 퍽 집어던지고는,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이게 내 실력에 대한 주변의 평판이다. 전생에 아리스타타였기 때문에, 너에게 검술을 배우고 있기에, 거기에 나는 없지. " 카멜은 가만히 대꾸했다. " ...제가 다른 묘목들도 가르치길 원하십니까? " 아스는 성큼성큼 걸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카멜은 그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축복의 성을 일컬음은 숲에 반쯤 파묻힌 흰 바위를 연상케 하는 성만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니었다. 축복의 성은 또다른 푸른 하늘과, 푸른 숲과, 흰 성인듯 그대로 비추어 내는 거울의 호수까지를 포함하여 축복의 성이었다. 조그만 자갈들이 그리 깊지 않은 호수 바닥을 채우고 있고, 그 호수에 둥글게 감싸인 흰 성으로 통하는 길은 호수 중앙을 가로지르는 흰 다리뿐이다. 오랜 옛날, 다리를 지나던 모든 트리옌들은 거울의 호수를 굽어보고 있던 아리스타타와 마주할 수 있었다. 흰 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우아하게 고개를 내민 발코니에 그녀는 늘 앉아있곤 했다. 많은 트리옌들이 그 살아있는 신화적인 모습에서 존경과 흠모를 느꼈으며 그에 대한 예우로 그녀가 쳐다보든 안보든 항상 고개를 숙인 후 지나가곤 했다. 한 트리옌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그 행위는 어느사이엔가 전통이 되었고, 전통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리스타타가 그 자리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계속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 전통은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었다. 지금 다리 한가운데에서 고개를 숙여야할지 말아야할지 갈등하는 한 트리옌이 있듯, 그 발코니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아리스타타이지만 아리스타타가 아닌 소년이 온 후로 대부분의 트리옌은 그 전통의 실행함에 있어 많은 고뇌를 하고 있었다. 허나 그 트리옌이 고개를 숙이든 말든, 아스는 거울의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지난 일년 동안 자신은 많이 변했다. 자신 스스로도 그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앳되어 보이던 턱선은 야무지게 굳었으며, 동그랗던 눈매는 한층 날카롭게 변했다. 키도 어깨도 커졌으며, 손바닥은 예전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굳은살이 박히고 물집 자국이 남았다. 하지만 그의 분위기에서 고된 훈련의 시간이나, 거친 검사의 기색은 비치지 않았다. 아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루종일 햇살아래 나가있어도 피부는 되려 더 희어지는 것만 같고, 몸이 한층 단단해지기는 했지만 근육은 붙지 않는다. 청록색 눈동자와 회청은빛 머리카락. 짧게 잘라버리기는 했어도, 아스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막연한 불안을 느꼈다. 아리스타타와 틀림없이 닮았을, 혹은 닮아갈 자신의 얼굴이 두려웠다. 아스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곧 있을 회동에서 에린지움의 방으로 가는 권리를 차지하게 되면, 그 아래 생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리관에 누웠을 아리스타타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과 똑같을 것을 상상하면 현기증이 일었다. " 아스님. " 어느새 떨리는 그의 어깨를 눈치채고 다가온 카멜이 아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스는 간신히 떨림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 카멜... " " 괜찮으십니까? " 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카멜의 상냥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 사실을 말하자면 두렵다. 나는 에린지움과, 아리스타타를 이 눈으로 확인하는게 무서워. 그녀를 보는 순간 나는 산산조각이 나버릴것 같다. " 산산조각이. 안스륨이 그녀의 이름을 울부짖었던 그때처럼. "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 아스는 카멜의 손목을 꽉 틀어쥐었다. 그는 불안에 한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카멜을 올려다 보았다. " ...네가 아리스타타를 보는 순간, 나 따위는 부정해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 ... ... 너는 나의 것이지? 너만은 나의 것이지? 아리스타타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이겠지? " " 예. " " 너는 그날 맹세했었다. 내가 살기로 마음먹었었던 그날, 내 것이 되겠다고 맹세했고, 나는 너를 위해서라도 살겠다고 말했었어. 나는 리아트리스야! 아리스타타가 아닌! " 그리고 아스포델도 아닌. 아스는 카멜에게 한없이 매달렸다. 지금 그에게는 카멜뿐이었다. 낙엽이 아찔한 군무를 추고 있었다. 발간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것 같던 그 낙엽들은 소리없는 환호성을 지르며 아래로 아래로 저녁과 함께 낙하하고 있었다. 서녁의 불타는 석양은 붉은 낙엽빛을 반사했고, 세상의 모든 것이 소리없이 조용히 불타고 있었다. 차가운 어젯밤의 가을비의 기색은 간 곳이 없었고, 모든 것이 바싹 말라 불붙어 내렸다. 지는 석양을 침범해오는 보랏빛의 짐충한 하늘은 벼랑밑 깊은 계곡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고, 불타는 낙엽들은 애처로이 달아오른 반딧불들처럼 벼랑 아래로 사라져갔다. 그 벼랑의 끄트머리에서, 카멜은 몸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손톱이 벗겨져라 단단한 바위면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외침을 토해내었다. ' 제발... 제발... 아스님-!! ' 카멜은 아스가 대답도 하잖고 그대로 실 끊긴 인형처럼 아래로 쓰러져 버릴까봐 심장이 타들어갈 것 같은 긴장을 느꼈다. 하지만 지난 두달간 말하지도 먹지도 자지도, 단지 육신만이 살아있을 뿐 죽어있었던 아스는 입을 열었다. ' 나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어. ' 카멜은 고개를 들었다. 긴 은빛 머리카락은 불타는 폭포였다. 동녘하늘의 어둠과 싸늘한 달빛이 아스의 눈동자에도 침범하고 있었다. ' 나 조차도 가진 것이 없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봐. ' " 그게 아니잖아요! 내가 말한 건 보랏빛 바탕에 은빛 수였다구요! 이건 금빛 수잖아요!! " " 죄, 죄송합니다 펜 오키드님! 당장 다시 찾아보겠어요... " " 내 옷 시중을 든지가 몇 년째인데, 대체 아직까지 내가 원하는게 어떤 건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 펜은 시종이 들고있던 망토를 집어들어 그녀에게로 내팽겨쳤다. 그녀는 갑작스런 펜의 횡포에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고, 펜은 퍼뜩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자신의 이런 분노에도, 신경질에도, 짜증에도, 그녀는 익숙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망토를 줏어모으는 시종에게 다가가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 미안해요. 내가 괜한 일로 심한 소리를 했군요. " " 아, 아닙니다. " " 아니야, 내가 정말로 미안해요. 용서해주지 않겠어요?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 답잖은 모습을 보였어. " " 아니예요. 조금만 기다리셔요. 제가 금방 원하시는 것을 찾아다 드릴게요. " 시종이 총총 걸음으로 사라지자, 펜은 이마를 짚고는 다시 한번 긴 한숨을 내뱉았다. 오늘은 정말로 중요한 회동이 있는 날인 것이다. 이렇게 신경질이나 부리고 있을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불안했다. 오늘은 리아트리스에게 에린지움의 방으로 가는 권한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질 터였다. 원로회는 대부분 자신의 편이고, 자신이 강력하게 밀어붙이면 저 리아트리스는 결국 에린지움은 구경도 못한채 자신의 능력을 증거할 기회마저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펜은 불안했다. 왜냐면 그녀는 그가 정말로 아리스타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펜은 아직도 또렷히 기억나는 그때의 그 기억을 더듬어 내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빛나는 광명과, 흉내낼 수 없을 위엄. 잠깐이나마 아리스타타로 각성했었던 리아트리스에게 에린지움이나 아리스타타의 시신을 보여주면 그는 당장 아리스타타로 깨어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펜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정말 힘들고 기나긴 시간이었다. 만들어진 인형일 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조그만 실수에도 사사건건 정통성을 들고 따지며 그녀의 능력과 권한 여부를 의심하던 늙은이들. 그들 사이에서 전쟁의 참상과 아리스타타가 남기고 가버린 명성과 싸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결계를 완성한 것도 그녀였고, 용족과 평화조약을 맺은 것도 그녀였고, 전쟁의 뒤처리를 하고, 노예제도를 근절시키려 노력하며, 수인족들을 보호하고 인간들의 왕국에 에린지움과 트리옌의 권위를 다시 세운 것도 모조리 그녀였다. 이미 죽어버린 아리스타타가 아닌. 하지만 원로회의 늙은이들은 단지 자신의 눈동자가 청록색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을 믿지 않았다. 믿지 않으면서도 끈임없이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떠맡겼다. 에린지움의 걸음이 아닌 에린지움의 지킴이라는 그럴듯한 명칭을 붙여놓고서는 자신들 좋을대로 이용해 먹었다. 그 와중에서 아리스타타의 대리가 아닌, 만들어진 인형이 아닌 축복의 성의 주인으로써 자신을 증거하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그런데, 이제와서 그것을, 그 노력과 수고와 지난 시간을 다른 차원에서 끌려온, 아리스타타도 아닌 리아트리스에게 빼앗길수는 없었다. 비록 그가 진짜 아리스타타라 하여도! 그녀는 싸워야만 했다. " 피곤하신가 보군요. " 펜은 고개를 들었고, 반사적으로 미소지었다. " 아니, 로단테님이 아니셔요? " " 습관적인 웃음이라니, 참으로 서글픈 습관이십니다. 스피리아 로단테, 에린지움의 걸음 펜 오키드님을 뵙습니다. " 펜의 방문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다가 우아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남자는, 가는 눈에 큰 키와 넓은 어깨를 지닌 부드럽지만 단단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펜은 그가 자신을 에린지움의 걸음이라 부른것에 주목했으며, 그 사실은 그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는, 카멜이외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리스타타의 묘목이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타타의 환생체가 나타났다는 이야기에도 꿈쩍하지 않고 묘목들만을 돌볼뿐 스피리아라는 직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던 그가, 오늘 회동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고개를 들자 문 저편에서 시종이 새로운 망토를 들고 왔다. 그 망토 역시 펜이 원하던 망토는 아니었지만 펜은 내색없이 그것을 받아들어 걸쳤다. 그리고 치맛자락을 걷어올리고는 로단테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둘은 펜의 방을 지나 회랑으로 내려오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 후훗, 역시나 아리스타타라는 이름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네요. 수많은 요청에도 불구하고 긴급한때가 아니면 축복의 성에 발도 들여놓지 않던 로단테님을 이렇게 오게 만들고 말이어요. " 로단테는 싱긋 웃음지었다. " 아리스타타라는 이름이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흥미를 가진 것은 리아트리스라는 이름이지요. 펜 오키드님과 꼭 같은 회청은빛 머리카락을 하고 아리스타타님과 똑같은 청록색 눈동자를 하고 있다는 그 소년은, 축복의 숲 전체에 굉장한 소문을 몰고 다닙니다. " 펜은 싸늘하게 웃음지었다. " 오랜 방랑자들 사이에서 술잔을 치고, 치기없는 묘목들과 칼싸움을 벌이며 떠돌이 수인족들 사이에서 노래한다는 소문 말입니까? 그런 소문이라면 축복의 성 내에서도 많이 들린답니다. " " 그렇지요. 대륙을 떠돌며 갖은 이야기를 알고 있는 방랑자들과 환담을 나누고, 누구나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스피리아들 대신 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까마득한 미래가 남아있는 묘목들과 겨루고, 대륙의 잊혀져가는 많은 종족들에게 관심을 보인다더군요. 알고 계십니까? 축복의 숲에 짧은 그 머리칼이 도로를 지나가면 숱한 사람들이 그에게 인사를 합니다. " " ... 그는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이니까요. " " 그러면서, 아리스타타이기를 거부하는 특이한 소년이지요. " " 허나 다만, 환생체일 뿐일겁니다. " 모인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가까워져 왔다. 회랑 한가득 모인 원로회와 스피리아와 존경받는 트리옌들의 의문들을 한가득 담은 소리였다. 로단테는 펜을 회랑의 가운데로 안내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 바로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펜 오키드님이 바라시는 대로 밝혀지겠지요. 그가 그저 환생체일 뿐인지, 아니면 아리스타타인지, 아니면 리아트리스인지. " 아리스타타라면 몰라도, 리아트리스라는 이름이 가진 가치는 없다. 펜은 로단테가 왜 리아트리스라는 이름에 관심을 보이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스의 가치는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는 점에서 파생되는 것이었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 될 수 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지난 몇백년 동안 펜이 그토록이나 노력해왔어도 끝끝내 떨치기 힘들었던 아리스타타의 기억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아스는 카멜이 들고온, 시종이 추천해준 예복을 거절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늘 입던 낙낙한 튜닉과 짧은 망토와 연습용 검을 허리에 둘렀다. 카멜은 굳이 예복을 권유하지는 않았다. 아스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눈부신 빛을 발하는 존재였으니까. 회랑으로 내려가는 몇개의 복도와 계단을 지나며 카멜은 아스의 등에 어제와 같은 두려움과 망설임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의 등은 곧고 발랐으며 바람을 기다리는 흰 돛대와 같아 보였다. 카멜은 아스에게 격려의 말을 건넬까 싶었지만, 곧 관두기로 했다. 회랑의 웅성거림이 뚝 멎었다. 모든 트리옌의 시선이, 회랑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짧은 은발머리 소년에게 집중되었다. 소년은 길고 날씬한 다리를 과시하듯 짧은 튜닉과 허리띠만을 두르고 있었고, 장신구라고는 허리에 매단 짤막한 연습용 검 하나 뿐인 듯 했다. 그는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듯 내려오던 속도와 발걸음 그대로 가볍게 회랑으로 내려섰다. 카멜의 안내로 펜의 맞은편에 준비된 자리에 앉은 그는, 가볍게 좌중을 둘러보았다. 모든 트리옌들은, 이 소년에 대해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잘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여태까지 그와 마주쳤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그들은 은발과 청록색 눈동자에 가려져있던 선명한 소년의 눈썹과 중성적인 매력에 놀라거나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당황은 펜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펜이 높은 목소리로 개회를 선언했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 ... 아리스타타의 환생체, 편의상 리아트리스로 부르겠습니다. 리아트리스는 지난번 축복의 성에 기거할 권한과 교육의 기회에 대한 청탁에 연이어, 에린지움의 방에 출입할 권한에 대한 청탁을 했습니다. 설명해 주시지요. " 아스의 뒷전을 지키던 카멜이 앞으로 나섰다. 좌석에 앉은 트리옌들은 모두 고령이었지만 카멜보다는 적은 나이었고, 카멜과 마찬가지로 변하지 않는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트리옌들은 모두 젊음에 어울리지 않는 눈빛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이 모인 회랑은 묘한 분위기였다. 카멜은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나무가 위에서 뿌리는 내리는 듯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천정까지 닿도록 목청을 높였다. " 여러분들 모두가 아시다시피, 아리스타타님이 돌아가신 후, 저는 그 분을 찾아 무척이나 오랜 세월을 다른 시공과 차원을 헤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계절에 아리스타타님의 환생체를 발견할 수 있었지요. 이 분을 축복의 성에까지 모셔오는데에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다른 세계에 계시던 분이라 많은 부족한 점이 있지만, 그 어떠한 사실도 이 분이 아리스타타님의 환생체라는 진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저는 아리스타타님의 첫번째 묘목으로써, 현재로는 이분의 보호자이자 대리인으로써, 이 분이 당연히 가져야 할 축복의 성 주거권과 교육의 기회를 청탁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에린지움의 방에 출입할 권한을 청탁합니다. " " 질문하십시오. " 여기저기에서 손이 올라왔다. 그 중의 한 트리옌이 발언권을 얻어 일어섰다. " 에린지움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곳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단 한사람, 에린지움의 걸음과 그가 허락한 자 뿐입니다. 청탁한 권한은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의 권한입니까, 아니면 그가 허락한 자로써의 권한입니까? " " 물론,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의 권한입니다. " 그 트리옌이 연거푸 말했다. " 저 소년이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는 사실과,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 " 나는 저 소년이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는 사실 역시 믿을 수 없소! " 답답함을 참지 못한 한 트리옌이 음성을 높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스를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 그가 아리스타타님의 환생체라는 증거는 저 머리카락과 눈동자 이외에는 전혀 없지 않소?! 그가 정녕 아리스타타님의 환생체이고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면, 왜 무스카리에게 자신의 심장을 노출시키는 위험한 짓을 했다는 말이오? 아리스타타님은 심장을 빼앗기지 않고 에린지움의 존속과 트리옌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자결하셨던 분이요! 그랬던 분이 어찌하여...!! 결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손아귀에 들어왔던 숲의 저주 그 무스카리를 저 소년 때문에 놓쳐버리지 않았소! " " 흥분하여 앞뒤도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은 삼가해 주십시오. 원로회의 체면이 상합니다. " 아스를 손가락질하며 외치던 트리옌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한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앉은 로단테를 보고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미간을 구겼지만 입을 꾹 눌러 닫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로단테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카멜은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 로단테...!! " " 오래간만입니다 카멜. " 카멜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외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리스타타의 묘목- 그래서 그는 지난 시간 동안 몇번이나 그를 찾아갔었다. 그는 고령의 존경받는 스피리아였고 카멜과 함께 아리스타타와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힘이 되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전쟁 이후로 스피리아로써 묘목을 돌보는 일에만 치중할뿐 축복의 성에 드나들지도 않고 은거한다는 로단테는 상대가 카멜이라 해도 묵묵부답으로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오늘 회동에 나타난 것이다. 카멜은 그의 의중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아직은 흐릿하고 불분명하기만 한 아스의 입지는,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이었다는 자신이 간신히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리스타타의 또다른 묘목인 로단테가 그의 입지를 부정한다면, 아스와 카멜로써는 상당히 힘들어지는 것이었다. 다갈색 머리카락을 넘겨묶고,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는 가는 눈으로 좌중을 둘러본 후 아스를 바라본 로단테가 입을 열었다. " 그는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임은 틀림없습니다. 첫째로, 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그것을 가장 강력히 증거해주고 있지요. 두번째로, 그가 에린지움의 능력을 통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결계를 풀었다는 것입니다. 허나, 먼젓분이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는 것과,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에린지움의 걸음이 계시니까요. " 좌중이 술렁거렸고, 펜은 아무런 내색을 비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리스타타의 묘목이었던 로단테가, 펜을 에린지움의 걸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에린지움의 걸음은 하나면 충분하다. 둘은 필요없다. 둘은 분열과 혼란만을 불러올 뿐, 에린지움의 약점을 하나 더 늘이는 꼴밖에는 되지 않는다. " 존경하는 원로회와, 스피리아 분들과,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트리옌들께서는, 당연히 저 소년의 존재가치에 의문을 품으실 겁니다. 물론, 이것 역시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는 사실과는 별개의 것이지요.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에 대한 예우로써 축복의 성에 기거할 수 있도록 해주고, 먼 곳에서 온 이방인에 대한 배려로써 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왜 우리가 그에게 에린지움의 방에 대한 권한을 줘야 할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싶습니다, 카멜리아. " 그 불붙은 낙엽들이 너울지던 벼랑 끝에서서, 아스는 마지막 탄식과, 마지막 희망을 담아서 말했다. ' 나 조차도 가진 것이 없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봐. ' 이곳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다. 아무도 자신을 모른다. 하늘도, 땅도, 숲도, 냉정한 시선으로 그를 일별할 뿐. 아스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안스륨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토록이나 뜨겁게 아리스타타를 열망하던 그의 목소리가. 그가 아리스타타의 이름을 부른 순간, 그가 줬던 아스포델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죽었고, 먼 이방인의 세계에서 그는 껍데기만 버려졌다. 허나 그 껍데기마저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이 은빛 머리카락과, 청록색 눈동자는 아리스타타의 것이었다. 그 껍데기마저도 아리스타타의 찌꺼기다. 아스는 자신의 발밑에 자리한 깊은 암흑을 바라보았다. 무너져 주저앉아 있던 카멜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쳐왔다. 그 손은 아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 제가 있습니다. 지금... 지금부터, 저는, 저는 아리스타타님의 첫번째 묘목이라는 이름을 버리겠습니다. 저를 가지십시오. 당신의 것이 되겠습니다. ' 멀리서 까마귀가 울었다. 까마귀의 검은 그림자가 붉은 석양을 가로질러 퍼득거렸다. 아스의 공허한 목소리가 울렸다. ' 나는 이름조차 없어. ' ' 제가 드리겠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름도, 저도, 마음도, 이 세상까지도! ' 카멜은 슬펐다. 이 세상 모두를 가진, 에린지움의 걸음인 그가 아무것도 가진게 없다 말하는 것이 지독히도 슬펐다. 자신의 모든것을 가져간 주제에 아무것도 가진게 없다 말하는 그가 미웠다. 하지만 카멜은, 주고주고 또 줘야만 했다.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줘야만 했다. 그가 아는 진실은 오로지 그것 뿐이었다. 아스의 붉은 뺨을 타고 불타는 눈물이 흘렀다. 그가 알던 안스륨은 이 세상에 없었다. 아스포델이라는 존재와 마찬가지로. 그는 무스카리일 뿐이었다. 숲의 저주,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빼앗고 갈취하고 강탈하는 자. 그가 아스의 모든 것을 가져가버렸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자가,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주겠다고... 바라지도, 원하지도, 가져가지도 않고 그저 주겠다고. 아스는 그 순간을 회상하며 눈을 감았다 떴다. 그때 말했었다. ' 네가 나에게 이름을 준다면, 너를 위해 살겠다. ' " 왜 우리가 그에게 에린지움의 방에 대한 권한을 줘야 할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싶습니다, 카멜리아. " " 내가 원하기 때문이다. " 로단테는 아스를 바라보았고, 카멜도 아스를 바라보았고, 펜도 아스를 바라보았고, 모든 트리옌이 아스를 바라보았다. 아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 내가 원하기 때문이다. " 쿠웅! 어떤 커다란 굉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있을리 없을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펜은 외마디 비명을 깨물었고 로단테는 다시는 그렇게 눈을 크게 뜰 수 없을 만큼 눈을 크게 떴다. 아스의 은빛 머리카락은 물 속에 잠긴 듯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고, 세상의 푸르름을 모두 담은 듯한 청록빛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들어올리 없는 햇살이 회랑안을 기뻐 날뛰었고 사람들은 모든 숲이 크게 호흡하는 소리와 대륙에 부는 모든 바람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향기가 술내처럼 진동하고 모든 계절이 피어났다 사라져갔다. 오랜 목마름에 시달리던 나무가 단비를 빨아들이듯 충만한 에린지움의 기운은 모든 트리옌들과 그 본체들까지 격동시키고 있었다. 축복의 숲 전체를 퍼져나가고도 남을 듯한 그 느낌은, 틀림없는 에린지움의 것이었고, 그들이 수백년만에 맛보는 환희였다. 모든 사람들이 엉거주춤 일어서거나, 바닥으로 나동그라지거나, 입을 벌린 가운데 아스는 회랑의 가장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나에게 에린지움의 방으로 가는 권한을 주면, 내가 너희들이 그토록 원하던 아리스타타가 되어주겠다. " 로단테가 낮으막히 중얼거렸고, 펜이 소리질렀다. " 저희들이 부여하는 권한따위는 필요없지 않으십니까. " " 안돼--!!! " 우웅- 회랑의 바닥이 물결치고, 파도를 일으키며 나선형으로 회전했다. 신비한 움직임이었다. 몇겹으로 일어난 파도는 서로 엇갈리며 나사가 풀리듯 움직였으며, 하늘로 드리우는 에린지움의 흰 그림자가 회랑의 천정에 닿았다. 무스카리는 깊고 조용한 숲속에 서 있었다.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는 숲은 지독히도 조용하다. 그 숲 그늘에 숨어 그는 길잃은 사슴처럼 새벽에 내린 어린 이슬 맺힌 풀잎 사이를 방황하고 있는 한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그만 체구에 새카만 머리카락이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그가 무스카리를 쳐다보았다. 새카만 눈동자가 놀라움이 뒤섞인 반가움에 물들고, 무스카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나와 그에게로 양 팔을 벌렸다. 작은 빛 방울들을 부숴뜨리며 그가 품 안으로 뛰어들어오고, 무스카리는 새카만 머리카락에서 풍겨나오는 숲내음을 깊게 호흡했다. 무스카리가 낮으막히 그의 이름을 부르자 품 속에서 그가 고개를 들었다. 허벅지까지 닿는 긴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싸늘한 청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한다. 잊을수없기에 괴로운 그 얼굴이 차갑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흠칫 놀란 무스카리는 문득 숲 저편에 서 있는 또다른 인영과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부터 드리워진 역광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낯익지만 본 적은 없는 것 같은, 아마도 청년인듯한 그 실루엣에서 막연한 슬픔이 전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무스카리는 눈을 떴다. 오랜만에 자신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나른함이 후두둑 쏟아진다. 무스카리는 자신의 잠을 깨운 반갑지 않은 손님에게 불쾌한 시선을 보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을 태연한 얼굴로 받아낼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하나인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불길한 미모의 청년은 입가에 드리운 가식적인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입을 열었다. " 오래간만이네, 무스카리. 한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히스테리만 부리다가, 갑작스레 뜬금없이 사라져 난 자살기도하도 하러 갔나 싶어 무지 걱정했어. " " 헛소리 마. 내가 죽이면 가장 기뻐할 사람이 너란 것쯤은 잘 알고 있다. " " 그래? 하긴, 아리스타타가 살아있었다면 그녀가 가장 기뻐했겠지만. " 무스카리는 시트를 걷고 일어섰다. 드러난 그의 조각같은 나체는 변함이 없었지만, 레지는 그의 몸 구석구석에 남은 몇개인가의 상처자국을 볼 수 있었다. " 알고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모임이 있는 날이야. 에리카가 오늘 이곳으로 돌아올거다. " " ... " " 너도 느꼈겠지? 이 폭풍의 성채에까지 와 닿은 그 기운을. 에린지움의 흰 그림자가 온 하늘에 가 닿았다. 아스, 그 귀여운 꼬맹이가 카멜과 함께 축복의 성으로 달아난지도 일 여년. 대륙 곳곳에는 아리스타타의 환생체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져있고, 그 흰 성의 발코니에 은빛 머리카락의 사람이 다시 앉아있다고 하지. " " 그래서? " 무스카리는 마법으로 몸을 감쌌다. 자주빛의 튜닉과 검은 망토가 펄럭이고, 레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 에린지움을 연 것이 그 꼬맹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소리야. " 큭, 큭큭. 무스카리는 난데없는 비웃음을 흘렸다. 빙글거리며 웃던 레지의 미소가 멈추고, 낮은 비웃음소리는 어느새 폭소로 바뀌었다. 검은 하늘이 뒤덮인 창문을 때리며 무스카리의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고, 레지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래서? 나의 어떤 반응을 바라지 어릿광대? 내가 그가 다시 에린지움의 힘을 찾아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없게 된 것을 괴로워하길 바라나? 아니면, 다시 아리스타타가 재림한것에 대해 기뻐하길 바라나? " " 너는 그 꼬맹이를 짓밟았어. 안스륨이라는 다정한 사내에게 눈멀어 아무것도 몰랐던 그 아이를. " " 그래서-!!! " 무스카리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레지를 마주했다. 그때, 레지가 펼쳤던 안개의 마법에 걸려든 카멜은 아스를 찾아내지 못했고, 그는 똑똑히 보았었다. 울부짖는 아스를 짓누르던 무스카리를. 그것은 실로 잔인한 광경이었다. 아스는 무스카리에게 몇번씩이나 꿰뚫리면서도 끝까지 저항했고, 자신을 허락치 않았다. 분노에 찬 무스카리가 억지로 그를 끌고 오려 했지만 레지가 그를 방해했기에 그는 아스를 잠깐 놓쳤고, 그것은 영영 잃어버린 것이 되었다. " 내가 몸이라도 뒤틀며,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며 지난날을 후회하고 뉘우칠까? 나의 본성을 가장 잘 아는 것이 네가 아니더냐! 말해봐. 말해봐 레제다. " 레지는 무스카리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뜨거운 욕망과 끊임없는 집착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안스륨이라는 존재는, 결국 그에게는 허상이었다. 레지는 피식, 하고 웃음을 떨어트렸다. 자신의 동복형제는 그 어떤 후회도 두려움도 잘못도 용납치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의 정의는 강함이었고 그는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더욱 더 가지기 위해 그 어떤 짓이라도 하는 자다. 짓누르고, 빼앗고, 억압하고, 굴복시켜 결국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후회하며 슬퍼하기 보다는, 분노하는 것이 무스카리다. " 그래. 너는 무스카리다. " 그저 그녀를 가지기 위해 안스륨이라는 가면을 쓰고, 또 거침없이 그것을 버릴 수 있는 잔혹한 사내. " 숲의 여왕은 내 것이다. 그가 에린지움의 힘을 되찾았든, 걸음이 되든 말든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는 오로지 내 것이고, 그것이 아리스타타라는 이름이든 아스포델이라는 이름이든 개의치 않아. 이번에야 말로 나는 그를 갖겠다. " 레지는 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무스카리는 드리운 자신의 그림자로 시선을 주었으며, 그 그림자는 길게 늘어나며 화르륵 불타올랐다. 레지는 무스카리의 그림자에서부터 몸을 일으킨 거대한 불꽃의 야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 그것은...!! " " 저 트리옌들의 결계안에서 마법의 힘은 약해지고, 정령만이 움직일 수 있다. 이 놈을 잡느라 안드리움의 심연속 불꽃에서 타 죽는 줄만 알았지. 달이 세번 차고 기울동안 흔적을 쫓았고 달이 두번 차고 기울동안 기다렸고 꼬박 사흘간을 싸워 얻었다. 소개하지, 불타는 심연의 정령수다. " 무스카리의 입가에서 짙은 만족감의 미소가 피어올랐고, 그는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올 고귀한 존재를 상상했다. 은빛 머리카락과 청록색 눈동자를 되찾았던 그 모습은 아름다웠었지.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고는 비명을 올렸지만 그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쏟아져 내리는 눈물의 향기는 아득해서 그때의 분노마저 잃게 만들었었다. 무스카리는 자신이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느꼈다. 한번 새장안에서 벗어난 새는 다시 잡아들이기 힘든 법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새를 낚아채 올 맹금을 길들인다면. 그의 그림자에 묶인 야수가 으르렁 거렸다. 아스는 떨리는 걸음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에린지움은 홀의 바닥에 위치한 이공간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스는 자신이 에린지움의 흰 그림자가 닿은 달에서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방의 하늘과 땅은 까마득했으며, 지평선에는 멀리 바다가 있는것처럼 파도같은 포말이 희게 빛났다. 그리고 그 경계선에서 시작된 새파란 푸른색은 위로 갈수록 희어지고, 그 푸른빛이 사라지는 경계에 문이 되어준 하얀 달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에, 한 그루의 거대한 은빛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에린지움의 그림자는 하늘로 뻗어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사르륵 거리며 노래하는 나뭇잎들은 은빛과 푸른빛과 녹색과 회색으로 빛났고 땅과 이어진듯한 가지는 눈이 아플만큼 눈부시고 깨끗한 흰빛이다. 아스는 잠시 망연히 서서 그 거대하고 아름다운 나무를 바라보았다. 아스는 아련한 마음의 상심에 왈칵 눈물이 솟구칠 것만 같았다. 그것은 잃어버렸던 자신의 반쪽이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고향이었다. 먼 꿈속에서, 또렷하지 못한 상상 속에서만 그려왔던 그 나무는 또다른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스의 몸을 휘감는 안온함과 안도감이 그의 상처를 달래는 듯 했다. 아스는 에린지움에게서 위로받았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사랑은 보답받는 것이 아니며, 상처받더라도 버릴 수 없는 그런 것이라고. 너는 어쩔 수 없었다며, 다시 이 자리에 되돌아온 것을 환영했다. 그리고 그 나무의 발치에, 작고 흰 제단이 하나 있고, 유리관이 있었다. 아스는 한참동안이나 그것을 바라보다가,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두근두근 맥박이 고동치고 있었다. 아스는 그 소리가 자신의 귀를 멀게 만들어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유리관의 앞에 섰다. 유리관위에는 에린지움의 가지인 듯한 것이 놓여 있었다. 잎이 없는 그 가지에는 한 송이의 보랏빛 꽃이 피어 있었고 줄기에 가느다랗게 무엇인가가 새겨져 있었다. 아스는 그 글자를 손 끝으로 더듬었다. 언령마법의 흔적인, 고대어로 씌여진 말이었다. 죽어가던 세계를 재생시킨 이 위대한 나무 에린지움을 만들어낸 언령마법은, 이미 사라진 언어였지만 언령마법의 마지막 유산인 에린지움의 나무 밑에서 희미한 능력을 발하고 있었다. 새겨진 것은 가장 존귀한 자, 위대한 자를 뜻하는 카와, 사랑받음과 흠모를 뜻하는 아스였다. 아스는 그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리스타타의 애칭도 아스였던 것이다. 그녀를 애칭으로 부를만한 자가 없었기에 잊혀진 이름이었지만. 사랑스럽다는 의미의. 아스의 손가락은 아리스타타의 얼굴 쪽으로 옮겨갔고, 유리관에 가로막혀 닿을 수 없음에도 그녀의 얼굴을 그리듯 손가락의 끝은 가냘픈 선을 따라 그렸다. 자신과는 판이하게 다른 선이었다. 가냘프지만 우아하고, 연약하지만 강인한 곡선. 아리스타타의 얼굴은 평온하고, 약간 슬퍼보였다. 이 여인이... 자신의 전생. 에린지움의 걸음. 숲의 절대자. 은빛의 여왕. 그리고... 무스카리가 사랑했던 여인. 꽝-! 멀리로 아스의 주먹이 유리관을 때린 소리가 울려퍼져나갔다. 하지만 아스의 낮으막한 중얼거림은 울려퍼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작고, 너무나도 침통한 것이었기에. " 다, 모든것이 다, 당신때문이야... " 펜은 털썩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아스가 들어가버린 에린지움의 문은 단단히 잠겨 열리지 않았다. 에린지움의 느낌도 한층 멀어진 것 같았다. 펜은 불안함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펜이 에린지움의 입구를 열지 못하는 것을 본 많은 원로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펜은 머리카락을 걷어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 그가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었지요. 그가 이 문을 열 수 있었던 것도 단지,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진실이예요! 그는 다만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일뿐, 이 세계에 대한 아무것도, 자기자신의 전생인 아리스타타의 기억도 없는 평범한 소년일 뿐입니다! 지금 그에게 기대를 걸어서 남는게 무엇이죠? 그는 용족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심장, 즉 에린지움의 유일한 약점을 하나 더 늘리는 꼴밖에 남지 않는 대상입니다! " " 그렇다해서, 그를 죽이기라도 할 겁니까? " 펜은 로단테를 돌아보았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말을 이었다. " 우리는 그를 죽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 그가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이기 때문에. 그를 죽일수도 없고, 그를 어디엔가로 추방할 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존재이기에. 죽이지도 버리지도 못한다면 그를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 펜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 어떻게 말인가요?! 둘이나 되는 에린지움의 걸음으로 말입니까!! " 그때, 잠잠히 있던 카멜이 입을 열었다. " -우리들의 결정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들이 준 권한에 관계없이 에린지움의 문을 열었듯, 그분은 우리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실 겁니다. 그 말은, 우리들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스스로 결정하시고, 행동하실 겁니다. " " 내가 허락치 않아요!! " 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카멜의 말을 가로막았다. " 그와 같은 에린지움의 걸음인 내가 허락치 않을 거라구요! " 카멜은, 펜을 보고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당신은 모르시는군요. 아스님과 당신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펜 오키드님이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셨듯, 그 분도 그러하실 겁니다. 누군가의 허락이나 거부는 의미없는 일입니다. " 그때였다. 갑자기 펜이 서 있던 홀의 중앙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놀란 펜이 뒤로 쓰러졌고, 월이 황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그리고 거기에 있던 모든 트리옌들이 놀랄만한 경악을 느꼈다. 그 불길은 정령이었다. 불길 사이에서 희끗희끗 모습이 스쳐지나가는 것은 틀림없는 정령이었다. 하지만 나무인 트리옌들은 자신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불의 정령은 부릴 수 없는 존재였다. " 대체 누가... ...!! " " 인간인가? 수인족? " " 정령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트리옌밖에 없다! " 불길은 몸을 뒤틀며 자신의 크기를 키워나가며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나갔다. 끊임없이 솟구쳤다 무너지고 불타올랐다 흩어지는 그 움직임 속에서도 카멜은 그것이 누구의 모습인지를 알 수 있었다. " 무스카리-!!! " 홀 전체에 경악으로 숨을 들이키거나 비명소리가 들어찼다. 불길로 이루어진 무스카리는, 실제 자신의 머리카락과도 같은 븣깔인 불꽃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서히 눈을 떴고, 그 일렁이는 금빛 동공이 카멜을 응시했다. 카멜은 신음과도 외쳤다. " 용족인 네놈이 어떻게 정령을... ...!! " - ...오랜만이군 카멜. 무스카리는 입가에 미소를 걸쳤고, 카멜은 그 눈이 무의식적으로 홀을 훑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잠깐 펜의 은빛 머리카락에게로 가 닿았고, 펜은 그의 일렁이는 시선에 입술을 깨물며 몸을 떨었다. 허나 푸확-! 하고 그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터져나오며 감정이 실리자, 그녀는 턱을 부르르 떨며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무스카리는 실망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짓고는, 다시 카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늘 그렇지만, 오늘도 그대에게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하게 될 것 같군. 카멜은 이를 으득, 갈았다. - 선전포고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우리는 에린지움의 걸음의 심장을 갖기 위해 진군하겠다. 대륙전쟁의 재개전을 알리겠다. 소리없는 경악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무스카리는 그 침묵을 귀로 들으며 새어나오는 공포와 분노를 즐겼다. 카멜의 눈동자 역시 분노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카멜은 무의식적으로 정령을 불러모았고, 그의 주변으로 새하얗게 몰려든 물의 정령들이 공기를 식히며 안개를 만들어내었다. " 빼앗길줄 아느냐? " 무스카리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 빼앗는다는 표현은 적절치 못해. 그것은 원래 나의 것이었으니까! 하하하... 촤악--!!! 구름을 만들정도로 몰려들었던 물의 정령들이 일시에 불꽃으로 이루어진 무스카리를 덮쳐 들어갔다.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공기가 맞부딪히는 격렬한 소리가 울리고 갑작스런 열과 폭음이 엄청난 증기와 함께 피어올랐다.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숙였던 사람들은, 이윽고 증기가 나무의 뿌리모양을 한 홀의 천정으로 올라가며 어느정도 걷히자 앞을 볼 수 있었다. 보이는 것은 불꽃의 무스카리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짙은 그을음과, 증오로 몸을 가볍게 떨고 있는 카멜이었고, 남은 공간을 차지한 것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쿠르르르르르------ 광장에 모인 용족들의 열기를 대변하듯, 안드리움의 거센 불길이 으르렁 거렸다. 이렇게나 많은 용족이 모여든 것은, 지난 대륙전쟁의 개전을 알렸던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때에도 무스카리는 이렇게 광장의 앞쪽으로 자리한 탑 꼭대기에 서서, 자신을 응시하는 수많은 빛깔의 눈동자들을 응시했었다. 지금 역시도 무스카리는, 그것들을 응시하며 수많은 용이 뒤엉킨 모양을 한 탑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많은 용족들은 수백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자신들의 제왕이자, 누구보다 강한 자를 바라보고 모여들고 있었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용족들을 물리치고, 숱한 아내들을 스쳐, 이윽고 골드 드래곤 에리카에게 도전했던 자. 그가 골드 드래곤 에리카의 아들이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용족들 사이에서 핏줄이나 혈연은 큰 의미가 없었기에. 다만 용족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스카리가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레지도 그들 틈에 섞여 있었다. 용족들은 어떤 질서를 가지고 모여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용족만이 들을 수 있는 전언으로, 에리카가 소집을 명했고, 그것은 강제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무스카리가 돌아왔다는 이야기에 깊은 화산 속에서, 설산에서, 바다밑에서 수많은 용족들은 모여들었다. 안드리움에 자리한 이 드넓은 광장에는 젊고, 연륜있고, 애꾸이거나 혹은 외팔이거나, 붉은색이거나 혹은 푸른색이거나 한 숱한 용족들이 서거나 앉거나하며 두서없이 모여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안드리움의 불꽃속에서 태어난 용의 불타는 듯한 머리카락이 그 열기에 흩날리는 것을 보았다. 무스카리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것만으로 소음이 가라앉고, 안드리움의 사나운 불길조차 잠잠해진 느낌이 든다. 레지는 탑의 꼭대기에 선 자의 위용을 비웃을 수가 없는 자신이 싫었다. 그는 무스카리에게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애써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이윽고 무스카리의 목소리가 화산재를 뚫고 울려퍼졌다. " 우리는 싸운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기에---! " 함성 따위는 터지지 않았다. 무스카리도 과장된 제스츄어를 취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직한 자신의 칼자루를 붙잡고, 짧게 외쳤다. " 우리는 에린지움의 심장을 가질 것이다! 그것이 본래 우리의 것이기에!!! "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용족들은, 레지까지도, 그들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열기와, 살의와, 싸우는 자의 잔인한 본성이 으르렁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말없는 소리를 대변이라도 하듯, 무스카리의 그림자속에서 불타는 심연의 야수가 이글거리는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었고, 안드리움의 화산이 폭발하는 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울부짖었다. 2차 대륙전쟁이 개전되었다. 흐린 하늘이 하얗게 빛나던 성벽을 회색빛으로 물들였다. 당장이라도 그곳에 검은 자욱을 새길 것만 같은 구름은 우울하게 꿈틀거렸지만, 멀리 언덕과 둔덕으로는 이따금 한 여름의 저녁 햇살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시원스런 바람이 성의 안쪽으로 우울하고 텁텁하게 뭉쳐져 있던 습기를 날려주는 듯 했지만, 그것을 그렇게 맘놓고 기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장마가 끝나가고 있었다. 짧고도 길었던 초여름의 때, 용족들은 선전포고를 하자마자 순식간에 드라세나의 바로 코앞까지 진격해왔다. 원래부터 뛰어난 전투력에, 결계 안에서도 소용없는 정령수를 부리는 선봉의 무스카리 덕분에 제대로 전열조차 가다듬지 못한 트리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용족들은 지난 대륙전쟁때 그들의 발목을 물고 늘어졌던 드라세나 앞에서 주춤했으며, 첫 패배를 안았고 때를 맞춰 찾아든 장마에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하늘을 날며 대부분이 안드리움의 화산속에서 태어나는 용족들은 억수같은 비에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반대로 장마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트리옌들은 그 틈을 타 무사히 드라세나 외곽쪽의 숲에 진영을 마련했고 정령들을 운용한 기습전으로 몇차례나 거듭 승리를 거두었다. 굽굽하고 후덥지근한 장마비 속에서는 인간병사들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몇차례나 거듭된 승리로 사람들은 장마가 끝나는 것을 그다지 반길 수 없는 처지였다. 지금 성의 안마당에 빼곡히 천막을 치고 자리한 병사들은 태연한척 음식을 먹거나 칼을 갈고 있었지만 몇몇 병사들은 애써 태연한 듯 개어오는 들녁의 먼 하늘을 힐끗 힐끗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병사들 틈을 등에까지 닿는 갈색의 꽁지머리가 누비며 다니고 있었다. 내재적인 불안을 품은 병사들의 어딘지 모르게 침중한 심기와는 달리 가벼운 발걸음 이었다. 천진한 빛을 머금은 호박색 눈동자는 누군가를 찾는 듯 끊임없이 내성입구쪽을 훑고 있었다. 막 소년기를 벗어나고 있는 드라세나의 왕자, 제피란더스 드라세나는 이윽고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목소리를 높였다. " 아스-!! " 하지만, 곧 돌아보는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 대하자 그 위화감에 제피는 잠시 멈칫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변했을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자신만큼이나 키가 크고 한층 날카로워진 턱과 눈매 같은 것은 모르던 사실이다. 게다가 제법 먼 거리에서도 확 눈에 띄는- 뭐랄까. 매력이라고 하는 어떤 분위기가 그의 주변에 명확하게 감돌고 있었다. 그 전의 아스가 숨겨진 보석이라고 한다면, 지금 제피앞에 자리한 아스는 날카롭게 다듬어진 다이아몬드같은 존재였다. 제피는 아스가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이며,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부담감을 지우려 애쓰며 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스가 그의 손을 마주잡으며 웃자, 제피는 그의 눈동자에 그가 알던 아스의 예전의 순수함을 발견하고는 함박 웃음을 지었다. " 어떻게 지냈어? " " 그럭저럭. 배울게 많아서 고생 좀 하고 지냈지. 넌 전혀 변한게 없네. " " 응. 그에 비해서 너는 못 알아 볼 정도로 변했군. 흐음, 하지만 나의 아리스타타님이라고 하기엔 의심스러운데? 이거이거, 우리 드라세나 광장의 석상이 더 예쁘잖아. 역시 남자라 그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거냐-!! " " 하하. " 아스는 제피의 허물없는 농담에 웃었다. 한편으로는 놀라움도 느꼈다. 자신의 앞에서 이렇게나 태연하게 아리스타타와 비교하며 가볍게라도 농담을 던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아스는 그런 제피의 말에 자신이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 스타티스는? " " 스티? 그녀석은 정식 기사단원이 되어서 오즘 눈코뜰새 없이 바빠. 일단은, 나의 호위같은것 까지도 죄다 접어놓고 있을 정도니까. 다시 시작된 대륙전쟁이라고는 해도, 수백년전의 일인거잖아. 덕분에 그는 기사단장에게 꽉 붙들려서는 군의 편성이니 지원군의 배급문제니 용병의 수급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 만나봤자 헛소리만 할거야. " " 그래? " 두 사람은 내궁으로 들어가는 짐마차에 잠시 자리를 비켰다. 말들을 먹일 건초는 뒷문으로 들어가야 할 터였지만 뒷문으로는 무기를 실은 짐마차가 가득이라 도무지 들어갈 구멍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궁의 반짝였을 포석위로는 병사들이 주저앉거나 누워있거나 하며 도박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고, 천막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소란과 인기척은 불안과 흥분에 휩싸여 시끄러웠다. " 일단 내 궁으로 가서 차라도 한잔 하자. 그냥 오면 될텐데 굳이 이런 어수선한 곳에서 만나자고 한거야? " 아스는 눈으로 웃었다. " 내 존재가 너한테 불편한 것 쯤은 잘 알고 있어. 지금은 전쟁준비로 정신이 없지만 황태자가 쥬니퍼 가문의 독자를 호위로 거느린 너를 탐탁찮게 생각하잖아. 스타티스도 바쁘다는데, 굳이 너와 내가 친분이 있다는 것 까지 알려서 괜한 위험을 부를 필요는 없지. 괜찮다면 좀 지저분해도 내가 있는 막사로 가지 않겠어? 우리 조는 도무지 막사에 머무르는 것은 모르니까. " " 조라니? " 제피가 문득 의문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아스가 지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전쟁에 참전했다면 어떤 형식으로든지 군에 소속되어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리 숫자가 많지 않은 트리옌들의 군에 조로 이루어진 단위는 없다. 조로 이루어진 단위는 일반적으로 용병들이었다. 제피는 그러고보니 아스의 차림새가 정규군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아무런 문장이나 표식도 없는 특색없는 갑옷에 트리옌군이라는 증표로 어깨쪽에 딱지가 하나 붙어있을 뿐이었다. " 난, 이번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해. 락시움 용병단 5조지. " " 뭐어-?! 미쳤어?! " " 너, 너, 용병들이 뭘 하는 건지나 알고 거기에 있는거야? 아니, 애초에 널 용병단에 넣어준 것 자체가... 아니지! 대체 트리옌들은 너를 용병단에 들어가도록 놓아둔것이... 참전하는 것 조차도 말려야 할 판국에 군에도 넣지 않고 용병단이라니!! " " 그만, 그만 흥분해. 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어 그런거니까. 일단 우리 막사로 가. " " 지금 흥분 안하게 생겼어? " " ... " 아스는 대꾸 대신 주변으로 시선을 주었고, 그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훑어본 제피는 어디든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를 가린답시고 허술한 가죽투구를 쓰고 있기는 했지만 길이는 짧아도 선명한 그 은빛은 도드라져 보였고 그의 청록빛 눈동자나 날씬한 몸매나 모든것이 주변의 관심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이번 전쟁에 참전한다는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고, 몇몇 호기심 강한 자들은 그를 보기 위해 일부러 트리옌 군단의 근처를 어슬렁거리기도 했던 것이다. 소수의 귀밝은 자들은 아스가 용병으로 참전했다는 그다지 신용없는 이야기도 알고 있었고 믿지 않고 있었지만, 통일성없는 허름한 가죽갑옷을 입은 아스의 모습을 보고 그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피는 일단 아스가 이끄는 대로 내성을 지나 광장을 지나고 외성의 끄트머리 언덕 아래 즈음 자리한 용병대가 막사를 지은 곳으로 갔다. 몇 개인가 조잡한 용병단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고, 대륙의 승패가 갈리는 일인만큼 유명한 용병단의 이름난 문장이 새겨진 깃발들도 눈에 띄였다. 락시움 용병단도 그 중 하나였다. 락시움 용병단을 상징하는 입에 칼을 문 늑대는 돈을 받고 일하는 용병들이지만 우리를 개 취급 말라는 정중한 권고가 포함된 것이었다. " 아스님-!! " 그 깃대가 세워진 곳 밑에서 한참 대련을 하고 있던 두 사람중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아스를 불렀다. 트리옌이었다. 밝은 금발에 선명한 녹색 눈동자. 제피는 트리옌들 중에서도 눈에 띌 미모를 지닌 그 남자를 보고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카멜리아 버베나.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이자, 트리옌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이자, 지난 대륙 전쟁때 날개 살해자라는 암묵적인 별칭을 가지고 있는 트리옌. 아리스타타의 죽음을 지켰으며 그녀의 환생체인 아스를 이 세계로 데려온 장본인이다. 제피는 나라의 고위층과 일부 비싼 정보만을 파는 자들 사이에 전해진 이야기를 떠올렸다. " 제가 저와 함께 가셔야 한다지 않았습니까, 혼자서 그렇게 다니시면...! " 깡!! 대련이라고는 하지만 진검이다. 그 사실을 상기라도 시키듯 상대방이 카멜의 검을 때렸고, 카멜은 말하는 도중 퍼뜩 자세를 고쳐잡고 팔에 힘을 주었다. 카멜과 대련하는 남자는 수인족이었다. 회색빛의 짧은 머리카락에 무척이나 과묵하게 보이는 얼굴을 한 거구의 사내였다. 아스는 다시 용병단장의 동생이자 조장과의 대련에 집중하기 시작한 카멜을 내버려 두고 제피와 함께 막사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은 그는 짐보따리를 가리키며 제피에게 앉기를 권유했다. " 방금 저 분은 카멜리아겠지? " " 응. " " 나 참-! 그렇다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 대체 왜 군이 아닌 용병단인거야? 용병단을 고용하는 주된 목적을 알고 있잖아? 가장 선봉에서의 칼맞이라고! 아리스타타의 환생체가 용병단에 들어갔다가 칼침맞아 죽는다면 역사는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그 사실을 남기지도 못할거야! " " 진정해. 나도 개죽음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하지만 어떻게든 전쟁에는 참전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용병단에 들어오는 수 밖에 없었는걸. " " 그게 무슨 소리야?! " 아스가 무스카리가 전해온 2차 대륙전쟁의 선전포고를 알려온 소식을 전해들은 것은 에린지움의 방을 나온 직후였다. 이미 홀에 모여있던 트리옌들은 자신들의 놀란 가슴을 추스리기 위해 거처로 돌아가거나, 전쟁준비를 위해 재빨리 나이트들과 군사가 될만한 스피리아들을 부르는 펜을 따라 대화하기 편한 회의장으로 옮긴 뒤였다. 아스는 에린지움의 방에서 얻은 복잡한 감정에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던 카멜을 외면하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곧 입을 연 카멜의 말에 우뚝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 ... 뭐라고? 지금? " " 용족이 선전포고를 해 왔습니다. 2차 대륙전쟁이 시작 된 겁니다. " " 그게 무슨... 무슨 소리야? 2차 대륙전쟁이라니! 그렇다면... " " ... 어쩌면 이리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스님이 이곳에 오신 그 순간부터. 무스카리... 무스카리 그 증오스런 놈은, 아직도 단지 자신의 이기심과 종족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에린지움의 걸음의 심장을 빼앗겠다고 했습니다! " 무스카리.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지끈 울린다. " 전쟁... ... " " 생각하기 싫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수많은 묘목들이 불태워지고, 아리스타타님이 돌아가셨던 그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니... " 카멜은 괴로운 듯 고개를 떨구며 미간을 찌푸렸다. 수백년전의 일이라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귓전을 울리는 비명, 쇠와 살이 섞이는 소리, 숲이 불타는 고통, 누구 할 것 없이 살육자가 되어야만 했던 숱한 밤. 그리고, 그리고. 무스카리의 발치에 몸을 무너트리던 아리스타타. 카멜은 주먹을 꾹 쥐었다. 고통스런 기억으로 얼룩졌던 그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이기겠습니다. 지켜보이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죽일겁니다! " 아스는 눈동자는 황망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를 죽여 아리스타타의 복수를 할건가 카멜? 아스는 그 이름을 자신의 앞에서 부르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허나 그 전에 그를 죽이지 말아달라고도 말하고 싶었다. 그를 죽이면, 그가 가져가버린 자신의 마음도 죽어버릴까봐. 아스는 자신의 참전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카멜은 지휘자격인 천부장의 자리를 완강히 거부했고, 소규모의 전투전을 직접 치뤄야할 백부장이 되었다. 아스는 카멜에게 자신을 카멜의 부대에 넣어달라고 말했지만 카멜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했다. " 아시잖습니까. 그들이 노리는건 아스님이십니다. 어디 먼 곳으로 몸을 피하셔도 안전치 못할 마당에 전장에 나가시겠다니, 그런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 " 그래서, 나를 부대에 넣어주지 않겠다는 거냐? " " 예. " 아스는 미련없이 돌아섰다. 백부장은 그 외에도 수두룩했고, 아스는 묘목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졌고 카멜의 지도를 직접받은 자신을 거절할 다른 부대는 없을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미 펜이 아스를 그 어떤 곳에도 소속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후였고, 카멜 역시 그를 전장에 내보내지 않을 심산이라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용족의 가장 첫번째 목표가 될 아스를 자신의 부대에 넣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어디든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 생각한 아스는 당장 짐을 쌌다. "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 " 드라세나로 간다. " " 인간들의 나라로 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원군을 받더라도 아무도 아스님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축복의 성에서 머무르십시오. " " 난 정규군에도 지원군에도 가지 않아. " " 무슨 말씀 이십니까? " " 난 용병단에 들어가겠어. 돈을 받고 움직이는 놈들이니, 나를 참전시켜 주는 대신 그만한 댓가를 주면 돼. " " 말도 안되는 소리 마십시오! 못 가십니다! " " 나를 막는다면 억지로라도 가겠어! 비켜!! " 카멜은 아스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워서 전쟁에 참전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으로는 절대 내보낼 수 없다. 무스카리의 눈에 띄지 못하는 곳, 에린지움의 방같은 곳에 꼭꼭 숨겨두고, 전쟁이 끝나고 자신이 무스카리의 목을 베어버릴때까지 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아스를 차분히 달래기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쳐든 질투가 너무 돌발적이었다. " 전장에서라도 그를 보고 싶으신 겁니까? " 아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카멜은 갑작스레 자신의 몸을 친 압력에 문 저 밖으로 내동댕이 쳐졌고, 자신이 실수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아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코니로 달려가 뛰어내렸다. 첨벙!하고 물이 튀기는 소리가 들리고, 카멜이 황급히 난간으로 가 밑을 쳐다보았을때엔, 아스는 이미 에린지움의 힘으로 숲에서 자신의 흔적을 감추고는 가버린 뒤었다. " 그래서, 정말 돈으로 여기에 들어온거야? " " 아니, 내가 그런 돈을 갖고 있을리도 없고, 그런식으로 참전해서야 제대로 싸울 수 있을리도 없잖아. " 결국 백부장이고 나발이고 다 걷어차고 카멜은 애걸하며 아스를 따라왔다. 그리고 드라세나에서, 전쟁을 위해 곳곳에서 몰려드는 지원병이며 용병들 틈바구니에서 락시움 용병단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락시움의 용병단장은 수인족으로써, 회색늑대족으로 일곱뿐인 조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 전과는 찬란한 사내였다. 그는 느닷없는 아스와 카멜의 출연과 더욱 더 느닷없는 입단 희망에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 용병단 다 말아먹을 일 있어? " " 폐는 끼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나의 실력부터 보는게 어때? " " 글쎄? 흐음. " 아스는 자신의 앞에서 까끌까끌한 턱을 쓰다듬는 용병단장을 관찰했다. 그는 험난했던 과거의 소문이며 눈부시며 기록적인 전투를 치뤘던 장본인 치고는 무척 왜소하고 느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스는 자신의 장기인 정령을 운용한 빠른 검법으로 그를 공격해 놀래켜줄까 하고 생각했지만, 검손잡이에 손을 가져다대자마자, 자신의 목깃에 와 닿은 서늘한 쇠의 감촉을 느낄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긴장감 없어 보이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찼고, 아스는 그가 자신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는 동시에 카멜 역시 그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는 순순히 검을 거두어들였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이 날개 살해자-가 부록으로 온다면 받아주지. 내 이름은 베르베리스다. 베리라고 불러. 베스라고 부르면 죽는다. " " 그렇다해도 굉장한 담력의 사내군. 베르베리스라면 대단한 남자야. 락시움 용병단이 시간백작의 반란때 그 반란군을 저 일곱개의 조만으로 몰살시켜버리다시피 한 이야기는 유명해. 무시무시한 베스라는 웃기지도 않는 별명이 있지. 본인 앞에서는 절대로 부를 수 없는 별명이지만. 아무튼 그가 왜 너를 받아들여줄 마음을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절대 찬성할 수 없어. 너는 너의 입장을 조금도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아. 너는 에린지움의 걸음이고, 절대로 죽어서는 안되는 존재란 말이야! " 아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 절대로 죽어서는 안되는 존재는 아리스타타였겠지. 지금은 펜 오키드가 있어. 나는 절대로 죽어서는 안되는 존재가 아니라 심장을 빼앗기면 안되는 존재야. 하지만 정확히 어떤건지 나도, 상대도 모르는 심장 따위 때문에 웅크리고 숨어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 지껄이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어. " " 그야 뭐, 예의 그 심장을 빼앗긴다는게 정확히 어떤건지는 모르지만... 에린지움의 걸음인 너라면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 " 나도 몰라. 그것이 무엇인지. 아리스타타는 그것이 뭔지 알고 있었으니까 심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결했겠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형태로 집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그녀가 납치되어 간지 거의 일여년 동안은 심장이 안전했다는 소리니까. 나는 그것이 언령 마법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어.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가라앉는 것이 있는 것 처럼 에린지움과 트리옌을 만들어낸 언령 마법의 결점이랄까, 당연한 결과랄까... 하지만 그런 이야기 만으로는 정확히 어떤것이 심장이고 뺏긴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어. " " 용족들도 그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적장인 무스카리는 한번 아리스타타의 심장을 빼앗을뻔한 사람이야. " 아스는 손에 깍지를 끼고 턱을 얹었다. 과연 그는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아니다. 그가 만약 알고 있다면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을 억지로 꾀어 결계밖까지 데리고 가려 했을리 없다. 그가 사랑했던것이 아리스타타라고는 하지만, 나는 단지 그녀의 환생체였고, 처음부터, 그러니까 그가 대륙전쟁을 일으키고 아리스타타를 그렇게만든 궁극적인 목적은 그녀의, 에린지움의 심장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 무스카리는 어떻게 그녀의 심장을 뺏으려 했을까. 홀로 치는 북소리는 외로웠다. 둥- 둥- 둥- 둥- 심장의 고동소리와도 같이 아득하게 하늘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는 죽음을 대면할 자들의 것이기에. 죽음을 대면할때 사람은 누구나 혼자일 수 밖에 없다. 날씨는 약간 흐린 편이었지만 비는 완전히 멎었고 텅빈 밀밭과 진흙길위로 어지럽게 찍힌 많은 발자국위에 채 마르지 못한 빗물이 고여 있었다. 드라세나의 성벽위로 음울한 구름들이 자욱을 남기며 흘러가고, 남은 여인들은 근심어린 얼굴로 먼 구릉너머로 도열한 자신들의 남편과 아들들의 무사를 기원하고 있었다. 남은 구름들을 걷어가려는 듯 높이 깃발이 흔들렸다. 지휘자는 도열해 선 병사들을 가로질러 뛰어가며 깃발을 흔들었다. 그가 내뱉는 우렁찬 목소리가 귓 속을 울리고, 일시적으로나마 터질 듯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를 잊게 만들었다. "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던 한 여인을 알고 있다---!! 그녀가 목숨을 바쳐 지켰던 것을-! 다시 저 무도한 자들의 손에 건넬 수는 없다-!!! " 함성소리같은 것은 너무나도 무거운, 그리고 격렬한, 폭풍전야와도 같은 침묵에 싸여 터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스는 전쟁을 겪지 못한 지난 삼백여년 세월 사이에 태어난 기사들 대신, 과거 거대했던 대륙전쟁의 기억을 가졌을 그 나이든 트리옌의 표정에서 피냄새를 맡았다. 그는 필시, 현재가 아닌 수백년전 그 전쟁터 한가운데에 서 있을 것이다. " 세계를 창조한, 위대한 에린지움의 걸음 밑에서, 우리는 오늘 승리한다----!!!! 기마부대! 진군!! " 앞선 기병들이 말들의 옆구리를 가볍게 걷어차고, 2인 1마로 이루어진 부대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말의 고삐를 잡은 것은 인간이었고, 뒤에서 장창을 쥐고 있는 것은 트리옌이었다. 말들이 고요한 공포와 흥분을 걷어차며 말발굽을 울리자, 적진에서 마법의 빛이 터지며 진이 떠올랐다. 그 마법진은 일시적으로나마 결계의 힘을 약화시켜 용족의 폴리모프를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불볕 사막의 일족, 페나카이트의 오리어군과 수인족 부대 사이사이에 섞여있던 용족들의 등에서 커다란 날개들이 피어오르고, 그들은 홰를 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많은 용족들이 일으키는 날개바람에 풀잎과 그에 맺혀있던 빗방울들이 튕기고 트리옌과 드라세나 연합군은 한층 하늘이 더 어두워 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곧 계속 홀로 울리던 북소리가 멎고, 지휘자가 들고있던 진분홍과 진녹색이 그려진 깃발이 흔들리자 진격나팔이 힘차게 울렸다. 지휘자가 진격을 외치는 듯 했지만, 그 소리는 그때까지 엉겨있다가 터져나온 함성과, 거센 말발굽소리에 곧 묻혀버렸다. 진흙이 튀고, 사람들은 하늘위에서 내리꽂히는 발톱에 이를 악물었다. 으아악!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첫번째 비명이 울리고, 트리옌들은 자신들을 향해 날선 발톱을 내리찍는 용족들에게 장창을 던졌다. 퀴에에엑--- 하늘을 울리는 용족의 비명소리와 함께, 한 용이 장창에 날개를 맞아 땅으로 추락한다. 곧 창을 던지고 땅으로 내려섰던 트리옌들이 그를 덮치고, 단말마의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한채 그것은 검에 난자당했다. 붉은 피가 튀고, 그것은 포도주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들고 있었다. 습한 진흙내와 뒤섞여 짙게 피어오르는 피비린내에 아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스의 곁에 서 있던 카멜이 괜찮습니까? 하고 물었지만 아스는 말없이 손으로 잠깐 이마를 짚었다. 에린지움이, 땅으로 스며드는 피냄새에 아우성치고 있었다. 아스는 몸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며 앞에서 깃발을 곧추세운 지휘관을 쳐다보았다. 깃발이 흔들리고, 진격나팔이 울린다. " 좌용병대! 우회하여 진격한다!!! " 락시움 용병단이 포함돤 좌용병대가 걸음을 떼자 기마부대 뒤에 서 있던 궁수부대에서 비같은 화살이 하늘을 꿰뚫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화살을 본 용족들이 재빨리 더 높이 날아오르거나 옆으로 빠져 화살을 피했고, 미처 그러지 못한 몇명은 화살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제 2열이 다시 화살을 쏘자, 정령을 부리는 후방의 트리옌들이 화살에 바람의 힘을 실었다. 화살은 그들의 사정거리 바깥에 있던 적군에게까지 미쳤고, 바람의 힘을 더해 갑옷을 찌그러트리는 위력을 발휘한 화살에 많은 자들이 거꾸러졌다. 화살의 밑을 지나 일시에 빈 전장을 꿰뚫고 좌 우 용병대가 만났다. 베고 죽이는 것에 누구보다 익숙한 용병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활약할 무대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로 날아오른 용족들은 기마부대와 궁수부대를 지원하는 정령부대에게 발이 묶였고 적진은 방금 날아든 화살에 큰 타격을 입은 참이었다. 흉터가 있고, 뼈를 달고, 문신을 한 많은 사나운 용병들은 짓궂은 것 같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이 애용하는 도끼, 쌍칼, 작살따위를 쥐었고 곧 거센 소리를 지르며 돌격했다. 콰다다당! 갑옷과 무기와 방패들이 무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스는 그때까지 긴장감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가,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덮쳐들어오는 억센 오리어군인을 발견하고 순간 굳어버렸다. 피냄새와 소음이 어지러웠고, 아스는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커다란 샴쉬르에 급히 검을 쳐올렸지만 늦었다. 아스는 눈을 질끈 감았고, 고통 대신 끄헉, 하는 짧은 비명을 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때엔 카멜의 긴 장검이 오리어인의 피를 털어내고 있었다. " 정신차리십시오! 여긴 전쟁터입니다! " 그래. 여긴 전쟁터. 사람이 죽고 죽이는 곳. 하지만 아스는 도무지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방금전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오싹한 흥분과 긴장감은 온데간데 없고, 현실감이 들지 않는 듯 멍했다. 아스는 사방에서 난자하는 피가 자신의 몸에 그대로 스며드는 것 같다고 느꼈다. 붉은 피를 볼수록 팔다리를 무겁게 만드는 무력감. 아스는 현재 결계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리려 애쓰고 있는 펜의 상태도 자신과 마찬가지이고, 그것은 대지에 스며드는 피에 대해 절대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는 에린지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아스님! " 찰싹! 카멜이 가볍게 자신의 뺨을 때렸다. 아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검을 집어들었고, 카멜이 또다시 자신에게 덤벼드는 수인족 하나를 베었다는 것을 알았다. 카멜에게 짐이 되고 있다. 아스는 자신이 전쟁터에 나오겠다고 억지를 부렸음을 깨닫고는 다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곧 어깨로 날아드는 샴쉬르를 막아내고, 아스는 자신의 앞에 자리한 적군을 마주대했다. 얼굴을 제대로 볼 겨를도 없이 아스는 그동안 익혀온 배움에 따라 곧장 검을 내찔렀고, 그것은 이상한 느낌을 손안에 전하며 적의 배를 관통했다. 아스는 순간 몰려오는 구역질과 오싹함에 자기도 모르게 정령으로 상대방을 튕겨내버렸다. 그때였다. 화르르르르르르-------------------------- 불꽃이 공기를 태우는 소리. 뒤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후끈 끼쳐오고, 아스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덩어리의 불꽃이 기다란 불꽃의 꼬리와 강철로 이루어진 불타는 앞발을 휘둘러 가며 퍽퍽 병사들을 튕겨내고 있었다. 암흑과도 같은 시커먼 입안에 머리가 물린 병사 하나는 참혹한 비명을 지르다가 곧 온 몸이 불탔고, 그 불꽃의 짐승은 곧 맛없는 것을 먹었다는 듯 퉤! 하고 그 시체를 뱉어내었다. 검게 그을린 시체가 바닥으로 나뒹굴자 적군이고 아군이고 할 것 없이 두려움에 물러서고, 그것은 성큼 뛰어 다시 연합군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저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확인하듯 카멜이 중얼거렸다. " --저것이, 불타는 심연의 정령수!! " 무스카리가 간신히 붙잡았다는, 무저갱의 어둠과 불꽃속에 숨어있던 야수. 정령수는 같은 속성의 정령을 부릴 수 있는 짐승이었다. 정령의 특징이 그러하듯, 제멋대로에 오만하고 변덕스럽기 그지 없어 누군가의 것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스카리는 그것을 붙잡아 자신에게 구속시켰고, 저 정령수로 결계안에서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신들의 약점을 크게 보완하고 있었다. 푸후-! 불꽃이 피어나고 곧 도화선을 타고 번지는 것 처럼 사방팔방으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어느사이엔가 적군은 정령수의 뒷편으로 퇴각했고, 멀리서 후퇴를 알리는 목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아스도 뒷걸음질을 쳤지만, 곧 멈추었다. 그 야수의 발치에서, 어둠 한자락이 펄럭였다. 그 자는 죽기 살기로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자신에게 덤비는 병사 하나를 너무나도 간단하게 도륙했다. 금빛 눈동자는 짐승보다 더 짐승같고, 붉은 머리카락은 불꽃보다 더 붉다. 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발길을 그쪽으로 했다. 무스카리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눈에 띄는 은빛 머리카락과 청록색 눈동자는 머리 전체를 뒤덮는 투구에 가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스는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분노에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실어 뛰쳐나갔고, 곧 카멜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어깨를 붙잡았다. 아스는 격렬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고, 그때 갑자기 크르렁-! 하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화아아악! 야수는 폭발했다. 뜨거운 불꽃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며 땅 위를 휩쓸었고 퇴각하던 많은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뜨거운 열폭풍이 커다란 공기덩어리로 연합군의 깃대를 꺾고 철갑옷을 입은 많은 병사들을 통째로 쪘다. 아스도 드러난 팔과 다리, 그리고 트인 좁은 투구의 안면으로 밀려드는 뜨거운 혓바닥을 느꼈다. 콧등이 익는 느낌이 나며, 온 몸이 후끈하고 울렸다. 그리고 아스는 정신을 잃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후퇴하는 연합군의 뒤를 쳤던 불꽃의 바다가 피워냈던 열폭풍 때문이었다. 한층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던 구름떼는 뜨거워진 몸을 식히려는 듯 빗방울을 떨구었다. 비는 시신을 수습하는 처량맞은 병사들의 어깨와 피에 젖은 깃발을 씻은 다음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전장에는 아직도 채 식지 못한 대지가 차가운 빗방울을 맞아 무럭무럭 증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홀로 숲속에 있었다. 그는 바로 코앞에 트리옌의 진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느긋하게 산책하듯 걷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깊은 숲속에서 하늘이 조금 트인 한 곳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 청록색 눈동자를 생각했다. 머리를 덮은 쇳조각 따위로 못 알아볼리 없었다. 그렇게 어리던 소년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자라 있었다. 아리스타타도, 아스도 닮은 모습이 아니었다. 거기에 서서 분노를 불태우던 사람은 청년이었다. 사슴같은 우아함과 그 다리같은 단단한 육체. 여문 뼈와 근육은 잘 짜여진 조각품 같았다. 무스카리는 문득 서글픔을 느꼈다. 자신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자라버린 그가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자신이 곁에 있었다면 볼 수 있었을까. 하루하루가 부쩍 키가 크고, 하루하루 틀리게 아름다와져 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 너무나도 변해 있었다. 아스는 이미 자신이 쉽사리 손 댈 수 없는 어떤 고귀한 것이 되어버린 듯 했다. 자신의 번뇌 따위는 멀어버릴 듯한 눈부심. 아리스타타처럼, 너무나도 멀어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무스카리는 곁에 선 나무 하나를 쓰다듬었다. 나뭇가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아리스타타를 처음 만났던 숲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런 숲이었다. 조용했고, 자신은 아리스타타의 출전으로 패배를 겪은 후 다음 번 전략을 생각해 내기 위해 홀로 걷고 있었다. 숲 속의 생물들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에 숨을 죽인 채였다. 무스카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느 나뭇가지 위에서 배배 울 새소리를 듣고 싶은 어처구니 없는 욕심에 숨을 죽이고 기척을 없앤 채 나무그늘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하지만 날아든 것은 작은 새 따위가 아니었다. 그날 그 숲속으로, 자신의 마음속으로 불현 듯 걸어온 것은 희고, 크고, 무척이나 아름다운 새 였다. 전장에서 먼 발치께로 본 적이라면 서너번. 하지만 이렇게나 가까이서, 그것도 저렇게나 무방비 상태의 아리스타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얇은 드레스 하나만을 걸친 채 맨발로 숲 속을 걷는 그녀는 숲이 쥐죽은 듯 조용한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듯 했다. 허벅지까지 닿는 바람부는 숲같은 머리카락은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리고, 세상의 모든 푸르름을 다 끌어다 놓은 것 같다는 눈동자는 고요했다. 헛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가 만들어졌던, 천년 전부터 살아온 음험한 여자일 거라고, 그녀를 칭송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찬사와 어휘들은 다만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지위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무스카리는 난생 처음으로 말의 진실됨을 믿게 되었다. 그 모든 말들은 사실이었다. 우아함, 아름다움, 눈부심, 고아함, 그런 모든 단어는 그녀가 있기에 생겨났고 완벽함이라는 허구는 그녀에게서 구현되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목이 메이는 듯 했다. 세상에 저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와, 또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한 울분으로. 그 감정은 곧 격렬한 소유욕으로 표현되었다. 그때까지의 자신은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강했고, 그랬기에 싸웠고, 에리카가 원했기에 전쟁을 일으켰다. 어떤 것을 진정으로 원하고, 갈망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무스카리는 그 순간에 심한 갈증을 느꼈고 그제서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 감정이라는 것을 난생 처음 겪었고 그로 인해 진정하게 살아 있었다. 무스카리는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으며, 그는 그 숲 그림자에서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누구도 견뎌내지 못할 그의 모든 감정을 실은 시선이었고, 그녀는 가는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그녀를 진심으로 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녀를 불렀다. 차마 먼저 다가가면 도망갈 것 같은 느낌에 그저 그녀를 부르기만 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하는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그녀는 자신이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얼마나 위로받았는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떨면서도 자신에게 다가오려 했었다... ... 그 후로 자신은 그녀에게 미쳤다. 사랑이라고 이름 짓기에도 민망한 집착과 소유욕, 자신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온갖 음험하고 징그러운 감정들. 하지만 그녀를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 무스카리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마음이 애달팠다. 또 그 숲에서의 꿈을 꾸었다.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들인 악몽... 아스는 눈을 떴고, 그 꿈을 꾸고 나면 항상 찾아오는 현실과의 괴리감에 잠시 낯선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여- "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촛불과 물그릇이 놓여있는 선반 너머의 침대에 푸른 고수머리를 한 미소년이 웃음짓고 있었다. 아스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스타티스- " " 괜찮아? 한동안 정신을 놓고 있길래, 걱정했어. 카멜이 하도 이리저리 안절부절 해서 보다못한 제피님이 끌고 나갔다고. " " 여긴 어디야? " " 부상병동-이라 하면 웃길테고, 제피님의 성에 있는 손님방이야. 화상환자들 중에서도 특별대우지. 지금 그 불꽃의 야수에게 화상입은 병사들은 다 이 성안에서 치료받고 있어. " " 그럼 너도? " " 응. 난 기사니까 기마부대에 속해있어. " " 그렇구나... " " 어디 아프지는 않아? " " 응. 정신을 잃었다 뿐이지 딱히 아픈 곳은 없는 것 같아... " 거짓말이라는 듯 가슴이 욱신거렸다. 무스카리, 그였다. 전쟁터에서의 그는 위압적이고, 두려운 적이었다. 아스는 몸을 일으켰고, 더위에 몸이 후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미묘한 열기 때문인지, 뜨거운 공기에 노출된 탓이기 때문인지는 그 자신도 잘 구분할 수 없었다. " 씻고싶어. " " 그래? 욕실이라면 이어져 있는 방 하나 건너에 딸려있어. 아마 환자들을 치료하고 한다고 물은 받겨 있을거야. " " 대체가, 아스를 용병단에 입단 시키다니, 그랬던 순간부터 이정도 부상은 각오 했어야죠. " 카멜은 눈살을 찌푸렸다. " 제가 지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 " " 아스만 지키면 뭐합니까? 그를 지키는 궁극적인 수단은 전쟁에서의 승리고 적장의 죽음인데, 적장 그럴 수 있는 인물은 발이 매여서 전전긍긍... 주객이 전도된 꼴이잖아요. " 성의 안뜰은 조용했다. 한밤중이었기에 부상병들의 신음소리도 잠들어 있었고 보초를 서는 병사들마저도 낮의 긴장감과 피로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다만 사방팔방 환하게 밝혀놓은 횃불이 심지를 태워먹는 소리만이 들릴뿐, 흔한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조금 어수선한 곳에서 카멜은 제피란더스의 추궁을 받고 있었다. 제피나 스타티스나 크게 그런것에 신경쓰지 않는 타입이라 카멜을 되도록 어색하지 않게 대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아스를 위하는 것이기에) 카멜은 도무지 그 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외적인 관계라면 간단하다. 트리옌의 우방국인 드라세나의 제 2왕자와 그 호위자이며 기사. 하지만 그 둘은 자신이 모르는 아스의 친분이었으며- 아스가 무스카리와 여행할때 같이 만났던 사이이다. 안스륨이 무스카리인 것을 알고 있는건지 모르고 있는건지도 모르겠으며, 안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사실 그 사건은 중대한 스캔들이었다. 아무리 아무것도 모른채 무스카리에게 끌려다닌 것이 성립되는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그는. " 왜 아스를 전쟁터로 나올 수 있게 하여 안스륨과 만나게 했는 거냐구요. " " 그는 안스륨이 아닌 무스카리입니다! " 알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모를리가 없었다. 무스카리라는 남자는 그저 행동거지와 외양이 틀리다 해도 그저 보고 잊어버릴 수 있는 카리스마의 인물이 아니었고, 아스의 정체를 숨긴채 그토록 애지중지 데리고 다닐만한 인물이라면, 떠올릴 수 있는 폭은 좁았다. 제피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 아스는 그를 잊은 겁니까? " 카멜은 그저 자신의 마음속에 묻어두기만 했던 괴로운 질문을 타인의 입에서 듣자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무스카리가 그의 심장을 갖겠다는건, 결국 그를 사랑하는 겁니까? " 카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 무스카리, 그는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자입니다. 그는 모든 것의 파괴자이며, 사랑마저도 그리 해야 한다고 믿는 자이고, 아끼고 사랑하며 키우는 것 따위는 모르는 잔인한 자입니다. 그가 가진 것은 그저 집착과 소유욕과 광기일뿐,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가, 무스카리가 정말 아리스타타님이 에린지움의 걸음이 아니고, 아스가 아리스타타님의 환생체가 아니었다면 그런... 본인은 사랑이라고 믿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처구니 없는- 그런 생각을 품기라도 했을 것 같습니까? ...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 사랑은 그런것이 아니었다. 무스카리가 갖는 그 어떤 감정은 다만 더러울 뿐. 솔직히 카멜은 자신의 감정이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할만한 만용과 오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무스카리가 모르는 기나긴 세월과 추억이 있었고, 그것만큼은 사실이었다고, 진실이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다. 별빛을 부르는 숱한 노을과, 노을을 식히던 셀 수 없던 바람. 아직도 또렷히 기억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마주대했던 그녀의 얼굴을. 주변은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갓 태어날 트리옌의 예민한 감성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킨 것은 아리스타타 뿐이었다. 나무 줄기에 거대한 물방울이 맺힌것 처럼 불룩한 수막안에서는 그 안에 자리한 조그만 아이를 내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공기방울을 밀어내고 있었다. 안에서 요동치던 공기방울들이 수막을 치고, 이윽고 그것이 탁, 소리를 내며 깨어지자 아리스타타는 아이가 떨어질새라 얼른 두 팔로 그를 받았다. 수막안에 차있던 액체가 그녀의 몸을 적셨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자신의 씨로 자신이 애써 키운 트리옌. 조그맣던 수막이 점점 부풀어 오르며 안의 아이를 키우는 것을 보고, 아리스타타는 스스로의 힘에 감사했었다. 그녀는 카멜에게 늘 말하곤 했었다. '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야. 나는 네가 태어나는 과정울 지켜보며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었지. 그것은 그저 에린지움이 가진 힘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보다 더 크고, 더 위대한 자연의 힘이 너를 내게 보내준 거야. ' 아이는 남자애였다. 아직 녹색의 물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벌꿀같이 탐스러운 금발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얼굴을 지닐 터였다. 아리스타타는 아이가 초록색의 눈을 떠서 자신의 바라보길 기다렸고, 아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열렸을때 가벼운 탄성을 내뱉었다. 카멜은, 그 탄생의 순간 자신이 처음 봤던 아리스타타의 얼굴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안도와, 기쁨과, 충만함이 차 있던 표정. 카멜은 자신이 축복받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먼저 보았으니까. 하지만 카멜은 다시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절대자였고, 그렇기에 항상 고독했다. 세상이 태어났을 태초에 에린지움과 함께 전 세상에서 남겨진 아리스타타. 그녀는 무수히 긴 세월을 살아오며, 항상 혼자였었다. 수없이 많은 해가 뜨고, 수없이 많은 달이 뜨고, 그런 어느 날 밤에 카멜은 아리스타타를 끌어안고 맹세했다. ' 앞으로 살아갈 세월동안, 에린지움이 말라죽는 그 날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 그녀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 네 모든 걸 나에게 다 줘버리면 너는 어디로 가지? ' ' 당신이 제 모든 것이니까. ' 그녀를 너무도 사랑했다. 하지만 다만 사랑하기에 상대는 너무나도 커다란 존재였다. 그저 자신의 품에 가둘 수 없기에 카멜은 모든 것을 주었고, 사랑한다는 말도 삼켰고, 곁에 잠드는 숱한 밤에 안지 못했다.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찾을 수 있었으며, 다시 아스라는 존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줄 수 있었으니까. 방으로 돌아온 카멜은 욕실로 갔다는 스타티스의 말을 듣고 그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욕실문의 앞에 섰다. 노크를 하려던 카멜은, 문득 안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에 동작을 멈추었다. 아스는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비참했다. 그는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들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자신의 다리에 휘감기던 그의 머리카락, 자신의 가슴을 더듬던 그의 손, 자신의 허리에 비벼지던 뜨거운 열기, 낮으막한 그의 신음소리, 습한 내음, 그의 눈동자... 무스카리를 마주대하고 그를 덮쳐든 것은 몸을 갈가리 찢는 증오도, 분노도, 괴로움도, 슬픔도 아니었다. 그의 몸뚱아리를 들뜨게 만드는 정념이었다. " 으아아아!!!! " 아스는 손에 잡히는 것을 아무거나 잡고 집어던진 후, 욕조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와 처음 살을 맞대었던 것도 욕실에서였다. 서슴없이 자신의 다리사이에 얼굴을 묻고 몇번이고 자신을 안고 싶다 애원하던 그의 몸. 빈 욕실에 아스의 향기가 피어오르고, 그는 터질듯이 부풀어오른 자신의 것에 떨리는 손을 가져갔다. 비참했다. 비참했다. 비참했다. 남은 마음도 몸도, 모두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모두 다 가져가 버리고, 남은 자신의 껍데기를 멸시하게 만들었다. 그래, 자신은 아리스타타가 아니었다. 아리스타타라면 결코 이런 치욕스러운 감정을 느끼지 않을테지. 그러다 문득, 아스는 고개를 들어 반쯤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카멜을 보았다. 그의 굳은 표정과, 흔들리는 눈동자. 아스는 자신의 더러운, 무스카리의 열기에 사로잡혀 기뻐하는 중심을 뽑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아득하게 만드는 수치감이 들었고, 아스는 아무런 행동도 못한채 다가오는 카멜을 바라보았다. 카멜이 입을 맞추었다. 아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카멜은 조심스럽게 한쪽 손으로 아스의 턱을 치켜들고 한 손으로 아스의 머리를 받친 채 서늘한 입술을 부볐다. 부드럽게 아스의 입술을 머금던 카멜의 입술 사이에서 뜨거운 혀가 아스의 벌린 입속으로 들어오고, 따스한 입김이 목구멍에 닿았다. 입천장과 치열을 더듬고, 부드럽게 혀를 휘감아 오는 부드러운 살. 아스는 눈물이 났다. 카멜은 낮으막한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떼었고, 그를 욕조안에서 안아 올렸다. 그는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제가 잊게 해드리겠습니다. " 그리고 망설임없이 침대로 걸어가 그를 내려놓았다. 철그럭, 검집이 매달린 허리띠를 풀어 바닥으로 던지고, 가죽 장갑을 벗고 위에 걸친 튜닉을 벗었다. 그리고 셔츠 단추를 풀자, 그저 말라보이기만 하던 몸 사이사이에 자리잡은 얇은 근육들과, 몇개인가의 거친 흉터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스가 그의 상처들에 놀라기도 전에, 카멜은 아스의 몸위로 상체를 무너뜨리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고른 치아가 아스의 어깨를 물자, 그는 짧은 신음을 삼켰다. 카멜이 뜨거운 아스의 목덜미와 귓볼을 핥자, 그의 체액에서 카멜 특유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평소와는 조금 틀린, 짙고 농염한 빛깔을 띈 상쾌한 향기. 그의 청량하고 맑기만 하던 향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야하고 간절한 울림을 담은 것이었다. 목덜미와 쇄골을 헤매어 입술로 더듬어 내려가자, 분홍빛 유두가 걸렸다. 아스의 가슴위에 그것은 작은 지표였다. 카멜은 입술로만 그것을 물고 지분거리다가, 이윽고 혀로 그것을 쓸어올렸다. 아스의 허리께가 들리며, 흑, 하는 낮은 신음소리가 울렸다. 카멜은 중심이 지끈하며 고개를 바싹 드는 것을 느끼고 유두를 빨아 들였다. " 웃...! " 들리는 허리를 손으로 꽉 붙잡는다. 군살이라곤 없는 날씬한 허리는 두손에 꼭 잡힐 듯 했다. 카멜은 샅샅히 그의 어깨와 팔과 팔꿈치, 가슴과 옆구리와 등허리를 핥았다. 그는 자신이 폭주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움직임을 자제하고 싶었지만, 가끔씩 스스로의 성급함과 초조함을 참지 못해 아스의 하얀 몸 구석구석에 붉은 자욱을 남겼으며, 아스는 그때마다 가늘게 허리를 떨었다. 카멜의 입술은 점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배꼽위에서 한참 춤추던 그의 혀가 더욱 아래로 내려가, 중심 주변의 예민한 살결위에 닿자 미약한 흥분과 치밀어오르는 열기에 아스의 것이 움찔 움찔 떨기 시작했다. 아스의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맞추던 카멜은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스는 고개를 숙인채 카멜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 ... ... 나는 아리스타타가 아니야. 네가 나로 인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아... " " ... 잊으셨습니까? 저는 아스님의 것입니다. 아리스타타님이라면... " 카멜은 갑작스레 아스의 다리를 들어올렸다. 반동으로 아스가 털썩 눕고, 카멜은 그에게 입술을 맞추며 예고도 없이 힘껏 자신의 것을 아스의 안으로 밀어넣었다. " 흑...!! " 부들부들 떨리는 아스의 입술에 깊은 입맞춤을 한 후 카멜은 말했다. " 아리스타타님이라면, 안지 않습니다. " 카멜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스는 눈꼬리에서 눈물방울을 떨구며 힘껏 그의 어깨를 안았다. 카멜이 아스의 허리를 안고, 그는 곧 참지 못하고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시트가 구겨지며 다리사이에 휘감기고, 카멜은 밀려오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아스가 그의 귓전에 속삭였다. " 아... 아앗, 아학! " 움직임이 격해지자 들어올려진 아스의 허벅지가 카멜의 허벅지에 마찰되었다. 아스의 발목이 자신의 옆구리에서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스의 억누르지 못한 신음소리에 카멜은 더 듣고 싶다는 욕망으로 손가락을 아스의 입술에 넣었다. 뜨거운 혀가 손가락의 끝에 와닿으며 가녀린 신음이 방안을 울렸다. " 아, 후... 으.. 응! 응! 읏...!! " " 하아.. " 아스가 꾹 감고 있던 눈을 가늘게 뜨더니, 카멜의 머리를 끌어당겨 속삭였다. " 내 이름을 불러줘. " " 아스님, 아스... 아스! " 아스가 그의 어깨에 이를 박고, 카멜이 목을 뒤로 젖혔다. 간절히 사랑한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카멜은 그 말이 아스에게 상처가 될까봐 그저 한없이 그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아스의 안에 들어간 카멜의 것이 꿈틀거리며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에서 전해져오는 척추를 타고 흐르는 쾌감에 아스의 것도 카멜의 손 안에서 부르르 떨렸다. 두 사람은 나란히, 뜨거운 절정에 이르렀다. " 아름다워. " " 네? " 아스는 카멜의 나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창문 밖에서는 어스름 새벽이 밝아오고, 새벽의 푸른 기운이 둘의 땀과 체액에 형편없이 구겨진 침대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 네 몸 말이야. 너는 항상 대련할때도 깍듯하게 옷을 여며입고 있어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줄 몰랐어. " 아스는 손을 내뻗어 천천히 그의 길고, 살짝 핏줄이 일어난 목과, 움푹 들어간 쇄골과 자잘한 어깨 근육과 배를 어루만졌다. 지난 전쟁의 상처인지 가슴과 어깨와 옆구리에 깊은 검흔이 남겨져 있고 자세히 보면 그 외에도 눈에 띄지 않는 흉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카멜은 자신의 몸을 더듬는 아스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끌어안으며 그의 정수리에 키스했다. " 아름다우신 것은 아스님입니다. 늘 참으로 허리가 날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안으니 힘이라도 주면 부러질 것 같군요. " 아스가 쿡쿡 웃었다. " 그건 칭찬이 아니라 흉이야. 나도 검사라고. " 카멜은 엷게 웃음지으며 그의 조금 빨간 콧등에 입맞춤했다. 그렇게나 자신에게서 혹독하게 검술을 익혀온 사람치고는 그 노동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피부는 상아처럼 매끄럽고 허리는 날렵하다. 하지만 여자처럼 부드럽지도 가냘프지도 않다. 그의 중성적인 매력은 사람의 것이 아닌 듯 했다. 카멜은 희게 벗은 아스가 새벽의 푸른 기운에 휘말려 사라지기라도 할까봐 그를 꼭 안았다. 자신의 품에 존재하는 체온과, 희미한 공기. 마음 한 구석이 아련하게 기뻤다. 나는 이 분에게 모든 것을 바쳤지만, 무스카리 너는 무엇을 주었지? 그는 빼앗기만 한다. 그는 항상 자신의 것이라고만 한다. 하지만 사랑은 상대방의 것이 되는 것이지, 자신의 것이 되는 게 아니다. 카멜은 참지 못하고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다가, 다시 그의 입술을 찾았다. 아스가 또? 라는 듯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었지만, 카멜은 그의 허리를 자신의 허리로 잡아당기며 키스했다. 아침이 두 사람의 발목을 적시고 있었지만 카멜은 신경쓰지 않았다. 다음날, 아스와 카멜은 한쪽팔에 붕대를 감은 스티의 안내로 제피와 점심식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드라세나의 왕자궁은 천정이 무척이나 높고, 갖은 벽화와 태피스트리로 장식되어 중후한 느낌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천사와 신화의 주인공들이 높다란 천정을 받친, 정원과 면해 한쪽이 트인 긴 복도를 따라 두 사람은 테라스에 도착했다. 테라스에 놓인 탁자에는 새하얀 식탁보가 깔려 있고 4명분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세사람이 자리에 앉자, 제피가 테라스 중앙의 문에서 걸어나오다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 아스... 카멜-? " 자기가 초대해 놓고 왜 저렇게 놀랄까-라고 생각한 의문도 잠시. 제피는 이마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내 이럴 줄 알았어. 아스를 성 안에서 공식적으로 만나면 곤란하다고 했잖아, 스타티스! " " ... 손님들 계시는데 꾸중은 나중에 하시지요. " 제피는 조금 난처한 듯 자리에 앉았고, 곧 아스가 물었다. " ...스타티스가 임의로 이 자리를 만든것 같은데, 왜... ? " " 이런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물론 일여년동안 못 봤던 친구와 그 대단한 글로리 나이트를 모시는 것은 기쁜 일이야. 하지만... " 제피는 한숨을 쉬면서 냅킨을 무릎에 펼쳤다. " 하지만 말야, 나는 쥬니퍼 가문의 독자를 호위로 하고 있는 제 2 왕자야. 드라세나 왕가의 호위자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 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과 함께 대륙이며 다른 왕국의 역사며 기초지식을 습득해왔던 지난 시간동안, 트리옌의 우방국 드라세나에 관한 것은 많이 배웠던 것이다. 드라세나의 왕족은 성인이 되면서 쥬니퍼 가문의 사람들의 호위를 받게 된다. 오랜 세월동안 왕가자체가 아닌, 왕족 한 사람만을 위해 봉사해온 그 가문은 그렇기에 가족이나 친지들끼리 칼을 겨눠야하는 상황도 적지 않았고, 많은 후손들이 목숨을 잃었다. " 스티의 부모님만 해도, 각자 뿔뿔히 흩어져 계시는 상황이니까... 어쨌건 쥬니퍼가문의 호위덕에 오랫동안 장수를 구가해온 왕족은 인원이 늘어났지만 쥬니퍼 가문에는 독자 한사람 밖에 남지 않았어. 바로 스티야. 원래라면 스티는 당연히 나의 형, 태자의 호위가 되어야 마땅한 것이지만... " " 제피의 호위가 되었구나. 제 2왕자일 뿐인... " " 그래. 덕분에 나는 시도때도 없이 큰 형이 으르렁거리며 나를 경계하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한다고. 이때껏 호위자가 없었던 왕은 없으니... " 제피는 물을 마시며 딱 잘라 말했다. " 쥬니퍼 가문의 사람들은 평생 상대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만큼 지켜야 할 대상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 " 그러니까- 형의 호위자가 되면 좋았잖아.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래? " " 제가 지켜드리니까 괜찮습니다. " 아스는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슬며시 미소지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제피는 스티가 떠나버리면 무척 슬퍼하리란 걸 안봐도 뻔했다. 스티 역시, 그가 태자를 거부하고 제 2왕자인 그를 선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충이 있었을까? 하지만 두 사람은 주변의 불안 요소에도 불구하고 굳건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아스는 그들이 부러웠다. 일상속에 녹아있는, 형제같은 그들이. " ...어찌되었건 이런 식으로 저희를 이용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군요. " 카멜이 낮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었다. 같은 검사로써, 그에게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는 스티도 움츠리고, 제피는 만면에 미안한 기색을 띄우고 황급히 대꾸했다. " 죄송합니다. " " 죄송합니다. 제 욕심 탓입니다.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한 것은 고의였습니다만, 두 분을 대접하고 싶었던 것은 저나 제피란더스님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부디 언짢아 마시고 식사를 즐겨주십시오. " " 왜...뭘 이용했다는 거야? " 갑작스런 냉랭한 분위기에 놀란 아스가 묻자, 카멜이 대꾸했다. " ... 가끔은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십시오, 아스님. 쥬니퍼의 호위자가 있는 제 2왕자가,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이며 에린지움의 걸음인 분과, 또 아리스타타님의 첫번째 묘목인 저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은 큰 요인이 됩니다. " " ...그래. 난 또 형님에게 왕이 되고 싶은게냐고 추궁을 들을것이 뻔하다구. 몇번이나 말했잖아. 난 제 2 왕자일 뿐이고, 목숨 잘 연명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날 지지하는 귀족들도 없어. 생각 좀 고쳐먹고 이런 일 좀 벌이지 말아, 스티. 왕의 호위자가 되고 싶으면 형님의 호위자가 돼!" 제피가 한숨을 쉬면서 말하자 스타티스도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 그런 이야기는 쉽사리 말라고 제가 몇번이나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지키고 싶은 것은 왕이 된 제피란더스님이지 그냥 왕이 아닙니다. " " 그런 소리 말라니까! " 이번에는 제피가 정말 화가 났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스티는 입을 꾹 다물었고, 자리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결국 카멜이 불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런 자리에서는 별로 식사하고 싶지 않군요. 저희는 이만 성을 나가 병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 아, 이런. 카멜리아님... " 그때, 시종 한명이 들어와서는 제피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말했다. " 왕자님, 축복의 성에 계셨던 에린지움의 걸음, 펜 오키드님께서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 " ... 펜이-? " 펜은 불쾌한 얼굴로, 연신 자신의 손을 잡고 놓을 줄 몰라하는 태자인지 뭔지 하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소심한 듯한 얼굴에, 입매는 비굴하게 일그러트리고, 그런주제에 눈동자는 감히 자신을 향한 욕정으로 번들거린다. 펜은 욕지기가 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손을 뿌리쳤다. 풍성한 수염에도, 갈색 머리카락에도 희끗희끗한 백발이 섞이기 시작한 중후한 외모의 발만 드라세나 왕은, 갑작스런 펜의 방문에 당황한 상태였다. 대대적인 환영식을 열어 정중하게 맞이하지는 못할 망정, 식사하던 도중 갑자기 그녀를 맞게 된 것이다. " 갑자기 이렇게 왕림하시다니... 맞이할 아무런 준비도 못했습니다. " " 아닙니다. 이런 무례를 범하는 저를 용서해 주시지요. " "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전시에 이곳까지 납시다니, 무슨 일이 있으신지...? " 펜은 왕 발만에게 살짝 굽혔던 허리를 들고는, 곧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앳되어보이는 청년이 나타나자 태자 알파시디스의 얼굴이 구겨지고, 펜의 뒷전을 지키고 있던 월이 고개를 숙여 펜에게 말했다. " 저 분이 맞습니다. " 제피가 나타나자 발만은 제피를 가까이 오게 하고는 그를 펜에게 소개시켰다. " 둘째 왕자인 제피란더스입니다. 인사드리거라, 이 분이 바로 에린지움의 걸음이신 펜 오키드님 이시다. " " 아아,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제피는 펜의 얇은 손을 살짝 잡고 그 위에 짧게 입맞춤 했다. 펜에게서는 톡 쏘는 라임과도 같은 향이 짙게 배어져 나와 제피의 입술에 묻는 듯 했다. 제피는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듯한 그녀의 외모와, 그런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냉정한 눈빛에 놀랐다. 발치까지 닿는 은빛 머리카락은 같은 색깔이라지만 짧아서 애처로운 아스의 것과 달리 앞에 선 소녀를 더욱 신비스럽게 보이도록 하고 있었다. 펜 역시 제피에게 인사를 하고, 양해를 구한다는 듯 발만왕에게 말했다. " 사실, 제가 이곳까지 발걸음 하게 된 것은 일각을 다투는 전쟁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둘째 왕자분께 여쭐것이 있어서 입니다. " " 아니...? 도, 도대체 무슨 볼일이...? " 알피왕자가 불안한 듯한 음성으로 입술을 쭈그러트리며 말하고, 펜은 그를 외면한채 제피를 쳐다보며 말했다. " 아스는 어디 있지요? " " 네? " " 설마 모른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죠.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인 트리옌 말입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축복의 성을 뛰쳐나가 용병이 된 그 소년 말입니다. " " 아... 그건... " 발만왕과 알피왕자의 눈이 커졌다. 발만왕이 놀랍다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아직 그 정체가 다 드러나지 못한 아리스타타님의 환생체를 네가 알고 있더냐? " 펜이 짧게 대꾸했다. " 아직 공식적인 입장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공식적인 입장이 있다면, 감히 그리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터. 어디있죠? " " ... 저의 궁에 지금 머무르고 있습니다. " 재피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어쩔 수 없이 대꾸하자, 경악한 알피왕자가 새된 소리로 외쳤다. " 뭐-?! 그, 그런 분을 너 혼자서 모시고 있었단 말이냐-?! 구, 국가의 귀빈이신 분을, 너같은 놈이~~! " 펜이 입 다물라는 듯 알피왕자를 쳐다보았다. " 누누히 말하지만, 아직 공식적인 입장이 없는 사람입니다. 국가의 귀빈이라는 둥의 그런 표현은 적절치 못하군요. 안내해 주시죠, 제피란더스 왕자. " 제피에게 누가 될까 직접 걸음하지 못하고, 그 테라스에서 펜을 기다리고 있던 아스는, 주변을 물린 펜이 다짜고짜 자신의 뺨을 때려 화낼 생각도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축복의 성을 제멋대로 빠져나간 것도 모자라 용병단에 입단하고, 것도 모자라 전쟁터에 나가-?! 네 심장을 무스카리에게 빼앗기기라도 하면, 너의 그 죄를 어떻게 사죄할 것이냐? " " ... 나에겐 그를 만날 권리가 있어. " " 그리고 에린지움의 심장을 지킬 책임도 있다!!! 에린지움의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은 너야! 에린지움의 걸음이 되기로 결정했으면 행동과 지위에 책임을 져! 게다가 전쟁터라는 곳이 에린지움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모르느냐?! 너도 느꼈겠지... 파과와 살육밖에 일어나지 않는 곳이 뭐 좋을게 있다고 제발로 나가? 네가 전쟁터에 서 있을때, 결계를 지키고 있던 나에게 마저 영향이 미쳤어! 전쟁 자체가 에린지움에게는 악영향이다! 당장 전쟁에 나가는 그 짓거리를 관둬! ... 그리고 이건 에린지움의 걸음인 나밖에 느끼지 못하는 사실이다. 나도 뚜렷히는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당연한 이야기지. 약점이기도 한 것이라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에린지움은 지키고 창조하고 키우는 힘이다. 그 나무의 신성력과 치유력은 그 자체의 순수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네가 전쟁에 참전한다고 설치다가 혹시 실수로라도 누굴 죽이게 되면... 그건 에린지움의 걸음이, 생명을 경외해야할 자가 살인을 저지르는 꼴이 된다. 그 손에 직접 피를 묻히게 되면 무슨 결과가 일어날지... 그 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거야. 육식도 하지 못하고, 피와 살육과 전쟁에 본능적인 혐오감을 가진 우리야. 너의 그 고삐풀린 망아지같은 행동때문에, 결계가 약해지기라도 하면 그 순간 죽을 수많은 트리옌들은 어쩌라고?! " " ... " 펜은 아스의 뺨을 올려붙이느라 들어올렸던 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 게다가 너는 지금 카멜의 발목을 잡고 있어. 그 한명이면 다른 사람 열의 전력이 된다. 그리고 지금 불타는 심연의 정령수를 부리는 무스카리를 견제할 수 있는 것은 그 뿐이야! 카멜이 전면에 나서 전쟁에 참전하지 못한 것 만으로 얼마나 많은 트리옌이 부상당하거나 죽었는지 네가 알기나 해? 바보같은 과거에 휘둘려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마! " " 바보같은 과거라고? " " 암, 바보같은 과거이고 말고. 아무것도 모른채 무스카리따위에게 끌려 결계까지 따라가 결계를 풀어준 너 말이지! 정신차려! 그는 이제 적의 수장이고, 숲의 저주야! 너의 원수이고 우리의 적대자다! 네가 멋모르고 있을때 그가 너를 조금 위해줬다고 언제까지 그에게 집착할 셈이지? 밤낮 너의 옆에서 너만 생각하는 카멜이 불쌍하지도 않아? 그는 너만의 것이 될 수 없는 몸이야! 그는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이었고, 가장 위대한 트리옌의 영광인 사람이야! " 원래라면 나의 것이 되었어야 할! 펜은 그 말을 삼켰다. 아스는 맞은채로 고개를 떨군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 너같은 것이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니 믿을수가 없어. " " ... 나도 믿을 수가 없어. " 조금 위해줬던 것이 아냐, 그는, 그때 그는,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이라는 무스카리가 아닌 조금 무뚝뚝하지만 상냥한 안스륨이었으며, 자신에게 아스포델이라는 이름을 줬고, 레브록이라는 가족의 성을 줬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줬어... 갑자기 맹렬한 살의가 들끓었다. 자신은 그를 만날 권리가 있다. 그를 만나, 자신은 뭐였냐고, 안스륨은 누구였냐고 추궁할 권리가...! 아리스타타의 마음도 아닌, 헛되이게 그가 가져가버린 자신의 마음을 돌려달라고 명령할 권리가...!! 하지만 아스는 그 순간 마음 한쪽 구석에서 울리는 카멜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 전장에서라도 그를 보고 싶으신 겁니까-? 아냐, 아니다. 그를 보고 싶은 것이 아냐. 나는 그가 이렇게나 미운데. 보고싶을 리가 없어. 자괴하고 있는 아스를 내버려둔채, 펜은 몸을 돌렸다. " 네 주변에 흐르는 에린지움의 기운과 전쟁의 영향 때문에 환영을 보낼수도 없어, 이렇게 직접 찾아와 말하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전쟁터에 나가겠다면 묶어서라도 내보내지 않을테니 알아서 해. 그리고 너는 이 성에 계속 머물러. 에린지움의 걸음씩이나 되는 자가 지저분한 막사 따위에 머무는 것은 내가 용납못해. 나는 본성에서 이번 전쟁을 돌볼테니. 내 말 명심해. " 펜이 아스의 뺨을 올려붙일때 카멜이 테라스로 나가려 했으나, 펜을 따라왔던 월이 그를 저지했다. 밝은 테라스와는 달리 복도에는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고, 월은 카멜이 몸에서 힘을 빼자 팔을 놓았다. 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들렸지만, 카멜은 아스에게 쏟아지는 폭언에 격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듣고만 있을 뿐. " ... 저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는, 정말로 카멜님이 모든 것을 다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까? " " ... 무슨 소리지? " 카멜은 문득 걸어온 월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감정없는 녹색눈동자로 카멜을 잠시 응시하더니, 곧 고개를 앞으로 하고는 말을 이었다. "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제가 뒤를 밟았던 무스카리와 아스님은... ... 행복해보였습니다. " 움찔, 카멜의 어깨가 떨렸다. 그의 몸에 아직 지난밤 아스의 체취가 남아있건만. "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처럼 보였지요. 저같은 무감각한 사람도 느낄 수 있는 만큼. " " ... 그것은 무스카리의 본질을 모르는 너니까 할 수 있는 소리다. " "... 만약, 심장이라는 것이 인간의 말과 같은, 사랑과 같은 것이라면, 이미 그의 심장은 무스카리에게 빼앗겼는지도 모릅니다. 결계에서 무스카리가 그를 떠나고, 당신이 그를 데리고 축복의 성에 돌아올때, 저 분이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펜님의 명령으로, 두 분을 살피러 갔었을때, 그는 죽어있었지요. 말하지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 어떤 마음도 의지도 없는 채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듯 했습니다. 그는 필시, 무스카리에게 모든 것을 다 줘버린 거겠지요. 그래서 비어버린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럴만도 하지요. 그는 낯선 세계에서 와, 아무것도 모르는 이 곳에서의 모든 것을 그가 주었으니... " " 입 닥쳐. " " 그의 그런 행적을 봐 온 저로써는, 저 곳에 있는 소년도 그저 껍데기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카멜리아님의 간절한 의지에 따라 일어나 움직이는 인형처럼... " " 입 닥치라고 했다. 이제는 다르다. 아스님이 반쯤 죽어버렸던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런 그분을 살려낸 것은 나다. 지금 저 분에게 살아갈 의지를 주고, 희망을 준 것도 나야! 그의 마음이 비어버렸다면, 내가 채워줄 것이고, 무스카리가 주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면, 내가 모든 것을 줄것이야. 내 모든 것을 저 분께 드렸다. 모자란다면 무엇이든 드릴 수 있어...! 무스카리는 그저 적일 뿐이야! 그는 저 분을 두 번 죽였다. 나도 그럴수만 있다면 무스카리를 두 번 죽이겠다. 그와 저 무스카리 사이에 남은 것은 오로지 그 사실 뿐이야! 청산해야 할 은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과거! 저기 서 계신 분은 에린지움의 걸음이고, 아리스타타님의 환생체이고, 내가 이름을 드린 분이다! " 그 절벽에서, 황혼에 불타던 낙엽들이 군무를 추던, 싸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던 그 벼랑에서 아스는 카멜에게 말했다. ' 나 조차도 가진 것이 없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봐. ' 그가 사라질까 두려워, 온 몸의 힘을 다해 뻗었던 손안에 붙잡았던 아스의 옷자락. ' 제가 있습니다. 지금... 지금부터, 저는, 저는 아리스타타님의 첫번째 묘목이라는 이름을 버리겠습니다. 저를 가지십시오. 당신의 것이 되겠습니다. ' ' 나는 이름조차 없어. ' ' 제가 드리겠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름도, 저도, 마음도, 이 세상까지도! ' 아직도 마음을 불태우고 과거를 불태우는 그 짙붉은 노을속에서 빛나던 그의 한 줄기 눈물을 기억한다. ' 네가 나에게 이름을 준다면, 너를 위해 살겠다. ' 그래서 카멜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소년에게 리아트리스라는 이름을 주었고,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지위도 주었고, 자신도 주었다. 그리고 어젯밤, 카멜은 자신이 주었던 그 모든 것의 댓가를 돌려받았다. 이제 그의 몸속에 각인 된 것도 자신의 것이었다. 아스의 체취에 몸을 묻었고, 그 아름다운 육신을 자신의 안에 각인시켰다. 사랑스러웠다. 카멜은 아스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켜내고 만들어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은 아스의 것이었고, 이제 아스도 자신의 것이었다. 침묵도, 카멜의 분노도 내려앉자, 월이 말했다. " ... ... 무스카리와 아스님의 그 행적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는 불안한 자리에 큰 흠이 됩니다. 헌데 두 사람의 관계까지 알려지게 된다면... 아리스타타의 원수인 무스카리에게 트리옌의 존망이 달린 에린지움의 심장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모든 트리옌이 생각하게 될 겁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이 전시에, 카멜리아님의 발목을 잡는 존재라 한다면... 아무쪼록 모든 것을 조심하십시오. " " ... 자네의 주군은 펜 오키드인데, 어째서... 말하지 않았지? " " 저의 주군께서는 그러한 스캔들 따위가 없어도 에린지움의 걸음이시고 그 누구보다 강인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증거하는 나의 주군께 타인의 것으로 존재하는 사람따위는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 " 그 말을 후회하지나 않게 될까 걱정이군. " " 고마우시다면 언제 대련이나 함께 해주시지요. " 펜이 테라스에서 나왔다. 그녀는 카멜에게 짧게 목례하며, 아스에게 했던 말 그대로를 전하는 화사한 미소를 짓고는 월과 함께 어둑한 복도로 사라졌다. 카멜은 잠깐의 시간을 그대로 보낸 후, 아스의 마음이 어느정도 다 진정되었으리라 생각한 때에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 뿌연빛깔의 하늘 위로 적의 공격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카멜이 아스를 바라보았고, 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여기에 있을께. 다녀와. " 카멜은 엷게 미소짓고는,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엷은 풀들이 발치에서 날아오르고,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가 순식간에 성의 담장을 넘어버린 카멜에게서는 어느새 살의가 무럭무럭 피어나고 있었다. 차분하고 안온했던 눈매가 오랫동안 달궈온 증오로 날카로워지고, 카멜은 아스의 앞에서는 숨겨왔었던, '날개 살해자'로써의 그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쐐애애애애액-!!! 커다란 날개들이 하늘을 활강했다. 장마가 끝나고 내려쬐이는 불볕이 날개의 얇은 피막위에서 튀어올랐다. 카르릉, 이를 드러낸 짐승의 무기는 희게 빛나고, 전의로 불타오르는 눈동자는 뜨거운 햇살과는 달리 차갑다. 어제의 승리에 대한 사기에 힘입어 용족들이 기습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단시간 내에 이동할 수 있는 날개를 지닌 용족들에게 기습은 굳이 몸을 숨길 필요가 없는 공격이었다. 빠르고 강한, 선별된 오십여명의 용족들은 번쩍이는 화살촉처럼 드라세나의 성벽안으로 날아들었다. 투석기 위에 돌이 실리고, 수많은 화살들이 용족들을 노리고 제비처럼 뛰쳐올랐지만 용족들은 기다란 꼬리를 방향을 잡아가며 바람을 타고 쐐액 몸을 뒤틀었다. 미처 정비하지 못한 공격라인은 두서없이 화살을 뿜어내었고 그 공격들은 큰 의미가 없었다. "끄아아악!!! " 성벽위에 서 있던 궁수 하나가 발톱에 나꿔채졌다. 그 용족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빨로 인간을 갈갈이 찢어 우왕좌왕 모여들고 있는 병사들 사이로 집어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아있던 두개골이 터지고, 비명과 분노의 고함이 하늘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홰애애액- 용족들이 성벽위를 선회하며 병사들을 하나 둘씩 떨어트리는 날갯짓 소리가 요란하고, 소환군을 애타게 부르는 목청이 울렸다. 누군가가 던진 장창을 한 용족이 물어 던지고, 무서운 기세로 날아 달려 도망치는 그의 머리를 짓씹어 삼켰다. 싸아아아아----- 갑자기 차가워지는 공기를 느끼고 한 용족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늦은 뒤였다. 날개가 꿰뚫리는 진동음과 함께 용족은 비명을 지르며 성벽 바깥으로 추락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용족의 날개에는 무수한 얼음의 창이 박혀 있었다. 정령을 부리는 트리옌 소환부대가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순간적으로 날개를 얼어붙게 만드는 바람이 이빨을 드러내며 용족을 덮쳤고 용족들은 일시에 높이 날아올라 그 공격들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시일뿐, 용족들은 탑이나 지붕 아래로 숨은 병사들을 잡아내기 위해 건물들을 부수기 시작했고 무너져 내리는 바위 때문에 많은 부상자들이 나고 있었다. 장마가 끝난 더위는 물의 정령에게 큰 힘을 실어주지 못하고 있었으며 성의 바로 위에서 용족들이 날뛰고 있었기에 투석기나 화살들은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펜 역시 보고 있었다. 위험하다고 몸을 물리라는 월의 외침도 무시하고 창문에 매달려 하늘을 선회하는 용족들을 바라보던 펜은, 입술을 깨물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처럼 흔들리고, 주변으로 파문과도 같은 기운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성벽 아래에서 거대하고 붉은 몸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붉은 날개는 밤의 장막을 빌려온 것 처럼 크고 거대하고 불길했다. 이글거리는 황금색 눈동자는 폭주하는 태양을 그대로 갖다 박아 놓은 것 같다. 수많은 상처와 흉터들로 날개끝은 너덜너덜했지만 그것마저도 공포스러웠으며 다른 용들보다 유독 길고 붉은 갈기와 서슬퍼런 빛을 뿜는 발톱은 초승달의 날카로운 조각 하나를 훔쳐와 박은 듯 했다. 그것은 주변에 있던 용들마저 물러날만큼 크게 홰를 치더니 곧장 펜이 서 있는 성의 건물 벽을 쳤다. 쿠웅! 하는 소리고 울리고 창문이 와장창 깨어졌다. 월이 앞으로 뛰어가 쏟아지는 유리들로부터 펜을 가로막았고, 창문 안을 휘저었던 발톱이 멀어지자 몸을 날려 문틀위로 뛰어올랐다. 성벽바깥으로 크게 선회하여 날던 무스카리는 창문위에 올라선 트리옌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퍼져나오고 있는 에린지움의 기운때문에 틀림없이 저 곳에 있는 것이 아스라고 생각했는데, 곁을 지키고 있는 트리옌이 카멜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또다른 에린지움의 걸음인 펜 오키드는 지금 축복의 성에 꼭꼭 숨어있다. 무스카리는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그대로 다시 그 창문가로 날아들었다. 월이 불러일으킨 거센 바람의 저항이 일부 날개끝을 잡아 끌었지만 무스카리는 무시했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날선 발톱을 곧추세웠다. 창문을 가로막고 선 월의 뒷편으로 언뜻 은빛 머리카락이 보인듯 했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무스카리의 귓전을 울렸다. 주변이 있던 공기가 일순 사라진 느낌이었다. 날개를 실은 바람의 느낌도 없어지고, 잠깐의 진공상태, 시간이 멈춘듯한 순간이 지나자 에린지움의 느낌이 실려오던 그 창문께에서 무서운 바람의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충격으로 그 창문은 물론이거니와 벽과 지붕이 모조리 터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맴돌던 용족들도 튕겨나가 날개가 찢기거나 성벽에 처박히거나 했다. 무스카리도 갑작스러운 압력에 그 거대한 몸이 바깥으로 날려갔으며 날개의 일부가 북, 하고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고통이 뒤따랐다. 무스카리는 찢어진 날개를 주체못하고 땅으로 비틀거리며 떨어졌고, 부서진 건물에 서 있는 회청은빛 머리카락이 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펜 오키드. 같잖은 그 에린지움의 계집년이!!! 무스카리는 땅으로 떨어지기 전 폴리모프를 풀었다. 쿵, 하는 굉음대신 털썩,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무스카리는 땅에 착지했다. 그는 우연하게 몸을 굴려 충격을 완화시키고는, 깊이 파인 팔뚝의 상처를 돌보지 않고 앞으로 뛰었다. 펜이 이곳에 와 있다면, 아스의 기척을 읽어낼 수 없는 자신으로써는 에린지움의 기운으로 아스가 어디있는지 알 수 없다. 무스카리는 짜증과 함께 울분이 겹치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대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심연의 정령수를 불렀다. 정령수는 자신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검에 휘감겼고, 굳게 닫힌 성문에 이르르자 무스카리는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꽈앙! 거센 폭발음과 함께 성문이 불타오르며 산산조각이 났다. 후둑 후둑 떨어지는 성문의 잔재들을 헤치며 무스카리는 얼굴을 찌푸린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날개가 있는 용족에게 이딴 성문따위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날개를 다친 이상 계속 하늘을 날아 공격하다가 또 날개를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인 것이다. 하지만 무스카리에게는 정령수가 있었고, 그것은 폴리모프를 하나 하지 않으나 큰 차이가 없었다. 무스카리는 반드시 그 펜 오키드 계집애를 잡아 족치겠다고 이를 갈며 자신의 위로 떨어지는 불씨를 검으로 쳐 날렸다. 검이 바깥쪽을 향한 그때, 무스카리의 안쪽으로 무엇인가가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무스카리는 헛숨을 삼키며 크게 뒤로 물러났다. 균형을 잃고 뒤로 나자빠질 뻔 했지만 무스카리는 훌쩍 뛰어 자신의 심장에 검을 겨눈 사람에게 목숨을 내어주는 일만은 막았다. 무스카리는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자신이 균형을 잡은 그때 벌써 뒤를 돌아 검을 내리긋는 카멜을 본능적으로 막았다. " 카멜. 이렇게 검을 실제로 검을 마주대하는 것은, 오랜만이 아닌가...? " 삐뚤어진 빈정거림이 절로 우러났다. 자신의 위로 공중제비를 뛰어넘어 물러서는 카멜의 금발머리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그래그래, 비로소 실감이 난다고 생각했다. 날개 살해자, 저 아름다운 트리옌과 검을 맞대지 않으면 에린지움의 심장을 갖기 위한 이 전쟁도 큰 의미가 없다. 반드시 이 손으로 저 트리옌의 목을 자르고, 본체를 불태워야만 그것은 완전한 자신의 것이 될 터였다. 무스카리는 음험한 눈동자를 들어 자신에게 검을 겨눈 카멜을 바라보았다. 카멜은, 감정을 숨긴 눈동자로 그의 시선을 마주대하며 낮으막히 뇌까렸다. " ...우리에게 시간이 큰 의미가 있던가? " " ... 없지. 몇백년을 그녀만, 그리고 서로를 증오하는 데엔 다른 어떤 장식도 필요없어. " 바람이 불어, 흩어져있던 재와 불씨가 날아올랐다. 무스카리의 붉은 머리카락과 카멜의 금빛 머리카락이 태양빛을 뿌리치며 흩날리고 조용하고 근원적인, 지독히도 차분하고 냉엄한 증오가 바닥에 깔렸다. 무스카리가 그다운 비웃음을 입가에 머금었고, 카멜 역시 그다운 침묵과 무표정을 지켰다. " 와라. " 무스카리의 권유가 끝나기도 전에 카멜의 검격은 시작되었다.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왈츠를 추는 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검이 번쩍이는 빛이 반복되었다. 그 어떤 망설임도 두지 않은, 필사의 공격이었지만 그것 역시 필사의 방어에 의해 막혔다. 공격과 방어는 때로 자리를 바꾸며 반복되었고, 그것은 두 사람에게는 목숨을 걸고 시간을 깎는 사투였지만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쓸데없는 검의 부딪힘으로 보일법한 지루한 시간이었다. 깡!!! 갑작스레 공격진로를 비꾼 카멜이 뒤로 깊숙히 물러났다가 무스카리에게로 펄쩍 뛰어올랐다. 무스카리는 카멜의 체중을 검에 모두 받으며 그것을 막아내었다. 서로의 숨결마저 들릴것 같이 가까운 거리에서 두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무스카리는 깊히 숨을 들이키며 카멜을 떨쳐내었다. 그리고, 언뜻 스쳐가는 향기의 꼬리. 무스카리는 카멜 특유의 체취에서 익숙한, 잊으래도 잊혀지지 않을 향기를 맡았다. 아스의,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던 때의 가장 농염하고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미약과도 같은 향기. 질투라는 무서운 짐승이 무스카리의 머리를 장악했다. 뜨끈하게 피가 오르며, 무스카리는 카멜이, 저 카멜이, 아직 자신도 한번 만져보지 못한 리아트리스의 그 몸에 자신을 묻었음을 깨달았다. 눈물방울이 맺힌 그 달궈진 시선으로 카멜을 바라보고, 새된 신음과 외침으로 카멜의 이름을 불렀음을 상상했다. 카멜의 것이 아스의 가장 깊숙한 곳에 묻히고, 카멜이 그 달콤한 입술과 혀를 자신의 입 속에 머금었음을 알았다. 자신이, 자신이 수없이 부둥켜안고 부볐던, 하지만 진실로 가져본 적은 없던, 억지로 자신의 것을 묻었던 그 몸을... 카멜이, 카멜이. 카멜, 카멜, 카멜, 네가... 네가!!!! " 카메에에에에엘!!!!!!!!!!!!! " 무스카리의 그림자에서 무서운 불꽃의 야수가 이빨을 벌리고 뛰쳐나왔다. 카멜은 검을 휘둘렀지만 정령수에게 검은 통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정령들이 몸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뜨거운 열기에 비명을 지르며 사라져갔고, 카멜은 뒤이어 짓쳐든 무스카리의 검을 순간 피하지 못했다. 카멜의 동공이 커지고, 월이 아래로 뛰어내리고, 무스카리의 눈동자가 곧 사라질 그 눈동자의 빛을 탐색했다. 그 장면을 바라보던 펜의 비명이 하늘을 울리고, 갑자기 그녀는 의식을 잃고 반쯤 무너진 바닥으로 쓰러졌다. 무스카리의 검이 일순 카멜의 목을 스친것 같은 순간이었다. 구웅-- 하는 울림과 함께 에린지움의 흰 그림자가 성벽을 쓸었다. 끼이이이이잉- " ...! " 무스카리는 카멜의 목에 바로 갖다대어진 검에 힘을 주었지만, 그 찰나의 공간을 두고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을 뒤로 젖힌 카멜의 녹색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굳어 있고, 검날은 자신의 몸에 카멜의 투명한 피를 묻히는 대신 갑자기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는 햇살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햇살이 환희에 차 미쳐 들끓고 있었다. 빛무리가 파도라도 치는 듯 눈부심이 주변을 가득 메웠고, 이빨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도, 비명과 고함소리도, 방금전까지 홰를 치며 하늘을 어둡게 만들던 용족들도 모든것이 사라진 듯 했다. 두웅- 하는 진동과 함께 무스카리는 카멜의 목을 내려긋기는 커녕 뒤로 밀려났다. 보통 사람이라면 성문 밖으로 튕겨났어야 마땅한 파동이었지만 무스카리는 발끝에 힘을 주고 더이상 밀려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강력한 압력에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팅기고 있는 무스카리와는 달리, 카멜은 아무런 영향도 받고 있지 않는 듯 했다. 그는 무스카리에게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고 무스카리는 그곳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카멜 때문에 가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무스카리는 하마터면 비켜! 하고 소리칠 뻔 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모습을 드러낸 한 남자 때문에 곧 삼켜졌다. 빛의 망토라도 두른듯한 모습으로 차분히 걸어나온 것은 회청은빛 머리카락의 청년이었다. 다부진 턱과 꼭 다문 입매, 날카로운 눈동자는 청록색. 사슴과 같은 걸음걸이로 카멜의 곁에 다가선 그는, 감정없는 눈동자로 무스카리를 바라보았다. 무스카리는, 정령수를 부르는 것도 잊고 그 시선을 마주보았다. 빙설같이 차가운, 항상 정념의 불길로 타오르는 자신의 마음마저 얼려버릴 듯한 청록빛. 무스카리는 자신도 모르게 뇌까렸다. " ... 아리스타타-? " 아스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공포와 분노, 세상의 모든 증오란 증오는 다 담은 듯한 얼굴로, 그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 무스카리---------!!!!! " " 으윽! " 무스카리는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용족을 거부하는 에린지움의 힘에 튕기어 성문 밖으로 날려졌다. 그와 동시에 하늘까지 닿은 에린지움의 흰 그림자가 섬뜩한 섬광을 발했고, 일순 거대한 힘의 파동이 드라세나의 성벽 주변으로 해일처럼 밀려나갔다. 성벽위를 맴돌며 기습을 하고 있던 용족들도 그 힘에 휘말려 비명을 지르며 튕겨나갔고 그것은 곧 그것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트리옌의 진영을 스쳐지나 용족들을 덮쳐들어갔다. " 안돼!!! " 에린지움의 힘이 모두 폭발한 듯한 저 파동이 용족들을 때려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무스카리가 손을 쓰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용족의 군대가 산산조각이 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에린지움의 파동이 덮치기 전, 커다란 마법진이 떠오르며 그들을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새파란빛으로 번쩍이는 그 마법으로 이루어진 장벽은 불길한 빛을 뿌리며 에린지움의 힘과 부딪혔다. 꺼어어엉!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섬광이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할 것 처럼 번쩍였다. 무스카리는 빛을 가리며 결계가 쳐져 있는데 누가 어떻게 마법을 썼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곧 거짓말처럼 에린지움의 힘이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귀가 멍멍한 진동이 사라지자 잠시 청력이 어찌 되기라도 한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무스카리는 뒤를 돌아 성문 안을 봤고, 아스의 짧은 은빛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카멜의 품속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뿌득, 무스카리는 이빨을 짓씹었다. 그랬나, 그런거였나, 그런거였어 아리스타타!! 카멜의 목숨이 위기에 처했던 그 순간, 아스가 순간적으로 에린지움의 힘을 모조리 끌어와 카멜을 보호했던 것이다. 그리고 에린지움의 힘이 모조리 아스에게 몰린 그 순간... 무스카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항상 수많은 감정의 빛을 뿌리고 다니는 아스는 절대로 그런, 그런 차가운 눈을 할 수가 없다. 그 눈동자는, 자신이 익히 알던, 그녀를 침대에서 그녀를 짓누를때마다 보아왔던 그 빛이었다. 아스의 속에 잠들어있던 아리스타타가 깨어난 것이었다. 아스가 본능적으로 끌어모은 에린지움의 힘이 아리스타타를 일으켜 세웠고, 무스카리를 본 그녀가 무서운 증오로 에린지움의 힘을 폭발시키다시피 한 것이다. 하지만 그 덕에 결계는 풀어진 상태였으며, 레제다가 마법으로 에린지움의 힘을 견뎌낸 것이다. 그 충격으로 아스는 의식을 잃었으며 에린지움의 힘은 흩어져 버렸다. 무스카리는 용족들사이에서 새파란 번개와도 같은 날개 한쌍이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레제다 튜베로즈, 그였다. 펜 오키드도 어찌된 것인지 결계는 다시 발동되지 않았고, 결계가 없는 이상 용족들에게 이보다 더한 기회는 없을 터였다. 레지가 그 특유의 시퍼런 마법의 스파크를 일으키며 선봉에 서자, 용족들이 모조리 폴리모프를 풀고 하늘로 떠올랐다. 곧 레지가 불러일으킨 번개가 성벽을 때렸고, 그것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짐과 동시에 성벽안에서 아우성이 일어났다. 무스카리는 아스를 안고 안쪽으로 피신하는 카멜의 금발머리를 쏘아보았다. 놓칠줄 아느냐 카멜? 무스카리가 다시금 성문 안쪽으로 뛰어듦과 동시에 무서운 번개의 폭격이 성벽을 모조리 무너트렸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용족들의 날개 그림자가 드라세나를 뒤덮었다. 콰아앙!! 용족의 꼬리가 탑을 때리고, 돌덩이들이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파편들이 도로에 박히고 사람을 짓누르고 돌담을 부숴뜨리는 가운데, 무스카리는 몸을 날려 카멜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스를 품에 안은 카멜은 그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검을 꽉 움켜쥐었다. " 무스카리... " " 카멜, 카멜. 내가 너를 얼마나 미워해야만 이 증오가 가실까? " 무스카리의 그림자에서 검붉은 짐승의 얼룩이 피어났다. 무스카리의 입가에서 늘 카멜을 대할 때마다 피어나던 그 비웃음은 지금 찾아 볼 수 없었다. 카멜을 비웃기엔 그의 진노가 너무나 커다랬다. 카멜의 몸에 배여있는 아스의 향기와, 아마도 본능적으로 에린지움의 힘을 모두 끌어모아 카멜을 보호한 그의 행동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지만, 무스카리는 묻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 그를 안았나? " 카멜은, 자신의 품에 안겨 의식을 잃은 아스를 바라보았다. 펜 오키드도 아스가 폭주하면서 그 힘에 끌려가 의식을 잃은 듯 했고, 덕분에 결계는 와해되고 드라세나는 무너졌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아스를 안은채 무스카리와 대치하고 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카멜은 자신이 그를 안았던 그 날 밤, 욕실에서 무스카리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던 아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나간다. 아스를 안았냐고? " 그래. 이 분을 안았다. " 너를 잊지 못해 몸부림치는 아스를. 너의 손길에 길들여진 이 몸을 내가 품었다. 카멜의 마음 속에서도 수백년 묵은 증오와 질투가 피어났다. 아리스타타님을 그렇게 납치해 너의 침대위에서 능욕하고, 다시 환생한 아스님마저 너의 그 사랑같지 않은 집착으로 더럽혀 놓고서는... 너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아스를 네놈 대신 안아줄 수 밖에 없었던 나를 그렇게 질투하는 거냐?! 삐뚤어진 우월감과 비참함을 불러일으키는 열등감. 무스카리의 금빛 눈동자에서 시커먼 분노가 울렁울렁 흘러나왔다. 주변이 시커먼 어둠으로 들어차는 것 같은 살기가 카멜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카멜은 살기를 피워올리는 대신, 입가에 삐뚜름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무스카리, 항상 네가 이런식으로 웃었더냐? " ...그를 돌려줘. " " ...애초에 너의 것이 아닌 분이 아니냐? 이분의 이름도, 이분의 존재가치도 모두 내가 주었다. 네가 빼앗아간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채웠어. 너에게 더렵혀진 몸마저도 내가 씻겼으니, 이제는 나의 것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 " 크아아앗! 카메에에에엘!!! " 사랑하는거냐? 카멜을 사랑하는거냐 아스!!! 에린지움의 힘을 모두 끌어와 그를 보호할 만큼!!! 푹. 하지만 카멜에게 덤벼들려던 무스카리는 우뚝 행동을 멈추었다. 그의 어깨로 긴 장검이 끝을 뾰죽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그 장검의 끝이 그의 어깨안으로 사라지자 피가 흘러내렸다. 무스카리는 천천히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쥬니퍼 가문의 인장이 박힌 쌍검을 들고 서 있는 파란 고수머리의 소년이 서 있었다. 스타티스는, 떨리는 걸음으로 자세를 곧추잡으며 카멜에게 짧게 말했다. " 아스를 부탁드립니다. " 카멜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에게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현재 결계와 드라세나는 무너졌고, 아스는 의식을 잃은채 자신의 품 속에 있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싸우기엔 에린지움의 걸음인 아스의 심장이 위험했다. 에린지움의 심장을 뺏기는 일은 트리옌의 멸족을 의미한다. 선택은 당연한 방향을 가리켰고, 카멜은 갈색 꽁지머리를 한 명랑한 다갈색 눈동자의 왕자를 떠올렸지만 이쪽으로 날아들기 시작하는 용족들의 그림자에 서둘러 뒤돌아 뛰었다. 쐐애액 용족 두마리가 땅위를 가로지르듯 낮게 날며 카멜을 쫓았다. 무스카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감히, 감히 용족의 제왕에게 칼을 꽃아넣은 당돌한, 하지만 목숨을 버린 짓을 저지른 인간소년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아스를 닮은듯한 동그란 얼굴. 하지만 기사견습생이던 그때와는 달리 정규 기사제복을 입은 그 모습은 엄연한 한 사람의 남자이고 전사였다. 무스카리에게 곧 죽일 상대에게 말을 거는 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물었다. " 홀로 남게 될 2왕자를 생각하지는 않은 거냐? " 스타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 ...심장을 노릴 생각이었지만 너의 정령수가 방해하더군. ...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분에겐 태자의 위협이 되는 호위기사보단 용족의 제왕과 싸우고 에린지움의 걸음을 지킨 호위기사의 명성이 더 필요할 겁니다. " 무스카리는 이것은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척살이라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무리 검의 천재라 불려지던 소년이었지만, 인간인 이상 그의 실력은 무스카리가 뒤를 신경쓰지 않은 사이 정령수를 피해 어깨에 검을 꽃아넣을 정도였다. 붉은 피가 하늘로 튀어오르고, 충격으로 몸을 뒤로 젖힌 스타티스의 눈동자에 맑은 하늘이 가득 어렸다. 하지만 스티가 그 순간 본 것은, 눈부시게 맑은 하늘도, 뜨거운 빛을 뿜어내는 태양도, 하늘을 여유롭게 떠가는 여름의 구름도 아니었다. 태자가 아닌 자신을 선택한 스티를 보고, 한숨처럼 한마디를 속삭이던 그의 얼굴이었다. 꼬리처럼 팔락이는 갈색 머리카락, 깃털처럼 가벼운 발걸음, 맑고 총명한 눈동자, 늘 스티-라고 자신을 부르던 그 목소리. ' ... 허락한다... ' 제 죽음도 허락해 주실까요. 제피란더스님. 푸른색 고수머리가 아래에 고인 핏물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스는 숲 속에 서 있었다. 적막이라 표현될만치 조용한 숲 속.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숲 그림자 너머에서 자신을 꿰뚫는 너무나도 강렬한 시선과 눈이 마주치면, 자신은 그만 그 시선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게 된다. 숨조차도 쉴 수 없다. 하지만 고개를 돌릴 수도 없다. 무언의 부름에 머뭇거리며 걸음을 내민다. - 안돼!!! 무엇인가가 자신의 팔을 잡아챈다. 아스는 뒤를 돌아보았고,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에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짧은 회청은빛 머리카락, 청록색 눈동자. 이제 남자의 태가 나기 시작하는 청년의 얼굴. 그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은 아스를 보고, 날카로운 눈매를 흐려뜨리며 말했다. - 가지마. 그는 너를 짓밟고, 너의 마음을 빼앗아 뭉개버릴거야. - 너는... 누구? - ... 리아트리스. 아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 아니야, 리아트리스는 나야. 너는 누구지? 아스포델인가? - ... 고요한 호수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아스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스는 그의 이름을 말하려 했지만 그는 아스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 나는 너고, 너는 나야. - 너는... !!!! 드라세나는, 너무나도 손쉽게 함락되어 버렸다. 연합군은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은 용족들의 일제 공격에 많은 손실을 입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병사들의 피해가 적었던건 후퇴하는 연합군을 쫒아오던 용족들이 다시금 결계가 발동되자 인간모습으로 되돌아가버렸기 때문이었다. 피난민과 뒤섞여 간신히 진영을 정돈하기 시작한 연합군은 드라세나의 인근 숲으로 숨어들어 드라세나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다들 이 어처구니 없는 패배에 크게 낙담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제피는 그런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푸른색 고수머리를 찾고 있었다. 평소같으면 벌써, '다행입니다, 제피님. 곁에서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며 모습을 드러내었어야 정상인데, 정신없는 판국에 아버님과 형을 도와 기사단과 함께 여기까지 도망쳐 오고 나자 스티가 안보인다는 사실에 불안해졌다. 어디가서 자기몰래 고꾸라져 죽을만한 녀석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걱정이 되었다. 스티가 안다면 틀림없이 '왕자님 걱정이나 하세요' 하고 빈정거릴테지만 드라세나를 그렇게 빼앗기고 도망쳐 와 있다보니 그가 보이지 않자 무척이나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지나치던 기사를 붙잡고 물었다. " 이봐, 혹시 스타티스 보지 못했는가? " " 아니요. 워낙 난리통에 저희 기사단은 남쪽 성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 " 그는 거기 없었는가? " " 예, 보지 못했습니다. " 그때 지나가던 다른 기사가 말했다. " 스타티스라면, 저희와 함께 성문쪽에 있다가 안에 남아계신 분이 없는지 살피겠다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 " 마지막으로 나온 인물이 누구였지? " " 장검을 든 트리옌 한명과, 짧은 은색 머리카락의 소년이었습니다. " 카멜과 아스다. 제피는 소년이 아니라 소녀 아니냐, 에린지움의 걸음은 여자라던데, 아니다 라고 말하는 기사들을 두고 몸을 돌렸다. 제피는 트리옌들의 진영으로 걸어가 거기에 쳐져 있는 두개의 막사중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트리옌이 없는 쪽으로 들어갔다. 안의 간이침대에 누워있는 아스의 파리한 얼굴이 보였고, 그 곁을 지키고 앉아있던 카멜이 고개를 돌렸다. " 제피란더스 드라세나... " " 죄송하지만 물어볼 것이 있어 왔습니다. 아스는 좀 괜찮습니까? " " ... 의식이 돌아오질 않고 있다. " " 펜 오키드님은 의식이 돌아오셨던 것 같던데요. " " 그래. 그녀라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결계를 발동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연합군이 괴멸될뻔한 큰 위기였다. " " 그렇습니까... 갑자기 왜 결계가 사라진걸까요. " " ... " 카멜이 침묵을 지키가 제피는 자신이 그런걸 물으러 온 것이 아니란걸 깨달았다. " 저... " " 쥬니퍼 가문의 그 호위기사 말이냐. " " ... " 카멜은 이미 제피가 무엇을 물으러 왔는지, 이미 그가 올 것까지 예상한 듯한 모습이었다. 제피의 눈동자가 커졌고, 그는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막사안에 켜놓은 조그만 촛불이 어디에선가 들어온 바람에 파르르 흔들리며 그림자에 얼룩을 만들어 내었다. " 그는 훌륭한 기사였다. 그가 없었다면 연합군의 괴멸은 물론이거니와 리아트리스님의 심장까지 빼앗길뻔 했다. 용족들이 무수히 덮쳐드는 상황에서 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탈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 " 그럼... 스티는요? " " ... 그가 무스카리의 어깨에 칼을 꽂았고, 우리를 보내고 대신 남았다. "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숲의 저주, 그 무스카리와 남은 것이다. 드라세나는 이미 함락되었고, 그는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인간이, 인간이 그와 검을 마주대하여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제피는 고개를 흔들었다. 스티는 다를 터였다. 그는 검의 천재였고, 드라세나에서는 그와 검을 겨룰 자가 없는 우수한 기사였다. 그의 실력은 트리옌들에 버금갈만 했으며 아직 나이가 어린데도 그 정도의 검술이니, 나이가 먹으면 검술의 지경에 이르러 그 이름을 대륙역사에 길이 남기게 될 그런 사람이었다. " ... 그에게 이기지는 못했을거라도, 무사히 도망은 쳤을 겁니다, 그렇죠? 다만 아직 늦어지고 있는 것 뿐이겠지요. " " ... 호위기사로써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등 뒤에서 찌르는 정당하지 못한 행동은 했을지 몰라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도망갈리는 없다. " "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은 바로 접니다. 저의 허락도 없이, 저를 지키다가도 아닌 그런 곳에서 죽을리 없어요. " " 에린지움의 걸음의 심장을 빼앗기는 일은 트리옌의 멸족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드라세나 왕가의 몰락과도 직결된다. 리아트리스님을 지키는 일이 곧 너를 지키는 일과도 같다. " " ... 아니야... " " 그에게 빚을 진 사람으로써, 진심으로 애석하게... " " 아니야!!!!! 제기랄, 스티가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란 말입니다! " " ... " 카멜은 일견 냉정해보이기까지 한 녹색 눈동자로 제피를 바라보았다. " 포로가 되었을겁니다. 아마 그럴거야. 무스카리는 스티를 알고 있어요. 함께 축제에서 논 적도 있는 걸요. 그런 그를 쉽게 죽을리 없어요. 그가 쥬니퍼의 독자인 것도 아는데, 그냥 죽이는 것 보다는 포로로 삼아 협상하는 쪽이 훨씬 낫잖아요? 협상을 제의해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사시켜서 그를 데려오면 돼요. " " ... 무스카리가 자신의 몸에 검을 꽂은 인간을 살려둘리 없다. " " ... 그런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일 틀림없이 협상제의는 들어와요! 그는 아직 멀쩡해요! 그가 내 허락없이 죽을리 없어... 허락한 적도 없고 허락하지도 않을거니까! " 제피는 몸을 홱 돌려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카멜은 멀어져가는 그의 정신없는 발소리를 들었다. 드라세나의 2왕자로서 쥬니퍼 가문의 독자가 호위기사로 선택한 청년. 주변의 방해와 시기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었던 두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카멜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제피의 고통을 생각하자 오래 묵었던 가슴의 통증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그 자신도 아리스타타님이 죽었을때 얼마나 괴로웠던가. 내장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듯한 고통속에 그가 숲 속을 헤매리라는 것을 알았다. - 그런 이야기 따위 인정할 수 없어! 피지 못할 사정따위란게 뭐야? 자신이 원하면 행하는 거야! 그것이 나의 정의야! - 나, 네가 마음에 들었어. 내 성은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거야. - 곁을 떠나지 않으며, 당신의 정의를 지키겠습니다. 허락한다고 말해주십시오. - 당신이 그러지 않겠다면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당신의 호위자가 되어서. 물결같은 푸른빛 고수머리, 하늘을 그대로 담아놓은 눈동자. 왕이 되어달라 간청하던 그에게 얼마나 섭섭했던가. 왕이 아니라면, 내가 왕의 재목이 아니라면 나의 곁에 있지 않을건가? 너는 단지 왕이 된 나의 모습만을 싶은거냐? 그저, 그저 아무런 쓸모없는 드라세나의 2왕자로는 너를 만족시켜줄 수 없는 거냐... 욕심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늘 자신의 곁에 있어준 그 아름다운 소년의 옆모습이, 그저 자신을 아무런 조건없이 바라봐주는 사람이 아닌것이 싫었다. 왕 따위는 되기 싫다. 왕이 되어 마음에 없는 여자와 결혼하여, 죽을때까지 그의 호위나 받으며 살긴 싫다. 자신 때문에 그가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그저 친구로써,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나의 곁에 있어주었으면 했다. 자신이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했다. 제발, 제발 나를 떠나지마 스티. 숲속에 웅크려 우는 제피의 갈색 머리카락위로 달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크르르르렁... 레지가 다가가자, 무스카리의 그림자에 깃들여져 있는 야수가 이를 드러내었다. 무스카리는 성 한쪽의 자그만 방안에 서 있었다. 레지는 들어서자 마자 왜 그 방에 무스카리가 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토록이나 달콤한 트리옌들의 체취. 무스카리는 어둑한 눈동자로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고, 레지는 쉽게 그 위에 몸을 눕혔을 사랑스러웠던 꼬마와 그를 죽도록 사모하는 아름다운 트리옌을 상상할 수 있었다. " ...카멜인가? 드디어 소원성취 했나 보군. " " 때를 맞춰 공격을 시작해 준 것 고맙게 생각한다. " " 네가 인정사정 없이 짓눌렀던 때와는 틀렸겠지? 한층 요염해졌을 얼굴로 그의 품안에서 앙앙거리고 울었겠지. 음-!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이 향기, 날이 새도록 함께 결합하며 쾌락과 환희를 나누었을거야. " " 덕분에 어려운 관문이 되리라 생각한 드라세나를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 " 너는 단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기쁨이 아닌가? 네가 짓누를때마다 그녀는 신음은커녕 비명도 지르지 않았지. 너의 그 얼음여왕님이라면 차라리 괜찮았겠지?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을 그런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그 아름답고 강한 트리옌에게 모든것을 주었군. " " 입 다물어!!!! 레제다 튜베로즈!!! " 크어어엉...! 질투로 물들어 고통에 날뛰는 황금빛 눈동자. 레지는 겁을 먹기는 커녕 웃음이 나왔다. 즐거웠다. 그래. 너에게 어울리는 것은 그런 음험하고 괴롭고 징그러운, 그런 짐승의 눈동자지. 레지는 자신의 이런 비웃음이 그를 극심하게 자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질투로 미쳐버릴 지경일테고, 그 분을 삭히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웃었다. 무스카리는 한손에 그의 목을 틀어잡았고, 레지는 어쩔 수 없이 그 웃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신음소리가 안으로 삼켜지고, 바짝 들린 목이 조여오며 괴로움을 선사했다. " 죽고 싶나 보군. " " 큭... " 하지만 레지는 무스카리가 아무리 자기를 싫어해도 자신을 없앨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예상과 같이 무스카리는 곧 그를 벽으로 집어던졌으며 레지는 나동그라지면서 숨을 켁켁 골랐다. 그리고나서도 벌러덩 드러누워 껄껄 웃음지었다. " ... 제기랄, 입 닥쳐!!!!! " 크어어어어어헝!!!! 그의 그림자에서 검붉은 짐승이 튀어나와 레지의 목줄기 앞에 화염의 침을 떨어트리며 울부짖었지만 레지는 웃음을 멈출 마음은 없었다. 그는 되려 더 크게 웃었다. " 하하하하하!! 꼴 좋구나 무스카리! 뺏고 약탈하는 네가 가지지 못하는 것도 있구나! 아아, 나는 그것을 거듭 확인할때마다 즐거워 미치겠어. 좀 더 질투해봐, 좀 더 성내보란 말이야! 모든 불타는 것들의 제왕이신 무스카리, 사랑의 초조함에 몸을 떨며 괴로워해봐! " " ...나가. " " 하하하하!!! " " 나가! 내 눈앞에서 꺼져!!!! " 콰앙!!! 굉음과 함께 레지는 갑작스레 열린 문 밖으로 튕겨났다. 도로 무섭도록 닫히는 문을 보고 레지는 끅끅 비웃음을 삼켰다. 그래도 그 방에서 나오기는 싫은거냐? 나를 쫓아낼만큼 아스의 향기가 그립더냐. " 후후, 후흐흐. " 레지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었다. 무스카리를 이렇게 실컷 비웃을 수 있을때만, 가슴의 차가움이 잠시 녹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웃고 나면 그보다 더한 공허함이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비웃을 수 밖에는 없는 자신이 싫어지는 것이다. 레지는 멍하게 성의 천정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뇌까렸다. 왜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는 거냐, 레제다. 그때였다. 레지가 튕겨나온 그 방엔에서, 진동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움직이면 기척이 들킬까봐 레지는 그대로 누워 있었고, 곧 그 목소리가 무스카리가 붙잡아놓은 그 정령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불타는 숲과 같은 목소리로 무스카리에게 말했다. - 너와 나의 계약은 틀림없이 알고 있겠지. " 물론. " - 나는 다만 계약에 의해 머물고 있는 것 뿐.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너의 힘과 목숨은 내가 삼키겠다. 그리고 나를 묶고 있는 지긋지긋한 심연의 속박에서 벗어나겠어. 그런 의미에서 네가 반드시 계약을 지켜내길 바란다. 귀가 징징 울렸다. 레지는 처음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곧 그것이 그 야수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 시끄럽다. 때가 되면 싫어도 가질테니 입 닥치고 있어. " 또 귀가 울리는 느낌. 레지는 그 소리가 잦아들고 침묵이 내려앉자 그 야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 되새겨 보았다. 분명한 것은 무스카리가 자신의 힘으로 그를 억눌러 두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정령수를 누군가 길들여 붙잡아 놓는다는게 가당키나 한 이야기던가? 세상에서 하나뿐인 골든 드래곤 에리카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무스카리는 계약에 의해 일시적으로 그를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힘을 빌려주는 대신 맺은 그 계약을, 무스카리가 제대로 이행해내지 못하면 그는 모든 것을 정령수에게 내줘야 하는 것이다... 무스카리가 어째서 자신의 생명과 힘을 걸고 정령수와 계약했는지는 안봐도 뻔했다. 에린지움의 힘이 고대의 언령마법으로 이루어진 힘의 결정체라 하더라도 그것은 나무다. 물과 바람과 흙 모두와 동조하지만 불과는 결코 그럴 수 없다. 결국 저 정령수는 에린지움의 천적이라 할만하다. 마법을 쓸 수 없는 결계안에서는 저 정령수의 도움이 없다면 절대로 아스를 잡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더더군다나 그가 에린지움의 힘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된 지금은. 무스카리는 그렇게라도 아스를 갖고 싶은 것이다. 몇백년동안 사그라들줄을 모르는 욕망. 허나, 계약내용이 무엇일까... 저 정령수는 무스카리가 틀림없이 계약을 이행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듯 했다. 레지는 방안에서 물건을 때려부수는 소리가 들리자 몰래 일어나 고개를 흔들며 그 방에서 멀어져 갔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막사 중 한 곳에서는, 밤새 잠들지 못한 에린지움의 걸음 하나가 터트리는 분노로 꽉 차 있었다. " ...드라세나까지 함락되다니, 그라시스 숲은 이제 드라이 그라시스 들판일 뿐이고, 우리 앞에 남은 거점이라고는 소도시 안수케 뿐이야. 코앞이 축복의 성이라고! " 펜은 분노에 찬 음성을 터트렸다. 월은 말없이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 그 역시 기절해버린 펜을 데리고 용족들이 덮쳐드는 드라세나를 빠져나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스카리가 카멜의 목을 벤다고 생각하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져 버리며 기절했다... 펜은 월에게 자신이 쓰러진 사이 아스가 그 힘을 썼으며, 온통 끌어모은 그 힘을 제어하지 못해 그 역시 쓰러져 버렸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얼간이! 정신나간 멍청이 같으니라고! 펜은 나오려는 욕설을 삼켰다. 물론 카멜은 잃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전력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계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살리려면 자기 재주껏 살릴 것이지 왜 결계의 힘까지 모조리 끌어와 모든 일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냐! 자신도 쓰러지고, 멍청한 그것도 제 힘을 이기지 못해 쓰러진 사이 결계는 무너지고 에린지움의 힘은 흩어져 드라세나는 함락당했다. 드라세나까지 함락당한 이상 불이 발등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일단 오늘 날이 밝는 대로 안수케로 가서 진영을 꾸리자고 의견을 모았지만, 전망은 불투명했다. 안수케까지 무사히 후퇴나 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을 봉쇄한 결계는 무스카리가 대체 무슨 수로 붙잡아 뒀는지 모를 불의 정령수 때문에 그 효용이 훨씬 줄어들었다. 날개 살해자 카멜리아는 그 얼간이 때문에 발이 묶여 있고, 자신은 그 얼간이가 나타난 덕분이 위축되어 더더욱 에린지움의 힘을 마음대로 쓰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결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 아니던가! 전쟁터에 나가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일이라 그토록 말했건만. "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일을 망쳐?! " " 펜 오키드님... " " 내가 잘못 생각했어. 그냥 둬서는 더더욱 안되었던 거야. 하긴, 그만큼의 전력을 묵혀두는 것 자체가 우습지. " 어떻게든 이용해야 한다. 펜은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을 빼앗길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다가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아침해가 떠오르는 동시에, 아스는 눈을 떴다. 아직도 꿈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자신이 아직 그 숲에 있는지 어디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꿈과 현실과의 괴리감이 사그라들고, 아스는 카멜이 " 깨어나셨습니까? " 라며 자신의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주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자신을 이 곳으로 불러들인 꿈. 지긋지긋하도록 반복되는 꿈. 꿈을 꿀때마다 내용은 조금씩 진척되는 듯 싶더니 어제는 갑자기 바뀌었다. 자신을 붙잡은 자신. 그것은 아리스타타였을까? 아스는 자신이 어떻게 여기 누워있는지를 생각하다가, 퍼뜩 무스카리가 카멜의 목을 날리려던 그때 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카멜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옷이 찢기고 상처가 보이긴 했지만 목이 달아난 것 보다는 나았다. 아스는 카멜이 내미는 손을 더듬어 잡으며 안도의 기색으로 그를 살폈다. 카멜은 살풋 웃더니, 황망한 그의 얼굴을 쓸었다. " 안심하십시오. 덕분에 저는 괜찮습니다. 다 제 탓입니다. 그런 불찰을 끼쳐드려서... 일이 이 지경이 되었군요. " " ... ... 이 지경이라니? " 아스는 자신이 드라세나의 안이 아닌 숲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곧 카멜이 말했다. " 결계가 한동안 사라졌고, 드라세나는 함락당했습니다. " " 뭐...? " 아스는 본능적인 느낌으로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떠올렸다. 카멜이 죽는다고 느낀 그순간, 무엇인가를 재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카멜을, 그를 구하는 것만을 생각했다. 몸에 엄청난 무엇인가가 들이닥친다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기억은 끊겼지만, 아스는 자신이 에린지움의 힘이란 힘은 모조리 끌어모아 카멜을 지켰다는 것과, 덕분에 결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계가 사라진 이상 용족들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마법을 쓰며 들이닥쳤을 것이다. 드라세나는 손쉽게 함락되었겠지. " 그런...!! " " 손실은 컸지만 다행히 아스님도 펜님도 드라세나 왕가의 사람들도 무사하십니다. " " 드라세나가 함락되었다면 축복의 성까지는 코앞이잖아! 펜은... 펜을 만나봐야겠어! " " 아스님. " 카멜은 밖으로 나가는 아스를 붙잡았다. " 그리고 쥬니퍼 가문의 호위기사가... " " ... 스타티스가 뭐? " 아스의 눈동자에 불안한 의문이 떠올랐다. 카멜은 되도록 담담하게 말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축복의 성 코앞으로 용족들이 진격해온 이때, 이 정도의 일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 그가 시간을 벌어주는 바람에, 아스님을 데리고 무사히 드라세나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무스카리와 함께 남았습니다. " 아스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무스카리와 그가 남았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일이다. 뭐라 할말을 찾지 못하고, 사고회로가 정지된 듯했던 아스는 곧 멀리 하늘위를 맴도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용족이었다. 보랏빛 몸체에 새파란 날개를 가진 그 용족은, 연합군의 진영까지 다가오지 않고 드라세나의 앞을 크게 맴돌더니 외쳤다. - 쥬니퍼 가문의 독자의 시신을 넘겨받고 싶다면-! 리아트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을 넘겨라!!! 아스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신을 넘겨달라 요구해서가 아니다. 쥬니퍼 가문 독자의 시신이라고. 일말의 희망마저도 남기지 않은채 그 용의 그림자는 곧 성벽안으로 사라졌고, 비통한 침묵이 그들 사이를 감싸기 시작했다. " 아니야! 아니야!!!! " " 왕자님, 진정하십시오! " " 아니야아아아아아!!!!!!!!! " 아스는 소란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는 기사들에게 팔을 붙잡힌채 날뛰고 있는 제피란더스가 있었다. 늘 명랑하던 호박색 눈동자는 믿을 수 없는 충격으로 빛을 잃었고 그의 입술은 비명만을 내질렀다. 아스는 손을 바닥에 짚었고, 손안에 잡히는 흙을 그러모아 쥐었다. 곧 그런 아스의 위로 조그마한 소녀의 그림자가 떨어졌다. 펜은, 아스가 차마 두려워 생각지도 못하던 사실을 내뱉았다. " 너 때문이다. 리아트리스. " 나 때문. 나 때문. 부족하고, 모자란, 에린지움의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다. 드라세나가 함락당하고, 스타티스가 죽었다. 아스는 몸을 웅크렸다. 무서운 슬픔의 무게감이 자신의 등을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아리스타타의 껍데기일 뿐이라고 자책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은 에린지움의 걸음이었고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였다. " 네가 모두가 원하는 아리스타타가 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모두가 원하는 아리스타타는 이런 사람이었어? " 아니. 아니야. 나는, 나는... 나는 보잘것 없고, 아무런 쓸모없고, 누구에게나 폐를 끼칠 뿐인.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런 리아트리스일 뿐. 아스는 자신의 멱살을 잡아드는 여린 소녀의 팔목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화난 얼굴로 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멍한 그의 얼굴에 손찌검을 했고, 그것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찰싹, 찰싹, 찰싹, 아스의 뺨이 울리는 소리가 숲을 울렸지만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카멜마저도 그런 그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붙잡아 막은 것은 제피였다. " 그만 둬! " " ... 무례하다! " 펜의 일갈에 제피는 그녀의 손을 놓았다. 제피를 보자 아스의 눈에서 비로소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울기 시작하자 상황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향기가 숲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펜은 그것마저도 화가 나서, 아예 아스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쳐! 네가 감히 울 자격이나 있는 사람이냐?! 네가 이 왕자의 호위기사를 죽였어! 마지막 남은 쥬니퍼 가문의 대를 끊어놓았다고! 네가 드라세나가 함락당하게 만들었어! 거기에서 얼마나 많은 양민들과 군인이 죽었는지 알고 있어?! 다 너 때문이야! " " 제기랄! 제발 그만 둬!!! " 제피는 외쳤다. 자신이 스티의 죽음이 아스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싫었다. 이런 소동들로 스티가 죽었다고 확신하기 싫었다. 자신이 차가운 그의 몸을 품안에 안기 전까지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펜은 자신의 발길질에 쓰러진 아스를 붙잡아 올리며 외쳤다. " 그러니까 일어나! 네가 다 책임져! 내가 너의 뒷치닥거리까지 하는 걸음인 줄 알아?! 너도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면 네 행동에 책임을 져! 슬퍼하지마! 괴로워하지도 마! 누가 걸음에게 그런 감정을 허락했나! 울지마! 어깨를 피고 일어서란 말이야 이 쓸모없는 것아! " 아스는 펜이 이끄는대로 비척비척 일어섰다. 아스가 펜보다 키가 컸기에, 펜이 아스의 멱살을 붙잡은 것은 우스운 몰골이 되어 마치 펜이 그에게 매달리는 것 같이 보였다. 펜은 아스와 제피를 바라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 축복의 성은 코앞이야. 드라세나는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 " 연합군은 피난민과 함께 안수케로 이동했다. 쬐끄만 소도시는 이미 전쟁 피난민들로 차고 넘칠 지경이었고 거리는 더럽고 거지로 가득했다. 도시에는 보급할 물자도 남아있지 않았고, 좁은 턱에 도시 안에 진영을 차리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축복의 성에서의 지원과 증원군이 도착했고, 연합군은 간신히 드라세나에서의 피해를 추스릴 수가 있었다. 안수케의 영주는 어떻게든 펜과 아스를 자신의 성에 모시고 싶어했지만 펜은 냉정하게 그것을 거절했고, 에린지움의 걸음인 그녀와 아스가 성에 머물지 않자 덩달아 드라세나의 왕가 사람들도 성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불완전한 에린지움의 걸음인 펜을 직접 보고 경험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 일부에서는 그녀야말로 아리스타타의 환생체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거친 잠자리도 마다하지 않고 잠자는 시간마저 아끼며 전략회의를 하는 그녀는 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아스는 펜에게 뺨을 얻어맞고 걷어채이기까지 했지만 덕분에 슬픔과 죄책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기에 늦었다. 그리고 차라리 그러는 것이 쉬웠다. 아스는 펜의 강압에 의해 회의마다 꼬박꼬박 참여했으며 자신을 불신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는 트리옌들의 시선을 참아내야만 했다. 드라세나 탈환을 위한 전략회의의 방향은, 용족측에서 먼저 전달해 온 스타티스의 시신과 아리스타타의 교환으로 모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기회를 이용하는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다. 일방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용족을 막기는 불리했기에, 미끼를 쓰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 건에 가장 강력한 반대를 피력한 것은 당연히 카멜이었다. " 그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저는 아스님의 곁에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저도 없이 협상장소에 아스님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 " ... 그것 뿐만이 아니라, 리아트리스님은 어떻든간에 에린지움의 걸음입니다. 저쪽에 인질로 붙잡히기라도 해 심장을 빼앗긴다면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는 결말이 찾아옵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게다가 협상단을 맡을만한 인물로는... " " 내가 하겠어. " 그 자리에는 제피도 참석해 있었다. 그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 협상단은 내가 맡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타티스를 되찾아 오겠다. " "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 " 왕족인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나선단 말이야! 잘되지 않았는가? 나는 죽어도 상관없는 몸이다! " " 어찌되었건 이 계획은 너무 무모합니다. " 우려하는 청중을 향해 펜은 잘라 말했다. " 심장을 빼앗길 것을 걱정한다면 우리는 필요없는 사람들이예요. " " 100에 70은 아스님이 붙잡힌다고 봐야되는 불완전한 작전입니다. " "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로단테. " 펜은 자신의 곁에 앉아있는 아리스타타의 묘목이자 고령의 스피리아인 로단테를 보고 말했다. 그는 축복의 성에서 온 지원군을 이끌고 안수케에 와 있었다. 그는 가는 눈으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아스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간단합니다. 다만 다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요. 저 분은 아리스타타님의 환생체이고, 아리스타타님과 같이 행동하면 됩니다. " 아스는 로단테의 시선을 받았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 ... 약속하겠다. 내가 인질로 잡히더라도 협상하지 마. 심장을 빼앗길 위기가 오면... 자결하겠다. " " 아스님!! " 카멜이 소리쳤지만 로단테는 그를 무시하고 웃으며 말했다. " 리아트리스님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그때와는 틀리죠. 우리에게는 펜 오키드님이라는 훌륭하신 에린지움의 걸음이 계십니다. 거추장스러운, 또하나의 약점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을 역이용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 그러나 다른 트리옌이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하지만 저분은 아리스타타님이 아니시다. 최후의 순간에 죽음을 두려워해 망설인다면 어찌하겠는가? " " 나를 모독하지 마라! " 아스는 벌떡 일어섰고, 막사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져야할 책임. 자신도 모르는 환생에 대한 책임.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는 싫다, 그저 이 세상의 이방인으로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기는 싫다. 비록 아리스타타의 껍데기일 뿐으로, 무스카리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빈 몸이라도 아스는 자신이, 자신이 살아있고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가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사실을. " 그대들이 원하는 아리스타타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에린지움의 걸음이고, 그 책임을 지겠다. 에린지움의 걸음인 내가, 죽음이 무서워 트리옌들의 멸망을 부르리라 생각하느냐? " 빛나는, 아리스타타의 청록빛 눈동자. 오만하기까지한 당당한 얼굴. 그곳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카멜은 홀로 선명한 그 청년의 모습을 바라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모든 것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은 다만 나의 착각이고 과욕이었던 것일까. 그는 이미 에린지움의 걸음이었고,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지녔고 스스로 세운 가치였다. " 뭐...? " " 그러니까, 협상에 응하겠다고 연락이 왔어. 자. " 레제다는 드라세나의 다 무너지다시피 한 성벽위에 서 있던 무스카리에게로 다가가 화살에 매여져 날아온 쪽지를 건네주었다. 무스카리는 그것을 받아들지 않고 레지를 쳐다보았다. " ...우롱조인 그 협상을 받아들일리가 없지. 아무리 그 드라세나의 왕자가 그를 아꼈다 하더라도 살아있는 사람도 아닌 시신을 에린지움의 걸음과 교환하자고 정말 적혀있더냐? " " 그래. 때와 장소는 저쪽에서 제시했군. 드라이그라시스의 거석이 있는 곳에서 나흘 후 해가 뜨는 시간에서야. " " 같잖은 술책이군. " " 그럴까? 내가 보기엔 집요하도록 아스에게 집착하는 너의 성미를 잘 이용하는 것 같은데. 협상이 진짜든 가짜든, 너는 그애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그것에 응할 사람이야. 안 그런가? " 무스카리는 히죽히죽 웃는 레지를 무시하고 먼 곳을 응시했다. " 드라이그라시스에는 그곳이 있다. " " ...버려진 여름궁전 말인가? " " 그래. " 아리스타타의 피가 흘렀던 곳. " 안봐도 뻔하군. 내가 틀림없이 협상장소에 나오리라 생각하고 기습을 할 모양이야. 결계가 쳐져 있는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나와 정령수만 없앨 수 있다면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 우습지도 않은 협상에 응하도록 하지. 답신을 보내. " " 알았어. " " 그리고 용족들을 차출해 협상이 벌어지는 사이 우리는 그놈들의 진영을 친다. 부대를 재편성하고 빈곳을 충원해라. 남은 수인족과 오리어군은 드라세나를 지킨다. " 휘이이익 레지의 등뒤에서 새파란 날개가 연기처럼 피어올라 형태를 갖추었고 그의 목이 길게 늘어나며 보랏빛의 비늘이 돋아났다. 레지가 일으키는 바람에 무스카리의 머리카락과 망토가 미친듯이 펄럭거렸다. 폴리모프를 푼 그는 하늘로 날아올라 크게 드라세나를 선회해 안수케로 날아갔다. 카다란 날개가 한여름의 햇살이 떨어지는 하늘을 가로질렀다. 아스는 조용한 숲속을 걷고 있었다. 전쟁의 불길이 아직 이곳까지 미치지 않은 탓에 숲은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언제 불타 그 수백년 먹은 목숨이 한줌의 재가 될지 몰랐다. 용족들은 숲을 증오했고 숲이 있는 전장은 그들에게 불리했기에 가는 곳마다 숲이 보이면 인정사정 없이 파괴했다. 드라이그라시스 들판도 제 1차 대륙전쟁전에는 축복의 성과 함께 이 땅을 아우르는 가장 거대한 숲 중의 하나였다. 아스가 거니는 지금 이 숲은 그라시스숲의 마지막 남은 흔적이었다.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가며 황무지를 숲으로 바꿔가는 나무의 힘. 땅을 기름지게 하고, 물을 가두고, 바람을 아름답게 하며 짐승을 키워내는 축복받은 곳. 아스는 그곳에 서 있는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가 가지고 있을 그 가치와 고귀한 임무를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오솔길을 따라 무작정 걷던 아스는 점점히 드러나는 뼈같은 하얀 돌들의 자국을 보고 그것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엔 잘 닦인 포석이었던 듯 무성한 덤불과 축축한 이끼사이로 새파랗게 변한, 때로는 하얀 끄트머리를 삐죽 내민 돌의 흔적을 쫓아 걸었다. 곧 바닥에 점점히 보이던 흰 돌은 큰 기둥이 되어 이끼의 성이 되어있고, 아름다웠을 축대와 난간의 조각들이 여기저기 구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아스는 숲속에서 허물어져 가는 커다랗고, 한때는 새하얗게 빛났을 성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숲 속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과거의 아름다움에 아스는 기묘한 기분이 되어 발걸음을 옮겼다. 성의 대부분이 숲에 묻혀 사라지고 있었지만 한때 정원이었던 곳으로 보이는, 분수와 조각상의 흔적이 있는 곳의 한 정자만은 이끼도, 잡초도 돋아나지 않은채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낯익으면서도, 두렵고, 기묘한 느낌. 아스는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 아리스타타가 자결했던 장소지. " 아스는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승마복같은 단촐한 옷을 걸친 제피란더스가 서 있었다. 아스는 숲속에 떨어지는 햇살에 비치는 그의 얼굴에 소년의 기색이 깨끗히 사라져 버렸음을 알고 놀랐다. 그는 조용히 아스에게로 걸어왔고, 아스는 그저 고요히 가라앉아 있기만 한 그의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 이곳은 예전 드라세나의 한 사치스러웠던 왕족이 지었던 여름궁전이었어. 그 왕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향락을 반복하며 이곳에서 수많은 대륙의 미녀들을 그러모아 지내곤 했지. 하지만 곧 그의 사치를 참다못한 그의 아들에 의해 왕좌에서 끌어내려졌고, 그 아들은 사치를 혐오하는 사람이었기에 한때 이곳은 무너질 위기에 처했어. 하지만 그냥 무너뜨려버리기엔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그 왕은 아리스타타에게 이 성을 바쳤다. 그 왕은 은빛의 여왕을 연모했거든. " 아직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시피 한 그곳은 아치형의 둥그런 천정에도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기둥엔 새와 꽃들이 조각되어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 대륙전쟁때 아리스타타가 무스카리에게 납치당하고, 용족들은 그라시스 숲까지 불태웠다. 무스카리는 그녀를 납치해 이곳에서 머물렀어. 아리스타타가 이곳에 있었던 탓에 이 부근의 숲은 그나마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지. 트리옌들은 다시 아리스타타를 되찾기 위해 용족들을 이곳에서 몰아내었지만, 무스카리는 아리스타타의 심장을 앗으려 했고 그녀는 자결했어. 이곳에서. 그녀의 신성한 피가 흘렀기 때문인지 그 아름답던 성이 모두 무너지고 잡초에 뒤덮혀도 이곳만은 이끼도 잡초도 나질 않아. " 조용한 숲의 햇살이 흰 돌위로 고개를 내민 야생초 무더기위로 떨어졌다. 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제피의 곁에 서서 그가 하는 말을 경청했다. 그가 입을 닫자 둘 사이에는 조용한 침묵이 잦아들었고, 햇살이 날리는 가느다란 꽃가루들이 흘러갔다. " ... 스티와는 자주 이곳으로 놀러오곤 했었어. 형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항상 이곳으로 와 그 놈 욕을 하곤 했지. ...언제부터 여기에 오지 않게 되었을까? 아마 녀석이 내 호위기사가 되어서, 친구였을적 보다 더 녀석을 만나기가 까다로워 졌을때 부터였나... 하지만 이곳에 오면 늘 스티를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었어. 이곳에 오면 다시 그녀석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 " " ... " " 녀석은 내 호위기사가 되어서는 안되는 입장이었단 말이야. 바보같으니. 그 녀석을 만날때마다 우려와 걱정어린 말들을 들어야만 했지. 어릴때는 왜 그런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어.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아꼈으니까, 그냥 같이 있는것이 당연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거야. 나는 왕자고, 녀석은 쥬니퍼 가문의 독자이니까. " " 제피... " " 그냥 친구였으면 좋았을거야. 누가 누굴 지켜주거나, 만나려면 정식 절차를 밟아야 한다거나, 암살 위협같은거 없는... " 미안하다. 미안하다. 그 말이 아스의 마음속에서 커다랗게 메아리쳤지만 아스는 차마 그 말을 입밖에 낼 수 없었다. 그것은 그와 스티의 관계를 모욕하는 짓이었다. 나 때문에 스티가 죽었다고 사과할건가. 아니다. 스티는 제피의 친구였고 그 만을 지키는 호위기사였다. 그의 죽음은 오로지 그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했고, 그 죽음조차도 사죄의 말조차도 모든 것이 제피의 것이어야만 했다. " 날마다 투덜거리기만 했어. 왜 하필 네가 내 호위기사가 되는 바람에, 내가 이 고생을 해야하느냐...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왜, 그냥 흔쾌히 왕이 되겠다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나는 왕이 되어 그녀석을 지켜줘야만 했어. 강하고, 강한 왕이 되어 누구도 내게 검을 들이댈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래서 녀석이 날 지킬 필요도 없을 그런 강한 사람이 되어야만 했어. 하지만 난 결과적으로 그녀석에게 어리광만을 피우고 있었던 거야. 그가 내 호위기사인게 싫다, 그냥 친구면 어떠냐는 그런 말로 그녀석이 나를 지켜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어... " 제피는 두 손을 들어 괴로움에 일그러진 얼굴을 감쌌다. 그는 울지 않았지만, 아스는 그의 눈동자에서 비통함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 좀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았을텐데. 좀 더 아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텐데... 맙소사. 나는, 나는, 녀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내가, 내가 얼마나 그를... 그를 이렇게나 사랑하는지... 깨달았어... " 이제 멀어진 사람에게는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마음도 전해지지 않는다. 후회조차도 빗겨지나가 자신에게만 돌아와버리는 슬픔은 그 어떤 슬픔에 비할바가 아닌 것이다. 제피의 구슬픈 말은 아스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공허하게 숲을 울릴뿐. " 너를... 이렇게나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스티... " 아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주먹을 쥐었다. 무스카리. 네가 밉다. 네가 미워. 왜 그를 살려주지 않았어? 그가 없으면 이렇게나 괴로워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왜 죽였지? 아스는 무스카리를 원망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스카리가 그를 죽이기 이전에, 자신이 그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원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미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다가는 껍데기밖에 없는 이 몸을 부숴뜨릴지도 모르니까. 캄캄한 밤이 찾아오고 나서야 홀로 숲에서 돌아온 아스는 숲의 입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카멜의 품 속으로 뛰어들었다. 카멜은 가늘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감싸안았다. 아스는 차마 제피의 앞에서는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소리없이 흘렸다. 아스는 카멜의 향기와 그의 상냥함에 매달려 말했다. " 나는... 나는 어쩌면 스티가 죽었다는 것을 슬퍼하기 보다는, 네가 무사하다는 것을 기뻐했는지도 몰라... " " 아스님. " " 하루 종일 사랑만 해도 모자란 거야. 입을 열때마다 사랑한다는 말만 해도 모자란 거야. " 나를 안은 이 팔을 풀지 말아줘. 내가 어디론가 흘러가 버리지 않도록, 내 마음이 영영 너의 곁에 머물 수 있도록, 내가 너를 잃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아스는 카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카멜은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는 아스의 따뜻한 혀와 달콤한 맛에 눈을 감았다. 카멜은 아스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키스했다. 카멜은 키스하며 아스를 안아올렸고, 아스는 카멜에게 매달린 팔을 풀지 않았다. 둘은 숲으로 걸어들어가 말없이 목덜미를 깨물고 어깨를 부비며 옷을 벗었다. 달빛에 드러난 두 사람의 나체는 서로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카멜은 울먹이는 아스의 눈꼬리의 눈물방울을 다정히 핥아주고 뺨을 손으로 감싸고 귀밑과 뒷덜미와 어깨를 깨물었다. 한 쪽 손은 떨어질줄을 모른채 유두를 배회하고 한쪽 손은 가늘게 떨고 있는 허리를 지나쳐 내려가 그의 엉덩이와 회음부와 페니스를 쓰다듬고 있었다. 떨어지는 달빛에 새하얀 나신과 두사람의 명주실같은 머리카락이 빛나고, 카멜의 머리가 신음하며 들썩이는 아스의 허리를 붙잡고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 하, 음... 으...! " 배의 오목한 부분을 훑고 옆구리를 훑고 허벅지의 골에 혀를 넣어 비비고는 깨문다. 아스의 것을 입안에 물자 머리가 멍해질 것 같이 달콤한 향기가 가득찼다. 카멜은 아스의 뒤를 꽉 움켜쥐고 어느때보다 격렬하게 혀와 입술을 움직였다. 귀두를 빨아들이고 회음부를 축축하게 적셨다. " 아앗, 우웃... 으, 하..! 하앗..! " 그의 것을 빨아올리는 습한 소리가 축축하게 숲속의 공기를 울렸다. 카멜의 손이 더듬어 올라와 그의 유두를 집고 벌어진 입술을 헤집었다. 카멜은 아스가 입을 다무는 것을 싫어했다. 자신의 신음이 부끄러워 입을 다물라 치면 그의 긴 손가락이 입을 벌리고 혀를 누르고 치열을 더듬었다. " 아흣...! " 새된 신음에 참지못한 카멜이 밑에서 헤매던 입술을 떼어 아스의 입술을 삼켰다. 신음이 카멜의 입안에서 춤추었다. 정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쾌감의 울림. 카멜은 축축하게 젖은 아스의 아랫도리를 한 손에 움켜쥐고 천천히 비볐다. 아스가 허리를 뒤틀며 배를 카멜에게 붙여왔다. 카멜은 아스의 엉덩이를 들어올리고 자신의 것을 천천히 삼입했다. 귀두만이 들어가도 예민해진 아스의 것은 차가운 공기속에 노출된채 부르르 떨었다. 카멜은 자신에게 손이 두개쯤 더, 혀가 한개쯤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키스를 하면서 아스의 것을 빨아들일 수 있을텐데. 카멜의 허리가 천천히 관능적으로 움직였다. 달빛이 흐르는 허리를 따라 물결쳤다. 결합된 두 사람의 몸이 엉키고, 아스는 한쪽 다리를 카멜의 어깨에 걸친채 깊숙히 삼입된 카멜의 것을 느꼈다. 뜨거웠다. " 으... 흑...! 카, 카멜... " " ... 제가 채워드린 몸입니다. 제가 가져도... 되겠지요... " " 아....!! " " ...후... 이 순간만은, 제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말씀... 말씀해 주십시오... " " 카멜... " " 제... 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제가... 아스님의 것이라고만... 하..." " 으응! 으...읏... " . 태초부터 어딘가가 비어있었던 것 같은 몸을 카멜이 채운다. 두 사람이 원래 하나의 몸이었던 것 처럼 맞물린다. 카멜의 녹색 눈동자에 괴롭고 달큰한 감정이 고이고, 아스는 자신의 것을 감싸쥔 그의 손길에 신음을 흘렸다. 배가 부드럽게 마찰하고, 카멜이 짧은 숨을 삼키며 그의 가슴을 깨물자 아스의 목이 뒤로 젖혀지며 가늘게 떨렸다. 고인 눈물이 귓가로 떨어졌다. 카멜은 아스를 앞으로 안에 엎드린채 그의 얼굴과 허리를 부여잡고 그의 날개뼈에 자신의 자욱을 남겼다. 뒤흔드는 허리와 맞닿인 살의 움직임에 땀과 애액이 흘렀다. 카멜의 낮던 신음소리가 격해졌다. " 읏...흑-! " " 아... 아아아아.!! " 짧은 쾌락의 순간, 아스는 슬픔과 괴로움으로 텅 비어버린 자신의 마음에 가느다란 불씨가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숲에서 열락을 밤새 나누고 돌아온 두 사람을 기다린 것은 월이었다. 월은 펜의 문장이 박힌 서신을 그에게 전달했고,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진영으로 돌아갔다. 카멜이 펴본 서신안에는 펜의 전언이 담겨있었다. -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이자, 트리옌들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 카멜리아 버베나. 협상을 미끼로 이끌어낸 이번 일은 여러가지로 불완전한 면이 많아, 우리로써는 큰 희생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것이예요. 여차하면 리아트리스의 심장이 위험한 지경이니. 어떻게든 무스카리의 그 불타는 심연의 정령수를 대적할만한 무엇인가가 있지 않으면 안돼요. 불과 상극인 에린지움으로써는 그것과 맞설 수 없습니다. 협상은 나흘 후, 아직 이틀이 남았습니다. 당신은 숲의 저 너머 대륙의 동쪽 끝의 바다까지 가 주셔야 겠어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인어를 따라 섬으로 들어가 냉렬한 심해의 정령수를 만나주세요. 그리고 그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이세요. 정령수가 누군가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무스카리에게는 불의 정령수가 있고, 그것은 당신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예요. 물의 정령수는 인어들조차도 접근하지 못하는 심해의 가장 깊은 계곡에 있다고 전해집니다. 행운을 빌어요. 옆에서 같이 서신을 보고 있던 아스가 짧게 말했다. " 나도 가겠어. " " 위험합니다. 여기 계십시오. 정령수는 일반적인 정령들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그들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 " 알고 있어. 그러니 더더욱 가겠어. 에린지움의 걸음인 내가 가면 좀 더 이야기가 쉬워질거야. " " ... ...정령수는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가 아닙니다. 제발 이곳에 계셔 주십시오. " 아스는 카멜을 똑바로 쳐다봤다. 카멜은 그의 눈동자를 보자 자신이 승복하고 말 것임을 깨달았다. "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너의 곁이야. " " ... 알겠습니다. 다만 시간이 없으니 강행군이 될겁니다. " " 각오하고 있어. " 카멜과 아스는 다른 짐조차 챙기지 않고 그대로 동쪽을 향해 내달렸다. 말보다 더 빠른 그들의 다리로 달려도 산맥을 넘어 동쪽의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꼬박 반나절을 달려야만 했다. 해가 뉘엿뉘엿 할 때쯤에야 아스는 안수케같은 조그만 소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을 이루는 수많은 수인족들에 놀랐다. " 여기는 수인족이 무척 많군. " " 유일하다시피한 수인족들의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바다속에서 일종의 큰 나라를 이루고 사는 인어족들의 비호를 받아 성장한 곳이거든요. 그들은 수인족이 아닌 다른 종족을 배척합니다. 인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산맥에 가로막혀 거의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고 있지요. 여기에선 트리옌이나 용족이 매우 드물겁니다. " 카멜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거리의 사람들은 모두들 아스와 카멜을 신기한듯이 쳐다봤다. 일부는 불쾌하거나 경계하는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내기도 했는데, 카멜은 그것을 지금 일어나고 있는 2차 대륙전쟁의 피해가 여기까지 닿을까 두려워 그러는 것이라 했다. " 좀 더 둘러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은 항구도시지만 여유롭게 설명할 시간이 없군요. " 둘은 서둘러 항구로 나갔다. 고깃배가 잔뜩 들어서있는 소박한 항구에서 한 여자가 둘을 보고 다가왔다. 여자는 거의 벌거벗은 듯한 차림새였고 파도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한 사람이었는데 특이하게도 피부가 푸르스름했다. " 당신들이 물의 정령수를 만나겠다던 그 트리옌들인가 보군요. 용족들이 불의 정령수를 부린다는 소문이 정말이었나 보네요. " " 카멜리아 버베나, 이쪽은 리아트리스님입니다. " " 그렇군요. 곧 죽을 사람들과 인사 나누는 취미는 없지만... 전 릴케라고 불러줘요. " 아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 무례하군. 곧 죽을 사람들이라니... 어째서 그런거지? " " 그야, 인어족도 아닌 분들이 물의 정령수를 만나겠다 하니까 그런거죠. 바다는 에린지움의 힘도, 용족의 힘도 상관없는 무결한 곳이예요. 우리 인어족들조차 수압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심해의 협곡에 가겠다니, 죽으러 왔다고 밖엔 설명할 수 없는거죠. " 그녀는 더 이야기하기도 귀찮다는 듯 빙글 돌아서 풍덩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스가 놀라기도 전에 수면위로 튕겨올랐다 사라지는 커다란 물고기의 꼬리가 바닷물을 튀겼다. 그녀는 수면밖으로 머리를 내밀더니 " 가지 않을건가요? " 라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아스는 돌아서면서 보인 그녀의 등에 커다란 아가미가 자리한 것을 보았다. 카멜은 바람의 정령을 불러 두 사람들 주위로 공기의 구를 만들었고, 둘은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스는 카멜처럼 유연하게 움직여 보려 했으니 물속에서 공기의 막까지 두른 상태에서는 버둥거리는 것이 고작이라 그냥 카멜에게 손을 맡기고 따라가기만 했다. 유연한 꼬리의 움직임으로 바다를 가르고 물고기떼를 지나쳐 릴케는 점 점 깊은 곳으로 헤엄쳐 가기만 했다. 수면의 빛도 멀어져가고 아스는 깊은 바다속에서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차츰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의 기분을 알듯이 카멜의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릴케는 오랫동안을 헤엄쳐 두 사람을 커다란 산호의 산으로 안내했고, 각양 각색의 색깔의 산호들로 이루어진 그 커다란 산은 불분명하게나마 성의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 모습에 감탄을 보냈다. 얕은 바다에서만 사는 줄 알았던 산호가 깊은 바다속에 무리지어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더욱더 신기한건 그 산호에 군생해 살고있는 물고기의 무리였다. 그 물고기들은 반딧불같은 빛을 발하며 그 산호의 성 주변에 몰려 있었는데, 그 자그맣지만 무수한 빛이 컴컴한 바닷속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아스와 카멜은 릴케가 안내하는 대로 산호의 성 안으로 들어갔고, 안에 자리한 커다란 터널을 지나 동공같은 홀안으로 들어섰다. - 반가워요.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홀안에 꽉 차있던 바닷물이 마치 무슨 유리막으로 밀어내는 것 처럼 물러갔다. 카멜은 둘 사이에 쳐져있던 공기막을 사라지게 하자 바람의 정령들은 바닷물로 뛰어들어 공기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물이 없어지자 어느새 릴케의 꼬리는 다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스는 동그런 입구에서 걸어나오는 무척이나 긴 머리카락의 여인을 바라보았고, 카멜은 무릎을 꿇어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하지만 아스는 무릎을 꿇지 않고 그저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들었다. 에린지움의 걸음인 자신이 그녀에게 예를 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는 오호호 웃더니 말했다. " 되다만 에린지움의 걸음이니 이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간이니 하는 소문이 많더니,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군요. 만약 내게 무릎을 꿇었다면 그 오만하신 펜 오키드님에게 우롱의 말을 잔뜩 담은 서신을 보낼 예정이었는데.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불쑥 이런 손님을 보낸것만으로도 심사가 잔뜩 뒤틀렸거든요. 하지만 저 고귀한 글로리 나이트가 내게 예를 표해주었으니 관두도록 하겠어요. " 그녀는 무릎을 굽히며 아스에게 인사했다. 가까이 오자, 아스는 그녀가 무척이나 나이든 노부인 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름은 가슴팍이 패인 우아한 진주빛 드레스를 입고 끌리는 듯한 긴 하늘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모습에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 역시 푸르스름한 빛을 띈 피부였다. " 바다의 귀부인이라 일컬어지시는 노라넬리님 이십니다. " " 만나서 반가워요, 리아트리스님. " " 저야 말로. " 아스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가볍게 키스했다. 그녀는 소녀처럼 얼굴을 물들이며 오호호 웃었다. 나이들어서도 아름다운 청년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며 주책이라 웃던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 내 정신 좀 봐.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이니죠? 마음같아서는 아름다운 저희 인어족 아가씨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해 주고 싶지만... 한시가 급한 일이겠죠? " " 네. " 카멜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더니 말했다. " 저희는 무례한 지상의 물건이 그 협곡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이를테면 그물이나 바늘같은 그런 것들요. 감시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 협곡에 대한 권리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답니다. 하지만 늘상 그 협곡을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해오고 있긴 하지요. 무서운 수압때문에 그곳에 들어가서 살아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가장 깊은 바다속까지 헤엄쳐 봤다는 모든 인어족의 사람들도 그랬답니다. " " 위험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전 대륙이 전쟁의 불길에 휩싸여 다시금 그 악몽을 되풀이 하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드라세나의 성벽까지 무너진 지금 우리에게는 정령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 " ...그렇겠지요. 하지만 말리는 것이 저의 의무이니, 일단 말리겠어요. " "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군요. " " 하지만 저 에린지움의 아름다운 소년을 살리고 싶으시다면 그를 데리고 협곡으로 들어가진 마세요. " 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 어째서 카멜은 되고 나는 안된다는 거지? " " ... 잘라 말해서 그가 아무리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이고 위대한 글로리 나이트라 해도 결국은 보통 트리옌일 뿐이니까요. " " 그 가치로 따진다면, 두명있는 에린지움의 걸음 중 한명인 내가 덜하지 않은가? " 노부인은 미소지었다. " 세상에는 그 희귀성으로 인해 가치가 결정되는 존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존재도 있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글로리 나이트가 당신이 그곳으로 함께 따라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 같군요. " 그리고 다음 순간, 아스는 풀썩 앞으로 몸을 쓰러트렸다. 꺼져가는 의식속에서, 아스는 카멜을 스타티스와 같은 꼴로 만들수는 없다고 소리쳤지만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뒤에서 그를 기절시킨 카멜이 얼른 그의 몸을 안아들었고, 주변에서 두명의 인어족이 다가와 그를 넘겨받았다. " 리아트리스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 " 알겠어요. 당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를 무사히 축복의 성까지 데려다 주겠어요. 하지만 이대로 괜찮은 건가요? " 카멜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 물론 틀림없이 화를 내시겠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반드시 돌아올겁니다. " 카멜은 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릴케와 함께 돌아섰다. 그는 다시금 그녀의 안내를 받아 성 밖으로 나왔고, 점점 더 어두워져 가는 심해의 바닷속으로 가기 시작했다. 카멜은 어젯밤 자신의 품안에서 신음하던 아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바닷속 커다랗게 입을 벌린 거대하고 시커먼 계곡을 바라보았다. 아리스타타님이 그렇게 돌아가신 후에도 살아남았던 자신이다. 그런데 살아계신 그 분을 두고 자신이 먼저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한번 그를 가질 수만 있다면,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돌아올 것이다. 행운을 빈다는 릴케의 말을 뒤로 하고, 카멜은 계곡의 끄트머리에서 한발 걸었다. 곧 계곡의 아래로 빨려드는 해류가 그를 집어삼켰다. 잠깐이었을까, 거센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간다 싶은 후에, 갑자기 움직임이 멈추었다. 정신을 차렸을때 카멜은 자신이 시커먼 암흑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암흑. 숲의 어둠과도 틀리고, 지하의 어둠과도 틀린, 그 형체없는 어둠은 카멜을 압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 암흑속에 떠 있는 것 같았지만, 카멜은 느낌상 자신이 천천히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바람의 정령들이 수압에 신음을 지르고, 카멜은 그들을 달래며 아래를 쳐다보았지만,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바닥은 시커먼 아귀를 벌리고 있었다. 점점 더 아래로 흘러가자, 바람의 정령들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수압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참다 못한 정령들이 물방울이 되어 흩어져 사라지고, 카멜은 몸을 조이고 머리를 터트릴 것 같은 수압에 순간 휩싸였다. 입에서 신음이 나왔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 암흑속에서는 공기도 없었으며, 곧 카멜은 꾸르륵 꾸르륵 공기방울을 내뱉으며 괴로워 하기 시작했다. 숨이 막혔다. 입 안으로 하염없이 바닷물이 들어오고, 카멜은 몸 속과 밖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카멜은 마지막 숨을 끌어모아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외쳤다. - 냉랭한 심해의 정령수여!!!!! 그때였다. 카멜은 일순 고통도 잊고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시커먼 암흑속에서, 마치 환영처럼 그 거대한 것이 스르륵 몸을 드러내었기 때문이었다. 연기처럼 새하얀 몸이, 빛이 없는 곳에서 둥실 떠오르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커다란 삼각형의 머리가 카멜을 응시하고, 카멜은 물속에서 공전하는 것 같은 커다란 목소리를 들었다. - ... 너는 누구냐. 내 잠을 방해한 녀석은 오백년만에 처음이군. 카멜은 대답 대신 입만 뻐끔거렸고, 그 흰 뱀은 어쩐지 쯧, 하고 혀를 차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곧 카멜은 자신을 죄던 수압의 느낌이 사라지고, 물 속에서 자유롭게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딘가 아가미가 생긴건 아니겠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고 카멜은 대답했다. " 저는 아리스타타님의 첫번째 묘목, 트리옌들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 카멜리아 버베나입니다. 당신을 만나뵈러 왔습니다. " - 나를 만나러 왔다고?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 냉랭한 심해의 정령수, 물의 정수, 어둠의 뱀. " - 그래. 나는 정령수다. 나에겐 그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다. " 알고 있습니다. " - 그런데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왔다고? 나에게 뭔가 필요한 것이 있는게 아니냐. " 그렇습니다. 하지만 요구가 아닙니다. 부탁입니다. " - 그 역시 마찬가지. 너는 바람이 부탁한다고 부는 것을 보았느냐? 너는 비가 부탁한다고 그치는 것을 보았어? " 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자연의 힘을 따라 그를 믿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가뭄이 들면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가을이면 햇빛이 따사롭기를 기원하지요. 저는 트리옌, 그 어떤 종족보다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인 몸입니다. " 카멜은 그 뱀이 피식 웃은 것 같다고 느꼈다. - ... 그래. 무슨 일 때문이지? " 용족의 우두머리가, 불꽃의 야수를 길들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불과는 천적인 저희로써는 당해낼 방도가 없어, 이렇게 도움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카멜은 물속이 커다랗게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뱀이 크게 웃은 듯 했다. 뱀의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이고, 그것은 재밌다는 듯 말했다. - 길들여? 누가 누구를 말이냐? 누가 정령수를 길들이는게 가능하다더냐? " ...믿기 어렵지만 그는 심연의 불타는 정령수를 부립니다. - 그가 어떻게 그 심연속에 웅크리고 있는 놈을 찾아내었을지 모를 일이군. 그것은 길들인 것이 아니다. 아마 둘은 계약을 했을거야. 아느냐? 태초에 에린지움이 생겨났을때의 일을. " ...예. 고대의 세계가 마법의 불에 더럽혀지고, 모든 땅과 바다가 죽음의 장소가 되었을때, 위대한 언령 마법사가 그 땅에 남은 마지막 언령의 힘을 모아 에린지움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 - 그래. 에린지움은 고대 언령마법의 산물이다. 전세계는 에린지움을 만든 댓가로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모두 소진했으며, 멸망했다. 에린지움을 만든 마지막 마법사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 위에 에린지움의 묘목을 심었고, 곧 그도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 " 예... " - 그런데 그 마법사가 한가지 더 했던 일이 있다. 그것은 지난 세계를 멸망시켰던 근원이자 에린지움의 천적인 그 야수를 붙잡아 가두는 일이었어. 마법사는 야수의 날개를 잘랐고, 그것은 심연으로 숨어 도망쳤지. 그리고 나, 날카로운 바람의 정령수, 침묵한 대지의 정령수에게 에린지움을 부탁하고 죽었다. 하지만 바람의 정령수가 그를 동정한 나머지 그 날개를 용암속에 묻었고, 안드리움의 분화와 더불어 용족이 생겨났다. 골든 드래곤 에리카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에린지움과 함께 태어난 아리스타타의 존재와는 달리,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태어났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강력한 존재. - 불꽃의 야수는 에린지움을 증오하고 있다. 하지만 날개가 잘려 힘을 잃은 상태로 천년 가까운 시간을 침묵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지. 그의 존재는 점점 잊혀져 갔고, 에린지움이 이 땅을 다 정화하고 아리스타타가 태어나 새 세계를 열자 우리들도 자연의 질서를 위해 침묵하기로 했다. 그 짐승이 무슨 계약으로 그 용족과 함께 세상에 나왔을런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자신의 힘을 되찾고 대륙을 다시 불태우는 일이 될 것이다. " 그런...! " - 네게 힘을 빌려주겠다. 다만 그것은 너희 트리옌이나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불타는 심연의 정령수를 막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양지하기 바란다. 이것은 우리 사이의 계약이다. 너는 그 정령수와 용족사이의 계약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더불어 에린지움의 심장 역시도. " 에린지움의 심장은 무엇입니까? 트리옌에게는 심장이 없는데, 심장을 빼앗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요? 그것만 알 수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일은 훨씬 수월해 질 것입니다. " - 그것은 말해줄 수 없다. 단 한사람이라도 그 사실을 아는 자가 늘어나는 것은 결국 위험부담을 늘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 야수는 에린지움을 증오하고 있고, 자신의 힘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것이다. 용족과 계약하여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러한 행동의 일환일 것이고, 힘이 닿는 한 에린지움의 심장을 손에 넣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힘을 되찾으면 이 세계 역시 결코 안전할 수 없다. 그는 파괴의 짐승이며, 복수에 눈이 멀어버린 자다. 자신에게서 만들어진 존재라 해서 용족에게도 결코 우호적이라 할 수 없다. " 알겠습니다. " - 단 하나, 알아둬라. 에린지움은 언령마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카멜은 무슨 말인가 순간 생각에 빠졌지만 계속 그것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 커다란 뱀이 자신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 네가 계약을 어길 시에는, 나는 이 세계가 멸망해도 방관하겠다. ...어차피 야수가 힘을 얻으면 막는 것은 불가능 하겠지만. " 아악!!! " 카멜은 커다란 힘이 자신에게 부딪혀 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몸이 모조리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몸 속과 얼굴을 무엇인가가 마구 휘젓는 느낌이 나면서, 격한 구역질이 느껴졌다. 카멜은 머리가 쪼개지는 느낌을 받으며 외마디 비명 후 정신을 잃었다. 나흘 후. 아침이 밝을 시간이었지만 사방은 어두컴컴했다. 희뿌연 새벽의 빛이 간신히 내리는 비와 함께 떨어져 대지를 밝히고 있었지만 어둡기는 매한가지였다. 제피란더스는 떨어지는 비를 얼굴로 받으며 중얼거렸다, 하늘로 커다란 구름들이 어지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 태풍을 부르는 구름인가... " 그의 짐작과 같이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지며 거친 바람과 함께 불어젖히기 시작했다. 제피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날씨에서는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드니, 속임수가 더욱 용이할 것이다. 그는 뒤를 돌아 자신의 말 뒤에서 걸어오는 은빛 머리카락의 남자를 한번 쳐다보고, 말을 재촉했다. 한여름이라고는 하지만 계속되는 비는 체온을 빼앗아 가고 있었으며, 긴 비옷에 감싸인 몸이 부르르 떨리는게 느껴졌다. 불어치는 비바람에 들판의 풀들이 땅위로 납작하게 엎드려 숨죽인 가운데, 제피란더스 일행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로 다가갔다. 좀 멀찍히 거리를 둔 가운데, 제피는 입가에 손나팔을 만들었다. " 우리는 트리옌-드라세나 연합군의 협상단이다! 그대들은 누군가!! " 제피는 큰 소리로 외쳤지만 그 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작게 울렸다. 상대편의 선두에 선 누군가가 대답했다. " 그대들이 기다린 상대이다. 교환할 대상은 준비했는가! " " 물론이다! 한명씩만 앞으로 나서서 교환 대상을 확인하겠다!! " 제피란더스는 옆에 선 사람과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제피옆에 선 남자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 협약한 내용과 마찬가지로 상대쪽의 용족의 기척은 한사람 뿐. " 구체적으로 정한 협상 내용에는 협상의 위험을 없애기 위해 각자 대표격의 용족 한명과 트리옌 한명만을 협상단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이쪽에서 데려갈 트리옌 한명은 교환 대상이 리아트리스로 정해져 있는 만큼 어쩔 수 없이 그가 되었고, 저쪽에서 나올 용족은 틀림없이 무스카리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스에게 무섭도록 집착하는 그라면, 속임수일 것이 뻔한 이 자리에도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상대편은 혼자서 관 하나를 끌고 앞으로 나왔으며, 두 팀은 일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멈춰섰다. 제피는 그가 끌고 나온 관을 보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입을 열어 관을 열여달라 했을때엔,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가운데, 남자는 관뚜껑을 열어젖혔다. 텀벙! 둔탁한 소리를 내며 뚜껑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제피는 그 안에서 눈을 감고 누워있는 새하얀 얼굴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제피의 곁에 선 남자가 망토를 젖히며 앞으로 나서는 것을 느끼고는 그는 다시 눈을 부릅떴다. 순간이었다. 은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품 속에 숨겨둔 칼로 정확히 스티의 관 옆에 서 있던 용족의 심장을 노리고 찌르자, 연이어 제피가 단검으로 그의 배를 찔렀다. 그의 신음소리는 빗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은 듯 했다. " 무스카리... 스티의 복수를 하겠다!! " 제피가 외치자, 심장을 찌른 은빛 머리카락의 칼을 손으로 붙잡은 남자가, 남은 한 손으로 망토를 벗으며 말했다. " 그 말, 그에게 꼭 전해주도록 하지...! " " 어헉! " 갑자기 터진 파란 불꽃에 둘은 튕겨나갔다. 뒤쪽에 서 있던 협상단들이 각자 칼을 빼들고 달려오고, 제피란더스는 가슴과 배의 칼을 뽑는 남자가 무스카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키가 큰 보랏빛 머리카락의 용족으로, 은빛 머리카락의 트리옌을 보고서 비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 너무하군. 그래도 이쪽은 확실한 시신을 갖고 나와줬는데... 은빛 가발을 둘러쓴 가짜라니 심하잖아. " 월은 펜의 긴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을 벗고는 검을 빼들고 레지에게로 돌격했다. 제피 역시 검을 꺼내들며, 달려드는 사람과 검을 겨누며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관속의 스티를 바라보았다. 일차적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제피는 카멜이 잘 해낼 것을 믿었다. 그리고 일단 지금은, 스티를 다시 되찾아 오는 것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 시간 무스카리는, 다 무너져가는 흰 성의 페허속에 서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때마다, 숲속으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가 그를 이끌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 줄이나 알고, 아스는 이곳에 숨었을까. 무스카리는 앞으로 걸어 잡초와 이끼를 밟고 걸을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 듯 했다. 조금 만 더 걸어, 그 흰 정자에 도착하면 아직도 가슴에 흉측한 검을 꽃고 쓰러져 있는 아리스타타가 보일 듯 했다. 무스카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침묵이 강처럼 흐르는 무너진 포석을 밟아 점점 짙어지는 향기 가까이로 다가갔다. 무스카리는 자신을 이끌어내기 위한 거짓임에 틀림없는 협상에 속지 않았다. 물론 아스가 나올 가능성도 있었지만, 무스카리는 그러한 일을 카멜이 절대로 허락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라면 협상이 틀어짐을 알고 용족의 군대가 덮칠 빈약한 연합군의 진영에서 아스를 빼내어 어딘가 안전하다 느끼는 곳에 숨겨뒀을거라 여겼다. 무스카리는 자신의 폐를 적시는 아스의 향기를 깊게 호흡했고, 울창한 나무때문에 훨씬 약해진채 내리는 빗줄기가 흰 돌위를 통탕거리고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무스카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 카멜. " " 반갑지 않은 얼굴을 자주 보는 것 같아 불쾌하군. " " 그런가? 나는 아주 반가워. 아무리 증오스러운 너라 할지라도 네 곁에 아리스타타가 있다면 참을 수 있지. " 이따금씩 고인 빗방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잎에서 후드득 빗물이 떨어졌다. 무스카리는 젖어버린 붉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올리며, 카멜의 코와 입술끝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았다. 조각같이 아름답고, 예리한 빛을 머금은 얼굴. 카멜은 망토의 핀을 끌렀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젖어 무거운 망토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가 한쪽 발을 천천히 뒤로 빼며 검집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보고, 무스카리도 망토를 벗어버리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훑어 물기를 짜내었다. 후두둑! 격돌하는 둘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크게 울렸다. 쩡! 하는 소리가 비내리는 소리에 잠겨있던 숲을 쩌렁쩌렁 울리고, 검을 맞부딪혔다 크게 회전하는 두 사람 주변으로 물방울이 원을 그리며 튀었다. 쿵! 하고 낡은 포석을 내려찍는 무스카리의 검날에 카멜은 손을 짚고 뒤로 훌쩍 돌아 피했다. 그리고 다시 비호처럼 날아들어 그의 머리를 쪼갤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검은 빈 허공을 쳤고, 카멜은 목을 스치는 검을 피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캉! 캉! 쩡!! 카가각-! 맞부대낀 검들이 각자 이를 들어내며 서로를 견제했다. 무스카리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맞대여진 카멜의 얼굴을 보고 이를 들어내었고 카멜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둘은 동시에 뒤로 훌쩍 뛰어 물러섰다. 무스카리는 카멜의 얼굴을 빠짐없이 응시하며 외쳤다. " 아스!! " 그의 목소리가 숲의 빗줄기 사이를 헤치고 번져나갔다. " 아스포델-!!! " 카멜은 묵묵히 아스를 부르는 무스카리를 쳐다보았다. 무스카리는 빈틈을 보이지 않도록 카멜을 검으로 겨냥하며 외쳤다. " 나와 함께 가자! 너는 나의 것이야! 너의 이름도 내가 주었고, 너의 모든 것을 내가 가졌다! 나를 벗어나지 못해! 너는 내 것이고, 내 품안에 들어올때 까지 너를 쫓겠다! 누구를 죽이든지, 숲을 불태우든지 상관하지 않고 너를 쫓아가겠어! 영원히!!! 죽음을 넘어서도 너를 찾았던 나야! " " ... 아스님은 네 것이 아니다 무스카리. " " 네 것도 아니지 카멜. " " 아스님은 그 이름을 버렸다. 그 분은 이제 내가 준 이름의 리아트리스 님이시고, 누구의 것도 아니야. 그 분은 나의 것이 아니지만, 나는 그 분의 것이다. 너는 누구의 것이지? " " ... 그녀를 만난 후 내 정신과 내 마음과 내 모든 욕망은 그녀에게 가 있다. " " 그것은 단순한 너의 욕심이 아닌가 무스카리? 네가 그분의 것이 되기 위해 너는 뭘 주었나? 고통? 슬픔? 좌절? 증오? " " 입 닥쳐라, 카멜리아. 너의 착각이 우습구나. 나는 그의 모든 것을 가졌어! " " 그래! 너는 그분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지! 네가 가져가 비어버린 모든 것은 내가 주었다! 네 식으로 말하면, 그런 그야 말로 내 것이 아닌가? 내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기에, 아스 역시 나의 것이야! " " 감히-!!! " 늘 님, 자를 붙여 공경심을 동시에 나타내던 카멜이 아스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불렀다는 것은 무스카리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때, 무스카리는 카멜의 목에 무엇인가 작은 병을 매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분노에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스의 향기는 그 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병에 담긴 액체는 아스의 눈물이었던 것이다. 무스카리는 자신을 농락한 카멜때문에 머리끝까지 시커멓게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고, 그가 이를 악물며 검을 치켜들고 카멜에게 덤벼들자, 카멜은 검을 들 생각은 않고 오른쪽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 ?! " 카멜의 입에서 새어나온 연기같은 형상. 그것이 점점 커지며 카멜을 둘러싼 커다란 어떤 것의 모양으로 변하자 무스카리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 그것은... " " 너를 위해 준비했지. 냉랭한 심해의 정령수, 어둠의 뱀이다. " 카멜의 몸을 감싸고 커다랗게 선 세모난 머리의 그것은 새하얀 비늘을 가진 커다란 뱀이었다. 그것은 새파란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무스카리를 응시했고, 곧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두개로 갈라진 푸르스름한 혀를 드러냈다. 무스카리는 어느새 주변에 응축되어 있던 빗방울의 포환에 온 몸을 두드려 맞았다. 거친 비바람을 헤치고 그라시스의 들판을 넘어 군대가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보는 느린편이었다. 원래라면 날개를 단 그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지나쳤어야 할 곳이지만 비바람때문에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용족의 군대는 느리지만 꾸준히, 인간들의 군대처럼 진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밤중에, 남몰래 출발했고 느리다고는 하지만 꾸준히 거리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구릉의 윤곽을 따라 교묘히 이동하는 그들은 허허벌판에서도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협상의 성공과 실패를 기다리진 않았다. 무스카리는 어젯밤 안수케로의 진군을 명령했고, 그들은 지형적으로나 숫자로나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는 연합군의 진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비바람들 사이로 조그만 소도시의 주변을 둘러싸듯이 쳐진 천막과 깃발이 펄럭거리는 것이 보였다. 드라세나의 진홍빛 깃발은 폭풍우에 농락당하고 있었고 얼기설기 만들어진 엉성한 방책은 몇군데는 비바람에 날려가고 부셔져 있었다. 용족들은 조심스럽게 열명씩 흩어져 안수케를 둘러쌌다. 폭풍우에 모두들 천막안이다 어디다에 꼭꼭 틀어박힌듯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 두명밖엔 보이지 않았다. 재빠른 용족 한명이 뛰쳐나가 순식간에 경비병 두명을 베어넘어뜨리면서, 용족들이 굶주린 짐승처럼 일제히 안수케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천막을 때려부수던 용족들은 곧 어리둥절하게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천막은 모조리 텅텅 비어있었다. 경비병을 베었던 용족 하나가, 짚단으로 만들어진 경비병의 투구를 내동댕이 치면서 으르렁거렸다. " 함정이다!!! " 그 시간, 주민들과 에린지움의 걸음 펜 오키드를 축복의 성으로 피신시키고 안수케를 비운 후 나온 연합군의 병력은, 용족들처럼 그라시스 들판을 돌아 드라세나 성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성벽안에는 모든 용족들이 안수케 기습을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드라세나를 지키고 있는 것은 인간과 수인족 병사들 뿐이었다. 드라세나를 함락당하면서 많은 병력을 잃은 상태였지만, 트리옌들이 섞여있는 연합군이 우세한 편이었다. 그들의 진두 지휘를 맡은 로단테는 승리를 장담하면서, 공격개시를 지시했고 비바람을 뚫고 날아가는 바람 화살들이 초소를 지키던 병사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지난 공격때문에 성벽이 많이 무너졌으므로 연합군은 손쉽게 드라세나 내부로 잠입할 수 있었다. 연합군은 로단테의 지시에 따라 흩어져 도시 곳곳에 있는 수인족과 인간병사를 없애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비바람에 가로막힌 비명과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 아스는 애써 그런 소리들을 무시하며 로단테와 함께 대로를 달려 성으로 향했다. 성문앞에 다다르자 많은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로단테는 감탄할만한 정령 운용으로 그들을 모두 자빠트린 후 무기를 빼앗고 움직일 수 없도록 밧줄로 묶었다. 놀란 얼굴로 쳐다보는 아스에게 그는 눈을 찡긋하면서 대꾸했다. " 저도 스피리아 이전에 나이트였습니다. 아리스타타님의 묘목이었으니까요. 빨리 갑시다, 일단 성을 함락하면 항복을 권고하는 것이 훨씬 쉬워질 겁니다. " 아스는 한때 축제를 즐기러 왔었던, 낯익은 성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달리는 그의 눈이 흐려졌다. 이곳에서 제피와 스티의 얼마만큼의 추억이 쌓여있을까. 아스는 지금쯤 스티의 시신을 마주했을 제피를 생각하자 가슴이 메어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슬퍼할 여유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성안에 있던 병력들이 많이 밖으로 빠져나간 후라 성안에 남아있는 적군은 얼마 없었다. 대부분 로단테의 실력으로 처리하고, 곧 아스는 왕의 연설을 위해 성 밖으로 툭 튀어나온, 도시 어디에서나 잘 보이도록 만들어진 테라스에 섰다. 대로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곳에서 아스는 난간 위로 올라섰다. 난간은 좁았고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 위태로웠지만 아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내부에 흐르는 에린지움의 힘을 느꼈다. 곧 그의 머릿속에 하늘로 치솟은 커다란 흰 그림자를 가진, 은록색 이파리의 커다란 나무가 떠오르고, 아스는 손끝과 발끝까지 미치는 이상한 느낌에 갑자기 힘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하며 천천히 그 어떤 기운을 자신의 밖으로 내보내 돌리기 시작했다. 그 힘은 무척이나 거대하고, 흐르는 물이나 바람과도 같아서 붙잡아 두기가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 자신의 통제를 무시할것만 같은 커다란 어떤 흐름. 아스는 눈을 떴고, 어느새 그의 머리카락은 무중력 상태처럼 너울거리기 시작했고 청록색 눈동자가 선명한 빛을 띄었다. 로단테는 한발 뒤로 물러나, 이 세상에 현존한 가장 위대한 기적,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 그 근원의 힘을 보았다.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로, 처음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 소년. 이 세계와 전혀 다른 곳에서 자랐을 그는 허물을 벗는 뱀과 같이, 자신의 본질을 향해 빠르게 변화했다. 하지만 그는 아리스타타와는 전혀 다른 인격체였다. 심지어는 외모조차 그다지 닮지 않았다. 하지만 로단테는, 아리스타타의 미숙한 면과, 아리스타타의 숨겨진 고집과, 아리스타타의 숨겨진 성격이 그대로 표현되었다면 리아트리스와 같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늘 도도한 얼굴로 축복의 성 꼭대기에서 모든 숲을 지배해왔던 여왕.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모든 얼굴과 감정과 성격을 숨겨왔고, 어쩌면 그것이 그녀에겐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익숙했을 것이다. 태초부터 홀로 존재해온 뿌리깊은 고독으로 그녀는 그렇게 서 있기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리아트리스는,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청이면서 울고 웃고 괴로워하고 반항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존재한다. 어떤 이성적이지 못한 감정적인 존재에게 에린지움의 힘이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렇기에 그것은 일종의 기적이었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그의 힘은, 그렇기에 아리스타타보다 아름다웠다. 에린지움의 힘이 커다란 파동을 그리면서 드라세나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아스는 자신의 목소리에 정령의 힘을 실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 여기에-!!! 나 에린지움의 걸음이 있다-!! 드라세나는 나에게 바쳐진 왕국!!! 사악한 용족들에게 이끌려 전쟁터로 나온 이들이여!! 순순히 항복하라! " 파앗-!! 비바람을 꿰뚫고 에린지움의 힘에 이끌려 참지못하고 뛰쳐나온 햇살이 그의 주변으로 떨어졌다. 캄캄한 비바람의 어둠속에 그의 주변에만 햇살이 떨어져 기쁜듯 반짝반짝 어우러지고 있었다. 신화처럼 빛나는 그 모습에, 싸우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을 잊고 손을 놓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명한 회청은빛 머리카락은 이 세상을 정화한 힘의 상징이었으며, 빛나는 청록빛 눈동자는 그가 아리스타타임을 증명해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광장에 선 아리스타타의 석상을 쳐다보진 않았다. 그들은 그곳에 직접 강림한 에린지움의 걸음을 바라보았고, 어쩔수 없는 경외로 손에 들었던 무기를 놓았다. " 커헉!!! " 무스카리는 배를 꿰뚫고 지나간 물줄기에 피를 쏟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카멜은 비아냥거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 불타는 심연의 정령수는 어디있지? 왜 반격하지 않나. " " 크... 크윽! " 무스카리는 피를 쿨럭쿨럭 쏟아내느라 대꾸하지 못했다. 카멜은 무스카리의 상처 위에 적대적으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 반격하지 않으면 죽는다. " " 후... 나를 죽이는 것은 네 오랜 비원이 아니었더냐? 뭘 망설이는 거지? " " 너를 위해 그러는 것이라는 착각은 눈꼽만치 말아! 그 야수를 어쨌지?! "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카멜의 목소리엔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당장이라도 무스카리의 숨통을 끊으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이지경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는 그 불꽃의 짐승이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상처를 그러잡고 크크, 어깨를 들썩이더니, 곧 숲이 떠나가라 웃기 시작했다. " 하하하하!!! 카멜, 너는 삼백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발전이 없구나!! " " 네놈!!! " 다시 솟구쳐간 물의 뱀이 그를 감싸며 날카로운 머리를 목줄에 들이대었다. 하지만 무스카리는 그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대꾸했다. " 지난 대륙전쟁때, 너는 나를 죽일 수 있었던 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타타가 나의 수중에 있다는 점 때문에 나를 죽이지 못했지. 우습지 않나? 너의 아리스타타가, 나의 마지막 비책이 되는 것이. 그녀가 나를 살리는 카드라는 점이 말이야. " " ...그것을 어디로 보내었지? " " 궁금하나? 나의 정령수가 어디에 가 있는지? 미안하지만 그 같잖은 협상단에는 없다. 거짓임이 뻔한 장소에 그가 필요할리 없지 않나? " " ...그럼, 안수케로 진군한 군대에 있나? " " 네가 협상이 실패하면 습격당할 것이 뻔한 안수케에 그를 남겨뒀을리 없지 않나? 후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만약의 사태를 위해 드라세나성에 그를 숨겨놨지. " 카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스카리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쳐지고, 하마터면 카멜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의 목을 가를뻔 했다. " 걱정은 하지 마라. 그 정령수는 오로지 에린지움의 걸음에만 관심이 있으니까. 무고한 다른 생명들을 죽이진 않겠지. 하지만 그는 에린지움을 미워해. 아주 싫어하지. 한시라도 빨리 내가 그곳으로 가 그를 제어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일단은 그저 그를 붙잡아 두라고만 시켰지만 원래 내 명령같은건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는 존재라서. " " ...무스카리...!! " " 자, 이제 날 좀 풀어줄 마음이 생겼나? " 카멜의 눈동자가 증오로 흐려졌다. 무스카리는 그의 맑고 차가운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면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느꼈다. 카멜은 절대로 자신을 죽일 수 없었다. 아스를 죽이고 싶지 않아서라도 나를 놓아줄 수 밖에 없겠지. " 그게 너와 나의 다른 점이다 카멜. 나라면 차라리 아스의 목숨이 위태롭더라도 너를 죽이겠어. 차라리 그를 죽였으면 죽였지, 너와 아스가 함께 있는 꼴은 보지 못하니까. 나를 풀어주더라도, 그는 이미 내 수중에 있어. 네가 품었던 사랑스러운 육체가 내 품에 안기겠지. 그의 입술은 달콤하더냐 카멜? 그의 안은 보드랍더냐? " " 입 닥쳐라... " 카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은 무스카리와는 달랐다. 그의 지독한 소유욕과 집착은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카멜의 마음의 빈틈을 헤집고 들어와, 그의 추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차라리 그가 죽는게 낫지. 어떻게 내 품에서 우는 꼴을 보겠어? 다시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내게 매달리는 시간이 지금일까 언제일까 초조해하며 질투심에 사로잡혀 몸을 떨꺼냐? 하하...! 네가 아무리 고귀한척, 그를 위하는 척 하더라도 사랑은 이기적인 거다. 그 일방적인 마음은 이기적인 거란 말이야! 나를 죽여보시지 카멜!! " 퍼억!! 무스카리는 멀리로 튕겨나갔다. 카멜은 뒤를 돌아, 으스러져라 주먹을 쥔채 말했다. 그의 목소리로 이를 씹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 아스님의 손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지 마라. " " 크크... ...하하!! 넌 역시 위선자야. 그런 점이 나를 즐겁게 해. " 무스카리는 몸을 일으키며 등뒤로 검붉은 날개를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그가 숲 위로 떠오르는 바람을 느끼면서 카멜은 외쳤다. " 그를 억지로 가질수록, 그의 마음은 너를 떠날 것이다 무스카리!! 너는 영원히 마음만은 가질 수 없어!! 네 욕심에 또 그를 죽이지 말아!! ... ... 너에게 빼앗기기 싫어서라도, 나는 그를 다시는 찾지 않을테니. " 마지막 말은 거센 비바람을 꿰뚫고 날아오르는 용의 날갯짓에 묻혀 들리질 않았다. 아스는, 에린지움의 힘을 거두며 테라스에서 내려왔다. 보이는 전황으로는 대부분이 항복을 선언하고 얌전히 포로가 되고 있었다. 뒤를 돌아서던 아스는, 갑자기 자신을 감싸는 로단테의 등에 가로막혔다. 다음 순간 뜨거운 열기가 확 끼쳐오고, 아스는 열기와는 반대로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뭔가 불꽃이 번쩍인다 싶더니, 가로막고 서 있던 로단테가 저만치 날려 테라스 구석에 처박혔다. 그는 그을린 뺨을 추스릴 생각도 못한채 기절했고, 아스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타오르는 커다란 짐승을 마주대할 수 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만들어졌다 허물어지고 또 만들어지며 솟구쳤다 무너지는 그것은, 진주홍과 노랑과 빨강의 환영과도 같은 것이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몸집과 갈기, 네개의 발은 왠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 열기와 불꽃 사이에 떠 있는것 처럼 보이는 붉은 보석같은 눈동자만은 뚜렷했다. 아스는 본능적인 거부감에 한발 뒤로 물러섰지만, 난간에 막혀 더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것은 비웃음 같은 것을 그르릉, 내뱉더니만 한숨처럼 입가에처 작은 불꽃을 토해내었다. - 나는 불타는 심연의 정령수, 불의 정수, 불꽃의 야수다. 나를 아느냐? " ...너, 너는 무스카리의... " - 나를 아느냐? 아스는 입을 다물었다. 아스는 그가 무스카리와 계약한 정령수라는 사실밖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대꾸를 하지 못하자, 짐승의 몸이 갑자기 백열하더니, 분노에 찬 음성을 내질렀다. 그 목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키는 것 같은 것이었기에 아스는 귀가 먹어버릴 것 같았다. - 감히 나를 몰라-?! 내 날개를 자르고, 심연으로 처박히게 만든 장본인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이냐-?! 너의 천적이라는 이유로 내가 당해야 했던 모멸감과 수치를 네가 모른다고?! " 으아아! " 아스는 귀를 틀어막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정령수의 소리치는 음성이 너무 커서 고막이 터질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짐승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불꽃으로 이루어진 꼬리를 뻗어 아스의 팔 한쪽을 휘감았다. 치지직, 살타는 냄새와 함께 끔찍한 고통이 밀려와 아스는 귓전에서 손을 뗄 수 밖에 없었지만 고통에 비명은 더 나왔다. " 아아아악!!! " - 그 잘난 에린지움의 힘으로 한번 나를 대적해보지 그러느냐?! 너에게 두려운 것이라면 경외하고 두려워해야 하거늘, 끝없는 지하의 심연속에서 천년을 갇혀 있어야만 했던 나의 고통을 왜 모르는 척 하는 거지? 나의 고통은 지금 네가 겪는 그것보다 수십배, 수천배는 더 했다! 아스는 몸에 위해가 가해지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에린지움의 힘을 몸속에서 느꼈지만, 그것은 불꽃이 감긴 팔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무의 천적은 불.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팔에서 시작되는 열기가 몸속의 수분을 바짝 말려버리는 듯 했고 그냥 불에 데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이 정신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 지난 시대가 멸망한 것이 왜 나의 탓이지? 나의 힘을 과욕하고 탐닉한 인간들의 잘못이 아니더냐? 정령수는 자연 그 자체. 그저 그 힘 자체로 존재할 수 있을 뿐! 왜 그들의 죄를 내가 짊어졌어야만 하는 거지?! 대답해봐라! 나를 파멸시킨 에린지움의 걸음이여! " 놔라. " 아스는 순간 고통도 잊고, 뒤에서 자신의 한쪽 뺨을 감싸고 불꽃이 붙잡은 팔을 잡은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아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잔혹한 일들을 자신에게 저지르고, 자신을 지옥의 나락에 빠트린 그의 손은... 아직도 크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아스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은 팔을 옥죄는 불꽃보다 더 괴로웠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크으... 너는 나에게 명령할 수 없다. " 그리고 너는 이 아이를 죽일 수 없다. 나와의 계약을 상기해라.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저 복수만으로 만족하고 또다시 그 심연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 아스의 팔에서 스르륵 불꽃의 꼬리가 풀려갔다. 아스는 팔을 붙잡으며 털썩 꿇어 않았고, 무스카리는 황급히 그런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아스는 극심한 고통속에서도 무스카리의 손을 매섭게 물리쳤다. 무스카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늘 자신을 신뢰와 사랑의 감정으로 쳐다보던 따스한 초록색 눈동자는 어딜가고, 마주쳤던 그 순간부터 자신을 불타는 것보다 더한,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에 빠트린 청록색 눈동자가 거기 있었다. 아스는 고통에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무스카리를 외면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본건 헤어진 후 처음이었지만, 아스는 애써 그의 얼굴에서 안스륨의 흔적을 지워냈다. 그의 안스륨은 자신과 같은 검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무뚝뚝하지만 상냥한 남자였다. 불타는 듯 붉은 머리카락에 금안을 가진, 자신을 강간한 남자가 아니었다. 애증이 아스의 마음속을 축축히 적셨고,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불꽃의 짐승은 으르렁거리면서 무스카리의 그림자로 되돌아 갔고, 무스카리는 우뚝 선채 시커멓게 탄 팔을 붙들고 쓰러져 떨고 있는 아스를 내려다 보았다. 아스를 다시 되찾기만 한다면, 무척이나 기쁠것만 같았는데 아니었다. 무스카리는 무엇인가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싸늘히 식는 느낌을 받았다. " 아스포델. " "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마!!! 나는 리아트리스다! " " ... 나더러 카멜이 네게 준 이름으로 너를 부르란 말이냐? " " 그렇다면 나에겐 이름이 없어.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그 이름과 카멜 뿐이니까! " 무스카리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안스륨이 아니듯 여기에 있는 이 소년도 아스포델이 아니었다. 그렇게나 냉정하고 차가웠던. 자신을 지독하게 증오했던 아리스타타의 머리빛과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있을 뿐. 무스카리는 눈을 감았다. 내리는 비가 그의 눈꺼풀에 축축히 맺혔다. " 무엇이든 상관없어. 이제 너는 내 것이야. 나와 함께 안드리움의 성채로 가야한다. " " 나는 네 것이 아니야!!! " " 내 것이 아니라면 네 스스로 증거해봐. 네 스스로 나에게 벗어나서, 내 것이 아님을 보여. " 무스카리는 아스의 팔을 붙잡아 일으키며 억지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아스가 입술을 벌리지 않고 고개를 돌리려 하자 무스카리는 탄 상처를 꽉 옥죄었다. 고통에 소리를 지르려던 아스가 입을 벌렸고, 무스카리는 그 안으로 자신의 혀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곧 뜨끔하는 고통에 얼굴을 떨어트릴 수 밖에 없었다. 무스카리는 입가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자신을 노려보는 아스를 바라보았다. " ...너에게 농락당했던 것은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로 족해! 나는 아리스타타도, 아스포델도 아니야! " " ... 뭐든 좋아. 너는 나와 함께 간다. " " 놔! 놔!! 카멜을 어떻게 했지?!! " 무스카리는 거칠게 반항하는 아스의 뺨을 때렸다. 아스의 고개가 크게 돌아가고, 아스는 입술을 깨물며 무스카리의 뺨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지만 곧 제지당했다. 아스는 붙잡힌 팔 대신 다리를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안긴힘을 썼다. 무스카리는 카멜에게 당했던 상처가 깊었기에 더 이상 아스가 반항하는 것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는 아스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킨 후, 어깨에 들쳐 업었다. 그는 드라세나를 지나쳐 퇴각하는 용족들을 보며 폴리모프를 풀었다. 폭풍우는 어느정도 사그라졌다지만 아직도 비가 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며, 무스카리는 마음의 시커먼 동공이 더 커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삼백여년이나 걸려 다시 찾은 아리스타타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한것은 없었다. 자신은 여전히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숲의 저주 무스카리였고 그는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 자신을 극심하게 증오하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품안에 아스를 안고 있으면서도 아스가 그리웠다. 까마귀같은 새카만 머리카락에, 명랑하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 조그만 것에도 즐거워하고, 모든 것에 호기심을 보이며 자신을 어미새처럼 따라다니던 조그만 아이를.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아무것도 없다는 표현은 걸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곳에 있는 것은 더럽혀진 황무지와, 잔인한 침묵과, 고통스러운 허공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갖는 것이 있었다. 새하얀 나무 한 그루와, 백발의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한 명의 남자. 하늘은 시커멓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검은 구름에 뒤덮혀 한 점 빛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였지만 그 나무가 서 있는 주변으로는 간간히 햇살이 흩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그 햇살 한줄기 속에 서서 나무의 흰 줄기를 쓰다듬으며 기침했다. 처음 보는 남자였지만, 낯이 익었다. 아스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물어보려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말은 나오지 않았고, 아스는 실체가 없는 것 처럼 그저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막연히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함께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휘청, 하고 몸을 일으켰다. 늘어진 머리카락들 사이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꾹 깨문 입술이 보였다. 그는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는데, 그 말 한마디를 할때마다 심장이 쥐어짜지는 것같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이...제... 마, 마지막... 이다. 흐... 너에게... 이름을..." 이름. 데자뷰가 일어나면서, 자신이 지녔던 몇개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이름을 주었던 사람들도 떠올렸다. 아스의 몸이 가볍게 떨려왔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전부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누군가가 부르는 이름이 자신을 상징하는 표식이 되는 것이다. " 사랑받는 자, 아스. " 마법사의 몸에서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가 일어나 나무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자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아스는 그 나무가 고동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 위대한 자, 카. " 또 마법사의 몸에서 나온 뭔가가 나무에게로 흘러가자 고동이 점점 잦아들었다. 아스는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 옆에 자신과 함께 있던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짧은 은빛 머리카락에 청록색 눈동자, 소년같은 몸매. 마법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닥으로 쓰러졌고, 그 몸이 먼지처럼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괴로운 듯 입을 열었다. ' 아스의 모순은, 카를 위한 것이지. ' " -! " 아스는 갑작스레 밀려오는 한기에 번쩍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한기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척 추운 곳인듯 손발이며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방금전까지 무슨 이상한 꿈을 꾸었던 탓인지 상황파악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돌로 만들어진 조그만 방에 길죽한 창문이 하나 달려있고 자신은 거기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짐승의 모피로 감싸인 침대 네 귀퉁이에는 유리 등불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과 꼭같은 모양으로 크기만 큰 것이 방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적인 불이 아닌 마법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런 연료도 없이 유리등불 한가운데 둥둥 떠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스는 몸을 일으키고 발을 한발 내밀었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차가움이 발끝을 감싸고 맴돌기 시작했다. 아스는 다시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성에로 얼룩져 바깥이 잘 보이지 않는 창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쌔앵-! " 흣...! " 얼어붙을듯 거세고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스는 두 팔로 상체를 감싸고는 눈을 크게 떴다. 순간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뭔지 몰라서 였다. 하얗다. 온통 하얗다. 마치 에린지움의 방에 들어온 것과 같았다. 하얀 땅과, 하얀 하늘과, 땅과 하늘을 구분 짓는 것이라고는 푸르스름한 지평선 뿐. 게다가 지독한 추위. 아스는 곧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떨기 시작했다. 금새 찬바람에 노출된 뺨이며 코가 떨어져 나갈듯 시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스는 아직 따스한 생각을 붙들고 자신이 왜 이런데 와 있는 것인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심해의 정령수. 나흘뒤의 협상. 양동작전. 드라세나 성의 탈환. ' 내 것이 아니라면 네 스스로 증거해봐. 네 스스로 나에게 벗어나서, 내 것이 아님을 보여. ' "... 크... 무스카리!! " " 나를 불렀나? " 아스는 몸을 홱 돌렸다. 그러자 저절로 창문이 닫혔다. 무스카리는 창문을 닫기 위해서인지 까닥 움직였던 손을 내려놓았고 들고온 쟁반을 탁자위에 내려놓았다. 아스는 얼어버린 듯 우뚝 굳어서서는 그를 바라보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아스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지러운, 상반되도록 모순된 마음이 그를 괴롭혔다. 그의 죄를 추궁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과, 두번 다시는 그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무스카리는 그런 아스를 무시하고 팔안에 들고 있던 옷을 아스에게로 던졌다. 아스가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옷은 아스의 가슴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 입어라. 그런 차림으로는 금방 꽁꽁 얼어버릴테니까. " 말하고 싶지 않다. 아스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무스카리는 마치 그가 묻기라도 했다는 듯 대꾸했다. " 여기는 안드리움을 넘어 산맥의 끝, 대륙의 끝에 있는 빙원이다. 이 빙원의 너머에 빙해가 있고 세상의 끝이 있다. 그러니까 이 성채는 대륙의 제일 끝에 있는 성채다. 그러니까 이곳은 사방 천지가 눈과 얼음뿐이고, 자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트리옌도 이런 차가운 땅위에서는 얼어죽는다. 트리옌이 약한 것은 불도 있지만 겨울도 있지. 일조량도 적고 비도 오지 않는다. 충분히 먹어두지 않으면 금방 몸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테니까 괜한 객기 부리지 말고 주는 것은 모두 먹도록. 이런 추운 오지에서 날마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니까. " 그가 들고왔던 쟁반위엔 갓 따온 것 처럼 싱싱한 과일과 야채들이 한아름 올려져 있었다. 자신의 말을 듣는 건지 듣지 않는 건지. 겁에 질린 고양이처럼 벽에 바싹 붙어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아스의 모습에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무스카리는 아스발밑에 떨어진 옷가지를 주으려 몸을 그 가까이로 굽혔다가, 아스가 움찔, 하고 크게 몸을 떠는 것을 보고는 행동을 멈추었다. 자조적인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무스카리는 옷 줍는 것을 관두고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갔다. 무스카리가 나가자 말자 아스는 벽에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있는지도 모를 심장이 튀어나오기라도 할듯 두근거렸다. 그의 모습은 예전의 안스륨이 아니었다. 불타는 듯 붉은 머리카락은 흉폭하고, 금빛 눈동자는 잔인하게 번뜩인다. 다만 변하지 않고 그를 괴롭히는 것은 그의 목소리로, 그 낮고, 조금은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어조가 그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그를 바라보지 않고 그 목소리만을 들으면 마치 안스륨이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곧 이어 떠오르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범하던 목소리가. ' 사랑해!! 아리스타타!!! 사랑해, 아리스타타!! 아리스타타!!! ' " 싫어-!!! " 아스는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시라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 잠깐이라도 무스카리, 그 저주스런 놈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다. 그에게서 할 수 있는 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멀리 가야만 했다. 그를 마주대할때마다 산산히 부서질 자신의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아스의 마음속에는 그것이 남아있었다. 아스는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 중 길고 두터운 망토 하나만을 집어든채로, 다시금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좁은 창틈에 발을 올린 후 그대로 아래로 몸을 던졌다. 거센 북풍이 그의 발밑 허공을 집어삼킬 듯 불었지만, 아스는 정령을 불렀고 얼어붙은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 이런 곳에 꼭꼭 숨겨놓으면, 카멜이 찾지 못할 줄 아는거냐? " 무스카리는 불 유쾌한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런 경우엔 대꾸해줄 수 밖에 없었다. 이 성채는 레제다 튜베로즈, 그의 이복동생 것이었고 자신은 그것을 빌려쓰는 처지이기에. " ...그라면 이곳도 그리 머지 않은 시간에 찾아오겠지. 이 세상에서 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카멜리아뿐이니까. " 수백년의 시공 틈바구니에서,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져 다른 세계의 껍질을 쓴 아스도 찾아내었던 그다. 같은 공간에서 에린지움의 걸음으로 각성한 그를 찾지 못할리가 없다. 이곳에 숨긴것도 임시방편. 카멜에게서 그를 제대로 숨기려면 폭풍의 성채에 가야 했겠지만 그곳은 아스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 수없이 많은 적대적인 용족들과, 무엇보다도... 그곳엔 자신의 어머니이자 골드 드래곤인 에리카가 있으니까. 그녀의 변덕에 의해 자신은 언제 영혼이 비어버린 아스의 껍데기만을 안을 수 있게 될런지 몰랐다. 이런곳에 있는다고 해도 그녀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스카리는 계속 그녀가 자신의 감정과 아스를 묵인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에린지움의 심장을 가져오라 명령한 것은 그녀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 그나저나 가엾게도. 자신을 그렇게 농락하고 짓밟은 자에게 붙잡혀 함께 있어야 한다니. 게다가 또 언제 밤을 틈타 그의 침실 사이로 숨어들지 모르지. 아름다워 졌지? 그애는. 사슴같이 늘씬한 팔다리에, 단단하면서도 가냘픈 육체와 만개한 꽃같이, 잘 버려진 검같이 아름다운 얼굴. 당장이라도 덮쳐 가지고 싶겠지. 이제 그는 네 손아귀에 있어. 네가 뭘 하든 어떻게 하든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렇지? " 레지는 농염하고도 잔인한 미소를 띈채 무스카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그런 미소가 그의 흉폭성을 부추겼지만, 무스카리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상한 일이다. 사치스런 감정일까? 그가 곁에 없을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갖고, 그가 싫어하든 비명을 지르든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안고 싶었다. 다시 카멜이 그를 빼앗아가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것이라도 그 몸속 깊히 각인시켜 늘상 자신을 괴롭혔던 아리스타타의 그 오만한 자존심마저 모두 찢어발겨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몸을 가까이 가져간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떠는 아스의 모습을 보고, 우습게도.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무스카리는 상처입었다. 상처입어야 할 것은 아스인데, 무스카리는 자신도 상처입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막상 그를 그렇게 눈앞에 두니 겁이 더럭 났던 것이다. 자신이 언제 타인의 감정과 이목따위를 신경썼다고 그가 그렇게 자신을 경멸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증오하며 저주의 말을 퍼부을 것이 무서웠다. " 그는 이미 너를 뼛속깊히 증오하지. 네가 어떤 놈인지, 얼마나 잔인하고 이기적인 짐승인지 똑똑히 알아버렸으니, 되려 두려울 것 없지 않아? 안스륨이라는 역겨운 가면을 뒤집어 쓰고 그가 언제 네 정체를 알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돼. 너의 본성을 마음껏 드러내고 그를 짓밟아!! 그는 너를 그 누구보다 싫어하고, 한시라도 카멜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 지금 저 차가운 대지를 맨발로 뛰어서 도망가고 있으니까. " " 뭐? " 무스카리는 퍼뜩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벌컥 열자, 설원 저 너머로 아스가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레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방금 주변에 건 현혹마법을 뚫고 뛰쳐나갔어. 정령의 도움때문인지 굉장히 빠르네. 얼른 뛰어가서 잡지 않으면 뒤의 숲으로 들어가버릴 거고 일단 숲으로 도망치면 잡기 어려워질거야. 저래뵈도 에린지움의 걸음이니... " " 지금 그게 문제냐!! " 무스카리는 창가로 몸을 날렸다. " 헉... 헉... " 찬바람때문에 목이 따가웠다. 설원을 박차는 맨발은 벌써 얼어서 감각이 없다. 트리옌도 이런 설원에서 약해진다던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닌듯, 아스는 마치 자신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온 몸은 부서질 듯 추웠고 아직 성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도 못했는데 눈앞이 흐려지고 걸음이 무뎌졌다. 도망가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멀어져서 카멜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카멜에게서 받은 그의 조그만 조각조차 부서져 버릴거다. 아스는 뛰면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스쳐 지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방금전까지 눈앞에 보이던 새하얀 설원 위 얼어붙은 검은 성채는 갑작스레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법인가, 하고 생각하며 아스는 다시 발길을 옮겨 뛰었다. 성이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불안감이 조금 사라졌다. 사방천지가 더 설원인줄 알았는데 성의 뒤쪽 멀리로 어렴풋이 숲이 보였다. 눈에 뒤덮혀 싸늘해보이기 그지 없는 숲 너머로는 희미하게 눈구름에 가린 커다란 산맥에 보였다. 아마 저 산맥을 넘어가면 안드리움 성채가 나오고, 그 후로 용족의 땅을 지나 사막을 건너 들판을 지나면 트리옌들의 결계가 나올 것이다. 말로 하면 쉽지만 실제로 그 거리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날개가 있는 용족으로써야 쉽게 횡단할 수 있는 거리일진 몰라도 정령의 힘을 빌린다해도 두 다리를 가진 아스로는 한달 밤낮을 꼬박 달려야 할 거리인 것이다. 도망가는 것은 힘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지만, 일단 숲으로만 들어가면...! 입에서 하얀 입김이 굴뚝의 연기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때 쐐액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스는 본능적으로 그 소리가 무엇인지 깨닫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허허벌판에서 날개가진 것을 피할 수 있는 법은 없었다. 자신의 위와 흰 설원으로 검은 그림자가 뒤덮힌다 싶더니 곧 누군가가 자신을 뒤에서 덮쳤다. 아스는 그 무게에 놀라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무스카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무릎으로 그의 다리를 옮아맸다. 아스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스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 놔!!! 이것 놔!! 내 몸에 손대지 마!! 놓으란 말이야!!! " " 놓으면 도망갈거잖아. " " 당연하지... 내가 왜 너같은 것과 함께 있어야 하지?! 날 놔줘!!! 그 더러운 손 치워!! " " 이곳은 설원이다. 그런 차림으로는 도망은 커녕 저 숲에 당도하기도 전에 얼어죽는다! 도망갈 생각은 버려! " " 놔!!! 놓으란 말야!!! 짐승같은 놈, 제발 날 놔!! 날 건드리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 무스카리는 폭언을 퍼붓는 아스에게 불끈 화가 나서 엎드려 있던 그의 몸을 뒤집었다. 아스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채 머리를 흔들며 고함쳤다. " 놔!! 가까이 오지마!! 내 손가락 하나도 건들지 말란 말이야!! 강간마!! 살인자!! 으아아!!! " " 달아나지 않겠다고 해! " " 싫어!! 으아악! 놔!!! " " 오늘만이라도 달아나지 않는다고 해라! 이런 몰골로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나!! " 눈을 질끈 감고 비명만 지르던 아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무스카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씩씩거리며 내뿜는 그의 숨결은 달콤했고, 그 신선한 청록색 눈동자는 자신의 가학성을 자극하는 그 빛이었다. 무스카리는 아스의 발버둥이 멎자 그를 놓아주었다. 사실상 더이상 그를 그렇게 붙잡고 있다가는 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를 놓아주자 아스는 뒤로 후다닥 물러서더니 망토를 끌어당겨 몸을 싸맸다. 무스카리는 돌아선채 말했다. " 지평선이라 숲이 가까워보이지만 사실은 반나절을 꼬박 걸어야 당도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눈보라라도 치면 너는 그 사이에 얼어죽는다. 아니, 눈보라가 쳤다면 벌써 얼음이 되어있겠군. 그러니 함부로 도주를 결심하지 않는게 좋아. 도망갈 생각이 있다면 적어도 얼어죽지는 않을 꼴을 해서 도망가라. " " ... " 폭언이외에는 아스는 그에게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듯 했다. 무스카리는 그의 대답듣기를 단념하고 폴리모프를 풀었다. 무스카리는 등을 보이고 있느라 몰랐지만, 아스는 용족이 본체로 돌아가는 광경을 가까이서 보긴 처음이기에 외면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눈을 크게 떴다. 몸 주변으로 금빛 오라가 흘러나오며 둥실, 몸이 떠오른다 싶더니 그 모습이 파묻히듯 금빛 거체가 드러난 것이다. 가까이서 보는 용의 모습은 위협적이기도 하고 압도적이기도 했다. " 타라. " " ... " 타라고? 아스는 경계심과 불만이 뒤섞인 눈초리로 무스카리의 거체를 바라보았다. 금빛 비늘과 붉은 날개가 아름다워 평소의 그였다면, 아니 예전의 그였다면 호기심에라도 기꺼이 올라탔겠지만 그것은 무스카리였다. 아스가 말을 듣지 않을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무스카리는 아스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그의 옷깃을 발톱으로 잡아채 자신의 등뒤로 집어던졌다. 아스는 반사적으로 무스카리의 갈기를 붙잡았고, 그는 아스가 내려설 틈을 주지 않고 홰를 쳐 날아올랐다. " 윽...!! " 아찔한 느낌이 들면서 몸이 뜨는 기분이 들자 아스는 비명을 삼키며 갈기를 꼭 붙들었다. 머리를 갈기에 파묻고 엎드리고 있자니 살아있는 생물의 온기가 흘러 꽝꽝 얼었던 두 뺨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센바람에 아스는 몸을 일으킬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조심조심 상체를 들었고, 곧 펼쳐진 몽환적인 광경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거센 바람에 찢어져 흘러가는 구름들. 멀리 지평선 너머로 아릿아릿 해가 지고, 산맥은 병풍처럼 대지의 한쪽을 감싸고 있었다. 멀리로 보이는 흰 지평선의 흔들림은 빙해의 포말. 금새 해의 끝자락이 사라지자 산맥 저 너머에서 부터 침범해오는 어둠이 자락을 깔기 시작했다. 그리고... " 오로라!! " 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커튼이 울렁이듯, 엷은 분홍과 보랏빛을 띈 환상적인 빛무리의 흔들림. 둘은 그 사이를 헤치며 날아가고 있었다. 빛으로 만들어진 커튼을 지나 밤의 홀로 다가가는 길. 아스는 그 빛이 자신에게 부딪혀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황홀경을 삼켰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자연의 신비가 가져오는 그 아름다움은 두 사람을 압도하고, 위로하고,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아스는 가늘게 흘러내리는 눈물 한방울을 훔쳤다. 이 곳, 이 풍광이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안스륨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멀리 머릿속에서 예전, 수많은 숲속의 밤 그가 낮으막히 읊조렸던 말이 생각났다. - 결계를 넘어가면, 뜨거운 사막을 지나자. 사막을 지나 대륙의 지붕 뜨거운 불길의 화산을 지나면 누구도 이르러 본 적 없다는 대륙의 끝 빙원에 당도할거다. 빙원에서 은하수와 오로라를 밟으며 걸어 빙해에 다다르면, 빙산의 징검다리를 지나 아무도 없는 세계의 끝으로 가 함께하자. 그것이 진실이 될거라고 믿었던 때. 그때의 그 감정은 어째서 그토록이나 맹목적이고 어리석도록 아름다운 걸까. 하지만 아스의 가슴 한 귀퉁이는 얼음여왕의 거울조각이 박힌듯 차갑도록 아팠다. 아스를 태워 성으로 돌아온 무스카리는 그를 아스가 누워있던 방에 던져놓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경계심과 두려움에 처음엔 바싹 긴장하고 몸을 옹크린채 침대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아스였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록 무스카리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어느정도 마음이 풀렸다. 게다가 배도 고팠고, 방안에 갇혀있다시피 웅크려 있자니 지루했다. 창밖으로는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다가 그쳤다가를 반복했고 몇번이나 창밖을 바라보아도 보이는 것은 온통 새하얀 세계뿐. 아스는 지금쯤 미친듯이 자신을 찾고 있을 카멜이 걱정스러웠지만 시간이 멈춘듯한 방안에서는 그런 생각마저 엷어졌다. 게다가... 그 방문너머에 어쩌면 그 무스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모순된 마음은 여전했고, 이상하게도 막상 그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를 다시 만나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은 우스우리만치 엷어졌다. 자신은 지금 그에게 잡혀있는 몸이고, 생명력이라고는 부족한 이 얼음의 땅에서는 에린지움의 힘도 낼 수 없었다. 그리고... 막상 그에게 무엇인가를 추궁한다 하더라도, 무엇을 말해야 한단 말이지? 사랑하는 아리스타타 대신 나를 억지로 안아서 화가 난다고 해야하나? 아리스타타가 아닌 자신보고 아리스타타라 그래서 화가 난다고? 그가 자신이 아닌 아리스타타를 사랑한게 밉다고 해야하나? 그런 것을 떠올린 순간 아스의 얼굴은 수치로 붉게 물들었다. 추궁한다고 해봤자 죽어도 입밖으로는 낼 수 없는 말 뿐이 아닌가.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은 그는 아리스타타의 환생이었고 에린지움의 걸음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떠올린 아스는 퍼뜩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에린지움의 걸음. 그것은 에린지움의 심장을 지닌 자로써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다. 아스는 계획을 세울때에 자신이 맹세했던, 심장이 빼앗길 위기가 오면 스스로 자결하겠다고한 말을 떠올렸다. 아스는 자신이 없애야 하는 자신의 목숨 무게에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무스카리는 그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고, 지금의 자신으로써는 그가 정말로 그의 심장을 뺏고자 어떤 짓을 한다면 저항할 힘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 다시는 그의 마음에 이리저리 휘둘리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은 이제 리아트리스. 안스륨이 주었던 모습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이 땅에 선 한 인간이다. 카멜이 자신에게 주었던 이름과 생을 생각하며 아스는 멀리 푸른 지평선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무스카리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 자신은 그 어느때보다 스스로를 직시해야만 했다. 불안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얼룩진 추억이 지금을 빼앗지 않도록. 그리고 성에 갇힌지 사흘만에 아스는 무스카리가 줬던 옷을 갖춰입고 방문을 나섰다. 아스가 머물던 방은 성의 꼭대기였다. 탈출을 용이하지 않게 만들기 위함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그런 의도였다면 지난 탈출건에서 증명되었다시피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으리라. 아무튼 아스는 가파른 계단을 한참 내려와서야 다른 방들이 있는 복도에 설 수 있었다. 바닥엔 융단이 깔려있고 벽은 테페스트리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썰렁하고 온기가 없는 성이었다. 인적이라곤 없을 뿐더러 성 전체가 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지 어두운 분위기에 극지방의 냉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스는 복도를 따라 걸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원형모양의 커다란 계단과 그에 연결된 일층의 홀을 볼 수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의 벽은 많은 초상화와 촛대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는데, 할일도 없고 해서 그것들을 유심히 감상하던 아스는 문득 한 그림에 시선이 멈추었다. 그림에 그려진 여성은 검푸른빛의 머리카락에 엷은 은청빛 눈동자를 한 미녀였다. 왠지 낯익다고 생각했더니 여태까지 봐온 그림들 대부분에 그녀가 같이 그려져 있었다. 둘러보니 계단에 그려진 초상화들의 테마는 그녀라고 해도 과연이 아니었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과, 많은 풍경이 그려진 그림들이었지만 거기에는 항상 빠지지 않고 그녀가 등장하고 있었다. 죽 그림을 보고 내려가던 아스는 그녀의 그림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화려한 보랏빛 머리에 새파란 눈동자의 미청년. 마력적이라고 해도 될만큼 아찔한 그의 미모는 그림속에서도 유난히 두드러졌다. 레제다 튜베로즈. 무스카리의 동생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무스카리와 함께 했던 행적속에서 가끔 등장하던 그는 지금 그림속에서 그녀와 함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긴 의자위에 앉아 있었다. " 내 아내였던 여자야. " " -! "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아스는 놀라서 몸을 돌렸다. 거기엔 기억속과 하나 틀림없는 모습의 레지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서 있었다. 그는 아스가 자신을 쳐다보자 손을 들어보며 새삼 아는척을 했다. " 여어, 오랜만이야 귀여운 꼬맹이. " " 레지. " 오랜만에 만난 사이인 만큼 반가워야 했지만, 이미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의 아스가 아닌 이상 무턱대고 살갑게 그를 대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은 이제 에린지움의 걸음이었고 그는 용족일테니까. 경계심이 서린 아스의 눈동자를 보고 레지는 어깨를 으쓱했다. " 이거이거, 너무 하잖아?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으면 아는 척이라도 해줘야지. 내가 너를 알게 모르게 얼마나 도와줬는데? " " ... ... " " 그런 토끼같은 눈으로 바라보지 마. 확 덮치고 싶잖아 그럼? 아무짓도 안할테니 걱정마. 내가 언제 너한테 해코지 하는거 봤어? 너에게 손끝하나라도 대었다간 무스카리가 날 잡아먹을테니까 그러고 싶어도 못 그래. 게다가 이렇게나 안전한 은신처에 먹을 것 입을 것 까지 도와주고 있는데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잖니? " " ... 그럼 그 과일들도 옷도 다... " " 그래그래. 겉멋만 들은데다 으름장만 놓을줄 아는 녀석이 뭐 그런거 세심하게 챙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 " 사실을 말하자면 도와주기는 커녕 남모르게 그를 괴롭혀 왔던 레지지만 그는 뻔뻔스럽게 입에 침도 안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한들 아스가 어떻게 알 것이며, 그가 해코지를 한다한들 아스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을 아스도 깨달았는지 아스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어깨에 힘을 뺐다. " 그런데 레지는 이곳에 왜 있는거죠? " " 왜라니? 이곳이 내 집이니까 있는거지. 뭐 정확히 말하면 내 전 부인이었던 저 여자의 집이지만 이제는 내꺼야. 게다가 또 내가 무스카리가 저질러 놓은 일 뒤처리반이잖니. 너를 그렇게 덥석 납치해왔지만 그놈이 뭔들 할 줄 아는게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내가 이 성도 빌려주고 무스카리가 사라진 연유에 대해서도 여기저기 변명하고 다니고 했다- 이 말이야. " " ... 전부인이라면 지금은 아니라는 소린가요? ...아무튼 뭐든 물을 상대가 생겨서 다행이네요. " " 그래. 다행이지. 뭐가 궁금한데? " " 전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다. 드라세나를 탈환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은 실종되었고, 여기에 처박혀 있으니 전쟁의 양상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를 몰랐다. 더불어 카멜의 행방도 궁금했다. " 뭐, 잘라 말하자면 엉망진창이지. 무스카리가 여기 너를 데리고 처박혀 있는 이상 전쟁이 우리측에 불리하게 돌아가는건 당연지사고 카멜이 눈이 시뻘개져서 너를 찾겠다고 닥치는대로 밀어버리고 들어오고 있는 중이니까... 다행이라면 오리어의 그 황제인지 왕인지 하는 놈이 생각보다 유능해서 밀리고는 있어도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는 양상이야. " " ...그렇군요. 그럼... 그는? " " 무스카리말야? 내내 너랑 여기 있었잖아? " 그날 이후로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는데 뭔 말인가. 아스가 머리를 갸우뚱하자 레지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 여튼 겉모습과 달리 소심하기는. 계속 이 성에 머무르고 있었어. 보지 못한거야? " " ... 그가 어디 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 아스는 입술을 사려물었다. " 다만 갈아입을 옷도 필요하고 가져다 놓은 음식도 다 떨어졌어요. " " 아 그래? 그건 내가 준비해다 주지. " " 그리고 두터운 외투와 장화도 필요해요. " " 왜? 탈출이라도 하려고? " " 바보가 아닌 이상 탈출하기 무리란거 알아요. 하지만 성 안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계속 있기엔 심심하니까 성밖의 산책이라도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리고 된다면 검도 부탁해요. 몸을 계속 단련해두지 않으면 금방 무뎌지니까. " " 알았어 그쯤이야. 하지만 난 계속 이곳에 있는게 아니니까 앞으로 필요한게 있다면 무스카리를 찾아 그에게 말하는게 좋아. " 아스는 자신도 모르는 울컥함에 버럭 소리쳤다. " 그와는 말하고 싶지도,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도 않아요!! " " ...라는데? " 레지는 윙크를 하며 뒷전을 바라보았다. 자연히 아스의 시선이 따라가자 거기엔 홀의 가운데 있던 문을 열고 나오던 무스카리가 서 있었다. 그는 무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그 표정 그대로 문을 닫고 다시 들어갔다. " 에구, 삐졌네? " " ... " 고개를 홱 돌리는 아스를 보고 레지는 가까이 다가와 묘한 웃음을 걸치고는 말했다. " 너무 자극하지 않는게 좋아. 너도 아는가는 모르겠지만 저 놈은 한번 눈이 뒤집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성격이거든. 게다가 이곳은 고립된 곳이고 너는 힘을 쓸 수 없으니, 무슨 꼴을 당할지 알게 뭐야? 그러니 얌전하게 고분고분 무스카리가 하자는 대로 있는 것이 되려 너에게 이득이 될 뿐더러 도망칠 기회를 노리기도 좋아. " " ...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거죠? " " 글쎄. " 아스의 의심스런 눈초리에 레지는 빙긋이 웃어보이더니 무스카리가 들어간 방으로 사라졌다. " 뭐야? 난 지금쯤이면 벌써 몇번이고 꼬맹이의 침대로 기어들어갔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 한번 붙여보기는 커녕 근처에 가 보지도 못했나 보군. " 무스카리는 놀리는 것이 틀림없는 레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인상만 썼다. 레지는 난롯가 앞에 늘어져 있는 안락 의자에 몸을 던지더니 팔을 등받이에 걸치고 뭐가 웃긴지 킥킥 거렸다. " 하아,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깝던데? 레지씨이~ 레지씨이~ 앙앙거리던 강아지는 어디가고 의심스러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는 산고양이라니. 아 귀여웠던 아스포델! 돌아와줘어어어~~ 나한테도 저렇게 차가운 기색이어서야, 네가 건드려볼 생각도 못하는게 조금은 이해가 가. 킥킥.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다 차가운 빙원의 성에서도 아리스타타는 아리스타타라는 건가? 그래도 그렇지, 이틀이나 아무도 없는데 내팽겨 쳐두다니 너답지 안잖아 무스카리?? " " 시끄럽군. 대체 뭐가 신나서 그렇게 나불거리는 거지? " " 신나지. 신나고 말고. 후훗. 그렇게 갈망하던 그를 잡아다두고서도 근처에 가지도 못하는 네 모습이라니!! 아하하핫!! " 무스카리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하지만 저런 비웃음에는 이제 일일히 대꾸해주고 싶은 기분도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지는 무스카리가 발끈해하지 않자 풀이 죽은듯 곧 김빠진 소리를 피시식 내고는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런 그를 보고, 아주아주 모처럼, 무스카리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 ... 가까이 간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거지? 지난 추억이라도 즐거운 듯 이야기 해야 하나? 그를 짓밟은 일을? " " 너에게는 즐거운 추억 아니었나 무스카리? 새삼 그가 곁에 있으니 약해지는 모습 하고는... 크큭, 아무튼 재밌다니까. 그렇게 본성을 드러내놓고도 아직 연기할 마음이 남아있나? 이 위선자. 그를 앞에 두고 전전긍긍하기라도 하면 그가 좋아라 할 줄 알았나? 머뭇거리는건 네 사전에 없는 일 아니었나? 간단해. 지금이라도 저 바로 문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꼬맹이의 손목을 잡아채고 깔아버려. 간단하잖아? 그 짓 하는데 무슨 대화가 필요한가? " " 계속 빈정거리면 그 나불거리는 입을 짓뭉개주겠어. 신경을 긁는 것도 적당히 해라. " 무스카리가 무섭게 쏘아보자 레지는 알았다는 듯 손을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아무튼 저대로 두면 모처럼 잡아온 보람이 없잖아? 네가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 금발머리 아가씨께서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올라오고 있다고. 언제 다시 그가 카멜과 떠날지 모르는데, 아니지. 거기까지 내다볼 필요도 없나? 언제 에리카가 녀석의 심장을 뽑아오지 않느냐 호통칠지도 모르는데 일분 일초가 네게는 아깝고도 소중한 시간 아니던가? " 뒤로 젖힌 레지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으로 번들거리며 축축히 젖어들었지만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무스카리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 즐겨야지. 조금이라도 더 이 순간을 아껴야지.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시간도 모처럼이잖아? " 곧 다시 머리를 든 레지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 뭐, 할 이야기가 없으면 옛날 이야기라도 해주라고. " 아스가 성안을 한바퀴 둘러보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때엔 언제 갖다 두었는지 갈아입을 새 옷 두벌과 방한복과 장갑이니 장화니 하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은빛 장식으로 마감된 검도 있었다. 보통 검치고는 약간 짤막한 듯한 그 검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날을 빼들고 나서야, 아스는 그것이 그와 함께 할때 무스카리가 썼던 검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스카리같은 장한이 쓰기에는 짧은 칼이다. 되려 그것은 아스의 폼에 맞았다. 아스는 일단 그 검을 배게밑에 챙겨두고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요기를 했다. 그러자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으며 저절로 등잔에 불이 붙었다. 아스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빙원에 내리는 어둠은 고요하다. 아무런 소리도 흔적도 없이, 눈의 침묵에 휩싸여 바다에 끌어당겨지듯 내려앉는다. 아스는 어둠이 차가운 하늘과 싸늘한 대지를 모두 물들이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잠깐의 어둠 후에는 곧 다시 눈부신 빛이 찾아든다. 하늘의 길을 걸어 세계의 끝으로 달리는 은빛 강은 어둠이 있기에 되려 더 빛나는 길이다. 한참동안 창문을 열어두고 있었더니 얼굴이 꽝꽝 얼어버렸다. 아스는 하얗게 번지는 자신의 입김을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렸을때, 의자위에 앉아있는 무스카리를 발견하고 몸이 굳었다. 무거운 침묵. 그는 자신을 보지 않고 눈을 내리깐채로 어느샌가 탁자위에 올려져 있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기에 차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스는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더 이상 그 답답하고 괴로운 침묵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 ...아무리 내가 신세지는 입장이라 해도 남의 방에 들어올땐 인기척이라도 내는게 어때? " 무스카리가 흘낏 눈을 들자 아스는 숨을 삼켰다. 이글거리는 듯한 금색 눈동자.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그의 눈동자는 어두운 금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더니, 탁자너머의 빈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 앉아. " 그 명령조의 고압적인 어투에 아스는 발끈했다. " 싫다. 네놈과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있느니 살인마나 몬스터따위와 마주보는게 낫겠군. " " 앉아. " 내용은 똑같았지만, 이번에는 왠지 어조가 달랐다. 버럭 소리치듯 앉을것을 강요할 것이라는 아스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어쩐지 뉘앙스 만으로는 애원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어조로 말했다. 아스는 무스카리를 노려보다가, 그가 자신의 방에 있는 이상 앉지도 않고 일일히 그의 말에 틱틱대는 것도 우습다고 생각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까 레지가 했던 말도 떠올라서 였기 때문이었다. 분하지만 무스카리가 화가 나서 자신을 강제로 끌어다 앉히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침대에 떠밀어 버린다면 이겨낼 자신이 없다. 아스가 자리에 앉자 무스카리는 웨이터처럼 찻주전자를 들어 빈 찻잔에 차를 붓고는 아스의 앞에 내밀었다. 아스는 무심한 눈동자로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무스카리는 아랑곳 않고 말했다. " 렌데초는 향기도 맛도 좋을뿐더러 혈액순환을 도와 추위를 물리치는데 효과적이다. 이 지방에 사는 이종족들 사이에는 필수품과도 같지. " " ... " " ... " 잠깐의 침묵. 하지만 그것은 그저 침묵이 아니었던듯, 아스는 그가 다시 말을 이었을때 무스카리가 주저했던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차를 한모금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입을 떼었다. " 이 성이 어떻게 이곳에 만들어 졌는지 알고 있나? " " ... " 아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무스카리와 친밀한듯 대화란걸 주고받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무스카리의 말과 시선을 외면했지만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 모른다고 생각하고 말하지. 아주 먼 옛날이었다. 그때엔 아직 마법이 발견되지 않았던 시대였고 대륙의 많은 부분이 미 개척지로 남아있던 시절이었지. 많은 몬스터들과 위험들도 우글거렸지만 숱한 이종족들과 용족들이 경계심없이 뒤섞여 살던 시대이기도 하다. " 아주아주 옛날에, 한 용족이 있었고 그 용족을 사랑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용족이 아닌 수인족이었고, 강한 상대만을 남편으로 받아들이는 용족의 특성상 여자는 수인족을 사랑하지 않았다. 남자에게도 날개와 날카로운 발톱이 있었지만 그것은 용족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보잘 것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일방적으로 남자를 무시했지만 남자의 사랑은 굴하지 않았고 작은 날개로나마 어디든지 그녀가 가는 곳을 따라다녔다. 그를 싫어한 여자는 그가 따라올 수 없는 곳까지 가리라 마음 먹고 세계의 끝을 향해 홰를 쳤다. 사흘밤낮 잠도 자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남자는 열심히 날아 여자를 따라갔지만 작은 날개로는 용족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빙원까지 그녀를 따라갔지만 눈보라가 치는 빙해너머까지는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싸늘한 설원에 몸을 누인채 자신의 약한 날개를 원망하며 울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언젠가는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이 성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탑의 꼭대기에서 날마다 북쪽을 바라보며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는 그녀를 기다리다 지쳐 죽었다. 그런 그를 가엾게 여긴 북극의 여신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하늘로 올려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용족보다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큰 날개를 달아주었고, 남자는 그 날개로 빙해를 건너 그녀를 따라 세계의 끝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 사람들은 그 남자의 날개가 오로라라고 하지. 은하수는 그가 날아간 길의 흔적이라고 하고. " 아스는 문득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던 무스카리가 고개를 들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도 모르게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무스카리는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스는 무스카리의 그 목소리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고개를 돌려 그를 죽어라 쏘아보고 싶었다. 이렇듯 고개를 돌려 그의,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만을 듣고 있노라면, 앞에 있는 자가 무스카리가 아닌 안스륨인 것 같았다. " ... ... 나 역시, 너를 찾아 차원을 넘어갔다. 수백년의 시간을 헤매었어. 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너는 나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는군. " 나를 찾아? 나를 찾아?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아리스타타였어. 저 목소리로 불렀던 것은 아리스타타, 바로 그 이름. 아스는 이를 꽉 물었다. 그리고 두려움과 분노가 반반씩 뒤섞인 감정으로 무스카리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이질적인 금빛 눈동자가 무서웠지만, 아스는 노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억속의 부드럽던 검은빛과는 다른 무스카리의 눈빛을. " 네가 수백년의 시간을 헤매었는지, 아리스타타를 쫓아갔는지 어땠는지, 나는 몰라. 내가 알바가 아니야. 알고 싶지도 않은 일이지. 내가 살아온 해는 고작 18년일 뿐이고, 지난 과거도, 아리스타타라는 여자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것도 몰라!! 내게 지난 시간에 대한 댓가를 강요하지마,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책임지라 말하지 말란 말이야!! 너는 단지, 단지 나에겐...!!! 나에겐!! " 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이런 일로 눈물따위, 더 이상 흘릴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자신의 앞에서 아리스타타에게 바쳐졌던 그의 마음과 순정을 알아달라 요구하는 그의 목소리가 괴로웠다. 그리고 분했다. 미칠 듯이 화가 났다. 저런 말에 자극당하는 자신이 싫었다. " 나갓!!! " 아스는 벌떡 일어섰고 그 여파로 조그만 탁자가 젖혀지며 찻잔이 쏟아져 내렸다. 바닥으로 구른 찻잔 하나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어지고, 곧이어 무서운 침묵이 뒤따랐다. 지겹도록 긴 시간.무스카리에겐 잠깐의 한숨을 내쉴만한 시간이었지만 눈물을 참고 있는 아스에게 그것은 힘겨운 한순간이었다. 이윽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이 쏟아지는 바람에 젖어버린 옷자락 그대로 밖으로 나가자, 아스는 소리를 삼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냉기가 다리를 타고 올라왔지만 얼굴과 마음은 타는 듯 괴로웠다. 아스는 주먹을 꼭 쥔 채로 눈물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눈두덩을 눌렀다. 더 이상은 싫어, 더 이상은 싫어. 이제 제발 나를 내버려둬. 죽어버린 줄 알았던 내 마음을 농락하지마. 그 후로 무스카리는 다시 사흘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스는 하루동안 방 안에서 꼼짝도 하고 있지 않다가 성 안을 돌아다녔지만 그와는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레지도 보이지 않는데 방으로 돌아가고 나면 음식과 옷가지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스는 무스카리가 자신과 함께 이 성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복잡한 마음과 무스카리를 의식하는 생각을 잊으려고 아스는 성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원래는 레지의 전 부인의 성이었다고 했던가. 전 부인이라면 헤어졌던가 죽었던가겠지만, 아스는 여자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성을 보며 어쩐지 그 여자가 지금은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잠시간 머무르고 장기간 비워두는 성이라기엔 드레스룸에는 옷가지가 꽉꽉 차 있었고 여자의 침실에는 자젤구레한 생활도구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방 곳곳마다 남아있는 많은 그림들. 아스는 그 그림들 중에서 레지의 초상화도 한 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림이라 그런지, 실제의 레지보다는 훨씬 인상이 부드럽고, 화려하다기 보다는 아름다운 느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하고 곰곰히 그 그림을 바라보던 아스는, 레지의 입가에 늘상 걸려있는 그 미소가 아니면 이런 얼굴이겠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 미남자의 입가에 항상 걸려있는, 비웃음과도 닮아있는 삐뚜름한 미소. 장난스러워보이지만 명백한 빈정거림이 뒤섞여 있는 듯한 그 웃음을 제외하고 난다면... 이런, 이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이겠구나 하고 아스는 생각했다. 성의 바깥으로는 늘상 엄청난 눈보라가 몰아쳤는데, 무스카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된지 사흘이 지난 오후에 눈보라가 멎었다. 아스는 자신이 처음 이 성에서 깨어나 탈출을 기도했던 그 날처럼 춥지만 그래도 당장에 얼어버릴 눈보라가 멎고 말간 하늘이 드러난 것을 보고 방한복을 껴입었다. 그리고 검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당장 무스카리가 쫓아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아스는 도망칠 마음은 없었고, 무스카리 역시 그것을 아는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스는 그가 보이지 않는 것에 안심하며 검을 빼들고는, 그동안 잔뜩 굳어버린 몸을 풀기 시작했다. 휭-! 하고 북극의 냉기를 가르는 검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스는 번쩍이는 칼날끝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유연하게 몸을 움직였다. 지난 일년, 대륙 최고의 검사들이라는 글로리 나이트 중에서도 전설적인, 무스카리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검술실력의 카멜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의 검끝은 물 흐르듯 나래를 펴고 있었다. 검술연습을 할때면 늘상 자신의 앞에 목검을 들고 서 있던 카멜의 실루엣을 그리며 아스는 그의 그림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카멜의 그림자는 무스카리 역시 보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아스를 쫓아 헐레벌떡 뛰어나오거나 하진 않았지만 성의 가장 꼭대기층, 즉 아스의 방에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스가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에. 무스카리는 부서지는 빙원의 날카로운 햇살에 회청은빛 머리카락이 빛나는 것을 눈부시게 바라보며 아스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을 읽었다. 카멜과 숱하게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왔던 그로써는 가상의 카멜을 상대하고 있는 아스의 행적을 누구보다 잘 볼 수 있었다. 언제나 아스는 필사적으로 덤벼들지만, 카멜에겐 빈틈이 없어서, 카멜은 한발자욱 멀찌감치 떨어진듯한 위치에서 여유롭게 검을 휘두른다. 그런 그에게 기습을 넣을 수 있는 방법은 항상 정령을 운용한 변칙적인 방법 밖에는 없다. 아스는 검을 크게 횡으로 베어내고 움츠렸다가 정령의 힘으로 뒤로 힘껏 뛰어오르며 크게 허리를 비틀어 검을 내리 휘두른다. 하지만 아무리 카멜의 머리를 금방 쪼개놓을 듯한 검격이라도 카멜은 간발의 차이로, 살짝 어깨를 비트는 것으로 피해버린다. 아스는 회심의 일격이 통하지 않는 것을 느끼자 허탈감을 느끼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움직임을 멈춰섰다. 그리고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스카리는 코끝을 차갑게 만드는 바람을 느끼며 역시 아스의 거친 숨결 역시 흐트려 놓는 것을 보았다. 제법 능숙한 솜씨다. 웬만한 인간 검사들보다 훨씬 나은 실력이었다. 검이라면 휘두를 줄도, 만질줄도 모르던 녀석이었는데. 거친 칼부림이 일어나면 내가 다칠까봐 소리지르고 피를 보면 울기나 하던 녀석이었는데. 카멜 그 녀석이 그를 저렇게나 강하게 만들어 놓았을까. 무스카리는 문득 카멜에게 빼앗긴 아스의 일년을 생각하자 질투가 치밀었다. 언젠가 나에게 빼앗길 것이 두려워 그에게 검을 가르쳤나 카멜? 나라면, 만약 나라면 그가 검을 휘두르지 않아도 안전하도록,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도록 꼭꼭 숨겨두겠다. 그저 매일 품 속에 안아둘거야. 무스카리는 창밖에 주저앉은 아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한 손에 꾹 쥐어질 것 같지만 그렇게 되진 않는다. 무스카리는 대신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숨결이 점점 잦아들고, 땀이 마르자 오슬오슬 몸이 떨려왔다. 아스는 냉기가 찌뿌드드 올라오는 바닥에서 일어나 추위를 떨쳐버리고 성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성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는 다른 훈기가 밀려들었다. 아스는 얼얼하게 얼어있던 얼굴이 녹는 것을 느끼며, 모닥불의 그림자가 흔들리는 홀을 바라보았다. 모닥불 앞에 놓여있는 손님용의 긴 안락의자는, 비어있는 평소와는 달리 긴 그림자 하나를 품고 있었다. " 그것도 검술이라고 배운거냐? " 바깥은 북극인데, 안락의자에 길게 몸을 누인채 방만한 태도를 하고 있는 무스카리는 얇아보이는 가운 하나만을 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모닥불의 번들거리는 빛이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쇄골과 가슴팍 일부를 훑고 지나갔다. 아스는 표정을 차갑게 굳힌채 그를 무시하고 계단을 올라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빈정거리는 그의 말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 웃기는 군. 그깟 쇠꼬챙이 좀 휘두른다고 네가 나를 어쩔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카멜은? 너에게 그런 같잖은 칼질을 가르치고. 자신이 용족의 메마른 토지를 휘젖고 다니며 흙먼지를 뒤집어 쓰는 사이 정작 너는 이렇게 내가 손만 뻗으면 닿을 위치에 있는 것을. 내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인들 못하리란걸 알면서도. 쿡, 쿡쿡... " " 시끄러워. 그는 너보다 뛰어난 검사야. " " 그가 나보다 뛰어났다면 벌써 나를 몇번이고 죽였겠지. 지난 수백년동안 그럴 기회 한번 없었겠나? 하지만 그는 나를 죽이지 못했어. 아아- 아니면 그가 나를 죽이지 못하기에, 대신 너라도 죽여보라고 그딴 검술을 가르쳐 주던가? 내가 침대에서 널 덮치는 사이 심장이라도 찔러보라고? " 캉!!!! 바람처럼 날아드는 아스의 검을 막은 것은 무스카리의 팔목에 걸려있던 쇠장식이었다. 쇠장식에 엷게 금이 가고, 무스카리가 피식 웃자, 아스는 치밀어오르는 화에 이를 갈며 소리쳤다. " 검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나야! 배운 것도 나고! 왜냐하면 언제고 네놈의 가죽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벗겨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 " 하하! 그럼 차라리 백정에게 칼질을 배우지 그랬나! 그런 어설픈 솜씨로는 토끼새끼 한마리 못잡겠군. " " 입 닥쳐! 혀를 도려내버릴테다! " 쩡! 쩡! 퍽! 칵!! 몇번 무스카리의 팔목에 감긴 장식에 부딪힌 검은 장식들이 다 떨어져 내리자 무스카리가 자리를 훌쩍 피하는 바람에 소파를 두동강 내고 말았다. 바람의 정령들이 힘껏 매달려 밀어제끼는 검의 힘은 홀의 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길 정도였지만 무스카리에게는 가 닿지 못했다. 무스카리는 턱끝을 스치는 살기 시퍼런 검끝의 바람을 느꼈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카멜의 검을 받아낼 정도인 그에겐 느리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쉬지않고 달려들어 검을 내리긋는 아스의 실력은 훌륭한 편이었지만 무스카리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무스카리는 슬쩍슬쩍 아스의 검을 피해가면서 계속 카멜을 모욕하고 아스를 화나게 하는 말을 지껄였다. 아스는 분개해 제정신도 없이 검을 휘둘렀지만 방금 격렬히 몸을 움직인 탓에 체력은 쉽사리 떨어졌다. 아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계속 움직였지만 몸동작은 점점 더 둔해져 갔고 이윽고는 헉헉거리며 어깨를 늘어트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움직임을 멈춘 순간, 아스는 비호처럼 날아든 무스카리의 팔에 검을 잡은 팔을 낚아채였고, 나머지 손으로 어깨를 떠밀자 그만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부서지지 않은 반대편 의자에 허리를 젖힌채 쓰러져 버린 아스는 동공을 크게 뜨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한쪽 어깨를 무스카리가 짓누르고 검은 떨어트린채 손목을 잡힌 후 였다. 아래로 길게 붉은 머리카락이 늘어지고, 그 끝이 아스의 뺨을 간질였다. 모닥불의 불빛에 따라 무스카리의 금안이 울렁거렸다. 아스는 반사적인 두려움에 움찔, 하고 몸을 빳빳하게 굳히고 말았지만 거칠어진 숨결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헉... 헉... 헉... 침묵 가운데 모닥불이 숨쉬는 소리와 아스의 숨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아스는 무스카리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왠지 그가 덤벼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 시선을 마주대하고 있자, 서서히 감정이 멀어지고 머릿속이 비어지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장작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리고, 무스카리의 숨결에 따라서 간간히 목에 건 펜던트가 짤랑거렸다. 금안은 조용히 가라앉아 흔들리고 있었다. 아스는 그 금빛의 연못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이 지는 호수와 같은 빛. 이상하게도 아스는 그 순간 그렇게 짐승같고 두렵던 그의 눈동자 어디에서도 흉폭한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가라앉아 있기만 한 빛. 아스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그 눈동자가 점점 가까이 온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아스는 순간 그가 입술을 마주대려는 줄 알고 몸을 버둥거리려 했지만 무스카리는 아스의 입술을 삼키는 대신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무스카리의 가슴과 아스의 가슴이 맞닿이고, 무스카리의 목과 아스의 목이 겹쳐졌다. 아스는 그의 살결이 닿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오싹함을 느꼈지만 자신의 목덜미로 흩어진 그의 머리카락과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은 손길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움직여야 했다. 벗어나야 했다. 그의 온기를 느끼기 전에!! 아스가 무스카리의 어깨를 밀어내려는 순간, 무스카리는 아스가 자각을 하기도 전에 재빨리 마법을 걸었다. 그에게 마법을 걸어 억지로 취하고 싶진 않았지만, 무스카리는 다만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가벼운 수면마법이었기에 원래라면 트리옌인 그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었지만 극지방의 차가움에 기운이 많이 약해진 아스는 몰려오는 졸음같은 것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무스카리를 밀어내려 손에 힘을 줘보았지만 그것은 부드럽게 제지당했다. 잠이 마구 밀려와서 아스는 멍한 눈으로 천정을 응시했다. 발버둥을 치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몸은 기억하고 있는 온기를 반갑게 맞아들이고 있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온기... 차가운 비가 몸을 적시고, 뜨겁지만 소름돋는 손길이 그가 기억하는 길을 지나고- 쾌락은 고통과 좌절의 나락이 되었던 그 순간. - 사랑한다! 아리스타타!! " ... 싫어...! 싫어, 싫어 싫어!!!! " 아스는 버둥거리는 대신 비명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소리쳤다. 구슬픈 울음이었다. 하지만 무스카리는 그를 놓아주는 대신 더욱더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낮으막히 말했다. " 아스, 아스... " " 싫어... 싫어어... " " 아스. 아스. 나의 아스... 나의 아스포델. " 그 순간에, 그렇게 불러줬어야 했어. 마법의 기운이 아스의 마지막 생각을 꺼트렸다. 눈물 한줄기를 귓가로 흘리며 잠에 빠져든 아스를 붙잡고 무스카리는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것인 그의 이름을. " 이게 뭡니까! " 카멜은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펜의 방에 뛰어들었다. 월이 먼저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펜은 그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하녀가 건네주고 있던 망토를 자신이 손수 받아 고리를 걸면서 그녀는 자신의 앞에 대륙 사방에 배포된 종이 한장을 내미는 카멜을 올려다 보았다. " 뭐긴요. 보시면 아시잖아요? " 카멜은 생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갸우뚱하는 펜을 보고 입술을 꽉 물었다. "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는 제가 찾아내겠습니다. 제가 되찾아오겠다구요! " " 그러시면 되잖아요. " " 그런데 왜 이런...! " 그것은 리아트리스를 되찾아 데리고 오는 자에게 거액의 포상금을 내리겠다는 전단이었다. 이미 그 전단은 온 대륙으로 퍼져나가 수많은 용병단과 헌터와 레인저들이 본 뒤였다. 펜은 월의 도움을 받아 망토를 걸치면서 말을 이었다. " 카멜님이 그를 되찾아 오지 못한다고 보고 그런것을 뿌린건 아니예요. 저는 물론 카멜님을 믿어요. 하지만 카멜님 한사람의 힘만으론 부족할 수도 있는 법. 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게 되면 더 많고 다양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가 심장을 빼앗기기 전에 되찾아오는 것은 지금 우리 트리옌들 제일의 선결과제! 그저 카멜님 한사람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은 다분히 정략적인 계산이 깔린 일이었다. 펜은 아직까지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의 소문을 억누르고 더욱 더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굳히는 동시에 길게 이어지고 있는 전쟁의 사기를 높이려는 것이었다. 아리스타타의 환생체가 또 무스카리에게 잡혀가 수배되고 있다는 것은 리아트리스의 무능을 증명함과 동시에 그가 잡혀가도 아직까지 축복의 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펜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언제 에린지움의 심장을 빼앗겨 트리옌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막대한 상금은 계속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는 군대뿐만 아니라 돈이나 다른 것을 목적으로 자원하고 있는 의용군과 용병대의 사기를 높여주는 일이 될 것이었다. " 리아트리스님은 북쪽에 계십니다. 오직 전 대륙에서 저만이 그를 찾을 수 있어요! 그리고 지금 그분의 곁에 무스카리가 있는 이상 행적이 발견된다고 해도 애꿎은 희생자를 낼 수도 있는 일입니다." " 무스카리가 용족들의 영역인 북쪽으로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 사라진 무스카리의 행적을 쫓는 것은 카멜님 외에도 좀 더 많은 발이 있는 것이 유리한 일입니다. 설사 희생자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것 역시 그를 쫓을 수 있는 길이 되지 않겠어요? " 그렇다고는 해도 카멜은 아스가 무슨 사냥감처럼 돈을 노리고 그를 찾는 자들에게 발견되는 것이 싫었다. 펜은 자신 역시 에린지움의 걸음으로 묵과하고 있지만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존재는 다른 자들에게 유혹적인 존재이다. 세간에는 그 피를 마시면 불사한다는 헛소문도 돌고 있고 트리옌이라면 눈을 벌겋게 밝히는 노예상인들도 있는 것이다. 아니면 일단 찾아만 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노릇. 허나 펜은 더이상 이 일에 대한 의견을 받지 않겠다는 듯 회랑으로 나서며 잘라 말했다. " 지금 카멜님께서는 축복의 성에 계시기 보다는 한시라도 더 빨리 북쪽으로 진격하여 리아트리스를 찾는 일이 급선무인 것 같군요. 전쟁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있습니다. 사막에 들어서면 앞으로 점점 더 나빠지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를 되찾을 때까지, 그의 심장이 안전한 것을 확인할때까지 대군을 물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희생자를 걱정하신다면 메마름에 힘들어할 우리 트리옌군을 걱정해 주세요. " " ... 예. " 트리옌과 드라세나 연합군은 결계를 지나 계속 북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무스카리와 정령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용족의 폴리모프가 용이한 결계 바깥쪽인데다가 숲도 없고 황무지와 사막이 이어지는 대지는 진군의 걸음을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카멜은 조금씩 천천히 진군하면서 도시 하나 하나를 점령해 갈때마다 쥐잡듯 샅샅히 뒤져 무스카리와 리아트리스의 흔적을 찾았지만 조그만 단서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현재 전쟁은 소강상태로, 군은 불볕사막 대륙에서 가장 강인한 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토지의 입구에서 멈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전단지를 본 많은 용병과 레인저들이 그보다 더 북쪽으로 사막과 암석의 대지로 스며든 상태. 성을 나와 북쪽으로 내달리는 카멜은, 군을 뒤로 물리고 단신으로라도 북쪽으로 하루빨리 들어가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애써, 애써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갑 복잡한 심정을 잊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그저, 그래. 그저 리아트리스님을 찾는 데에만 열중하는 것이다. 놀라서 자리에서 후닥닥 일어났지만, 자신은 여느때와 다름 없이 꼭대기의 그 방에 얌전히 누워 있었을 뿐. 아스는 창밖에서 눈보라가 우웅- 울어치는 소리를 듣고 몸을 움츠렸다. 무스카리와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소파로 떠밀쳐진 일이 기억나자, 가슴이 지끈거렸다. 목덜미에 휘감기던 그의 긴 머리카락과, 귓전으로 울리던 그의 절절한 목소리. 그 목소리, 그 목소리가 그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어깨를 부드럽게 내리누르던 손과, 따스하게 맞닿은 몸. 아스는 머리를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탁자위에 곱게 개켜진 새옷을 걸쳤다. 짙은 보랏빛의 옷을 걸치고 나자 자신의 옷을 누가 벗겨 침대에 눕혔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지워버렸다. 검을 비껴차고 아래로 나려가자, 성 안에는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성 안 어디엔가에는 무스카리가 있겠지. 계속 이어져 엇갈리고 있는 마음. 만나고 싶다. 만나고 싶지 않다. 이야기 하고 싶다.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 그를 대하면 가슴의 고통과 애잔함이 괴롭고, 그런 것을 느끼는 자신이 증오스럽다. 하지만 그를 대하지 않으면 다시금 그를 찾아가 붙잡아 추궁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질때까지 어떻게 해버리고 싶다. 흔들리는 마음. 아스는 머리에 손을 짚고 흔들었다. 기억하지마, 아무런 생각도 하지마. 카멜, 네가 보고 싶어. 축복받은 숲의 햇살 아래에 서서, 자신을 한없는 믿음의 눈동자로 쳐다보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비바람 몰아치고 폭풍우치던 지난날이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었지. 그의 품에 안겨 그 열기에 기대어 신음하고 있으면 홀로 침대에서 괴로움과 증오에 몸떨어하던 고통스러운 밤들이 잊혀질 것 처럼 느껴졌었지. 하지만 그가 곁에 없는 지금은. 잊고 싶기만 했던 지난 날들이 되살아나 다시 반복되는 것 같아 무서웠다. 다시금, 다시금 덜컥 그에게 마음을 줘버리고 고통스러워 할까봐. 아스는 성안의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멀리 빙해가 가장 가깝게 보이는 방으로 들어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쳐 창문이 덜컹거리고 커튼이 어지럽게 휘날려 푸른 파문이 이는 그 선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스는 온 몸을 때리는 그 칼날같은 차가움에 자신을 내맡겼다. 뺨을 후리고 목덜미를 베는 바람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준다. 콧 속이 얼어버릴때쯤, 누군가가 창문을 닫는 바람에 눈보라는 더이상 들이치지 못했다. 아스가 얼어붙은 눈꺼풀을 들자, 거기엔 혀를 끌끌 차면서 레지가 커튼을 가다듬고 있었다. " 그냥 들이치는 눈보라라 하더라도 오래 맞고 있으면 위험해. 아무리 네가 튼튼한 트리옌이라지만 여기는 북극이라는 걸 생각하라구. 안그래도 몸이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을텐데. " " 레지... 보이지 않길래 어디론가 간 줄 알았어요. " 레지는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 아아~ 뭐 그 무스카리야 내가 그래주길 간절히 바랄테지만 뭐래도 여긴 내 성인데 다른 사람들 들여둔 채로 내내 비워둘 수는 없잖아? 그리고 어딜 나가도 네가 무스카리가 괴롭히는 바람에 엉엉 울고 있지나 않을지 걱정 되어서 말야. 어디에 후닥 뛰어나가 얼어죽기라도 하면 골치아픈 일이 이만저만 아니거든. " 아스는 얼어버린 앞머리를 매만지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는 아름다운 레지의 초상화가 걸려있었다. 그러고보니 저 초상화가 걸려있는 방이 여기였구나. 실제의 레지가 그 앞에 서 있으니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눈을 살짝 내리깔고 안온한 표정의 레지를 뒤로 하고, 화려하면서도 진심이 없는 차가움을 띈 레지가 있다. 레지는 아스의 시선이 자신의 뒤를 향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뒤를 돌아 초상화를 바라봤다. " ...아아, 저거? 아주 예전에 그렸던 거지. " " 부인이 살아계셨을때 말인가요? " " 그래. 그때. " " 부인을 아주 사랑하셨나보군요. " " 뭐? " 레지는 아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곳 하하핫 하고 웃어제꼈다. " 아주 사랑해? 하하! 그런 말만큼 용족과 어울리지 않는건 없을거야. 용족들은 트리옌과 달라. 인간과도 다르지. 사랑이니 평화니 하는 말과는 정말로 다르거든. 사실 부인이라는 말도 이상한거야. 내가 그의 남편이었다는 말이 옳겠지. 용족의 여자들은 아주 강해서 많은 남편을 거느리기 때문에 보통 한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진실로 같이 하는 일은 드물어.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지. 복도에 그녀의 그림이 많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을거야. 주변에 그려져 있는 남자들은 모두 그녀의 다른 남편들이었어. 그녀는 빙해에서 태어난 아주 강한 용족이었거든. " " ...그러면 부인과 남편들은 모두 이 저택에서 함께 지냈나요? " " 아아, 뭐, 지낼때도 있고 곁에 없을때도 있고... 하지만 나는 그녀와 함께 재법 오랫동안 이 성에 머물렀지. 왜냐하면 그때는 그녀의 남편은 나밖에 없었거든. " 그럼 그것은 레지가 그녀의 남편들을 모조리 이기고 그녀에게 유일의 남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스는 그 말을 굳이 하진 않았다. " 그치만 저 초상화에서의 모습은 아주 부드러워 보이는군요. 지금의 레지와는 달라요. " " 그래? 그럴지도. 저때엔 아직 어렸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나의 첫 부인이었어. 뭐랄까, 용족에게 부부관계는 그저 사랑이니 뭐니같은 것과는 틀린거야. 그냥... 그저 그녀와 나는 유대감이랄까 신뢰랄까. 용족들은 대부분 안드리움 근처의 화염이나 화산속에서 태어나. 특히 빙원에서 태어나는 용족은 드물지. 그렇기에 우리 둘은 잘 맞았을거야. 그리고 이곳 추운 북극은 다른 이들은 잘 오려 하지 않지만 눈보라와 빙설에 가까운 나에게 편안했지. " 끝도 없이 부는 눈보라. 이따끔 하늘이 개면 해가 지지 않는 파란 하늘과 세계의 끝으로 가 닿은 오로라가 펼쳐지는 곳. 그곳에서 오직 그녀와, 오직 나와. 침묵속에 함께 했던 때. 아스는 머리를 기울이며 그 초상화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 사랑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구요... 하지만 사랑이라는 그 말의 바탕에는 틀림없이 신뢰와 편안함이 깔려있는 것일 거예요. 그리고 그런것이 정말로 사랑이라 말할만 할거예요. " 레지는 아스의 말에 보기 드물게 입을 다물고 미소 짓는 것을 잊었다. 묵묵히 서 있는 레지의 표정은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었지만 아스는 초상화를 바라보느라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초상화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그래. 편안함과 신뢰가 깔려있는 것이 정말로 사랑이라 말할만 한, 행복하고 따스하고 아름다운 것이겠지. 그녀를 사랑한다고, 혹은 나를 사랑한다고 울부짖는 무스카리의 외침은 그저 집착과 욕망과 채울 수 없는 마음으로 헤매이는 것. 이 몸이 안스륨의 온기를 기억하고 그의 목소리를 애틋해 한다고 하더라도 어지러운 생각과 불길처럼 들끓는 괴로움은... 사랑이 아니야. 이런건 사랑이 아니야. 무스카리는 침묵속에 홀로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림자가 지는 어느곳에서건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그림자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이 무스카리 주변을 감싸고 돌고, 차가운 얼음의 대지에서 그 열기는 수증기를 피워올렸다. - 이런 곳에서 무얼 하고 있나, 불타는 것들의 자식아. " ... 내가 무얼 하든, 무슨 참견이지? " - 헤맬때가 아니다. 방황활때도 아니야. 너는 내게 약속한 것이 있어. 이런 데서 시간낭비를 하고 있어도 괜찮다는 말이냐? " 네가 알 바 아냐. 너와 나의 약속된 시간은 아직 길다. 차분히 기다려라, 야수야. " 무스카리의 주변으로는 너무 차갑기에 되려 불꽃보다 뜨거운 고통의 빙해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무스카리는 그 위를 떠다니는 빙산의 한 조각 위에 서 있었다.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그것은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며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 위에 앉은 무스카리는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은 가끔씩 빙산의 흔적들이 보이는 망망대해. 세계의 끝은 어디에 있는지, 무스카리 그의 날개로도 반나절을 날았지만 보이는 것은 오로지 바다뿐. - 그는 너를 증오하는 것 같더군. 너를 아주 싫어해. 그런데도 나에게 약속을 지킬 수 있겠나? " 쓸데없는. 그러는 너야말로 왜 하필 내게 그런 계약을 제시한 것이지? 너 역시 그를 증오한다. 정확히는 에린지움을, 그것을 만들어낸 언령의 마법사를. 너의 날개를 꺾고 심연의 불길속으로 처박은 정령수들을. " - 그래. 나는 복수하고 싶다. 너의 힘을 모조리 삼켜 너의 육신을 입고 나는 새로운 그릇으로 다시 태어나 그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에린지움의 나무를 베고 그 뿌리까지 태워버릴 것이다. 너의 그 꼬맹이 역시도 나의 업화를 피해갈 수는 없겠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다면 너는 너와의 계약을 지켜야 해! " 그럼 나에게 이렇듯 참견할 이유가 없지 않나? 내가 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기를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면 될 것을. 너는 묘하게 초조해 보이는군. 그리고 그에 대한 증오심을 숨기지도 않아. 나는 너의 속셈을 모른다. 너는 우리를 초월한 존재. 자연에 한없이 가까운 네가 복수를 떠드는 것이 이상하군. ...하지만 나는 너의 힘이 필요했기에 너에 대한 의문을 접어두고 계약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지. 실패하면 내게도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에, 실패하면 차라리 너에게 먹혀지는 것이 낫기에. 그러니까 나를 내버려둬라. " 무스카리를 감싸고 그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만들던 불꽃은 그의 그림자속으로 사그라들었다. 무스카리는 침묵이 잦아들고 한참동안에도 그렇게 홀로 있었다. 세계의 끝으로 날아가는 오로라가 아무런 소리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을때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날개를 펼쳐 자신이 가야할 곳으로 날아올랐다. 자신이 가야할 곳. 갈 수 밖에 없는 곳. 항상 자신을 부르는 어떤 것... 아스에게로. 저녁때가 되자 눈보라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모닥불앞에서 눈보라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스는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뽀얀 입김이 피어올랐고 하늘은 눈구름으로 잔뜩 흐렸지만 한결 가벼워진 모습이었다. 아스가 성 주변을 천천히 돌고 있는 사이, 어느새 구름들이 엷어지고 하늘이 드러나자 오로라가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아스는 성벽에 기대어 그것이 사라질때까지 한참이나 오로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로라의 끝자락이 맞닿은 북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눈보라가 칠지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눈보라에 갇혀 코앞에 있는 성도 찾지 못하고 꼼짝없이 얼어죽으리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아스는 북쪽으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성 주변을 두른 결계에 가까이 가서도 무스카리도, 레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아스는 결계를 지나 계속 북쪽을 향해 걸었다. 콧속이 얼고 얼굴이 얼고 손끝과 발끝이 떨어져 나갈듯 시렸지만 아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커다란 날개짓 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스는 무스카리일 것을 예상하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고개를 돌렸을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여자치고는 무척이나 큰 키. 감정없이 보이는 건조한 얼굴생김. 길고도 단단해보이는 팔다리. 짧게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은 금적색, 눈동자는 몸속의 피가 그대로 비쳐보이는 듯 붉다. 이런 빙원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아무런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얇은 옷차림으로 가볍게 걸어 아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누구? " 아스의 의문에 그녀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 ... 그렇군. 나를 만나는 것은 처음인가. " 아스는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여자의 어조에 경계심을 품었다. 저 화려한 빛깔. 용족임에 틀림없다. 아직까지 무스카리나 레지외의 용족과는 마주대한 적이 없지만, 그녀에게서 아무런 위협적인 느낌이 나지 않더라도 그녀가 용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안감을 품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아스의 앞에 멈춰서서 허리에 손을 올렸다. 가까이서 보니 아스보다도 훨씬 큰 키에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뭔지 모를 묘한 느낌이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 나는 에리카 로벨리아. 그리고 너의 이름은 리아트리스였던가. 아니면 아리스타타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까? " " 당신... " 골드드래곤 에리카 로벨리아. 아스가 어떻게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가 한 손을 내밀어 아스의 가슴팍에 가져다 대었다. " 너의 심장은 어디에 있지? " " ...컥-!!! " 그녀가 가져다댄 손으로 갑자기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나면서 아스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고통에 의식이 끊겼다 이어졌다. 아스는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았지만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릎이 꺾였지만 쓰러질 수도 없었다. 에리카는 유리알같은 눈동자를 그에게 바싹 가져다대면서 입을 열었다. " 에린지움의 심장은 어디에 있어? " " 아... ....으... 아아!!! " " 에린지움의 심장은 뭐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지? 빨리 말해. 너를 죽여버리기 전에. " " 아아아아아악!!!! " 아스가 소리높은 비명을 올렸지만 에리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감정없는 눈동자로 고통에 떠는 아스를 무심히 쳐다볼 뿐이었다. 아스의 청록색 눈동자가 흐려질때쯤, 에리카는 중얼거렸다. " 네가 정말 아리스타타냐? " 그 순간, 갑자기 흐렸던 하늘에서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흩날리는 햇살과 들끓는 공기. 속살거리는 기쁨의 소리들. 아스의 머리카락이 떠오르고 희미해져 가던 눈동자가 다시 또렷해졌다. 에리카는 그 푸른빛을 바라보았고, 아스 역시 그녀의 눈동자에 떠오르는 이채를 볼 수 있었다. 이상했다. 그 끔찍하던 고통이 갑자기 사라지고, 자신이 자신이 아닌듯 느껴졌다. 의식은 있지만 육신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주변이 이상하게 눈이 부시고, 묘한 긴장감이 떠돌았다. 아스는, 아니 정확히 아스의 몸은 에리카의 팔을 붙잡고 무릎을 곧게 폈다. 그리고 아스의 입술은 열려 청명한 목소리를 내보냈다. 아스는 그 목소리를 듣자, 그가, 지금 자신의 밖으로 나온 그녀가 자신의 꿈속에 나왔던 또다른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가 정말 아리스타타냐고 묻고 싶은 것은 아스였다. 아리스타타와 아스의 의식이 공존해 있는 것이다. 아스는 처음으로 현실에 드러난 아리스타타의 실체를 보고 있었다. " 내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지? " " 너의 심장. " " ... 바람의 정령수는 내가 봉인한 것이 아니다. 그의 자취는 나 역시도 알 수 없어. 나의 심장을 갖는다고 그를 불러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것. 원래 그는 어디에도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자. 원래 네것이 아니었다. " 에리카의 붉은 눈동자에 희미하게 감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스가 그것을 채 관찰하기 전에 누군가가 갑자기 에리카의 팔을 붙잡고 아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으로 갑자기 아스는 의식이 뒤로 꺼지는 듯 어지러운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아스는 에리카의 팔을 붙잡은 손안에 돌아와 있는 감촉과 가슴에 남아있는 고통의 여운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등 위로 흩어진 청보라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레지는 아스를 가로막은채 에리카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 어머니. " " 레제다. 비켜라. " " 어머니,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무스카리가 이미 손안에 넣고 있지 않습니까, 그가 심장을 어머니께 바칠 것이니 기다려 주십시오. " 아스는 레지의 이런 진지한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라 낯설음을 느꼈다. 하지만 에리카는 여전히 변화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 네가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나에게 해야겠느냐? 네가 그토록이나 증오하는 무스카리에게 가장 큰 고통은 저 아이가 다시 죽어 없어져 영혼마저 찾을 길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네가 가장 바라는 길이 아니었느냐? " " ... " 레지의 침묵에 아스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레지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무스카리를 증오한다고? 무스카리가 그를 싫어하는 것 같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형제라고 말하며 늘 그의 주변을 맴돌던 레지가 그를 증오해? 하지만 레지가 다시 무어라 말을 잇기 전에 하늘에 거대한 그림자가 뒤덮혔다. 아스가 고개를 들자 검붉은 날개가 보였다. 하늘을 크게 선회해 돌아온 그 그림자는 빙원에 미끄러지듯 착지해 곧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무스카리였다. " 아스!!! " 에리카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무스카리가 다가오자 레지를 밀쳐버리고 남은 한손으로 아스의 목줄기를 틀어쥐었다. 아스가 목소리를 삼키고, 레지가 머뭇거리는 사이 가슴에 댄 에리카의 손아귀에서 무언가 엄청난 느낌이 새어나왔다. 그 느낌은 너무 크고 시커멓고 공포스럽고 뜨거워서, 아스는 이번에야 말로 틀림없이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명도 지를 수 없다. 눈 앞이 까마득해진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안스륨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크워어어엉!!! 하지만 에리카는 아스의 가슴을 헤집지는 못했다. 불꽃의 야수가 이빨을 드러내며 에리카를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안드리움의 분화의 불꽃과 함께 태어난 그녀라 할지라도 정령수의 불꽃을 고스란히 맞고 무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리카는 뒤로 피했고, 정령수는 원래라면 자신의 일부분이었을 에리카를 해칠 마음은 없는 듯 아스의 앞을 가로막고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에리카는 야수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 불타는 심연의 야수... " - 물러서라. 그를 죽인다 해서 심장이 얻어지는게 아님을 알지 않느냐!! " ... 그를 죽여도 에린지움의 걸음은 아직 하나가 더 있지. 너 역시 무스카리의 곁에 있다고 에린지움의 심장이 얻어지는 것은 아닐텐데? " " 에리카 로벨리아! 그를 그냥 두십시오!! " 무스카리는 외침과 함께 얼음위에 무릎을 꿇었다. 아스는 무스카리가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에리카는 자신의 몸에 붙은 불씨를 툭툭 털어내며 차가운 눈으로 그런 그를 응시했다. " 네가 나를 공격한 것이냐? " " ...그를 그냥 두십시오. " " 그냥 두면, 언젠가는 나에게 에린지움의 심장을 가져다 줄 것이냐? 여태까지도 너의 행동을 묵과해왔다. 하지만 너는 심장을 가져오기는 커녕 저 계집에게 빠져 모든 일을 돌보지 않았다. 지금도 저 아이를 데리고 이곳에 숨어있느라 트리옌군이 결계를 넘어 북쪽으로 진군해오는 것을 내버려 두질 않았느냐? 네가 정녕... 에린지움의 빛에 눈멀어, 나의 두려움은 잊은 것이냐? " 쐐액!!! 에리카는 갑자기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길게 빼내어 휘둘렀다. 무스카리에게 그 검붉고 시커먼 독기가 날아들었지만 그는 차마 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정통으로 맞았다. 입술 사이로 고통스런 신음이 짧게 새어나오고, 아스는 자신도 모르고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누군가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다치는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조차 없는 무스카리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가슴팍 절반이 날아간 듯한 엄청난 상처를 입고는 시커먼 독기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안색이 차가워지고, 카멜과 검을 마주대던 순간에도 여유로워보이던 입가엔 고통이 서렸다. " 크... ... " 에리카는 그런 그를 차가운 얼굴로 쳐다보더니 폴리모프를 풀고 날개를 폈다. 거대한 황금빛 거체가 드러났다. 촤라라 소리를 울리는 비늘 하나 하나는 금으로 세공한 듯 아름다워 햇빛이 나지 않는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눈이 부셨다. 태양에 던져져 태어난 존재라 할만큼 찬란한 모습. 날개를 한번 휘젖자 몰려가는 바람에 아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금빛의 용은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며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까마득한 북쪽의 하늘을 크게 돌아 구름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에리카가 가버리자 그것을 올려다보던 아스는 극심한 긴장감이 사라지며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 털썩, 아스가 무릎을 꿇는 것과 동시에 무스카리 역시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엄청난 양의 피가 빙원에 흩어지고 있었다. 하얀 얼음의 대지에 번지는 새빨간 피. 트리옌들의 투명한 피와는 달리 그것은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무스카리가 의식을 잃고 엄청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이다. 아스는 몸을 부들부들떨며 어찌할 바를 몰라 레지를 쳐다보았지만, 레지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채 쓰러진 무스카리를 관망하고 있었다. 차갑고, 차가운 증오. 아스는 온 몸의 피가 싸늘히 식는 것만 같았다. 레지의 무표정은 너무나 차가웠고 무서웠다. 하지만 아스는 무스카리를 저대로 두먼 틀림없이 그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마음이 마구 뒤엉켰다. 그가 죽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나, 그를 죽기보다 더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그런 심정과는 달리 어느새 아스는 차갑게 얼어버린 표정의 레지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 레지...! 레지...!! 그를 구해줘요, 얼른 성으로...!! 저대로 둬버리면...!! " 레지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스를 응시했다. 아스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왜 우는 거지? 아파서? 무서워서? 아니면 무스카리가 죽어버릴까봐 두려워서? 아니면 그가 죽게되어 기뻐서??? 레지는 그런 아스를 보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미소가, 아스는 너무도 무서워서, 섬뜩해서 레지를 붙잡은 손을 놓고만 싶었다. " 저대로 두면 죽겠지. 피는 점점 빠져나가고, 몸은 차갑게 식어 얼어버릴거야. 너는 너를 짓밟고 범했던 자의 최후를 볼 수 있게 되었어. 기쁘지 않아? " " 레지...!! " " 울면 안돼. 웃어야지. 너의 그 향기로운 눈물도 지금 이 순간엔 아무런 소용이 없어. " 주변으로 아스의 향기가 자욱하게 퍼져나가고 있었지만 레지는 미동도 없었다. 그래. 그가 미웠다. 자신을 그렇게 속이고, 무시하고, 잊고, 아리스타타만을 찾으며, 자신을 범하고 모든 것을 빼앗아간, 자신을 망쳐버린 무스카리를. 하지만... 하지만...!! " 그를 저렇게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요...!! 그건 내가 원하는게 아냐... 이건 내가 원했던게 아니야!!!! 나는, 나는... 나는 그를...!! 그에게...!!!! " 아스는 힙겹게 말을 이었다. 뭐라도 말해서 레지를 설득시키고 싶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울음으로 헐떡이는 목구멍은 얼어버린 듯 했다. 아스는 레지의 옷자락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그는 어깨를 곧추세우고 커다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슬픔을 담은채 외쳤다. " 그는 이대로 죽으면 안돼!!! 그를 죽이는건...! 그에게 복수하는 건...! 그를 망치는건...!!! 나여야 하니까...!!! 나때문에 흘리는 눈물 한줄기 보지 못하고 그를 죽게 만들 순 없어-!! " 아스는 비명처럼 그말을 토하고 쓰러져 엎드렸다. 그래. 그래. 이대로 죽게 할 순 없지. 내 마음을 갈기갈기 다 찢어놓게 하고, 저만 저대로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어. 여전히 그를, 아리스타타를 사랑하는 그로 보내버릴 순 없어... 똑같이, 나와 같은 이 고통을 맛보게 해주기 전까진 죽게 할 수 없단 말야. 죽게 할 수 없어. 아스는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는 레지의 손길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 차갑고 냉랭한 표정은 어딜가고, 레지는 평소와 같은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로 웃고 있었다. 그는 아스의 눈물을 낼름 맛보더니 피식 김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 그래. 저놈을 저대로 죽도록 내버려두면 두고두고 억울하겠지? 에구에구, 데려갈 일이 걱정이네. " 레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마법식을 그리더니 이상하게 생긴 짐승을 불러내었다. 소환수였다. 레지는 무스카리를 그 소환수 등에다 던져 올리더니 아스를 데리고 자신도 거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목깃을 토닥토닥 두드려 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성으로 돌아온 레지는 무스카리를 무스카리가 항상 틀어박혀 있던 홀 안쪽의 방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아스가 허둥거리는 사이 난로에 장작불을 활활 피워두고는 으쌰, 하며 허리를 폈다. 피는 어느정도 잦아들긴 했지만 무스카리가 엎어진 침대위로는 여전히 붉은 흔적이 번지고 있었기에, 아스는 무스카리를 그렇게 내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는 레지를 붙잡으려 했다. " 레지...! 저대로 두면...!! " " 괜찮아 괜찮아, 빙원도 아니고 원체 튼튼한 놈이니까 저렇게 두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살아날거야. 뭐 정 상처가 깊으면 나중에 용암속에서 잠이라도 자면서 요양하면 되겠지. " " 하지만 아직도 피가 저렇게나...! " " 괜찮다니까. 금방 지혈될거야. 뭐 천쪼가리로 묶어준다해서 더 빨리 낫는 것도 아니고, 나보다는 에린지움의 걸음인 네가 간호해 주는게 더 빠를걸. " 그건 그렇다. 그를 빨리 낫게 하고 싶으면 치유력의 힘을 가진 자신의 피가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레지는 그냥 그렇게 나가버리고, 결국 아스는 혼자 끙끙거리며 무스카리를 바로 눕힐 수 밖에 없었다. 상처가 드러나자 안에서 피가 쿨럭 쏟아지고, 시커먼 독기가 뭉게뭉게 올라왔다. " ...윽! " 금방 나을거라지만, 그리고 확실히 피는 줄었지만 지독한 상처였다. 아스는 떨리는 손으로 상처 가까이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가 독기가 뱀처럼 쉬잇 머리를 들이미는 바람에 화들짝 손을 거두었다. 에리카가 뿌려놓은 독기는 그녀가 없어도 흩어지지 않고 상처가 낫는 것을 방해하고 무스카리의 체온을 계속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스는 그것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무스카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와서 이렇게 마음놓고 제대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전에도 저런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지. 카멜이 나를 찾으러 왔을때, 월의 검에서 나를 지키려다가 다쳐... 아스는 마음 한구석이 당기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때도 그는 나를 지키려다가 이렇게나 다쳤다. 그 지독한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상처하나 없이 압도적인 공포로 적군을 살육하던 그였는데. 나를 지키려다가 또 이렇게나 다친 것이다.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자신을 거부하는 나를 위해. 비록 내가 아리스타타였기 때문이라 하지만 그 사실만은 진실이었다. 아스는 입술을 깨물고 팔을 칼로 그었다. 투명한 피가 어지러운 향기를 뿜으면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똑, 똑, 방울을 그리면서 그것은 상처위로 떨어졌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어느새 아물고 피부는 서로 엉겨붙으며 지혈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피로도 에리카카 남긴 독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모닥불을 활활 피우는데도 독기에서는 싸늘하면서도 뜨거운 냉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새파랗게 질린 무스카리의 안색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스는 팔을 대충 지혈하고 모닥불에 장작을 더 올렸지만 어깨에서 가슴팍까지로 이어진 상처를 휘감고 심장을 차갑게 만들고 있는 독기때문에 그는 더욱더 괴로워지는 듯 몸을 뒤틀었다. 아스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무스카리의 얼굴에 손을 대어보고 깜짝 놀랐다. 백짓장처럼 차가운 얼굴은 그 빛깔만큼이나 싸늘했다. 곧 시체가 될 사람 같았다. 더듬어보니 온 몸이 그렇게 차가웠다. 무스카리는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고 그것이 모닥불로는 쫓아낼 수 없는 독기로 인한 추위 때문이란 것을 아스는 깨달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곧 마음을 굳혔다. 그가 그렇게 죽는 것을 보고 싶었으면 그냥 둬야 했어. 그를 살리기로 결정한 것은 나! 살려야 해! 아스는 두터운 외투를 벗어내리고 튜닉의 어깨핀과 허리띠를 끌러내었다. 얇은 속옷 한장 차림이 된 아스는 떨리는 걸음으로 무스카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스카리가 누운 침대속으로 기어들어가 옷을 벗기려 손을 뻗자, 원래 그것은 마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그런듯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아스는 어지럽게 쿵쾅거리는 마음을 무시하려 애쓰며 무스카리의 팔을 들어올리고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시체처럼 차갑고 딱딱해진 몸을 끌어안았다. 독기가 상처로 뻗은 아스의 팔을 휘감자 아스에게도 지독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거친 숨결에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무스카리의 목울대와 깊이 패인 쇄골과 그를 몇번이고 안았던 허리가 맨 살결이 가 닿자 아스는 뭐라 형연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다만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마음만은 지독히 아프다는 것. 하지만 그것마저 차가운 육신을 끌어안자 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잦아들었다. 아스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늘상 커다란 강의 흐름같아 제어하기 어려웠던 에린지움의 힘은 차가운 북극에서 얼어붙어 얕은 흐름밖엔 간신히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스는 정신을 집중하여 그 자락을 모두 끌어당겨 독기를 덮은 자신의 손으로 보냈다. 손으로 뻗은 기운은 그의 몸에 퍼진 맥을 따라 작게나마 흐르기 시작하고, 아스의 몸에서 엷은 빛이 새어 나오며 무스카리를 같이 감싸기 시작했다. 아스의 손을 밀어내려 꿈틀거리던 독기는 자신들을 감싸죄는 그 기운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흩어졌다. 하지만 무스카리의 체온을 되돌리기 위해 아스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자신이 안고 있는 무스카리가 점점 더 따뜻해져 오는 것이 느껴지자, 아스는 점점 엷어지는 기운과 짙어지는 피로감을 동시에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떨어트렸다. - 당신이었지? 우웅- 에린지움의 흰 그림자가 하얀 설원위의 새파란 하늘에 펼쳐져 있다. 아스는 자신의 앞에 저만치 등을 보이며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짧은 은빛 머리카락, 소년같이 늘씬한 체구. 그는 아스의 질문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보이는 얼굴은 자신,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 아리스타타...? 아스는 떨리는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는 슬퍼보이는 듯한 미소를 빙긋이 짓더니,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를 흔드는 그 움직임에 따라 머리카락이 서글픈 빛을 뿌리며 흩어졌다. 그럼 누구...? 당신은 누구지? 무스카리는 암흑에 잠겨있는 듯한 컴컴한 터널에서 갑자기 깨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온 몸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지만 묘하게 가뿐했다. 그는 잠의 여운을 쫓아내며 생각을 했고, 곧 아스와 레지와 에리카를 떠올렸다. 무스카리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상처에 올려져 있는 흰 손과, 자신의 몸과 몸을 감고 누워있는 작은 인영을 발견했다. 심장이 떨어질뻔 했다. " 아!... ... 스... ... " 무스카리는 놀라서 소리치려다가 지쳐 잠든듯한 아스의 얼굴을 보고 황급히 말소리를 줄였다. 상처는 그 지독한 에리카의 독기하나 없이 말끔히 정화되어 있었고, 몸은 모닥불의 열기뿐만이 아닌 향기로운 온기로 훈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침대 주변과 자신에게 은은히 남아있는 아스의 체취. 그것은 에린지움의 흔적이기도 했고, 무스카리는 아스가 자신을 낫게 하기 위해 잘 느껴지지도 않을 그 힘을 꺼내어 쓰다 지친 것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무스카리는 방심하여 잠든 아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를 내버려두고 달아날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지? 아스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자신을 치료해주었다는 사실은 안타까움을 동반한 애틋함을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일생에 있어 몇번 느껴보지 못한 달콤한 사랑스러움. 무스카리는 갑자기 벅차오르는 감정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아스의 흩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곱게 내리깐 눈꺼풀과 살짝 벌린 입과 그대로 드러난 목덜미와 가슴이 비치는 엷은 옷. 무스카리는 밤새 그가 그의 몸을 자신의 몸에 겹치고 다리에 다리를 휘감고 온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에 아래에 욱신하게 당겨오는 것을 느꼈다. 마음의 따사로움은 어느새 몸이 녹아내릴것 같은 열망으로 변했다. 안고 싶었다. 키스하고 싶었다. 무스카리는 아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것으로만 만족하려 했지만 치밀어 오르는 달큰한 열기가 너무나 괴로웠다. 주변에 떠도는 감미로운 온기에 몸을 묻고 싶었다. 무스카리는 조심스레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을 내려 이마와 뺨과 코와... 입술 끝을 더듬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의 입술 바로 앞에서 마주댈 듯 말듯 숨결을 불어넣자, 으응, 하고 잠꼬대인듯 아스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무스카리는 아스가 깨어나지 않도록 지극히 조심스럽게, 하지만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른 입술로 그의 목덜미를 더듬었다. 한층 더 희어진 목줄기를 따라 조심스럽게 입술과 혀를 놀린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올라가 이르는 귓볼. 보송보송한 솜털이 입술에도 느껴지는 것 같자 무스카리는 낮게 신음했다. 무스카리는 아스가 깨어날까봐 낮은 숨결과 가벼운 입술만으로 그의 귀를 더듬었다. 그리고 오로지 부드러운 입술만으로 쇄골과 어깨를 훑었다. 그는 이로 아스가 걸친 얇은 속옷을 끌어내리고 드러난 그의 나신을 흐려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그 순간엔 자신이 아스를 지독히 원했고 수많은 밤을 그렸다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이 순간 그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있을 뿐. 무스카리는 혀를 내밀어 그를 맛보길 원했다. 거침없는 손으로 더듬어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스의 거부의 손길이 두려웠고, 그럼으로 이 비밀스럽고 은밀한 혼자만의 쾌락을 깨고싶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숨결과 입술로만 그의 가슴을 더듬어 내려갔다. 하지만 이윽고 유두에 이르렀을땐, 그만 참지 못하고 그것을 머금어 버렸다. 자극에 아스가 몸을 가볍게 뒤틀자 무스카리는 자신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삼백년을 기다려온 인내를 끌어내어 그의 유두를 조심스럽게 애무했다. 혀로 굴리고, 입술로 가볍게 빨아들이고, 간간히 참지못한 거친 숨결을 내뱉는다. 달콤한 자극에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는 아스는 그것에만 사로잡혀 자신이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여기가 어딘지 잠시 잊었다. 부드러운 잠의 여운과 달뜬 감각에 몸을 내맡기고 작게 신음했다. " 응... " 무스카리의 입술은 유두를 떠났지만 손이 다시 그것을 사로잡았다. 그의 입술은 쇄골과 옆구리를 더듬어 내려갔고, 아스의 달콤하고 아득한 신음소리는 무스카리의 혀와 입술을 더욱더 거침없게 만들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팔은 아스의 떠오른 허리를 안고, 손은 유두를 애무하며 혀는 가랑이 사이로 내려갔다. 아스의 것 주변을 입술로 누비며 자신의 목에 문질러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더이상 치밀어오르는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아스 역시 온 몸을 사로잡은 열기와 욕망에 미칠것만 같았다. 어렴풋이 지금의 상황은 깨닫고 있었지만 그것을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의 손길을 기억하는 몸은 그가 움직이는데에 따라 움찔거리고, 거부의 말을 외쳐야할 입술은 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는 것에 급급했다. 힘을 써서 나른한 몸에 잠의 여운이 팔다리를 사로잡고 입술과 혀와 숨결만으로 더듬어 내려가는 그의 애무는 도저히 뿌리칠 수 있을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몸이 녹아 내린다. " ...아...!! 핫! " 회음부를 무스카리의 혀가 스치고 지나가자 아스는 그만 참지 못하고 신음을 터트렸다. 무스카리는 그곳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며 신음을 도로 삼키려는 아스의 입술을 빼앗았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신음이 막히지 못하고 새어나왔고, 욕망으로 끈적끈적해진 혀가 입천장과 치열과 혀를 빨아들였다. 달콤한 맛. 머리가 아득해지는 순간. 아래에서 무스카리의 손길이 또다른 즐거움을 선사하자 아스는 허리를 크게 휘었다. 그리고 다리를 휘감은 사이로 무스카리의 뜨거운 열기 역시 느껴졌다. 그 열기가 느껴지자 자신안의 빈 곳 역시 느껴졌고, 아찔한 갈망이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무스카리는 거침없이 그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마지막 남은 한조각 이성이, 그보다는 죄책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는 허락을 구하려는 듯한 어조로 신음하며 말했다. " 아스... 아스... 가져도 될까... 너를... " - 이 순간만은... 제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말씀해주십시오... 제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제가 아스님의 것이라고만...!! 카멜. - 제가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름도, 저도, 마음도, 이 세상까지도!! 카멜! - 리아트리스님. " 카멜! " 아스는 무스카리의 어깨를 밀어내었다. 나는... 나는 이제 아스포델이 아니야. 나는 리아트리스. 카멜이 이름을 준 리아트리스. 그래... 네가 내 것이기에. 나는 이 자에게 마음을 줄 순 없어. 줘선 안돼. 다시는... 다시는 마음을 빼앗길 수 없어. 아스의 눈동자와 무스카리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무스카리의 눈속에 떠오른 감정을 읽고 아스는 순간 사과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스카리는 아스에게 사과를 받아내는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가버리자 홀로 남은 침대의 무스카리의 빈자리엔 싸늘함이 감돌았고, 아스는 어느순간 차갑게 식어버린 자신의 몸을 움켜잡았다. 카멜, 카멜. 나를 붙잡아줘. 나를 찾아줘. 하지만 이미 깨달아버린,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몸과 마음은 외치고 있었다. 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방 밖으로 나온 무스카리는 홀의 기둥에 기대어 선 레지를 발견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음험한 즐거움에 잠겨 웃고, 무스카리는 지독히도 기분이 나쁜 이 순간 그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항상 레지는 이런 순간에 나타나 자신의 마음을 있는대로 후벼판다. 오로지 그 즐거움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엾은 자. 하지만 저 비웃음이 그를 가엾게 여기지 못하도록 만든다. " 그는 이미 카멜의 것이구나. 불쌍하기 짝없는 무스카리. " 무스카리는 그를 무시하고 마법으로 다시 옷을 만들어 몸을 감쌌다. 하지만 레지는 그를 계속 따라오며 이죽거렸다. " 흠흠- 향기로운 내음이야. 누구라도 저 아이의 몸에 한번이라도 묻고 싶을거야. 나 역시도. 이 성전체에 그 은밀한 향기가 떠돌고 있어. 저 향기를 재료삼아 내가 홀로 즐거움을 풀어도 원망하지 않을건가? 아니면 애써 들뜬 몸을 추스리고 있을 그에게 달려가 위로해줄까? 너 대신 말야. 아니, 카멜 대신인가? " " ... " " 카멜 대신으로라도 안아주지 그랬어. 지금쯤 저 방에서 욕정을 참지 못해 홀로 위로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달콤한 애액이 혼자 흐른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깝지 않아? 그 애액을 받기위해 누구라도 유혹하면 넘어올텐데. 아아, 얼마나 맛있을까 저애는. " " 입 닥쳐. " " 알고 있지? 지금 온 대륙에 퍼져있는 저 아이의 얼굴을. 지금은 돈에 눈먼 자들이 아스를 찾아 헤매이고 있지만 일단 그를 보게 되면 그를 가지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될 걸. 한번이라도 저 몸을 가르고 모든 것을 채워줄것만 같은 향기에 잠겨보고 싶게 될거야. " " 시끄럽다 레제다. " " 후훗. " 무스카리가 그를 노려보자 레지는 즐거운 듯 웃었다. 그리고 위험한 빛을 뿜는 푸른빛 눈동자가 그의 어두운 마음을 울궈낸다. "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이지 그랬어. 아리스타타가 죽었을때에, 너는 내심 안심하지 않았던가? 나는 가지지 못했어도, 적어도 저 카멜에게는 돌아가지 않겠구나- 하고. 수백년 그녀를 찾아 헤매었던건 그녀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다시 카멜곁에 그녀가 서 있는 꼴을 볼 수 없어서가 아니었어? 너는 그런 존재니까. 다른 자들이 낚아채기 전에, 아니 벌써 낚아채였잖아? 카멜의 것인 그. 어떻게 보겠어? 가서 죽여. " 가서 죽여. 무스카리의 금빛 눈동자가 일렁거린다. 죽여서 그의 죽음만이라도 네 것으로 만들어. 그의 시신만이라도 네 것으로 만들어.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없애버려! 창문을 열자 북극의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눈보라는 치고 있지 않았지만 살을 에는 바람은 지독했다. 하지만 아스는 그 바람에 자신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었다. 맙소사, 맙소사. 그를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마음 주지 않겠다고 그렇게 맹세하고, 나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나는 이미 죽어버린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그가 곁에 없었던 일년동안의 시간에도 가슴을 후벼파는 상처는 남아있었다. 오로지 그 고통만은 자신의 것. 그를... 무스카리를... 사랑하는 고통만큼은 자신의 것. 아리스타타를 부르는 그 목소리에 그토록 상처받았던 것은 자신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 맙소사, 나는 그를 사랑해. 지금도 사랑해. 나의 집착, 나의 애증, 나의 광기, 나의 욕망. 처음 본 순간부터 갖고 싶었다. 그녀를 갖고 싶어서 미칠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그녀를 납치했고, 능욕했고, 범했다. 어떻게 하면 가져질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손아귀에 가두어두고 밤마다 짓눌러도 그녀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 어쩌면 레제다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그녀가 죽는 순간 자신은 안심했을지도 몰랐다.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없어져 버리는 것이 낫다고. 하지만... 하지만 그녀를 다시 발견했을때엔. 까만 머리카락, 녹색 눈동자의 천진하기만 했던 그 소년을 만났을때엔. 자신을 그토록이나 믿고, 그토록이나 신뢰하고, 끝없이 사랑하고, 모든 것을 다 주었던 그를 만났을때엔. 이것이 욕망일까, 광기일까, 애증일까. 이토록 괴롭고 고통스럽고 두려우면서도 영원히 그러고싶은 이 마음은. 아아. 무스카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 ... 내 것이 아니라도, 나는 그가 살아있길 원해. " 레지의 웃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마치 어긋나 금 간 거울같은 미소로 반문했다. " ... 그를... 그 꼬맹이를... 사랑하는 거냐 무스카리? 네가? " " 그래. 사랑해. " 레지의 얼굴에 생겨난 금이 더욱 더 커지고 있었다. " 그는 지금 달아나고 있어. 네가 싫어서 알몸으로 뛰어서 도망치고 있단 말이야!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거냐? 카멜의 이름을 부르며 너를 거부하는 그를? 카멜에게 안겨서 숱한 밤을 보냈을 그를? 너를 증오하는 그를? 네가 사정없이 짓밟았던 그를!!!! " " 그래. 사랑해. " 아스는 맨발로 빙원을 박차 뛰고 있었다. 어디론가로 도망쳐야 했다. 무스카리가 없는 곳으로, 카멜이 있는 곳으로.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 그를 사랑한다. 그가 안스륨이 아닌 무스카리라도.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숲의 저주, 아리스타타를 사랑하는 그를, 자신은 사랑한다!! 자신을 그토록이나 무참히 짓밟고 무시하고 괴롭혔어도 그를 사랑한다! 자신의 심장을 빼앗을 그를 사랑해!!! 그러니 달아나야 했다. " 아스!!! " 뒤쪽에서 자신을 붙들러 온 무스카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스는 더욱더 필사적으로 뛰었다. 하지만 에린지움의 힘을 무리하게 쓴데다가 정신적인 공황으로 정령을 부릴 겨를이 없어 그저 맨발로 뛸 뿐이었다. 무스카리는 금방 아스를 따라잡았다. 그는 모포 한장만을 걸치고 나온 아스의 팔목을 잡아채어 세웠다. " 아스! " 아스는 버둥거리거나 반항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어지러운 감정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볼뿐. 무스카리는 아스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 둘 사이로 빙원의 차가운 빛이 떨어지고, 한없이 아득한 침묵 사이로 그는 입을 열었다. " 도망가지마. " 도망갈거야. " 떠나지마. " 떠날거야. " 내 곁에 있어줘. " 있을 수 없어. " ... 널... 널 사랑한다. " 그 순간엔, 내가 아닌 아리스타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 는 그런 의문은 들지 않았다. 아스가 그가 안스륨이든 무스카리든 상관없이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깨달은 순간, 그 역시 그럴 것이라는 이해가 들었던 것이다. 그에게 자신은 아리스타타이자 아스포델이고, 그저 그가 사랑하는 한사람일뿐. 그 역시 나를 사랑해. 기쁜걸까 슬픈걸까, 그저 격한 감정만이 들어 아스의 눈동자는 얼룩졌다. 어쩌면 좋을까. 자신은 에린지움의 걸음이고 그는 용족의 수장이다. 그저 둘만의 감정을 확인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의 세계의 끝은 없으며 빙해를 건너 어딘가로 둘만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의 사랑은 갈 곳이 없다. " 사랑해. " ... 하지만 그 말 앞에서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가 나를 사랑한다. 그가 나를 한없는 비참의 나락에 떨어트렸어도, 그가 나를 사랑한다. 아스의 마음은 더 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인정했잖아, 그를 사랑한다고. 무스카리의 눈동자는 그가 도망가도 소용없다고, 세계 끝까지라도 그렇게 쫓아가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스가 그를 사랑하는 이상, 아스가 그를 생각하는 이상 그는 무스카리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결국 아스는 입을 뗄 수 밖에 없었다. " 난... " 아스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있을리도 없는 심장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찾아온 것은. 목이 불타는 듯 했다. 아스는 그 아픔에 비명조차 낼 수 없었고 그저 몸을 휘청, 흔들며 고개를 수그렸을 뿐이었다. 무스카리는 갑자기 아스가 허리를 구부리며 괴로워하는 듯 보이자 그를 부축해주고 싶었지만 방금 그에게 거절당한 여운이 손길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스가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자신을 응시하자, 그 손길은 완전히 얼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 너... 넌 누구지? 넌 누구야!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아스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의지대로 움직여보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의식은 뒤로 밀려난 채였고, 그의 육신은 에리카를 상대할때 자신을 점령했던 그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왜, 왜 이런 순간에...?? "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숲의 저주, 용족의 수장, 무스카리 알리움. " 무스카리는 갖은 감정으로 혼돈스럽던 아스의 눈동자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감했다. " 난 당신을 증오해. " 무스카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감정을 읽을 수 없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 저런 눈동자를 몇번이나 봐 왔던가. 아스가 내뱉은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을 후볐다. 빙원에 내리꽃히는 싸늘한 햇빛이 그의 눈동자를 산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 저 말만이, 저 입술에서 나오는 잔혹한 진실만이 그가 저지른 죄의 댓가. 아리스타타를 죽이고, 아스를 범한 댓가. 감히 그를 사랑한 댓가. 아스는 몸을 굳히고 고개를 떨군채 서 있는 무스카리를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스카리는 떠나가는 그를 잡지 않았다. 아니, 잡지 못했다. 그는 산산히 부서지는 자신의 마음 부스러기를 붙잡고 외쳤다. 그것만이 최선이었다. "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스!!! " 돌아서서 걷는 아스의 차가운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의 몸은 아스의 것이 아니었다. 아스의 몸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또 하나의 의식이 잠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또 하나의 의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스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자신의 돌벽과도 같은 육체에 마음을 부딪히며 울부짖었다. - 싫어! 이제 더 이상은 싫단 말이야!!! 그를 떠나 어지러운 마음으로 고통당하기 싫어!! 그를 사랑해, 그를 사랑해!! 이제 나를, 나를 그의 곁으로 보내줘-!! 사랑을 외치는 무스카리를 피해 도망이라도 가듯 아스의 몸은 이제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아스는 견딜 수 없는 슬픔에 흐느꼈다. 그리고 그의 몸을 점령한 다른 의식 역시 끊임없는 눈물을 흩뿌리며 달리고 있었다. 눈보라가 시작되고 있었다. 빙원을 휩쓰는 차가운 분노가. 서서히 다가든 그것은 어느새 번개와도 같은 신음을 남기며 점점 벌어지는 둘 사이의 공간을 삼키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눈보라 때문에 더 이상 자신의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때까지 외쳤다. 하지만 그 말도 이윽고 힘을 잃고 그의 입술안으로 숨어들었다. "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해... 사랑해...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다시 놓지 않을 거야... " - 사랑해... 입술 밖으로 나가지 않는 웅얼거림은 아스의 멍든 마음 여기저기에 부딪혀 또다른 상처를 만들며 되돌아왔다. 험한 눈보라는 세상을 찢어발기고 있었지만 아스의 주변으로 그 날선 바람은 들이닥치지 못하는 듯 했다. ' 그것'은 아스보다 훨씨 더 능란하게 에린지움의 힘을 일으켜 그 온기로 자신을 감싸 북극의 냉기를 손톱만큼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고막속으로 새어드는 거센 바람소리조차 주변을 둘러싼 보호막에 둘러싸여 침입하지 못했다. 눈보라의 울부짖음과는 상관없는 공간. 모든 것이 꿈같고 반쯤은 현실같지 않게 느껴졌다. 아스는 그 묘한 침묵속에 가라앉아 물었다. - 넌 아리스타타지? " 아니. " - 그럼 넌 누구지? 왜... 왜... " 너도 알고 있지 않아? 넌 아스. 난 카다. " 희미한 꿈결 속 기억 너머로 그 말이 떠올랐다. 아스의 모순은 카를 위한 것. - 그 말이... 무슨 뜻이지? 아스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이렇게 무스카리를 떠나게 만들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원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받는 아스의 모순은 위대한 카를 위한 것. 아스는 뒤에 뭔가가 있다는 생각에 움츠려 있던 의식을 세워 돌아보았다. 거기엔 검붉게 빛나는 커다란... 암석이 꽃혀 있었다. 날카롭게 쪼개진 모양으로 그의 의식속에 파고들어 있는 존재. 자세히 보니 그것은 암석이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간직한 무엇이었다. 아스가 그것에 다가든 순간, 또 하나의 그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것의 얼굴은 아스와 마찬가지로 눈물에 얼룩져 있었다. - 이것을 봐라. 이것이 우리에게 내려져 있는 저주, 영원히 벗을 수 없는 멍에. 이것이야 말로 아리스타타를 죽게 만든 그것. 아스의 동공에도 그것이 박혀들 듯 했다. 그 안에서 춤추고 있는 것은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것 같이 잔혹한 불길. - 세상의 모든 것은 4대 원소로 이루어진다. 그 섭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어. 에린지움 역시 마찬가지였지. 에린지움은 물과 바람과 땅의 모습을 빌어 언령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나무의 형상을 한 그것역시도 불을 완전히 제외하고는 만들 수 없었어. 하지만 불은 더럽혀져 있었고 저주받아 있었다. 이 세계를 멸망의 불길속에 잠재우게 한 그 힘을 또다시 드러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하지만 그 불의 힘 없이는 에린지움 역시 완성될 수 없는 것이었어. 그래서 에린지움을 만든 최후의 마법사는 그 나무에게 하나의 완벽함이 될 수도, 결점이 될 수도 있는 봉인을 만들고 그 안에 불의 힘을 채워넣었다. - 그것이... - 그래. 그것이 바로 이것. 물론 사실은 이렇게 형상화되어 있지 않지만. 그 봉인이 바로 아스의 모순은 카를 위한 것이었지. 사랑받는 아스는... 위대한 카를 위하여... 모순 될 수 밖에 없었어. 에린지움의 걸음은 대륙을 정화시키는 그 위대한 치유의 능력과 한없는 아름다움으로 모든 숲의 절대자로 군림했다. 다만 군림이라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았지. 모두가 그녀를 경외하고 찬양하고 흠모했다. 모든 숲과 종족들이 그녀를 사랑했어. 하지만 그녀 자신은 그 누구도,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지. 아스는 온 몸이 싸늘해지는 것 같았다. 에린지움의 유일한 약점은 심장. 존재하지도 않는 심장을 빼앗기는 일. 불의 봉인. 사랑받는 아스의 모순. 모든 잔인한 사실들이 한가지로 모아져 거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다시 수백년의 세월을 흘러 환생해 이 자리에 섰어도 변하지 않는 진실. - 에린지움의 걸음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그 누구에게도 사랑한다 고백할 수 없다. 에린지움을 만든 자는 언령 마법사. 그는 사랑한다는 그 말에 강력한 불의 봉인을 걸었다. 오로지 유일자로 대륙을 인도해 나가야 할 여왕에게 그런 편협한 감정은 되려 독이라 생각한 것이지. 오로지 사랑받기만 하며, 사랑을 줄 필요 없는 완벽한 존재. - 설사 그 봉인을 깨고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남는 것은 재앙뿐이다. 본체는 죽고 남은 힘은 상대에게 인도되지. 본체가-에린지움이 죽으면 트리옌은 태어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트리옌의 멸족을 의미한다. - 이럴수가... 이런... 어지러웠다. 무스카리에게 심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결한 아리스타타... 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그녀 역시도, 그녀 역시도... 무스카리를 사랑했어. - 그럼 나는... 난... 단정적인 어조로 또다른 그가 말했다. - 에린지움은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고백하면 안돼.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스!! 무스카리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울리는 듯 했다. 아스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자신이 아닌 아리스타타를 사랑했다 생각하고 무스카리를 떠나 찢어발겨진 마음으로 그렇게 방황했다. 다시 돌아와 이윽고 그래도 부정할 수 없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깨달았는데... 이제야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 역시 그를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그 사실을 깨달았는데... 어째서. 어째서. 그 존재를 알았기 때문일까, 아스는 자신의 목구멍속에 깊숙히 자리한 그 뜨거운 봉인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자의 낙인. 불의 저주. 어차피 그의 마음도, 무스카리의 마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서로를 사랑하든 말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중요한 사실은, 그는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것. 그가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것. - 차라리...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거야. 차라리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때가 좋았어. 차라리... 내가 에린지움의 걸음인걸 몰랐을 때가... 선명하게 지난 기억들이 떠올랐다. 이 대륙으로 갑자기 굴러들어와, 아무것도 모르던 자신. 무스카리에게 농락당했다 생각했을땐 의식적으로 잊고 지우려고 노력했던 그 기억들이, 그 시간들이 다시금 생생히 되살아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평범한 트리옌으로, 그저 평범한 수인족으로. 거리낌없이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구하던 때.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이곳으로 돌아와야 했는지. 왜 환생해야 했는지. 눈에 잡힐 듯 선명했다.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의 죽어버린 차디찬 가슴에 다시 한번 칼을 꽃아넣고, 무너져 내리며 그녀가 간절히 마음속으로 빌었던 소원. 언젠가 다시... 꼭 다시...! 그것은 바로 잠깐이나마 그와 함께 할 수 있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순간들은 모두 지나쳐 버렸어. 내가 그 시간들의 소중함을 채 깨닫기도 전에... 이제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그를. 아스는 작게 몸을 웅크렸다. 까마득히 눈보라가 웅웅거리고, 무스카리가 사랑한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귀를 막았다. 이젠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진 것 같았다. 그가 무스카리를 사랑하는 것도, 그동안 겪었던 마음의 고통도, 수많은 번뇌도,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의 부담도, 업신여김도, 그 사실도, 그 힘도... 아무것도. 차가운 북쪽의 날씨는 흐렸다. 또 한바탕 눈이 쏟아질 모양이었다. 락시움 용병단의 단장 베르베리스, 흔히 베스라고 불리우는 (그렇다지만 그 앞에서 이 이름을 말했다면 맞기 십상이다.) 사내는 우울하게 흐려지는 하늘을 보고 옷깃을 여미었다. 그리고 곧 눈이 싫네 북녁이 싫네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부단장 칼소는 그런 베스를 보고 한마디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 애초에 현상금에 홀딱 반해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오신게 누군데요. " " 하지만 너무 하잖아! 황야 너머서는 사막이고, 사막 너머서는 화산에, 화산 넘어서는 눈밭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안왔다구. 게다가 정작 목표물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보이지도 않고- 무작정 헤매는데도 지쳤다구. " " 하지만 다른 사냥꾼들 보다 우리가 유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우리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까요. " 그렇다. 락시움 용병단엔 자신을 군에 넣어주지 않는다고 뛰쳐나온 문제아 아스가 지난 2차 대륙전쟁때 입단해 싸울 수 있었던 곳이었다. 같잖은 검술로 나대는게 마음에 안들었지만 카멜을 덤으로 그를 넣어주었던 것이었다. " 얼굴을 알면 뭐하냐. 얼굴 몰라도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 베스는 아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녀석이긴 했다. 베스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진, 오직 검과 싸움과 전쟁, 보다 더 강한 적과 승부를 겨루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겐 상대방의 외모는 큰 영향을 끼치진 못한다. 상대가 얼마나 더 강한지, 쓰러트릴만한 가치가 있는 자인지가 더 중요하지. 아스는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아직 한참 더 미숙했다. 정령을 운용해 남들보다 검술에 있어 유리한 고지에 있다지만 베스같은 검사에겐 어디까지나 그것은 아직 잔재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카멜이 가르쳤다지만, 아직 그에겐 상대가 될만한 실력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검외에는 무심한 베스조차도 아스가 나타나면 절로 눈길이 끌릴 수 밖에 없었다. 인간과는 다른 트리옌이라는 존재만으로도 특별한데, 아리스타타의 환생이라 했었던가. 숲의 여왕, 빛나는 은빛의 군주, 세상의 모든 이들이 사모한 영광의 여인. 신비로운 회청은빛 머리카락은 짧기에 더욱 더 시선을 끌었고, 검을 들고 있노라면 되려 화사한 팔다리는 확실히 그림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건 선명한 청록빛 눈동자- 태고적의 푸름을 간직한 그 큰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울렁거려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는 그 자신의 빛에 미친 용족에게 잡혀 이 북쪽땅 어디론가 사라졌다. 베스는 그 무스카리를 죽이고 아스를 데려올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에린지움의 걸음이 내건 현상금을 보고 이곳에 숨어든 자들은 대부분 목숨을 내놓은 것이라고 밖엔 볼 수 없었다. 그 붉고 거대한 용족은 그 누구보다 강하고 잔인하며 살아있는 모든 대상에게 공포니까. 하지만 베스에겐 얼마동안이나마 무스카리를 묶을 수 있는 비장의 물건이 있었다. 원래는 지난 전쟁때 용족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했었던 것인데, 이제는 무스카리를 묶을때 쓰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만나야 써먹든지 말든지 할텐데 말이지- 옛날부터 전해져오는 전설 비스무리한 이야기를 듣고 북쪽의 끝 빙원 어딘가에 있는 성을 찾은지 한참이 되었다. 하지만 북쪽의 빽빽하고 음침한 침엽수림은 좀처럼 쉽게 길을 터주지 않았다. 눈보라가 툭하면 몰아칠때엔 몇날 몇일이고 꼼짝 못했던 때도 다반사이고, 눈이 멎더라도 가뜩이나 좁은 숲길은 허벅지까지 오는 눈더미 속이니 여길 헤치고 다닐 장사가 없다. 간간히 느껴지는 인기척이라고는 자신과 같은 목표물을 노리는 사냥꾼들 뿐... 베스는 " 젠장, 사실은 단장이 무스카리 그와 붙어보고 싶은 욕심에 여기까지 온 거 아니예요? " 라고 투덜거리는 칼소의 말에 뜨끔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느껴지는 피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곧 돌격대장인 무뚝뚝한 지즈도 그것을 느꼈는지 말을 멈춰 세웠다. 베스는 잠시 일행을 멈춰세우고, 칼소를 남겨두고 지즈를 데리고 피냄새가 나는 곳을 향했다. 온통 희고 검은 세상에 붉은 빛이 낭자한 곳에서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들과 같은 한무리의 용병들이었다. 제대로 된 깃발도 없는 것으로 봐서 현상금을 노리고 급조된 무리인 것 같았다. 시체는 모두 절단면이 깨끗했고, 그것이 더욱 섬뜩했다. 인간의 몸이 무기물처럼 잘려 나동그라져 있는 모습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그것들은 그냥 인형 같았다. 붉은 물감이 뿌려져 있는 곳 위에 나뒹굴고 있는 인형. 대체 어떻게... 라는 생각을 떠올리자, 지즈가 그의 생각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베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무슨 미지의 괴물이 저지른 살육도 아니고, 여러 놈과 맞붙다가 이렇게 된 것도 아니었다. 단 한사람, 단 한사람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바람이 불고,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자 베스는 문득 소름이 돋았다. 아마도 이 시신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 즉, 그들이 쫒고 있는 현상금을 데리고 있는 용족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법의 흔적이 없긴 했지만 그라면 마법따위 쓰지 않고도 인간 몇십명쯤은 간단히 도륙할 수 있을테니까. 베스는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하고 몇날 며칠 더 숲을 떠도는 사태보다야 나아졌다고 생각하며, 말머리를 돌려 일행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곧, 그 살육의 현장에서 이어진 흔적을 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휘오오오오오----------------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지만, 아스가 서 있는 숲의 공터로는 바람이 비껴가듯 눈보라가 들이치지 않았다. 한없이 조용하기만 한 숲에서 모포 한장만을 걸친 알몸으로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아니, 모포 한 장 외에 그는, 검 한자루를 들고 있었고 깨끗하기만 한 그의 몸과는 달리 검에는 붉게 얼어붙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아스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것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숲과 생명을 키우는 에린지움의 걸음이라 했던가. 전쟁터에서 조차 피를 보고 거부반응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몸이었는데... 이제는 몇십명을 무자르듯 베고 나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숲으로 들어오자 완전히 자각한 에린지움의 힘은 더욱 더 강하게 느껴졌고, 자신의 심장에 박힌 불순한 불덩이 역시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표출되는 힘은 그 피바다 속에서 아스에게 피 한방울 묻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피와 죽음을 배척할 수 밖에 없는 에린지움이라면, 이런, 이런 일은... 아스는 피식,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자신은 역시 에린지움의 걸음이 아니었다.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일런지는 몰라도, 자신은 아스였고, 한때 이계의 인간이었던 자였고,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이었으며, 자신을 죽인 남자를 사랑하는, 제어하지도 못할 커다란 힘을 흉기처럼 두르고 있는 자였다. 난 뭐지? 난 뭐냐? 깨진 거울과도 같은 자신. 아스의 눈이 흐려졌다. 카멜, 카멜. 자신에겐 카멜이 필요했다. 자신을 위해 살아달라고, 아스의 무너져가는 부분을 끊임없이 채워줄 수 있는 그가 필요했다. 무스카리가 가져가버린 자신의 모든 것을 메꿔줄 그가 필요했다... 그의 체취와 따뜻한 온기가 필요했다. 자신의 모든 것은 카멜이 준 것. 카멜이 없으면 그는 견딜 수 없었다. 아스는 검을 버려둔채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대로라면 발이 푹푹 빠지도록 쌓인 눈위였건만, 아스의 맨발엔 눈조차 닿지 않고 있었다. 아스가 걸음을 옮기는 대로 빽빽한 북쪽의 숲은 절로 길을 비켰다. 카멜은 밤에도 파르스름한 빛을 발하며 결계를 지키고 서 있는 황무지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도 이곳에 선 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그는 환생한 아스와 이윽고 만날 수 있었고, 그는 각성했다. 하지만 자신은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고, 아스는 무스카리에게 더럽혀졌으며 한없이 상처 입고 본 적 없는 연약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안겼었다... ' 나 조차도 가진것이 없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봐... ' 불꽃처럼 낙엽이 흩날리던 그 절벽. ' 제가 있습니다. 지금... 지금부터, 저는, 저는 아리스타타님의 첫번째 묘목이라는 이름을 버리겠습니다. 저를 가지십시오. 당신의 것이 되겠습니다. ' 까마귀가 가로지르던 붉은 석양. ' 나는 이름조차 없어. ' ' 제가 드리겠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름도, 저도, 마음도, 이 세상까지도! ' 아스가 흘리던 붉은 눈물. ' 네가 나에게 이름을 준다면, 너를 위해 살겠다. ' 리아트리스, 나의 리아트리스... 카멜은 비어버린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는 눈을 감는 것 만으로도 자신의 어깨에 매달리던 아스의 체취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부드럽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팔이 서늘한 밤공기와 함께 자신의 귓전에 와 닿을때면 자신의 품에 안은 그를 믿을 수 없어서 눈물이 나려했던 적도 있었다. 카멜은 고독했다. 몇백년의 길었던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독했다. 죽어버린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를 찾아 무수한 시공을 넘나들며 헤매었을때도 그는 힘들고 괴롭긴 했지만 고독하진 않았다. 그는 그저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고 다만 아리스타타의 고독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며 가슴아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리아트리스를 사랑하는 그에겐 그조차 생겨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사랑의 추한 일면이 생겨났다. 주는 만큼 받고 싶다. 그가 나만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나만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나외의 그 누구도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질투와, 애증과, 집착과, 갈망. 무스카리의 것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자신에게도 생겨난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무스카리의 품에서 신음하고 있을지도 모를 아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카멜은 여태까지 자신이 아리스타타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 사랑이야말로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리아트리스를 안은 지금 그를 향한 이 소유욕은 무엇일까? 카멜은 아리스타타가 무스카리에게 안기는 모습은 죽어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한때 무스카리를 위해 울고 그에게 모든 것을 주고 말았던 아스라면, 그의 손길을 잊지 못해 떨던 그라면 지금쯤 그에게 안겨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손길에 떨고 키스에 울던 그 얼굴로, 그 표정으로, 그 목소리로... 카멜은 거세게 어깨를 움켜잡았고, 쿠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카멜 주위의 땅이 푹 꺼졌다. 카멜의 숨결에서 흰 연기와도 같은 차가운 수증기가 배어나왔다. 그것은 흰 뱀의 모습을 하고 카멜의 팔과 어깨를 휘감았다. 카멜은 서늘한 그 느낌에 어깨를 부술듯 잡고 있었던 팔을 내려놓았고, 냉랭한 심해의 정령수는 울리는 듯한 그 목소리로 말했다. - 사랑의 번뇌가 너를 태우고 있구나. " 이것이 사랑입니까? 나는 이런것을 사랑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런 추한 감정은 오직, 오직 집착일 뿐입니다. " - 심장이 차가운 나는 사랑을 모른다. 하지만 그 불꽃에 타는 몸을 맡기고 죽을때까지 춤추는 숱한 자들을 봐왔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마약에 취해 그것이 자신을 부수는지, 태우는지, 죽이는지 모르지. " 저도 그렇습니까? " - 글쎄. 하지만 그것은 불을 일으키는 바람과도 같은것... 심장을 차갑게 가져라. 그러면 그것은 일순간의 바람으로 지나쳐 가버릴 것이니... 그리도 못하면 묻어라. 깊은 땅에 묻고 나면 잊은 듯 되리니... " 저는 차갑게 지닐 심장조차 없습니다. 그러면 이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머리에서? 아니면 이 어디선가 모아지는 희미한 감정이라는 찌꺼기 속에서... 아니면 지나간 과거의 흔적 속에서...? " - ... 에린지움을 만든 언령 마법사, 카- 바냐하는 고귀한 사람이었다. 단 한번도 감정이라는 우물에 자신을 가둔 적 없었고, 그랬기에 대륙을 휩쓸었던 그 마법의 불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에린지움을 만들 수 있었지. 하지만 그도 인간이었고, 되려 완벽한 자였기에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사랑했다. 사실 그것은 사랑할 수 밖에 없었지.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더럽혀진 다음 세상을 정화시키고 생명을 낳고 키울 태초의 생명체... 그리고 너무나 사랑했기에,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며 에린지움을 영원한 자신의 것만으로 만들었다. " 무슨...? " - 에린지움은 위대한 카와 사랑스러운 아스이다. 그리고 아스는 모순되었지. 카- 바냐하는 그 모순으로 영원히 에린지움이 자신의 것이 될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에린지움이 그의 것이었을까? 모든 생명체를 위해 에린지움을 만들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그것을 남기면서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지. 그 모순은 뒤틀려 있었지만 나름의 합리성으로 이 세계를 지탱해왔다... " 그것은 에린지움의 걸음의 심장에 대한 말씀입니까? " -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에린지움은 언령으로 만들어진 것... 하지만 그 모순이 있다고 해서 에린지움이 그의 것이며, 그 모순이 없다고 해서 에린지움이 모두의 것이었을까? 트리옌이여, 그렇지는 않다. 모순이라는 것도 결국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균형의 한 축. 사랑이 모든 것을 이루어내고 모든 것을 파괴시키듯이, 어떤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단언하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 하지만 무스카리, 그의 집착, 그의 광기, 그의 소유욕...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제게도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싶진 않아요. 그것은 제가 살아온 삶을 모두 부정하는 일이고, 제가 주었던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말일테니까 말입니다. - 항상 모든 것을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어찌보면 항상 모든 것을 받은 것일수도 있다. 스스로 인정하고 하지 않고는 너의 선택이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너의 감정을 부정하는 것 역시, 너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더냐? 카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이런 몸을 불사르는 감정조차 사랑이라면. 아니, 사랑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기에. 감히 나는... 나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 " 아아아아악-!!!!!!!!!!!!!!!!!!! " 쨍그랑!! 한밤중, 조용한 축복의 성의 적막을 깨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렸다. 시녀들은 불안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황급히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채 도착하기도 전, 투두둑 무엇인가 천이 찢겨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벌써 누군가가 들어갔는지 채 닫지 못해 열린 문 틈으로 시선을 주자 황급한 목소리가 외쳤다. " 물러가! 시녀장만 남고 모두 물러가라! 시녀장, 어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라! " 시녀장은 따라온 시녀들을 물리치고 급히 문을 닫고 엉망이 된 방안으로 들어갔다. 찢겨진 커튼은 열린 발코니 창에서 흐느적거리고, 깨진 물병과 유리조각, 흩어진 물이 카펫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엉망인 펜이 거기 있었다. 월은 당혹스러움과 가슴이 찢겨나갈 듯한 불안으로 바닥에서 고통에 구르고 있던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오랜세월 그녀를 모셔온 시녀장도 자신도 모르게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려 입을 다물었다. 공포와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비록 아리스타타는 아니라 할지라도, 만들어진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도 2차 대륙전쟁에서도 굳건히 버티어 내며 트리옌과 숲을 지켜주었던 그녀였는데. 그녀는 지금 검붉게 변한 팔을 부여잡고 몸을 떨며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는 혼탁해 빛을 잃었고 지난 전쟁때 미끼로 쓰느라 귀밑까지 짧게 잘린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다. 시녀장은 떨리는 손을 가누며 급히 펜의 방 한쪽에 숨겨져 있던 에린지움의 꽃즙을 꺼내 그녀의 이마와 입술에 뿌렸다. 가격을 따질 수 없을정도로 귀한, 몇십년을 모은 꽃잎에서 짜낸 영약은 펜이 정신을 차리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의 떨림이 가라앉고, 눈동자에 촛점이 돌아오자, 월은 흐트러진 침대위를 치우고 그녀를 눕혔다. 시녀장도 월도, 에린지움의 몸에 나타난 불길한 이변에 커다란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그 어떤 말도 물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몸으로, 병과 불결한 것이 틈탈 수 조차 없어야 할 에린지움의 몸에... 펜은 아직 미세하게 떨리는 팔을 들어 검붉게 변한 피부를 바라보았다. 양팔은 마치 핏물에 담갔다 빼낸 썩은 나무토막처럼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하, 하루라도 빨리... 리아트리스를 찾아요. " 펜은 마치 자신이 저지른 짓인양 수십명을 칼로 토막낸 살육의 현장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었다. 피와 쇠와 불을 배척하고,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조차 못할 몸이... 살인을 했다. 살육을 저지른 것이다. 마음을 닫고 에린지움의 힘을 방패처럼 둘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고서 그 무엇보다도 생명을 지키고 품어야 할 그 힘으로 죽였다... 피로 물든 대륙을 정화시켜나갔던 에린지움이 뿌리부터 썩어들어가는 것이다. 그 부정함과 더러움은 반대급부가 되어 펜에게 들이닥치고 있었다. 에린지움, 리아트리스, 펜 셋 중 가장 그 능력이 쇠하고 정하지 못한 자신에게 먼저 영향이 끼치는 것이다. 그녀는 고통과 공포에 몸을 떨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 나에게 먼저 영향이 나타나고 있지만... 리아트리스가 그 손을 더럽히면 더럽힐수록 에린지움의 뿌리는 썩어들어가고 정화력을 잃을 겁니다. 빨리 그를 찾아서 이곳으로 데리고 와야... " 그녀는 말꼬리를 흐렸다. 어쩌면 그가 저지른 죄의 댓가로 자신이 받은 이 더러움은 없어지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자신은 아직 만들어진 몸이었고, 적어도 리아트리스, 그만은 더이상 죄를 범해 자신과 에린지움을 버리도록 만들면 안되었다. 펜은 건조한 눈가에서 귓전으로 떨어지는 눈물 한방울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리스타타는 에린지움의 걸음이었고, 숲의 여왕이었으며, 적어도 자신이 짊어진 모든 것을 알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 하지만 리아트리스는 위험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의 중요성도 모르고, 그가 짊어져야 할 운명과 그 책임도 모른다. 그저 바보같이 번뇌하고 자신만의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단지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저지른 죄를 자신이 대신 받아야 하는 것을 펜은 참을 수 없었다. " 내가 미쳐버리기 전에... 고통과 증오로 그를 죽이려 들기 전에 그를 내앞에 데려오세요. 그리고 그가 저지른 죄와, 내게 저지른 죄와, 내가 그토록 짊어지려 노력했던 운명을 대신 지워야해!! 끌고서라도, 사지를 잘라서라도 내게 데려 오란 말이야! 아아아아!!!! " 월은 다시 몸을 떨며 경련을 일으키는 펜의 어깨를 눌렀다. 시녀장은 그녀의 비명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황급히 방의 창문을 닫았고 그녀의 입에 물에 적신 재갈을 물려주었다. 세계는 밤의 어둠에 휩싸여 고요했고, 숲은 잠들 새들로 적막했지만 돌이킬 수 없도록 일그러진 굴레는 쇳소리를 내며 틀어지기 시작했다. 세계를 구원했던 모순은 이제 다시금 그 모순적인 행태로 모든 것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으며, 드러나지 않았던 불의 저주는 다시 대륙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없어졌다 생각한 원죄는 남아있었고, 잊혀졌다 생각했던 과거는 고개를 들었다. 스스로가 믿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배신이 일어났고 잔인함이라는 또다른 이름의 운명은 그 누구하나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았다. 별에 스쳐 부는 바람에 슬피 우는 소리가 실려갔다. 그 살육자의 뒤를 쫓는 것은 아주 쉬웠다. 왜냐하면 그가 지나간 곳엔 숲이 길을 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베스는, 살육자가 무스카리일 것이라는 가설을 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숲을 증오하는 용족이라면 숲을 불태워 버리든가, 아니며 그냥 날아 지나치든가 둘 중의 하나지 설사 그가 걸어 이곳을 지났다 해도 숲이 저절로 없던 길을 만들어 가며 비킬리 없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한사람. 숲의 사랑을 받으며 숲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자, 숲의 여왕 단 한사람 뿐이었다. 게다가 그가 지나간 길엔 은은한 그만의 향기가 발자국처럼 배어있었다. 베스는 더이상 자신들이 쫓는 상대가 아스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다. 아스가 정말 그들을 그렇게 다 죽였는지 아닌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베스는 신중해지기로 했다. " 카무, 둘을 더 뽑아 정찰조로 나서라. 목표물을 확인하는 즉시 섵불리 행동하지 말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도록. 지즈, 다렐, 하발, 너희들은 날 따라 계속 이 길을 추적하고, 칼소 너는 남은 녀석들을 이끌고 남하하도록 해라. 하이포시스 왕의 도시에서 만나자. " 칼소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 단장, 대상은 어중이 떠중이라지만 용병 몇십명을 무썰듯 썬 놈입니다. 네명만으로는 위험합니다. " 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 나, 지즈, 다렐 하발 이 인원으로도 안되면 용병단이 다 가봤자 소용없어. 인원이 적어야 되려 도망치기도 쉽다. 명령에 따라. " 칼소는 별 수 없이 짐에서 네사람분의 물과 식량을 나누어주고는 남은 일행을 이끌고 길을 되돌아 갔다. 정찰조를 먼저 보내고 칼잡이들은 천천히 숲이 그 누군가를 위해 터준 길을 따라 걸었다. 뒤를 보니 칼소가 사라져 가는 길 끝은 서서히 나무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자 떠났던 정찰조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대상이 멈춰섰으며, 그 대상이 아스 혼자인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네명으로 이루어진 사냥꾼 한무리가 그를 뒤쫓고 있다고 보고했다. 베스는 정찰조는 칼소 일행을 따라 가도록 지시하고, 자신들은 천천히 전진했다. 어쩌면 자신들보다 먼저 아스와 접촉할 사냥꾼 무리에 휘말리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늦은 오후에나 멀리 숲의 끝자락 바위 위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앉아있는 아스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베스는 일행을 뒤에 남겨두고, 자신 혼자 앞으로 나서서, 무방비인 두 손을 보여주며 크게 외쳤다. " 어-이-!!! 거기 리아트리스, 아스인가-!!! " 한참 후에야, 아스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표정에 아무런 기색이 없어 베스는 조금 불안했지만, 다행히도 아스는 베스를 알아보았다. 아스는 바위위에 일어서서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중얼거렸다. " 락시움 용병단 단장... " " 그래. 회색늑대족 베르베리스다. 나를 기억하나? " " 그래. 기억해. 하지만 이런 곳에서 무슨 볼일이지? " 갑자기 주변의 온도가 차가워졌다. 베스는 살기도 뭐도 아니지만 섬찟한 그 느낌에 하마터면 살기를 내뿜을 뻔 했다. 그는 간신히 자신을 자제하며 천천히 말했다. " 무슨 볼일이긴. 자네를 찾으러 왔지. " " ... 최근에 나를 찾는 사람이 많군. 너도 현상금인지 뭔지를 노리고 날 잡으러 온건가? " 아스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고 베스도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미처 보지 못했던 숲의 높은 나무 꼭대기위엔 인형처럼 반쯤잘린 목이 덜렁거리는 시체 네구가 매달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시체 주변으로는 까마귀조차 꼬이지 않고 있었다. 베스는 솜털이 바싹바싹 일어서며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싹한 느낌에 당장이라도 검을 틀어쥐고 녀석을 향해 내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자신은 틀림없이 죽으리란걸 예감하고 있기에... 그는 입술을 깨물며 그 충동을 참았다. 공포에 쫓기려는 자신을 제어했다. " 카멜이 당신을 찾고 있다. " " ... 카멜이? " 베스는 자신을 둘러쌌던 그 이상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카멜의 이름을 꺼낸 것은 적중한 모양이었다. 베스는 소름이 돋아난 팔뚝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 그래. 당신이 드라세나에서 용족들과 함께 사라진 이후 그는 미친듯이 너를 찾고있지. 하지만 그는 트리옌이고 이쪽 용족들의 땅이자 불모지인 곳으로는 함부로 들어올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 그래서 현상금을 걸어 대신 우리들이 온거야. " 베스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사실 현상금을 건 것은 펜 오키드였지만, 베스는 어디까지나 카멜이 그를 찾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카멜이 그를 지극히 아끼는 것은 당연했고, 아스 역시 트리옌 무리에 있지 못하고 용병단에 그와 함께 입단할 정도로 그를 가까이 두었으니 그 이름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아스는 베스의 설명을 듣자 주변을 흐르게 하던 이상한 힘- 아마도 에린지움의 힘이리라- 를 거둬들였다. 그리고 갑자기 어린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베스는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이 우습게 보았던 그때의 아스로 돌아왔음을 느꼈고, 위협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절로 길을 열었던 숲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아스가 흘리는 눈물 방울에서 나는 지독히 매혹적인 향만이 주변을 감쌀 뿐이었다. " 카멜... 카멜에게로 가고 싶어. 카멜이 보고 싶어. 날 그에게로 데려다 줘... " 방금 느꼈던 그 공포는 어디가고, 베스는 한없이 그가 가엾고 안쓰러우며 사랑스러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스에게로 다가가, 그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순간 정신을 잃었다고 밖엔 할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그의 눈물을 핥았고,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베스는 칼잡이로써의 본능이 그를 붙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은 아직 방금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었고, 베스는 애써 그를 자신의 품에서 떼어낸 후 말했다. " 우리와 함께 가자. 그에게로 데려다 주지. " 금방 해가 졌기에 아스를 포함한 베스 일행은 내일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숲의 가장자리에서 그들은 야영을 했다. 숲은 이것이 마지막이고, 황무지가 이어지다 안드리움 화산을 지나면 사라센들의 나라, 불볕 사막이 나온다. 관건은 안드리움 화산을 지나는 일이었다. 아스는 울다 지쳐 새근새근 잠이 들었고, 베스와 지즈, 하발, 다렐 이 넷은 모닥불 주변으로 둘러앉아 앞으로의 여행길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다. 화산에서 멀리 떨어진 수인족들의 길을 따라 이동하기로 결론을 내렸지만, 커다랗게 솟은 안드리움 화산을 시야에서 완전히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 이 숲을 나가면 저 아스의 힘은 많이 약해질거다. 현상금 따위에 별 관심이 없는 용족들에게야 눈에 띄지 않게 하면 그만이지만, 되려 더 위험한건 사냥꾼들이야. 칼소가 입단속들을 시켰을테지마는, 그들이 남하한다는 것만으로 눈치빠른 놈들은 낌새를 알아차릴지도 몰라. " " 멍청한 사냥꾼 놈들이야 그냥 속여 넘이거나 덤벼오면 해치우면 그만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불볕사막쪽이 더 걱정인데요. 거기에선 하이포시스 왕의 눈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모든 오아시스가 그의 휘하에 있으며 모든 부족들이 그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데, 오아시스를 거치지 않고 갈 수도 없고...그는 탐욕이 많은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 다렐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벨이 말했다. " 저 녀석은 그래도 에린지움의 걸음이지 않습니까? 적어도 자기 몸 하나쯤 지킬 정도야 되지 않을까요? " " 불볕사막은 트리옌들에겐 지옥과도 같은 장소다. 우리는 아마 녀석이 죽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지나 않으면 다행일거야.그리고... 섵부른 그 힘은... 없으니만 못하다. 있어봤자 우리에게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득이 되진 않을거야. " 베스의 말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아스의 눈물에서 흘러나왔던 그 향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확실히 아스는 위험했다. 무기와도 같은 힘을 몸에 두르고 상대를 유혹한다. 아름다운 모습에 이끌려 다가가면 언제 그도 모를 칼에 당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베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스의 눈물방울을 핥았던 혀 끝의 맛을 기억하고 지그시 이빨을 깨물었다. 정말 위험했다- 고 그는 생각했다. 한번만 더 그같은 향기를 맡았다가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용족이나 사냥꾼들을 걱정하기 이전에, 자신의 일행들을 걱정했다. 아스가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자극이 되는 행동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다. 까닥하면, 그의 공포에 질려 덤볐든, 그의 아름다움에 홀려 덤볐던 그 사냥꾼들과 같은 꼴이 될거라 생각하니 베스는 덜컥 겁이 나려 했다. 베스는 깊은 한숨을 쉬고는 중얼거렸다. "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일을 떠맡아 버렸군. " 그 과묵한 지즈가, 베스의 푸념에 일침을 놓았다. " 다 단장 탓이다. " 우오오오오옹--- 바람소리일까...? 이것은? 캄캄한 어둠속에 서 있던 그는 갑자기 뒤에서 솟구치는 불길에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온 사방이 불타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의 비명소리조차 나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이 타고만 있을 뿐인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아름다웠던 축대와 난간과 계단들은 하무말없이 허물어져 갔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자욱히 피어오르는 연기뿐이었다. 거센 바람이 불어 불티가 화르륵 날아올라 아스는 황급히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지만 어느새 그의 옷자락엔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스는 옷을 찢어버리고 맨 몸으로 달렸다. 어느새 뜨거운 불길은 멀어지고, 숨이 가빠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딘가에 걸려 바닥에 넘어진 아스는 너무나도 벅차오르는 가쁜 숨과 답답하게 조여드는 심장을 쥐고 몸부림쳤다.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만 아스는 몸이 약했다. 심장이 약했고 기관지가 약했고 소화계가 약했다. 있다가 만듯한 기관은 그를 항상 뛰지도, 달리지도 못하게 만들었었다. 탁한 공기는 폐부를 쥐어짜고 아스는 이윽고 숨마저 쉬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에 손가락을 바르작거렸다. 어느새 쓰러진 그를 바싹 뒤쫓아온 불길은 그의 눈 앞에 있었다. 그 불길은 자신의 심장에 꽃혀 있었다. 세상을 불태웠던 불의 저주, 어쩌면 그것은 사랑에 고통받는 아스 그 마음의 불길인지도 몰랐다. 멀리서 끝없이 무스카리는 부르고 있었다. -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스-!!! 그리고 저 편에서 울려오는 메아리는 다른 말을 외쳤다. -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리스타타-!! 아리스타타-! 아스는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계속 끝없이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의 팔이 그를 붙잡는다. - 안됩니다! 제 모든 것을 드렸으니, 이제 아스님은 제 것입니다! 카멜의 얼굴은 적금발의 무심하고 딱딱한 여자의 얼굴로 변했다. - 네 심장은 내꺼야. 아스는 다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어디에선가 커다란 비웃음소리가 울려왔다.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그 소리에 아스는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아스에겐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비명소리에 놀란 아스는 퍼뜩 몸을 일으켰다. 안온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던 조그만 천막안에서, 잠들어 있던 일행들이 그의 비명소리에 놀라 뒤척이고 있었다. 옆에 누워있던 베스가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 무슨 일이냐? 또 악몽을 꿨어? " " 아... ... " 아스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베스는 다시 자리에 누웠고 천막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아스는 목덜미를 축축하게 적신 식은땀을 손으로 문질러 닦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차갑기 그지 없는 바람이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막의 밤은 아름다웠지만, 기괴했다. 바람과 모래마저도 잠든 고요한 밤 달빛은 아름다웠지만 아스에게 그 커다란 달은 자신을 노려보는 누군가의 눈동자 같았다. 황무지를 지나 모래밖에 없는 본격적인 불볕 사막에 들어온 이후, 아스는 극도로 지쳤다. 그 눈보라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발산하고 있던 에린지움의 힘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아스는 예전 인간이었을때처럼 숨이 탁탁 막히는 고통을 겪으며 사막을 지나야 했다. 생명의 흔적이라곤 없고, 오직 모래와 모래. 태양과 태양. 그리고 이따금 부는 바람은 끔찍한 모래폭풍이 되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나 갑작스레 차고 흘렀던 에린지움의 힘은 이제 억지로 끌어내려고 해도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스는 자신이 죽인 사람들을 생각하고, 피와 죽음을 거부하는 에린지움을 생각했다. 처음 전쟁에 참전했던 그때, 피가 튀기는 가운데서 뻣뻣히 얼어붙었던 자신. 하지만 아스는 아무런 죄책감, 아무런 거리낌없이 사람을 몇이나 살해했고, 에린지움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게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상관없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떻게 되어버려도 괜찮았다. 그저 아스는 지쳤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며, 자신을 안아주고 일으켜 세워줄 카멜의 팔만이 간절히 필요했다. 땀이 식으면서 몸이 떨려왔지만, 아스는 씻고 싶다고 생각했다. 불볕사막에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되는 악몽은 그를 깊은 잠에 들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온 몸을 끈적거리는 불쾌감에 휩싸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오아시스에 들어서서 몸 상태가 조금 나아져,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아스는 간간히 천막이 서 있는 공터를 지나 물가로 다가갔다. 물가에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고 나니 몸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뿌리칠수가 없었다. 아스는 오아시스에 들어오면서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단단히 감고 있던 천을 풀어버리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무그늘 밑 어두운 곳에서 조심스럽게 헤엄쳤다. 물 속은 되려 바깥보다 따뜻했다. 머리끝까지 물속에 잠그고 아스는 물 속의 어둠속에 잠겨들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던 악몽이 생각났다. 물밑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스는 그 소리없는 부름에 응하고 싶은 기분마저 느꼈다. ...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다. 이윽고 물 밖에 머리를 빼고 숨을 가다듬으며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올리자, 연못가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달빛을 등지고 선 그림자는 손을 허리에 얹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는 아무런 무기를 들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 과연, 소문대로 아름답구나. 달빛보다 더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에, 선명한 청록색 눈동자, 눈처럼 흰 피부와 사슴같은 몸매라... 그 호색한이 보면 환장을 하겠군. " " 누구냐! " " 오늘 아침에 첩보가 들어왔지. 현상금을 추적하던 사냥꾼들 중 한명이었는데, 어떤 용병단 하나가 바로 그 대상을 데리고 있는 것을 황무지에서 보았다고. " " 우리를 습격했던 무리중의 사냥꾼이냐? " " 에에, 나 말야? 정보를 가져다준건 그 놈이 맞지만 난 그런 개떼같은 놈들과 비교하면 서글프지. 하지만 뭐, 누구라곤 꼭 잘라말할 순 없는게... 그냥 떠돌이라고 할까? " 무기는 없지만 상대는 혼자다. 게다가 체구도 아스와 비슷했다. 아스는 선공을 마음먹고 재빨리 몸을 날렸다. 어깨로 상대방의 몸을 들이받고 그의 앙쪽 허리춤에 있는 칼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자는 빠르고 갑작스러운 아스의 공격을 어깨를 비트는 것으로 가볍게 피하고 균형을 잃은 아스의 허리를 나꿔채었다. 아스는 곧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순간 너무 놀라 행동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드러난 달빛에 보인 그 얼굴은... 남자는 놀란 기색이 역력한 아스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 왜? 내가 너무 잘생겨서 놀랐어? " 그가 가볍게 아스의 입술에 키스를 날리고 나서야 아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놈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뭔가로 목덜미 뒤를 찌르는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다리에 힘이 스르륵 풀리며 그가 자신을 안아드는 것이 느껴졌고,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 남자는, 죽어버린 스티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다음 아스의 정신이 돌아온 것은, 흔들리는 말 위에서였다. 아스는 꽁꽁 묶인채 말 뒤에 짐짝처럼 엎어져 있었는데, 꽤나 오랫동안 그 자세로 있었는지 목과 허리가 죽을만큼 아팠다. 아스가 신음소리를 내자 말을 몰고 있던 자가 고개를 돌렸다. " 어라? 깼어? " " ... ... " 아스는 눈동자를 침범하는 강렬한 태양빛을 쫓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밝은 대낮에 보니 스티와는 인상이 좀 틀렸지만, 얼핏 보면 스티라고 착각할 만큼 그와 닮아 있었다. 스티가 좀 고운 얼굴이라면 이쪽은 잘생긴 뉘앙스였다. 스티보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턱선도 좀 더 단단했고 눈썹도 짙었다. 그리고 앞머리로 흘러내려와 있는 고수머리는 스티같은 맑은 푸른빛이 아니라 검은색에 가까운 청색이었다. 아마 스티가 더 나이가 든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아스는 바싹 말라 갈라진 목소리로 가까스레 물었다. " ... 당신... 누구?... " " 나? 어제 말한거 같은데? 그냥 떠돌이라고. 지금은 이렇게 호색한 밑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중이지만. 이름을 물은 거라면 말해주지. 난 뉴사이란이다. 사이라고 부르던지 사이란이라고 부르던지 맘대로 해. 넌 아리스타타라 불러야 하나 에린지움이라 불러야 하나? " " ... ... 난 리아트리스... 아스야. 사이...라고. " 아스는 스티가 쥬니퍼 가문의 독자라고 알고 있었다. 그럼 형제는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사촌이나 친척일런지도 몰랐다. " 성은...? " " 성? 성 같은거 없어. " 아스는 더 묻고 싶었지만 목이 타는 것 같았기에 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참 고개를 떨구고 그렇게 실려있던 아스는 또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사이에 뜨거운 햇살과 모래위를 헤엄치는 뱀, 화려한 천정, 웃는 여자들, 그리고 사이란이 지나쳐 가는 듯 했다. 몸이 어디론가 둥실둥실 떠가는 것 같았다. 꿈에선 제피란더스가 그 무너진 여름궁전의 폐허에서 울고 있었다. 꿈 속에서도 제피가 스티의 시신을 보았을까, 보고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펜이 나와서 소리쳤다. -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죽였어! 정말로 온전히 정신을 차린 것은 정말 오랜시간이 지난 후였던 것 같았다. 눈을 뜨자 돔 형으로 생긴 둥근 천정과 거기에 매달린 우아한 모양의 램프가 보였다. 아스는 바닥에 깔린 푹신한 시트위에 누워 있었고 천의 느낌은 차가웠다. 방의 한쪽 면은 테라스처럼 밖으로 튀어나가 완전히 트여 있었고 그곳으로는 오아시스가 보였다. 아스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몸의 뼈와 근육등이 삐그덕 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막을 지날때의 그 숨막히는 고통은 사라져 있었다. 물이 풍부한 곳인듯, 불어오는 바람엔 습기가 느껴졌고 창가로는 무성하게 자란 키큰 야자수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는 불안감만 없으면 상당히 멋진 곳이었다. 아스는 자신이 알몸이란걸 깨닫고 옆에 개어져 있는 가운을 걸쳐 입었다. 테라스 밖으로 나가자 건물로 둘러싸인 곳 연못에서 발가벗은 구릿빛 피부의 여자들이 물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보여 아스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돌렸다. 어느새 커튼으로 가려진 방의 입구에 여자 한명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아스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시녀인 듯한 그 여자가 입을 열었다. " 깨어나셨습니까 아스님. 목욕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식사를 먼저 하시겠습니까. " " ... 여기가 어딘지부터 먼저 알고 싶은데. " " 이곳은 폐하의 영지이자, 폐하의 대리인이시며 영주이신 가미날카님의 저택입니다. " " 폐하라면? " " 위대한 하이포시스 폐하를 이르심입니다. " 아스는 오랜만에 맑은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베스가 조심해야 한다던 그 하이포시스 왕에게 잡혀가는 도중인 모양이다. 아스는 어렴풋이 사이란이 말했던 그 '호색한'이 하이포시스 왕을 이른다는 것을 깨닫고 소름이 쭉 돋았다. 예전, 이곳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노예로 팔려가 겪을뿐 했던 혐오스러운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또다시 그런 꼴을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은 아직 용족의 땅. 계속 끌려가면 용족에게로 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고, 그리고... ' 무스카리... ' -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직도 눈보라 소리와 함께 그의 음성이 귓전에 생생했다. 아스는 욱신거리는 가슴의 고통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바닥에 조아리고 있는 시녀를 한번 바라보고, 바깥으로 훤히 트인 방 밖을 바라보았다. 도망가달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스는 놀라 고개를 드는 시녀를 놔두고 훌쩍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꺄 꺄 소리치며 물장난을 치던 여자들이 아스를 바라보고, 아스는 몸을 날려 연못 가 반질거리는 돌들을 밟고 뛰어올라 반대편 건물로 뛰었다. 비어있는 반대편 방을 건너 바깥으로 나 있는 복도를 가로질러 건물 밖으로 나가자, 무수한 모래빛의 건물들과 색색깔의 천막들, 그리고 높은 성벽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불볕사막이 보였다. " 도망가봤자 소용없어. " 휙 몸을 돌리자 거기엔 아스와 마찬가지로 가운 한 장 차림의 사이란이 벽에 팔을 걸치고 서 있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 너같이 불볕사막에서 견디지 못하는 몸이 저 곳에 식량도, 물도, 말도, 길잡이도 없이 혼자 나갔다간 죽지 십상이지. 게다가 이곳에서 너같은 이방인이 그런걸 구하려면 상당한 거금이 필요해.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네가 가지건 그 몸뚱이 하나 뿐인거 같은데. 남창굴에라도 가서 돈 벌려고? " 아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스는 사이란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그것은 여지없이 막혔다. 사이란은 되려 내뻗은 손목을 잡아채고 아스를 확 끌어당겨 허리를 안았다. 킁킁 거리며 아스의 체취를 맡던 그는 아스가 버둥거리려 하자 재빨리 그를 놓아주었다. " 상당히 달콤한 향기군. 역겨운 향유냄새를 방금 진탕 맡고 돌아온터라서 말야. 그리고 너, 상대방에 붙잡고 있는데 버둥거리지 말라고, 쓰러트려지고 싶지 않으면. " 아스는 노골적인 그의 말과 드러난 그의 가슴팍에 무수한 키스마크를 보고 방금전까지 그가 여자를 안고 왔다는 사실에 붉어진 얼굴을 돌이킬 길이 없었다. 아스는 고개를 돌려 사이란을 외면한채 물었다. " 날 하이포시스에게로 데려갈건가? " " 그래. " " 데려가서 어쩔거지? " " 글쎄? 데려다주는 것 까지가 내 일이라서. 그 뒤는 놈이 알아서 할테지만, 그 놈이 호색한인데다가 남색을 밝힌다는 것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어. 아! 그리고 정치적인 목적으로도 넌 아주 유용하지. 용족에게든 트리옌에게든 널 갖다바치면 엄청난 댓가가 쏟아질 것은 자명한 일이니까. 불볕 사막을 넘어 좀 더 풍요로운 땅을 갖고 교역권을 넓히고 싶어하는 왕한텐 절호의 기회지. " " 누가 그리 되게 굴 것 같아? " " 안 그럼 어쩔건데? " 아스는 지그시 사이란을 노려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꾸했다. " 미안하지만 넌 내 상대가 안돼. 좋은 솜씨지만 아직 멀었어. " " 나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데, 여기선 몰라도 너와 나 둘뿐인 불볕사막에서라면 네가 잠자는 틈을 타 널 죽이고 네 물건을 빼앗아 도망갈 수 있어. " "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긴 불볕사막도 아니고, 그랬다간 넌 사막에서 길을 잃고 죽기 십상일걸? 네가 반드시 죽는다에 내 전재산을 걸수도 있어. 내 재산이라면 칼뿐이지만. " " ... 넌 하이포시스 왕의 신하는 아닌 것 같군. " 그는 빙긋이 웃었다. " 그래. 그가 준 집에서 살고 그가 준 권력을 휘두르면서 그가 준 여자를 안지만 신하는 아니지. 심심하면 나까지 침대로 끌어들이려는 그런 호색한의 부하가 되고 싶진 않거든? " " ... 그렇다면... 당신, 스타티스를 알아? " 사이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결좋은 흑청색 고수머리가 흔들렸다. " 아니? 모르는데? " " 스타티스 쥬니퍼. 정말 모르는 사람인가? " 아스는 사이란이 잠시 멈칫 하는 기색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사이란은 곧 시치미를 떼고 고개를 흔들었다. " 미안하지만 몰라. 이제 그만 거기 서 있고 들어오지 그래? 시원한 목욕과 멋진 만찬이 기다리고 있다고. 몇날 며칠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으니 허기가 상당할텐데. " 사이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고, 목에서 극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아스는 고개를 돌려 불볕 사막을 한번 바라보았다가, 이내 체념하고 사이란을 따라 안으로 돌아섰다. 사이란이 연못가를 지나자 연못에서 놀던 여자들이 알몸으로 그를 유혹하며 휘파람을 불어대었지만 그는 본체만체했다. 그는 윙크를 하며 아스에게 말했다. " 여기 영주인 가미날카의 하렘 여자들이야. 남의 땅에서 남의 여자를 건드렸다간 죽기 십상이지. 넌 트리옌이니까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겠지만, 저 여자들에겐 말도 붙이지마. 성격이 잔인한 것들은 잠깐 말 몇마디 한 것 정도로도 이야기를 부풀려 남자를 죽이려드니까. 뱀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하렘의 여자들이라지. " 아스가 사이란과 함께 자신이 누워있던 방으로 돌아가니, 아까의 시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스를 보더니 눈에 띄게 안도의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말했다. " 영주님께서 아스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의복이 준비되어 있사오니 목욕을 하신 후에 차리는 것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애들아. " 그러자 휘장 너머에서 여자들 몇명이 우르르 들어와 아스의 가운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아스는 황급히 물러났지만 여자들은 막무가내였다. 무의식중에 도움의 눈길을 사이란에게 보냈지만 그는 그 중 한 시녀에게 추근덕 거린다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목욕을 하고 싶긴 했기 때문에 괜한 반항도 우스운거 같아 그냥 욕탕으로 끌려갔다. 탕 속에까지 들어오려는 시녀들을 내쫓고 혼자 목욕을 끝마친 아스는, 다시 다가오는 시녀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 이제 다 씼었으니 됐잖아? " " 향유맛사지를 해드리겠습니다. 머릿기름도 발라야하고, 몸에도 화장을 하셔야 합니다. " 처음의 그 시녀가 말했다. 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 그런거 필요없어. 빨리 내 옷이나 줘. " 하지만 시녀가 내민 옷은 받아보니, 속이 훤하게 비치고 옷이라기 보다는 보석두루말이에 가까운 이곳의 후궁들이나 입을 법한 의복이었다. 어느모로보나 신체를 가린다-는 의복의 적합한 용도에 맞질 않았다. 아스는 성을 벌컥 냈다. " 지금 누구를 우롱하는 건가?! 나는 에린지움의 걸음이다!! 내게 왜 이런 창녀들이나 입을 법한 천쪼가리를 주는 거냐!! " 시녀들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 가미날카님께서 직접 내리신 의복입니다. 입지 않으시면 안됩니다. " " 내가 왜 한낱 영주따위 때문에 이런걸 입어야 하지?! 이런걸 입을 바엔 그냥 알몸으로 있겠다! " 옆에 걸려 있던 가운을 잡아채 몸에 두르고 성큼 성큼 밖으로 나서려는데, 벽에 기대서 있던 사이란이 아스의 차림새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 뭘 입든 그건 네 자유지만, 여기 영주인 가미날카는 하이포시스 왕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변태라서, 입지 않으면 네가 곤란해질거다. " " 내가 아무리 네 포로의 몸으로 여기 있는다지만, 난 누구에게 인형이나 애완동물 취급당하려고 온게 아니야. 내가 입기 싫다면 싫은거야. " 아스의 말 속에는 아무리 자신이 사이란에게 잡혀 하이포시스 왕에게 끌려가는 지경이라도, 에린지움의 걸음인 자신을 막대할 수 없다는 계산과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사이란은 고개를 저으며 '네가 곤란해 진다니까...' 라고 중얼거렸다. 때마침, 복도 저 편의 응접실에서 가미날카로 추측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왔다. " 리아트리스님은 어찌 된게냐! 왜 이리 늦는거냐! " " 지금 채비를 갖춰드리고 있사오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 아스는 예의 그 변태에게 직접 성을 낼 요량으로 응접실의 휘장을 걷어부치고 들어갔다. 안에 있던 배가 나온 검은 수염의 중년남자는, 시녀에게 역정을 내고 있다가 기척에 고개를 돌렸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가미날카는 하이포시스 왕만큼이나 미색을 밝히기로 유명한 남자였다. 불볕사막에서 몇 손가락안에 꼽히는 큰 오아시스를 거점으로 자신만의 하렘을 꾸린 그는 뭔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의 후궁들로 거래할 정도로 많은 미녀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태껏 자신이 품어왔고 길들여왔던 그 모든 여자들이 자신앞에 선 이 단 한명앞에서 모든 가치를 잃는 것을 느꼈다. 인간이 아닌 트리옌의 미모에 관해서는 자신도 익히 아는 바였지만, 눈 앞의 소년은 그저 인간도, 그저 트리옌도 아니었다. 전설속의 무언가가 자신앞에 내려앉아 있다면 이런 모양이리라- 채 마르지 않은 물기가 어린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뻗쳐져 있고, 분칠도, 입술도 바르지 않은 맨 얼굴에 어떤 향유도 붓지 않은 몸이건만, 눈부시게 빛이 났다. 인위적은 기름냄새와는 다른 청량하고 맑으면서 달콤한- 방금 막 따온 햇빛에 농익은 과실같이 향기로운 냄새이 응접실을 가득채웠다. 신비로운 회청은빛 머리카락과 오아시스보다 싱그러운 청록색 눈동자가 가미날카를 주시하자, 그는 숨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가운 사이로 드러난 아스의 뽀얀 가슴팍에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곧 그가 자신이 특별히 보낸 옷을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네가 영주 가미날카냐? " " 숲의 여왕,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이신 리아트리스님을 이런 사막 한 복판에서 뵙게 되다니, 사라센으로써 정말 영광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가미날카입니다. 계속 의식이 없으시기에 걱정 했는데, 건강하신 듯 보여 다행이군요. 마침 제가, 특별히 주문해 만든 의복과 보석들은 어쩌시고 그리 맨몸으로 나서셨습니까? " " 나는 너의 소유물도, 후궁도, 장식물도 아니다. 나는 너에게 그 어떤 물건도 받지 않을 것이고 준비가 되는 대로 속히 이곳을 떠날 것이다. 아무리 내가 지금 너의 영지에 부자유한 몸으로 있다해도 나를 그리 취급하지 말아라!" " ... " 사이란이 아스의 뒤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손한 듯 숙였던 가미날카의 눈이 번뜩이는 듯 싶더니, 그는 번개처럼 허리에 감아두었던 채찍을 꺼내 휘둘렸다. 짜악-! " 아아아아악-!!!! " " 네 년들! 대체 어떻게 굴었길래 아스님이 내 정성어린 선물을 거절하신단 말이냐! " 시녀들이 일제히 비명과 울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 아닙니다, 아닙니다 주인님!! " " 모든 물건이 최고급품으로 이 땅에서 찾기가 힘들만큼 진귀한 것들이건만! 네년들이 값싼 것으로 바꿔치기라도 한 것이 아니냐!! " " 꺄아아악!!! "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채찍아래에서 자지러졌다. 아스가 멍하게 있는 사이 채찍이 시녀들의 등과 가슴팍을 후려갈겨 피를 튀겼다. 가미날카는 잔인한 손속으로 거침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살갗을 찢는 날카로운 회초리끝이 온 응접실을 훑었다. " 그러지 않고서야 어째서 나의 성의를 무시하신단 말이냐!!! " 아스는 놀라서 소리쳤다. " 그만두시오!!! 어째서 죄없는 그녀들을...!! " " 아스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내 선물을 거절하게 만든 것이 이년들이 틀림없습니다! 내가 손수 살가죽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을때까지 매우 때려 네 년들을 죽여놓을 것이야! " " 그만-!!! " 시녀들이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며 방 이리저리로 웅크리며 도망다니는데 가미날카의 채찍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아스는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지만 말로 설득하기엔 가미날카의 채찍이 너무 무자비했고 힘으로 제압하기엔 오아시스라지만 사막안이라서 그럴 수가 없었다. 아스는 가미날카가 변태라며, 입지 않으면 자기가 곤란해진다는 사이란의 말을 그제야 바로 이해했고, 결국 그것들을 받겠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아스가 승낙하자마자, 그는 채찍을 거둬들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 고맙습니다. 이제야 제 진심을 알아주시는군요. 소란스럽게 해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이년들, 어서 썩 일어나 여길 치워라!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피로 더럽혀졌으니, 아스님은 내실로 모시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사이란께서도...? " 가미날카는 사이란이 동행하는걸 꺼리는 눈치였지만, 그는 입을 떼어 말했다. " 당연히 동행해야지. 하이포시스 페하께서는 자신의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길이나 입김이 닿는 것을 매우 싫어하시니, 모셔가는 내가 관리를 잘 해야지. " 가미날카와 사이란 사이에 묘한 냉기가 흘렀다. 아스는 본능적으로 사이란이 영주들과 귀족들에게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며, 수도에 가면 여기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취급을 받으리란걸 예감할 수 있었다. 응접실의 화려한 타일에는 시녀들의 핏자국이 튀어있었고, 등이 온통 헤집혀진 시녀들은 그것을 치료할 생각도 하지 못한채 흐느끼며 자신들의 핏자국을 지우기 바빴다. 아스는 문득 노예시장에 끌려다니던 그때의 신세가 떠오르며 소름이 쭉 끼쳐왔다. 그때보다 나빴으면 나빴지 좋진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안스륨이... 아스는 인상을 흐리며 생각을 중단하려 애썼지만, 한번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은 좀체로 사라지지 않았다. " 젠장. " 몇날 며칠 부상당한 몸으로 힘겹게 사막을 건너와 간신히 오아시스에 도착해 시원한 물 한잔을 들이켰건만, 베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욕이었다. 가미날카가 이 오아시스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물 한잔마저도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사방이 우물 천지인데도 베스일행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모습 그대로 있는 돈 없는 돈 닥닥 긁어서 간신히 물 한병을 살 수 있었다. 목욕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지칠대로 지쳐 가미날카의 으리으리하면서도, 철통같은 경비와 높은 담에 둘러싸인 저택을 보며 베스는 물병을 지즈에게 넘겼다. 며칠전 사막의 작은 오아시스에서 쉬고 있던 밤에, 납치범은 아스가 잠깐 나간틈을 타 쥐도새도 모르게 그를 데려가 버렸다. 번갈아가면서 불침번을 서 아스를 감시하고 있었지만 어디에 약을 썼는지 죄다 잠들어버린 것이다. 다음날 아스가 없어진 것을 알고 밤새 말을 달려 그를 쫓았지만 갑자기 모래속에서 튀어나온 두명의 자객에게 하발이 크게 다치고 다렐이 부상당했다. 간신히 여기까지 도착해 들은 이야기라고는- 더욱 더 힘빠지게 만드는 것으로, 남쪽의 유명인사, 즉 아스가 하이포시스 왕의 용병 뉴사이란과 함께 와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이란, 그가 누구던가? 하이포시스 왕이 오리어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게 그였다. 단신으로 모래 아룡을 죽이는 남자이며, 특이한 쌍검을 쓰는 사내. 원정을 나섰던 하이포시스의 군대 일만을 죽여 그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던 삼족(三族) 족장들의 머리를 단 한마디의 명령에 수행한 용병. 그러면서도 하이포시스에게 충성은 맹세하지 않고, 용병의 신분으로 아무런 지위도 없으면서 이 땅에 가장 큰 권력과 부를 등에 업은 인간. 사막의 사라센들에게 흰 피부의 쌍검술을 쓰는 이방인이라면 외경과 증오의 이름이었다. 자신들을 덮친 복면의 두 자객도 순식간에 당할만큼 솜씨가 좋았지만, 그 사이란의 부하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했다. 전쟁이 결계부근에서 미묘하게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는 지금, 아스를 데리러 올 자는 지위에 얽매여 전쟁터에 나가있지 않은 사이란, 그 밖에 없을 것이다. 한번도 검을 섞어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단신으로 죽였다는 모래아룡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모래속 깊숙히 숨어 먹잇감을 노리는 그 커다란 뱀은 사라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베스는 그것과 싸우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았지만, 100%의 자신할 수 있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염려와는 달리, 베스의 얼굴엔 되려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을 보고 다렐이 궁시렁거렸다. " 저봐라, 우리 단장 또 사이란이라는 말에 좋아한다. " 다 죽어가는 하발도 덧붙였다. " 강한 것이라면 뭐든지 좋아한다니까, 덕분에 우리만 죽어나지. 에휴. " 사이란은 아스가 반 억지로 받아들인 몸치장을 끝낼동안, 발코니에 서서 사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의 대부분을, 거의 평생을 사막과 함께 살아온 그였지만 사막은 언제나 그에게 어떤 감흥을 일으키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고향은 따로 있기 때문일까? 이곳의 검붉은 구리빛 피부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흰 피부... 자신이 어디까지나 이 사막위에서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사이란은 자신의 성을 묻던 아스의 말을 기억해내고는 입안을 씹었다. 성이란건 잊고 산지 오래다. 사라센들에겐 성이 없다. 이 척박한 사막의 대지에서 혈연이란 쥐오줌보다 더 가치가 없는 개념이었다. 이들은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자를 소유물로, 형제를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본다. 이 풍토에 묻혀 살아오면서, 성 따위, 자신의 핏줄따위 잊은지 오래라고 생각했건만... 자신의 출생을 물어오던 그 질문이 그렇게 반가울줄은 몰랐다. 사이란은 준비가 다 되었다는 시녀의 말을 듣고 몸을 돌렸다. 예쁘다고 반 놀림으로 칭찬해줄 생각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가미날카 그 변태자식은, 변태다운 안목(?)으로 아스를 완벽한 꽃으로 만들어 놓았다. 겹으로 드리워진 얇디 얇은 안개빛 가운 한장에 사막에서 귀하기 이를데 없는 진주로 온 몸을 장식한 아스는 그가 당장 입만 열면 그 어떤 존재라도 굴복시킬 수 있을만큼 아름다웠다. 안이 훤히 비치는 가운은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기 위해 입혔을 뿐인 것 같았고, 아스가 입고 있는 진정한 옷은 그야말로 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머리에서 부터 발끝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진주는 사이사이에 눈알만한 사파이어와 에메랄드를 매달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그러모아 날씬한 허리를 꽉 죄는 것은 자개장식으로 현란한 문양이 그려진 굵은 허리띠였는데 이 마저도 사치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원래 자신의 것인양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아스는, 곱게 화장을 하고 머리장식을 올리자 아리스타타를 이르던 그 숱한 전설들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숲의 여왕, 아름다운 절대자, 모든 이들이 사모하는 은빛의 군주. 용족 무스카리를 미치게 만들었다던 여인. 사이란은 애써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아스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다가가자 보통 여자가 바르면 체취와 뒤섞여 역겨운 향유냄새는 미약처럼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사이란은 충동을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하다가, 언제나 자신이 충동을 견뎠던가, 생각하고 아스의 허리를 끌어당겨 목덜미를 입술로 훑었다. 그러다가 곧장 자신의 목덜미에 다가든 칼날을 발견하고 손을 들고는 뒤로 물러섰다. 언제 빼들었는지, 자신의 쌍검 중 한쪽을 빼든 그는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 그 물렁거리는 주둥이가 거기 있길 바라면 나한테 손끝도 건드리지 마. " " 흐응, 아름다운 장미엔 가시가 있다 이건가? 알았어 알았어. 관둘테니까 내 검은 돌려주지 그래? " 아스는 콧방귀를 끼면서 그에게 검을 던졌다. 그것을 받아 허리춤에 끼우면서 사이란은 언젠가 이러한 충동에 사로잡혀 자신을 잃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사막에서 자란 남자답게 여자를 좋아하는 그였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리긴 싫었기에 하렘의 여자들만큼은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었다. 하렘의 여자들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내가 한둘이던가! 하지만 그녀는 하이포시스 왕의 후궁이었다. 누군가의 후궁에게 손을 대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 상대가 더욱이 하이포시스 왕의 여자이어서야! 흑단같은 머릿결이 발치에 이르고, 검은 눈동자가 샛별처럼 빛나던, 이 땅에선 보기 드물게 가녀리고 가냘프며 순진한 여자였다. 사이란은 왕의 후궁에게만큼은 손을 대선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수줍게 유혹하는 그녀의 손짓에 그만 그녀의 침대에 몸을 내맡겼고, 벌거벗은채 그녀와 뒹굴다 그녀를 찾아온 하이포시스 왕을 대면했었다. 잘때조차 옆구리에 끼고 있던 쌍검은 하나는 바닥에 속옷과 엉켜서, 하나는 허리띠에 꿰인채 침대 저편으로 넘어가 있었다. 아무리 자신을 아끼는 왕이라고 한들, 자신은 용병이고 그녀는 하렘의 여자였다. 하이포시스왕은 체면 때문에라도 그를 죽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사이란은 죽음을 예감했고 칼도 없는 판국에 살아보려는 발버둥조차 체념했다. 하지만 하이포시스는 그를 살려주었다. 되려 웃으며 자신 대신 그 여자의 목을 베었다. 달콤했던 침실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고, 따스하던 그녀의 피가 사이란의 몸을 적셨다. 하이포시스는 그에게 검을 던져주며 말했다. - 어떻게든 너를 없애보려는 작자들의 술수다. 너에게야, 내 후궁따위 얼마든지 내 주마. 내 하렘에 마음대로 출입해도 좋으니, 나에게도 주지 않은 마음을 한낱 여자에게 주지마라. 그날 이후 사이란은 왕의 하렘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최초의 남자가 되었다. 하지만 하이포시스 왕이 자신만을 섬기길 바라며 멋대로 그에게 내맡긴 수많은 돈이며 권력과 마찬가지로 그 여자들도 소용없는 것이 되었다. 한낱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그녀가 그렇게 죽어버린 지금, 그때 느꼈던 그 유혹이 사랑이었는지 진실된 마음이었는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사이란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이 모래밭처럼, 자신의 마음이 머물 곳을 찾지 못했다. 그냥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모래산처럼 모양을 바꾸고 모습을 바꾼다. 그렇게 자신의 흰 피부와, 이방인의 피를 모른척 하고 살아왔는데. 사이란은 자신의 옆에서 걸어가는 아스를 바라보았다. 이 소년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돌아갈 곳을 알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 돌아갈 곳은 있는가, 내가 마음을 바칠 상대는 있는가... ... 가미날카는 호화롭게 꾸며진 그의 내실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안의 사치스러움이란 굉장한 것이었다. 천정과 바닥을 뒤덮은 타일엔 보석이 박혀있고, 바닥에 깔린 쿠션과 카펫은 모두 최고급이었다. 가장 놀라운건 자리 중앙에 있는 직사각형의 조그만 연못이었다. 그 연못 한가운데엔 타일로 만들어진 네모난 섬이 중앙에 있었는데, 그 연못의 물은 죄다 포도주였다. 사막에서 가장 비싼 음료는 포도주였다. 그걸로 연못을 한가득 채웠으니, 그의 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키 어려울 정도였다. 가미날카는 치장한 아스를 보자 몸을 꼬며 놀라더니, 곧 그 위험스럽게 번뜩거리는 검은 눈으로 아스를 샅샅히 훑기 시작했다. 아스는 그 시선이 참을 수 없을만큼 불쾌했다. 이런 옷을 입은 것도 불쾌한데, 자신을 물건 감정하듯, 손으로 범하듯 그렇게 쳐다보는 가미날카의 시선은 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입으로는 꿀발린 칭찬을 늘어놓더니, 곧 박수를 쳤고 그 내실로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웠다. " 제 후궁들입니다. 제 후궁들이 아름답기로는 이 불볕사막에서 널리 알려진 바지요. 오늘만큼은 제가 손님들에게 바치는 정성이오니, 맘껏 즐겨주십시오. " 여자들이 꺄꺄 거리며 아스와 사이란에게로 달라붙었다. 사이란은 좋아라고 여자들을 끌어앉혔지만, 아스는 그냥 가미날카의 끈적한 시선보다야 이런 여자들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은 아스가 가만히 있자 그의 머리카락이며 피부를 쓰다듬으면서 탄성을 질렀다. " 어쩜 이렇게 신비한 색깔이 다 있을까! 마치 달빛같네요. 한명 더 계시다는 걸음도 이렇게 아름다우신가요? " " 아잉, 피부가 너무 곱네요! 이 햇살에 잡티하나 없으실까. 사이란에게 끌려오셨다 들었는데, 저 무례한에게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으셨는지 몰라요." 사이란에게 제공된 몇명의 후궁들은 치근덕거리는 사이란의 손을 매섭게 뿌리치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며 웃음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가미날카도 가장 아름다운 후궁 두명을 옆구리에 차고 앉아 뭔지 모를 미소로 그런 사이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란은 후궁들이 퍼주는 포도주를 맘껏 마셨지만, 아스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 아스님을 위해 차린 연회입니다. 맘껏 드시지요. " " 시장하지 않다. " 가미날카의 말을 한번에 거절한 아스는 포도주를 퍼서 자신에게 내미는 요염한 미소의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약간 억지스럽다 싶을 정도로 그것을 아스에게 권하며 말했다. " 자아, 이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서 맛보시는 포도주는 감로주와 같을 거예요. 무척 시원하고 달면서 맛있답니다. 이것을 한모금 드시면 훨씬 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 왠지 모를 불쾌감에 아스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억지로 내렸다. 그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던 가미날카가, 곧 다시 한번 손뼉을 치자 아름답게 차린 무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대부분은 악기를 들고 연못 저 편에 앉았고, 그중 자그마한 체구의 여인 하나만이 서서 허리를 숙였다. " 자!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네 춤을 보여야 할때다. " 몽롱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사이란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 오호! 저 사람이 가미날카께서 그리 아끼신다는 바로 그 무희입니까? 하이포시스 폐하께서도 그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 " 그렇습니다. " " 어지간한 자가 아니면 구경도 못하게 하신다더니, 저희가 이리 대접받는 줄은 몰랐습니다. 아, 물론 여기있는 리아트리스님이야 그렇다 치지만, 한낱 일개 용병에 불과한 제가 말입니다. " " 그럴리가! 사이란님은 이 사막어디를 가도 환영받는 존재이실겝니다. 뭐니뭐니해도 삼족장의 머리를 벤 용맹무쌍한 사라센이 아닙니까! " 하하하하!!! 크게 웃던 사이란은 정말 우습다는 듯 어깨를 떨더니 낮으막히 말했다. " 흰 피부의 저에게 사라센이라니, 그것 참 이상한 말이군요. 저를 진작 사라센으로 여기셨다면, 2차 대륙전쟁에 저는 참전하지 못하도록 하신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땐 흰피부의 용병을 흰피부의 이기적인 자들과 성전하는데 보낼 수 없다지 않으셨습니까? " " 하하, 그건 당연히 사이란님의 안위를 걱정해서였습니다. 전쟁에서야 천하무적이시겠지만, 사이란님이 계시잖으면 빈 이 땅은 누가 지킬 것이며, 그런 전쟁 한복판에선 사이란님을 시기하는 다른 영주들의 칼침을 피하기가 어려우셨을겁니다. 저의 마음은 그런 것인데, 혹여나 무슨 오해를 하셨다면 섭섭하군요. " " 그러신가요? " " 내 사죄의 의미로라도 저 아이를 보여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자! 어서 노래해봐라! " 그 무희의 주변에 있던 다른 무희들이 그녀의 베일과 치렁치렁한 겉옷을 벗겼다. 안에 드러난 것은 수인족이었다. 그것도 아직 채 어린 소년이었으며, 두 눈이 질근 감겨 있었는데 그 두덩이 움푹 들어가 눈동자가 없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온 몸이 오색의 깃털로 뒤덮인 그 수인족이 입을 열자, 아스는 그때까지의 불쾌감도 있고 그를 바라보았다. 태양이 저물면 시작되네. 오아시스의, 아니 사막의. 금빛모래 흘러감을 알지못해 길 잃은 전사여, 물가에서 만났네 달빛이 빛어낸 여인을. 무희는 새가 지저귀는 듯 높고 가냘픈 목소리로 노래하며 팔을 벌려 춤추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팔에 가득 달린 길고 찬란한 깃털들이 파르르 떨리며 펼쳐지며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우아하게 움직이던 그가 순간 풀쩍 뛰어올라 포도주 연못 중앙의 섬위에 내려앉아 팔을 뻗자 사이란이 감탄의 소리를 삼키는 것이 들려왔다. 그것은 그 좁은 공간에서 살풋 뛰어올라 빙글빙글 돌며 계속 노래했다. 샛별은 차갑게 빛나는데 홀로 씻는 미인은 누구를 위한 여인일까. 사막의 신기루여 말해다오. 손을 내밀어도 덧없는 시간에 서럽구나. 춤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했고, 서글프면서도 아름다웠다. 이윽고 무희가 날개를 내려접고 앉자, 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 무희의 춤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저렇게 아름다운 존재가 가미날카같은 자에게 종속되어, 이 사막 한가운데 매여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 어떻습니까? 아껴둘만 하지 않습니까? " " 아름다운 춤이었소. 내 생애에서도 손꼽을만한 여흥입니다. " 아스는 사이란의 말에 여흥이라기 보다는 예술에 가깝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다. 새는 다시 한번 나풀 뛰어올라 아스의 옆에 내려앉았고, 어느새 후궁들이 다 물러가고 아스의 옆엔 그만이 남았다. 그의 춤에 깊은 감명과 안타까움을 함께 느낀 아스는 그가 곁에 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무희는 무척이나 우아한 손놀림으로 포도주를 떠서 아스에게 내밀었다. " 아, 나는 아무것도 먹고 싶지... " 그 무희는 아스의 거절에 빙긋 웃더니, 자신이 포도주를 한모금 마시더니 다시 한모금을 입에 머금고 부드럽게 아스에게로 손을 가져갔다. 아스는 그 손을 물리치고 싶었지만, 그가 팔을 벌릴때마다 흔들거리는 찬란한 오색 깃털들에 한눈을 팔고 말았다. 그가 춤추는 듯 움직이며 그 아름다운 깃털로 아스를 감싸고, 조용히 이마에 키스하자 반항할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은 그가 입술을 맞춰왔을때도 마찬가지였고, 부드러운 혀로 입술이 벌려지고 안으로 포도주가 쏟아져 들어와 놀라는 사이 그것을 삼키고 말았을때도 마찬가지였다. 꿀꺽, 하고 포도주가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부드럽게 혀를 감아오는 촉촉함과 가슴과 다리를 더듬는 농밀한 움직임에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 떨어져. " 아스가 정신을 차린건 검을 들이대는 사이란을 보고 놀라 무희가 입술을 뗐을 때였다. 방금전까지 후궁들에게 둘러싸여 거의 반라로 끈적한 유희를 즐기고 있던 그였는데, 그는 흐트러진 옷차림새 그대로임에도 불구하고 눈빛을 번쩍이며 무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희가 난처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가미날카가 황급히 말했다. " 왜 그러십니까? 원하신다면 밤에는 사이란님께 봉사토록 하겠습니다. " " 하! 그대의 무희가 기가막히게 춤을 잘춘다는 것과 꾀꼬리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 외에 들을 수 있었던 소문이 또 있지. 여자를 풀어 적을 끌어들이거나 혹은 죽이는건 그대의 대표적인 술수가 아니던가? 난 한번은 속지 두번은 속지 않는다. " 사이란의 냉랭한 눈동자가 가미날카를 향하자 그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버럭 소리쳤다. " 그 무슨 망발이오! 내 사막을 건너온 그대들을 이리 극진히 대접하건만!! " " 나를 유혹했던 그 후궁은 자네가 하이포시스 폐하께 바친 여자였지. 이 무희가 저 멋들어진 깃털로 몇이나 되는 자들을 넘어트렸는지는 몰라도, 나에겐 어림없는 일이다. 가미날카, 그대는 유혹에 좀 강해질 필요가 있어. 이 오아시스 그대의 하렘안에서에 무슨 퇴폐적인 짓을 하든 상관않겠네만, 저 아이는 안돼. 왜냐하면 나의 실수는 네 여자에게 넘어갔던 그 한번으로도 족하고, 아스가 더럽혀지는 것은 하이포시스는 물론 나도 바라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 " " 뭐, 뭐라고! " " 주인이 손대기 전의 성찬에 먼저 달려드는 개는 두드려맞기 십상이야. " 가미날카의 얼굴이 욹그락 붉그락 해지더니 그가 고함을 치자 내실 안으로 건장한 전사들이 무기를 들고 우르르 뛰어들어왔다. 후궁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무희가 다시 재빨리 포도주를 입에 머금고 아스의 입술을 벌리는 새 곧 불꽃튀기는 격투가 벌어졌다. 덤벼드는 자들을 한 놈 두 놈 쳐 내리고 포도주의 연못에 자빠트린 사이란의 검은 순식간에 자신의 검을 뽑아들던 가미날카의 목께로 향했다. 그리고 아스에게 달라붙어있던 무희를 노려보는 순간, 사이란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아스는 어느새 몸을 축 늘어트린채 무희의 품에 안겨있었고, 사이란도 갑작스런 어지러움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멀어지는 가미날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하하! 대단하군! 벌써 쓰러졌어야 하는데... 포도주에 약을 탄 것이 이제야 효과가 나타... ..." ...... 아스는 몸을 더듬는 느낌과 손 발의 부자유스러움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속이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아스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포도주에서 느껴지던 이상한 맛을 떠올리며, 그것이 약이었구나, 싶었다. 혹시나 이런 사태가 생길까봐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멍청하게 그 무희에게 홀리는 바람에 이런 꼴이... 희미하게 눈을 뜨자, 앞에서 사락 거리며 움직이던 그 휘황한 깃털들이 보였다. 아스가 눈을 뜨자 그 무희가 얼굴을 내보이며 싱긋이 웃어보였다. 아스는 자신이 침대 기둥에 팔다리가 묶여 있으며, 위에 그 무희가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희는 부드럽게 아스의 뺨과 목덜미에 키스하더니, 곧 은밀한 손동작으로 아스의 허리께와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너무 교묘해서 아스는 그 무희가 춤뿐만이 아니라 이런 쪽으로도 어떤 훈련같은 것을 받은, 전문적인 창녀와도 같은 그런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과는 별도로 몸은 들뜨기 시작했다. 자신의 가슴께에서 정신없이 헤메이는 무희의 입술때문에 나오려는 신음을 억누르며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 앉아있는 가미날카가 보였다. 그는 털이 무성하고 건장한 가슴팍을 드러내놓고, 아스를 애무하고 있는 무희를 보며 몽롱해진 얼굴로 흥분하고 있었다. 그는 아스의 경악어린 시선을 깨닫고는 씩 미소지었다. " 그 아이가 그렇게 매달리는 것은 처음보는군. 내가 숙적들을 회유하거나 거추장스러운 놈을 꼬여 숙청하려고 할때, 마지못해 밤의 기술을 쓴 적은 많았지만 저렇게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처음 보았어. 흐흐, 물론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할때도 말이야. " " ...! 추잡스러운 놈... 나를 어떻게 할 셈이지? " "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하이포시스에게로 갈 몸이니 내 취향대로 맘껏 다루진 못하겠지만, 손안에 굴러들어온 떡을 그냥 놓치는 것은 바보짓이지. 흥! 하이포시스 그놈이 지금은 이 사막의 주인이라지만, 원래 우리들은 각기 자유롭게 살아온 사라센들! 그놈의 무력에 모든 부족이 어쩔 수 없이 굴복해있기는 하지만, 2차 대륙전쟁으로 그놈의 힘도 많이 약해졌을 것이다. 너 하나쯤 내가 손댄다고 이 사막에서 가장 큰 부를 쥐고 있는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야. 그리고 너는... 그저 명목상의 걸음이 아니던가? 또 하나의 걸음이 버젓이 축복의 성에 자리하고 있는데, 절대자는 둘이 필요없지. " " ...!!! " 다리 사이를 혀로 훑기 시작하는 무희의 움직임에 소름이 확 돋았다. 쾌감보다는 공포가 전신을 지배해 몸이 떨려왔다. 팔다리를 아무리 버둥거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에린지움의 힘은 사막에 들어서면서 사라지다시피 했고, 사이란은... 아스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그가 웃으며 말했다. " 그 놈 역시 너와 크게 다르진 않지. 아, 다만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약에 취해 내 후궁들과 뒹굴고 있다고나... 약으로 잔뜩 흐리멍텅해진 머리로는 꼼짝도 할 수 없을게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게 좋을거다. 그 놈도 어차피 수도로 가면 하이포시스에게 너를 넘길 놈이다. 그는 나보다 더한 색마였으면 색마였지 덜하진 않거든. 하긴, 아름다운 것을 거부하는 자가 누가 있겠느냐! 그도 이곳에서 저 무희를 실컷 즐기고 갔지. " " 그만 둬... 그만두란 말이야! " " 흐흐... " 아스는 점점 더 거침없어 지는 무희의 움직임에 비명을 질렀다. 무희는 아스의 향기에 취해 자신을 잃고 정신없이 아스를 탐하고 있었다. 아스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풍겨나오는 미약과 같은 향기는 이미 방안에 가득 찼고, 축축한 소리와 함께 무희의 가느다란 신음소리와 아스의 비명소리가 뒤섞이자, 가미날카는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무희를 저리 던져버리고 옷을 벗었다. 번들거리는 구릿빛 육체가 드러나고, 아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이 향기... 이것이 트리옌들만이 낸다는 그...!! 아아! " 자신을 삼킬듯 벗은 자신의 몸위에서 움직이는 가미날카의 손길은 죽을만큼 혐오스러웠다. 아스는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스는 미친듯이 버둥거리며 온 몸의 힘을 끌어모았지만 소용없었다. " 하지마!! 아아악!!! 싫어!!!! " " 더 발버둥쳐봐라. 너를 채찍으로 만져주지 못하는게 아쉽지만 그렇게 흐느끼면 흐느낄수록 나는 즐겁다. 하하! " " 안돼... 안돼, 카멜!! 카멜!!! " 아스는 정신없이 카멜을 소리쳐 불렀다. 구해줘, 누가 날 구해줘. 싫어, 제발... 제발...카멜... 카멜, 카멜! 언제나 나를 구해줬잖아. " 안스륨------!!!!!!!!!! " 아스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 아아아아아악-!!!!!!!!!!!!!!!!!!! " 공기를 잡아찢는 듯한 절규에 축복의 성의 시녀들은 몸을 움츠렸다. 그녀들은 황급히 성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옮겨진 펜의 방으로 통하는 모든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고 몇겹이나 되는 휘장을 친 뒤 물러갔다. 한동안 잠잠했던 듯한 펜의 발작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이번따라 더욱 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름을 쳤다. 침대위에서 발버둥치는 그녀를 억누르고 있던 월은, 그녀의 팔에 시커멓게 번지는 검은 얼룩이 갑자기 어깨까지 침범하는 것을 보고 신음을 삼켰다. " 아악... 아아아악!!! " " 펜님... 정신차리십시오. 펜님! " " 아아아... 으흐흐... 아악!!! " 월은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에 펜을 꽉 끌어안았다. 펜은 발작하는 자신의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2차 대륙전쟁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이때에 에린지움의 걸음이 절대로 걸릴리도 없고 걸려서도 안될 병 때문에 수족이 썩어들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찌보면 전쟁의 흉보보다 더 끔찍한 이야기였다. 펜의 발작때 곁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월밖엔 없었고, 그는 홀로 고통스러워하는 펜을 그저 끌어안아 줄 수 밖엔 없었다. 이윽고 내지르던 비명이 조금 잦아들고, 몸을 움찔거리며 발작이 잦아들자 월은 그녀를 품에서 놓고 얼굴을 살폈다. 멍해진 눈으로 온 몸이 식은땀에 젖은 그녀는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다. 팔은 시커멓게 썩어 말라붙어 가고 있었고, 그렇게 만들도록 한 요인인 듯한 검은 얼룩은 이제 어깨에까지 번졌다. 이대로 가면 이것이 펜의 전신을 침범하는 것은 금방일 듯 했다. 월은, 펜의 팔을 잘라내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 ... 헉, ... 헉. 월... " " 예, 펜님. " 그녀의 눈에 서 눈물이 흘렀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는 일이 없던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강하던 그녀가... 월은 할말을 잃었다. 펜은 흐느끼면서 말했다. " 난... 난 무서워. 무서워. 죽을까봐 무서운게 아냐... 나 따위, 만들어진 인형같은 나따위는... 죽고나면 또 만들면 그만이겠지... 아니, 이젠 아리스타타의 환생체가 없으니까 그럴리도 없는걸까?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면서 에린지움의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른자가 지은 죄에 내 팔이 썩고 있어... 월...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난거지? 왜 다들 나를 만든거지? " " ... " " 라이트리스를... 죽여버리라고 하고 싶어. 아니, 차라리 찾아서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싶어. 하지만 난 그렇게도 할 수 없어. 리아트리스가 죽어버리면 에린지움의 걸음이 없으니까... 없으면 또 만들까? 가지를 잘라서, 나처럼. 그리고 또 카멜이 환생체를 데려올때까지 인형처럼 세워놓고, 갖은 고통을 줄 참일까? 왜 나야... 왜 나만... 나만 이런 고통을... 으흑... 으흐흑... ... ... " 어둠이 내려앉은 방안에 비명보다 더 고통스러운 울음소리가 울렸다. 흐느끼는 펜을 끌어안은 월의 녹색 눈동자가 위험스럽게 빛났다. 휘우우웅---------------- 결계가 있는 황무지의 밤은 칠흑같았다. 달빛마저도 구름에 가리우고, 먼지섞인 스산한 바람만이 거친 땅을 할퀴고 지나칠 뿐이었다. 오늘밤도 잠이 오질 않아 혼자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결계를 바라보며 서 있던 카멜은, 근심에 잠긴 얼굴이었다. ' 요즘들어 부쩍 결계의 기운이 약해졌다... 이건 그야말로 버티는 정도일까, 오늘밤은 더욱 더 흐리군. 게다가 아스님도 느껴지질 않아... ' 아스가 무스카리에게 잡혀 북쪽으로 사라진 것도 한참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지날때마다 카멜의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저 소강상태이기만 한 전쟁터를 놔두고 자신만 무작정 떠날수도 없는 터였고, 정령의 힘을 쓸 수 없는, 몸조차 가누기 힘들 사막으로 트리옌이 들어간다는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에, 카멜은 혹시나 아스의 소식이 닿을까 그것만을 초조하게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아스가 정확히 어디에 있다는 것만이라도 알면, 죽을각오를 하고서라도 아스를 데려올 마음이었다. 하지만 어렴풋한 느낌만이 느껴질 뿐. 아스의 소식은 아무것도 전해지질 않았고, 그나마 그 느낌만을 위안삼으며 아스가 무사히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순간부터, 아스가 느껴지질 않았다. 아리스타타님이 죽었을때도 끊어지지 않던 그것이, 사라진 것이다. 펜이 태어나면서 에린지움의 힘이 분할되어 감각이 흐려졌던 기억은 있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기척이 사라진 것은 처음이었다. 카멜은 견딜 수 없는 불안감으로 몇번이나 결계를 넘으려고 했었지만, 그때마다 자신과 아스를 보내느라 죽었던 그 드라세나의 어린 기사가 떠올라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결계마저도 불안정하니... 자신이 이곳을 비우면 용족들이 거침없이 들이닥칠 것이고, 드라세나에 있는 그 왕자의 목숨도 위험해질 것이다. 대역을 세우고 빠져나가는 방법도 생각을 해보았지만, 카멜은 적장중에 아주 우수한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보랏빛 머리카락에 새파란 눈동자를 한 그 용족은, 아주 교활하고 영민해서 어찌보면 소강상태인 이 전쟁을 끈질기게 대치상태로 이어가고 있었다. 카멜이 여기를 비울 수 없는 것도, 결계가 있음에도 군대를 물릴 수 없는 것도 어찌보면 다 그 놈때문이었다. 용족치고는 특이하게 빙계의 마법을 쓰는 그는 전쟁터에서도 두드러지는 활약을 했을 뿐만 아니라, 몇번이나 무스카리가 비운 그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그는 방심할만 하면 결계주변으로 위협적인 용족 몇을 보내 병사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몇번 시위하듯 마법으로 결계의 벽을 후려갈겨 우레와 같은 소리로 놀라게 만들었다. 한번은 대담하게 오리어의 군대 일부를 이끌고 결계를 넘어온 적 까지 있었다. 카멜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 대신에 여기를 메꿔줄 누군가가 아쉬웠다. 그는 월을 떠올렸지만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결코 펜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멜은 자신이 무스카리가 아니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리스타타의 묘목, 트리옌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로써의 명성이 이 전쟁터에서 중요하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카멜은 조여오는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아스, 아스님. 이젠 질투따위 상관없었다. 제발 무사히 있어주기만 하시면...!! 한번만 더 그를 품안에 안전히 안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바람이 한번 휘몰아친다 싶더니, 갑자기 결계에서 무슨 희미한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멜은 낯익은 그 형체를 알아보았다. " 월 저먼더. " 희뿌연 그것은 결계의 힘을 일부 빌려 온 환영인 듯 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흐려서인지 묘하게 침울해보였다. 그는 카멜에게 무릎을 꿇더니 둔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 트리옌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 카멜리아 버베나님을 월 저먼더가 뵙습니다. " " 그대는 무릎을 꿇어야할만한 사람이 아니오. 무슨 일인가? " 월은 잠시 망설였다. - 카멜님께 급히 전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다만 이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 ... 무슨 일인가가 생겼군. 요즘 부쩍 결계가 약화되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축복의 성에 무슨 일이 있는가? 아니면 아스님의 소식이라도? " - ... 펜님이, 죽어가시고 계십니다. 카멜은 순간 얼어붙었다. " 뭐? " - 펜님의 팔이 검게 변해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얼마전까진 팔꿈치까지였지만, 오늘 어깨부근까지 그 얼룩이 번져 펜님은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하고 계십니다. 지금 결계만도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만, 에린지움의 방에 들어가 치유도 바래볼 수 없는 몸으로 가혹한 짐을 짊어지고 계신겁니다. 카멜은 빠르게 이어지는 월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잠깐 머리를 내저어 월의 말을 끊고는, 펜이 죽어가고 있다는 그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비록 만들어져 있다지만 에린지움의 걸음이고, 에린지움과 연결되어 있는 몸이다. 그런 그녀가 어째서...?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건 에린지움 역시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며, 그것은 에린지움인 아스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모든 것을 살리는 에린지움이, 죽어가고 있다니!!! " 그게 무슨... " 카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리스타타님이 무스카리에게 잡혀갔을때 만큼이나 커다란 불안감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 펜님의 말씀으로는, 아스님이 죄를 짓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손을 피로 더럽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루라도 빨리 아스님을 찾지 않으면 자신은 돌아가실 것이고, 에린지움은 정화력을 잃고 뿌리부터 썩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 그, 말은... " - 우리는 에린지움의 심장을 뺏기지 않고도, 멸망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 - 지금 당신의 리아트리스가 그렇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 왔을때부터 재앙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인 무스카리에게 마음을 주었었고, 이제는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르며 우리가 갈수조차 없는 사막의 땅에 있습니다. 트리옌인 우리는 저땅에 들어갈 수 없지요. 하지만 만약 다시 그가 제 눈앞에 있는 날이 온다면, 저는 이번에야 말로 주저하지 않고 그를 죽을겁니다. 그것이 트리옌과, 펜님을 살리는 길이 될테니까요. 카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그의 머릿속엔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는 저질러서는 안될 죄... 살육을 한 아스에 대한 걱정과 그를 그렇게 만든 무스카리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 카멜님. 저는 펜님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할 겁니다. 그것이 설사 모든 것을 없애는 결과가 될지라도, 저는 펜님만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존재해왔고, 죽을겁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아스님을 되돌리십시오. ...펜 오키드님을 살려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월의 형체는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홀로 남아 빈 손을 떨고 있던 카멜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일이. 내가... 내가 수백년동안 그를 찾아 헤매었던 것은 모두가 쓸데없는 짓이었나? 그저 재앙이고, 불행인가? 카멜은 그가 무스카리와 함께하면서 찢어졌었던 그의 마음을 떠올렸다. 무스카리에게 배반당해 마음을 잃고 죽으려던 그를 생각핬고, 무스카리를 잊지 못하던 그를 안았던 밤을 떠올렸 고, 지금 이렇게 그를 잃어버린 자신의 고통을 알았다. 하지만... 하지만...!! 카멜은 자신의 품안에서 평화롭게 잠들었던 그의 얼굴을 알았다. 그의 미소와, 그에게 속삭이던 목소리와, 향기까지도...!!! 카멜은 아스가 그에게 준 고통과 환희를 동시에 깨닫고 몸을 떨었다. 그래.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한, 그 시간과 인내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속삭였다. 자신의 힘과 의지는 그것이라고, 오로지 믿고 모든 것을 주고 참고 인내하며 소중한 것을 지켜가는 자신만의 사랑이라고. 그것만이 그가 그로 있을 수 있으며, 그가 강할 수 있는 이유였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안드리움의 불길은 언제나 뜨겁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 중 가장 뜨거운 것이라고 하지만 무스카리는 그보다 더 뜨거운 것을 알고 있었다. 뜨겁다, 뜨겁다. 뭐든지 닿는 순간 녹여버릴 용암의 바다속에서도 무스카리는 그 열기보다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길이 더욱 더 뜨겁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암속에서 태어났고, 불의 정령수와 함께인 무스카리에게 물질적인 뜨거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그 타는 불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수십번 외쳤고 말했지만 생겨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되려 모든 것을 파괴해버릴 뿐. 무스카리는 눈동자를 멀어버리게 만들 듯 벌건 용암 속에서 과거를 보고 있었다. 아리스타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독이 되었고 비수가 되었었다. 그녀를 납치해 데려와, 이 마음속의 불덩이를 어찌하지 못해 밤마다 그녀를 범했다. 아리스타타는 무섭게 저항했지만 불의 종속으로 힘을 옮아매고 얄팍한 드레스를 찢고 그녀안에 자신을 묻었다. 정신없이 욕망을 풀고 난 후에 남은 것은 수치와 분노로 얼룩진 증오의 얼굴. 그 눈동자의 새파란 빛이 그를 얼마나 두렵게 만들었었는지 그녀는 평생 알지 못했다.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꿈도 꾸지 못했다. 사랑인지도 몰랐다. 자신은 그녀에게 적이었고, 죽여버리고 싶을만큼 증오스러운 대상일 뿐이었다. 숲의 저주,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었고 불길이 아무리 숲을 탐해봤자 남는 것은 잿더미 뿐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멜의 군대가 코앞까지 들이닥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때, 어느샌가 자신이 묶어둔 불의 종속을 끊은 아리스타타를 발견했었던 그때에. 사실 어리석었었다. 숲 한가운데의 여름궁전에 머물면서 아리스타타가 언제까지나 그 구속에 묶여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것이. 무스카리는 이대로라면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녀의 기억속의 자신은 그저 그녀를 범하고 약탈한 더러운 짐승만으로 남게 된다는 두려움에 무의식중에 억눌러왔던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 너를 사랑한다, 아리스타타... 그녀는 고통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었다. 그 푸름을 일순 잃게 만들만큼 어두운 빛. 그리고 그녀는, 무스카리가 그녀를 억지로 범하지 않게 되면서 주었던 검을 빼내어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차라리 그녀가 자신을 죽여줬으면 좋겠다는 우스운 마음으로 줬던 그 무기는, 자신의 심장이 아닌 그녀의 가슴을 갈랐다. 아직도 무서울만큼 또렷히 기억이 났다. 그녀의 피는 투명했다. 그래서 한없이 흘러도 그녀의 몸을 더럽히지 못했다. 그렇기에 가슴에 꽃힌 비수도, 무너지는 그녀의 모습도 거짓말 같았다. 아리스타타의 몸을 안고 절규하는 카멜이, 분노로 눈동자를 불태우며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큰 부상을 입고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 그리고. - 사랑한다! 사랑한다 아리스타타! 너를 사랑해!!! 자신의 그 말에 아스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약한 내부를 억지로 헤집고 들어가, 또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된 자신에게 아리스타타처럼 깔리며, 비명을 질렀다. - 사랑해. 북극의 설원에서 내뱉었던 그 말에, 아스는 얼음보다 더 차가운 눈으로 말했었다. - 난 당신을 증오해. 그래.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 나의 사랑은 그래. 한없이 어둡고, 더러우며, 짐승같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욕망에 충실하며, 끝없는 소유욕과 얕은 인내심으로 모든 것을 약탈한다. 카멜의 말이 맞는지도 몰랐다. 자신의 사랑은 사랑이 아닌지도 몰랐다. 어떻게 이렇게 추잡스러운 감정이 사랑이란 말인가! 무스카리는 실소했다. 하지만 또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지? 그저 집착과, 가지지 못한것에 대한 열망인가? 차라리 죽여 없애야만 하는 것인가? 카멜, 너는 내가 아스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했지만, 내가 과연 지금, 손안에 쥔 것이 무엇인가? 아리스타타의 죽음? 아스의 실망? 눈물? 증오? 분노? 슬픔? 무스카리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술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카멜이나 아스와는 다른, 선명한 붉은빛의 피. 그리고 그들의 향기와는 다른, 선명한 피비린내. 레지의 음험하고, 때로는 두려운 그의 서슬퍼런 눈동자와, 목소리가 떠올랐다. -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죽이지 그랬어. 아리스타타가 죽었을때에, 너는 내심 안심하지 않았던가? 나는 가지지 못했어도, 적어도 저 카멜에게는 돌아가지 않겠구나- 하고. 수백년 그녀를 찾아 헤매었던건 그녀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다시 카멜곁에 그녀가 서 있는 꼴 을 볼 수 없어서가 아니었어? 너는 그런 존재니까. 다른 자들이 낚아채기 전에, 아니 벌써 낚아채였잖아? 카멜의 것인 그. 어떻게 보겠어? 가서 죽여. 가서 죽여. 차라리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의 죽음이라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아리스타타의 마지막, 아스의 시체라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없는 영혼, 껍데기만을 불어넣어서라도, 그저 그냥 자신의 옆에 앉혀놓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 내것이 아니라도 자신은 그를 사랑했다. 무스카리의 마음을 태우고 몸을 태우고 영혼을 태우는 이 불길은, 사랑이었다. 사랑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정의 내리지 못하는 자신이 괴로웠다. 차라리 이것이 정말로 집착이나 단순한 열망이었으면 좋겠다. 그랬다면 이렇게까지나 괴롭진 않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서, 아직 자신의 영역에 있는 그를 붙잡아 올 수 있었다. 꼼짝도 못하게 이번에야 말로 완벽한 불의 종속을 씌워 안드리움의 성채, 자신의 성에 평생 가둬둘수도 있었다. 안드리움에서라면, 에린지움의 힘을 지우고 거짓 영혼을 씌워 세뇌시켜 노예로도 만들 수 있었다. 차라리 카멜의 옆에서 미소짓는것 보다, 그의 품에 안기는 것 보다야 그게 나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단지 이 순간 떠오르는 것은 먼 옛날, 그 어떤 때보다 두렵고, 간절하고, 견딜 수 없는 울림으로 뱉어내었던 자신의 고백에 자신의 키스를 받아주고 자신을 안아주며 낮으막히 내뱉었던 그의 단 한마디... - 안스륨, 고마워요... ... 내 사랑이 너에게 고마울 수 있을까? 아무것도 네게 주지 못한, 아무것도 갖지 못한. 그 음험하고 시커먼 마음이, 네게 고마울 수 있었을까? 맙소사. 무스카리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이 안드리움의 용암속에서, 뻔히 손아귀에 쥘 수 있는 아스를 그냥 놔두고 있는 것은 그때 했던 아스의 그 단 한마디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단 한마디가,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는, 자신안의 그 무언가를 지켜주고 있으며, 그것이 마법처럼 자신을 옭아매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고 있으며, 차라리 이대로 자신이 사라져 버리는게, 차라리 모든 것을 잊고 죽어버리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을. 그를 놓아줘야만 하는 것일까, 여태까지 죽어도 생각치 않았던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을. 쿠구구구구... 무스카리 주변의 용암들이 들끓었다. 불의 정령수가 분노하는 소리였다. 그의 그렁그렁한 목소리가 용암속에 파동을 만들어 멀리 파도를 만들고 있었다. - 숲의 저주,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이여, 나와의 약속을 지켜라. 그 전엔 너의 죽음따위, 내가 용납하지 못한다. 너는 이미 내게 메인 몸. 넌 죽어도 죽지 못할 것이다. 무스카리는 일렁이는 불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 알고있다. " 자신의 사랑은, 독이다. 아리스타타를 죽였다고 생각한 그 독은, 이제 자신마저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무스카리에겐 그것이 차라리 기쁨이었다. 아스는 숲속에 있었다. 아주 깊고 깊은, 그리고 조용한 숲. 숲은 울창했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뻗은 나무들은 끝간데 없었고 숲속엔 아무런 인적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은 언제나 그렇듯이, 방황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아서. 처음엔 조심스럽던 걸음이, 이젠 점점 더 거침없이 지고 있었다. 아스는 이제 거의 숲 속을 달리고 있었다. 멀리 누군가가 숲 사이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스는 정신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외쳤다. - 안스륨!!! 검은 머리카락의 그는, 걸음을 문득 멈추고, 천천히 아스를 돌아보았다. 돌아본 사람은 이미 안스륨이 아니었다. 그는 불꽃보다 더 붉은 머리카락과, 빛나는 금빛 눈동자를 한 용족의 수장, 무스카리였다. 아스는 떨리는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 무스카리... 그는 돌아서며 냉정하게 말했다. - 나는 안스륨이 아니다. 너는 나를 사랑한게 아니야. 너는 안스륨을 사랑한 것이었어. - 아니야, 난...!!! 갑자기 목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았다. 입을 열때마다 뜨거운 불꽃이 자신의 목을 찢어발기는 듯 했다. 아스가 고통에 목을 움켜잡고 신음하고 있자니, 눈앞의 무스카리는 어느새 카멜로 변해있었다. 그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 그렇습니까. 그를 사랑하시는군요. 모든 것을 아스님께 준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 -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에겐 네가 필요해 카멜!! - 정말 이기적이시군요. 저를 사랑하지도 않으시면서, 단지 필요하니까...? 카멜은 냉소를 지었다. 그는 곧 제피란더스로 변했다. 제피는 물기어린 눈으로 증오스럽다는 듯 아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가 외쳤다. -네가 스티를 죽였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우리 앞에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도, 네가 이 세상에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도!!! 너 따위가 무슨 에린지움의 걸음이고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냐! 이 살인자!!! 어느새 눈을 크게 뜨니, 펜이 자신에게 시커멓게 변한 팔을 내밀면서 비명을 질렀다. - 살인마!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 저지르지 말아야 할 피의 업보를 썼어. 에린지움은 썩어가고 나는 죽어가! 다 너 때문이다 아스! 네가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 가지지 말아야 할 감정을 가졌기 때문이야!!! - 그만, 그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아아악!!! 아스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없는 추락이었다. 끝도 없었다. 아스는 자신이 떨어지면서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카락이, 손이, 발이, 눈동자가, 감정이, 마음이, 영혼이 엷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바닥에 다다랐고, 아스는 그곳에 부딪혔다.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육체는 선명한 고통의 감각을 전해주었다. 아픔에 몸이 굽혀지고 침이 흘러나왔다. 기척에 신음을 억누르고 고개를 들어보니, 끝도 없는 지평선에서 일어나는 푸른 포말과, 하늘로 뻗어있는 에린지움의 흰 그림자를 등지고 한 사람이 보였다. 짧은 은빛 머리카락을 하고 청록색 눈동자를 한 또다른 자신. 위대한 '카'가 입을 열었다. - 어리석은 자, '아스'여. 네가 없으면 나도 존재할 수 없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건가!!! 무엇으로부터? 아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헉!!! 언제나의 악몽처럼, 아스는 꿈에서 깬 후에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몸을 사로 잡는 괴리감. 아스는 흔들리는 몸과, 온 몸을 흐르는 뜨거운 땀방울과, 내리쬐는 살인적인 햇살을 느꼈다. 눈안으로 들어온 시야에,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의 모래가 보였다. 그리고 새하얗게 눈부신 사막의 하늘도. 멍하니 자신이 말위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손이 묶였으며 발도 말의 배밑으로 매인 것을 느꼈다. 등에 기대인 사람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사이란이 자신 대신 고삐를 잡고 말을 몰고 있었다. 사이란은 머리에 쓴 두건으로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 일을 크게 치뤘더군. 너를 지키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지금 명목상 가미날카 영주를 살해한 자를 수도로 호송하는 중이다. " " ... 살해? " " ... ... " 아스의 멍한 눈동자를 보며 사이란은 혀를 찼다. " 그래. 네가 가미날카 영주를 죽였잖아. " 그것도 난도질해서. 사이란은 그 방의 풍경을 다시 한번 떠올리고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여태까지 무수한 사람의 시체와 살인현정과 살육을 봐왔고 해왔지만, 그처럼 처참한 시체는 처음이었다. 시체는 제 조각을 찾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무슨 퍼즐을 맞추는 일이 될 것이었다. 무희의 시체에서 빠진 깃털과 피가 온 방에 칠갑이 되어 있고, 거기에서 피를 뒤집어쓴채 멍하게 있던 아스의 모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그 아름다움과, 잔혹함. " 내가...? " 아스는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되뇌였다. 아스는 그 영주의 방에서 무희에게 농락당한 일과 그가 자신에서 덤비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카멜을 몸서리치게 외쳐 불렀었다는 것도 기억해냈다. 하지만 다음 일은 누가 먹물로 새카맣게 칠한 것 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무스카리를 그렇게 떠나오고 숲에 이르러 베스를 만날때까지, 혼자 숲을 헤매던 때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카'에게 사로잡혀 기억이 흐린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살인을. 에린지움의 힘으로. 순간 꿈에서, 시커멓게 썩고 있는 팔을 내밀며 절규하던 펜이 떠올랐다. 에린지움은 썩어가고 나는 죽어가!! 다 너 때문이다 아스!!! 아스는 전쟁터에서 물려들던 그 피비린내와 살육의 현장에서 그 피와 쇠의 내음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자신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 피와 살인은 독이라고 외치던 펜의 음성도 기억할 수 있었다. 육식조차 할 수 없는 트리옌이다. 피조차 붉지 않은 트리옌이다. 모든 것을 정화하고 치유하며 생명을 키우는 숲의 신성수, 에린지움이... ... 살인을 했다. 귀에서 이명이 우웅-... 하고 울렸다. 머리로 떨어지는 햇살이 뇌를 후벼파는 것 같았다. 온 몸의 피가 증발하고 근육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오한에 이가 따닥따닥 부딪히고, 발기발기 찢긴 시체들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인형처럼 토막내고, 걸레처럼 나무에 걸어놓고, 천조각처럼 찢어발겼다. 칼과, 정령과, 들끓는 분노로 에린지움의 힘을 끌어내서. -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건가!! 무엇으로부터? 모든 것으로부터...난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어. 모든, 것으로부터. 오리어국의 수도, 하이포시스왕의 나라는 사막의 보석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아름다웠다. 그것은 그야말로 사막 한가운데 솟아난 오아시스의 성이었는데, 멀리서도 보이는 에메랄드빛 성은 신기루처럼 아지랑이 위로 떠올라 있었다. 수도 가까이로 다가가자 멀리서 온 사막의 거상 카라반 무리들이 떼를 지어 걸음하고 있었다. 살인을 했다는 충격에, 사막의 뜨거운 기운에 거의 정신을 놓고 있었던 아스는, 차라리 그대로 미쳐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오아시스가 가까워져 옴에 따라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조금씩 기운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사이란에게 안긴채로 무거운 머리를 떨구고 있던 아스가 고개를 들자, 사이란이 말했다. " 이제야 제정신이 들었나? 다 왔다. 하이포시스왕의 나라 페나카이트다. " 아직까지 흐린 눈안에 에메랄드빛과 황금빛의 돔형 지붕을 한 성과 주변으로 빽빽히 자란 나무들과 그 모든 것을 아우른 흰 벽돌의 성벽이 보였다. 입구로 다가가자 경비병이 다가왔다. 그는 아스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신분을 요구했다. 사이란은 그의 쌍검에 붙은 커다란 장식술과 뭔가가 새겨진 보석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 나는 하이포시스 폐하의 용병 뉴 사이란이다.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숲의 주인을 모셔왔다 이르라. " 경비병들이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 사이란이 돌아왔다!!! 폐하께 전갈을 넣어라!!! " 성벽 안으로 들어가자, 아스의 회청은빛 머리카락과 청록색 눈동자를 보고 구리빛 피부의 무수한 사막 민족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에게 꽃혔다. 천천히 말을 몰아 마을을 통과하면서, 아스에게 대해 수근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멀리로까지 퍼져나가, 이윽고 성문 앞에 이르렀을땐 아스를 보기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대로가 북새통이 되었을 지경이었다. 성문앞엔 까무잡잡한 피부에 터번을 쓴 검은 눈을 한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사이란을 보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 " 오셨습니까 사이란님. 그리고 페나카이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리아트리스님. 전갈이 도착하질 않아, 이렇게 갑작스레 오실 줄 몰랐습니다. 게다가..." " 가미날카의 땅에 들렀었지만 그 놈이 죽는 바람에 거긴 난리통거다. 그래서 아마 전갈을 날리지 못했겠지. 나도 그렇고 특히 이놈은 지쳐있으니 얼른 씻기고 오아시스와 가장 가까운 방에 데려가. " " 폐하께선 두 분을 바로 모셔오라고... " " 이녀석은 지금 폐하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대륙 최고의 미인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내보일 순 없지 않아? 폐하는 내가 찾아뵐테니 내가 시키는대로 해. 아, 참. 그리고. 이 녀석이 가미날카를 죽였다. 정당한 결투가 아니었고 영주를 죽였으니 폐하의 심판을 받을때까지 자유롭게 놓아주면 안된다. 구속을 풀지 마라. " " ...예. " 정중히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남자의 눈에는 불만이 스쳐지나갔다. 아스는 사이란과 헤어져 남자가 이끄는 대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엔 녹색과 푸른색과 흰색의 타일들로 아주 시원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무척 조용했다. 한참 복도와 휘장들을 지나쳐 어떤 방에 안내된 아스는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의 손에 이끌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녀들은 무슨 분부를 받았는지 가미날카의 시녀들처럼 시끄럽게 떠들기는 커녕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난생 처음 접하는 트리옌이라는 존재에 감탄과 호기심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차림새는 보통 흰 가운에 흰 허리띠를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손에 묶였던 밧줄은 가느다랗지만 쇠로 만들어진 쇠사슬로 바뀌었다. 밧줄에 실킨 손목이 시큰거리며 아파왔기에 차라리 둔탁하고 차가운 쇠고랑의 느낌이 나았다. 시녀들이 물러가고 아까의 남자가 들어와 갖은 과일을 올려둔 큰 바구니를 갖다주더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 여기서 쉬고 계십시오. 곧 하이포시스 폐하께서 부르실 겁니다. " 그 남자도 사라지고, 아스는 허기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과일을 몇개 집어먹었다. 설탕에 절인 무슨 과일조림을 몇개나 주워먹고 나자 입안도 달달해지고 배가 불러와 졸음이 쏟아졌다. 아스는 무의식의 상태로 멍하니 있다가, 잠이 들었다. 하이포시스는 무척 체구가 장대하고, 시미터(곡도)를 다루는데에는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의 전사였다. 그는 원래 사막에서 손꼽히도록 큰 부족의 어린 부족장이었는데, 자신의 형제와 사촌을 모두 숙청하고 열여섯의 나이로 부족장이 된 남자였다. 그는 자신이 어리다고 자신의 영토를 침범하던 다른 부족과의 전쟁을 시작으로, 그 전쟁에서 이겨 사막에서 가장 큰 부족을 이루게 되면서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사이란과는 그때 그 전쟁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사막을 횡단하던 중 군대를 덮쳐든 아룡을 그가 혼자 죽이는 것을 보고 용병으로 사들였던 것이다. 사실 욕심대로라면 자신의 부하로 만들고 싶었지만, 사이란이 그것을 단칼로 거절했기 때문에 용병으로써라도 데려올 수 밖에 없었다. - 내 가문의 피에는 모셔야 할 주인이 정해져 있습니다. - 그러면 너는 왜 그 주인을 모시지 않고 방랑하고 있는가? - 모셔야 할 주인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결국 너는 아직 주인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군. 내가 너의 주인으로 모자람이 있다는 말인가? -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제 목숨을 바쳐야 할 상대를 그리 쉽게 고르고 싶지도 않고, 제 몸속에 흐르는 핏줄만 아니라면 주인을 거부하고 싶습니다. 그때문에 여태껏 모셔야할 자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방랑하는 겁니다. 하이포시스왕의 장군들은 모두 그자가 이방인이며, 첩자일지도 모르고 용병이기에 언젠가 왕을 배신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하이포시스는 사이란이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를 곁에 두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주고 자신옆에 붙들어 둘 수 있을텐데... 사이란은 마치 마술같은 능력으로 자신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냈다. 용맹한 전사이자 영웅인 삼족장의 목을 모조리 베어 왔고, 이번엔 그 용족 무스카리가 납치해갔다는 아리스타타의 환생체 리아트리스마저 데려왔다. 하이포시스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채로 자신앞에 무릎꿇은 사이란을 보고 말했다. " 설마 설마 했는데 어떻게 그 무스카리에게서 데려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군. 자네는 마법사인가? " " 죄송합니다만 아무리 저라도 용족의 수장 무스카리를 이길 재주는 없습니다. 리아트리스를 발견한건 우연이었습니다. 안드리움이나 용족의 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막에 어떤 용병 집단과 함께 있더군요. " " 그래? 운도 실력이지. 그런데 어째서 무스카리는 리아트리스를 찾지 않는걸까? " "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는 길에 어떤 기색도 느끼지 못했고, 그가 여기있다는 것을 모를 무스카리도 아닌듯 하니 크게 상관않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됩니다. " " 흠. 그렇군. 허나 그냥 이렇게 내버려둘꺼면, 왜 데려갔는지 알 수가 없군. 뭐, 아무튼. 가미날카가 죽었다고? " " 예. 예의 그 취미생활을 리아트리스와 즐기려다가... 어찌되었건 결투도 아니고 영주가 죽었기 때문에 폐하의 심판이 필요하기에 구속시켜왔습니다. " 하이포시스는 피식 웃었다. " 내가 무슨 판결을 내릴 것인지 뻔히 알면서 자네도 참 능청스럽군. 가미날카 그놈이 야금야금 왕국의 재산을 이자 핑계를 대며 까먹고 있는데 진력이 나던 참이었어. 한동안 그놈이 자랑하는 오아시스와 하렘은 상속 때문에 피보라가 불겠지. 누가 죽여주지 않으면 내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죽일판이었는데, 잘됐어. 어차피 정당방위가 아닌가? 게다가 나라의 국빈을 죄인취급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굉장한 미인이던가? " " 예. 그 가미날카나 하이포시스 폐하께 가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덮쳐들만큼. " " 후후, 정말 흥미롭구나. 아름다운데다가, 에린지움이라는 절대의 힘을 지닌 환생체 트리옌이라... 바로 만나보고 싶었는데 어째서 데려오지 않은거지? " " 트리옌에게 사막은 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폐하를 뵐만한 상태가 못되는 것 같아서... " " 뭐, 좋다. 날 만날 상태가 못 된다면 내가 만나러 가지. " 하이포시스는 몸을 일으켰다. 하이포시스 왕의 시종 만파는 손수 아스의 주변을 돌봐주고 막 폐하께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복도 저 끝에서 이방인 용병과 함께 오는 하이포시스를 보고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 폐하! " " 오, 만파. 리아트리스는 저기 있는가? " " 아, 예. 그렇습니다만, 어찌 손수 예까지... 부르시면 되셨을텐데. " " 그럼 또 치장하니 뭐니 하면서 오래 기다려야 하니 번거롭지 않나. 거긴가? " " 잠깐 제가 알려... " " 됐다. " 하이포시스는 만류하는 만파를 뒤로 하고 사이란과 함께 아스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투명한 휘장이 늘어진 방은 수영장이 바로 옆에 붙어있는 내궁에서 손꼽히도록 쾌적한 방이었다. 하이포시스는 방안에서 감도는 묘하게 달콤한 향기에 코를 킁킁거리다가, 과일냄새인가 싶어 탁자위에 올려져 있던 과일 하나를 집어 냄새를 맡다가, 침대위에 엎어져 있는 아스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과연이라면 과연이랄까.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이리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이포시스왕은 미녀 소년 소녀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하렘엔 어여쁜 미동들이 줄을 지어 있었지만 아스는 그들 중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명확한 청년의 모습인데, 그냥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한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이다. 피로에 깊히 잠든 아스의 모습은 무척 평안해 보였다. " 하하. 가미날카를 찢어죽일정도로 잔인해 보이진 않는데. " " 에린지움의 힘 자체가 잔인하지 않습니다. " " 그래? 네가 보기엔 어떤가? " " ... 위험하지요. " " 위험하기로 손꼽히는건 자네가 아니던가? 삼족장의 목을 벤 수상한 이방인 용병이니, 언제 내 목을 그을 줄 알고? " " 농담이 아닙니다. " 사이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미날카의 그 끔찍했던 시신은 생각만하면 몸서리가 쳐왔다. 문제는 그 파바다 속에서도 혼자 아름다웠던 아스였다. 한없이 아름답게 벼려진 검날같은 존재라, 무심고 손을 댔다가는 베이기 십상일 것이다. 몸에서는 한없이 달콤한 향기를 내뿜으며 사람을 유혹하지만 덮쳐들었다가는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된다. 자신도 몇번이나 사막을 건너오며, 힘없이 축 늘어진 아스에게 충동을 느꼈는지 모른다. 반송장상태로 괴로워하던 아스였기에 덮쳐도 위험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녀석을 안는 취미는 없었기에 참았지만 그가 가진 독을 모르는 자에게는 치명적일 것이다. " 자아, 이제 이 아이를 어찌할까? 무엇과 바꿀까? 아니면 도로 무스카리에게 바칠까? 아니면 이대로 좀 두고 감상할까? " " 되도록이면 빨리 다른 곳으로 보내는게 낫습니다. 가까이 두면 분란만 생길겁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가둬두십시오. " " 무엇도 신경쓰고 걱정하던 것 없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의심스럽군. 응? 제일 위험한건 자네가 아닌가? 분란만 생길거라는 건, 스스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그에게 반했나? 그를 주인으로 섬길건가? " " ... 반한다고 주인으로 섬깁니까? 반했다면 주인으로 섬기면 안되지요. " " 아무튼 좋다. 손 안에 들어온 귀한 보물이니 잘 써먹어야지. 만파! " " 예. "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들어왔다. " 내궁의 기본적인 시종과 시녀를 제외하고 내궁을 모두 비워라. 물론 입이 무겁고 믿을만한 자들로 채워야 한다. 이 아이의 시중은 네가 직접 들도록 하고, 구속을 풀어주고 내궁은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도록 두되 밖으로 내보내진 마라. 하렘의 후궁들도 당분간은 부르지 않을 생각이니 그리 알도록 하고, 위험하다니 사이란 네가 지키도록 해라. 여기에 머무르면서 말이다. " " ... 예. " 하이포시스는 돌아 나가며 가볍게 사이란의 입술에 입맞췄다. " 저 아이에게 반하지 말거라. 내가 말했었지? 나에게도 주지 않은 마음을 남에게 주지 말라고. 내가 질투에 미쳐 에린지움의 걸음이건 아리스타타의 환생체건 또 죽여버리지 않도록 말이다. " " ... 예. " 하이포시스는 그대로 나가버리고, 사이란은 하이포시스가 맞춘 입술을 손으로 문질러 닦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빌어먹을 호색한이... "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다. 그 후궁이 가미날카의 첩자인줄 뻔히 알면서 자신에게 접근하도록 내버려뒀던 그때처럼. 하이포시스는 자신이 그를 주인으로 모시기를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자신을 모시하는 말은 다시 꺼낸적이 없었지만,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부와 명예와 여자들을 안겼고 자신이 마음을 주는 자들은 다 죽였다. 떠나려면 언제든지 떠날수는 있었다. 하지만 여길 떠나면 또 어딜 간단 말인가? 자신이 모셔야 할 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것은 드라세나 왕가의 수호기사 쥬니퍼 가문의 것. 비록 반쪽자리의 피라도 자신은 그 가문의 사람이었다. 단지 쥬니퍼 가문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는 사람과 결혼했고, 결국 자신의 주인을 따라 원치 않는 이 사막의 땅에까지 와야했던 어머니. 자신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 사막의 사라센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내키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곳에서 있고 싶었고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이곳에선 이방인이었고,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넘치는 힘과 능력이 있었지만 어디에 쓸지, 누구를 위해 써야할지는 몰랐다. 그래, 이대로도 나쁘진 않다고. 자신의 숙명따위 외면하며 어디에서나 이방인인채 적당히 발걸치고 적당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이란은 그가 여기서 머문다는 말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는 만파에게 먼지투성이의 망토를 던지고 욕탕으로 걸어들어갔다. 레지는 안드리움 성채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방을 형해 나선형의 무수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 계단은 폴리모프를 풀고 날아서 올라가기엔 너무 좁았고, 생각을 정리하느라 레지는 계단을 쓰지 않고 두 다리로 그것을 차근 차근 하나씩 밟아 올라가고 있었다. 불길과 용암이 들끓는 바깥과는 달리 안드리움 성채의 안은 소름끼칠 정도로 조용하고 차가웠다. 레지는 난간도 없는 좁고 허물어져 가는 계단을 오르며 새파란 눈을 번뜩였다. 무스카리 알리움. 숲의 저주이고, 용족들의 수장이며,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이자... 감정이 없는 잔인한 무생물에 지나지 않던 자. 에리카의 자식들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도전하는 무수한 자들을 물리치고 용족들 중 가장 강한 자가 되었던 그였지만... 레지는 잘 알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그 어떤 감정도 느낌도 가진것 없이 그저 에리카가 부리는 하나의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무스카리가 용족들의 수장이 된 것도 힘을 증명해 보이라는 에리카의 그 단 한마디 명령 때문이었지 자의가 아니었다. 당연한 듯 자신의 파괴력을 무심히 쓰던 그것은 레지, 그의 아내를 죽일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시신앞에서 울부짖는 레지를 보며 무스카리는 감정없는 눈동자로 말했었다. " 약한 자의 죽음은 예정된 것이다. 뭘 그리 슬퍼하지? " " ... 네가... 네가 그녀를-!!! 죽이겠어! 죽여버리겠다 무스카리-!!!! " 레지는 자신이 이끌어 낼 수 있는 모든 기세를 이끌어내어 무섭도록 무스카리에게 덤벼들었다. 레지역시 무스카리와 마찬가지로 에리카의 자식이었고, 용족으로써는 드물게 빙하속에서 태어난 그의 힘은 무스카리와는 상극이었기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부딪혔다. 하지만 무스카리는 그의 공격을 막기만 할 뿐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 왜! 왜!!! 차라리 나를 죽여! 나를 죽여다오! " " 그럴 수 없다. 너는 에리카 로벨리아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며 사생아이니까. " " 으아아아아-!!! " 결국 스스로 힘을 다 소진하고 지쳐 쓰러진 레지앞에서, 무스카리는 비웃음을 흘렸다. " 사랑했나 그녀를? " " ... 그래. " " 그렇다면 사랑이란건 참으로 우습고 아무런 쓸모 없는 하찮은 것이군. " 사실 용족 사이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레지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빙원에서의 둘만의 나날. 밤하늘에 오로라가 울고 은하수가 쏟아지며 빙해가 달빛에 반짝이면 그녀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그 광경들이 마법이 되어 내렸다. 에리카를 원망했었다. 사생아인 자신을 만든 것이 싫었다. 자신같은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을 경멸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신에겐 기적이었다. " 그것은 아무런 힘도 없는 허망한 꿈에 불과해. 그녀를 사랑했다면서 복수도 하지 못하고 죽지도 못하는 네가 말하는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의미없는 것이다. " 무스카리는 그렇게 그녀를 사랑했던 레지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었다. 레지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무스카리는 자신을 죽이지도 않고, 사생아이면서 사랑을 말하는 자신에게 차가운 조소를 보낼 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레지는 되려 그를 비웃을 수 있었다. 아리스타타라는 존재에 마음을 뺏기고 그것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무엇인지도 모른채 헤매이는 무스카리는 레지에게 쾌감을 불러 일으켰다. 네가 그토록이나 무시하고 경멸하며 의미없는 것이라던 감정에 사로잡혀 괴로워 하는 것을 봐라! 넌 평생 사랑의 삐둘어진 면만을 볼 뿐, 사랑을 비웃고 경멸하던 네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네가 가진 것은 오로지 집착과 소유욕과 욕망과 질투 뿐이야! 파괴할 줄 밖에 모르는 너는 네 손안에 쥔 그녀도 파괴할거다. 그리고 너 스스로도 같이 파괴시키겠지. 망가져, 망가져 버려! 네가 우습게 여기던 감정에 사로잡혀 부서져 버리라고!!! 결국 그는 아리스타타를 자결하도록 만들었다. 그녀가 죽고도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카멜의 뒤꽁무니를 쫓아 삼백년이라는 시간동안 미쳐 헤매었다. 영원히, 영원히 그렇게 사랑의 고통속에서 헤매이리라 생각했었는데... 아스가 나타난 것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안스륨이라는 거짓 모습으로 벌이는 촌극은 우습기까지 했다. 무스카리, 그가 제대로 된 사랑을, 제대로 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에겐 지난 아스의 생에서 저지른 결코 씻을 수 없는 죄가 있었고, 그가 안스륨이라는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되려 즐거웠다. 일순간의 행복에 전전긍긍하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무스카리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이윽고 그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을때 그가 당할 고통을 상상하며, 자신은 무스카리에게 해를 입힐 수 없었지만 아스를 조금 건드리는 것만으로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는 것은 비웃음을 안겨주었다. 그의 모든 것을 붙잡고 뒤흔드는 아스라는 존재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엉킬대로 엉켜, 결코 풀어낼 수 없는 둘의 인연에 한없이 즐거웠다. 결국은, 아스를 손에 넣지 못하고 자신을 삼키는 어두운 감정들에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이번에야 말로 스스로의 손으로 그를 죽여버리고, 그 어떤 희망도 일말의 기대도 갖지 못한 채 홀로 고독과 죄악감속에 몸부림치다 스스로를 해할거라 예감했다. - ... 내 것이 아니라도, 나는 그가 살아있길 원해. - ... 그를... 그 꼬맹이를... 사랑하는 거냐 무스카리? 네가? - 그래. 사랑해. " - 그는 지금 달아나고 있어. 네가 싫어서 알몸으로 뛰어서 도망치고 있단 말이야! 그래도 그를 사랑하는거냐? 카멜의 이름을 부르며 너를 거부하는 그를? 카멜에게 안겨서 숱한 밤을 보냈을 그를? 너를 증오하는 그를? 네가 사정없이 짓밟았던 그를!!!! - 그래. 사랑해. " 레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돼. 안된다 무스카리. 그 감정은 네게 허락된게 아니야. 네가 가지는 감정은 그런게 아니잖아? 네가 가질 수 있는건 오로지 추하고 더러운 것 뿐이야. 그런건 내가 용납하지 못해. 너는 사랑을 알 가치가 없어! 너는 사랑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자다!!! 이윽고 레지는 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늘어진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방과 방만한 크기로 밖으로 트인 테라스가 보였다. 화산의 뜨거운 공기가 이글거리며 솟구치는 테라스의 끝에서 흩날리는 짤막한 적금발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레지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 어머니. " " ... 레제다. " 에리카 로벨리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우성치는 열기에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금빛으로 번들거리며 빛났다. 살아 일렁이는 듯한 그녀의 안광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레지는 고개를 숙였다. " 어쩐 일이지? 네가 여기까지 오다니. " "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 " 무스카리에 대한 것이냐? " " 예. " " 말해봐라. " " 어머니의 바램을... 제가 이뤄드리겠습니다. " " 무스카리도 하지 못한 일이다. " " ...그는 아스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하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니 제가 하겠습니다. " " 그리고 무얼 바라는 거냐? " " ... 제가 아스를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확-!!! 일렁이는 불덩이 하나가 테라스 뒤로 솟구쳤다 사라졌다. 열기가 테라스 쪽으로 훅 밀려들어오며 둘의 머리카락을 감아 올렸다. " 심장을 뺏으면 그애는 당연히 죽는다. 하지만 네가 그를 죽이면 무스카리가 너를 죽일 것이다. 그 말은 죽고 싶다는 거냐? " " ...... " " 원하는대로 해라. 사랑하는 아들아. " 새파란 레지의 눈앞에서 보랏빛의 머리카락이 열기에 휘말려 어지럽게 흔들거렸다. 레지는 몸을 숙였다. 그의 몸이 파랗게 빛나더니 곧 거대해졌고, 불길한 보랏빛의 거대한 몸체가 드러났다. 홰를 침에 따라 테라스가 부서질 듯 진동했고 일으키는 바람에 날뛰는 열기들이 뱀처럼 쉿쉿 거렸지만 에리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레제다는 날아올랐고, 자신의 몸을 집어 삼킬듯 새빨간 입을 낼름 거리는 화산의 열기 위로 떠올랐다. 레제다는 빠른 속도로 비상했다. 화산 위로 솟구쳐 오르자 차가운 공기와 뼈를 드러낸 달빛이 레지의 비늘을 훑었다. 이것이 나의 복수다 무스카리. 사랑의 환희, 사랑의 기쁨, 사랑의 달콤함, 사랑의 기적,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결코 네게 가르쳐 주지 않겠다. 네가 허락된 건, 오로지 고통으로만 기억될 사랑뿐이다. - 살인마!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 저지르지 말아야 할 피의 업보를 썼어. 에린지움은 썩어가고 나는 죽어가! 다 너 때문이다 아스! 네가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써 가지지 말아야 할 감정을 가졌기 때문이야!!! 시커멓게 썩어들어가는 팔, 그것은 점점 펜의 온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그것에 먹혀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아스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이건 악몽이야. 악몽. 어서 깨어나, 깨어나란 말이야!!!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지만 꿈은 끝나지 않았다. 꿈속인데도 달리는게 너무 힘이 들어서 아스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무릎을 짚은 손이 끈적거려서 문득 손을 들어보니 온통 끈적한 피투성이였다. 아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조각나 맞추기 힘들 정도로 난도질 된 시체들. 온통 피 칠갑인 방안. 자신은 다시 그 안에 서 있었다. 수인족인 무희의 몸에서 빠진 깃털들이 여기저기 피와 뒤섞여 처덕처덕 붙어있었다. 아스는 나오려는 비명과 솟구치는 공포심을 억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정신차려. 갑자기 주변의 어둠이 물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사방이 환했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선명히 가 닿은 에린지움의 흰 그림자가 보였다. 지평선 너머 파랗게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도 보였고 은빛 가지를 흔드는 신성한 에린지움이 보였다. 아스는 에린지움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끼며 나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흰 줄기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이 닿자 뿌리쪽에서 부터 펜을 집어삼켰던 시커먼 얼룩이 꾸물꾸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스는 입을 틀어막으며 황급히 물러났고, 그것이 줄기를, 가지를 침식하기 시작하자 회청은빛 나뭇잎들이 파들파들 말라가며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 광경이 너무나 공포스러워서, 아스는 꿈이라는 사실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 안돼! 안돼!!!! 안돼-!!!! 에린지움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그 고귀한 나무가 천천히 검은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아스의 몸도 흩어지고 있었다. 아스는 모래처럼 떨어져 나가 바람결에 사라지는 자신의 손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 헉!! 낯선 천장. 그 광경을 비집고 낯익은 얼굴이 다가들었다. " 괜찮아? 악몽을 꾸는 것 같길래 깨웠는데... " 검푸른 머리카락에 파란 눈동자. 스타티스와 꼭 닮은 얼굴. 사이란이었다. 그는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뚝뚝 떨어트리며 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는 갑작스런 현실과의 괴리감에 숨도 못 쉬고 있다가, 사이란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뺨에 떨어져 차가운 감촉을 전해주자 그제야 맘을 놓았다. 아스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땀투성이였다. " ... 응, 그래. 악몽이었어... 악몽... 다행이야... 사실일리가 없지... " 사이란은 탁자위에 놓여있던 시원한 과일음료를 아스에게 내밀었다. 아스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열대과일의 향긋한 내음이 목을 시원하게 해주고 미각을 즐겁게 만들었다. 아스는 잔을 사이란에게 도로 내밀며, 다시 떠오르는 꿈의 기억에 몸을 떨었다. 그 검은 얼룩, 펜의 몸을 집어삼키고 에린지움과 자신마저도 없애버리던... 너무나 생생했다. 자신의 손에 칠갑이 되어있던 핏덩이들. 그게 정말 꿈일까...? 하지만 마음속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의 꿈이 평범한 꿈이 아니라는 것은 예전부터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꿈속에서 이 세상을 처음 접했으며 카와 만났다... 하지만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에린지움이 사라지는 일따위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리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린지움의 걸음이자 아리스타타의 환생체, 청록색 눈을 가진 유일한 후계자인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 결코 저질러서는 안될 죄... 불길한 느낌이 온 몸을 옥죄어 들었다. 만약 그 꿈이 사실이라면? 에린지움과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절규하던 펜의 모습이 진짜라면? 아스는 사이란을 쳐다보았다. 사이란은 머리를 말리며 과일을 하나 까먹고 있었다.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넋놓고 있을때가 아니다. 마음속에 밀려오는 불안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가서 눈으로 직접 펜과 에린지움이 무사하기를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은 돌아가야 한다. 축복의 성으로. 그러나 여기는 하이포시스 왕의 성이었다. 자신이 돌아가고 싶다고 쾌히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아니었다. 옆에 저 사이란이 지키고 있는 이상 탈출도 힘들테고... 차라리 협상이 빨리 이루어져 무난하게 남쪽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손쉽게 이루어질리 없을 뿐더러 만약 펜이 정말로 죽어가고 있는거라면, 혹시라도 그 사실을 이쪽이 알게 된다면 자신은 돌아갈 수 없다... 다시 무스카리에게 붙잡히는 것은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조급함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방 주변을 살폈다. 가미날카의 집과 비슷한 구조로 방 한쪽은 완전히 트여 휘장만 걷으면 바로 분수와 연못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인공적으로 조경했다기엔 엄청 커 보이는 연못 저 편으로는 커다란 궁이 있었고 옆으로 정원수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태만해 보이는 여자들은 그림자도 없고 연못은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어쩌다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시종이었다. 아스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사이란이 그 옆에 다가들더니 말했다. " 여기는 왕이 사사로이 머무는 내실이야. 하렘의 여자들은 물론이고 신하고 시종들이고 아무도 없지. 지금은 너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최소한 필요한 아주 충실한 시녀와 시종들을 빼고는 텅 비어있어.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니만큼 웬만한 자들쯤이야 맨손으로도 쓰러트릴 수 있는 실력들이야. 저 건너편 보이는 궁전이 왕의 침실이다. 그리고 여기가 이 나라에서 가장 녹음이 우거지고 물이 풍요로운 곳이지. 여길 벗어나면 나무는 커녕 풀 한포기 물 한방울 찾아보기가 힘들거다. 궁을 잇는 모든 길과 광장은 깍은 돌과 석상들로 꾸며있지 나무로 꾸며져 있진 않거든. 내가 이렇게까지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를 잘 알겠지? " 아스는 사이란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그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 너는 이 궁에서 한발짝이라도 나가면 사막에서처럼 무척 괴로워질거다. 그리고 너를 지키는건 현재 너만이 아냐. 내 두명의 암부가 조용히 없는 듯 숨어서 24시간 너를 감시하고 있다. 도망칠 생각은 버리라는 이야기야. 언제까지 여기에 있게 될런지도 모르는데, 하이포시스가 너에게 호의를 베풀어줄때 얌전히 있는게 좋아. 그는 호색한이긴 하지만 가미날카처럼 바보는 아니거든... 그리고 가미날카보다도 더 잔인하지. 너를 잡느라고 쫓아다니고 싶지 않으니까 제발 조용히 있어줘. " " 앞으로 난 어떻게 되는거지? " " 글쎄? 그건 하이포시스 왕 맘이지만, 내 생각엔 여기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을거야, 공주님. " 아스는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추는 사이란의 턱을 퍽, 하고 올려쳤다. 끅-! 혀 깨물었어-!라며 데굴데굴 구르는 사이란을 무시하고 아스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연못을 바라보았다. 여기를 빠져나가는건 어떻게든 한다고 해도, 사막에 나가서 무사히 결계를 넘는 것은 트리옌인 자신으로써는 불가능하다... 사막에서도 견딜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 휘우웅------ 휘우웅---------- 부는 바람에 따라 결계가 사라질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가 다시 밝혀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그것은 바람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카멜은 그것을 바라보며 근심어린 얼굴로 로단테와, 자신과 비슷한 키에 머리카락을 한 트리옌을 바라보며 당부했다. " 꼭 아스님을 데리고 금방 돌아올테니, 그때까지 결계와, 제가 계속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잘 지켜주십시오. " 로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 다시 계획을 고려할 마음은 없으시겠지요? 이 일은 너무 무모합니다. 지금이라도 카멜님과 함께 북쪽으로 올라갈 사람들을 조직하면... " " 이 일은 극비인지라 수인족이나 인간과는 함께 할 수 없으며 눈에 띄는 트리옌을 데리고 가는 것은 정화석을 다 낭비하는 일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스님은 무스카리와 떨어져 혼자 사막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무스카리가 없는 이상 위험은 적을 것이니 저 혼자 가는 것이 좋습니다. 내게는 물의 정령수의 수호가 있습니다. 걱정 하지 마십시오. " " 예. 어쩔 수 없지요. 부디 사막에서 돌아온 사냥꾼들에게서 들은 그 정보가 사실이길 빌겠습니다. 그럼, 무사히 다녀오시길. " " 예. 그리고 펜님... 에 관해서 절대로 그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주십시오. " " 이미 취해놓았으니 걱정 마십시오. " 카멜은 로단테에게서 부터 정화석을 받아들였다. 아스를 그 더러운 공기가 꽉 찬 이세계에 데리러 갔을때에도 카멜은 이것이 있었기에 태연할 수 있었다. 과거 아리스타타가 대륙전쟁을 하면서 트리옌들을 사막에서도 보호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었던 물건 중 하나였다. 이제는 다섯개밖에 남지 않았지만 카멜은 북쪽으로 아스를 데리러 가기 위해 그것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에린지움의 힘이 누적된 그것을 받아 목에 걸고, 카멜은 결계목들 중 하나에게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결계목을 통해 펜의 괴로운 신음소리가 전해져 왔다. " 펜 오키드님.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꼭 아스님을 데려와 펜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구하겠습니다. " - 카멜리아... 트리옌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 ... 그대가... 나를 걱정해주다니... 기쁘군요... 펜은 고통중에서도 권위있는 모습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의 안타까운 모습에 카멜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아스님을 해하려 한, 에린지움의 지킴이일 뿐인 그녀였지만 누구보다 아리스타타의 빈자리를 잘 메꿔준 것은 그녀였다. 한없이 강인하기만 하던 그녀의 신음섞인 목소리는 아직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일 뿐인 펜을 상기시켜 주었기에, 그녀의 이런 모습이 아스 때문이기에 카멜의 괴로움은 더 했다. - 부디... 무사히. " 펜 오키드님께서도 꼭 무사하십시오. " 그렇지 않다면 전 저를 용서할 수 없을겁니다. 카멜은 결계목에서 손을 떼고 서서히 결계를 통과했다. 평소라면 트리옌이 통과하는데에도 약간의 저항감이 있을테지만 약해질대로 약해진터라 아무런 느낌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카멜은 자신이 결계를 통과할 때 또다른 누군가가 결계를 통과해 나갔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결계안보다 훨씬 더 거칠어지고 메마른 황무지의 바람을 받으며, 카멜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카멜이 짙은 먼지바람과 함께 사라지자, 바람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옅은 빛의 갈색 머리카락에 선연히 빛나는 녹색 눈동자. 허리에 찬 기다란 장검은 트리옌의 나이트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월이었다. 그는 카멜이 사라져 간 쪽을 바라보다가, 품에서 펜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몰래 빼내온 정화석을 꺼냈다. 그는 그것을 꾹 쥐었다가 목에 걸었다. 카멜이 단신으로 떠난 것은 다행이었다. 월은 조심스럽게 카멜의 뒤를 밟아, 아스를 확인하여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아직 펜님의 몸을 잠식한 검은 것은 어깨까지다. 아스가 한번만 더 살인을 저질러 펜님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드느니 차라리 죽일 심산이었다. 아스가 오면 펜을 구해줄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구해주는 것보다는 더이상 악화시키지 않도록 만드는게 더 급했다. 에린지움의 걸음이 살인을 저지른다는 사실자체가 아스의 어딘가가 이상하다는 증거이다.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이면 무엇할까, 그 누구보다 에린지움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은 바로 그인데!!! 아스에게 펜을 살릴 방도가 없다면, 더이상의 죄는 짓지 못하도록 죽이겠다. 그렇게 되면 에린지움의 심장도 하나로 줄고, 에린지움의 걸음도 유일자가 되고 저 무스카리의 집착도 사라져 전쟁도 끝날 것이다. 아스는 존재 자체가 해악이다. 월이 막 먼지바람 속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참이었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갑자기 자신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결계 밖인지라 아마 마법이리라. 월은 반사적으로 검을 꺼내들고 휘둘렀다. 이곳에서 자신의 적이 아닌 자는 아무도 없다. 상대는 깜짝 놀라더니만 뒤로 훌쩍 물러나, 만류하는 제스처를 해 보이더니 천천히 두건을 내렸다. 보랏빛의 어지럽도록 화려한 머리카락. 섬뜩하리만치 새파랗게 빛나는 유리알같은 눈동자. 입가에 걸쳐진 비웃음과도 같은 미소. 자신도 익히 아는 자였다. 이번 2차 대륙전쟁중 무스카리의 공석을 메꾸고 있는 용족. 그 역시 골드 드래곤 에리카의 자식이라는 자... " 너는-! " " ... 내 소개를 하자면 레제다 튜베로즈가 되겠군. 반가워요. 이제 그쪽 소개를 들을 수 있을까? " " ... 내게 무슨 볼일이지? 난 카멜이 아니다. " 월이 카멜과 같이 결계를 통과한건 자신이 결계를 빠져나간다는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기도 했지만, 이렇게 용족이 트리옌이 넘어온 것을 느끼고 짓쳐든다면 자신보다 강하며 얼굴도 잘 알려진 카멜쪽으로 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선명한 금발머리였기 때문에 트리옌이라는 것이 확연히 표시가 났지만 자신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은 수인족 에게서 존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 자기 소개를 직접 하기 싫다면 내가 할까? 에린지움의 지킴이 펜 오키드의 묘목이자 트리옌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 월 저먼더씨. " 월은 상대에게서 살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을 죽일 심산이었다면 벌써 죽였겠지. 하지만 월은 펜의 상태에 대해 무언가를 눈치채고 자신에게서 그것에 대한 정보를 들으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자 바싹 긴장이 되었다. 아스는 여기 없고, 펜은 누워있다. 용족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 습격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레제다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결계를 바라보았다. " 결계가 무척 약해졌군. 요즘따라 상태가 불안정해. 이것이 펜 오키드의 상태와 무관하지 않겠지? 당신이 결계를 넘어온 것도... 카멜이 결계를 넘은 것은 귀여운 꼬맹이를 구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도 모르게 이쪽으로 넘어온 당신은 무척 수상하군. " 월은 검을 세웠다. 마법을 쓰는 이 용족을 쓰러트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자신은 글로리 나이트이다. 질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 후후. 그 꼬맹이가 가는 길엔 시체가 즐비하지. 아, 안심해.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오로지 나 뿐이니까. 용족들은 시들해진 전쟁에 별 관심이 없고, 모두 무스카리가 그 아이를 잡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선 신경을 쓰고 있지 않지. 그가 놓아주지 않는 이상 아스가 혼자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만약 도망을 갔다손 치더라도 그리되면 무스카리가 그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을테니 모를 수 없을거야. 하지만 무스카리는 아스를 놓아주었고 그는 열심히 살인을 저지르며 사막으로 들어갔다- 이 말씀. 그에 비례해 결계의 힘은 약해지고, 카멜과 당신이 허둥지둥 결계를 넘어왔으니 사실을 유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내 말이 틀렸나? " 레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이 자는 틀림없이 펜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려 들겠지. 카멜이 그렇듯, 묘목이란 원래 그런 존재이니까... "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 " 거래를 하자. " " 무슨...? 내가 너와 같은 용족과 거래 따위를 하리라 생각하는 건가? " " 펜 오키드를 살리려면 할 수 밖에 없을걸? " 월은 흠칫 몸을 굳혔다. 화사한 얼굴을 하고 말하는 레지는 악마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먼지바람은 지옥의 불길인듯 불길하게 두 사람을 흔들었고, 레지는 조용하지만 사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 에린지움이 있는 곳. " " ...?! " " 에린지움이 있는 곳을 내게 알려준다면, 아스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 월의 눈동자가 커졌다. 레지는 계속 말을 이었다. " 설마, 자신이 정말 아스를 죽일 수 있다고 믿었던 건 아니었겠지...? " 그렇게 생각했었다. 자신과 카멜은 정화석이 있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아스에겐 정화석이 없다. 아무리 그가 에린지움의 걸음이라 해도 물 한방울 풀 한포기 없는 불볕사막에서 태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아스보다는 카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지키는 싸움보다는 죽이는 싸움이 쉽다. 월은 펜을 살릴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숨따위는 아깝지 않았기 때문에 카멜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아무 힘없는 아스를 죽일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레지의 말을 듣고 나자, 예전 아스가 처음 이 세상으로 와서, 펜의 명령으로 그를 죽이려 했을때 그가 발휘했던 에린지움의 권능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의 주변에서 사계가 피어나고 햇빛이 미쳐 날뛰었으며 모든 것이 환희에 떨었었다. 그 권위서린 목소리에 자신은 칼을 겨누기는 커녕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조차 못했다. 거기에 서 있었던 건 틀림없이 그 힘없는 꼬마가 아닌 아리스타타였었다... ... " 트리옌이 에린지움의 걸음을 죽인다는건 있기 힘든 일이지. 하지만 아스는 저대로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둘만큼 안전한 자가 아니야. 그의 몸엔 에린지움의 심장이 있고 에린지움의 힘이 깃들어져 있어. 그런 주제에 살인을 저지르며 펜 오키드와 결계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응당 자신의 죄값을 받아야 하겠지. 언제까지나 카멜의 품에서 응석만 부리기엔 그가 지닌 책임과 죄가 너무나 크지 않나...? 그가 살아있는 한, 펜은 언제까지나 에린지움의 걸음이 아닌 지킴이일 뿐이고, 언제든 그에 의해 심장도 에린지움도 뺏기고 죽을 수 있는 모조품일 뿐. 그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될 존재야. " 월은 그의 말에 자신이 동의하고 있으며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재빨리 물었다. " 그래서, 그가 죽어서 너희가 얻는 이익이 뭐지? 아스가 죽어도 펜님이 건재하시다면 예전과 다를바가 없지 않나? 착각하지 마라. 나는 아스를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펜님을 살리고 싶은 것이다! " " ... 아스, 그의 존재는 우리 용족에게도 독이 되기 때문이지. 그가 이 세계로 돌아와, 한동안 무스카리의 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당신은 펜의 측근이니까. " 월은 무스카리가 다치는 모습을 보고 울던 아스를, 노예 상단에 잡혀가면서도 그를 찾던 아스를 떠올렸다. 그래. 자신은 알고 있었다. 아스와 무스카리가 아직 서로를 모르던 때라 해도 같이 있을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될 웃음으로 함께 했었다는 것을. 어쩌면 그들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을. " 무스카리, 용족의 수장이자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저주여야만 할 그가 에린지움의 걸음을 사랑하다니,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겠어? 이번만 해도 아스를 사로잡아 심장을 빼앗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와 둘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전쟁이고 뭐고 다 내팽겨쳤지. 나의 어머니이자 모든 용족의 어머니인 에리카 로벨리아께서는 이 모든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신다. 심장을 뺏아와야 할 아들이 되려 그것에 빠져 자신을 거역하려 드니. 에리카께서는 심장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스카리에게서 그를 영원히 포기시키는, 즉 죽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스의 죽음은, 당신과 나의 공통적인 이익이 되는 셈이지. " " ... 그것과 에린지움이 어디있는지 아는 것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지? 너도, 나도 그저 아스를 죽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에린지움은 별 상관이 없어. " " 있어. 왜냐하면 에린지움과 그는 연결되어 있으니까... 에린지움이 그에게 힘을 빌려주고 펜을 외면하는 한 아스는 에린지움의 힘에 보호를 받는 숲의 절대자다. 그가 살인을 하는데 마구 썼던 힘이 뭔지 아나? 그가 무슨 힘이 있어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그건 바로 에린지움 때문이지. 모든 것을 지키고 보호해야할 에린지움이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다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에린지움이 어디있는지를 알면 그 힘을 차단하여 일순간이나마 아스를 무력한 상태로 만들 수 있다. 당신이 에린지움이 어딨는지를 가르쳐주면 우리가 아스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테니 그 정보를 교환하자는 것이지. 그리고 에린지움의 힘을 차단하는건 우리 용족의 마법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야. 트리옌의 정령의 힘은 에린지움에게 묻혀버리니까. " " ... 하지만 에린지움이 어디있는지를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에게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 " 심장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도 아니고, 에린지움에겐 이 세상 어느것보다 강대한 힘이 있다. 그게 단지 어딨는지만을 안다고 우리가 무슨 방법을 쓸 수 있을까? " " 만약 에린지움의 힘을 차단해 아스를 죽이는 방법을 에린지움이 어디있음으로써 가능하게 된다면 그것은 펜님에게도 유효하게 되는 일이다. 난 거기에 속아넘어갈만큼 어리석지 않아. " " ... 후후... 내가 한가지 맞춰보지. " 레지는 눈을 가늘게뜨고 월을 바라보았다. " 펜 오키드는, 에린지움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어. 맞지? " " ...!! " " 역시 쉽게 알 수있는 사실이야. 아스가 저지른 죄의 댓가가 그녀에게 먼저 돌아간다는 것은, 그녀가 가장 약하다는 이야기이고, 에린지움의 힘을 이용해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는건 아스보다 에린지움의 힘을 쓸 수 없다는 이야기지. 아스는 청록색 눈동자를 가진 아리스타타의 환생체. 에린지움이 사랑하는건 결국 그 아이지 펜 오키드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에린지움이 어디있는지 모르고 그에 접근할 수 없다면 아스가 죽어도 펜이 그 힘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고, 에린지움에 가까이 갈 수 있다 하더라도 아스가 살아있으면 그것은 결코 펜 오키드를 돌아보지 않을거야. 이제 이해가 가나? 이 거래조건이 성립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 월은 트리옌내부의, 그것도 아주 극소수밖에는 모르는 것들을 이 용족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가 끓었다. 그것은 다 용족의 땅에서 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아스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이 다 그 때문이다. 거래조건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자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한, 아스가 계속 일을 저지르고 다니도록 그들의 땅에 붙들어 두면 그만이다. 펜과 에린지움은 자멸할거고, 결국 아스조차 자신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그에게 무스카리는 미쳐있고, 그는 아직 용족의 땅에 있다... ... 이미 이 모든 것을 레지가 알고 있는 한 함정이라 해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월은 생각했다. 설사 저 용족의 술수에 놀아난다 하더라도, 일단, 일단 아스가 죽든 에린지움의 방에 들어갈 수 있게 되든, 어떤 방법을 거쳐서라도 펜 오키드님이 에린지움의 힘을 완전히 가지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이 대륙에서 그녀를 어찌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펜님은 아스처럼 어리석지 않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펜은 그 모든 것을 헤치고 당당히 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에린지움의 걸음, 청록색 눈동자의 펜 오키드로써...! " 하지만 이 거래조건엔 한가지 문제점이 있다. " " 무슨... ?" " 에린지움은 축복의 성 에린지움의 방에 있다. 그사실을 모르고서 에린지움이 어디있는지 묻는 것은 아닐텐데...? " " 하하, 나를 바보로 아시는군. 에린지움이 진짜 나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것이 인공적인 어떤 구조물안에 있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군. 내 예상으로 그 에린지움의 방이라는 것은 어떤 차원일거야. 에린지움이 있는 곳으로 이어지는. " " ... " " 나는 거기가 어디인지를 알고 싶은 거야. 어디인지만 알게 된다면 그 문을 통하지 않고서도 에린지움으로 갈 수 있을거다. " " 하지만 그것이 다른 차원에 있는 거라면 우리는 도달할 수 없다. 차원이란 것은 시공과 공간이 뒤섞인 곳. 카멜님이 아스를 찾아 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아리스타타의 묘목이었기에 그와 이어져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에린지움이 어디있는지 알 수 있는 자는 아스밖에 없다. " " 펜도 미약하게나마 이어져 있지 " " 그렇게 해서 알 수 있었을 것 같았으면 벌써...!! " " 하지만 내 생각에 에린지움은 틀림없이 이 차원에 있다." " ... 어째서? " " 그것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좀 더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어쨌거나 에린지움이 이 차원의, 즉 이 대륙의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봐.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을거야. " " ... ... " " 그럼, 계약은 성립이겠지? 약속의 징표로, 우리 '용족'은 아스를 붙잡고 있지 않겠다. 아스를 붙잡아 두는 것만으로 그대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아스가 결계 안으로 돌아가는 때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기로 하지. " " 좋아. " "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 " 한차례 거세게 부는 먼지 바람과 함께 레지의 모습은 사라졌다. 월은 아직까지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 한 그 용족의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사악한 미소를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잘하는 짓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펜님이라면, 펜님이 진정 에린지움의 걸음이 되신다면 강인한 분이니 이 모든 것을 이겨낼 것이다. 만약 무슨 과오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짊어지겠다. 그것이 목숨값을 바라는 일일지라도... ... 사막궁전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무료했다. 하이포시스 왕도 아스를 찾지 않았고, 아스 주변엔 시중을 드는 두명의 시녀와 만파라는 시종과 자신을 감시하는 사이란만 머물렀다. 시녀들은 아스의 어떤 질문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만파만이 아스에게 짤막한 대꾸를 할 뿐이었다. 제대로 된 대화상대라고는 사이란 뿐이었는데, 사이란은 눈만떴다 하면 심심하다느니, 뭐라느니 하며 끈적끈적하게 아스에게 치근덕거렸다. 아스는 정말 이 놈을 한번 먼지나게 흠씬 두들겨 팼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날마다 생각했지만 사이란의 실력은 녹록한 것이 아니어서 장난삼아 몇대는 맞아주었지만 감정이 실린 주먹질엔 순순히 맞아주지도 않았다. 사이란이 낮잠을 퍼잘때면 아스는 조심스럽게 내실을 돌아다니며 탈출경로를 모색했다. 경비도 철통같았고 시녀나 시종들이 짝을 지어 순찰을 돌았기 때문에 그들 눈에 띄이지 않고 몸을 밖으로 빼낼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하지만 그것도 정령을 사용하면 문제가 없었고, 일단 내실을 빠져나간 뒤가 문제라서 아스는 어떻게 하면 사막에서도 견딜 수 있게 할 것인가 한참을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아스는 탁자위에 놓인 과일을 먹으려다가 과일 한쪽이 짓무른 것을 보고 무의식중에 에린지움의 힘으로 그것을 다시 싱싱하게 만들었다. 그것을 아무 생각없이 깨물어 먹다가, 아스는 그런 식으로 에린지움의 힘을 어디 다른데다가 저장해 놓을 수 있다면, 사막에서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퍼뜩 떠올렸다. 사막에서 자신이 맥을 못추는 이유는 에린지움의 힘이 눈꼽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생명력이 고갈 된 땅- 불볕사막 때문이다. 자신의 내부에서 힘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기 힘들다면, 외부에 저장시켰다가 끌어오면 되지 않을까? 아스는 몇 번 여러가지 물체들을 가지고 실험을 해봤다. 과일이나 식물같은 살아있는 것은 에린지움의 힘을 자신들이 써버리기 때문에, 저장하는데는 별 쓸모가 없었다. 무생물엔 힘이 잘 깃들지 않았고, 돌이나 흙같은 곳은 힘이 흘러가버리고 응축되지가 않았다. 여러가지로 고민하다가 발견해낸 것이 보석이었다. 보석은 구성성분이 순수하고 결합이 단단해서, 에린지움의 힘을 응축하는데 용이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스에겐 보석이 없었다. 아스에게 제공되는 것은 일상적인 의복과 식사 뿐, 보석이나 그외 장신구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스는 가미날카의 저택에서 보석 하나만 들고 나올 걸 후회했다. 결국 궁전에 여기저기 장식된 숱한 보석들 중 하나를 고를 수 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상아장식품의 조그만 보석을 하나 뺐다가, 그것을 관리하는 한 시녀가 큰 치도곤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것은 관두기로 했다. 결국, 아스가 눈독을 들인 것은 사이란의 귀걸이였다. 사이란의 오른쪽 귀엔 큼지막한 사파이어가 달린 기다란 귀고리가 있었는데, 아스는 도망치는 날까지 그것을 사이란에게 맡겨두었다가 빼내갈 작정이었다. 사이란은 실제로 꽤나 귀해보이는 사파이어 귀걸이였음에도 불구하면 귀찮으면 빼두거나 씻거나 할땐 아무데나 던져두거나 했기 때문이었다. 아스는 사이란의 몸에서 그것이 떨어져 있을때나 그가 잠들었을때 몰래몰래 조금씩 에린지움의 힘을 그 안에다 흘려넣었다. 한번은 그것을 가지고 힘을 흘려넣다가 사이란에게 들킨적이 있었는데, 사이란은 그것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 너, 그게 마음에 드는거냐? " " ...어? ...아. 그래. 무척 크고 아름다운 사파이어야. " 아스는 황급히 둘러대었다. 그리고 마치 진짜 그런 것인 것 마냥 뚫어져라 사파이어를 응시했다. 사파이어는 사실로도 아름다웠다. 에린지움의 힘이 깃들자 더욱 더 반짝거리며 광채를 더 했는데, 특이한 모양으로 컷팅이 된 그 새파란 빛은 잃어버린 누군가의 눈빛을 떠올리게 했다. " ... 내가 알던 사람중에 이런 푸른 눈동자를 한 사람이 있었어. 아주 아름답고 강하면서 신념과 의지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 " 죽어버렸지. 사이란은 아스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들어 귀에 차면서 말을 이었다. " 나도 이런 눈동자를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도 아주 아름답고 강하고 신념과 의지가 있는 여자였지만, 그녀의 신념과 의지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상처입혔지. 이건 무적의 그녀를 상처입힐 수 있는 단 두가지 중 하나였어. 난 그 기념으로 이것을 들고 다니는거고. 사실 무겁기 짝이 없어 별로 하고 싶진 않지만. 버리긴 아깝더라고. " " ... " 아스는 사이란을 올려다 보았다. " 당신도 그 사파이어와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어. 아주 새파랗고 깊은 빛... " 그리고 스타티스와 아주 닮았어. 시간이 자닐수록 스티의 얼굴이 흐려지면서, 그와 똑같은 얼굴이 늘상 앞에 보이다 보니 스티의 얼굴과 사이란의 얼굴이 똑같은 것 처럼 느껴졌다. 그보다 좀 더 부드럽고 미소년다운 이미지였다는 것은 기억이 나지만, 정말로 다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았다. 아스는 방해되는 사이란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치우고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스티... " 사이란의 몸이 흠칫 굳는 것 같았다. 아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추궁했다. " 당신, 정말로 쥬니퍼라는 이름을 몰라? " " 몰라. " " ... 쥬니퍼 가문은 드라세나 왕가의 수호가문이야. 당신처럼 하이포시스 왕과, 권력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면 그것을 모를 정도는 아닐텐데? 왜 모른다고 굳이 부정하지? 이런 경우엔 이름은 알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고 해야하는게 자연스럽지 않나? " " 난 일개 용병일 뿐이야. 권력이나 외국의 사정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머리도 없어. ... 그건 그렇고, 이건 지금 유혹하는 거냐? " 아스는 사이란의 머리카락을 걷고 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가까이 하고 있었다. 아스는 얼굴을 붉히며 얼른 손을 떼려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사이란이 그의 팔을 붙잡고 얼굴을 더욱 더 가까이 해왔다. 그의 숨결이 뺨에 닿는다고 생각한 순간, 아스는 힘껏 다리를 올려찼다. " ---------------!!!!!! " " ... 이런 장난은 내가 달갑지 않다고 몇번이나 말했어? " " 꺼... 크흑... 너, 너 내가 불구가 되면... 어쩌려고... " 아스는 거품을 물며 뒤로 넘어가는 사이란을 내버려두고 테라스로 나갔다. 연못의 물은 맑고 차가워 보였지만 그 위에 반사되는 햇빛은 무섭도록 뜨거울 터였다. 아스는 불어오는 사막의 뜨겁고도 건조한 바람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제발, 모든 것이 늦지 않기를. 내가 카멜에게 돌아가는 것이... 축복의 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두 늦지 않기를. 그날 밤. 하이포시스 왕이 아스를 사이란과 함께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여태까지 한번도 그를 부른 적도, 만나러 온 적도 없었기에 아스는 불안함을 떨칠수가 없었다. 고급스러운 흰 가운과 에메랄드로 장식된 허리벨트, 벨트와 셋트로 보이는 샌들이 주어졌고 정성스럽게 머리가 빗겨져 장식 끈으로 묶여졌다. 짤막했던 아스의 머리카락은 그동안 제법 자라 어깨 근처에 닿을락 말락하고 있었다. 시녀들이 자신의 머리를 묶자 아스는 다시 머리를 잘라야 겠다고 느꼈다. 사이란도 검은색에 금사로 장식된 정장을 차려입었고, 두 사람은 왕의 식탁으로 안내되었다. 하이포시스 왕은 생각보다는 작은 체구에, 교활해 보이는 눈과 한량같은 수염을 한 남자였다. 이쪽의 풍습에 따라 앉은뱅이 상에 낮은 방석으로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하이포시스 왕과 아스는 얼굴을 대면하게 되었다. 그는 아스의 앞에 놓은 은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반갑소, 숲의 군주 에린지움의 걸음 리아트리스. 나의 성에 이렇게 귀한 손님을 모셔놓고도 여태껏 모시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군. " " 아닙니다. " " 뭐, 여기에서의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소? 보안을 위해 필요인원만 남겨두고 모두 내보냈기 때문에... " " 없습니다. " " 난 영 불편하구료. 지금 이 자리만 해도 수십의 미희들이 흥을 돋구어야 하는 자리이거늘, 이렇게 조용해서야, 원. " 하이포시스의 말대로 넓은 방엔 한 구석에서 현을 뜯는 시종 하나만 있을 뿐 조용했다. 사이란은 아무말도 없이 앉아있었고, 아스는 자신을 탐색하듯 훑는 하이포시스의 시선이 불쾌했으며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할 것임을 예감했다. 하이포시스는 한참동안 음식을 들며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 때로는 아스가 모르는 그들 관료의 이야기를 사이란과 나누기도 했으며, 가미날카가 죽은 후 그 영지에서 일어난 후계자 다툼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아스는 가미날카의 이야기가 나왔을때 잠시 움찔 했을 뿐, 되도록이면 마음의 요동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음식을 들었다. 음식은 무척 신선했고 이쪽에서는 진귀한 생선요리도 올라와 있었다. 한참 그렇게 겉보기엔 평화로운 식사시간이 흘러가고, 후식으로 갖은 과일요리가 나올때쯤, 하이포시스는 여태까지 한 이야기들과 똑같은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어조로 말했다. " 그나저나, 축복의 성에 있는 또 하나의 여왕께서 병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 순식간에 찾아든 침묵이 아스의 몸을 꽉 옥죄었다. " 그래서 나는 고민중이라오. 잘하면 그대를 여러가지 조건을 붙여서 남쪽으로 보낼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게 아닐까- 하고 말이오. " 포크를 든 손이 떨리려고 했다. 아스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역시, 펜의 몸이 검게 변해들어가던 꿈은 사실이었어. 그래도 축복의 성 바깥을 넘어 이런 곳까지 그 소식이 알려질 정도라니... 쉽사리 그 사실을 알릴 펜이 아니라고 생각되었지만, 고통스러울 펜의 얼굴과 약해질 결계, 카멜의 얼굴등이 연달아 떠오르며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 그래서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영영 이곳에 머무르게 될지도 모르겠다, 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소만? " 아스는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야수같은 하이포시스의 흉폭한 눈동자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는 순식간에 자신을 집어삼킬 것이다. " ... 하하, 우습군요. " 아스는 긴장을 풀기 위해 되려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것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아스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하이포시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 모든 것을 치유하고 키우고 살리는 것이 에린지움입니다. 그런 에린지움의 수호를 받는 펜이 병이라뇨? 살다살다 이처럼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들어 보는 것 같군요. 마치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무스카리가 불에 타죽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하이포시스 폐하께선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신것이 아닌지-? " 하이포시스는 아스의 허세에 씨익 웃음을 흘리더니 대꾸했다. "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만, 어찌되었건 우리쪽에선 서두를 것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는 이야기인 것은 마찬가지. 여기에서 장기간 머물게 될 것이니... 무엇이든 불편한게 있으면 걱정말로 말씀하시오. 이젠 여기가 그대의 집이 될런지도 모르는데, 불편하거나 모자란게 있어서야 쓰겠소? " " 제가 정말 편하게 있는 것을 원하신다면 저를 숲으로 돌려보내주시는 것이 정답 아닐까요? 온통 사막의 거친 모래로 둘러싸인 감옥 아닌 감옥에 저를 가두어두려 하시면서 불편하거나 모자란게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니, 허언이 아니라고 생각할수가 없군요. " 아스는 그를 노려보는 눈동자에 혐오감을 담았다. 정말 뱀같이 차가운 사내였다. 언뜻 정중해 뵈는 말속엔 명백한 빈정거림과 조롱기가 담겨 있었고 친절해뵈는 미소 너머로는 무례한 시선이 자리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은잔에 든 포도주를 한모금 들이키더니 유들유들하게 말을 이었다. " ... 내 한가지 충고를 하지. 이 사막의 풍토는 몹시 거친 것이어서, 염격한 예법과 정도있는 생활이 아니라면 살아가기 힘든 땅이오. 이곳에선 자신의 주인될 자에게 그리 건방지기 짝 없는 시선을 보내는 것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수도 없는 일이라오. " 아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이 남자는 자신의 주인이 그라고 이야기 하고 싶은건가? " 그대는 이곳에 계속 머무르게 할 정당한 이유라면, 그것밖에 없지 않겠소? 나라간의 아주 경사스러운 일이 될 것이오. 물론 내 개인적인 소감도 마찬가지이고. 그대는 아주 아름답고 총명한 사람이니까 왕비로 모자람이 없소. 자식이야 어느 여자를 품에 안아도 나는 것이니... 난 이제 곧 그대를 나의 부인으로 맞아들일 생각인데, 그대의 주인인 나를 그리 적대시 하는 시선을 보내서야 되겠소? 계속 그리 군다면 나는 그대가 나를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도록 만들 수 밖에는 없소. 나에겐 그런 특별한 재주가 있다오. " 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가 끓어올라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의 남자는 자신을 억지로 이곳에 억류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자신을 축복의 성에 돌려보내기는 커녕 펜이 병을 얻었으니 그녀의 힘이 약해지거나 죽기를 기다려 결계가 사라지면 다시 전쟁을 재개해 남쪽을 모두 자신이 차지하고 아스를 붙들어두기 위한 명분으로 그와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스는 소리쳤다. " 하-! 참으로 뻔뻔하시군. 네가 무슨 권리로 감히 나를 억류하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주인이 되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이지? 내가 누구인지를 감히 잊었단 말이냐? " 아스의 주변으로 살기와 함께 기묘한 빛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공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사이란은 긴장하며 검을 빼내들었다. 그는 힐끔 하이포시스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 아니, 아주 잘 알고 있소. 그대는 숲의 군주이고 은빛의 여왕이며 축복의 성의 무적의 여신이지. 천년여왕 아리스타타의 환생체, 트리옌 리아트리스여. " 아스는 잔인하게 웃었다. " 그래. 감히 그런 나를 네가 가지겠다고 말하고 있는거냐? 나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가미날카, 그 더러운 버러지같은 최후를 당하고 싶지 않으면 입닥치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에린지움의 힘이기에 멸하는 것에는 인정을 두지 않는다. 하찮은 인간의 왕이여. " 짝짝짝... ... 갑작스레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하이포시스 왕의 앉아있던 뒤쪽의 휘장을 걷으며 한 남자가 나타났다. 화려한 보라색 머리카락과 섬뜩한 푸른빛의 눈동자. 레지였다. 아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과장되게 손뼉을 치며 어깨를 들썩였다. " 아아- 많이 자랐구나, 꼬맹아. 이젠 그 누가봐도 안스륨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그 병아리라곤 생각할 수 없겠는걸? " " ... 레지... 왜... 이곳에-? " 아스는 퍼뜩, 하이포시스에게 펜이 설령 자기가 죽더라도 철저히 숨겼을 '병'에 관한 사실을 알려줄만한 자는 레지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속내를 알 수 없는 남자. 자신에게 호의도 보이지 않으며 적의를 조심스레 감추며 삐뚤어진 웃음을 짓고 있는. " 후후, 우리의 리아트리스께서 화가 나셨군. 협박도 이젠 아주 그럴싸해. 자, 이젠 어쩔거지? 하이포시스를 죽이고 달아날건가? 이 자는 네가 죽였던 그 영주와는 달라. 하찮은 인간의 왕이지만 그래도 왕은 왕이지. 다른 병사들이 달려오기 전에 너는 저 자를 먼저 상대해야 할테고, 그럼 또 죽여야 할테지. 과연 네가 이 성을 탈출하기까지 죽여야 할 인간의 수는 몇명이나 될까? 그리고 축복의 성으로 돌아가봤자 기다리는 것은 뭐지? 아리스타타의 쓸모없는 환생체라는 자리? 에린지움의 약점이라는 불명예? 트리옌에게 불행을 초래한다는 매도? " 사이란이 검을 빼든채로 천천히 아스에게로 다가왔다. 아스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레지가 말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것이 펜의 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스는 펜의 병이 결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것때문에 레지가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스는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하이포시스에게 한 말은 그야말로 단순한 협박일 뿐이었다. 자신은 더 이상 살인을 할 수 없다.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 레지는 그것을 알고 그것을 빌미로 자신이 여기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 ...레지... 당신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는 거지? 당신이 그저 전쟁에서의 공적이나 명성이나 영예를 위해 이런다고는 생각치 않아. 무스카리 때문인가? " 레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단 한가지 명백한 것이 있다면 그가 무스카리를 증오한다는 사실이다. 그때 그 설원에서 에리카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죽어가던 무스카리를 살린 것도, 아스의 애원이나 그가 형제여서가 아니라... 그때 그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 처럼, 그렇게 쉽게, 죽어버리는 모습따위는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스카리의 이름이 나오자 레지의 눈동자가 어두워지면서 가늘어졌다. 그는 입가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것 처럼 히죽,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을 까닥, 움직였다. 그러자 그 움직임에 따라 아스의 어깨에서 부터 허리까지 길죽한 상처가 옷자락을 찢으며 생겨났다. " -! " 아스가 신음을 누르고, 레지의 모습이 천천히 흐려지며 그는 대꾸했다. "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단지 상황을 만들 뿐이지. 그것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순전히 너희들의 몫이야. 모든 일에 일어나는 결과는 너희들의 행동 때문이라고. 난, 아무 것도 하지 않지. 체질에 안맞거든. " 수면을 돕는 향이 아스가 누워있는 침실에 은은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허리에서 어깨까지 붕대로 몸을 감싼채 누워자는 아스의 얼굴은 파리했다. 레지가 낸 상처는 그 자리에 바로 얼어붙어 동상과 같은 형국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아물 생각도 못하고 피를 내지도 못한 채 흉측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레지가 사라지고 쓰러진 아스를 옮겨 치료를 하고 재운 사이란은 그의 눈썹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을 가만 가만 넘겨주고는 그를 물끄럼 바라보았다. 하이포시스의 속내를 완전히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아스만한 인물은 붙들어두기 위해선 허울만 좋은 것이라도 그럴듯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후궁은 하렘이 썩어넘칠 정도로 두면서 정비는 한번도 맞이한적이 없는 그는 마치 이런 날을 기다렸다는 듯 아스를 비로 맞이하겠다 했다. 사이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이 아이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하이포시스 왕의 명령을 받고 그를 잡으러 갔을때엔 이런 기분이 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보나마나 오만하기 짝없고 군주다운, 속에 능구렁이가 백마리쯤은 들었을 것 같이 교활한 자일거라 생각했는데, 남에게 굽실거리지 않는 자존심은 드높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위태롭고, 외로워보이기 짝없어 자꾸 신경이 쓰인다. 가느다란 주제에 꺾이지는 않아 부러지고 말듯한 그런 모습. 한편으로는 잔인한 살육자의 얼굴을 한 주제에 그런 죄와는 무관한 듯한 얼굴...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잊어버렸다 생각하는 자신의 이름을 들쑤신다. 여기에 두고 싶지 않다. 자신은 갈 곳 없어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라지만, 그에겐 돌아갈 곳이 있다. 숲의 주인에게 이런 사막은 어울리지 않는다. 숲과 정령의 웃음소리와 풍요가 넘쳐나는 푸른 곳이야 말로 그가 있어야 할 곳이다. 그가 하이포시스에게 붙들려 이 넓지만 갑갑한 궁에서 지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자신의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리고 그것은 아스에 대한 느낌뿐만이 아니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장담하며 하이포시스의 모든 호의를 애써 거절하려 해왔고, 용병이라는 애매한 위치에만 있으려 노력했는데... 뱀같이 차갑고 교활한 남자. 사이란은 그가 싫었다. 하지만 왜 자신은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가-? 자유의 몸이 되고 싶어, 주인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헤매었던 사막인데, 왜 자신을 모시라는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건가? 마음속의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 그가 두렵지? 사이란은 애써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하면서 얼굴을 쓰다듬었다. 오늘따라 더웠다. 사이란은 깊히 잠든 듯한 아스를 놔두고 옷과 장신구와 검까지 모두 던져버리곤 욕실로 들어갔다. 사이란이 욕실로 들어가고 잠시 후. 곤한 잠에 빠진 것 처럼 미동없던 아스의 눈꺼풀이 반짝 열렸다. 그는 소리없이 몸을 일으켜 사이란이 벗어놓은 옷 위의 귀걸이를 쥐어들었다. 그동안 가득 축적해 두었던 에린지움의 힘이 조용히 느껴지고 있었다. 가슴에 제법 깊히 난 상처가 욱신거리며 아팠지만, 아스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이포시스의 저 속내를 알고, 여기서 어떤 방법으로든 나갈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레지와 하이포시스가 펜의 병을 안 이상 숲은 위기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루라도 빨리 에린지움으로 돌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모든 것을 해야했다. 무언가 안좋은 일이, 불길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자신이 무스카리에 대한 마음에 빠져 허우적거릴 동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아스는 통증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고 사이란의 검 중 하나를 빼어 테라스로 몸을 옮겼다. 가볍게 정령을 불러, 연못 위 수면에 소리없이 내려섰다. 수풀에 잠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순찰을 도는 시종들의 눈을 피해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법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담을 넘자, 내궁을 빠져나와 궁 사이에 있는 커다란 광장과 도로가 보였다. 그것은 모두 가지런히 깎아놓은 돌들로 만들어져 있었고, 길을 따라 사막의 신들이 조각되어 서 있었다. 사막의 신들은 모두 광폭하고, 잔인한 표정으로 적의 목을 들고 있었다. 아스는 그들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빨리 걸음을 했다. 상처와 메마른 공기에 금새 몸이 지치는 것이 느껴졌다. 아스는 사이란의 귀고리를 귀에 달고, 바람처럼 길을 가로질러 달렸다. 군데 군데 서 있는 병사들과 지나치는 시녀들이 보였지만 아스는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그들의 눈을 피했고, 침입자를 경계하도록 개를 풀어놓았지만 트리옌인 아스에게선 풀냄새밖엔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역시 짖지 않았다. 막, 외궁의 갂아지르는 듯한 절벽과도 같은 담을 넘으려는 순간. 아스는 양 옆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에 걸음을 멈추었다. 복면을 쓴 검은 옷의 남자들이었다. 아스는 그들이 사이란이 말했던 암부일 것이다. 아스를 납치해올때 베르베리스 일행을 덮쳤던 그들은 아스가 내궁을 빠져나갈때까지는 지켜만 보다가 외궁에서부터 그를 따라붙어 온 것이었다. 왼쪽에 있던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 이제 그만 내궁으로 돌아가시지요. 외출은 여기서 끝입니다. " 아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미안하지만 이건 탈출이야. " 깡-!!! 아스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아스가 반격할거라곤 생각못하고 방심한 탓인지 오른쪽의 남자가 주춤 물러났다. 아스는 정령의 힘으로 가볍게 공중제비를 뛰어넘어 왼쪽 남자의 뒤를 노렸다. 검이 그의 어깨를 지나쳤지만 옷자락을 찢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면서, 아스는 칼 부딪히는 소리에 병사들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곧 사이란도 합세할 것이다. 아스는 심호흡을 했다. 조용히. 침착하게. 물 흐르듯이. 아스는 카멜의 모습을 떠올렸다. 난 할 수 있어. 난 돌아가야 돼! 아스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흔들렸다. 아스는 왼쪽 사내를 낮게 베어들어가며 몸을 한바퀴 돌려 오른쪽 사내의 턱으로 검을 올려쳤다. 무척 숙련된 검사인 그들은, 아스의 공격거리를 정확히 예측하고 뒤로 몸을 물렸지만, 한가지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스의 정령운용능력이었다. 아스는 순간적으로 바람의 힘으로 발을 내딛은 곳에서 한뼘쯤 몸을 더 앞으로 밀어넣었고, 그들이 물러선 거리만큼을 움직이지 않고도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쪽이 허리가 크게 베이고 한쪽은 턱이 갈라졌다. 피가 튀면서, 아스는 그 붉은색에서 일어나는 잔상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체없이 성벽 밖으로 몸을 날렸다. 7미터에 육박하는 거리를 뛰어내린 아스는 바닥에 착지해 몸을 한바퀴 굴린 다음 골목을 뛰었다. 그리고 시장으로 가는 길 집 뒤켠에 매어진 낙타처럼 생긴 짐승의 줄을 자르고 그 위에 올라탔다. 아스는 정령의 힘으로 문짝을 박살내고 그것을 타고 밖으로 뛰쳐나가 곧장 성문으로 달렸다. 성문 주변에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며 창을 들이대는 것이 보였지만, 아스는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그들을 날려버리고 성문 옆 성벽위로 짐승을 몰아갔다. 까마득히 높은 성벽에서 다시 뛰어내린 아스는, 짐승이 다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은 고삐를 놓고 공중으로 몸을 띄우고 정령으로 짐승을 받쳤다. 아스는 아무런 보호없이 바닥에 내팽겨쳐졌지만 몸을 웅크려 큰 부상만은 면할 수 있었다. 발목이 좀 시큰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아스는 짐승위에 다시 올라타선 재촉했다. 사막으로 달려나가자 자신의 안에 있는 에린지움의 힘이 엷어지며 귀걸이에서 느껴지는 에린지움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과연 사막을 빠져나갈때까지 이것이 버티려나 알 수 없었지만, 아스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붙는 기척이 느껴진건 잠시 후였다. 말발굽에서 피어오르는 모래먼지가 구름처럼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아스는 더욱 더 짐승을 재촉하며 달을 향해 달렸지만 말보다 빠르지는 못한지 아스는 금방 따라잡혔다. 말 위에 탄 남자는 보지 않아도 사이란이었다. 그는 목욕을 하다 뛰쳐나온 그대로인지 맨몸에 바지 하나만을 입고 검을 든채 잇소리를 냈다. " - 아스-! 거기서!! " 아스는 대답하지 않고 짐승위에서 뛰어내렸다. 사이란에게 이대로라면 붙잡힐 것은 자명한 일. 먼저 선수를 치기로 하고 아스는 사막위를 구르며 모래를 집어 말 앞으로 확 뿌렸다. 시야가 가려지자 당황한 말이 앞발을 쳐들고 급히 멈춰섰고, 고삐를 놓친 사이란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스는 번개같이 뛰어 사이란의 목에 칼을 겨눴다. " ... 날 보내줘. " 사이란은 누운채로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곧 칼을 잡은 아스의 손을 밀어올리며 몸을 굴려 일어났다. 그리고 눈 한번 깜짝 할 동안 아스의 팔을 붙들어 휘감고 허리를 짓눌렀다. 아스는 다리로 사이란의 발목을 걸면서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사이란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 오늘따라 팔팔하네? 사막에만 나오면 맥을 못추더니... " " 그래. 진작에 사막에서도 이정도만 움직일 수 있었다면 진작 도망쳤겠지. " 사이란은 아스의 귀에 매달린 자신의 귀고리를 보았다. " 너, 그거- " " 하앗-!! " 아스가 기합을 내지르며 사이란에게 달려들었다. 사이란은 능숙하게 찔러오는 검을 피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줏어들었다. 쨍쨍! 몇번이나 날카롭게 갈린 금속이 부딪히고, 아스의 은빛 머리카락과 사이란의 청흑빛 머리카락이 사막의 달밤 아래 어지럽게 흩날렸다. 열 세번째 호흡정도까지 갔을까, 사이란이 다리로 아스의 무릎뒤를 찍어내리자 아스는 그만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고, 그 사이에 사이란이 아스의 팔목을 쳐 내려 검을 뺏았다. 아스는 뒤로 훌쩍 물러났지만 무기는 빼앗긴 상태였다. " 내 검은 돌려줘야지? 미안하지만 이제 단념해. 쌍검을 쓰는 나는 여태까지와는 틀릴테니까. " 아스는 쳇, 하며 허리춤에서 숨겨왔던 단검을 꺼내었다. 사이란은 실소를 흘리고 아스에게 덤벼들었다. 나름대로 사이란과 해볼만하다고 여겼던 아스는, 무기가 불리한 데다가 양 옆에서 짓쳐드는 쌍검술때문에 정신을 차릴 여가가 없었다. 순식간에 다시 단검을 떨어트리고 바닥에 주저앉혀진 아스는, 분한 표정으로 사이란을 올려다보았다. 정령을 부릴 수 있었다면,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령을 부려도 이기기 힘들 것이다. 아스는 이제 어떻게 하지, 라는 암담한 심정으로 사이란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일어나는 데자뷰 현상에 깜짝 놀랐다. 푸른 고수머리, 푸른 눈동자. 쌍검을 쓰는 검의 천재소년. 달빛 아래 검은 머리카락을 평소보다 푸르게 물들이고 스타티스와 똑같은 자세로 쌍검을 잡고 선 사이란은, 이젠 정말 우연히 닮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스타티스와 똑같았다. 외모야 그렇다 치더라도, 왕가의 수호가문 쥬니퍼에서만 내려오는 저 검술의 모양새까지 똑같다는 우연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 ... 역시 알고 있잖아. " " 뭐? " " 쥬니퍼란 이름을. 숨겨도 소용없어. 그렇게 그와 똑같은 쌍검술을 쓰면서...!! " 사이란은 한숨을 쉬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는 아스를 일으키며 말했다. " ... 그래. 내 성은 쥬니퍼다. 내 이름은 뉴사이란 쥬니퍼지. 스타티스 쥬니퍼란 내 형을 말하는 거야. " 아스는 또 한번 놀랬다. 어느모로 보나 사이란이 훨-씬 연상으로 보였기 때문에. " ... 애늙은이 같으니... " " 뭐야? " " 스티는 화사한 미소년이었다고. 네가 동생이라니 믿을 수 없어. " " ... 뭐야 그 말은. 내가 더 잘생겼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사실이야. 난 스타티스 쥬니퍼의 어머니, 일렉트라 쥬니퍼의 아들이고, 내 형에게는 동복동생이 되는 셈이지. 내 어머니 역시 쥬니퍼 가문의 일원이었기에 왕가의 일원을 수호하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수호한 것은 왕이었고 어머니가 수호한 것은 그의 동생이었어. 왕의 정적이 되어버린 그는 드라세나를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가족을 모두 버리고 그를 따라 이 사막의 나라로 건너왔지. 나는 어머니와 그녀의 주인 사이에서 태어났어. " " 그럼... " " 그래. 난 드라세나 왕가와 쥬니퍼 가문의 혼혈인 셈이고, 드라세나 왕가의 사촌이고 쥬니퍼 가문의 동복 아들인 셈이지. 자, 여기까지 설명했으면 또 궁금하겠지? 내가 왜 계속 사막에 머물러 있는지. 어머니는 살아계실적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매일 말씀하셨다. 나는 비록 이곳의 먼 사막의 대륙에 있어도 쥬니퍼 가문의 사람이고, 내 주인은 저기 드라세나 왕가의 사람이라고. 그곳에서 나는 내 주인을 선택해 지켜야만 한다고. 그것이 내 숙명이고 운명이라셨어. 하지만 난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지. 내 아버지는 냉혹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를 자신의 호위기사 내지는 검같은 물건정도로밖엔 취급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러했고...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때문에 고향과 가족 모두를 버리고 이곳 거친 사막에서 헤매어야 했지. 어린 나를 데리고 말이야. 난 절대로 그렇게 되기 싫었어. 내 주인은 나이고 싶었지 주인따위 필요없다고 생각했어. " 아스는 제피란더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던 친구 스티를 잃어버리고, 소년에서 너무나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던 그의 서글픈 얼굴을. 그를 위해서 왕이 될거라고 말하던 애처로운 그를. " ... 자유롭고 싶다고? 그래서 당신이 당신의 자유로 하고픈게 뭐지? 자유롭고 싶다면서 왜 하이포시스 밑에 있는거야. 그를 싫어하잖아. " " ...그의 곁에 있으면 돈과 권력과 미녀가 주어지니까. " 아스는 차가운 실소를 날렸다. " 자신의 손으로 얻은 것도 아닌 그것들이 그렇게 좋았어? 거짓말. 사이란, 너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알지 못하고 있잖아. 하이포시스 그 왕에게 들러붙어 그의 수족으로 그가 시키는 일이라면 다 하는 주제에, 뭐가 자유롭고 뭐가 주인따위 싫다는 거지? 지금 네 꼬락서니는 되려 네 의지로 스스로 따를 사람마저 정하지 못한채, 하이포시스에게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꼴밖엔 되지 않잔아. 네 주인될 자를 확인하는 것 마저 두려워 이곳 사막에 갇혀서는, 개마냥 하이포시스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잖아! 그에게 매이는 것 조차 두려워 직위조차 받지 않으려는 주제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바보짓 중이잖아! 뭐가 자유롭다는 거야? 네 어디가 지금 자유롭다는 거지? " 아스는 사이란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 스타티스는 그렇지 않았어. 그는 그렇지 않았다고!!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이 모실 사람을 선택했고 그사람을 위해 후회없이 살았어!!! 주변의 어떤 시선이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해 살았단 말이야! 그런데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멍청이 주제에 네가...! 그의 동생이라고-!! 그의 삶따위 가치 없는 거라고 말해?!!" " 제기랄, 네가 뭘 알아? 태어나면서부터 내 운명이 누군가에게 매여있다는데, 나는 도망쳐 보지도 발버둥치지도 못한단 말이야? " " 알아!!! 난 16년 동안 전혀 다른 사람으로 자랐지만 갑자기 이 세상에 와보니 나보고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고 했어. 모두가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로써의 나만 보았지. 모두가...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했어. 내 마음 따위, 지금 내 보잘것 없는 존재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고, 나는 그저 과거의 허상일 뿐인가 하고 말이야-! 하지만 이제 알아! 차라리 바보처럼 웅크리고 앉아 귀도 마음도 틀어막고, 나를 부르는 음성따위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는게 편했겠지만. 아무리 도망가고 외면해봤자 난 에린지움의 걸음이고 아리스타타였어. 내가 그것을 부정하며 바보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동안 모든 것이 뒤틀려버렸단 말이야-!!! " 아스는 어느새 눈물젖은 얼굴로 사이란에게 매달려 악을 쓰고 있었다. " ... 난 운명이니 숙명이니, 그런것 따윈 몰라...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 하지만 난 이제 도망치지 않을거야...!! " 사이란은 자신의 입술에 겹치는 아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아득한 향기가 그를 감싸고 순간 함정이란걸 깨달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깃털처럼 와닿은 입술이 떨어지자, 배 안쪽으로 아스가 힘껏 꽂아넣은 주먹 때문에 다리가 꺾이며 머리가 어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이 기울어지며 뺨이 모래속에 파묻혔다. 사이란은 비틀비틀 검을 챙기며 멀어져 가는 아스의 발목을 바라보다 정신을 잃었다. 아스가 잡힌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사막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트리옌인 아스의 탈출치고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곧 하이포시스가 내보낸 친위대에 의해 사막에서 헤매던 아스는 잡혔으며, 차라리 잡히는 것이 더 나았을런지도 모를 몰골이었다. 사막의 더위와 모래폭풍, 밤의 영하까지 내려가는 추위에 먹을 것도 물도 없이 이틀이나 버틴 것은 용하다고 할 만 했다. 어찌되었건 사이란이 아스를 놓친 것에 대한 문책을 받는 동안 아스는 다시 잡혀왔고, 이제까지와 같은 대접은 받질 못했다. 아스는 일단 깨끗히 씻겨진채 나풀거리는 옷으로 갈아입혀져 팔목과 발목에 굵은 족쇄가 채워진채 아주 우아한 감옥에 갇혔다. 왕의 침실과 연결된 후원에 만들어져 있는 그 감옥은, 도대체 이런걸 왜 만들었나 싶을 정도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마치 커다란 새장 같았다. 아스는 그 바닥에 뉘인채 아직까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채였다. 탈수로 몽롱해진 정신 저 너머로 하이포시스와 사이란이 보였다. 하이포시스는 팔안에 액체가 가득담긴 투명한 유리물병을 들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목이 타는 듯 해 미칠 것만 같았다. 아스가 흐려진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을 알고 하이포시스가 비열한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 먹여라. " " 이건... ... " " 아아, 아주 구하기 힘든 물건이지. 트리옌의 미약만큼은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트리옌에게 트리옌의 미약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듣지도 않을 테니까. 저 아이는 나를 참 곤란하게 만들고 있어. 저렇게 사막으로 뛰쳐나가서야, 내가 마치 그를 억지로 억류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일 것이 아니냐? 그는 나의 반려가 될 소중한 존재인데 말이야. 자, 어서 먹여. " 사이란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새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 아스의 머리를 떠받쳤다. 아스는 물병을 부여잡고 정신없이 들이키려다가 그만 사례가 들려버렸다. 컥컥거리면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사이란이 물을 입에 머금고 입술로 직접 전해주었다. 조금씩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오는 감질맛나는 물줄기에 아스는 연신 혀로 그의 입술을 핥았다. 아스의 바싹 마른 목이 어느정도 적셔지자 사이란은 물병을 다시 건네주었고, 아스는 숨도 쉬지 않고 그것을 모두 마셨다. 다시 바닥에 쓰러진채로 있자, 팔다리가 저릿저릿 해져 오는게 느껴졌다. 물에 약이 든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아스는 바보같은 자신을 저주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에서 정녕 에린지움이 어떻게 될때까지 묶여 있어야 하는건가? 그럴수는 없고 그럴리도 없다고 수십번 되뇌어 보지만, 지금은 뺨을 쓰다듬는 하이포시스의 손길 하나도 뿌리칠 힘이 없었다. 하이포시스는 천천히 아스의 뺨과 목덜미와 어깨, 가슴을 쓸어내려 갔다. 그는 아스를 안아든채로 아스의 귓전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사이란에게 말했다. " 아무리 네가 이 아이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놓아주고 싶어도 소용없다. 다시 이렇게 잡혀왔으니까. 이 아이가 자력으로 여기에서 나갈 방법은 없어.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 성은 트리옌인 그에겐 철옹성이지. 무슨 재주로 사막에서 이틀이나 헤매었는지는 모르지만 산 송장 같군. 하긴, 바락바락 대드는 녀석은 내 취향이 아니니 차라리 이렇게 인형처럼 조용한 것이 났다. 입만 닫으면 얼마나 예쁜 인형이란 말이냐? 마음만 먹으면 매일 저 물을 마시게 해 이 상태를 유지하게 할 수도 있다. 정신은 있지만 몸은 움직여 지지 않지. 저 물만 먹여도 트리옌이니 죽진 않을테고, 예쁘게 장식해 앉혀둬도 안심일거야. " " ... " 사이란은 눈썹을 찌푸린 채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이포시스를 거스르지 말라고 말한 것은 이런 사태를 예상해서였지만, 그는 막상 아스가 다시 잡혀오자 그가 정말로 달아나길 바랬던 자신의 마음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하이포시스는 아스의 귓전을 지분거리며 말을 이었다. " 이 아이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너밖에 없다. 어떠냐? 나에게 충성을 맹세해라. 평생 내 것이 되어 내 검이 되겠다고 말해. 그럼 적어도 이런 반병신 상태로 놔두진 않겠다. " " ... " 사이란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 하이포시스는 입가를 끌어올리더니 입술과 혀를 놀려 천천히 아스의 목덜미를 핥고 빨아올렸다. 쇄골을 깨물고 입혀져 있는 둥 마는 둥 한 옷을 벗겨버리고 천천히 그를 농락했다. 그의 입술이 유두에 가 닿고 손길이 허벅지를 더듬자 아스는 다시 눈앞이 새카매져 오는 것을 느꼈다. 살인은 안돼. 안돼. 눈앞으로 자신을 짓누르던 가미날카의 몸이 산산조각나며 찢겨지는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손이 아스의 더 은밀한 곳으로 숨어들어가고, 입술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자 아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시야가 캄캄해지면서 마음 저 편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울컥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나에게 손대지 마! 네깟 것이 감히... 감히 날... 싫어... 싫어-!!!! " 폐하!!! " " 대답할 마음이 생겼... " 촥-!!! 하이포시스 왕의 화려한 옷 앞섶이 찢어져 달아나며 긴 검흔이 그의 뺨에 남았다. 사이란이 황급히 그를 뒤로 하고 검을 뽑았다. 아스가 새파란 감정없는 눈으로 하이포시스의 허리춤에서 빼어낸 보검을 들고 있었다. 그때 그 얼굴이다. 피 칠갑을 하고 가미날카의 방에서 보았던 그 얼굴. 사이란은 소름이 쭉 끼치는 것을 느꼈지만 아스는 공격은 하지 않고 검을 잡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손을 댄 자의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감과 분노, 증오와 더불어 폭주하려는 정신을 억누르려는 아스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된다. 나는 에린지움의 걸음-!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운명을 이제 멋도 모른채 더럽히고 싶진 않았다. 방황하고 아파하는 것은 아스에게 이제 충분했다.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고통을 주는 것은 이제 충분했다. 사이란이 아스가 갈등하는 사이 재빨리 팔목을 쳐 검을 떨어트리게 만들었고, 아스의 손목에 묶인 사슬을 확 끌어당겼다. 아스는 힘없이 앞으로 자빠졌다. 눈동자에 일렁이던 새파란 빛은 꺼졌지만,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하이포시스는 분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 " 감히... 네 놈들이 번갈아가며 나를 우롱하는 구나!!! " 철썩-!! 하이포시스는 사이란의 뺨을 거세게 올려붙였다. 사이란의 뺨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 자, 어서 내게 충성을 맹세해!!! 그렇지 않다면 저 아이는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 " ... 그에게 손을 대면 되려 위험한 것은 폐하이시지 않습니까. " 사이란의 차분한 말에 하이포시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화가 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예전부터 사이란이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누구도 따라올자가 없는 검술실력. 사막에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얼굴의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냉정한 남자. 그의 힘을 빌어 자신의 오랜 숙원이었던 사막통일을 이루어냈다. 그 거칠고 제멋대로인 사막의 족장들이 모두 자신을 왕이라 부르며 떠받든다. 자신의 권세에 그 누구도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자가 없거늘 정작 자신에게 그것을 안겨다 준 사이란만큼은 가질 수가 없었다. 지금 그의 왕국은 사이란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가 정작 가져야 할 것은 사이란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주는 모든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으며 언제까지고 자신에게 매이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사이란을 꼬드긴 그 계집을 죽이고 나서, 하이포시스는 후회했다. 차라리 그때의 분을 참고 그녀를 내려주는 대신 충성을 약속받았으면-! 사이란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가져다주고 가질 참이었다. 하지만 사이란은 원하는 것이 없었다. 하이포시스는 그것이 화가 나서 견딜수가 없었다. 그러던 찰나에 아스가 나타났다. 누구든 홀려버릴 미모에 고고한 빛을 가지고 있는 이 아이는 자신과는 달리 단박에 사이란을 사로잡아버렸다. 하이포시스는 사이란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지만 아스에게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번 아스가 탈출했을 때에도, 그가 정말 보낼 마음이 없었다면 아무리 조건이 불리했더라도 아스를 보낼리가 없었다. 하이포시스의 마음엔 질투와 굴욕과 집착이 들끓었고, 마음 같아서는 숲의 군주건 에린지움의 걸음이건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아스를 사로잡은 것을 기회로 사이란을 무릎꿇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이 감히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은 아스를 상처입힐 수 없다고 단언하는 사이란이라니... " 이 아이를 지하 광장으로 데리고 가 묶어놓아라! 사흘동안 아무것도 주지 말고 매달아 놔!!! 그런 후에 지하 노예들의 먹이로 내줄 것이다-!!! " 병사들이 달려와 축 늘어진 아스에게로 손을 내밀었지만 그것을 사이란이 가로막았다. 그는 새파래진 얼굴로 말했다. " 폐하, 어찌하여 그리 잔인한... 이는 그냥 트리옌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붙잡은 포로도 아니고 노예도 아닙니다. 아직까진 폐하의 비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하 노예들에게 주신다니, 만약 이 사실이 바깥으로 알려지면 남쪽 숲의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 어쩌면 아스에게 집착한다는 그 무스카리 마저도... " " 그는 제발로 내 성을 나가 사막으로 갔다. 그 드넓고 황량한 사막에서 트리옌인 그가 아무런 준비없이 나갔으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나도 모르는게 당연하지 않나? ... 그를 구할 수 있는건 오로지 너의 충성 뿐이다. 사흘동안의 말미를 주겠다. 그동안 내게 충성을 약속하고 친위대의 대장이 되지 않으면 난 지하노예들에게 그를 내릴 것이고, 만약 너 혼자 떠난다면 나는 그를 죽이고 그를 죽인것이 너라고 알릴 것이다. 너는 네 고향에 절대로 가지 못하겠지. 그리고 사막 안에서라면 나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 " 하이포시스의 눈이 번뜩였다. 사이란은 그가 아스를 빌미로 자신을 갖길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충성을 맹세해라-!! 자신의 주인을 외면하고 사막에서 떠돌며 내키는 대로 편하게, 하이포시스가 시키는대로 하고 살아왔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원치도 않는, 싫어해 마잖는 사람에게 충성을 약속해야 한다. 평생 그의 수족이 되어야 한다. 사이란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아스 네 말이 맞다. 나의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나는 목적없이 떠돌다가 매의 발톱에 낚아채인 쥐새끼에 지나지 않아. 운명을 피하기에만 급급하고, 그 어느것도 알려고 극복하려고 하지도 않은 댓가다. 사이란은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내가 지켜야 했을 드라세나의 그 누군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정말로 나의 모든 것을 걸만큼 가치있는 사람이었을까. 과연 나의 형은, 사랑하는 사람만을 위해 살았다는 그의 주인은 그의 운명을 맡길만한 남자였을까... 하고. 사이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당신에게... 충성을... " 그때, 병사들에게 들려 나가던 아스의 눈동자가 똑바로 사이란을 쳐다보았다. 그 청록색 눈동자는, 명백히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대답하지 마. 그런 협박에 너 자신을 팔지 마. 사이란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고, 사이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리고 있던 하이포시스의 얼굴이 진노로 물들었다. " 좋다. 네가 정녕 저 아이를 죽이고 싶단 말이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지옥을 보여주마. " 어두컴컴하고 쾨쾨한 습기로 가득찬 음침하기 그지 없는 지하광장의 한가운데, 아스는 십자가에 묶인채였다. 이틀째였다. 빛도 없는 이곳에 묶인 아스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으며, 레지에게 당한 상처는 나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이 무척이나 쑤시고 아파왔다. 귀에 매달려 있던 사이란의 귀고리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잡혀오면서 사라졌고, 하이포시스가 먹인 약의 기운은 가셨지만 되려 그 기운이 가시자 고통이 온 몸을 사로잡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홀로 있으면서, 아스는 고통과 싸우기 위해 지난날을 회상했다. 언제나 몸이 아파 괴로웠던 저 세상에서의 생활. 마음껏 뛰지도 가슴이 아파 웃지조차 못하던 때 자신은 갑자기 이곳으로 떨어졌다. 낯선 곳에서 노예상단에 잡혀가며 처음엔 무척 괴롭고 힘들었지만, 안스륨을 만나면서... 자신이 원래 이 세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처음으로 뛰고 마음껏 웃고 소리쳐도 아프지 않은 몸을 느끼며 행복했다. 안스륨과 함께 수인족의 마을을 거치고, 드라세나의 축제를 겪고, 카멜과 춤추고, 제피와 스티를 만나고, 노예상단으로 다시 잡혀가 하마터면 몸을 더럽힐 뻔 했지만 안스륨이 구해주었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에 대한 보답이라도 되는 듯, 그가 왔었다. 그리고 그가 괴로운 듯 토해내었던 말 한마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아스는 눈물이 솟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결계로 가 자신이 에린지움의 걸음이고 아리스타타의 환생체임을 깨닫고는, 무스카리가 그를 안개비 속에서 짓눌렀던 날... 아리스타타의 이름을 외치던 그를 저주했다. 증오스러웠다. 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빈껍질이 되었다. 그 빈껍질은 언제까지고 안스륨을 잊지 못해 괴로워했다...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그렇기에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런 자신을 붙잡아 준 것은 카멜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겠다며, 축복의 성에서 낯선 트리옌의 시선에서 보호해주고 가르쳐준 것은 그였다. 전쟁에서도 줄곧 자신을 돌봐주었고 아무것도 모른채 멋대로 전쟁터를 돌아다니던 자신의 곁을 지킨 것도 그였다. 무스카리를 잊지 못해 혼자 욕실에서 몸을 떨던 자신을 안아준것도 카멜이었고, 무엇보다 순결하고 댓가없는, 오로지 자신을 채워주기만 한 사랑을 준 것도 카멜이었다. 그의 빛나는 금발머리, 순수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 한없이 다정한 미소. 부서질새라 자신을 조심조심 끌어안던 그의 팔을 생각하니 또 눈물이 났다. 다시 드라세나 탈환전에서 무스카리를 재회했을때는 마음이 부서질만큼 괴로웠다. 모든 마음이 다 죽어버리고 그가 다 가져가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보자 그동안의 고독함이 모두가 거짓말이라는 듯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었다. 그리고 북극의 성에서의 생활... 그의 등에 타고 보았던 오로라와, 황혼에 빛나던 세상의 끝.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가 너무 밉고 미워서 다 잊어버리고 모른척 하고 싶었지만... 자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한다고 눈보라 속에서 외치던 무스카리의 목소리는 언제까지고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구멍을 불태우고 숨결을 집어삼키는 불의 봉인 역시 선명했다. - 누구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위대한 '카'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언령마법으로 묶인 불의 저주. 아스는 소리없이 뚝뚝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에 절망하여 넋을 놓고 살인을 저질렀다. 그 죄의 댓가로 에린지움은 썩어가고 펜은 죽어가는데, 자신은 지금 이곳에 붙잡혀 있다. 몽롱한 머리는 끈질기게 의식을 붙잡은채 고통을 불사르고 있었다. 나는 평생 아무도 사랑할 수 없어. 그 누구에게도 사랑한다 말할 수 없어... 내게 남은 자리는 에린지움의 옆-! 숲의 여왕 은빛의 군주라는 무거운 책임 뿐. 아니... 그것역시도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지. 나와 같은 머리카락을 가진 펜이, 누구보다 고결하고 강인한 그녀가 에린지움의 걸음이니까. 나는 아리스타타의 찌꺼기이기도 하고, 무스카리에 대한 애증으로 몸을 사르는 보잘 것 없는 아스이기도 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카 이기도 하고... 나는 뭘까. 왜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왜 신은 나를 이곳의 운명에 매어둔 것일까. 마음이 모두 다 바스라질 것 같고 몸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지만 아스는 자신이 가야한다는 것을, 살아있는 한 움직여야 하고 원하지 않았지만 짊어지게 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방황이 있었을까. 갈피없는 마음은 어지럽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살아있기에, 방황할 기력이라도 있기에. 움직여야 한다... 아스는 어둠속에서 선명히 떠오르는 에린지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희디흰 줄기와 가지, 바람이 없어도 홀로 노래하는 은빛의 나뭇잎들. 하늘로 드리워진 거대한 흰색의 그림자. 그곳으로 돌아가자. 진정한 나의 분신이고 나의 반려이고, 내 생을 저 편에서 이 편으로 이끌어온 그 옆으로. 그곳에서 모든 죄를 속죄하고, 이젠 자신의 방황을 접고 그곳에서, 아리스타타의 옆에서 잠들고 싶었다. 무스카리... 불타는 숲들의 제왕이여! 그대를 사랑할수도 잊을수도 없어 고통스럽다면, 이제 그만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당신을 추억하겠어. 아름답고 예쁘고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만을 기억하면서, 아리스타타가 목숨을 버리며 간절히 바랬던 그 추억을 그녀의 영전에 바치며 영원히 잠들거야. 아스는 억지로 눈을 깜박거려 눈물을 떨궈내었다. 시야에 다시 새카만 어둠이 들어찼다. 침묵이 찾아들자, 침묵 저편으로 소곤거리는 사람들의 무수한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스는 그 으스스한 기척에 공포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스가 사막으로 나갔다가 다시 잡혀온 날. 카멜은 사막의 수도, 하이포시스의 나라 페나카이트에 도착했다. 사방엔 까무잡잡한 피부의 사라센들과 비늘 밑 냉혈이 흐르는 수인족들 뿐. 카멜은 두건을 푹 눌러쓰고 모래먼지를 뒤집어써 까슬해진 턱을 쓰다듬었다. 하이포시스의 에메랄드 궁전은 그야말로 절벽위의 성이었다. 붉은 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내어 까마득한 높이의 성벽 너머에 위치한 그 둥근 초록색과 금장 장식의 지붕의 궁전은 단 두개의 출입구만이 존재했는데 하나는 엄청난 계단의 정문이었고 하나는 궁전안으로 들어가는 물자를 실어나르는 후문이었다. 후문쪽은 꼬불꼬불하게 가파른 비탈길과 도르레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것도 검문이 철통같아서 눈에 띄는 외모를 한 카멜이 잠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듯 했다. 어둠을 틈타 성벽을 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아스님을 구출할때를 대비해 정화석의 힘을 아껴둬야 하는데다가, 일단 성 안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 곳의 구조를 모르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아스가 어디에 있는지만이라도 알면 좋을테지만, 월이 자신을 찾아왔던 날 갑작스레 느껴졌던 불길한 느낌을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 아스님... ... ' 그 불길한 느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타는 듯 했다. 아스를 오랫동안 보지 못한 목마름에 말라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가 시공의 저 편에 있어도 항상 느껴졌었던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그의 느낌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손에 잡히는 것은 이 사막의 모래처럼 버석거리는 불안과 질투와 그리움. 사막을 건너오던 밤엔 모래가 사락거리며 춤추는 소리를 들으며 잠 못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팔 안에 아스가 없으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스를 안고 나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는데, 그가 없으니 그 행복감은 카멜을 좀 먹고 있었다. 보고싶다, 안고싶다는 갈망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한번 잡았다 놓친 것은 더욱 큰 갈증을 일으켰고,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아스의 품 속을 알고 나니 홀로 있는 밤 고독은 더욱 커졌다. 카멜은 자신을 향해 냉소를 날렸다. 그저 주기만 하자고 생각했다. 그저 바라보는 사랑만을 하자고, 아껴주며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지켜줄 수 있는 강인하고 고결한 사랑만을 하자고. 하지만 자신은 아스를 사랑했고, 그를 안았고, 그와 동시에 독점욕과 질투와 집착과 갈망을 얻었다. 자신만은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만약 아스가 눈 앞에 있다면 행여 그가 무스카리의 품에 다시 안겼을까봐 그를 엉망으로 짓누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 몸 구석구석을 샅샅히 열어 무스카리의 흔적이 남지 않았다 미친듯이 훑지 않을 자신이... 아아, 그래. 어쩌면 주기만 하자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나의 오만일런지 모른다. 내게 무엇이 있어서 뭔가를 드린단 말이냐? 내게 있었던 것은 고작 보잘 것 없는 그 마음 뿐이었는데... 카멜은 성벽 밑에 부랑자들과 섞여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사막의 황혼은 그야말로 온 세상을 불사르는 듯 했다. 붉은 하늘과, 붉은 모래와, 붉은 사람들. 서쪽에서부터 어둠이 몰려오자, 카멜은 그 어둠이 자신의 흰 피부와 금발을 가려주길 기다리며 망토에 몸을 싼 채 숨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같이 앉아있던 부랑자들이 술에 취해, 추위에 떨며 잠을 자기 시작할 무렵... 카멜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벽을 따라 걸었다. 성벽 주변으로 순찰을 도는 경비병이 보였다. 카멜은 두명으로 조를 이룬 그들을 노리고, 속의 장검의 손잡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 -!! " 카멜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려는 방향과는 반대로 움직였다. 검은 잡지 않았지만 그의 매서운 손날에 맞으면 적어도 기절은 할 것이다. 카멜의 뒤에서 그의 어깨를 쳤다가 하마터면 관자놀이를 얻어맞을 뻔 한 인물은, 이크... 라며 허리를 뒤로 젖힌채로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상대방도 망토를 깊숙히 눌러썼기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카멜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 누구냐-? " " ... 오랜만이군. " 망토를 걷자 드러난 것은, 정말로 오랜만의 얼굴이었다. 지난 드라세나의 주둔단지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던가. 회색 머리카락에 회색 눈동자. 회색 늑대족 특유의 외모에 뾰족한 귀. " ... 락시움 용병단장 베르베리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 " 자, 자, 이쪽으로. " 베스는 카멜을 끌고 슬슬 옆 골목길의 어둠속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엔 과묵한 부단장 지즈와, 부상당한 다렐과 하발을 대신해 이곳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했던 단원들 중 차줄한 세명의 남자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 하이포시스 왕의 궁전에 아스가 잡혀들어간 이상, 슬슬 트리옌쪽에서 무슨 수라도 쓰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당신이 정말 올줄은 몰랐군. 글로리 나이트 카멜리아. 트리옌은 사막에 다니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 " ... 당신들이야 말로 왜 여기에... " " 아스를 안드리움 화산 너머 북쪽 숲에서부터 데려온 것이 우리였지. 현상금을 노리고 아스를 찾아다니고 있었거든. 중간에 저 하이포시스의 용병 쌍검술의 사이란에게 뺏기고 말았지만, 여기까지 포기않고 달려왔다- 이 말씀. " " 그렇군. 그럼 그때 우리에게 소식을 전해준 수인족이 봤다는 용병들이 너희들이었군. " " 그래. 그러니까, 무턱대고 안에 들어가기 보다는 우리와 연합하는게 어때? 물론 넌 현상금이 중요한게 아닐테니 현상금은 우리가 받는 걸로 하고. 우린 계속 여기에서 저 에메랄드 궁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어. 얼마전에 아스가 탈출했다가 오늘 새벽에 잡혀들어갔지. 사막에서 길도 모르는 녀석이 혼지 아무런 준비 없이 나갔으니 잡히는게 당연했어. 돌아오는 길에 빼돌릴까 생각도 해봤는데, 사이란이 없더라고 친위대 전부가 출동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안되겠더라고. 지금이라면 시도해볼만 했겠지만. " " 다시 잡혀 들어갔다고? " " 그래. 그리고 지금은 하이포시스 왕의 분노를 사서 지하광장에 갇혀있다는 소문. 에메랄드 성이 자리하고 있는 저 엄청나게 높은 지대 밑에는 끔찍한 지하감옥이 있거든. 신전이기도 했다가, 각 힘있었던 사막의 부족들이 번갈아가면서 차지하고 앉은 적이 있던 저 궁전 밑에는 수많은 흉악범과 사상범 정치범 애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지. 지하광장은 그런 자들을 두고 족장들이 모여 검투를 시키고는 내기를 한다는 소문이 있어. " 카멜은 아스의 소식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는 기쁨과 걱정에 가슴이 옥죄는 듯 했다. " 용케도 그런 것들을 알았군. " " 아아 우리 용병단에 아주아주... 재주 있는 녀석이 하나 있거든. 어느 곳에든 숨어들 수 있는 그림자같은 놈이지. 게다가 변신류 수인족이기도 하고. 아무튼, 지하라니 차라리 잘됐어. 정문과 후문을 제외하고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뒤엣길은 수로를 통해 지하감옥으로 연결되어 있거든. ... 사실 길이 있는지 없는지 의문 스럽지만 궁이 오아시스를 모두 차지하고 이 도시에 있는 우물들이 모두 거기에서 나오는 물이란걸 생각하면 수로든 뭐든 통로가 있다는 이야기야. 어쨌든 지하 감옥 쪽이 궁전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 보다 훨씬 짧은 탈출경로를 만들 수 있어. 뭐, 아스 그 녀석이 궁전에 갇혀있었다면 성벽을 넘는 수 밖엔 없었겠지만... 그러니까... 네가 섵불리 성안으로 뛰어들어가 경계를 강화시키도록 만드는 것 보다 우리랑 같이 움직이는게 좋을거다 이 말씀. " " ... 좋아. " " 그래. 그럼 결행일은 당장 내일로 하지. 내일, 하이포시스가 그를 지하 노예들에게 내릴거라고 사이란에게 협박했다더군. 아, 뭐 여기엔 많은 복잡한 사연이 있는 거 같은데...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계획은 이거야. 우리는 지하광장으로 가게 될 죄수들 틈바구니에 뒤섞여 아스에게 접근한 다음 혼란한 틈을 타 그를 데리고 탈출할거야. " " 감옥에 갇혀있을 죄수들로 위장하는게 가능할까? 간수들이 감시할텐데... " " 저 에메랄드의 지하감옥에 대해서 잘 모르는군. 저긴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블랙홀 같은 곳으로 유명한 곳이야. 저 궁전의 밑엔 또다른 궁전이 있지. 수많은 자들이 저기에 사람을 집어넣기만 했을 뿐. 관리따위는 하지 않아. 저들은 빛도 먹을 것도 없는 암흑속에서 자기네들끼리 자급자족하면서 죽을때까지 갇혀있어. 이따금 족장들이 벌이는 검투대회에 나가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고... 궁전과 지하감옥은 아예 연결 통로 자체가 없어. 간수도 없고, 그냥 거대한 굴과 구덩이에 죄수들을 밀어넣어놨을 뿐이야. " " ... 그런데 탈출루트가 있다면 어째서 그들은... " " ... 사실, 여기에서 그리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아. 우물에 연결된 수로를 따라 가면 되니까. 하지만 들어가봤자 지하감옥 뿐이고, 궁전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 따위는 없으니까.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을리 없지. 하지만 나오는 길이 없어. 혹여 지하감옥에 갇힌 누군가를 구출하러 들어가봤자 같이 나오지 못하게 되는 일이 태반이라 들었어. " " 그럼 어떻게 탈출한다는 거야? " " 아아, 그야. " 베스는 싱긋 웃었다. " 당신이 있으니까 가능한 이야기지. 당신에겐... 물의 정령수가 있잖아? 여기에서 자넬 만난건 큰 행운이라고. 사실 우리도 일단 들어가고 봐야 하는건가, 어째야 하는 건가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거든. " 하이포시스는 사이란을 억류하지 않았다. 사이란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왕의 궁전에 머물렀다. 사이란도 모든걸 내팽겨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든 게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하이포시스의 말대로다.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았고 하이포시스가 퍼트리는 소문에 불과할 지라도 자신이 에린지움의 걸음인 아스를 죽였다면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그곳에서라면 아스를 데려왔다는 아리스타타의 묘목 최초의 트리옌의 영광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검사라는 카멜의 복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설령 사막에서건 무사할까. 카멜이 아니더라도 사막의 모든 오아시스에는 하이포시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족장들이 다스린다. 도망가더라도 붙잡히지 않을리가 없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아스가 지하광장에 묶인채 사흘이 흘렀다. 해가 천천히 기울며 황혼의 그림을 자아내고 있었다. 사이란을 저녁식사에 초대한 하이포시스는, 양념이 발라져 아주 잘 구워진 양고기를 손으로 찢으며 지난 사흘간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 그래, 아직도 마음이 바뀌질 않았나? " " ... ... " " 뭐, 이대로도 좋겠지. 네 충성을 받질 않아도, 넌 돈만 주면 일하는 용병일테고 지금까지와 바뀌는 것은 없을테니까. ... 하지만, 난 역시 너를 가지고 싶다 뉴사이란. 네가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애꿎은, 한 고귀한 인간이 망가질 뿐이야. 지하감옥의 죄수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알고 있겠지? 빛과 아름다운 것에 굶주린 그들은 그 아이를 형편없이 망가뜨려 놓을거다. 지상에서 그의 옷깃에 손이라도 가져다 댈 수 있는 자들이 몇이나 될까? 그런 것이 자기네들 앞에 떨어졌으니, 이성이 있는 놈은 없겠지. 죽진 않아도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하게 될걸. 뭐, 그 능력으로 죄수들을 죽인데도 거기 있는 놈들은 한두명이 아닐테고... 뭐, 좋지 않나. 에린지움의 걸음이 살육의 피를 뒤집어쓰는 것도. 설사 몸은 망가지지 않더라도 마음은 망가지겠지. 넌 어느쪽이냐? 차라리 몸? 아니면 마음?? " " ... 왜... 내게 집착하는 겁니까. " " 넌 강하니까. " " 저만큼이나 강한 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 하이포시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 아니야. 내게 왕국을 만들어 준 것은 너다. 너는 강하고 아름답지만 위태롭지. 너는 아직까진 주인이 없는, 세상의 무엇이라도 죽일 수 있지만 의지는 없는 검과도 마찬가지다. 강하더라도 의지가 있는 검은 그것을 잡은 주인을 죽이고, 쉽게 잡히더라도 강하지 않은 검은 부러지기 십상이지. 그래서 나는 너를 원하는 거야. 채 성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아름다운 청흑발에 이국적인 미모를 하고 세상 모든 것들에게 다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검을 휘두르는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느냐? " 그는 손을 뻗어 사이란의 턱을 끌어당겼다. 그는 사이란의 입술을 지끈 깨물며 말을 이었다. " 내 곁에 있어다오. " " ... 제 몸을 원하시는 거라면 드리겠으니 아스를 놓아주십시오. " 콰직-! 하이포시스는 사이란의 아랫입술을 거세게 깨물었다. 입술이 이빨에 뭉개지며 핏줄기를 주르륵 터트렸다. 그는 그것을 핥다가 사이란을 확 밀쳤다. " 품에 안을 수 있는 것따위는 천지에 널렸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충성이야-! 마지막으로 묻겠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해라!!! " " ... " 사이란은 대답하지 말라고 말하던 아스의 청록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정말 내가 이러길 원하나? 내가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 네가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텐데도? 하지만 사이란은 믿고 싶었다. 그 눈동자에 아직 자신의 의지가 남아있으며,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보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이포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좋다.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할 수 없지. 여봐라-! 지하광장으로 가겠다!! " 그 시각, 카멜과 베스와 일행들은 마을 우물 중 하나의, 바닥 옆구리에 뚫린 좁은 입구를 기어나와 바닥에 물이 흐르는 좁은 통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궁전 오아시스의 물이 졸졸 흘러가고 있는 그 통로는 간신히 한 사람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채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고 때때로 바위같은게 튀어나오거나 하면 간신히 몸을 뺄 수 있기도 했다. 덩치가 큰 지즈가 통로를 지나가는데 무척 고생을 하고 있었다. 한참 꼬불꼬불 연결된 습한 길을 걸으니, 물이 무릎정도까지 차오른다 싶은 동공 같이 조금 큰 공간이 나왔다. 그 공간엔 몇개인가의 구멍이 뚫려 각자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 여기를 거쳐서 마을의 우물들로 물이 흘러가나보군. " 물이 다리를 적시고 있자 캄캄한 지하 세계에라도 정화석에만 의지하는 것 보다 훨씬 기력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카멜은 여태까지보다는 조금 더 옆으로 넓적하게 넓은 통로를 걸어갔다. 물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물이 목에까지 차고 천정에 머리가 닿을 지경이 되자, 일행은 잠수를 해 바닥으로 들어갔다. 통로는 꽤 깊었다. 흘러가는 물살때문에 헤엄치기가 힘들었고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면 숨을 참기도 힘들 만큼 긴 거리였다. 카멜은 물의 정령수의 도움으로 사람들에게 공기막을 쳐주었고 덕분에 일행은 호흡에 아무런 곤란을 느끼지 않고 물을 헤쳐 갈수가 있었다. 어느 정도의 지점에 흐르자, 갑자기 유속이 빨라지더니, 몸이 그쪽으로 딸려가기 시작했다. 베스가 흐름에 몸을 맡기라는 신호를 보내왔고, 일행은 거친 물살에 따라 정신없이 어디론가 휩쓸려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다시 수면을 만나 사람들이 제각기 머리를 내밀었다. 물밖으로 기어나오자,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에 체온을 빼앗겨 몹시 추웠다. 트리옌인데다가 한동안 건조한 사막을 건너왔던 카멜은 되려 쌩쌩해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렸다. 베스가 목소리가 울리는 동굴 안에서 옷자락을 짜며 설명을 덧붙였다. " 아까 유속이 거세지는 그곳, 그곳에선 헤엄을 칠 수 없을 정도로 물살이 세더군. 아마 그때문에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게 틀림없어. " 카멜은 베스가 정확히 보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줄기가 모여 소용돌이 치는 그곳 때문에 아무리 헤엄을 쳐도 물살을 거스르지 못하고 빠져나가지 못한채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멀쩡한 통로가 있어도 빠져나갈 수 없는게 당연하다. 사실 들어오는 것도 어지간한 잠수부 아니고서야 어려울 듯 했다. 방금 그 물살에 휘말려 허우적대다가 익사하기 딱 좋았다. 체온이 조금 돌아오고 몸에서 물기를 짜내자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칠흑같은 어둠이 미끌미끌한 바닥과 불길하게 일그러트린 얼굴을 한 천정 사이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미리 준비해온 횃대에 물기를 꼭 짜낸 천조각을 두르고 밀봉해 가져온 기름을 붓고 부싯돌로 불을 붙이자, 빛에 놀란 어둠이 비명을 지르며 바위틈 사이로 숨어들었다. 베스가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 서두르자. 해가 졌을 시각이야. " 화르륵-!!! 불길이 어둠에 물든 공기를 살라먹는 것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빛에 조금 눈이 부신 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구덩이 한가운데, 자신은 십자가에 묶인채 떨어져 있었고, 구덩이 저 위에 서 있는 하이포시스와 사이란, 그리고 그 친위대가 보였다. 구덩이 벽면엔 둘러가며 창살이 쳐져 있었는데, 불이 밝혀지자 선명이 보였다. 어둠 저 편에서 들려오던 무수한 기척...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들은 횃불에 한발짝씩 흠칫 물러났다가, 곧 다시 창살 앞으로 빼곡히 다가와 매달렸다. 더러운 얼굴과 몸에 선명한 것은 섬뜩한 흰자를 굴리며 번쩍거리는 안광이었다. 무수한 안광들... 몇백, 몇천에 가까워 보이는 그 시선들이 아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불이 밝혀지고 그 시선들이 선명해지자 아스는 자기도 모를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자신을 보는 음습한 탐욕에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하이포시스가 입을 열었다. 커다란 공간에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 사이란, 네가 선택한 결과다-! 리아트리스여... 원망하려면 이 오만한 자를 원망해라. 자신의 충성의 값어치를 착각한 자의 선택이다! 철창을 열어라-!! " 그러자 어디선가 절그럭 절그럭 쇠사슬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철창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죄수들이 고함인지 환성인지 모를 소리들을 지르며 철창이 다 열리기도 전에 뛰쳐나오고 있었다. 아스는 두려웠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감았다. 에린지움이여, 아리스타타여, 나에게 힘을 빌려주세요. 그들과 연결된 자로써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화악- 햇빛이 있을리 없는 곳이었다. 그곳은 칠흑과도 같은 암흑이 점령한 곳이었고, 그것과 닮은 절망이 꿈틀거리며 실체를 가지고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이미 해는 졌을 시각이었고, 밖엔 어둠이 내리고 있을터였는데 아스의 주변으로 햇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자연에게 사랑받고 이 세상의 생명체 모든 것의 축복을 받은 에린지움의 걸음 주변으로, 늘상 그라는 축복에 기뻐 날뛰는 햇빛이었다. 횃불과는 선명히 다른 눈부신 빛에 죄수들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사이란이 눈을 크게 떴고 하이포시스는 벌린 입으로 억...하는 소리를 삼켰다. 아스의 머리카락이 물 속에 잠긴 것 처럼 너울거리고 있었다. 정령들이 속살거리고 웃음짓는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홀로 노래하는 나뭇잎같은 회청은빛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숲과 바다와 하늘, 이 세상 모든 푸르름을 끌어놓은 청록색 눈동자는 선명히 뜨여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지만, 하이포시스는 몸에 칼침이라도 맞은 것 처럼 한걸음 물러났다. " 하찮은 인간들의 왕이여. 너에게 나조차 어찌할 수 없는 한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건가? 네가 나를 더럽히고 파괴한다 했느냐. 하지만 나는 에린지움의 걸음이고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다. 이 땅의 햇빛도 풀도 나무도 사람도 모두 내가 살리고 내가 키운 것. 나를 더럽히는 일은 곳 이 세상을 더럽히는 일. " 아스는 슬픈 표정을 했다. " 나에게 더이상 죄를 짓도록 만들지 마라. " 하이포시스가 바락 악을 썼다. " 뭐, 뭐하느냐! 당장 저것의 입을 막아!!! 에잇-! " 그는 옆에 서 있던 친위병의 창을 빼앗아 아스에게로 던졌다. 그 역시 사막의 전사인지라, 그 창은 정확히 아스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어 명중했다. " 아아악!! " 짧은 비명이 터졌다. 햇빛도 사그라들고 형체도 없이 불던 바람도 멎었다. 기적은 가셨고 아스는 가슴이 창을 꽃은채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상처에서 투명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낫게 하는 비약이기도 한 그것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나왔다. 경외와 공포에 떨던 죄수들이 그 향기에 이끌려 흠칫 흠칫 다가오고 있었다. 하이포시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 트리옌들은 심장이 없다더니, 정말이구나!!! 가슴이 그같은 것을 꽃고도 아직 살아있다니- " 뿌드득. 곁에 있던 사이란이 주먹을 말아쥐며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친위대가 위협적으로 살기를 피워올리는 그를 향해 무기들을 겨눴다. 사이란이 분노에 찬 얼굴로 하이포시스를 노려보았다. " 경외도, 두려움도 모르는 하찮은 벌레같은 존재에게 팔아야 할 만큼 내 충성은 값싼 것이 아냐. " " 뭐-?! " " 아아 그래. 난 당신을 두려워 했다. 당신의 교활함과 잔인함과 냉정함을. 나를 유혹했던 그 후궁을 당신은 몹시 아꼈지. 하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베었어... 난 내가 너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이빨이 빠질때까지 이용당하다가 쓸모없어지면 그녀처럼 그렇게 손쉽게 버려질거란걸 알았기 때문에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어. 그래도 여태껏 용병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당신의 곁에 있었던건, 당신이 교활하고 냉혹한 남자더라도, 내가 먼 미래 헌산짝 처럼 버려지더라도 내가 충성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내가 돌아갈 곳을 제공해 줄줄 알았어... ... 하지만... 아니었군. " 아스의 주변으로 개미떼처럼 죄수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느 한명이 아스의 피를 핥고, 놀라운 치유력과 신선함과 마력을 경험하고 정신없이 달려들자 꿀을 탐하는 자들처럼 그들은 아스에게 달라붙었다. 창이 꽃힌 가슴에서 피는 쉴새없이 흘러내렸고 레지에게 당한 상처를 후비며 그들이 피를 짜내었다. 산채로 뜯어먹히는 기분이었다. 점점 십자가 기울어져 가며 그들 사이로 묻혀져 갔다. 번들거리는 광기와 욕망의 눈빛에 둘러싸인 그곳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온 몸을 축축하고 기분나쁜 혀와 뾰족한 이빨들이 유린하려 들고 있었다. 눈 앞에 새카매 지고 있었다. 피의 얼룩같은 잔상들이 스쳐지나가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힘이 폭주하려 하고 있었다. 자신을 잃어간다. 잔인하고 냉정하고... 사랑에 미쳐 흉폭한 카가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데서 폭주했다가는 자신은 필시 모두를 죽여버릴 것이 틀림없었고, 그리 되면 에린지움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지 모른다. 영영 자신을 잃어버리고 대륙의 재앙이 되어, 카멜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하고... 무스카리의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미쳐... 미쳐서... 목구멍이 뜨거웠다. 불의 봉인이 저주의 불길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아아, 그래. 미쳐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거야. 인간의 피에 취해 맘껏 날뛰고 자신을 잃어버리면, 그 어떤 고통도 책임도 자신의 운명따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지. 그리고 카멜이든 무스카리든,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맘편히 죽을 수 있을까... ... 눈 앞에 암흑이 뒤덮혔다. 그때였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끌며 다잡아주던 목소리. 절망의 구덩이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었던 다정한 사람. 그의 손이 아스의 손을 잡았다. 그가 비명처럼 아스의 이름을 외치면서, 모든 힘을 끌어모아 정령을 보내 아스 주변에 붙은 죄수들을 날려보냈다. 금발머리가 횃불처럼 휘날렸다. 아스는 흐릿하게 돌아오는 시야 너머로 간절히 그의 얼굴을 그리며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카멜... ... " " 아스님-!! 움직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 카멜... " 아스는 잠시 아무말 없이 카멜에게 안겼다. 주변의 상황이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그의 안온한 품에서 잠시나마라도 쉬고 싶었다. 카멜은 자신의 품에 안긴 아스의 머리를 꼭 끌어안으며 안도와 환희의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사람. 내 인생의 보물. 카멜은 아스의 정수리에 입맞췄다. 베스와 락시움 용병단이 주변으로 몰려드는 죄수들을 위협하고 검을 휘둘러 물리치는 동안 카멜은 아스를 품에서 떼네 옷자락을 찢어 그의 가슴에 난 상처를 지혈했다. 그 사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스의 몸은 바싹 말라 있었고 피부는 윤기를 잃었으며 머리카락은 퍼석퍼석 했다. 카멜은 저 추잡스러운 것들이 이 고귀한 몸에 손을 대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스 앞에서 이성을 잃은 모습따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이포시스는 갑자기 소용돌이 치는 정령의 기운과 아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카멜의 금발머리를 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 친위대-!! 당장 도망가지 못하도록 잡아라! 놓치지 마-!! " 그 명령에 몇명의 친위대들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무기가 없지만 악귀같이 달려드는 죄수들과, 거기에 친위대까지 합세하니 몇명 안되는 베스의 일행은 점점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이포시스는 친위대 두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물러났고, 친위대 세명에게 포위된 사이란도 허리춤에서 천천히 검을 꺼내고 있었다. 눈부신 푸른빛의 씽검. 사이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멜은 아스를 품에 안은 채 위협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아스를 품에 안은 채로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게다가 아스는 피를 보자 몸을 떨면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친위대와 베스의 일행은 격전을 벌이고 있었지만 엉켜드는 수백의 죄수들때문에 상황은 점점 난전으로 치닫고 있었고, 카멜은 자신의 망토를 벗어 아스에게 피가 튀지 않도록 감싸며 말했다. " 일단 먼저 빠져나가십시오. 저는 잠시 시간을 벌다가 곧 뒤따라 가겠습니다. 냉랭한 심해의 정령수여. " 카멜입 안에서 차가운 입김이 훅 흘러나오더니 곧 희고 거대한 뱀의 형체가 되었다. 카멜은 그에게 아스를 부탁했다. " 이분을 부탁드립니다. 속히 지하감옥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물길을 열어주십시오. " - 알았다. 상황을 판단한 베스가 지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서더니 아스의 길안내 겸 호위역으로 따라가라고 손짓했다. 지즈는 곧 아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카멜은 어지러운 아스의 눈동자위에 늘어뜨려진 그의 머리카락을 걷어올려주며 다정히 웃었다. " 잠시 후에 만나지요. " 카멜은 조용히 아스에게서 등을 돌렸다. 마음같아서는 아스가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고 이젠 더 이상 한순간이라도 떨어져 있고 싶진 않았지만 여기서 아스를 부둥켜 안고 싸우다가는 빠져나가기도 힘들 것이고 자기네들만 빠져나가기엔 도와준 베스일행은 버리고 갈 순 없었다. 다시 만났으니 잠깐의 이별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지즈의 손에 아스가 들어온 어두운 통로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카멜은 등을 돌렸다. 아스는 막 통로로 걸어들어가기 전, 하이포시스의 친위대를 상대로 저 위에서 눈부신 검술을 펼치고 있는 사이란을 보았다. 아스는 그를 두고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있는 힘껏 외쳤다. " 뉴사이란 쥬니퍼---!!!!!!! " 어지러운 싸움속에서도 사이란이 아스를 쳐다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고함을 치자 창에 맞은 가슴의 상처에서 쿨럭 피가 새어나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스는 다시 한번 힘을 모아 외쳤다. " 나와 같이 가자-! 너의 주인을 만나게 해줄게!! " 사이란의 푸른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망설임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하이포시스가 악을 쓰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어딜 간다는 거냐! 그 밑은 지하감옥뿐이다!! 넌 빠져나갈 수 없어 사이란-!!! " 사이란은 사슴처럼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무수히 아우성치는 죄수들의 머리를 밟고 아스의 곁에 내려섰다. 그는 하이포시스를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가, 곧 아스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엉겨드는 죄수 하나를 칼등으로 쳐 내리고는 말했다. " 약속을 지키길 바래. " 아스가 희미하게 웃어보이고, 지즈와 아스와 사이란은 죄수들이 들어차 아우성치고 있는 지하광장을 빠져나갔다. 사이란의 꽁무니를 하이포시스의 비명의 뒤따르고 있었다. 그는 지하 광장의 난간에 매달려 소리쳤다. " 가지마라! 가지마라 사이란-!!! 내가 잘 못 했다! 제발 날 떠나지마아---!!! "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었지만 귀신같은 지즈와 사이란의 검놀림에 모두들 짚자루처럼 쓰러져 갔다. 시커먼 동공이 입을 벌리고, 셋은 그곳으로 내달렸다. 아스가 완전히 멀어져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카멜은 긴 장검을 곧추잡았다. 숫자와 베어도 베어도 끝이 없는 좀비같은 죄수들의 기색에 떠밀려 베스 일행은 자잘한 상처를 입은채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카멜은 그들 앞으로 한발짝 내딛었다. 새파란 녹색 눈동자가 경멸을 담은채 벌레처럼 모여드는 죄수들을 노려보았다. 버러지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이 아스의 몸에 손을 댔다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무스카리 외의 사람에겐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차가운 혐오와 냉혹스런 분노가 치밀어 올라, 카멜은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의 장검이 한번 스쳐 지나가자, 무수한 목이 삐거덕 꺾여 달아나며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자신이 곁에 있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아스가 손에 피를 묻혔다. 고결한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 카멜은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자책, 분노와 혐오와 경멸을 담아 마음껏 검을 휘둘렀다. 그것이야 말로 일방적인 살육에 지나지 않았다. 숲의 저주, 불타는 모든 것들의 제왕 무스카리마저도 어쩌지 못한다는, 글로리 나이트의 이름을 최초로 얻은 아리스타타 첫번째 묘목. 그의 강함은 그곳에 있는 모든 존재를 초월하고 있었다. 무기력한 죄수들은 그저 카멜의 검 앞에 목을 디밀 뿐이었고 검을 쓸 줄 안다는 친위대들은 질린 표정으로 흠칫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베스조차도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의 강함에 놀라고 말았다. 절로 검을 잡은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모든 검을 잡은 자가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검사가 바로 저기에 있었다. 한번 팔을 휘두르면 남는 빛의 잔상에 피의 날개가 펼쳐지고, 인정사정 없는 손놀림 아래 생명은 생명이 아니었다. 용족의 날개마저도 종잇장 찢듯 잘라버린다는 날개 살해자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아리스타타가 키워낸 맹수의 진면목이었다. 아스와 사이란은 지즈의 안내 아래 정신없이 길을 내달렸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들은 길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암흑 속을 달리다 보니 방향감각을 잊어버렸고, 들어올땐 아스의 폭주하려는 느낌을 잡고 달리기 시작하는 카멜을 따라 미로를 통과했지만 그들 셋이서는 지하감옥의 미로처럼 얽힌 굴 속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걸음을 멈췄을땐 칠흑같은 암흑속에 휩싸인 채였다. " ... 길을 잃은 것이 아닌가? " " 맞다. 틀림없이 들어온 길로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 사이란이 대꾸했다. " 그렇게 만만하게 빠져나갈 곳 같았으면 누구라도 빠져나갔지. 지하감옥은 끝이없는 미로로 커다란 왕궁의 지하를 모조리 차지하고도 더 크다고 했어. 너희들은 틀림없이 수로로 들어왔겠지? " " 그렇다. " 아스가 황급히 자신에게 붙은 심해의 정령수에게 말을 여쭈었다. " 물의 정령수시여, 물줄기가 어느쪽에 있는지 느껴지십니까? " 아스의 입김이 차갑게 얼며 흰 뱀의 모습을 했다. 그것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 물론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물의 흐름만을 느낄뿐 거기까지 가기 위한 길 안내는 하지 못한다. 방향은 잡아줄 수 있겠지만... " 그럼 부탁드립니다. " 세사람은 이제 뛰지 않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스는 새카만 어둠속에서 침묵속에 걸으며 생각속에 빠졌다. 자신을 안아오는 다정한 손길. 청량한 향기. 부드러운 미소. 카멜... 가슴이 쿵덕거리면서 뛰었다. - 그렇습니까. 그를 사랑하시는군요. 모든 것을 아스님께 준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 -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에겐 네가 필요해 카멜!! - 정말 이기적이시군요. 저를 사랑하지도 않으시면서, 단지 필요하니까...? 단지 필요하니까... 단지 필요하니까... 꿈 속의 말이었을 뿐이건만. 그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 치고 있었다. 무스카리 가져간건 내 마음의 전부였고, 그에게 남은 마음은 없었다... 카멜, 그는 늘 말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아스는 다시 카멜의 품에 안기면서 느꼈던, 덜텅 하고 떨어지는 죄책감의 무게에 잠시 걸음을 휘청였다. 나는... 어쩌면 여태까지 그것을 당연하게만 받아들였던 걸까. 어째서 그랬던 걸까. 나에게 그런 자격은 없는데. 내가 사랑하는건 무스카리인데. 아직까지도 카멜의 따스한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방금 카멜의 품안에 안겨있으면서 느꼈던 안도감과 편안함. 하지만... 이런 죽음의 장소에까지 자신을 구하러 달려온 그는... 그런 그의 마음은... 난, 그의 사랑에 기대어 여태껏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던 거야. 난 어째서 이토록이나 이기적이고 어리석을까! 그가 정말로 나에게 주기만 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했던 걸까...! 무스카리를 사랑하는 주제에, 그에게 입은 상처를 카멜에게 안고 간다.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그에게 잔인하고 힘겨운 일이었을까. 난 내 상처와 내 감정에만 빠져서 조금도 카멜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갑작스런 깨달음이었다. 그동안 너무 힘겹고 힘들어서, 그저 그의 곁에 돌아가고 싶다고만 생각하던 아스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갈림길이 나오자, 냉랭한 심해의 정령수가 물줄기에서 좀 더 가까운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한참을 암흑의 길을 따라서 걷다가, 사이란이 갑자기 검을 휘둘렀다. 아스의 옷자락을 잡으려 내밀던 손이 비명을 지르며 어둠 안으로 사라져갔다. 아스가 흠칫 놀라자, 지즈가 잇소리를 내며 말했다. " 포위되었군요. " 광장에 있는 죄수들이 이 암흑세계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둠속에 도사리고 먹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들은 그들의 함정속에서 세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곧 여기저기서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들이 그들에게 달라붙고, 지즈가 기합성을 내지르고 사이란이 고함을 치는 가운데, 아스만이 냉랭한 심해의 정령수가 발하는 한기에 온전할 수 있었다. 그 한기에 닿은 것들은 얼어붙어버렸다. 사이란은 전신에서 달라붙어 오는 손을 떼네며 외쳤다. " 도망가! " " 그럴 순 없어! 내게도 검을 줘! " " 제기랄, 쌍검술의 용병 사이란을 우습게 보지 마! 이 어둠 속에서 널 다치지 않게 하면서 검을 휘두르는게 더 힘들단 말이야! " " 정령수여...!! " -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나의 힘은 여전히 글로리 나이트에게 깃들여져 있을 뿐. 여기 있는건 그저 분신이니 저들까지 지켜줄 능력은 없다. " 하지만...!! " 그때, 갑자기 뭐라고 더 말을 하려던 정령수의 뱀모양 분신의 몸 주변으로 붉은 기운의 무언가가 둘러쳐지며 그것은 입을 다물고 굳어버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 놀란 아스가 뭐라고 말하려 할때, 아스의 뒷편 어둠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아스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크고, 단단하고, 따스한 손바닥. 어둠속에서 그에게 끌려가며 아스는 낯익은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이 저려왔다. 눈가가 시큰해져왔다. 말할 순 없지만, 아스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스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스가 증오한다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 " 무스카리... ... " 어둠속에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스는 자신을 이끄는 그의 손에 매달려 길을 달렸다. 무수한 말들과 감정이 안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자신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닿은 것은 카멜과 베스 일행이 올라왔던 커다란 지하의 못 앞이었다. 무스카리의 모습은 여전히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 아스의 팔을 놓았다. 아스는 멀어져 가는 그의 손을 다시 붙잡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그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나를 구하러 왔던 것일까? 그를 증오한다고 말했던 자신을. 그를 사랑할수도 미워할수도 없는. 아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스카리가 입을 열었다. " ... 일행은 길은 좀 헤매겠지만 곧 당도할것이다. 얼른 이곳에서 빠져나가라. 물에 몸을 적시고 바깥의 공기를 쐬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양호해 질테니. " 아스의 가슴팍에 난 상처들은 지혈은 했다지만 심각한 것이었다. 무스카리는 손을 뻗어 그것을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에겐 아스와 같은 치유능력이 없다. 마법을 써봤자 튕길뿐이다. 무스카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 ... 가라. " " 무스카리... " 그는 지체없이 몸을 돌렸다. 아스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왜 나를 붙잡지 않는거지. 그동안 나를 쫓아오지 않은 이유는 뭐였을까. 나를 구하러 온 것은 왜이고 그렇다면 왜 물러나 있었으며 카멜을 보고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건 왜일까... 지금이라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을 다시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데 왜 그러지 않는 걸까... 무스카리는 암흑속에 녹듯 사라졌다. 아스는 그가 붙잡았던 팔뚝에 남은 선명하게 달아오른 자국을 보았다. 그는 마치 자신의 팔을 잡은 것이 아니라 심장을 잡은 듯 했다. 고통스러웠다. 이 상황에서, 카멜이 자신을 미친듯이 걱정하고 여기까지 구하러 온 상황에서 자신은 무스카리를 부르고 싶다. 차라리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하고 싶다. 몸이 찢기는 고통 너머에서라도, 트리옌의 존속도 카멜의 목숨도 에린지움의 광채도 모두 잊어버리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무슨 댓가를 치르더라도 좋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아스는 소리없이 눈물을 훔쳤다. 카멜, 카멜. 미안해... 난 역시... 네 품에 안길 자격이 없어. 나는... 그를 사랑해... 무스카리가 걸어가는 발걸음마다 불씨가 태어나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에서 나온 불타는 것이 그의 다리와 허리와 어깨를 타고 붉은 불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일렁이는 몸체는 끊임없이 생겨났다 허물어지며 찬란한 색채를 뿜어내었다. 주황색과 금색, 붉은 색과 청색과 녹색으로 일렁였다 다시 주황색과 금색으로 숨쉬는 것 처럼 꿈틀거린다. 그것은 무스카리의 가슴을 타고 들어가며 불씨가 타는 듯 속삭였다. - 왜 그를 놓아준 거지? "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 - 아니, 넌 상관해야만 돼. 화르륵-!! 무스카리의 몸도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뜨거움이나 고통따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서서히 불꽃으로 화하는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 이제 곧 이 몸은 내 것이 된다. " 그렇겠지... " 무스카리의 금안 한쪽이 적안으로 변했다. 불의 짐승은 무스카리의 안으로 반쯤 스며들어와, 그의 얼굴 반쪽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붉은 눈을 반짝거리며 으르렁 거렸다. - 어리석은 용족아. 어째서 나와의 계약을 받아들였나. 나는 너를 이용했을 뿐. 내가 내건 조건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느냐? 그때. 사흘 밤낮 안드리움의 가장 깊은 심연 속, 불길밖에 없는 공간에서 이 짐승을 쫓아 대면할 수 있었던 때. " 내겐 힘이 필요했다. 카멜을 능가하고 아스를 다시 되찾아올 수 있는 힘이. ... 그리고 어머니 에리카 로벨리아에게 그의 심장을 뺏기지 않을 힘이. ... 나야말로 궁금하군. 왜 하필 그런 조건을 내걸었지 너는? " 불타는 심연의 정령수가 씨익 웃었다. 그에 따라 무스카리의 한쪽 얼굴도 그 미소를 따라 비틀렸다. - 그것이 불가능하니까. 너도 그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 나와 무모한 계약을 한 건가? 이렇게 될 것을 뻔히 알았으면서. 정령수의 한쪽 팔이 무스카리의 가슴팍을 파고들며 옷을 불태웠다. 무스카리는 자조했다. " 알았다라... 그래. 불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믿고 싶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듣고 싶었어. 그 말을 듣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지. 나는 지금까지도 어쩌면... 아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헛된 희망을 품고 있다. 그가 내게 사랑한다고 그 입술을 열어 말해주길 바라고 있다. " -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해. 그가 네게 그럴리가 없어. 우리는 계약했지. 에린지움의 걸음에게서 네가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순순히 네게 힘을 빌려주고 네가 거부하면 다시 심연의 어둠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 너의 몸과 힘은 내가 가지겠다고. 그리고 너는 계약을 지키지 못했어. 짐승은 잔인하게 속삭였다. 무스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리가 없다. 아리스타타를 능욕한 후 끝내 죽여버리고, 다시 만난 그 마저도 카멜의 손에 빼앗아 들어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짓누르고, 지금은 카멜이 모든 것을 주었다 말하며 내게서 달아난 그는... 에린지움의 걸음. 빛나는 숲의 은빛 여왕. 천년의 군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 누구도 사랑할리 없을거라 생각했던 그녀였었는데... 이제 그는 카멜을 사랑한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 그 아름다운 트리옌을. 이렇게 될 바에야 죽여버리는게 나았을거라고 때때로 마음이 속삭인다. 하지만 자신은 변했다. 터질듯 했던 집착과 분노와 증오, 욕망과 광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것 너머로 그를 사랑하는 자신이 존재한다. 가슴에 칼을 꽃고 죽을 바에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더라도 여전히 그가 살아있길 바라는 자신이 있다. 마음 속에서 햇살의 조각처럼 빛나는... 그의 미소가 있다. 활발하고 천진하고 순수하며, 자신만을 아끼고 따르던. 아리스타타였을때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냥함을 자신에게 베푼 조그만 소년의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이 있는 한, 자신은 아스를 미워할수도, 죽일 수도, 짓밟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모든 추억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다시 암흑속에서 몸부림칠바엔... 차라리 그가 나를 사랑하길 바라며 비참한 기대를 하는 자신을 보는 것이 낫다. 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느니, 그의 행복을 부수지도 못하느니, 그를 억지로 가지지도 못하느니, 그의 죽음이라도 욕망하지 못하느니... 그냥 죽어버리는게 낫다. 무스카리는 이토록이나 무력해진 자신을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서서히 불의 짐승이 자신의 몸을 잠식해 들어오는데도 반항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불의 저주, 사랑한다 말할 수 없는 아스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심연의 정령수에게 무스카리의 간절했던 바램은 그저 그의 승리가 확실했던, 그를 차지하기 위한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강인한 존재가 사랑때문에 허물어져 가는 모습은 파괴하는 본성을 지닌 불의 정령수에겐 흥미로운 놀잇감일 뿐이었다. - 어리석구나. 네가 사랑이라 믿는 그것이 너를 죽이고 있다. 무스카리는 엷게 미소지었다. 그에게서 볼 수 없었던 평온한 미소였다. " 차라리 바라던 일이었다. " 아아, 그래. 마지막으로... 아스의 미소를.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 미소를 다시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아스가 간신히 눈물을 수습하고 나자, 불의 봉인에 갇혀 잠시동안 꼼짝도 하고 있지 않던 정령수의 분신이 돌아오고, 어두운 통로 저 쪽에서 사이란과 지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자잘한 생채기와 약간 그을린 자국을 제외하고는 다들 건강한 모습이었다. 아스는 얼른 슬픔을 걷어내고 애써 웃어보였다. " 무사했구나-!! " " 어, 그래. 길 헤맨게 다야. 갑자기 어디선가 불길이 일어나는 바람에 간신히 도망쳐 나올 수 있었어. 저김 저 안은 완전히 아비규환이야. " " 불이 났다고? " " 응. " 아마도 무스카리의 짓일 것이다. 아스는 빠져나오지 못한 카멜이 걱정되었다. 그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정령수의 분신이 대꾸했다. - 카멜은 나와 함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찌되었건 귀찮은 것들이 다시 나타나기 전에 나가는 것이 좋겠군. 아스는 그의 어조에서 무스카리가 다시 나타날까봐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스카리가 나타난 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잠시동안 봉인에 갇혀 꼼짝하지 못했으니 누가 다녀갔는지 짐작했을 것이다. 어지럽게 소용돌이 치던 시커먼 물줄기가, 흰 뱀이 뭐라고 욾조린 한마디에 잠잠해졌다. - 잠시 물길을 막아놨다. 물 속에서 나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세명은 망설이지 않고 물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입 주변으로 정령수의 분신이 공기층을 만들어주어 숨쉬는데 아무런 지장이 생기질 않았다. 아스는 신선하고 차가운 물이 몸을 감싸자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었던 몸에 원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라면 출혈이 멎지 않을 물속이었지만, 트리옌인 아스는 신선한 물이 몸을 감싸자 되려 출혈이 멎었다. 셋은 어두운 물속을 빠져나가 카멜과 베스 일행이 들어왔던 길을 되짚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물 바닥에까지 이르렀다. 지즈는 물통과 연결된 밧줄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 이것을 타고 나가면 된다. 밖에 우리 동료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 " 당신은... ? " " 난 단장과 함께 돌아가겠다. " - 그럼 나도 이 자와 함께 본체로 돌아가겠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모두... " " 현상금 때문이니 고마워 할 필요 없다. " 지즈는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어둠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스는 사이란의 도움을 받으며 우물 밖으로 기어나왔다. 우물 근처 그늘진 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사람 하나가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 아스님이시죠? 탈출이 성공했나 보군요. 하이포시스 왕이 경계령을 내려 모든 성문이 닫혔습니다. 저희가 준비해둔 탈출로가 있으니 먼저 나가시지요. 밖에 미리 정해둔 접선지점이 있습니다. " 아스와 사이란은 그를 따라 진흙집이 늘어서 성벽과 맞닿인 구석진 골목으로 갔다. 골목으로 가는 길에 식량과 물이 실린 말 두필을 어느 집 헛간 뒷켠에 매어두었다가 데리고 왔다. 그가 성벽에 손바닥을 대자, 미리 성벽에 그려둔 것인듯 희미하게 마법진이 떠오르며 오십센티 두께의 성벽저편으로 공간이 열렸다. 그는 말들을 먼저 보내고, 아스에게 당부했다. " 저기 보이는 별을 따라 쭉 가시다 보면 커다란 붉은 바위가 보일 겁니다. 거기서 기다리십시오. 해가 질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으면 먼저 남쪽으로 내려가시고, 하이포시스의 병사가 접근해도 마찬가지로 하십시오. ... 그런데 카멜님과 같이 오실 줄 알았는데. 이 자는 누굽니까? " " 제 친구입니다. 그리고... 저희와 접선하려 하지 마시고, 이곳을 탈출하게 되면 되는대로 남쪽으로 내려가십시오. 우리는 먼저 남쪽으로 가겠습니다. " " 길도 모르시면서 사막을 건너는건 위험합니다. 다소의 위험부담을 감수하더라도... " " 제 친구가 사막길을 잘 알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카멜에게 전해주세요. " 남자는 아스가 혼자 먼저 가겠다는 말에 당황한 듯 했다. 아스는 사이란을 벽 너머로 먼저 넘겨 보내고 말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애써 말했다. 원래는 카멜에게 직접 해줘야 하는 말이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서는 입술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 미안하다고... 아스포델이 정말 미안하다고 전해달랬다고 말해주세요. " " 예에? " 아스는 마법진을 너머 성벽 밖으로 나갔다. 사이란이 말에 올라타고, 아스도 그곳에 올라탔다. 성벽에 뚫린 마법진의 문이 닫히고, 둘은 말을 달렸다. 사이란이 물었다. 떠오르는 동과 함께 모래 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 왜 혼자 가려는 거지? 너를 구하러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었잖아-! " " ...이제 내 일이니까. 모두다...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니까. " " ... 뭐, 난 모르겠다. 아무튼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다 틀어졌으니까. 내 주인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약속, 잊어버리지 마. " " 알고 있어. 드라세나로 가자! " 그리고 축복의 성으로 가자. 에린지움의 곁으로 가자.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이제 모든 마음의 방황과 번민을 접자. 그곳에서 아리스타타의 무덤과 에린지움만을 지키며 살겠다고, 무스카리를 사랑하는 마음도 접고 잊혀진 듯 에린지움의 그림자가 되어 살겠다면... 카멜 넌, 너를 사랑하지 못한 나를 용서해 줄까...? 떠오르는 사막의 일출은 아름다웠다. 사막의 하늘을 다시 태우려 영원을 솟구치는 태양을 나란히 하고, 말 두마리는 남쪽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간신히 지하광장을 쓸어버리다 시피 하고 길을 더듬어 내려갔을때, 이리저리 어지럽게 뒤얽힌 지하동공들은 시뻘건 화염에 삼켜져 그 안의 어둠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몇년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인육을 먹으며 살아가던 자들이 겁화에 죄를 태우며 생명의 불씨를 꺼트려 가고 있었다. 사방이 비명과 화염, 불똥으로 지옥불을 연상케 하고 있었으며 연기와 불이 살라먹은 산소 때문에 숨쉬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하지만 카멜과 베스 일행은 심해의 정령수의 도움으로 조심스럽게 그 길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카멜의 어깨를 타고 앉은 흰 뱀이 내뿜는 차가운 수증기가 일행을 감싸 화염이 접근치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런 지하에서 이런 불이 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카멜은 이곳에 무스카리가 있음을 직감했다. - ... 나의 분신이 잠깐 불의 정령수가 만든 굴레에 씌였었다. 산소가 없는 곳에서도 타는 이 불은 정상이 아니야. 이것은 네 짐작대로 심연의 정령수가 일으킨 것이다. " 그는 어디에 있는 거죠? 아스님은 안전하신 겁니까? " - 그런 것 같군. 그는 나의 분신과 함께 물길을 뚫고 밖으로 나갔다. 이런 불길속에서는 그의 존재를 잡아내기가 어렵다. 허나 불길하군.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불의 짐승이 에린지움의 걸음을 순순히 놓아줬다는 것은 뭔가 음모가 있을 터. 열기를 타고 그놈의 환희가 희미하게 전해지고 있다. 카멜은 일단 아스가 안전하다는 말에 한시름 놓을 수는 있었지만, 무스카리가 그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 그리고서도 그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아스를 그냥 보내 줬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방금 잠깐 본 것으로는 도통 안심할 수 없다. 게다가 몸에 그런 부상을 입고... 카멜은 하이포시스의 목을 베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는 카멜이 날뛰기 시작하자 마자 친위대를 데리고 궁전으로 도망을 갔으며, 탈출이 먼저였기 때문에 돌아나온 것이다. 불길이 미친듯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텅빈 동공과 어둠과 지하 바닥을 샅샅히 훑고 있었다. 카멜일행이 물길속으로 들어갔을때 쯤에는, 지하세계의 동굴과 벽과 바닥은 꺼질줄 모르는 지독한 열기에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사람의 뼛골도 암석마저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훑어대는 화염 속에서, 무스카리... 아니, 불타는 심연의 정령수는 웃고 있었다. -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이제 곧 태워버리겠다. 모든 것을! 에린지움의 걸음 마저도 나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이제 곧 그 증오스런 나무를 태워버리고 모든 것을 삼켜버릴때가 머잖았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울부짖어라! 발버둥쳐라! 내가 나의 날개를 다시 손에 넣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테니까!!!! 아하하하하하핫----!!!! " 뭐라고-? " 카멜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을 듣긴 했지만, 머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카멜의 되물음에 남자는 난처하다는 듯 다시 말했다. " 아스님께서는 먼저 남쪽으로 내려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카멜님께 아스포델이 미안하다 했다고 전해달라... 컥-!!! " 카멜은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멱살을 붙잡고는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베스는 화내는 카멜의 모습을 보고 찔끔 놀랐다. 언제나 아스의 옆에서 상냥하게 웃음짓고 대하기 어려운 정중함이 있던 남자였는데, 지하광장에서 서슴없이 죄수들을 도륙하는 모습도 그랬지만 지금 애꿎은 자신의 단원을 채근하는 카멜의 화내는 모습은 무서웠다. 그리고 그에게서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이었다. " 지금... 아스포델이라고 했나? " " 큭... 커... 이 것... 좀 놔주십... " " 카멜리아, 그만 하지. 그래서는 할 말도 못하겠잖아!! " 베스는 황급히 카멜을 만류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어정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얼른 마법진을 열고 도망나가야 하는데, 카멜은 아스가 먼저 갔다는 말에 병사들이 달려올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카멜이 손의 힘을 풀자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카멜의 얼굴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남자를 응시하면서 중얼거렸다. " ...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아스포델이라고 말씀하셨을리가 없어... " 베스는 의아하게 여겼다. 아스의 이름은 리아트리스가 아닌가? 게다가 미안하다는 말에 놀란게 아니라 그 이름에 놀란 모양이었다. 카멜은 한걸음 뒤로 물러다니더 머리를 짚었다. 아스포델은... 무스카리 그가 지어준 이름이다. 아스는 자신과 만난 후 단 한번도 그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자신이 그의 모든 것을 주었다. 비어버린 그의 이름, 리아트리스를 주었는데, 어째서... 어째서... 리아트리스도 아닌 아스포델이,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걸까. 베스는 패닉에 빠진 카멜을 내버려두고 마법진을 열고는 단원들을 넘겨 보냈다. 마지막으로 카멜과 베스와 마법진을 연 그 남자만이 남자, 베스가 카멜을 채근했다. " 뭐가 충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길 나가야 아스를 다시 만나 뭘 묻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 " ... 그래... 물어야 해. " 뭐가 미안한건지. 왜 아스포델이라 말한건지. 하필 아스포델이 자신에게 미안한건지. 카멜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머리가 멍하고 가슴이 뛸 뿐이었다. 그 말에 들어서는 안 될 말인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고 자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명확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도 가지 않았고, 납득도 할 수 없었다. 직접 찾아서 물어야 했다. 무사한지. 무스카리에게 무슨 해코지는 당하지 않았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상처가 어떤지 살펴주고, 아직 자신의 리아트리스인건지 물어야 했다. 만약 무슨 대답을 듣는다면 아스의 입에서 직접이어야만 했다. 카멜은 베스와 함께 마법진을 넘었다. 마법진을 만든 남자도 넘고, 곧 마법진은 꺼졌다. 성벽 밖에 나온 자들은 벌써 말을 달리고 있었다. 멀리 성문이 열리면서 하이포시스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성벽 위에서도 병사들이 올라서서 활을 쏘고 있었다. 카멜은 혼란스런 마음을 가누려고 노력하며 말위에 올랐다. 일단 그는 아스를 만나야 했다. 일행은 군사들의 추격을 따돌리며 남으로 향했다. 레지와 계약아닌 계약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월은, 일단 축복의 성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혼자서 알아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알아보았지만 펜의 병에 관한 것도, 에린지움의 방에 관한 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에린지움은 천년간 철저히 아리스타타와 함께 해 왔기에 에린지움에 관한 어떤 것도 문서나 그림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문서나 기록들은 트리옌이나 축복의 성에 대한 것들 뿐이었고 대부분의 자료가 삼백년전 있었던 대륙전쟁에 관한 것들이었다. 에린지움에 관한 가장 많은 자료들은 아리스타타의 시신을 안치하러 들어갔을때와 펜을 만들기 위해 그때 체취해온 줄기에 관한 연구내용들 뿐이었다. 아리스타타만이 에린지움의 신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아리스타타와 동행한 자만이 에린지움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인데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월은, 고통에 시달리는 펜을 만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 ... 에린지움의... 방이라구요? " " 예. 용족에게 펜님의 이런 증상이 새나간 이상... 그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전 펜님이 일단 완전한... 에린지움의 힘을 행사하실 수 있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란 믿음을 가지고 거기에 응했습니다. " " 레제다 튜베로즈... 우리는 용족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죠. 대륙전쟁때까지는 그와 마찰도 없었고... 헉... 헉... 나의 병세에 대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어요. ... 너무 염려치 말아요. 월의 말처럼 이것은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예요.... 후... 정말로 그가 에린지움이 이 차원의, 이 땅의 어디에 실존하는 나무라면... " 펜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아스가 죽는다면. " ... 난 죄의 업보를 물리치고 에린지움의 걸음이 될 가능성을 갖게 되겠지요. ...하지만 나도 에린지움이 어디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헉헉... 나의 지식은 채 삼백년이 되지 않은 짧은 것. 그에 관해서는 나보다... 아리스타타의 묘목이었던 스피리아 로단테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예요. ...그라면... 묘목인 그라면 어렸을때 에린지움의 곁에서 자랐을 겁니다... " " 네? " " 지금은 그녀의 묘목이 카멜과 로단테밖에 남지 않은 탓에 대부분이 모르고 있지만... 아리스타타의 묘목들은... 어릴때, 에린지움의 곁에서 자라요. 헉, 헉... 본체인 나무는 아리스타타가 직접 돌본다고 해도 다른 트리옌과 똑같이 지상에서 자라죠. 묘목들이 특별했던.... 이유는 에린지움의 곁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축복의 성에서... 자라면서... 아리스타타와 함께... 에린지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꼈다고 알고 있어요. " " 그렇군요. " " 로단테라면...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그에게 도움을 구하세요. 그는 무척이나 현명한 사람이니 나를 도와줄거예요... 후우... " 펜은 간신히 말을 맺고느 거친 호흡을 고르며 침대에 다시 누웠다. 펜의 얼굴은 파리했다. 카멜이 떠난 이후로는 발작도, 검은 얼룩도 더 번지지 않았지만 펜의 상태는 결코 예전같지 못했다. 그녀는 결계를 유지하는데에만 모든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몸을 돌볼 여유조차 없었다. 월은 지체없이, 다시 결계로 내려가 로단테를 만났다. 그는 갑작스럽게 직접 찾아온 월의 용무를 의아해 했지만, 곧 에린지움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다고, 그에 관해 짐작가는바가 없느냐고 묻는 말에 대꾸했다. " ... 펜님의 병 때문입니까? 그 분이 에린지움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니까... " " ... 그렇습니다. " " 하지만 설사 펜님이 방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아스님이 살아계시는 이상 에린지움의 힘은... " 로단테는 말꼬리를 감췄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펜이 살려면 아스가 죽어야 하고, 아스가 죽으면 펜이 살 수 있었다. 로단테도 펜이 그동안 해온 노력과 그녀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비록 아리스타타의 환생체라지만 아스가 나타난 뒤 악화되고 있는 상황 역시도... 그는 신중히 대답을 골랐다. " 카멜님이 틀림없이 아스님을 데려오실 겁니다. 그가 오면 무슨 수가 생길런지도 모릅니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시오 젊은 트리옌이여... 리아트리스님이 죽으면 에린지움의 힘이 펜님께로 갈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그리고 셋은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 리아트리스의 죽음이 펜 오키드님께 아무런 영향이 가지 않을거라 어찌 장담하시오? 그러니까 극단적인 방법은 생각치 말았으면 싶습니다. " " ... 그는 언제 축복의 성에 도착할지 모릅니다. 굳이 그를 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에린지움의 곁에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펜님은 많이 나아지실 겁니다. 가르쳐 주시오 스피리아 로단테시여. " " ... 에린지움이 이 세계의 어디에 있는지 난 잘 알지 못하오. 하지만 그곳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오. 흰 모래바닥과 하늘로 닿은 흰 에린지움의 그림자. 그리고 지평선에서 일렁이던 하얀 파도와 푸른 하늘. 영원히 지지 않는 해와 달이 뜬 곳. " 월은 조급함에 물었다. " 그리하면 당신도 에린지움이 어딨는지는 짐작하지 못하신단 말씀이오? " " ... 아니오. 짐작일 뿐이지만... 에린지움이 있을 수 있는 곳은 단 한군데 뿐이오. ... 그것은, 바로 세상의 끝이라 일컬어지는 빙원의 끝일 것이오. " 월은 눈을 크게 떴다. 세상의 끝. 세상의 북쪽. 안드리움 산맥너머 빙원과 끝없는 빙해를 지나 존재한다는 곳. 오로라를 타지 않으면 갈 수 없다 전해지는 전설속의 장소. " ... 어째서 그곳이라 생각하시지요? " " 해와 달이 지지 않고 밤이 없는 곳이라면 그곳밖에 없소. 그리고 난 거기서 보았던 그 포말이 빙해의 것이라 생각하오. 사실, 세상의 끝이 아니라면 에린지움이 대체 이 대륙 어디에 있을거라 생각한단 말씀이오? "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끝은 용족의 땅 너머에 있다. 황무지와 불볕 사막과 안드리움 화산과 눈의 숲과 끝없이 차가운 빙설의 빙원을 너머... 아무도 가 닿지 못했다는 빙해 저편. 월은 절망했다. 거기라면 설사 장소를 안다고 해도 펜은 갈 수 없다. 로단테는 주저앉고만 월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 아스님을 기다립시다. 시공을 넘어서 그분을 찾아오셨던 카멜이오. 그는 틀림없이 축복의 성으로 돌아 올 것이오. " " 하지만 그가 온다 해서 펜이 살아날 수 있으실까요? 그가 있는한 펜님은 영원히 에린지움의 걸음이 될 수 없습니다. 죄를 짓고 에린지움을 더럽히는 자가 어째서... 어째서 에린지움의 걸음인 겁니까!!! 왜 펜님이 아니신 겁니까!!! " " 죄는 그것을 지은 자만이 속죄할 수 있는 것이오. " 월은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석상같이 무표정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그의 부모는 펜이었고 그의 삶의 가치와 목적도 당연한듯 펜이었다. 여태까지 그 모든 것에 어떤 의문도 느끼지 못했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여겼기에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강인하고 아름답던 그녀. 동정의 여지조차 잘라버리던 그녀였기에 자신의 어줍잖은 감정따위는 필요없다 생각했었는데...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월은 그동안의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펜이 자신에게 가지는 의미. 그녀가 자신에게 준 모든 것. 단지 '의무' 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얼마나 감사히 여기고 기뻐하며 행복이라 생각했는지, 그는 이제서야 알았던 것이다. 아스는 정화석도 없이 사막에서 상처와 더위와 메마름에 고통받았다. 사이란과 말에 실린 식량과 물이 아니었으면 그야말로 꼼짝없이 말라죽었을 것이다. 하이포시스가 수배령을 내렸기 때문에 오아시스가 있는 곳엔 갈 수 없었고, 사이란은 일단 아스의 몸상태를 돌보지 않고 미친듯이 말을 몰아 사막을 빠져나갔다. 아스가 그 내내 거의 혼수상태였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낮엔 그늘을 찾아 쉬고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달렸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불볕사막과 그 위에 가득한 바다같던 모래들은 서서히 딱딱한 돌과 거친 흙으로 변하더니 군데군데 성긴 덤불과 풀쪼가리를 내보이고 있었다. 자갈 사막을 한참 더 지나고 나서야, 남쪽의 경계선으로 상징되는 결계의 나무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스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건 그때부터 였다. 결계가 점점 가까워져 오자 거기에서 전해져 오는 힘에 기운이 어느정도 돌아온 것이다. " 아아- 저것이 말로만 듣던 그, 브리오니아 결계로군. " " ... 그래. " 떠난지 얼마되지 않았건만 황무지에 우뚝 솟아난 무성한 잎사귀를 단 나무와, 그 주변으로 둘러쳐진 푸르스름한 장막이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큼이나 반가웠다. 그래. 이곳이다. 아스는 떠오르려는 과거를 조용히 묻었다. 둘은 천천히 말을 몰아 결계를 통과했다. 사이란은 결계 안으로 들어오자 아스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햇살같은 부드러운 빛이 아스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물지 못하고 있던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메마르고 거칠어졌던 피부에 윤기가 돌아오고 퍼석퍼석하던 머리카락이 제 빛을 발하며 순식간에 길어지기 시작했다. 아스는 몸 안에 충만히 차오르는 에린지움의 느낌이 기뻤다. 몸의 실핏줄과 혈관 모두를 타고 흐르는 이 축복받은 기운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새삼스러웠다. 처음 이 세계로 와 맑은 공기를 느꼈을 때같은 환희가 들어찼다. 아름다운 햇빛. 신선한 공기. 축복받은 대지. 풍부한 물. 이곳은 에린지움의 땅이었다. 사이란은 다 죽어가던 아스가 제정신을 차리고, 선명한 청록색 눈동자를 들어올려 자신을 보자, 그동안 봐왔던 그의 외모가 수박 겉핥기 식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린지움의 힘이 충만한 그는 그야말로, 신이 빚어낸 최고의 풍경이었다. 대자연의 수려한 풍광을 앞에 두고서만 느낄 수 있는 경이로움과 감탄이 그를 사로잡았다. 사이란은 진심으로, 역시 그는 이곳에, 푸른 숲에 둘러싸여 있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느끼고는 그가 정말로 하이포시스의 궁전에 붙들려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스는 치렁치렁하게 길어버린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한 손에 잡더니, 사이란에게 단검을 빌려달라고 해서 그것을 인정사정 없이 싹둑 잘라버렸다. 바닥에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보고 사이란이 외쳤다. " 아깝게 왜 잘라! " " 거추장스럽기만 해. 안 그래도 잘라야 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잘됐다. " 아스의 머리카락은 다시 귀밑에서 처량맞게 나풀거리고 있었다. 사이란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말했다. " 그렇게 바닥에 흩어버릴거면 진즉 말하지. " " 왜? " " 팔면 돈될텐데. " 아스는 눈을 부라렸고 사이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 아무튼 네가 기력을 되찾으니 정말 살것 같다. 골골거리는 너 데리고 사막에서 도망쳐나오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 그의 말마따나 보송보송해진 아스와는 달리 사이란은 여행의 피로로 지쳐 푸석푸석했다. 결좋던 흑청색 고수머리는 엉망으로 솟구쳐 있었고 거칠거칠해진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 제기랄, 네 그 미덥잖은 약속에 끌려온거니까. 책임지라고. " " 알았어. 나를 도와줘서 고맙다. " 아스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정령을 불렀다. 사막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정령들이 무수하게 달려들었다. 그녀들이 기뻐서 내지르는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어디서 요사스런 소리가 들린다고 흠칫거리는 사이란을 달래, 아스는 물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을 불러 피로에 지친 사이란과 말들의 몸을 어루만졌다. 더러움이 씻겨나가고 시원함과 상쾌함이 번갈아 찾아왔다. 아스는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는, 다시 정령을 향해 손짓했다. 말 위에 타고 있던 사이란은 어쩐지 몸이 붕 뜨는 것이 느껴졌다. 말들이 공중으로 약하게 떠올라 당황해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 이제 정령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니 꾸물거릴 필요 없어. 바람을 타고 단숨에 드라세나까지 간다. " " 뭐? " " 바람아-!! " 뒤에서부터 엄청난 돌풍이 몰아친다 싶더니만 말들이 땅을 박차고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번 뛸때마다 그 도약이 얼마나 엄청난지 사이란은 말 다리가 부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 자, 잠깐-! 식량도 떨어졌는데 그거라도 채우고... " " 이대로라면 밤엔 드라세나에 도착할테니 필요없어. " " 뭐? 난 마음의 준비가 아직-!!! 으아아아-! 너무 빨라-!!!!!! " 사이란의 긴 비명을 뒤로 하고 폭풍같이 내달리는 말 두마리가 나타나기 시작한 초원지대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 " 얕은 잠에 빠져있던 펜이 눈을 번쩍 떴다. 결계가 가볍게 진동한다 싶더니, 몸에 병이 들면서 약해졌던 에린지움의 힘이 갑자기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집중하니, 뚜렷히 아스의 존재가 느껴지고 있었다. 펜은 화르르 타오르듯 아파오기 시작하는 검게 변한 팔을 붙잡으며,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 그가 돌아 왔구나... ... " 아스가 돌아온 것을 월도 알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두 필의 말을 보다가, 월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결계 바깥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한 용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 드디어 그가 숲으로 돌아왔군. 자, 계약을 이행할 준비는 되셨나? 글로리 나이트 월 저먼더. " 월은 악의적인 레지를 바라보며 마음을 굳혔다. 이미 이 자와 맞닥뜨린 그 순간부터, 아니, 아스를 죽이려고 마음먹고 결계를 넘었던 그 순간부터, 모든 일은 이미 정해진 터였다.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가 내미는 것이 독이라도 월은 들이켜야 했다. " 자아, 에린지움이 어디 있는지는 알아냈나? " " 그래. 하지만 먼저 에린지움의 힘을 차단할 수 있다는 마법을 보고 싶다. " 레지는 빙긋 웃으며 품에서 끝에 추같은 검은 보석이 달린 긴 끈을 꺼냈다. ...끈이라고 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그 끈은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시커먼 연기같은 형체를 연신 꿈틀거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보석머리를 한 뱀같았다. " 무스카리가 아리스타타를 납치해 가 여름궁전에서 그녀를 구속했었던 마법과 같은 것이지. 꾸준한 구속력은 가지지 못하지만 적어도 아스를 죽일동안은 에린지움의 힘을 차단할 수 있다. 이제 말하도록 하시지. 에린지움은 어디있지? " " ... ... " 마지막까지 망설임이 들었다. 에린지움은 이 대륙을 지키는 정화수고 트리옌의 전부다. 그리고 펜 오키드님이시다. 용족에게 에린지움의 위치를 알려준다는건 위험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월은 그렇게 해서라도 아스를 죽이고 싶었다. 아스가 죽으면 펜 오키드님이 완전한 에린지움의 걸음이 되실 수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와 펜님과 자신이 에린지움의 방으로 들어가, 구속구를 묶고 그를 죽이기만 한다면...!! 갈 곳 없어진 에린지움의 힘은 다시 에린지움이 품기 보다는 곁에 있는 펜 님의 곁으로 스며들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에 모든 것을 건다! 아스가 살아있는 이상... 펜님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 에린지움은... 세상의 끝에 있다. " 레지의 눈동자가 뾰족해졌다. 푸른빛 홍채속 길죽한 까만동공이 반들거렸다. " 세상의 끝? 빙해의 너머에 있다는 곳 말인가? " " 그래. " " ...아... 하하하하-! 그것 참 아이러니 하군!!! 세상의 끝이 있긴 있단 말이지? 하하하! 그곳이라면 펜은 문을 통하지 않고는 에린지움으로 갈 수 없군-! 그것을 알면서도 내게 말한건, 틀림없이 아스를 죽이겠다는 것이겠지? 아주 마음에 드는 군!! 아하하하!!! 자, 가라! 네가 죽일 상대를 저 트리옌이 골라줄 것이다! " 레지의 손에서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 처럼 그것은 뱀처럼 몸을 뒤틀며 월의 손 안으로 날아들었다. 월이 잡자 그것은 평범한 끈처럼 변했다. 레지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 그의 죽음은 이제 자명한 건가? 걱정마라. 네가 죽이지 못한다면 내가 죽일테니까. " 그의 뒤로부터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때이른 어둠에 녹아들면서, 레지는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무스카리가 원한다면 아스의 박제를 만들어주지. 아리스타타의 시신은 가지지 못했으니 그의 시신이라도 가져야 할 것 아닌가? 아니, 아리스타타의 시신은 에린지움의 옆에 안치되었다던가? 둘이 나란히 셋트로 장식해 놓으면, 아주 아름다울거야. 그리고 무스카리, 너도 아주 즐겁겠지. 두 명의 회청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다시 뜨이지 않을 청록색 눈동자를 아쉬워할까? 그래, 그 푸른눈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니, 눈만 뽑아 보존해 두는 것도 아주 좋을거야. 그것들을 보며 너는 기뻐할까? 즐거워할까? 아니면 고통스러워할까? 미쳐버릴까? 어느쪽이든, 아주 좋을거야. 하하핫. 갑자기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서린 독기에 월은 황급히 입을 막고 결계 안으로 물러섰다. 그가 내뿜은 독기는 결계안으로 침범하지 못했지만, 레지는 그것을 망토처럼 몸에 감고 때이른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 " 깜빡 졸았었나 보았다. 누군가가 부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어쩌면 스티같았다고 화들짝 깨어난 제피란더스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집무실엔 늦은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만 들어차 있을 뿐이었고, 아무도 없었다. 제피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전쟁의 뒷처리에 눈코뜰새 없이 바쁘던 터라, 책상머리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거였다. 밤이 되어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기에 요즘은 매일같이 밤낮으로 전쟁 문제에 온 정신을 골몰한 상태라 상당히 피곤하기도 했지만 가끔은 이렇게 견딜 수 없이 졸렸다. 하지만 자려고 누우면 잠은 오지 않고, 어둠속에서 익숙해진 눈동자는 일할때에는 떠오르지 않던 선명해지는 스티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괴로웠다. 다시 서류에 고개를 파묻으려고 하자, 시종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더니 들어와 차를 내놓았다. 제피는 고맙다는 짤막한 한마디 말을 하고 그것을 들이켰다. 향긋하고 산뜻한 냄새가 머리를 맑게 해주는 듯 했다. 평소에 과묵하던 그 시종은, 잠시 주춤거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 ... 주제 넘는 말 입니다만, 그만 쉬시지요. 벌써 사흘째 밤낮으로 서류만 바라보고 계시니 건강을 해치실까 저어됩니다. " " 걱정마라. 일하는게 즐겁다. " " ... " 시종의 얼굴은 금방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스타티스의 사후 명랑하던 왕자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고 잠도 사라졌다. 스티를 화장할때까지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은채 밤마다 그의 시신옆을 지키던 그는 재가 되고 불씨가 되어 사라지는 그의 친구를 보며 조용히 오열했다. 그 후로는 이렇게, 그를 억지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려는 듯 미친듯이 일에만 매달렸다. 전쟁때문에 처리해줘야 할 서류가 한가득이었지만, 왕위를 탐한다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라도 이런 국정운영에 관여치 않으려던 모습과는 사뭇 틀린 것이었다. 그는 지금 왕보다 더 많은 서류를 보고 더 많은 의견을 귀족회로 제출해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안건들은 별 이견을 달지 못한채 곧장 집행이 결정되어 내려졌다. 귀엽고 활발한 성격이라고는 해도 나태한 줄로만 알았던, 쥬니퍼 가문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냥 평범해 보였던 둘째 왕자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눌러왔던 기량을 펼쳐보이자 딱딱한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을 해결방안들 줄줄히 내놓아 연신 귀족회를 놀라게 만들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제피란더스는 자신의 몸 따위는 전혀 돌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스티를 잊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릴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막 시종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떨어진 펜을 주으러 몸을 일으키던 그는 갑작스런 어지럼증에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어깨가 책상 다리에 쿵!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시종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얼른 그를 부축했다. " 왕자님-!! 어의를... 어의를 당장 부르겠습니다. 잠시 여기 기대 앉으십시오! " 제피는 창백해진 얼굴로 시종이 하는대로 몸을 맡긴채 뒤의 두툼한 책장에 잠시 기대 바닥에 앉았다. 시종은 문을 벌컥 열고 나가더니 고래고래 왕자님이 쓰러지셨다며 어의를 불러올 것 따위를 명하고 있었다. 잠시 있자 어지럼증이 가라앉아, 제피는 몸을 일으켜 시종에게 소란떨지 말라고 말하고는, 역시 좀 무리했나 싶어 잠시 창가에 기대 앉았다. 누워계시라며 호들갑을 떠는 시종에게 눈살을 찌푸려 주고, 어의에게 진찰을 받으면 되잖느냐고 나무라 준 후에 잠시 까칠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 소란피우니까 더 어지럽구나. 냉수나 한잔 가져다 줘. " " 에옛!!! " 시종이 후닥닥 나가고, 제피는 그를 쫓아버렸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랫동안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런지 눈이 뻑뻑했다. 제피는 그것을 손으로 문지르며, 지난 성벽에 군데군데가 그슬리고 불탄 성벽을 바라보았다. 병사와 사람들과 인부들이 버글거리는 성문은, 막 내리기 시작한 조용한 황혼을 등에 업고서도 소란스러웠다. 제피는 문득 떠오르는 옛기억에 피식 미소지었다. 저기에서 얼마나 성문 경비병들과 많은 실랑이를 벌였을까. 저기 보이는 아리스타타의 석상이 서 있는 광장에서 매해 돌아오는 축제에 얼마나 즐거웠던가. 저쪽 뒷골목에선 평민 아이들과 쌈박질을 하고, 그런 자신을 나무라면서도 자신의 편에서 같이 싸워주던 소년. 어릴쩍 소녀인줄로만 알만큼 귀여운 얼굴에선 심심하면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물결같은 푸른 고수머리와 푸른 눈동자. 사랑스러운 내 동무. 하나뿐인 내 마음. 스티... - 저를 위해서라도 왕이 되시면 안됩니까!! - 곁을 떠나지 않으며, 당신의 정의를 지키겠습니다. 허락한다고 말해주십시오. - 스티가 아니라 스타타스입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드릴 겁니다. 쏟아지던 폭우에, 드러난 관 안의 창백했던 얼굴. 덤벼드는 자들의 검을 대충 물리치고 다시 품에 안은 그는 차가웠다. 제피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꽉 쥐었다. 그래.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네가 죽기전까지 난 몰랐어. 빌어먹을... ... 갑자기 어지럼증이 다시 치미는 듯 했다. 제피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어지러움이 가시기를 기다려 눈을 떴다. 멀리 성벽 너머로,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두 필의 말이 보였다. 지는 황혼의 역광에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성벽에 도착하자 경비병들이 당황하며 얼른 문을 여는 모습이 보였고, 말 위에 앉아있는 두 사람 중 한명의 머리카락이 흔하지 않은,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띄는 은빛이라는게 보였다. " ...아스? " 제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순간, 번개처럼 가슴이 뛰었다. 너무나 낯익은 모습. 멀리에서도 보이는 허리에 찬 두개의 쌍검. 머릿속으로는 그럴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이 먼저 움직였다. 막 방으로 들어오려던 의원이 깜짝 놀라 물러나고, 물을 떠오던 시종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왕자님-!!! " 제피는 날듯이 달렸다.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내리고 난간을 타고 미끄러져 밖으로 나가 정원의 장미들을 짓밟고 성곽을 뛰어내려 열린 성문으로 일언반구도 없이 뛰쳐나갔다. 대로에 이르러 무수한 사람과 말과 짐과 마차와 좌판을 헤치고 미친듯이 달렸다. 번잡스런 시장 골목을 가로질러, 광장으로 나갔다. 오늘도 조용히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채 턱을 들어올린 아리스타타의 석상은, 황혼에 길고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두 필의 말이 광장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은빛 머리카락을 한 사람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제피만은 다른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혼에 노을진 얼굴. 좀 변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스티였다. 싸늘한 시체가 되어, 불에 태워져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스티였다. 그래 그렇지. 평생 내 옆에서 나를 지키겠다던 녀석이 날 두고 먼저 죽을리가 없어. 그건 가짜였던 거야. 제피는 홀린듯 걸음을 옮겼다. 참을 수 없는 감동과 감정의 물결때문에 말을 꺼낼수가 없었다. 아스가 다가오는 제피를 보고 놀라 말에서 뛰어내렸다. " 제피란더스-! 오랜만이야. 우리가 오는걸 어떻게... ... " 하지만 그의 시선은 아스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얼굴을 찌푸린 사이란이말에서 내리자 제피가 그에게로 손을 뻗어왔다. " 뭐... " 사이란은 깜짝 놀라 흠칫 물러났다. 그는 아스를 보고 물었다. " 아... 는 사람? " " 아아... 내 친구인데... ... " 아스는 차마 제피에게 잘라서, 사이란이 스티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제피의 얼굴이 너무나도 절절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피는 조심조심 사이란의 뺨을 쓰다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붉은 노을 속에서도 그의 눈가가 붉어져 오는 것이 보였다. " 그동안... 키가 많이 자랐네... 얼굴도 좀 변한거 같애... 하지만... 하지만... 살아있었구나. 그렇구나. 다행이야. 정말로... " 정말로 기뻐. 너무 기뻐서 네가 아닌 것만 같아. 믿을 수가 없어 스티. " 어... 저? 저기? " " 스티... 스티... 스티... !!! " 이윽고 제피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의 손이 사이란의 허리와 목을 잡고 안겨들었다. 우와아아 대책없이 사이란에게 매달려 어린애처럼 우는 제피란더스의 풀어헤친 금갈색 머리카락에서는 햇살에 말린 풀냄새가 났다. 사람들의 시선에 둘러싸인채, 제피는 정신을 놓을때까지 사이란에게 매달려 그렇게 울었다. ... 뭔가 상당히 기분 좋은 꿈을 꿨었다. 그래... 스티가 살아있는 꿈. 죽은 줄 알았던 스티가 다시 살아돌아와서, 자신은 기쁨에 겨워 목놓아 울었었다. 차라리 깨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제피는 현실과 함께 다가드는 절망감에 눈을 떴다. 멍하니 익숙한 방의 천정을 올려다보면서 꿈의 여운을 즐겼다. ... 꿈 속의 스티는 상당히 많이 자라 있었다. 키도 자신이 안길만큼이나 커졌고, 얼굴 윤곽도 사내답고 단단하게 변해있었다. 필시 스티가 살아서 더 나이를 먹었다면 그런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녀석은 여러가지가 늦되었으니까. 그 얼굴이 너무 생생해서, 자신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당황하던 그 표정이 너무 생생해서 제피는 견딜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조금 후, 문이 조금 열리더니 뜻밖의 인물이 머리를 내밀었다. 아스였다. 드라세나 탈환전에서 무스카리에게 잡혀갔다는 소식만 들었었는데... 언제 이곳에 온 것일까. 꿈에 그도 나왔던 것 같던 기억이 어렴풋이 들었다. 다시 만난 친구에 대한 반가움에 제피는 미소지었지만, 스티가 없는 현실에서 오는 슬픔에 진정한 기쁨은 우러나오질 않고 있었다. " 아스...무사했구나. 드라세나엔 언제 도착한거지?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 " 그래. 숲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어제, 갑자기 쓰러져서 놀랐어. 많이 수척해졌구나. " " ...? 어제... 내가 쓰러졌나? " " 어제 광장까지 네가 뛰어나왔었잖아. " 아스가 곤란하다는 듯 웃어보였다. ... 그러고보니 어제 광장에서 말을 타고 돌아온 아스를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어제 내가 광장에 나갔던가? 그건 꿈이었는데... 뭔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도중에, 아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 어제 낮 내내 말을 몰아서 여기 도착했었어. 네가 광장까지 나와 있는 걸 보고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놀라워했잖아? 하지만 넌... 스티랑 닮은 사이란을 보고 울다가 지쳐서 잠들어버린거야. 시종에게 들었는데 그동안 무척 과로했다며. " " ... 무슨... 어제, 그럼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이야? " 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아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 스티를 봤다고! 스티가 살아있었어! 스티가 죽은건 역시 거짓말이었구나. 그게... 그게 꿈이 아니었어. 스티였던거야!! " " 아냐 제피. 진정해. " " 꿈이 아니라며? 스티... 그는 어딨어? 정말 그인거지? 대체 어디있다가 이제야 너랑 어슬렁 어슬렁 나타난거야? 난 꼼짝없이 그가 죽은줄로만 알고... 넌 스티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그렇지? 그런데 왜 내게 숨긴거야...!! " " 제피란더스! 스티는 죽었어!! " 아스의 어깨를 뒤흔들던 제피가 멈춰섰다. 방안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가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것이 보였다. " ... 꿈이 아니라며... 그럼 어제 내가 본건 뭐야? 스티의 유령? " " ... 네가 어제 본건 그의 동복동생이었어. " "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스티는 쥬니퍼 가문의 마지막 독자였어! 그런데 동생이 있을리가...!! " " 사이란. " 아스가 부르자 문 밖에 서 있던 사이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피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스는 얼른 말을 이었다. " 그는 스티가 아냐. 잘 봐. " " ... 거... 짓말. 똑같은 걸. " 제피는 휘청휘청 다가갔다. 그리고 사이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똑같은데. 스티라고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는데. 새파랗고 맑은 눈동자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도. 허리에 찬 장검도... ...하지만 그의 얼굴을 훑어보면서 제피는 멍한 기분이 되었다. 스티의 머리칼은 푸른색 고수머리였지만 이 스티는 흑발에 가까운 푸른색이었다. 스티의 얼굴은 전체적으로 여리고 흉터하나 없는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이 스티는 선이 굵고 왼쪽 관자놀이 부근에 희미한 흉터자국이 있었다. 제피는 흠칫 뒤로 물러났다. 무엇보다도... 표정이 틀렸다. 그는 평소 스티가 자신을 바라보던 표정이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쳐다보는 낯선 눈길. 난처하게, 자신의 시선에서 도망가고 싶어하는 곤란한 시선.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알던 스티의 표정이 아니었다. 제피는 쥐어짜듯 말했다. " 넌... 누구지...? " 사이란이 망설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 ... 형이 아니라 죄송하군요. 제 이름은 뉴사이란 쥬니퍼. 알츠킨 쥬니퍼의 부인 일렉트라 쥬니퍼의 아들로, 스타티스 쥬니퍼의 동복동생입니다. " 제피는 멍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받아들였다. 알츠킨 쥬니퍼는 현 드라세나 국왕, 즉 아버지를 호위하는 쥬니퍼 가문의 마지막 기사다. 하지만 그는 정식 쥬니퍼 가문의 핏줄은 아니었고 일렉트라 쥬니퍼와 결혼해 쥬니퍼 가문의 양자가 되어 국왕의 호위기사가 되었다. 일렉트라 쥬니퍼가 호위했던 자는 왕의 동생 그레함 드라세나 대군이었다. 그녀는 스타티스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국왕등극에 맞물려 대군의 망명길에 따라나섰다... 드라세나에선 잊혀진 인물들이었다. 소식이 끊어진지도 십년이 넘었다. 그런데... 뜬금없는 엘렉트라의 두번째 아들이라니. 스티의 동복동생이라니. 제피는 그 사실을 부인할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스티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도 싫었다. 그것 역시 그가 너무나도 스티와 닮아 있었기에... 틀림없이 스티가 살아 돌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죽은 것은 필시 무슨 착오이거나 착각 이었던 거라고... 그가 죽지 않아 너무나 기뻤다. 이제는 조금 무뎌지지 않았나 생각하던 아픔이었는데... 스티가 살아있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한번 절망하자 견디기가 힘들었다. 마음이 무너지는 듯 했다. 제피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 ... 미안하지만... 혼자 있게 해줘... " 아스와 사이란은 군말없이 밖으로 나섰다. 무거운 문짝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고, 왕자의 방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이 스티와 똑같이 생긴 사이란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납치되었다던 리아트리스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모자라, 스티와 똑같이 생긴 남자라니...!! 더군다나 그는 스티가 더 나이먹었을법한 성숙한 모습에 허리엔 쌍검을 차고 있다. 소문이 무섭도록 부풀려져 드라세나에 퍼져 나갈 것은 자명했다. 사이란은 아스와 함께 복도를 걸으며 불쑥 말했다. " 너, 내 주인을 만나게 해준다고 했어. " " 그래. " 태평한 아스의 말에 사이란은 울컥 했다. " 저 징징짜던 녀석이 내 주인이란 말이냐? 형이 모시던 드라세나의 둘째왕자? 황태자도 아닌? 형이 모시다가, 콱 죽어버렸으니 이젠 나더러 대신 모시라는 거야? 하! 웃기지마! " " 너보고 모시라고 한 적 없어. " " 그럼 왜 날 저녀석과 만나게 했지? " " 만나게 한 적 없어. 어제 제피와 만난 것은 우연이었어. " " 너...!! " 사이란은 아스의 어깨를 붙잡고 멈춰섰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스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재빨리 말했다. " 어찌됐든 난 네 주인을 고를 수 있는 곳에 널 데려다 줬어. 제피란더스, 둘째왕자가 내 친구인건 사실이고 역시 내 친구였던 네 형이 모셨던 주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너더러 그 자리를 메꾸라고 하기 위해 널 데려온건 아니야. 내가 무슨 재주로 그걸 명령해? 쥬니퍼 가문은 드라세나 왕가의 수호가문이다. 하지만 네 형이 그랬던것 처럼, 쥬니퍼 가문의 독자가 황태자가 아닌 둘째왕자를 주인으로 모셨던 것 처럼 네 주인은 네가 고르는 거야! 그가 둘째 왕자건 황태자건 막내 공주건 네 내키는대로 고를 수 있다 이 말씀이야. 난 그걸 강요한 적 없어. 모시기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고. " " 제기랄, 형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잖아-!!!!! " 사이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캐묻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아스는 스티가, 그의 이복형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동복형의 존재에 설레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것이다. 사이란은 형이 죽었다는 충격과, 자신은 여기에 죽은 형의 존재를 메꾸기 위해 온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기분이 아주 나빴다. 아스는 선명한 청록색 눈동자로 화내고 있는 사이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저 눈은 아주 묘했다. 화를 내다가도 저 눈동자를 바라보면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곤 하는 것이다. " ... 내가 널 이용했다고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넌 네가 그토록 강요당해왔던, 도망쳐다녔던 '주인'을 확인하고 싶어했잖아? 넌 쥬니퍼 가문에서 자란 자제도 아니고, 스티와 닮긴 했지만 이복동생에 불과한 네가 주인을 모시지 않으면 이방인에 불과하니 그냥 떠나도 너에게 뭐라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사이란. ... ... 하지만 널 여기에 데려온것에 스티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대답할 수는 없겠지. " 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 스티는 지난 전쟁때 나를 피난시키기위해 용족의 수장 무스카리와 싸우다가 죽었어. 그의 시체는 드라세나 탈환전때 눈가림으로 벌어졌던 협상전의 미끼로 쓰였지. 그의 죽음은... 제피의 것이지만 그의 죽음에 내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거야. 하지만 난 우연히 사막에서 널 만났고, 네가 스티의 동생이란걸 알았어. 이제 대가 끊겼다고 여겨지던 쥬니퍼 가문의 사람인 네가 사막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단 말이야. 내가 어떻게 너를 여기로 이끌지 않을 수 있었겠어? 내가 너를 만난 우연이, 너를 이곳으로 이끈 운명이 아니라고 잘라 말할 수 있어? 너와 제피란더스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인연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 ... 그를 주인으로 모시지 않아도 좋아.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드라세나를 떠나도 잡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 주인을 모시지 않겠다면 대륙을 떠돌며 다른 사람을 찾아도 좋고, 나와 함께 가서 축복의 성에 머물러도 좋아. 싫으면, 무시해버려. " 아스의 차가운 대꾸에, 사이란은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는 듯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화가 났다. 사이란은 돌아서려는 아스에게 꽥 외쳤다. " 젠장, 어떻게 무시해-!!! " 저렇게 안타까운 얼굴로, 비록 내 이름은 아니지만 나에게 매달려 울었는데. 나의 얼굴을 보며 참을 길 없는 그리움과 슬픔이 뒤섞인 표정을 짓는데. 어떻게 무시하고 뿌리치냔 말이다. 사이란은 자신의 품에 안겨 엉엉 울던 제피란더스의 체취를 맡았던 그때부터, 뭔가 당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이미 자신의 운명이 그에게 묶여버린 것 같아 사이란은 화가 났다. 자신이 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무너져 내리던 그의 표정이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혼자 억울함과 분을 삼키는 사이란을 놔두고, 아스는 몸을 돌렸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 였다. 운명이 자신을 사이란과 만나게 했고, 이곳까지 이끌었으니 남은 것은 두사람의 몫이겠지... 아스는 고개를 들어 남쪽으로 펼쳐진 울창한 숲을 쳐다보았다. 자신에겐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축복의 성으로 가야한다... 카멜이 도착하기 전에 자신은 이곳을 떠나야 했다. 당장 오늘 밤 떠날 생각이었다. 밤새 달린다면 내일은 축복의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스는 휴식을 위해 드라세나 궁의 정원에서 깊은 낮잠을 잤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그 악몽을 꾸었다. 자신을 이 세계로 불러들였던 그 꿈. 자신은 아주아주 조용하고 깊은 숲에서 방황하고 있다. 흰 맨발은 축축한 이끼를 밟았고 바람 한점 새 지저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숲은 고요했다. 목적도 의식도 없이, 자신은 영문도 모른채 그곳에서 헤매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숲의 그림자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사로 잡힌다. 그러면 자신은 꼼짝달싹 할 수 없다. 그 시선에 붙잡히면 너무 괴로워진다. 숨이 막히고 몸이 떨려오며, 그 시선이 보내는 흉폭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붙잡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은 그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할 수 없다. 그 시선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곳으로 간신히 한발을 내딛으려 한다. 그러면 누군가가 자신의 팔목을 잡아챈다. - 안돼!!! 가슴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아스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본 적이 있던 검이 자신의 가슴에 꽃혀있다. 자신이 찌른거다. 투명한 피가 마구잡이로 솟아나왔다. 몸이 무너지면서, 눈앞이 흐려져 온다. 흐릿해지는 시야 저편에 보이는 것은, 견딜 수 없이 증오하고 미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심장이 없는 자신에게 심장을 가져다 준 사람이었다. 자신을 억지로 겁탈하고 짓누르는 것 밖에 모르는, 서툰 사랑의 욕망과 집착밖에는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사람이었지만... 자신을 한 여자로써 사랑한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아스는 무스카리의 얼굴을 더 잘 보기 위해 눈을 깜박거렸지만 눈물이 흘러내려도 흐려진 시야는 점점 흐릿해져 가기만 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이 나오질 않았다. 목구멍이 타는 듯 했다. 있을리 없는 심장이 불탄다. 이윽고 눈 앞에 캄캄해져 왔다. 정신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무스카리의 목소리마저도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스는 필사적으로 기적을 바랬지만, 자신은 이미 죽음의 늪에 반쯤 몸을 담근 상태였다. 무언가 그와의 좋은 기억을,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고 싶었지만 그는 불타는 것들의 제왕이고, 자신은 에린지움의 걸음이다. 짓밟고 외면할 줄 밖에 몰랐던 그들사이엔 아픔과 고통만이 가득했다. 그것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안타까웠다. 멀어져 가는 의식속에서, 아스는 간절히 빌었다. 언젠가 다시...! 꼭 다시...!! 잠깐이나마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면... ... 다시 눈을 떴을때 그의 얼굴은 눈물로 온통 젖어 있었다. 해가 저물고 이른 밤 시각이 되자, 아스는 조용히 성의 뒷문으로 길을 나섰다. 배웅하러 제피란더스와 사이란이 나와있었다. 두사람은 어색한 거리를 두고 서로 떨어져 서 있었다. " 제피. 사이란이 드라세나에 있는 동안 신경써서 대해주길 바래. 그는 나를 페나카이트에서 구해준 은인이기도 하니까. " " 그런건 걱정마. ...일이 다 정리되면 한번 더 드라세나로 내려와. " 아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쩐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면... 다시는 에린지움의 방에서, 축복의 성에서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곳에서라면 무스카리의 손길이 닿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남은 시간을 그저 펜의 뒤에서 에린지움의 그림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스는 서글프게 웃었다. 사이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는 천천히 걸어 다시 길을 떠났다. 드라세나에 올땐 사이란이 있었기 때문에 같이 말을 타고 왔지만, 선천적으로 트리옌은 자신의 두 다리로 걷는 종족이다. 정령을 쓰면 말을 타는 것 보다 걷는 것이 훨씬 빠르다. 아스는 안스륨과 함께 여행했었던 길을 되짚어 올라갔다. 그와 몇번이고 애무를 나누었던 자갈 사막의 조그만 샘과, 봄비가 내리는 길을 함께 손잡고 걸었던 짙푸른 초원. 그가 자신을 구해주러 달려와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했던 노예시장의 도시 펌킨. 카멜과 싸우다 안스륨이 쓰러졌던 숲의 개울가와, 그의 품안에서 사정해버렸던 수인족의 마을. 그와 처음으로 만났던 숲과... 노예로 끌려갈뻔 했던, 자신이 이 세계에 처음 왔던 곳. 축복의 숲 가장자리, 드라이 그라시스의 들판. 벌판은 끝이 없었다. 이름 모를 잡풀만이 구릉을 만들며 펼쳐져 있었고 거기에 아스가 놀라움을 느끼며 밟았던 조그만 오솔길이 나있을 뿐이었다. 멀리 축복의 숲이 보였다. 들판이 끝나며 숲과 만나는 지점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 썼지만 빛을 잃지 않고 있는 금발과, 약간 피로해 보이는 녹색 눈동자. 허리에 찬 키만한 장검은 그가 트리옌의 나이트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몰려가는 구름들이 그림자를 만들었다 갑작스레 햇빛을 쏟아내었다. 그는 쉬지 않고 곧장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아스는 우뚝 멈춰서서 중얼거렸다. " ...카멜... " 그는 잠시 망연히 서서 아스를 바라보다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아스에게로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의 뺨을 쓰다듬다가 상처가 사라진 가슴팍을 더듬었다. " ... 상처는... 괜찮으십니까? " " ... 그래. 다 나았어. " " 그렇군요. 걱정했습니다. 정화석도 없이 사막을 건너느라 무척 힘드셨겠군요. " " 어, 응... " 자신을 바라보는 카멜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바람부는 숲처럼 조용히 고동치고 있었다. 카멜의 청량한 향기가 자신을 감싼다 싶더니, 어느새 그가 아스의 머리와 허리를 붙잡고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카멜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스를 꼭 끌어안았다. " ... 이상하군요. 이렇게 아스님을... 아스님을 끌어안으면, 마음속의 불안이 다 가실것만 같았는데... 아스님을 껴안아도 가시질 않습니다. 금방이라도 아스님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요. " " 카멜... " " 은빛 머리카락도... 청록색 눈동자도... 가는 허리도... 다 제가 기억하는 그대로네요. 제가 기억하는 리아트리스님이 맞아요. " " ... " 쏴아아아아-------------- 바람이 들판의 풀들을 훑고 지나갔다. 풀의 바다소리가 햇빛이 부서지는 파도를 만들어내며 번져갔다. 카멜의 긴 금발머리가 아스를 감싸고 어지럽게 휘날렸다. 바람이 잦아들고도 카멜은 한참을 그렇게 아스를 끌어안고 있었다. 긴 침묵이었다. 마침내 카멜이, 차마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어 힘겹게 말을 이었다. " 어째서... ... 아스포델이지요...? " 카멜의 품안에서 아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숨이 콱 막히는 듯 했다. " 저의 리아트리스님인데... 어째서... 아스포델이 제게 미안한 거지요? " " - 카멜! " 아스를 조이는 팔의 힘이 더 강해졌다. 아스는 울음을 터트렸다. 자기가 당했던 고통이다. 자신의 마음 모든 것을 주었지만 그 사랑은 자기것이 아닌 것이다.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신맛을 내며 부서져간다. 아스는 눈물을 흘리면서 카멜의 품안에서 숨이 막혀 헐떡였지만 카멜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카멜. 너에게 상처주고 싶진 않았어. 내가 너무 힘들어서... 네가 상처받을 걸 생각하지 못했어. 너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어. 네가 내 모든 것을 주었으니까, 내 심장은 당연히 네 것이라고... 하지만... 아니었어. 난 무스카리를 잊을 수 없어. 나는 그를 사랑해.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카멜의 가슴에 닿은 아스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렸지만 카멜은 굳은 채 움직일 줄 몰랐다. 깊게 고개를 숙인채 아스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그는, 그의 허리를 으스러져라 붙잡고 중얼거렸다. " ... 그럴수는 없어요. 놓아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아스님을 사랑해요. 저는... 제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아스님이 없으면 전 살아갈 수 없어요! 아스님을 찾아 헤매어 몇백년을, 시공의 혼돈속에서 헤매이며 오직 당신을 품에 안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빌어먹을 그 무스카리를 저주하며... 저주하고 또 저주하며... 다시 찾으면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리라 날마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간신히 다시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나의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 카멜이 아스의 어깨를 콱 붙잡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스의 청록색 눈동자에 비탄에 빠진 카멜의 얼굴이 비쳤다. 카멜은 그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더더욱 슬퍼졌다.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추해도 좋아. 짐승이 되어버려도 좋아. 당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겁니다! " " ...!! " 카멜의 입술이 아스의 입술을 짓눌렀다. 어깨를 잡은 카멜의 손아귀 힘이 강해지자 고통에 아스는 입을 벌렸고, 그 안으로 카멜의 뜨거운 혀가 사정없이 침범해 들어왔다. 집어삼킬 듯 혀를 빨아들이고 입안을 훑는다. 머리와 허리를 꽉 끌어안고 맞닿인 카멜의 몸은 그 어느때보다 뜨거웠다. 너무 뜨거워서 닿는 곳 마다 데일 것만 같았다. 아스는 카멜을 밀어내려 손에 힘을 줬지만 그의 강인한 팔은 꿈쩍하지도 않았다. 간신히 입술을 떠난 카멜의 입술은 성급히 아스의 귀를 깨물고 목을 깨물고 쇄골을 더듬어 내려갔다. 아스는 울부짖었다. " 카멜, 그만해!! 그만해!! " 카멜의 두 손이 아스의 날개뼈를 꽉 움켜쥐었다. 아스의 갈빗대를 깨물고 자신의 애무에 떨었던 허리를 핥았다. 카멜의 손이 아스의 유두와 엉덩이를 정처없이 방황하고, 아스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카멜은 그를 붙잡아 바닥으로 쓰러트렸다. 자꾸 아스의 손이 자신의 어깨를 밀어내자 카멜은 그것을 한손으로 그러모아 잡아버리고 사정없이 목과 어깨와 유두를 깨물었다. 아스는 비명을 올렸다. " 아악-! " 자신을 짓누르며 덮쳐드는 카멜의 등 너머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아스는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문지르며 조금이라도 그에게 더 와닿고 싶어하는 카멜의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팠다. 아스는 버둥거리기를 포기하고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 카멜, 제발... 제발... ... " 성급히 아스의 바지를 끌어내리고 드러난 성기에 입술을 갖다대자 찌릿거리는 느낌에 아스의 허리가 들썩였다. 그 허리를 두 손으로 훑으며 카멜은 정신없이 입술과 혀를 움직였다. 그의 애액이 조금씩 풍겨나오기 시작하며 카멜은 차라리 이대로 미쳐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미 미쳐버린건가... 무스카리와 다름없는 짓을 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사랑에 대한 배신감, 안타까움과 집착과 욕망과 애증이 한데 뒤섞여 끓고 있었다. 카멜은 힘을 놓고 늘어진 아스를 꾹 끌어안고 아스의 안으로 삼입해 들어갔다. 아무런 준비없이 들어간 곳이라 고통스러웠지만, 카멜은 고통도 쾌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문득 자신의 헉헉거리는 짐승같은 신음소리에 놀라 입술을 깨물었더니, 아스의 흐느끼는 신음소리만이 들려왔다. 카멜은 순간 뭐가 뭔지 알수가 없게 되어 자신의 밑에서 흐느끼고 있는 아스를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흘러내려는 투명한 액체를 손가락으로 받자니, 자신이 깨물고 긁어 발갛게 얼룩진 아스의 몸이 보였다. 땀이 지끈거리며 흘러내렸다. 몸엔 열기가 올랐지만, 아스와 맞닿은 부분은 고통으로 싸늘했다. 카멜은 아스의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아스의 가슴에 자신의 머리를 맞대고는 고통에 몸을 떨었다. " 왜... 왜 제가 아닌 겁니까... ... "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리스타타님이 돌아가셨던 이후 단 한번도 흘리지 않았던 그의 눈물이었다. " 왜!! 왜!!! "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었다. 누구보다 아껴주고 사랑해줄 수 있다. 다시는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다. 자신을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 조차도 부담이 되어 힘겹다면 조심스럽게, 눈치채지 않도록 몇백년이고 인내로 사랑할 수도 있었다. 아아, 그가 내 사랑을 허락만 해준다면-! 사랑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인데... 그를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 왜... ... !! " ' 네 모든 걸 나에게 다 줘버리면 너는 어디로 가지? ' ' 당신이 제 모든 것이니까. ' 카멜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스의 손길을 느끼면서 가슴을 찢어내는 아픔으로 울었다. 그 소리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쳤다. 펜은 아리스타타의 방에 서 있었다. 축복의 성 가장 꼭대기에 자리한 곳. 방은 작지만 거울 호수로 트인 테라스는 아주 넓다.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 방을 쓸 수 있었지만, 집무실이나 회의실과 멀다는 이유로 자신의 거처는 아랫층에 두었다. 펜은 테라스에서 거울호수에 그대로 비치는 성의 모습과 테라스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커멓게 썩은 팔은 소매가 긴 옷으로 감췄지만, 아스가 결계 안쪽으로 돌아온 이후 통증은 많이 줄어들어 혼자서 운신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펜은 물결에 비친 회청은빛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발치까지 닿도록 길었던 머리카락이지만 지금은 어깨정도까지밖엔 오지 않는다. 좀 더 주의깊게 수면을 바라보자 자신의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펜은 그 눈동자를 실컷 동정해주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그 방을 나왔다. 그리고 에린지움의 방으로 가는 문이 있는 영광의 회랑으로 내려갔다. 회랑의 바닥엔 몇겹으로 되는 흰 언령마법의 입구가 있었지만, 펜이 거기에 손을 대봐도 그것은 아무런 반응도 일으키지 않았다. 펜은 한참동안 거기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갑자기 팔이 욱신욱신 아프다 싶더니만 몸을 찌르르 하게 사로잡는 기이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누군가가 몸을 꾹 손아귀에 쥐고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에린지움의 빛이 그녀를 감쌌지만 소용없었다. 펜은 혼자 몸을 떨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 아아악-!!! " 그 소리에 놀란 월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잠시동안 느꼈던 극심한 격통은 없어졌지만, 펜은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 ... 결계가... " " 네? " " 결계가 부서졌어. " 아스에게 몸을 포갠채 쓰러진채로 있던 카멜은, 조용히 바람이 풀잎사귀를 스치는 소리와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었다. 가슴에 허탈감과 아픔의 여운이 꽉 들어차 있었다. 낮게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아스의 호흡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비웠다. 흘러가는 구름들이 그림자를 지웠다가 사라지고, 카멜은 잠시 이렇게 잠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물이 얼룩진 눈꺼풀을 내렸다가, 갑자기 격렬하게 헐떡거리기 시작하는 아스의 상태에 놀라 머리를 들었다. 아스는 눈을 커다랗게 뜬채 팔로 몸을 감싸고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굴이 새파래지고 호흡이 격해지며 꽉 다문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 아스, 아스님! 왜 그러세요! 괜찮으십니까? " " 으흑... 으... 으... 아아악-!!! " " 아스님-!!! " 고통에 몸을 비틀던 아스가 갑자기 축 늘어졌다. 카멜이 그의 몸을 안아들고 앞머리를 넘겨주자, 눈꺼풀을 파르르 떨던 아스가 눈을 떴다. 그의 청록색 눈동자엔 경악이 가득했다.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카멜을 올려다보며, 아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결계가... 결계가 부서졌다. " 결계수가 서 있는 황무지에 먼지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결계수 하나가 베인채 서서히 앞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쿠구구구-- 가지가 바닥에 닿으면서 우둑우둑 부서지는 무수한 굉음이 가득찼다. 거대한 그 나무의 가지들에서 뻗쳐나가던 결계의 기운이 사라지고 그 결계수에 깃들여져 있던 트리옌의 정령이 비명을 지르며 소멸해갔다. 결계를 운용하고 있던 마법진이 깨어지고, 결계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레지는 한발을 성큼 앞으로 내딛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미친듯이 휘날리고 있었다. 레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 이제 축복의 성을 배경으로 붉은 피보라를 일으켜 볼까? ... 아아, 트리옌들의 피는 투명하니 붉지는 않나? " 그는 마법으로 넘어진 결계수에 불을 지르고, 폴리모프를 풀었다. 커다랗고 불길한 보랏빛의 날개가 피어올랐다. 결계가 부서져서 레지는 마법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그는 축복의 성으로 텔레포트 마법을 외웠다. 거울의 연못 위에 갑자기 거대한 용족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경악스런 광경이었다. 축복의 성에 있던 트리옌들이 비명을 지르고, 레지는 위협하듯 유유히 상공을 선회했다. 그의 시커먼 그림자에 놀란 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후드득 날아올랐다. 월의 부축을 받으며 펜이 아리스타타의 방 테라스로 나와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에 커다란 그림자는 불길했다. 월이 이를 뿌드득 갈며 중얼거렸다. " 그 용족입니다. 에린지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것이 틀림없습니다. ...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게 아닌지... " " 아니예요. 책임을 따지고 들자면 끝이 없겠죠. " 레지는 테라스로 나와 있는 은빛 머리카락의 펜을 보자 우아하게 변신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그녀앞에 내려섰다. 월이 녹색눈을 부라리며 레지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멋지게 다리를 뒤로 빼며 허리를 굽혀 보였다. " 위대하신 에린지움의 걸음 펜 오키드님을 비천한 용족 레제다 튜베로즈가 뵙습니다. " " ... 네가... 결계를 깼군. 대체 어떻게-? " " 다 여러분의 은공 덕이지요. " 펜의 눈이 커졌다가 일그러졌다. " 설마... 그곳은 세상의 끝이다. 용족이라 해도 빙해를 가로지를 순 없어!! " 레지의 미소가 더욱 더 커졌다. " 그.냥. 용족이라면 그렇겠지요. 자아, 드디어 마지막 무대의 막이 열렸습니다. 리옌 여러분. 그럼, 즐겨볼까요? " " 이 놈-!!! " 월의 검이 위협적으로 날아들었다. 레지가 그것을 피하자 월의 검이 테라스의 난간을 박살냈다. 월은 무섭게 레제다를 몰아붙였다. 월 역시 펜의 묘목이며 글로리 나이트였다. 몇번 레지의 어깨와 다리에 상처가 났지만 레지는 이리저리 피하며 주문을 외웠다. 펜은 마법을 막기 위해 다시 결계를 발동시키려 안간힘을 썼지만, 이상하게 에린지움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오질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에린지움에게서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라는 오싹한 느낌과 함께, 레지가 내쏘는 번개에 맞고 테라스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월이 보였다. 다음 레지에게 목줄기를 틀어잡힌 것은 순식간이었다. 펜은 두려움을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 놔라-!!! " 레지의 미소가 짙어졌다. " 싫습니다만-? 자아, 당신의 심장은 어디에 있지요? 여기에 있나요? " 푹. 레지의 손이 펜의 조그만 젖가슴을 뚫고 가슴안으로 파고들었다. 흉기와도 같은 그것이 생살을 찢고 근육을 가르고 안으로 침범하자 투명한 피가 강처럼 흘러내렸다. 끔찍한 고통이 펜을 덮쳤다. " 꺄아아아아아아아악-!!!! " " 그 손을 놔-!!! " 정령으로 다시 솟구쳐 오리는 월의 검을, 레지가 재빨리 주문을 외워 날려보냈다. 문이 콰당! 열리고 무수한 트리옌의 나이트들이 올라왔지만 모두가 레지와 그에게 잡힌 펜 주변으로 둘러쳐진 번개의 장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파지지지지직--- 푸른 전류의 커튼 속에서, 레지는 모두가 바라보는 앞에 천천히 펜의 가슴을 헤집었다. 쿨렁쿨렁, 향기로운 피가 레지의 얼굴에 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펜의 파랗게 질린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월이 미친듯이 다시 달려들었지만 그는 번개의 장막을 뚫지 못한채 비명을 올렸다. " 으아아아악!!!! " 레지는 튄 피를 핥으며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 심장이 가슴에 없는데? 심장이 없는 트리옌의 심장은 대체 어디있는 거지? " " 아아아아악-!!! " 월은 제 죽는 줄도 모르고 계속 번개의 장막을 통과하려 기를 쓰고 있었다. 레지는 시끄럽다는 얼굴로 그를 튕겨 날려버리고, 펜의 가슴에 처박았던 손을 빼고는 그것을 혀로 핥았다. 그리고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 어서어서 오너라, 아스. 빨리 오지 않으면 이 아가씨의 목숨은 없어. " 꽈앙-!! 갑자기 전신을 짓누르는 느낌에 레지는 신음을 흘리며 펜을 놓쳤다. 펜은 시체같은 얼굴로 바닥에 쓰러졌다. 레지가 잠시 정신을 놓자 번개의 장막은 사라지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보니 마법을 억제하는 결계가 통째로 자신의 위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것을 시전한 자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테라스위에 올라섰다. 하얗게 흩날리는 은발머리 사이의 청록색 눈동자는 분노로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 레제다 튜베로즈... " " 아스... 큭-! " 구웅- 레지를 짓누르는 결계의 힘이 한결 더 강해졌다. 픽, 픽 귀와 코속에서 피가 튀어오르고, 레지는 마법을 뿌리며 간신히 저항했다. 그는 몸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도 입술을 끌어올려 말했다. " ... 왔...군. 좋아... 이제... 어디 춤춰봐라... " 몸은 당장이라도 으스러질듯 아팠지만 레지는 즐거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배우들이 모여들고 있다.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무대다. 세상에서 저보다 아름다운 주인공은 없을 것이다. 분노하니 더 아름답군. 아스는 레지의 입가에서 떠날줄을 모르는 비웃음에 이를 드런었다. 아스의 손가락이 위에서 아래로 허공을 긋자, 핏, 하는 소리와 함께 레지가 아스에게 냈던 상처와 똑같은 상처가 그의 몸에 났다. 레지가 구상하고 있던 마법진이 흩어지며 어깨서부터 허리까지 살을 가르고 피가 튀어올랐다. 아스와는 달리 용족인 그의 피는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레지가 고통에 멈칫거리는 사이 아스는 쓰러진 월과 펜 곁으로 달려갔다. 아스가 몸을 구부려 바닥에 손을 짚자, 회랑의 바닥에 그려져 있던 에린지움의 문이 위로 떠올랐다. 그의 손 아래에서 펜이 아무리 노력해도 꿈쩍도 않던 진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돌아가는 거기에서 선명하고 눈부신 흰 빛이 올라오고, 아스와 월과 펜이 물속에 잠기듯 아래로 꺼져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레지가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그의 목에 장검이 와 닿아 행동을 멈추게 했다. 레지는 흩날리는 금발을 보고 조소를 날렸다. " 글로리 나이트 카멜리아, 행차 안하셨으면 섭했겠지. " " 도대체 무슨 수로 결계를 깬거지? " " - 알고 싶으면 이 쇳덩어리나 치우시지-! " 레지는 뜻밖에 손으로 카멜의 검을 밀어냈다. 날카로운 단면에 손바닥이 왈칵 찢겨나가고, 레지는 양손에 가슴의 피와 손바닥의 피로 범벅을 하더니 트리옌으로써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용족의 마법주문을 외웠다. " 으윽-!! " 갑자기 피어오르는 열기에 카멜이 흠칫 물러서고, 거대한 굉음과 함께 다시 돌아가며 맞물려 닫히던 결계의 틈바구니가 끼기긱 멈춰섰다. 레지가 날려보낸 둥근 마법진이 사이에 끼어 닫히지 못하고 시끄러운 마찰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 안으로 몸을 날리는 레지를 보고 카멜은 이를 악물며 같이 뛰어들었다. 카멜이 뛰어들때까지 잠시 잠깐 벌어져 있던 결계는 곧 거대한 소리를 내며 사이를 막고 있던 주문을 부숴뜨리고는 다시 닫혔다. 두 사람을 안고 에린지움의 앞으로 내려선 아스는, 자신의 단검으로 손바닥을 그어 그의 피에 에린지움의 힘을 풀어 두 사람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을 빼고는 뭐든지 살려낼 수 있는 기적의 피와 에린지움의 힘이 끔찍하게 벌어진 펜의 가슴팍으로 스며들었다. 상처는 실타래가 엉키듯 새 살이 돋고 다시 아물어 갔다. 펜의 얼굴에 미약하나마 혈색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던 아스는, 문득 긴 소매 밖으로 드러난 펜의 검은 손 끝을 보고 천천히 옷을 걷어올렸다. 그것은 번개에 맞아 죽은 말라 비틀어진 고목같았다. 보드랍고 윤기있는 흰 피부가 자리해 있어야 할 팔은 시커멓게 죽어있었고 흉하게 비틀리고 말라붙은 모양이었다. 아스는 그것을 보고 흡, 숨을 들이켰다. 다 자신 때문이라고 외치던 꿈속의 그녀의 음성이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면서, 아스는 어지러움에 잠시 눈을 감았다. " 제발... 늦지 않았기를... " 아스는 손에 최대한 에린지움의 힘을 끌어모았다. 거대한 흰 나무가 엷게 빛나고 아스의 몸도 엷게 빛나며 그의 혈관을 따라 흐르는 모든 힘의 강줄기가 손끝으로 모였다. 아스는 자신의 피가 적셔진 손으로 펜의 팔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힘를 아무리 쏟아부어도 펜의 팔에 검게 얼룩진 그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아스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스는 축축해 지려는 눈꼬리를 문지르며 하릴없이 에린지움의 힘을 펜에게 흘려보내고 있었다. " 안돼...! 고쳐질거야. 이럴리가 없어. 제기랄! 나아! 나으란 말이야!!! " " ... ... 네 죄의 댓가다. " 퍼뜩 고개를 들자 펜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는 파리한 얼굴로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팔의 고통과 가슴을 헤집힌 후유증으로 몸이 헝겊인형처럼 뒤틀린 기분이었다. 펜은 분노와 고통을 담은 눈으로 아스를 바라보았다. " 다 너 때문이야. 넌 이곳에 돌아오면 안되는 자였어. 여기에 네 자리는 없어. 책임지지도 못할 두려운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다니며, 사람을 죽이고 다니니까 즐겁더냐? " 아스는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펜에게 듣기전 수십번 자신이 스스로에게 물었던 말이다. 펜은 소매를 찢고는 흉측하고 시커멓게 변한 팔을 아스에게 들이대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 네가 살인을 할때마다 나는 고통속에 몸부림 쳐야만 했어. 왜!! 대체 내가 왜! 너때문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거지? 왜 네가 에린지움의 걸음인 거야! 왜 내 앞에 나타나서 무슨 권리로 내게 고통을 주는 거냐고-! " 그때였다. 탁, 쉬리릭! 뭔가 목에 부딪힌다 싶더니만 온 전신을 감싸고 충만했던 에린지움의 힘이 갑자기 사그라들었다. 아스가 놀란 얼굴로 목을 더듬자 뭔가가 자신의 목을 감고 있었다. 펜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자신의 뒤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아스는 순간 뒤를 올려다 보았다. 거기엔 정확히 자신을 향해 검을 치켜든 월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심하게 화상입은 몸으로 비틀거리고 있었지만 검 끝에는 예전에 아스를 죽일뻔 했었던 때와 달리 흔들림이 없었다. " 그분의 말씀이 옳다. 너는 죽어야 해. " 비명은 나오질 않았다. 장검이 곧바로 내리꽃히는 것이 보였지만 피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스는 질끈 눈을 감았다. " ---!!!! " 펜의 소리 없는 비명과, 짧은 신음성. 투명한 피가 흩날렸다. 얼굴에 와 부딪히는 액체에, 아스가 눈을 뜨자 자신의 코 앞까지 와닿은 장검의 날을 희고 단단한 손이 꾹 쥐고 있었다. 장검이 다시 뒤로 쑥 빠져나가자, 카멜은 잠시 비틀거렸다. " ... ... 후... 윽... " " ... 카멜... " " 괜... 찮으시지요. 아스님. " 그리고는 곧 아무렇지 않게 몸을 곧추세우고는 허리의 장검을 빼어 그었다. 월의 몸이 두동강나며 아래로 흐트러지고, 펜이 비명이 에린지움을 울렸다. " 안돼에에에에-!!!!!!!!! " 카멜은 힘에 겨운듯 검을 떨어트렸다. 그의 가슴에서 솟아나는 피는 투명해서 현실감이 없었다. 옷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는 흔적만이 보일듯. 그것은 피가 아니라 그냥 물 같았다. " ... 카, 카멜. " 카멜이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 어째서... " " ... 어째서... 가 아닙니다. 당연히... 지요. " 아니야. 어째서가 아니야. 난 네 사랑을 외면했어. 네 사랑을 배신하고 무스카리를 택했어. 내 마음은 그를 택했고 널 보지 않아! 네가 모든 것을 바쳐서 내게 주었던 것들을 난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만들었어. 내가 밉잖아. 내가 싫잖아. 내가 증오스럽고 저주스럽잖아. 내가 안스륨을 잃고 고통스러웠던 것 처럼... ... 너도 아프고 힘들잖아. 그런데 어째서. 넌 이렇게 끝까지... " 아스님, 전... ... " " 말, 말하지마!! " 카멜이 말을 하자 피가 더 나오는 것 같았다. 아스는 서둘러 그의 가슴을 치료하려 했지만, 지직거리는 번개를 감은 붉은 피에 젖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카멜의 목을 휘어감았다. 카멜이 고통으로 얼굴을 일으러트리고, 무리한 마법의 사용으로 입에서 붉은 피를 후득후득 뱉어내고 있는 레지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날려보낸 전격에 아스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 펜 오키드. 죽여라. " " ...? " 월이 죽었다는 패닉으로 멍해진 펜은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레지는 욕설을 내뱉더니 거칠게 말했다. " 아스를 죽이란 말이야-!!! 그는 지금 에린지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지금이라면 죽일 수 있다!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할거냐? 어서 죽여!!! 그가 죽으면 에린지움은 네 것이 된다!!! " 펜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검을 줏어들었다. 아스가 손바닥을 그었던 그의 단검이었다. 카멜은 죽어버린 듯 파리한 얼굴에 호흡이 없었다. 아스는 자신 대신 칼을 맞은 카멜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아스의 동요를 읽기라도 하듯, 레지는 잔혹하게 말했다. " 아스. 카멜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 이 정도의 출혈이라면 제 아무리 트리옌이라도 살아남기 힘들지. 자, 어때? 그 위대한 에린지움의 힘을 사용해 보시지. 그리하여 날 죽이고 어서 카멜을 구해봐. 널 사랑해서 자신의 목숨은 벌레처럼 느끼는 이 불쌍한 트리옌을 말이야. " " 레지이이잇-!!!! " 아스의 눈동자가 번쩍이며 아스는 벌떡 일어났다. 아스는 이를 꽉 물었다. 그 순간엔 살인을 해선 안된다는 것 따윈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내뿜는 살기에 에린지움이 부르르 잎사귀를 떨었다. 하지만 아스는 전격에 가슴을 호되게 얻어맞고는 다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아스는 몸을 떨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상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방금전까지 터질듯 했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카멜을 빨리 치료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앞에 보이는 것은 명확한 에린지움의 나무. 흰 가지, 회청은빛 나뭇잎과 하늘에 닿은 흰 그림자. 그 앞에 잠든 고요한 얼굴의 아리스타타. 그 어느때보다 에린지움의 힘이 필요한 때였고 에린지움의 힘이 강력할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목에 감긴 뭔가 때문이다. 아스는 펜이 단검을 든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미친듯이 목에 감긴 것을 벗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구 잡아당기며 목에 생채기가 나고 손톱으로 긁어 흉이 졌다. 아스는 마구잡이로 목을 긁어대었다. 안돼. 안돼. 절대로 안돼. 이대로 그가 죽어버리면 난 평생 나를 용서할 수 없을거야. 자신이 사랑하는건 무스카리였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준 것은 카멜이었다. ' 긴 암흑 속을 지난다 생각하겠습니다. 오아시스없는 사막을 지난다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기다리겠습니다... 여태까지의 제가 그래왔던 것 처럼. 하지만 알아주십시오. 당신이 지금 지나고 있는 그 시간을, 그 고통을, 수백년동안 겪으며 제가 지금 당신곁에 있다는 것을. ' 그 불타는 황혼 속 깊은 계곡에 날려 떨어지던 수많은 불꽃같던 낙엽들. 까마득히 깎아지르던 벼랑끝에 서서 텅 비어버린 마음의 마지막을 긁어 물었었다. ' 나는 이름조차 없어. ' ' 제가 드리겠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이름도, 저도, 마음도, 이 세상까지도! ' 자신의 사랑에 눈물겨워 그를 돌보지 않았다. 그의 사랑과 희생을 당연한듯 받아들이며 힘들고 지칠때에만 그를 찾았다. 무스카리가 준 사랑의 상처를 그에게 가서 달랬다. 그래. 그동안 그가 이기적인 나에게 입은 수많은 상처는 누가 치료해 줄 수 있었을까. 그의 사랑을 거부한 자신 대신 검을 맞으면서, 당연하다고 말하던 그의 미소를 다시 한번 더 볼 수 없다면 자신은 미쳐버릴 것이다. 아니, 미치지도 못하겠지. 그가 준 모든 것을 잊고 마음 편하게 미칠수는 없다. 하지만 평생을 고통속에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더욱 무스카리를 사랑하는 자신을 저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스는 아무것도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힘이잖아. 에린지움의 걸음이잖아. 싫어도 그렇잖아. 그런데 왜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는거야. 방금전까지 펜을 고칠때에만 해도 넘쳐났던 힘인데. 펜은 단검을 치켜든 채 아스의 앞에 섰다. 단검을 잡은 두 손이 시커멓다. 펜의 시선이 일순 그 손에 머물렀다. 아스가 이것을 되돌리려 했지만 되돌아가지 않았다. 예상대로였어. 그가 죽지 않으면 낫지 않을거야. 그가 에린지움에 뿌린 피값은 그의 목숨으로 갚아야 해. 난 죄가 없어-!!! 펜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 없으면... 그만 없으면-! 귓가로 레지가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정확히 가슴 중앙을 찌르지 않으면 트리옌은 잘 안죽으니까, 겨냥을 잘해. 아! 아니면 차라리 머리를 찌르는게 나을지도... ... " 펜의 눈동자가 확 타올랐다. 단검이 푹 꽃혔다. 카멜이 아래로 스르르 쓰러졌다. 레지는 카멜을 잡고 있던 손등에 박힌 단검을 보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이를 갈았다. 펜이 일그러진 레지의 얼굴을 보면서 외쳤다. " 내가 그깟 유혹에 넘어갈 줄 아느냐! 아스가 있든 없든, 나는 에린지움의 걸음이야! 내가 내 자리를 지키는데는 청록색 눈동자도, 누군가의 죽음도, 에린지움의 힘도 필요없었어! 내가 나로, 펜 오키드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힘과 능력이야-! 이 검은 얼룩은 망할 저 아스가 만든 것이고, 나는 저 바보스러운 놈을 용서할 순 없지만... 나는 교활한 용족의 입발림에 내 분신을 죽일만큼 어리석인 자가 아니야!!! 죽어야 할 자는 신성한 에린지움의 땅을 침범한 용족, 바로 너다!!! " 레지는 손등의 단검을 뽑으며 말했다. 그는 휘청거리면서 단검을 던져버렸다. 무리한 주문을 쓴 여파가 너무 컸다. 잠깐이나마 에린지움의 입구를 벌린 마법은 그의 생명력을 거의 던져넣다 시피한 것이다. 게다가 아스에게 당한 상처에선 쉴새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고... 시야가 점점 컴컴해져 가고 있었다. 레지는 눈안으로 흘러들어오는 피를 닦아내고 손에 마력을 모았다. " ... 벌써 내 입발림에 넘어가서 에린지움이 어딨는지 가르쳐 줬잖아? 네가 죽이기 싫다면 내가 죽여주지. " 펜은 카멜의 곁에서 아직까지도 패닉상태에 빠져 목에 감긴 것을 풀어내려 목을 마구 긁고 있는 아스의 뺨을 세게 때렸다. 철썩 하고 요란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 이 얼빠진 자식아! 네가 조금만 정신을 차렸으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잖아! 뭐하는거야! 넌 에린지움의 걸음이다! 이 세상의 절대적인 존재라고. 그깟 구속 하나를 못 푸는 거야? 정신차려-!!! " 아스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카멜의 싸늘한 몸을 한번 내려다 보고는 다시 펜을 올려다 보았다. " 하, 하지만... 에린지움의 힘이 느껴지질 않아. 이, 이상하다구. 카멜이 숨을 안 쉬는거 같얘. 죽었으면 어떻게 하지...? 펜, 도와줘. 네가 어떻게 좀 해봐. 카멜이 죽어가고 있단 말야. 넌 에린지움의 걸음이잖아! 어떻게 좀 해봐!!! " " 멍청아! 내가 진작에 너같은 힘을 가졌다면... 징징거릴때가 아니란 말이야. 어서 일어나!!! 지금은 카멜보다 네가 더 중요해. 죽을 참이야? " 펜은 그들에게 덮쳐드는 전격을 아스를 확 떠밀어 버리고 자신이 대신 맞았다. " 꺄아아아-!!! " 펜이 쓰러지고, 아스는 뒤로 넘어진채 다가드는 레지를 바라보았다. 레지는 붉은 피를 입에서 뚝뚝 떨어트리며,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피에 젖은 손으로 걷어올렸다. 그에따라 그의 흰 이마에 붉은 선이 생겼다. 에린지움이 바람도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멀리 흰 수평선엔 푸른 포말이 일어나고, 하늘엔 영영 지지않는 흰 해와 달이 떠 있었다. 새파란 하늘엔 흰 에린지움의 그림자가 떠 있었고, 모든 것이 변함없고 에린지움은 저 자리에 있건만 아스는 목에 걸린 구속을 풀 수가 없었다. 레지의 손에 이글거리는 푸른 번개의 창이 생겨났다. 아스는 바닥의 흙을 움켜쥐고 비명처럼 외쳤다. " 아리스타타-!!! " 아리스타타가 무덤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도와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름에 호응하듯 에린지움이 우웅 떨었다. 흰 나무가 더욱 더 희게 빛나고 있었다. 무수한 은빛의 가루들이 진동하며 떨어지고, 공기가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그것은 에린지움의 앞에 커다랗게 둘러쳐진 금색의 타오르는 마법진에 막혀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아스는 눈을 크게 떴다. 저 마법진이 대체 언제-? 저것 때문에 결계가 부서졌고 목에 감긴 것 때문과 더불어 에린지움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는 레지의 뒤에서 나타나 마법을 치켜든 그의 손을 붙잡아 내리는 여자를 보았다. 적금발의 짧은 머리에 무미건조한 눈동자와 남자같은 딱딱한 몸매. " 에, 에리카 로벨리아... " 에라카가 나타나자, 레지는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풀썩 몸을 무너뜨렸다. 에리카는 그를 받아 바닥에 눕히고는, 뚜벅뚜벅 아스에게로 다가왔다. 아스는 경악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어째서 그녀가 이곳 에린지움의 신성한 땅에. 그것도 에린지움의 문을 통하지 않고서. " 당신이... 왜, 왜 여기에... " " ... 나의 똑똑한 아들 때문이지. 저 아이의 교활한 꾀로 알아낸 결과야. 에린지움이 세상의 끝에, 이 차원에 실존하는 나무라는 것을. 빙해를 너머 날아가는 것은 나로써도 힘겨운 일이었다. 사흘밤낮을 쉬지않고 날아야 했어. 마법으로 몇번이나 시동을 뛰어야 했고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어 영영 다른 세계로 가버릴뻔 했지. 그러다가 마침내... 저 흰 그림자가 보였다. 전설속에나 나오리라 생각했던 세상의 끝에, 달까지 그림자가 닿은 에린지움이 서 있더군. 너는 모를거다. 내가 얼마나 이 나무를 내 두 눈으로 보고 싶어 했는지. " 아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기서는 아무리 자신이 발버둥쳐도 그녀를 이길 수 없다. 그녀 역시 유일무이한 골드 드래곤 에리카 로벨리아. 태양에 던져져 태어난 불꽃의 분신. 아리스타타와 달리 그녀는 안드리움의 화산에 은거해 아리스타타 조차 그녀의 존재 여부만 알았을 뿐이지만, 에린지움을 막고 있는 저 거대한 마법진이 보여주듯 그녀의 힘은 에린지움조차 가로막을 정도였다. 몇번이나 레지의 전격에 얻어맞고, 목엔 내부에서 느껴지는 힘조차 쓸 수 없도록 구속이 묶여있고 에린지움이 마법에 막혀있는 이상, 자신은 그녀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죽은 목숨이었다. " ... 심장은 에린지움의 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야. " " ... 그럼 그건 어디에 있지? 네 몸에도 없고, 에린지움에도 없는거라면. " " 왜 심장에 집착하는 거지? 당신이 에린지움의 심장을 탐해 전쟁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 아리스타타와 무스카리는 전장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다. 아리스타타는 자결하지 않았을 것이며, 펜도 태어나지 않았을 거고, 자신도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다. 아마도 평범한 지구의 김재현으로 살았겠지. 모든 일의 시작은, 골드 드래곤 에리카 로벨리아가 에린지움의 심장을 가져오라 용족의 수장 무스카리에게 명한 것 때문에 일어났다. " ... 에린지움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물과 바람과 흙. 불을 봉하고 대륙을 정화시키기 위해 세명의 정령수의 힘을 빌어 언령마법사가 만들어낸 기적... 아리스타타는 그렇게 태어났지. 하지만 나는 날개를 뺏기고 봉인당한 불의 정령수... 그를 동정해 바람의 정령수가 화산속에 그 날개를 묻어 만들어낸 존재가 바로 나야. 그리고 용족은 내가 만들어냈어. 트리옌을 네가 만들어낸 것 처럼. " " ...... " " 아리스타타, 너만큼이나 나도 까마득한, 천년이란 세월동안 이 대륙에서 삶을 영위해 왔다. 하지만 너랑은 달리 나에겐 존재가치가 없었어. 너에겐 대륙을 정화시키고 생명을 키울 의무와 존재가치가 있었지만, 나는 그저 봉인된 불의 잔재로, 지난 세월의 파편으로 허공의 정령수 심허의 새가 단순한 동정심과 변덕에 의해 만들어낸 돌연변이일 뿐이야. 그래서 나는 항상 묻고 싶었다. 바람의 정령수 그를 만나, 나를 왜 만들었는지. " "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에린지움의 심장이 필요했나? " "... 고작이라고? " 에리카의 눈동자가 분노에 물들었다. 아스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존재 이유. 왜 나는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왜. 아스는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그에 대해 얼마나 고뇌해왔는지 떠올렸다. 나는 아리스타타도 아니다. 에린지움의 걸음으로썬 이미 펜이 있다. 무스카리와 카멜이 찾는것은 아리스타타.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도 아리스타타일뿐 아무것도 모르는 환생체 아스는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곳에서 아무런 필요도 없는 존재라면, 이런 고통을 주면서 왜 운명은 나를 여기로 이끌었나? 왜 나는 여기에 존재해야 하나? " 모든 자들은 숲의 주인이자 은빛의 군주 생명의 여신 아리스타타를 칭송한다. 네 품에서 태어난 생명들은 평화롭게 살다가 다시 자연의 섭리대로 흙으로 돌아가지. 하지만 나는 다른 용족들과는 달리 죽을 수 없는 몸이다. 나는 나를 죽여줄 존재로 용족을 만들었지만 그들도 나보다 약했고, 아리스타타는 생명을 죽일 수 없는 몸이었어. 나는 이 세계에 필요없는 기이한 돌연변이였고, 내 부모격인 심연의 정령수와 허공의 정령수에게조차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난 아무런 의미없이 계속 살아있어야만 했어. 난 묻고 싶었지. 왜 날 만들었냐고. 내 존재가치는 무엇이냐고. 이유가 없다면 차라리 나를 걷어가 달라고. 하지만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일이 없도록 그들은 스스로를 묻었고, 특히 형체가 없는 바람의 정령수는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에린지움의 심장을 내 손에 넣는다면, 그를 불러낼 수 있겠지. 아니면, 차라리 에린지움을 없애고 같이 파멸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거야. " 아스는 이를 악물었다. " 그럴 순 없어!! " " 자, 말해! 에린지움의 심장은 어디에 있지? " " 그건 눈에 보이는 것 따위가 아냐, 달라고 해서 줄 수 있는게 아니라고. 그건...!!! " - 어리석다. 골드 드래곤 에리카 로벨리아여. 갑작스럭 제 3자의 목소리에 아스와 에리카의 고개가 돌아갔다. 월의 시체는 흙에 반쯤 파묻힌 상태였고, 펜과 레지는 기절한 상태였다. 낯선 목소리를 끄집어낸 것은 카멜이었다. 온 몸을 흠뻑 적실 정도로 투명한 피를 흘린 그는, 낯선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두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때마다 하얀 입김이 보였다. 아스는 중얼거렸다. " 심해의 정령수... " " 심해의 정령수? 당신이 그 트리옌의 몸에 들어가 있었나? " - 그렇다. 에린지움의 걸음이여. 이 트리옌의 생명은 지금 내가 붙들고 있다. 내가 깃든 몸이 아니었다면 벌써 죽었겠지. 내 힘은 자연의 힘. 사사로운 일에는 쓸 수 없으므로 그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끝까지 막지 못한다. 서둘러라. 그가 오고 있다. " 그라니? " 에리카의 물음에 정령수가 대꾸했다. - 불타는 심해의 정령수. 네 날개의 주인이 오고 있다. " 무스카리가 말인가? " - ... 그의 몸은 이미 불의 짐승이 삼켰다. 아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 무... 무슨... 뭐라고... " - 그는 심연의 정령수를 부릴 수 있기 위해 그와 위험한 계약을 했고 그것을 이행하지 못했다. 무스카리라는 용족의 몸은 지금 불의 짐승이 장악하고 있다. 그럼. 그가 죽었다는 말인가? 아스의 귀에 우웅... 하는 이명이 들렸다. 시야가 캄캄해지고 있었다. - 골드 드래곤이여. 정녕 바람의 정령수가 어디있는지 모른단 말인가? " 형체도 모습도 없는 그를 내가 무슨 수로 찾는단 말인가? " - 네가 단지 봉인당한 심연의 정령수의 잘린 날개로만 죽지도 않는 강대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가? 새로운 종족을 탄생시킬 힘이 있다고? 생명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들 대정령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바람의 정령수 그는... 대정령으로써의 본분을 잊고 심연의 정령수에게 의지를 내준 나머지 그를 도와 지난 세계를 멸망시키는데 일조했고 끝끝내는 그의 잘린 날개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어넣어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켰다. 에리카 로벨리아. 바로 너 자신이 허공의 정령수이다. 너는 그의 의지와 능력과 모든 것을 받아 그 용족을 창조해낼 수 있는 힘과 육신을 입었다. 에리카의 몸이 우뚝 멈춰섰다. " 그런... ... " - 너의 방황은 의미없는 것이었다. 저 만들어진 에린지움의 걸음이 그렇게 말했지. 자신의 존재가치는 자신이 세운다고. 그녀는 그 누구의 힘도 능력도 빌리지 않았고 자신의 운명과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않았다. 네가 찾아 헤맨것은 너 스스로가 찾을 수 밖에 없는 것. 너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 ...!! " 그녀의 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감고 있는 그 손은 상처부위를 피도 나지 않도록 태우면서 천천히 물러났고, 에리카는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고 뒤를 돌아보았다. 심해의 정령수가 외쳤다. - 불타는 심연의 정령수!!! 한없이 일렁이며 끓어오르는 불길이었다. 무스카리의 육신을 입고 있었지만 그를 두르고 있는 옷은 불길이었다. 그것은 타오르는 불길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서도 있었다. 그의 발이 바닥에 와 닿자 흰 모래가 끓어오르며 녹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불똥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카멜, 심해의 정령수의 몸에선 그 열기에 대항이라도 하듯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멜의 금발머리가 까득까득 얼어붙고 스치기만 해도 얼어붙게 만들어 부숴버리는 절대 영하의 냉기가 그의 주변을 싸하게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자신을 돌아보는 에리카를 바라보며, 무스카리, 아니 심연의 정령수가 웃었다. - 저 흰 뱀의 말이 맞다. 바로 에리카 로벨리아, 그 몸에 나의 잘린 날개와, 바람의 정령수의 힘이 있지. 심연에 봉인되어 있던 나로써는 혼자 힘으로 나올수도 없었고, 형체를 갖추지 못한채로는 너를 죽일수도 없었다. 자아, 이제는 내 모든 것을 돌려받을때가 되었다. 네 존재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나? 크하하하, 그건 바로 나에게 모든 것을 돌려주기 위해서이지-!!!! 에리카는 잠시 자신의 상처를 감싸고는 비틀거렸다. 곧 심연의 정령수의 손아귀가 날아들었다. 그가 에리카의 머리를 쥐고 들어올리자 그녀의 눈이 고통에 크게 떠졌다. 머리카락이 타며 피부가 녹는다. 그녀의 얼굴에서 절대 뚫을 수 없는 용의 비늘이 파르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불과 함께 하는 몸으로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가 뜨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스카리는 당장 그녀를 녹여버려 자신의 안으로 흡수하려 들었지만 그녀의 몸 안에 숨어있던 허공의 정령수의 힘이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대정령의 법칙에 따라 정령은 합쳐질 수 없다. 서로가 서로의 힘을 견제하며 보완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에리카는 그의 날개였다. 조금씩 불과 바람의 힘이 심연의 정령수에게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에리카가 에린지움 앞에 쳐둔 마법진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스의 목에 둘러쳐져 있던 구속이 깨졌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앗. 불길이 치솟았다. 한번도 불길에 더렵혀진적 없는 세상의 끝, 에린지움의 성역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에린지움의 흰 그림자는 불길에 얼룩지고 있었고 피어오르는 열기에 나뭇잎들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곧장 멀리서 포말을 일으키던 빙해가 몰려오고 있었다. 엄청난 파도가 폭염의 불기둥으로 달려와 부딪혔다.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엄청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아스는 가슴까지 얼어붙을듯 차가운 빙해의 물살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고는 떠내려가는 펜을 붙잡았다. 카멜의 몸 주변으로 다가가면 얼어붙는 절대영도의 공기가 파르스름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심해의 정령수가 아스에게 외쳤다. - 심연의 정령수가 골드 드래곤의 몸을 집어삼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가 날개와 허공의 정령수의 바람의 힘을 손아귀에 넣으면 누구도 당해낼자가 없다. 이 세계는 파멸한다! " 하지만 어떻게...!! " 에린지움은 위대한 힘을 지녔지만 나무였다. 에린지움의 천적은 불이었다. 에린지움의 힘은 심연의 정령수가 부리는 불길을 억제하지 못했다. 카멜의 모습을 한 그가 대꾸했다. - 무스카리, 그의 심장에 칼을 꽃아라! 에리카의 힘을 흡수하기 전까지 그는 완전하지 못하다, 아직까지는 봉인된 상태다. 숙주인 무스카리가 죽으면 그는 다시 심연으로 돌아간다. 빨리 하지 않으면 이 트리옌은 죽는다. 겨우 생명만을 내가 붙들어두고 있는 상태인데, 이대로 내가 계속 무리하게 움직이면 결국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어서-!!! 아스는 반사적으로 쓸려가 물에 젖은 흙바닥에 꽃혀있는 카멜의 장검을 집어들었다. 아스는 펜을 에린지움의 나무둥치 밑에 뉘어놓고 에리카를 붙들고 있는 무스카리에게로 달려갔다. 에린지움이 눈부신 빛으로 뒤 흔들리며 아스를 감쌌다. 에리카의 마법진이 깨어지면서 순수무결한 그 힘이 아스에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심연의 정령수가 무수한 불길을 피워올렸지만 뒤에서 심해의 정령수가 그것을 피어나는 족족 그대로 꺼트리고 있었다. - 이이-!!! 같은 정령수를 언령마법사의 말에 넘어가 봉인한 배신자가, 끝까지 나를 방해하는 구나!!! - 너는 대정령의 법칙을 깼다. 네가 비열한 방법으로 얻은 허공의 정령수의 힘으로 넌 세계 하나를 멸망시켰어! - 내 힘을 멋대로 쓴것은 그들이다. 타락과 파멸을 부른 것은 그 인류들이었다! 그런데 내 날개를 꺾고 나를 암흑속에 봉인시키다니 그것이야 말로 대정령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그 댓가가 이것이다. 저 에린지움의 걸음은 결코 날 죽일 수 없다. 에린지움을 죽일 수 있는 것은 나 뿐이고, 그의 영혼을 움켜쥐고 있는 것도 나야!!! 아스가 장검을 뒤로 뺐다. 정령을 운용해 발에 힘을 실었다. 아스는 휘두르기만 하면 무스카리의 심장을 겨냥할 수 있었지만, 오만한 정령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불타는 얼굴로 말했다. - 네가 과연 나를 찌를 수 있을까? 이 몸은 무스카리, 그의 것이다. 비록 내가 잠식하고 있지만 그는 죽은 것이 아니야. 나를 찌르면 너는 그를 죽이는 것이지. 나는 그저 내가 있던 심연으로 돌아갈 뿐이고, 너의 검에 희생되는 것은 그다. 크하하하하!!! 네가 과연 죽일 수 있을까? 그를? 아스의 가슴 부근에서 타오르고 있는 단단한 불길이 보였다. 암석과 같이 굳어진 에린지움의 심장이었다. 안에서 불타고 있는 업화는 불의 저주. 에린지움에게 씌워진 굴레였다. -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네게 그런 저주를 씌운 것은 불행히도 내가 아니지. 바로 너를 만든 언령 마법사였다! 그 어리석은 자 역시 인간일 뿐이었어!! 세계를 구한답시고 세 정령의 힘을 빌어 나를 봉인하고 에린지움을 만들었지만, 결국 불없이, 4대 원소를 모두 갖추지 않고서 완벽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하필, 그런 형태로 네게 박아넣은 것은, 그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지. 그것은 그가 그의 손으로 만들어낸 완벽한 피조물이었다! 세상을 구원할 신이었지!!! 크하하, 그는 자신의 창조물을 사랑했어. 그 인간은 자신의 창조물이 다른 어떤, 특정한 것에 마음을 주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의 저주를 씌웠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말이야! 그 누구에게도 사랑한다 말할 수 없다! 너의 영혼과 진심과 마음과 심장은. 모두 내가 움켜쥐고 있다! 크하하하하하!!!!!! 아스는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숲이 불타는 것과 같이 불길한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손이 떨려왔다. 온 몸이 떨려왔다. 사랑받는 아스의 모순은 위대한 카가 쥐고 있다. 심장이 없는 에린지움의 심장은 불의 저주다. 심장이 없는 에린지움의 걸음은 사랑할 수 없다. 그 번뇌도! 고통도! 고뇌도! 망설임도! 아픔도! 슬픔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에린지움의 걸음이라는, 불의 저주라는 굴레에 묶여 흩어지는 한 줌 모래와 같은,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불과한 것. 나는... 나는...!!! 아스포델. 아스포델이 좋겠다. 그냥 아스라고 부르도록 하지. 아스포델... 무슨 뜻인가요? 별 의미는 없다. 그냥 흔한 이름이야. . ... 나에게 시간을 줘. 아무것도 묻지 말아. ... ... 당분간만이다. 당분간만... ... 알았어요, 안스륨. 처음에 만났을때 곧 알게 될거라고... 그랬죠. 그렇죠? 당분간만이라면 몰라도 괜찮아요. 안스륨은 지금 저의 유일한 보호자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고... 저를 보호하려 하니까요. 그것들이 안스륨을 괴롭힌다면 묻지 않을게요. 여태까지 안스륨이 저한테 많은 것을 해줬는데, 제가 그거 하나 못 참겠어요? ... ... 단지... 지금 안스륨의 옆에 있는건 저니까요. 안스륨, 안스륨... 흑, 나, 나 기다렸어, 안스륨이 올 줄 알았어... 하지만, 너무 늦었잖아. 못 오는 줄 알았어. 어떻게 찾은 거야? 어떻게... 너를 사랑하니까... ...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이 목마름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뭐라 해도 좋아! 내 죄를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그를 데리고 도망치겠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설사 수백년을 헤매더라도 그와 내가 살 땅을 찾겠다! 수백년동안 헤매더라도 그만 내 곁에 있다면 아무것도 필요없어!! 나는 아리스타타가 아니야!! 나는 아리스타타가 아니야!!! 나는, 나는, 나는 아스야!!!! 이래야만 했어!! 진작에 이래야만 했어-!!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너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엔 없어! 사랑해! 사랑해!! 미칠것 같이 사랑한다! 이 구멍을, 이 갈증을 어떻게 해야하나? 내가? 내가? 어떻게!!!!! 사랑한다 아리스타타! 사랑해! 아리스타타! 아리스타타!! 결계를 넘어가면, 뜨거운 사막을 지나자. 사막을 지나 대륙의 지붕 뜨거운 불길의 화산을 지나면 누구도 이르러 본 적 없다는 대륙의 끝 빙원에 당도할거다. 빙원에서 은하수와 오로라를 밟으며 걸어 빙해에 다다르면, 빙산의 징검다리를 지나 아무도 없는 세계의 끝으로 가 함께하자. 그는 이대로 죽으면 안돼!!! 그를 죽이는건...! 그에게 복수하는 건...! 그를 망치는건...!!! 나여야 하니까...!!! 나때문에 흘리는 눈물 한줄기 보지 못하고 그를 죽게 만들 순 없어-!! 도망가지마. 도망갈거야. 떠나지마. 떠날거야. 내 곁에 있어줘. 있을 수 없어. " ... 널... 널 사랑한다. " " 난 당신을 증오해. " " 아니야... " 아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어. 그것을 알아주길 바랬는데. 아스는 검을 치켜들었다. 에린지움이 우우웅 울고 있었다. 시커먼 폭염과 그에 부딪히는 얼음으로 생겨난 수증기들이 온 땅을 메우고 빛을 가려 사방은 어두웠다. 아스의 짧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앞으로 한발 내딛은 발의 뒤꿈치가 깊히 패여 있었다. 카멜의 장검을 잡은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 빨리...!!! 펑, 하고 또 한번 폭염이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심해의 정령수 어둠의 뱀이, 카멜이 삼키는 신음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무스카리는 불타는 한 손으로 에리카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불꽃을 사방으로 피워올리고 있었다. 아스의 몸에서 가느다랗게 흘러나오는 흰 빛이 폭염과 재와 튀어오르는 흙덩이를 비키며 금속의 새파란 날에 모여들고 있었다. 심연의 정령수는 이를 드러내었다. 보석같이 붉은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 넌 절대로 찌르지 못해. 이 녀석이 얼마나 불쌍하고 가여운지 아느냐? 단지 너를 갖겠다는 열망으로 나와 계약했지. 크하하, 그 계약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 것이었다. 무스카리 그가 패하는 것이 확실한 게임이었지. 그는 불의 저주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네 입에서 나올 사랑한다는 그 하찮은 말 한마디를 기다렸어. 나의 저주에 묶인 그 말 한마디를 말이다! 으하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심장따위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설사 네가 불의 저주를 깨고 헛소리라도 그에게 사랑한다 말했더라면, 에린지움의 모든 힘은 저주의 주인인 나에게 돌아왔겠지. 그리고 너는 죽을 수 밖에 없다! 흐흐흐... 차라리 이 자를 살리고 모든 트리옌과 이 세계를 버리겠느냐? 그것 역시 괜찮았겠지만, 이 세계는 원망해야 했을 것이야. 에린지움의 걸음이 환생체로 돌아와 살인으로 신성함을 더럽히더니 결국 사랑에 눈멀어 세상을 팔았다고!! 네 영혼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널 사랑하는 이 놈 역시 결코 구원받을 수 없겠지! 재미있지 않나? 이러든 저러든 모든 것이 나의 승리다. 결국 이 녀석은 혼자 죽지 못하는 이기적인 놈이야. 하지만 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징징거렸지. 그것만큼 하찮고 가치없는 말이 뭐가 또 있다고!! 크하하하하!!! 어디 찌를 수 있으면 찔러봐라. 너를 사랑한 불쌍한 사내를 죽여보란 말이다! 아하하!!!! " ... 그래... 난.... " 아스의 검을 잡은 팔이 아래로 늘어뜨려졌다. " 그를 죽이지 못해... 찌르지 못해... " - 에린지움의 걸음이여-!!! 어둠의 뱀이 신음처럼 외쳤다. 쾅! 쾅!! 대지를 가르고 용암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에린지움에서 나오는 연약한 빛이 나무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빛은 이글거리는 불길에 너무나 나약해 보였다. 땅이 흔들리는 곳에 서서, 아스는 팔을 늘어뜨린채로 중얼거렸다. " 그래... 난 결코 그를 죽이지 못하겠지. "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서로 헤매었던가! 그렇게 오해와 불신과 고통속에서 서로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고 결코 솔직해지지 못한채 숱한 아픔을 안겨주었었지.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나를 사랑한다고 거침없이 말해주었던 두 사람. 사랑한다는 말이 고통이고 두려움이었던 무스카리와, 사랑한다는 말이 사치와 과욕이었던 카멜... 아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아 그래. 지금에야 알 것 같아. 난 정말로 사랑받았구나- 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돌려주지 못했다는 것을. - 크하하하하!!! 나는 부활한다!!! 푹. 아스는 팔을 한껏 뻗어, 힘껏 자신의 가슴을 찔렀다. 그것은 정확히 가슴의 중앙을 관통하고 등을 뚫고 나왔다. 아스는 팔을 파르르 떨었지만 망설임 없는 동작으로 검을 빼내었다. 카멜과 정령수가 경악과 고통의 얼굴로 아스를 바라보았다.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올랐다. " 안돼!!! " - 안돼!!! 피가 주르륵 흘렀다. 아스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는 입술끝을 끌어올려 미소지어 보였다. - 으하하핫!!! 나의 승리다-!!!! " 천만에... 기적을... ... " 그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눈안에 검은 연기 저 너머로 에린지움의 풍성한 가지가 보였다. 축복과 기적과 생명의 나무여. " 단 한번...만... 에린지움이여... 단 한번만... " 아스는 아리스타타가 자신의 가슴에 칼을 꽃으며 빌었을, 자신과 똑같은 바램을 떠올렸다. 아스는 입술을 벌렸다. 가슴의 고통과 저주가 죄어오는 목구멍이 타는 듯 아팠다. 아스는 가시가 돋아난 듯한, 온통 굳어가는 혀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아리스타타, 지금 내 안에 있다면 힘을 빌려줘. 죽음을 넘어서 나를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만든 것이 너라면, 운명조차 거스르고 무스카리를 사랑했던 너라면 다시 한번 간절히 빌어줘. 기도해줘. 에린지움의 걸음이여. 세계의 창조도, 정화도, 보살핌도, 트리옌도... 너의 모든 것을 잊고 내 입을 벌려줘. 너를 대신 해서 말해줄게. 단 한번만... 내게 기적을-!!!!!! 아스는 쓰러진 채였다. 피가 강처럼 흘렀다. 그 피에 적셔진 땅에서 새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피와 함께 새어 나오는 그의 생명력에 그곳엔 순식간에 싹이 돋고 잎이 자라고 꽃을 피웠다. 꽃과 잔디속에 누운채, 아스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의 생명력이 미약해지고 죽어가면서 불의 저주 같이 약해졌다. 달싹이던 입술이, 기적의 말을 속삭였다. " ... ㅅ... 사랑해... ... 무스카리... "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던 아리스타타의 시신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그 빛은 너울져 내리며 파괴의 힘에 진동하던 대기를 어루만졌다. 어두웠던 하늘에선 에린지움을 사랑하는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검게 그을린 땅을 박차고 자라나는 아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작고 푸른 생명력들이 대지를 푸르게 물들였다. 만신창이로 쓰러져 있던 펜과 카멜의 몸에도 그 빛이 내리며 모든 상처를 없애고 있었다. 펜의 검게 죽어버린 팔이 제 빛을 되찾으며 앙상하지만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카멜의 가슴에 크게 뚫린 상처는 물론이거니와 오래 묵은 전쟁의 상흔과 흉터들까지 모두 사라졌다. 레지와 에리카의 몸에도 그 생명의 축복은 빈틈없이 내렸고, 심연의 정령수는 에리카를 떨군채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카멜의 몸에서 빠져나온 심해의 정령수가 푸른 눈으로 그를 직시했다. 무스카리의 주변을 뒤덮었던 불꽃은 차츰 꺼져들어가고 있었고, 무스카리가 다시 눈을 뜨고 있었다. 그의 바깥으로 밀려나면서, 심연의 정령수는 중얼거리던 말을 비명처럼 올렸다. - 아니야... 아니야 이럴 수는 없어... 불의 저주가 깨질 수는 없어... 아니, 깨졌더라도 에린지움의 힘은 내 것이 되어야 해... 이건 아냐!!! 이럴 수는 없다!!!! 내가 이겼어!!! 내가 이겼다구!!! 세계는 파멸이다!!! - 심연의 정령수여, 어둠속으로 돌아가라. - 아아아아악!!! 안돼!!! 그 암흑은 싫다!!! 이건 말도 안돼!!!! 무스카리의 밖으로 튕겨나온 심연의 정령수는 무스카리의 그림자에서 입을 벌린 시커먼 허공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남은 불꽃의 한 점 마저 사라지고, 제 모습과 의지를 되찾은 무스카리가 천천히 누워있는 아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아스의 입가엔 가느다란 미소가 걸려 있었고,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 눈을 떠라... 나의 아스포델... " 무스카리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몸을 감싸안았다. 아스의 목이 힘없이 기울어졌다. " 나의... 아스포델... ...여기가... 세상의 끝이다... 우리가 함께 하고자 했던 곳이다... 눈을 떠... 눈을... " 무스카리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지만 아스는 눈을 뜰 줄 몰랐다. 그의 몸이 천천히 빛으로 화하고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서 에린지움의 잎사귀는 회청은빛으로 빛나며 흔들리고 있었다. 아스의 몸에서 흩어지는 빛무리에 그 기적의 나무는 어느때보다 아름답게 침묵하고 있었다. - Epilogue 들리는 소리라곤 바람에 잎사귀 스치는 소리... 나무가 노래하는 소리였다. 하지만 바람은 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은빛의 나무는 언제나 노래했다. 흰 그림자는 푸른 하늘에 가 닿고, 한때 황량한 지평선이었던 광막한 대지엔 어린 풀들과 꽃들이 합창하고 있었다. 그곳에 아직은 어린 한 나무와, 한명의 트리옌과, 에린지움의 걸음이 서 있었다. 어린 나무는 또 하나의 에린지움 같았다. 줄기는 희고 잎사귀는 은빛이었다. 그것은 트리옌을 잉태한듯 불룩한 수막을 매달고 있었다. 지금 그 수막은 막 탄생을 재촉하는 듯 안에서 터져오르는 공기방울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자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검사였다. 흘러내리는 꿀같은 금발과 새봄의 숲 속같은 녹색 눈동자의 호리호리한 이 트리옌은 그 아름다운 외모에선 상상할 수 없을 강력한 힘과 칠백년이란 긴 세월을 지나보낸 현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최초 에린지움의 걸음이었던 위대한 여왕 아리스타타의 첫번째 묘목이자 트리옌의 영광 글로리 나이트의 시작이기도 했던 그는 가슴이 터질듯한 초조함과 기대와 불안과 흥분속에 수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에 서서 카멜과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에린지움과 똑같이 아름다운 회청은빛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에린지움의 걸음이었다. 아리스타타와는 그 출생이 다른 만들어진 걸음이지만 지금 그녀는 그저 전설이 되어버린 아리스타타를 잊게 만들만큼 아름답고 강인한 군주였다. 한때 검게 변했던 팔은 아름답게 뻗어있었고 비록 청록색 눈동자는 아닌 녹색 눈동자를 가졌지만 조그마한 소녀의 모습에도 그녀에게 경외를 보내지 않는 자는 없었다. " ... 다른 보통 트리옌들보다 훨씬 느리게 자라는군요 이 아이는. 벌써 백년인가요. " " ... 그렇군요. " " 저는 상상할 수 있어요, 이 아이의 모습을. 저는 그를 제 후계자로, 에린지움의 걸음으로 키우게 될겁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축복의 성이, 에린지움이, 그를 아름답고 강인하게 키울거예요. ... 다시 떠나지 않으실 건가요? 그를 찾아서. " " ... ... " " 저는 알고 있어요. 당신이 아직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 " ... 죄송합니다. 제가 펜 오키드님의 곁에 있지 않으려는 것은,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펜님의 첫 묘목인 글로리 나이트 월 저먼더를 죽인 것은 저 입니다. 그의 자리를 제가 대신할 수는 없겠지요. " " 그의 죽음은 제 탓이었어요. 욕심과 고통에 눈멀어 그를 죽음으로 내 몬 것은 바로 저...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저예요. 그리고 그 직분을 강요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예요. 저는 다만... " 그때였다. 수막을 탁탁 치던 공기방울이 격심해 지더니 어느순간 얇은 막이 터지며 안에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굴러떨어졌다. 카멜은 그 아이가 다치지 않게 재빨리 팔로 아이를 받았다. 몸이 젖어있는 아이는 잠시 추운듯 몸을 부르르 떨더니, 반짝 하고 동그란 눈을 떠 카멜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바다와 숲의 푸르름이 모두 모여있었다. 푸르름이란 푸르름은 죄다 끌어모은 듯 파란 눈동자. 아이의 눈동자는 선명한 청록색이었다. 카멜은 자신에게 손을 뻗치는 아이의 손바닥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이 나무는 아스가 목숨을 다하고 빛으로 화해 사라진 곳에서 자란 두번째 에린지움이었다. 카멜은 벌써부터 이 아이가 자란 모습을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청년으로 자라겠지. 길고 흰 팔다리는 사슴같고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흔들리는 숲의 나뭇잎들 같을거야. 저 푸른 눈동자가 나를 보고 다시 웃어주면, 나는 또 속절없이 그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사랑을 시작하겠지. " ... 제 몫으로 주어진 것은 이 아이겠지요. " 그리고 무스카리 그에게 주어진 것은, 바로 그 일테고. 무스카리는 아스가 죽은 후 이 세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카멜은 그가 어디를 헤매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일이겠지. 때로는 포기하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광막한 어둠, 끝이 없는 허무. 시커먼 고독의 짐승이 밤낮으로 으르렁 거리는 고통의 길. 길고 긴, 어쩌면 영원토록 계속될 방황이겠지. 하지만 우리는 결코 사랑하는 것을 관두지 못한다. 사랑하는 자가 바로 아스, 그이기에. " 이 아이의 이름은 뭔가요? " 카멜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스가 그렇게 죽고 난 후 처음으로 지은 미소였다. 아이의 푸른 눈에 카멜의 아름다운 미소가 가득 들어찼다. " 리아트리스. " 나의... 리아트리스. 더러운 공기. 시끄러운 소음. 어지럽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자동차들이 내뿜는 열기와 매연이 숨을 막히게 하고 양 옆에 늘어선 회색 건물들은 당장이라도 아래로 쏟아져 내릴 듯 했다. 아버지의 전근만 아니었다면 이런 도시엔 오지 않았을텐데. 부모님은 서울의 유명한 병원에 다니면 상태가 좋아질거라고 하셨지만 무엇보다 재현에게 절실한 것은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이었다. 새파래진 얼굴로 도로 한복판에서 비틀거리던 소년은 지나가던 사람에게 어깨를 부딪히고는 뒤로 넘어질 뻔 했다. 도무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오늘이 첫 등교라 벌써부터 지각을 하면 안될 터였지만 재현은 잠시 콘크리트 화단에 기대 앉았다. 두통 때문에 머리가 욱신거리며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앉아있으니 한결 덜 한 것 같았다. 교복을 입고 힘든 듯 숨을 몰아쉬며 있는 새파란 얼굴의 소년을 무시하고 출근과 등교길에 바쁜 사람들은 무표정으로 그를 스쳐지나갔다. 돌아가고 싶다. 푸른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고향으로. 몇번이고 심호흡을 해도 좋을 투명한 공기와, 바람이 불면 화르르 노래하는 나무들의 고향. 빛과 바람에 춤추는 나뭇잎의 눈부신 빛이 파도처럼 펼쳐지면 살아 박동하고 노래하는 숲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또 하나의 형체인듯 그 모습이 그대로 비치는 거울같이 맑고 얕은 호수와, 자연의 축복을 한껏 받은 숲으로 이루어진 그 아름다운 성. 재현은 문득 자신이 예전에 살았던 시골엔 그 같은 성도 호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곳이 절실히 그리웠다.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만져질 듯 생생하다. 하늘로 맞닿은 흰 그림자와 은빛의 거대한 나무가. 그리고... ... 그는 얼마전부터 꾸기 시작한 꿈을 떠올렸다. 자신의 앞엔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다. 자작나무처럼 흰 줄기와 가지의, 숲이 바람에 울면 빛나는 나뭇잎과도 같은 은빛의 잎사귀를 가진 거대한 나무. 그 그림자는 희었고 하늘로 뻗어 투명한 달과 해에 맞닿아 있었다. 대지를 뒤덮고 있는 것은 어린 풀과 꽃들이었고, 저 너머로 아스라하게 꿈틀거리는 지평선은 푸른 바다의 포말이었다. 그 나무 밑엔 항상 누군가가 서 있다. 나무와도 흡사한 사람이었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을만큼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정말 푸른 청록색 눈동자와 나뭇잎같은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어딘가 낯익고 친숙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손을 내민다. 자신은 그 손을 잡기 위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득 그녀앞에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면, 그곳엔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불타는 듯 붉은 머리카락에, 방금 강바닥에서 건져올린 자갈처럼 빛나는 금빛 눈동자. 무척이나 키가 큰 그는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한다. 자신이 그를 바라보면, 그의 무표정은 무너지고 무척이나 안타까운 얼굴이 된다. 하지만 시선만은 광포하고 집요하다. 그러면 자신은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정말로 숨이 막혀오고 팔다리가 떨려온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로 그 시선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만지기 위해 되려 한발짝을 더 내딛는다. 꿈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꿈에서 깨면 여자의 얼굴과는 달리 남자의 얼굴은 선명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느날엔가 아침에 꿈에서 깨어 거울을 보니 여자의 얼굴이 어딘가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남자의 얼굴은 꿈에선 지독히도 선명한데 깨면 아무래도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뚜렷한 것은 그 시선. 자신을 옥죄는 그 시선 뿐. 재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약해지니 별 헛꿈을 다 꾸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바닥으로 한걸음 내려섰다. 하지만 곧 몸이 비틀거렸다. 휘청이는 그를 누군가가 잡아주었다.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려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팔이 자신을 휘감아 왔다. " --! " 목과 허리를 단단히 옭아맨다. 재현은 깜짝 놀랐다. 누가 이런 대로 한복판에서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는단 말인가. 하지만 자신을 꼭 품에 안은 그 팔이 너무나 간절해서 재현은 잠자코 붙들려 있어주었다. 그의 체취는 어딘가가 그리운 냄새가 났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그가 몸을 떼 손으로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며 그를 보자, 재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렸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다. 하지만 자신은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꿈 속의 그다. 그는 꿈속과 꼭같이 안타까운 얼굴로 한참이고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어. 몇 백년... 몇 천년이 흘렀는지도 모르지. 여기 이 자리의 너를 찾기 위해 얼마나 헤매었는지... 몇번이고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찾았어. 결국은 찾으리라 생각했지. 네가 여기 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 무스카리는 눈앞의 검은 머리카락의 조그만 소년은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에, 이 세계의 껍질을 뒤집어쓴 채다. 하지만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사람이다. 그렇게 간절히 찾던 얼굴이다. 내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고 했잖아. 너는 영원히 내 것이라고 말했었잖아. 네가 아무리 내 앞에서 몇번이고 죽어버린다 해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이상 나는 영영 너를 놓지 않을거야. 그럴 수 있을리가 없잖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 나의 아스포델... " 나의 숲, 나의 여신, 나의 주인... 나만의 것. 자신의 일에 바쁜 사람들은 대로 한복판에서 서로 끌어안고 있는 남자와 소년을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다. 도시의 탁한 공기를 뚫고 아침의 햇살만이 그런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숲의 주인 > 完